5월 1일 정사
일식하였다.
한재로 종묘·사직에 기우제를 지냈다.
청나라에서 시강원 필선 정뇌경(鄭雷卿)을 죽였다. 재신 박로(朴𥶇)·신득연(申得淵) 등이 치계하기를,
"4월 18일에 용골대(龍骨大)·마부달(馬夫達) 두 장군이 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정뇌경 등의 죄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며, 조선에서도 이미 자문을 보내왔으니, 지금 처치해야 할 것이다.’ 하므로, 신들이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속바치기를 청하는 뜻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장군이 말하기를 ‘국왕이 재신으로 하여금 속바치는 것을 도모하게 하였는가, 재신이 스스로 속바치기를 도모하였는가? 재신이 당초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처럼 그를 구하려는 것인가?’ 하므로 신들이 말하기를 ‘국왕의 본뜻은 자문 안에 다 들어 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세자와 대군도 모르는 바이다. 다만 우리들이 같이 있은 지 오래되어 그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이 계책을 내었을 뿐이다.’ 하고, 반복하여 간절히 말하였더니, 두 장군이 말하기를 ‘우리를 해치고자 도모한 자를 구원하는 것은,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우리 두 사람과 두 역관의 살고기를 먹은 뒤에야 마음에 쾌하겠는가?’ 하므로, 신들이 부득이 세자에게 가서 고하겠다고 말하고 물러났습니다.
세자가 구원하고자 하여 재삼 물었으나 다른 계책이 없으므로 친히 아문에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명수·김돌시 두 역관이 여러 통사(通事)와 함께 말 앞에 늘어서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 머리가 부서져야 앞으로 갈 수 있다.’ 하므로, 세자가 말을 멈추고 주저하는데 아문의 재촉이 성화보다 급하므로 세자가 부득이 도로 관소로 들어왔습니다. 정역(鄭譯)의 무리가 정뇌경을 나오라고 독촉하자, 정뇌경이 새옷으로 갈아 입고 관문 밖에서 하직하니, 세자가 인견하고 술을 하사하였습니다. 정뇌경이 하직하고 나가 대문 안에서 동쪽으로 본국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또 그 어미를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나가니, 청인이 목졸라 죽였습니다. 서리 강효원도 일시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신들이 용골대·마부달에게 말하여 겨우 시체를 거두어 염습(斂襲)하였는데, 옷과 이불은 모두 대내에서 내었으며, 강효원에게도 염할 옷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관 박지영(朴之榮)으로 하여금 관을 호위하여 나가게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정뇌경의 죽음은 몹시 놀랍고 참혹하다. 해조로 하여금 장례 물품을 제급하게 하라. 그리고 그의 어미와 아내에게 달마다 양식과 찬거리를 주어 나의 애처로워 하는 뜻을 표하게 하라. 강효원에게도 일체로 시행하라."
하고, 또 정뇌경에게 증직(贈職)하도록 명하였다.
5월 2일 무오
상이 하교하였다.
"하늘이 재변을 내림이 해마다 이와 같으니, 불쌍하게도 간신히 살아남은 우리 백성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다. 지금 이 혹독한 한발이 실로 내 탓이라 생각하니 근심스럽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내가 오늘부터 정전을 피해 거처하여 더욱 수성(修省)할 것이다.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술을 금지하는 등의 일도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또 중외로 하여금 시정의 득실과 생민의 고락을 다 진달하여 나로 하여금 개과 천선해서 하늘의 꾸짖음에 답할 수 있게 하라. 승지는 이러한 뜻으로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초하도록 하라."
헌부가 아뢰기를,
"임금은 하늘의 부탁을 받아 만백성을 기릅니다. 그러므로 생민의 고락을 일신의 근심과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연사가 풍작이 되고 백성이 편안하며 변방이 무사한 것은 임금의 줄거움이고,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이 시름하며 나라 안이 날로 위태로운 것은 임금의 근심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밝은 임금은 반드시 천하의 일로써 즐거워하고 천하의 일로써 걱정하여, 외물(外物)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큰 난리 이후에 기근이 거듭 닥치어 위에서는 하늘이 성내고 아래에서는 백성이 원망하니, 지금이 참으로 어떠한 시기입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금중(禁中)에 화공(畵工)을 끌어들이고 내정에 꽃과 나무를 심는단 말입니까. 이 때문에 사방이 전해 듣고 뭇 사람의 입에 왁자하게 오르내리며, 지사(志士)는 눈물을 흘리고 인심은 실망하기에 이르러 모두 전하의 국사가 다시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구구한 뜻은 오직 전하께서 마음을 완전히 고쳐 깨닫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로부터 어진 임금은 진실로 허물이 없음을 어짊으로 삼지 않고 허물을 고침을 아름다움으로 삼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일이 없는데 헛된 말이 떠돈 것이라면 신들의 광망한 말에 개의치 마시고 더욱 성덕에 힘쓰시고, 이런 일이 있다면 곧바로 화공을 내쫓고 꽃과 나무를 철거하여 온 나라의 신민으로 하여금 모두 성상께서 허물을 고치신 것을 우러러 보아 대성인이 하는 일이 보통보다 훨씬 뛰어난 데서 나왔음을 알게 하소서. 그러면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5월 3일 기미
유성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우성(牛星) 위로 들어갔다.
이경증(李景曾)을 도승지로, 허적(許積)을 지평으로, 유영(柳潁)을 부수찬으로, 김집(金集)을 동부승지로, 조수익(趙壽益)을 집의로, 이만(李曼)을 부교리로 삼았다.
어떤 중 하나가 종각(鍾閣)에 들어가서 종을 쳤는데, 병조에서 잡아다가 유사에게 회부하여 신문하였더니 실성한 사람이었으므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5월 4일 경신
유성이 서방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소리가 가느다란 우레소리와 같았다.
이기조(李基祚)를 좌승지로 삼고, 윤겸선(尹兼善)을 특별히 호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단오날에 내자시에서 관례대로 창포주(菖蒲酒)를 올리고 육조에서 물선(物膳)을 올리니, 상이 한재가 한창 혹심하다는 이유로 받지 않았다. 예조가 굳이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반찬을 줄이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며 밤낮으로 허물을 생각하였으나, 열기가 찌는 듯하고 거센 바람이 더욱 심하여 우러러 바랄 데가 없어 몸둘 바를 모르겠다. 죄가 실로 나에게 있으므로 친히 기도하고자 한다."
