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6월

싸라리리 2026. 1. 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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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정해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남선(南銑)을 함경남도 병사로, 이덕수(李德洙)를 우승지로, 이상형(李尙馨)을 사간으로 삼았다.

 

비국이 사은사의 행차에 치하(致賀)하는 문서를 겸해 보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일 무자

유성이 포과성(匏瓜星) 위에서 나와 허성(虛星) 위로 들어갔다. 또 두성(斗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6월 3일 기축

평안도에 한재가 너무 심하여 보리와 밀이 말라 손상되었는데, 감사가 아뢰었다.

 

장령 홍무적이 상소하여 시사를 진달하고, 또 함봉(緘封)한 작은 책을 올렸는데, 밀소(密疏)였다. 소는 수천 마디나 되었는데, 그 대강은 복수하여 수치를 씻으라는 것이었으며, 또 강도(江都)를 수축하여 보장(保障)의 터전으로 삼고 다시 김상헌·정온 등을 임용하여 의사(義士)의 소망에 부응해 주기를 청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상이 회답하지 않았다.

 

6월 5일 신묘

비로소 비가 왔다.

 

양사가, 윤방을 멀리 유배하는 일로 연계(連啓)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정계하였다. 이에 연안(延安)에 유배시키도록 명하였다.

 

김수현(金壽賢)을 대사헌으로, 조한영(曺漢英)을 지평으로, 조중려(趙重呂)를 부교리로, 유영(柳潁)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검토관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 장법(贓法)이 엄하지 않습니다. 전 영춘 현감(永春縣監) 박해(朴垓)의 죄상을 사문(査問)하라는 하교가 계셨는데, 그가 지극히 원통하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이는 감사가 본현(本縣)의 향임(鄕任)에게 사문하였을 뿐이니 어찌 실정을 얻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영남에서 올 때 물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고 물어보았더니, 하나는 영춘 현감이 팔려는 배이고 하나는 그 자제의 배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는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지난번 헌부에 있을 적에 사실대로 논계하였습니다. 만일 도신(道臣)이 조사한 장계로 죄를 면한다면 탐오한 관리가 징계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풍문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과연 그와 같다면 의금부로 하여금 다시 추핵(推覈)하게 하라."
하자, 허적이 또 아뢰기를,
"대관은 임금의 이목이므로 구차하게 충원해서는 안 되는데, 공론에 버림을 받은 김여옥과 술을 좋아하여 본성을 잃은 임득열(林得說)을 사간과 장령에 주의하였습니다. 이조가 거리낌이 없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고 대관도 일에 따라 규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마지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에 박해를 강원도 평창군(平昌郡)으로 정배하였다.

 

6월 6일 임진

영의정 최명길, 좌의정 신경진, 우의정 심열이 차자를 올리기를,
"윤방의 죄상은 저대로 공의가 있으니, 진실로 신들이 감히 참여해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들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니, 조정(朝政)에 관계되는 것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진실로 소회가 있으면 사리상 다 진달해야 하는 것이 임금을 숨김이 없이 섬기는 도리입니다.
대저 천연의 참호(塹壕)를 지키지 못하여 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결하여 죽음으로써 명의(名義)를 온전히 하는 것도 진실로 대신이 나라를 위해 죽는 큰 절조입니다. 그러나 참고서 주선하여 화란을 해결하려고 도모하는 것도 대신이 변란에 대처하는 권도입니다. 전에 윤방이 가벼이 자결하였다면 당일의 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절하지 아니한 한 가지 절조만으로도 그 본심을 밝히기에 족합니다. 그런데 논평하는 자가 근사하지도 않은 비방을 가하기에 이르렀으니, 아마도 공평한 마음으로 용서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그 당시에 종묘 사직의 신주가 욕을 당한 데 이르러서는 참으로 우리 동방 신민의 지극한 아픔입니다. 종묘 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간 신하를 죄주지 않으면 다시 허물이 돌아갈 곳이 없으니, 진실로 정상이 용서할 만하다 하여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오히려 이에 대해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은, 윤방이 선조조의 구신으로 본디 덕량(德量)이 있다고 일컬어졌으나 일을 봄이 명민함은 원래 그의 장점이 아니었습니다. 나이 이미 60이 넘어서 뜻밖에 역경(逆境)을 만나 소임은 중하고 일은 급하여 곧 죽음을 결행하지 못하였으니, 갖가지 낭패는 형세상 진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만, 그 본심을 추구해 보면 진실로 또한 가련합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신병이 위중하여 숨이 곧 끊어지려는 상황이므로 몇 십 리를 못 가서 반드시 숨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니, 성상께서 죽음을 용서한 은혜가 헛일로 돌아가게 됨을 면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우리 조종이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운 뒤로 기구(耆舊)의 대신에게 더욱 두텁게 은혜를 베풀어, 죄가 반역에 관계되지 아니하면 으레 감등하여 형률을 논하는 은전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삭직하여 문외로 출송함이 대다수였고, 80세된 노신이 귀양길에서 죽었다는 것은 근대에 찾아봐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의가 두렵고 왕법이 엄하여 대간의 논의가 한창일 때에는 신들이 진실로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합계가 이미 정지되고 배소가 이미 정해졌으니, 왕법이 행해지고 공의가 펴진 것입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높은 벼슬을 지낸 구의를 생각하고 늙고 병든 정상을 굽어 살피시어, 혹 의금부에 명하여 분외로 호송하게 하여 급하게 핍박하지 말고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 길에 오르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은혜와 의리가 아울러 행해질 것이고, 또한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상의 어진 덕에 반드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6월 7일 계사