동부승지 김집(金集)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따뜻이 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에 문정전(文政殿) 월랑 아래에서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특진관 이시백이 나아가 아뢰기를,
"하삼도 및 강원·경기의 전사한 군사의 수효는 모두 합해 1천 7백 96인인데, 대정(代定)한 자는 겨우 1백 8인뿐입니다. 군병 중 늙어서 면제되는 자는 자신이 스스로 대정하나, 죽은 자는 관에서 대정합니다. 이러한 때 빠진 액수를 충정하는 것은 본디 매우 어렵습니다. 가포(價布)를 독촉하여 징수함에 이르러서는 또 전사한 자에게까지 징수하므로, 나랏일을 위해 몸을 바쳤는데도 아내와 자식도 보존하지 못하니, 원통함이 막심합니다. 별도로 변통하여 가포를 징수하지 마소서. 또 해당 고을로 하여금 연수를 정하고 액수를 정하여 대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절대로 가포를 징수하지 말고 빠진 액수만 충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사람의 일은 형체이고 하늘의 재앙은 그림자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비가 오려 하다가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사람의 일에 반드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성상의 하교를 보건대, 죄를 성상 자신에게 돌리어 하늘의 뜻을 돌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옥사를 심리하는 것과 같은 일에 있어서 한갓 형식적으로만 하고 있으니, 어떻게 감응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사의 실정은 실로 알기 어렵기 때문에 석방하기 어려운 것이다. 경의 뜻에는 누가 원통하다고 여기는가?"
하자, 이시백이 아뢰기를,
"위에서 옥사에 진념하여 밝게 살피십니다. 그러나 구중 궁궐 안에서 문서만 보실 뿐이니 어찌 그 실정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나의 억측이 어찌 반드시 다 옳겠는가. 지금 대신과 금부 당상 및 형조 당상과 면대하여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시독관 남노성(南老星)이 아뢰기를,
"박종윤(朴宗胤)이란 자는 폐조 때의 명관으로 멀리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지금 또 난시에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축하하였다는 이유로 다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도장(李道長)의 말을 들으니 일이 매우 원통합니다."
하니, 검토관 이도장이 아뢰기를,
"신이 2월에 시골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경주에서 찾아보고 4월에 성주(星州)로 돌아왔더니, 그때 박종윤이 방답(防踏)의 적소로부터 지나갔습니다. 이른바 난리 중에 합천(陜川) 정옹(鄭滃)의 집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축하하였다는 것은 단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남노성이 아뢰기를,
"이일상(李一相)의 일도 억울한 듯합니다. 그때 이성구(李聖求)가 이일상에게 이르기를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로 향할 것이니 먼저 가도록 하라.’ 하므로 곧장 먼저 나갔습니다. 이성구는 그의 사위이기 때문에 피혐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형적은 이와 같으나 그 실정은 알 수 없다."
하자, 이도장이 아뢰기를,
"이성구가 이일상을 권해서 보내는 말을 신이 친히 들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성구의 말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의심하였었는데, 지금 네 말을 들으니 과연 억울한 듯하다."
하였다.
상이, 대신과 금부·병조·형조의 당상과 양사의 장관을 명초한 다음 친히 임어하여 경외의 죄인을 심리하였는데, 차등이 있게 소결(疏決)하였다. 판의금부사 구굉(具宏)이 죄수의 명단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기종헌(奇宗獻)은 전에 충청 수사로 있을 적에 미곡 50석을 사사로이 썼습니다."
하자, 영의정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 죄가 과연 중합니다만 난리가 난 초기에 적병이 가로막던 날을 당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성으로 달려 왔으니, 그 공으로 속죄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정배하라."
하였다.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장릉 참봉(章陵參奉) 이돈림(李惇臨)은 숙직을 거른 죄에 지나지 않은데, 형신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화의 변고가 수호군(守護軍)에게서 나왔다. 참봉이 숙직하였다면 어찌 이런 변고가 있었겠는가. 다만 형추하지 말고 가두고서 기다리라."
하였다. 구굉이, 박종윤·오익환(吳益煥)의 일을 여쭈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경연에서 그 원통한 정상을 들었으니, 관대히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굉이 또 이민구(李敏求)의 일을 여쭈니, 상이 이르기를,
"같이 일하던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지금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또 이해창(李海昌)의 일을 여쭈니 상이 이르기를,
"양이(量移)하라."
하였다. 또 심기원(沈器遠)의 일을 여쭈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원수(元帥)라 호칭하였으니,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사면할 수 없다."
하였다. 또 이일상의 일을 여쭈니, 상이 이르기를,
"이도장이 이성구의 말을 친히 들었다 한다. 어찌 면전에서 거짓말을 하겠는가. 석방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홍보, 병조 판서 이시백이 차례로 죄안을 올렸다. 최명길·홍보가 아뢰기를,
"요즈음 관향(管餉)의 물화(物貨) 및 각 아문의 징채(徵債)로 인해 유배되고 구금되고 장폐(杖斃)된 자가 많습니다. 모두 탕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실이 서로 뒤섞였으니 명백히 조사해 처리하라. 비록 징수해야 할 것이라도 가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 남이웅(南以雄)이 아뢰기를,
"상방(尙方)024) 에서 징수할 것을 먼저 탕척하면 제사(諸司)가 저절로 차례로 거행할 것이니, 죄가 있든 죄가 없든 모두 성덕을 흠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옛날에 진 문공(晋文公)이 나라로 돌아와 창고의 물건을 훔쳤던 내시(內侍)를 만나보지 않았더니, 내시가 ‘임금으로서 필부를 원수로 여기면 두려워하는 자가 많아진다.’고 하자, 문공이 그를 불러서 만나보았지, 어찌 징치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또 갑자년 난리에 내인이 궁중 창고의 물건을 훔쳐 싣고 간 자가 있었는데, 환도한 뒤에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자, 인헌 왕후(仁獻王后)가 말하기를 ‘이 물건을 이 사람이 훔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오늘날 남아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묻지 않으니, 여염에서 미담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징수하는 바도 모두 그와 같은 것이니 일체 탕척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징수한 자가 있으니 일을 달리하기 어렵다. 또 듣건대, 이로 인하여 치부한 자도 있다 하니 정상이 밉살스럽다."
하였다. 홍보가 아뢰기를,
"외방의 죄인 또한 여쭈어서 처결해야 하나, 해가 이미 저물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자, 남이웅이 아뢰기를,
"비록 불을 밝히고서라도 다 처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헌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의논하여 처결한 뒤에 파하였다.
5월 5일 신유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해 보건대, 해독산천 기우제(海瀆山川祈雨祭)에 음복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대신은 ‘위에서 한발의 참혹함을 만나 비를 비는 제사가 있어 바야흐로 삼가고 두려워함이 간절하니, 예는 상례(常禮)를 변경하여 음복의 절차는 거행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7일 계해
상이 사직(社稷)에서 기우제를 친히 거행하였는데, 이튿날에 비가 왔다.
5월 8일 갑자
간원이 아뢰기를,
"호조 참의 윤겸선(尹兼善)은 일찍이 판결사로 있을 적에 대간의 비평을 중대하게 입어 정론(停論)된 지 며칠 안 되었는데, 도리어 본직을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 있었습니다. 제목(除目)이 한번 내리자 물정이 모두 놀랐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5월 11일 정묘
내주방(內酒房)에서 관례대로 일용의 향온(香醞)을 올리니, 상이 한재를 이유로 올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대사헌 남이웅이, 전에 아뢴 윤휘(尹暉)를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라는 뜻으로 극력 말하여 마지않으니, 상이 비로소 따랐다. 정언 최문식(崔文湜)이 아뢰기를,
"충주 목사(忠州牧使) 윤순지(尹順之)는 품계가 높은 수령으로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칭호가 온 도에서 제일입니다. 또 조곡(糶穀)을 나누어 줌이 고르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원통함을 호소하고, 고을의 여종을 몰래 간음하였는데, 아사(衙舍)와 향교가 불에 탄 변고도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합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순지는 사람됨이 무상한 자가 아니다. 대사헌도 이 말을 들었는가?"
하자, 남이웅이 대답하기를,
"신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말만 들었고 그밖의 일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또 묻기를,
"대신도 들었는가?"
하자, 좌의정 신경진이 대답하기를,
"신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헐뜯고 칭찬함은 무상하고 풍문은 믿기 어렵다. 문관이 어찌 이와 같을 리가 있겠는가. 또 농사철을 당하여,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단이 있으니, 아직은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강이 끝나자,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5월 12일 무진
함경도 명천(明川)·경성(鏡城)·회령(會寧)·경흥(慶興)·온성(穩城) 등지에, 4월에 눈이 내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해남 현감(海南縣監) 조정립(趙廷立)이 오로지 긁어들이기만 일삼아서, 미곡을 전세(田稅) 싣는 배에다 몰래 실어 시정(市井)의 인가에 갖다 놓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합니다. 본부에서 뱃사공과 담당 아전을 잡아다가 물어보았더니, 격가미(格價米) 50곡(斛)을 덜어내어 시정 사람 최승길(崔承吉)의 집에 몰래 보냈다 하였습니다. 최승길을 불러다가 물어보았더니, 이른바 50곡의 쌀은 영부사 이성구(李聖求)의 집에서 아들의 속은(贖銀)을 마련하기 위하여 해변에서 쌀을 사서 삯을 주고 싣고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최승길과 담당 아전이 주고받은 수기(手記)를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정밀하고 거친 것이 네 가지로 차이가 났습니다. 만일 세미(稅米)의 격가(格價)로 덜어낸 것이라면 필시 한결같을 것인데, 이것으로써 살펴보면 분명코 사사로이 판매한 것이지 관물이 아닙니다. 이밖에 또 들으니, 관미(官米)를 경강(京江) 사람 오일남(吳一男)의 배에 몰래 실었다 하므로 오일남을 잡아다가 물어보았더니, 과연 해남 현감이 부탁한 쌀 36섬을 싣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탐욕 방종함이 이 사람보다 심한 자가 없습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3일 기사
비국이 아뢰기를,
"김종일(金宗一)이 비록 자신이 범한 죄는 없으나 이미 잡아왔으니, 저들이 장차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 우리 나라의 처지를 탐지하려 할 것입니다. 우리의 방도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권도(權道)로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장형을 가한 뒤 유배하는 것으로 죄율을 정하면 아마도 마땅하게 될 듯합니다."
하니, 장형을 때려 경상도 영덕현(盈德縣)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성구가 상소하기를,
"신이 자식을 사랑하는 사정(私情)을 견디지 못하여 자식을 위해 속바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속은(贖銀)의 수량이 무려 1천 5백 냥이나 되었습니다. 신이 가산을 탕진한 나머지 맨손에 대책이 없어서 비루하고 잗단 일도 하지 않음이 없었는바, 일찍이 이 뜻으로 소차 안에서 대강 진달하였습니다.
제주 목사 심연(沈演)은 신의 처와 5촌입니다. 제주에 들어간 뒤에 노비 공선(奴婢貢膳)을 거두어 토산물을 사서 모아 잡미(雜米) 50석을 겨우 사서 배에 싣고 왔더니, 대관(臺官)은 이것이 해남의 관미인 줄 알았습니다. 문서를 고거(考據)하여 실상을 분명히 밝혀 이미 해명되었습니다만, 신의 마음에 끝내 미안한 바가 있어 이에 감히 성상께 밝히는 것입니다. 이번 쌀을 사들인 일은 심연이 실로 이를 주장하였으며, 전라 감사 구봉서(具鳳瑞)도 참여해 들었습니다. 다만 조정립은 일찍이 신의 군관으로 있었고 마침 해변 고을에 있었기 때문에 맡아 관리하여 무역해 보낸 것이고, 최승길은 본디 안면이 없는 자이나, 마침 해남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싣고 오는 일에 참여한 것이며, 신의 집에서 사람을 시켜 배에서 부려 곧바로 시장에 보내어 은을 샀을 뿐입니다.
대신된 신분으로 자취가 이익을 도모함에 관계되고 사연이 장오(贓汚)에 관련되고 이름이 간서(簡書)025) 에 나와서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신의 직명을 삭제하고 신을 법관에 회부하여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 집안의 답답한 정상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작고한 공신의 아내와 자식이 흉년을 당하여 어떻게 살아가는지 내 매우 염려된다. 그 가운데 더욱 빈궁한 자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널리 수소문하여 가을 추수 때까지 요미(料米)를 주어 그 급함을 구휼하게 하라."