이에 앞서 전 수사(水使) 이란(李灤)이 무진년029)  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를 욕되게 한 일이 많이 있어 의금부에 회부해 신문하여 처형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그 아들 이상윤(李尙尹)이 상서하여 원통함을 송변(訟辯)하니, 상이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최명길, 좌의정 신경진이 의논드리기를,
"이란이 죽을 적에 원통하다고 일컬은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수의하라는 명으로 인하여 본부의 추안을 가져다 보았더니, 당초 죄목이 매우 많았으나 박경룡(朴景龍) 등을 면질할 때에 모두 밝혀졌습니다. 다만 도망해 돌아온 사람을 쇄환(刷還)해 보낸다는 한 조항에 대해 ‘조정에 돌아가 고하여 잡아 보내겠다.’고 가벼이 답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죽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란이 실수한 바를 보건대, 다만 용장(龍將)의 위협을 견디지 못하여 경솔히 대답한 것이지, 고의로 국가에 일을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성상의 하문이 죄를 의논할 때에 나오셨다면 신들이 진실로 ‘죄가 죽음에는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관작을 추복(追復)하는 것은 곧 일시의 특이한 예수(禮數)이므로 사체가 매우 중하여 감히 가벼이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피차 매매할 때에 비단 등의 물화(物貨)를 한 단을 두 필로 나누어 만들었으니, 국가에 욕을 끼친 죄가 또한 그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을 지금 반드시 깊이 탓할 것이 없으니, 복직시키는 것이 무방하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직첩을 추급(追給)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석이 유신(儒臣)의 배척을 중하게 입었다는 이유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뜻하게 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6월 8일 갑오

전 이조 참의 윤황(尹煌)이 죽었다. 윤황의 자는 덕요(德耀)이다. 사람됨이 강하고 굳세며 기절이 있었다. 선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다. 광해의 정치가 문란하자, 시골에 돌아갔다. 반정 초기에 사헌부의 직에 등용되었다. 강도(江都)에서 청나라와 화친을 의논하게 되어서는 온 조정이 휩쓸렸으나, 홀로 화친이 믿을 수 없음을 극력 말하였다. 그리고 화친을 주장한 재신을 유배(流配)하고 항복한 장수로서 오랑캐를 인도하여 우리 나라를 배반한 자를 목베기를 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오늘날의 화친은 사실상 항복이다." 하여 상의 노여움을 격발하니 상이 귀양보내도록 명하였으나, 삼사(三司)가 힘써 구원함을 힘입어 면하였다. 병자 호란 이후에 또 화친을 배척한 것 때문에 마침내 죄를 받아 적소에서 죽었다. 장사를 간소하게 치르고 염(斂)할 때 사인(士人)의 의복을 쓰도록 유언하였다. 일찍이 상제례(喪祭禮)를 손수 지었는데 검약을 위주로 하였고,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준행하도록 하였다.