하였다. 충훈부가 작고한 청흥군(靑興君) 이중로(李重老), 옥산군(玉山君) 장돈(張暾), 화산군(花山君) 김경운(金慶雲), 홍양군(洪陽君) 이희건(李希建), 인성군(麟城君) 이우(李佑), 오천군(鰲川君) 문회(文晦) 6인의 아내와 자식으로 서계하고, 아뢰기를,
"작고한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집은 비록 6인의 집처럼 궁핍하지는 않으나, 현재 삼년상 중인데 조석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요미를 주도록 명하였다.
5월 14일 경오
충훈부가, 거의(擧義)한 사람 및 남한 산성에 호종한 사람 중 벼슬이 없으면서 서울에 있는 자에게 우선 요미를 주어 살아가는 바탕으로 삼게 하기를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시독관 남노성이 아뢰기를,
"지금 작고한 공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진념하여 가을 추수 때까지 요미를 주게 하시니, 어찌 살아 있는 사람만 감격하겠습니까. 죽은 자가 앎이 있다면 또한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을 것입니다. 위에서 홍명구(洪命耉)의 죽음에 대해 진념하여 그 어미에게 늠료(廩料)를 주셨는데, 어미가 죽은 뒤에는 아내와 자식이 경기 고을에 떠돌아다니며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작고한 공신의 처자와 일체로 요미를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그 밖에 절의를 위해 죽은 사람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공신의 집안과 일체로 시행하라."
하였다. 참찬관 김집(金集)이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임금의 한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이라 하였습니다. 임금이 진실로 본원을 맑게 하여 말하는 바를 정밀히 살피어서 반드시 도심(道心)이 항상 주장이 되고 인심이 매양 따르게 한다면, 천리가 널리 행해지고 인욕이 물러가서 사물마다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임금과 순임금이 서로 전수한 것은 오직 심법(心法)일 뿐이다. 진실로 이 마음을 맑게 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진달한 바가 더욱 절실하니, 내가 유념하겠다."
하였다.
5월 15일 신미
월식하였다. 목성(木星)이 방성(房星) 북쪽 첫째 별을 범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난해의 가뭄은 근고에 없던 바이고, 올해의 가뭄은 지난해보다 심합니다. 이미 봄철 농사가 잘못되었는데 어찌 가을 농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장차 며칠 못 가서 다 죽게 될 것입니다. 근심을 깊이하면 성(聖)을 계발하고 난리를 많이 겪으면 나라를 일으킨다는 것이 바로 전하의 일신에 있으니, 지금 이 급박한 재변이 전하께서 전환하는 하나의 큰 기회가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17년 동안에 재변을 만나 구언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고, 대각과 초야에서 분부에 응해 진언한 사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전하께서 전후로 내린 비답에 반드시 ‘가상하다.’ ‘유념하겠다.’ ‘채용하겠다.’ ‘시행하겠다.’라고 하셨으나, 아직까지도 누구의 말을 써서 어떤 일을 시행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오늘날 구언하는 전교가 종이 위의 빈말에 가깝지 않습니까. 신들이 조목별로 진달할 시폐도 새로운 것이 없으니, 어떻게 성상의 하교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전부터 행하신 정교(政敎)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한 것을 아래에 다 나열합니다.
1. 대간을 존중하여 공의를 넓히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근일의 일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논집하는 일을 오래도록 끌어가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느니 ‘이미 일렀다.’느니 하는 등의 몇 가지 말로 거절하고, 혹은 정계(停啓)하기를 기다렸다가 시행하라는 하교가 계시기도 하고, 혹은 논계가 그치자마자 곧바로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 계시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일개 수령이나 일개 소관(小官)에 이르러서도 잠시 논핵을 입으면, 대간의 논핵이 오래지 아니하여 정지될 것이라고 여겨, 탄핵을 참고 공무를 행하여 비웃음과 꾸짖음을 상관하지 않으며, 심한 자는 근거없는 말을 날조하여 도리어 대간을 헐뜯습니다. 그러므로 길가는 사람들이 만일 소리높여 외치는 대간의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업신여기고 기롱하기를 ‘윤허받지 못할 계사와 무익한 말을 수고롭게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강개한 말로 ‘대간을 설치하고서 그 말을 따르지 않으려면 차라리 대관(臺官)을 혁파하는 것이 낫다.’고 하기까지 합니다. 이 말이 일리가 있으니, 인정이 답답하게 여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앞으로 대간이 말하는 바를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소서. 그러면 위아래가 서로 화목하여 천재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여 나라의 명맥을 장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선유사(宣諭使)를 보내어 포흠(逋欠)을 탕감하였으나 형식적으로만 하여 마침내 실효가 없었고, 난리를 겪은 뒤로는 제향(祭享)을 견감하고 공안(貢案)을 줄였으나 실지 혜택이 베풀어지지 못하여 백성이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생민의 고락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데 수령의 현명 여부는 따지지 않고 오로지 노고를 보답하는 자리로 삼으며, 공적을 고사함이 공정하지 아니하여 애쓴 사람이 권장되지 않으며, 장법(贓法)이 엄하지 아니하여 침탈이 오히려 가혹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민생들이 다친 사람을 보호하듯이 해 주는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앞으로 백성들을 돌보기를 참으로 어린아이 보호하듯 하소서. 그러면 백성들이 보호될 수 있고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습니다.
1. 인재를 양성하여 원기를 북돋우는 것입니다. 신들이 요즈음 살펴보건대, 친히 임어하여 시재(試才)하시는 일은 매우 성대한 일이십니다. 무예가 중도에 쇠미해졌던 자가 자못 성효(成效)가 있었으므로 앞을 다투어 서로 사모하고 본받아서 달마다 증진되었습니다. 무릇 인재의 성취는 문무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성취하는 방법을 조금도 느슨히 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교육하는 직무의 성공을 독책(督責)하고 교훈하는 관원을 널리 설치하여 어린아이로부터 나이 많은 제생(諸生)에 이르기까지 경서와 자사(子史) 이외에 《소학》·《근사록》·《심경》을 가르쳐, 부박한 풍조를 통렬히 제거하고 의리와 예양을 힘쓰게 하소서. 그러면 마침내 이에 힘입어 국맥이 뻗어날 것입니다.
1. 염치를 힘쓰고 절의를 높여 선비의 풍습을 착하게 하는 것입니다. 절의와 염치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음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번 변란 때 목숨을 버린 사람들의 절의가 저처럼 훌륭하였는데도 포증(褒贈)하고 존휼(存恤)하는 일을 오래도록 거행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높여 숭상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정결(貞潔)한 선비를 찾아 만일 행적이 드러난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탁무(卓茂)를 임명한 것026) 처럼 차서에 구애되지 말고 벼슬을 높여주고, 당 덕종(唐德宗)이 단수실(段秀實)을 추증한 것027) 처럼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후하게 구휼하여 주시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 느끼는 동시에 선비의 풍습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1. 옥사를 밝고 신중하게 하여 천재를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뒤로 국가가 불행하여 역옥(逆獄)이 누차 일어나 해마다 추국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실정을 다 말하고 형벌을 받아 죽은 자 이외에도 고문을 받다가 지레 죽은 자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혹 실정을 숨긴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도 있겠으나, 또한 어찌 암담하여 드러내지 못하고 원통함과 억울함을 품은 자가 없겠습니까. 한 사람의 죽음이 화기를 상하고 천재를 부르기에 족한데 하물며 죽은 자가 한둘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전하의 밝고 신중하신 덕은 전대의 왕들보다 훨씬 뛰어나시니, 흠휼(欽恤)하시는 아래에 의당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옥사의 사체는 중대하고 옥사의 실정은 알기 어려우므로 국문에 참여하는 신하가 상반된 견해가 있더라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죽는 자가 많습니다. 이것이 비록 국가에서 옥사를 다스리는 옛 규례이기는 하나,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해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 역옥은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신의 생각에 오히려 옥석(玉石)이 서로 뒤섞이지나 않았을까 염려하고 있으니, 해부(該部)와 해관(該官)에서 스스로 처단한 옥사에 이르러서는 죄없이 죽은 자가 그 얼마나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이후로는 유사에게 거듭 명하여 묵은 폐단을 통렬히 혁파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사정(私情)을 따라 법을 어기는 자가 있거나, 혹은 실정을 알고도 잘못 처결한 자가 있으면 대관(大官)이라 하여 용서하지 말고 반드시 중한 형률로 다스려서 옥사가 공평하게 하소서. 그러면 재난을 그치게 하는 도리가 진실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아, 오늘날 아주 절박한 근심은 이 다섯 가지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미 위에서 조목조목 나열하였습니다. 그 진작하는 방법은 또 전하의 큰 뜻을 확립하고 전하의 실다운 덕을 힘쓰시는 데에 달려 있으니, 유념하소서.
아, 남한 산성의 포위가 겨우 풀려 국운이 아직 위급한데도 군신 상하가 이미 어려운 지경에 처했던 때의 마음이 없고 한두 해 사이에 모두 잊어버려 조금도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품으며 박부득이한 뜻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수치를 숨기고 말하지 않으니 충의의 기운이 없어지고, 일시의 안일을 탐내어 스스로 포기하니 나약한 습성이 고질화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큰 뜻을 먼저 세워 부지런히 힘쓰시되, 항상 남한 산성에 포위되어 있을 때처럼 하신다면, 향하는 대로 나아가더라도 모든 것이 뜻대로 될 것입니다.
전하의 병통은 또 미세한 일에 치우치게 밝고 긴요하지 않은 업무를 깊이 살피시는 데에 있습니다. 문자를 출납할 즈음에 글자 획 하나의 잘못에도 쪽지를 붙여 총명함을 보이시고, 기용(器用)을 제조하는 일에도 매양 신칙하는 분부를 부지런히 내리십니다. 외간에서 전하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이 한 가지 일로서도 전하께서 미세한 일에 힘쓰고 대체를 빠뜨린다는 것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미 지나간 일을 깊이 징계하고 실다운 덕을 더욱 힘쓰소서. 그러면 국가가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로 진달한 일은 격언과 지론이 아닌 것이 없다. 내가 유념해서 채택해 시행하겠다."
하고, 비국에 그 차자를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옥당의 신하들이 재변을 만나 처신을 조심하는 때를 당하여 임금을 바로잡고 나라를 구하는 말을 올렸는데, 그 조목이 다섯 가지로, 대간을 중히 여길 것,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할 것, 인재를 양성할 것, 사습(士習)을 착하게 하려면 염치를 면려하고 절의를 숭상하는 것을 급무로 삼을 것, 천재를 그치게 하려면 옥송을 밝고 신중하게 함을 중요함으로 삼을 것 등입니다. 이것은 절실한 말이 아님이 없으니, 위에서 한가하실 때에 더욱 조용히 살피고 널리 베풀어야 할 바입니다.
그 가운데 이른바 ‘교육의 직무를 책임지워 성취하고 교훈의 관원을 널리 두어 어린아이부터 연소한 제생에 이르기까지 경서·자사(子史) 외에 《소학》·《근사록》·《심경》 등의 책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은 인재를 양성하는 요점이며 또한 조정에서 일찍이 강론한 바입니다. 고을들이 차츰 소생되는 것을 보아 교훈하는 관원을 점차 선발하여 쓰면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
이른바 ‘송사의 진술을 청취하여 처결함에 있어서 일체 법의 본의를 따르고, 만일 사정(私情)을 따라 법을 어기거나 실정을 알고도 잘못 처결한 자가 있으면 대관(大官)이라 하여 용서하지 말고 반드시 중한 형률로 다스리어 옥사가 공평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의금부와 형조의 책무이고 또한 대간이 규찰해야 할 바입니다. 또 ‘큰 뜻을 세우고 실다운 덕을 힘쓰는 것을 큰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합니다. 바라건대, 유념하여 면려하시고 계속해서 태만함이 없게 해서 성실하게 하늘에 응답하는 소지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겠다. 또 《심경》 등의 책을 관학 유생(館學儒生)으로 하여금 먼저 강습하게 하고, 절의를 지킨 사람을 정표(旌表)하는 것도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6일 임신
전식(全湜)을 대사헌으로, 이경의(李景義)를 대사간으로, 이상형(李尙馨)·민응협(閔應協)을 장령으로, 이회(李禬)를 지평으로, 심재(沈𪗆)를 헌납으로, 임전(林)을 정언으로 삼았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상이 참찬관 이경증(李景曾)에게 묻기를,
"경이 새로 영남에서 왔는데, 영남에 숨어 사는 어진 사람이 있던가?"