 

6월 9일 을미

승지 박황(朴潢)·이기조(李基祚)·이덕수(李德洙)·목성선(睦性善)·이경의(李景義) 등이 아뢰기를,
"비국의 계사를 보면 ‘지금 이 사은사가 가지고 가는 표문(表文)은 사은·치하(致賀) 두 본을 만들어 그곳에 가서 형편을 살펴보아 올린다.’ 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일시의 권변(權變)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도 일찍이 저들이 한 짓을 살펴보았는데, 주의(主意)가 정해지면 만드시 자기의 뜻을 행한 뒤에 그만두니, 어찌 종이 한 장의 치하하는 뜻으로 그 사이에 이로움과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지금 세자가 동쪽으로 오느냐의 여부가 만일 조금이라도 이에 관계가 있다면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온갖 방도를 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신들이 여러모로 생각해 보건대, 저들의 주의가 머물게 하거나 떠나게 하거나 어느 쪽으로든 이미 정해졌으면 반드시 이로 인해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니, 해만 있고 도움이 없음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것입니다. 모든 일은 그만둘 수 없어서 하면 사리에 용서할 만한 것이 있지만, 그만둘 수 있는데도 하면 실제 일에는 도움이 없고 인정에 크게 어그러질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상의하여 결정하도록 해서 후회가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신들도 충분히 생각하고 헤아려서 그것이 도움이 있고 해가 없음을 알았으므로 누차 아뢴 것입니다. 지금 장차 거행하려 하니 결코 중지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0일 병신

상이, 납약(臘藥)·저포(苧布)·신·부채 등의 물건을 광해(光海)가 위리 안치된 곳에 보냈다.

 

6월 12일 무술

예조가 조사해 낸 난리 때에 절의를 위해 죽은 사람들을 의정부가 계사를 붙여 입계하니, 상이 정원에 묻기를,
"절의를 위해 죽은 것은 다름이 없는데, 정표(旌表)가 같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원본을 가지고 유별로 나누어 자세히 고찰하였더니, 스스로 목매어 죽고 목찔러 죽고 불 속에 뛰어들어 죽고 바위에서 떨어져 죽고 물에 몸을 던져 죽는 등 그 죽음은 매한가지인데, 어떤 사람은 정표하는 가운데 들어 있고 어떤 사람은 복호(復戶)·증직하는 반열에 들어 있었습니다. 사건의 본말을 자세히 구명하라는 것은 실로 성상의 신중하신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자세히 살펴서 아뢰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한성부의 보고 및 각도의 장계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그 수효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 직접 보지는 못하고 전해 들은 데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진위가 서로 뒤섞이어 허실을 분변하기 어려웠습니다. 신이 일찍이 각인의 행적을 나열해 적어 대신에게 나아가 의논하였는데, 그 가운데 사대부와 거가 대족(巨家大族)의 부녀, 이서(吏胥)·군병 등이 위급함을 당하여 생명을 버려서 사람의 이목에 드러나 있는 이는 모두 정표(旌表)의 반열에 두었고, 그 다음은 증직에 기록하였으며, 비록 이름이 문보(文報)에 들어 있으나 애매하여 알려진 바가 없는 사람은 복호(復戶)하는 데 기록하였습니다. 지금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잠시 후일의 공론을 기다려 처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혹 여기저기 주선한 자는 참여되고 가만히 있는 자는 참여되지 못하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6월 13일 기해

이기조(李基祚)를 도승지로, 정치화(鄭致和)를 집의로, 조중려(趙重呂)를 장령으로, 유영(柳潁)을 이조 정랑으로, 민응협(閔應協)을 수찬으로, 이시영(李時英)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6월 14일 경자

헌부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관기(官妓)를 두고 지아비를 정하여 사사로이 데리고 살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본래 사객(使客)을 위로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오늘날 방기(房妓)로 충당한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듣건대, 서울에 있는 창류(娼流)가 본래 많지 않은데다 또 사부(私夫)가 숨겨서 그 수효를 채우지 못하므로 무녀(巫女)까지 끌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녀는 창류와는 달라서 각각 혼인하여 원래 정해진 남편이 있는데 강제로 끌어내니, 이는 남의 아내를 빼앗아다가 주는 것에 가깝습니다. 침독(侵督)의 해가 방리(坊里)에 미치어 기상이 참혹하니, 동·서·남쪽 근읍의 관기를 가려서 수효를 충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관기를 숨기는 형률을 엄히 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5일 신축