하자, 이경증이 아뢰기를,
"선배들은 지금 모두 죽었습니다. 난리 뒤에 선비들이 더욱 흥기하는 마음이 없어서 글 읽는 것을 업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관(考官)이 된 사람들이 모두 문예(文藝)도 볼만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은 본디 인재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지금은 이와 같단 말인가. 만일 뜻이 있는 선비가 있다면 어찌 세상이 어지럽다 하여 학문을 폐지하겠는가."
하자, 이경증이 아뢰기를,
"경주에 사는 정극후(鄭克後)가 나이 이미 60으로 음사(蔭仕)를 여러 차례 지냈으며 계려(計慮)가 있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니, 이와 같은 사람을 시험삼아 백성을 다스리게 하면 좋을 듯합니다. 대구에 선비 서시립(徐時立)이란 사람이 있는데, 어린 아이들과 심부름하는 하인들도 ‘서 효자(徐孝子)’라고 일컫습니다. 지극한 행실은 남보다 뛰어나나 몹시 빈궁합니다. 하루는 공림산(公林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다가 금을 얻으니, 마을 사람들이 효행이 신을 감동시킨 소치라고 하였습니다. 본 고을 수령이 진휼 감관(賑恤監官)으로 차임하자 한번도 집에 가지 않고 마음을 다해 봉직하였다 합니다. 역시 초임의 낮은 관직으로 그의 효행을 표창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관직에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8일 갑술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위에서 나와 기성(箕星) 위로 들어갔다.
5월 19일 을해
비국이, 병조 참의 이명한(李明漢), 이조 참의 김세렴(金世濂)을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삼기를 청하니, 따랐다. 살펴보건대, 통정 대부로 부제조를 삼은 것은 선조조(宣祖朝)의 허성(許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경기 영평(永平) 땅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대사간 이경의가 상소하기를,
"금년의 한재가 지난해보다 심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거의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인애(仁愛)한 하늘이 전하께 무슨 깊은 노여움이 있기에 친절하게 경책(警責)함이 이에 이른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척연히 분발하여 중외의 말을 들으려고 할 만도 합니다. 신이 청컨대, ‘성실(誠實)’ 두 글자로써 전하를 위해 시종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남한 산성에 계시던 날에 각고 면려하는 뜻이 극진하셨는데, 환도하신 지 오래지 아니하여 환란에 처하였을 때 품었던 마음을 잊으셨으니, 전하의 분발하는 성의가 지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궁중의 의복·거마(車馬)와 상의원의 물건 제조가 앞을 다투어 사치함을 힘쓰니, 전하의 검소를 숭상하는 성의가 지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원유(苑囿)의 관람에 대해서는 신이 일찍이 경계하는 말씀을 올린 바 있는데, 얼마 가지 아니하여 기화 이초(奇花異草)를 나열하여 올리니, 전하께서 도움이 없는 일을 하지 않으시려는 성의가 지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예(技藝)와 세완(細玩)에 대해서도 진계한 바가 있었는데, 수 개월도 못 되어 외부에 있는 화공이 옷소매를 드날리며 들어가니, 전하께서는 간언은 구슬을 굴리는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성의가 극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재변을 인해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득실을 듣기를 구하시니, 전하의 성의가 이때에 진실로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들의 봉장(封章)에 대해 관례에 따라 너그러이 답하여 형식만 갖춤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전하의 성의가 이때에 이미 없어진 것입니다. 한 당에다 경연을 열고 마음을 비워 논난하였으니, 전하의 성의가 이때에 진실로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윽하고 넓은 곳에 외부의 유혹이 끼어들었으니 전하의 성의가 이때에 이미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쓰지 않을 시원찮은 말을 구하여 하늘에 응답하는 겉치레로 삼으려 하는 것이니, 아, 또한 구차합니다. 신은 들으니, 성(誠)이란 온갖 일의 근본으로서 쉬지 않는 공입니다. 하늘을 응함에 있어 실지가 없고 상제(上帝)를 대함에 있어 성의가 없으면, 하늘의 마음을 어찌 누릴 수 있겠으며 재이를 어찌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랫사람을 접응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에 이르러서는 막히고 정체되어 성의가 부합되지 못하므로, 한 꺼풀 밖은 호월(胡越)처럼 동떨어져서 위아래가 통하지 않아 은택이 아래에 이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천지의 기가 막히게 된 까닭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임금의 지기(志氣)가 확립되지 않고 성의가 극진하지 못하면 일신의 동작과 말하고 일하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못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국가의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성실’ 두 글자에 유념하여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답하기를,
"네 소장(疏章)을 살펴보고 너의 언론이 갈수록 더욱 곧음을 아름답게 여겼다. 내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5월 20일 병자
간원이 아뢰기를,
"명을 받은 신하가 조정을 하직하는 날 황공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길에 오르는 것이 분의상 당연합니다. 지난해 암행 어사를 떠나보낼 때 이조 정랑 이행우(李行遇)는 아비를 가서 보았고, 사과(司果) 김진(金振)은 집에 들렀으니,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중사(中使)와 사관을 보내어 성균관 유생을 점검하게 하고, 거재 유생(居齋儒生) 등에게 전강(殿講)을 보이도록 명하여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5월 21일 정축
장령 이상형(李尙馨)이 상소하기를,
"오늘날 시사 중에 통곡할 만한 것은 큰 강기가 떨치지 아니하고 큰 의리가 밝지 아니하고 큰 공도가 행해지지 아니하고 큰 혜택이 베풀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의 형세가 한결같이 시들하고 약해져서 구제하기 어렵게 된 까닭입니다.
우리 조선조의 역년(歷年)이 2백 년이 됨에 따라 오랜 세월 동안 안일에 젖어 조정의 온갖 법도가 모두 형식적인 것으로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제향(祭享)과 병정(兵政)은 더욱 보잘것이 없었습니다. 향사(享祀)를 공경히 하지 않으면 신령이 흠향하지 않고, 병정(兵政)이 실지를 잃어 버리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습니다. 이것이 하늘이 위에서 노하고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는 까닭입니다.
신이 일찍이 봉상시의 소임을 맡았을 때에 제향을 근신하게 하지 않는 것을 익히 보았습니다. 종묘·산릉(山陵)은 오히려 정성을 드릴 때도 있으나, 교사(郊祀)와 산천(山川)에는 원래 공경히 하지 않습니다. 신패(神牌)를 모시는 집이 비가 새고 바람이 들이치며, 상가(床架)가 설치되지 않고 새와 쥐가 더럽히고 있으며, 자리와 제기도 별도로 비치하지 않고 그때에 다다라 갖추어서 깨어지고 헐어진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제관을 차임해 보내는 데에도 무부(武夫)가 대다수여서 봉행하고 장만하는 데에도 으레 설만함이 많으니, 재계하고 제사지내는 것이 어찌 의식에 맞겠습니까. 귀신이 흠향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봉상시에서 깨끗한 집을 별도로 지어 신패를 모시고, 제관을 나누어 차임할 때에 품계가 높은 명관으로 가려 보내며, 봉상시의 관원도 가려 차임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면 필분(苾芬)028) 으로 향사함에 온갖 복이 내릴 것으로 여깁니다.
오늘날 군인의 고통과 세초(歲抄)의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대개 신역(身役)이 있는데다가 또 전역(田役)이 있으므로 양쪽으로 침탈을 받아 빼앗아가는 고통이 뼈에 사무쳤는데, 젖먹이 어린아이도 세초를 면하지 못하여 한 가정에 10인이 군역을 지는 경우도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대개 매년 세초는 성화보다 급하여, 병사(兵使)가 엄히 독촉하면 수령이 두려워하여 나이를 앞당겨서 초록하여 보고하는데, 이들은 모두 군민(軍民)들의 가정에서 나옵니다. 이 때문에 늙어 면제된 자는 종신토록 군역을 지고, 죽은 자는 죽은 뒤에도 군역을 지고 있으니, 화기를 상하고 재변을 부르는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식년(式年)마다 거행하는 대세초(大歲抄)는 폐할 수 없으나, 잠시 그 수효를 줄여서 백성들이 불어나기를 기다리고, 매년의 별세초는 특별히 정지하고 다만 늙어 면제된 사람과 죽은 사람만 보충하며, 그 밖의 침학의 폐단을 차례로 정리하여 제거하면 한번 느슨히 하고 죔에 뭇 폐해가 모두 제거될 것으로 여깁니다. 지금은 큰 난리를 겪은 뒤이니 크게 경장함이 없을 수 없는데, 하늘의 마음을 돌리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에는 먼저 해야 할 바가 이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고서 모두 알았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폐단은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봉상시에서 여러 신의 위패를 봉안(奉安)하는 곳을 연전에 이미 수리하였으니, 소에서 아뢴 바는 아마도 그 전에 본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인 듯합니다. 공물을 방납(防納)하는 것은 원래 몹시 가증스러운 것인데, 제향에 쓰는 것에 이르러서도 이 폐단을 면하지 못한다면, 제기 위에 진설한 바도 새롭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많이 올릴 것이니, 신명(神明)이 흠향하기를 바라려 한들 또한 이미 어렵습니다. 지금부터는 각도로 하여금 응당 바쳐야 할 제물을 차원(差員)을 별도로 정하여 상납하도록 하여 중간에서 방납하는 폐단을 끊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참작하여 계품하고 나서 처치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본시(本寺)의 제조(提調) 이하로 하여금 봄가을로 살펴보고 정우(庭宇)를 수리하고 청소해서 공경하고 존봉(尊奉)하는 뜻을 다하게 하소서. 그리고 대소의 관원을 어느 관직이나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제향을 맡는 중요한 자리는 더욱 사람을 가려야 합니다. 법전에 반드시 문관으로 제수하게 한 것은 뜻이 있는 것인데, 해조가 주의(注擬)하면서 정밀하게 가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부터는 특별히 가려 차임하여 구차하게 충원하지 말게 하소서.
군정의 폐해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고질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 아뢴 바는 다 외방 백성들의 정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군적에서 빠져 한가로이 노는 자는 모두 품관(品官)의 족속이고 역을 거듭 지고 치우치게 고통을 겪는 자는 모두 호소할 데 없는 불쌍한 백성들입니다. 이것은 수령의 죄이지 세초의 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막중한 일에 관계되므로 모름지기 시사가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려서 한번 정돈해야 할 일이지, 갑자기 변통해서는 안 됩니다. 후일을 기다려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허위(虛位)로 충정한 것은 기한을 정해 정파하라."
하였다.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상이 우의정 심열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중외의 상황이 어떠한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비가 내린 것이 늦기는 하였으나 앞으로의 농사는 그래도 가망이 있습니다. 만일 요역과 세금을 가벼이 해 준다면 거의 될 것입니다."
하였다. 동지경연 이경석이 아뢰기를,
"저번에 큰 전례(典禮)를 거행하는 일로써 신칙하셨습니다. 상참(常參)은 위에서 형식적인 겉치레라고 하셨는데, 성상의 분부가 합당한 듯합니다. 그러나 저번날 김세렴(金世濂)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관백(關白)이 사람을 보내서 묻기를 ‘귀국의 조정에서는 며칠 간격으로 시조(視朝)하는가?’ 하므로, 김세렴이 ‘매일 미명에 시조한다.’고 답하였더니, 어떤 왜인 하나가 말하기를 ‘이 말은 관백에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번날 영상도 상참에 대해 말하였는데, 형식적인 겉치레인 듯하므로 다시 거행하지 않았다."
하였다. 파할 임시에 윤대관을 불러 보았다.
5월 22일 무인
상이 이조에 하교하기를,
"옥당의 서벽(西壁) 중 승지에 합당한 사람을 의망하라."
하였다. 이에 목성선(睦性善)을 동부승지로, 유철(兪㯙)을 헌납으로, 성이성(成以性)을 교리로, 심재(沈𪗆)·김익희(金益熙)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5월 24일 경진
삼공이 아뢰기를,
"위에서 사직단(社稷壇)에 친히 제사를 지내신 지 겨우 하룻밤을 지나 과연 단비를 얻어서 제도(諸道)에 비가 내렸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렀습니다. 이는 성의가 감동시킨 바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야흐로 기쁘고 다행함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일부터 구름이 사라지고 뜨거운 해가 쨍쨍 내려쪼입니다. 경기 및 각도에서 온 자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두 말하기를 ‘모를 심어 놓은 것도 곧 다시 마르며, 혹은 전혀 모심기를 못한 곳도 많다.’고 합니다. 적은 비는 믿을 것이 못되어 이처럼 농사가 크게 걱정스럽게 되었습니다. 다시 기우제를 지내되, 제관을 특별히 가려 성의를 다해 기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심열을 사은 상사(謝恩上使)로 삼았다. 심열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사은사의 명을 받았는데, 신은 늙고 어두워 주선하고 응대할 즈음에 말이 유창하지 못하니, 반드시 명민하고 계려가 있는 사람을 부사로 삼아야 잘못되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승지 임담(林墰)이 가장 재국(才局)이 있으니 부사로 삼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5일 신사
간원이 아뢰기를,
"우승지 임담은 일찍이 대군 호행 재신(大君護行宰臣)으로 차임되었습니다. 이 행차의 지속을 미리 헤아릴 수 없으나, 지금 사은 부사로 옮겨 차임하였는데, 심양은 아침 저녁에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이 일이 있게 될 경우, 임담이 이미 떠나갔다는 이유로 대군 호행을 면하게 된다면, 조정의 정체(政體)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사은 부사를 고쳐 차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정한 소임을 이것 때문에 면하기 어려우니, 고쳐 차임하지 말라."
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특진관 이명(李溟)이 나아가 아뢰기를,
"방납(防納)이 가장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가 온갖 계책으로 물가를 조작하여 마음대로 침탈하고 있습니다. 간혹 적발하더라도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져 형률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전에는 공물만 방납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전세(田稅)마저 방납합니다. 만일 크게 금지하지 않으면 그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합당하다. 본조에서 적발하여 엄중하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자, 이명이 아뢰기를,
"비록 적발하더라도 수령은 겨우 파면만 되고 마니, 그 죄를 징치하기에 부족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5월 26일 임오
심양 배종 재신(瀋陽陪從宰臣)이, 청나라에서 장차 칙사를 내보낼 것이라고 치계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을 원접사로, 이경직(李景稷)을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5월 27일 계미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묻기를,
"청나라사신의 행차가 머지 않아 당도한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놀랐다. 경들의 뜻은 어떠하며 또한 장차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자, 영의정 최명길이 아뢰기를,
"청나라는 군사를 출동할 때 반드시 속임수를 쓰는데, 사신을 보냄에 이르러서도 뜻밖에 나오니, 이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가 패전을 당했다고 하는데, 칙서(勅書) 안에는 함락시킨 주읍(州邑)을 늘어 써서 뽐내는 소지로 삼고 있다. 이때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기뻐하는 뜻이 있을 것이니 지금이 실로 기회이다."
하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저들의 칙서를 보건대, 하례를 받을 뜻이 있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은(謝恩)을 인하여 하례하는 뜻을 붙이는 것이 편할 듯하다."
하자, 이덕형(李德泂)이 아뢰기를,
"‘하(賀)’자는 극히 부당합니다. 만일 중국에서 이를 들으면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듣게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차마 듣지 못하는 바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비가 얼마나 내렸는가?"
하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친히 기우제를 지내신 뒤에 내린 비가 자못 흡족합니다. 옛날에 보답으로 제사지내는 예전(禮典)이 있었으니 지금도 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도하여 비가 내렸다면 신에게 치성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그것이 이와 같은지 알아서 보답하는 제사를 지내겠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몸소 기우제를 지내고 또 중신을 보내어 위아래에 기도하였으므로 비가 연달아 내렸습니다. 예전에 실려 있는 바가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신의 의견도 보답하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다시 헤아려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8일 갑신
유성이 각성(角星) 위에서 나와 우집법성(右執法星) 위로 들어갔다.
박황(朴潢)을 도승지로, 정태화(鄭太和)를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김여옥(金汝鈺)을 사간으로, 이극인(李克仁)을 지평으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기근이 든 뒤에 또 칙사의 행차를 만났으므로 해조로 하여금 저축된 것을 죄다 가져다가 마련하게 하고 가을 추수와 길쌈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포목을 거두어 갚게 하려고 하신다는데, 성상의 하교가 이에 미치시니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경연에서 의논이 서로 틀리어 마침내 아름다운 뜻을 받들어 행하지 못한 것은, 금년의 세공(歲貢)은 민력을 쓰지 않고 모두 해조에서 마련해 내어 재력이 이미 다하였는데, 지금 이 세 번째 나오는 행차를 또 해조에만 책임지울 경우 창고의 저축을 죄다 내어 수응하더라도 형세상 반드시 마련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칙사의 행차가 이미 박두하였으므로 지금 포목을 거두어 쓰고 싶더라도 일에는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해조에 저축한 바와 각 아문에 남아 있는 병조의 가포(價布)를 모아서 쓰고 추후에 결포(結布)를 거두어 이어서 쓰는 바탕으로 삼되, 8월 그믐 사이로 기한을 정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지난해 칙사의 행차에는 다만 10결당 1필을 거두었을 뿐인데, 지금의 사세는 또 같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진전(陳田)을 준 것이 많아 전결이 너무나 줄어들었으므로 8결당 1필을 거두어야 지난해의 수량과 같게 됩니다. 이 뜻으로 해조에 분부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수원 부사 정태화가 병으로 갈리니 심기주(沈器周)로 대신하고, 허적(許積)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원접사 이경증(李景曾)을 인견하고 일렀다.
"청인이 일찍이 국보(國寶)에 관한 일을 물었는데, 재신이 대답을 잘못하였다. 대개 난리 때 종묘의 새보(璽寶)를 잃었는데, 청인이 그것을 얻고 묻기를 ‘이 새보가 여기에 있으니, 국왕의 새보는 어느 곳에 있는가?’ 하였다. 저들이 만일 물을 경우에는, 경들은 같은 말로 답하기를 ‘당초 난리를 만났을 때 모든 새보를 강도에 실어보내고 행용하는 새보만 가지고 있어 겨우 유실을 면했다.’라고 하고, 또 중궁은 당초부터 새보가 없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
5월 30일 병술
상이 호피 5령(令), 표피 13령을 해조에 내려 칙사가 나올 때 보태 쓰도록 명하였다.
사간 김여옥(金汝鈺)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5월에 본직에 있으면서 윤방의 일로 탄핵을 많이 받았으니 지금 다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파면하소서."
하였다. 사간원이 처치하기를,
"김여옥은 일찍이 자기의 사견으로 공의에 배척을 당하였으므로 이 합계하는 때를 당하여 형세상 직에 있기 어려우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39권, 인조 17년 1639년 7월 (1) | 2026.01.03 |
|---|---|
|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6월 (0) | 2026.01.03 |
|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4월 (1) | 2026.01.03 |
|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3월 (0) | 2026.01.03 |
|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2월 (0) | 202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