교리 성이성(成以性), 수찬 민응협 등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더위의 증세를 얻어 기가 잠시 편치 못하므로 인견하지 못한다. 소회가 있으면 써서 아뢰라."
하자, 성이성·민응협 등이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문서를 이제 발송한다 하는데, 한번 발송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미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터럭끝만큼의 이익이라도 된다면 설사 이보다 심한 것이 있더라도 신들이 또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없음을 알면서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니, 신들은 의혹스럽습니다.
저들의 풍속은 전쟁을 일삼아 군사 출동이 무상합니다. 만일 그들 스스로 자랑하는 말로 인하여 곧바로 치하를 보내면 ‘의리(義理)’ 두 글자는 우선 놓아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이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뒤에 장차 어떻게 계책하겠습니까. 군사를 징집하는 일과 도망해 돌아온 사람을 묶어 보내는 일은 모두 차마 말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만, 이는 모두 저들이 강제로 정한 데에서 나온 것이어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사람들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일은 어찌 우리측에서 먼저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옳다.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 일이 마음에 불안한 것은 어리석고 지혜로운 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그러합니다. 신들도 칠정(七情)이 있으니 어찌 이러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또 처음 계책으로 말씀드리면, 이 일을 허락받느냐 허락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일신의 이해에 관계되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론(衆論)을 힘써 따르면 일시의 아름다운 이름을 얻을 수 있고, 중론을 어기고 강행하면 일시의 비방뿐만 아니라 후일의 허물과 후회 또한 작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만 어찌 이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세자께서 이역에 억류되어 있은 지 3년이나 되었습니다. 밤낮 목을 빼고 한번 천안(天顔)을 바라볼 수 있기를 생각하고 있으나 그 길이 없으니, 이는 온 나라 신민의 지극한 아픔입니다. 진실로 돌아오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계책이 있다면 모든 방도를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추가로 보내는 문서는 실지가 없는 빈말에 지나지 않는 데이겠습니까.
지금 이 유신(儒臣)의 계사는 이 일의 이해를 상량해 논하여 큰소리만 치는 데에서 나온 것만은 아닌 듯하니, 신들도 그 말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사정은 억측으로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반드시 도움이 있다고는 감히 보장하지 못하겠으나, 반드시 도움이 없다고 하는 것은 또한 어떠한 견해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묘당과 대각은 맡은바 직분이 각각 다릅니다. 정론을 지키고 의리를 밝히는 것은 대각의 임무이며, 경중을 저울질하고 이해를 참작하여 종묘 사직을 보전하는 것은 묘당의 책임입니다. 논한 바와 본 바가 비록 같지 않더라도 국사를 함께 이루어나가는 데에 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난해에 묘당이 지나치게 삼사(三司)에게 견제되어 이미 떠나보낸 사신을 중지하기에 이르러 드디어 큰 화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지나간 일로서 거울삼을 만한 것으로, 신들은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사신이 이미 문서를 추후에 발송한 것을 알고 있으니, 경유한 바의 일로(一路)에서 아마도 반드시 종종 들었을 것이므로 이 일이 마침내 반드시 관중(館中)의 귀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며칠 못 가서 반드시 청인의 귀에 들어갈 터이니 그 해가 됨이 도리어 처음에 하지 아니함만 못합니다. 저러나 이러나 결코 중지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평상시의 반찬을 감한 지 날짜가 오래됨에 하늘이 감응함이 어그러지지 아니하여 곧바로 단비를 얻어 원근에 모두 흡족하게 내렸습니다. 오직 서로(西路)의 청북(淸北)만은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었는데, 지금 서도에서 오는 사람을 통하여 들으니, 초순 경에 큰비가 내렸다 합니다. 이달 16일부터 정전에 임어하시고 평상시의 반찬을 드시며 피고(皮鼓)를 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가을철이 멀지 않으니 잠시 정상으로 회복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9일 을사

비국이 아뢰기를,
"경상도에는 다만 금오(金烏)·천생(天生) 두 산성만이 있을 뿐인데, 천생 산성은 형세는 비록 험하나 성터가 너무 좁으며 또 우물이 없으니, 실로 지킬 만한 곳이 아닙니다. 온 도내에 믿을 곳은 금오 산성 하나뿐입니다. 지난해 전 감사 이경여가 어류 산성(御留山城)의 형세를 극력 말하고 도형을 그려 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비로소 수축하자는 의논이 있어 이미 작은 사찰 하나를 창건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접대하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조정을 하직할 때 위에서도 하교하였으니 이미 오늘날의 계책을 정한 것입니다.
다만 듣건대, 본성은 안팎이 모두 험하여 발을 붙이기 어렵고 사면 1백여 리 사이에 암석이 험하여 인가가 전혀 없고 양곡 운반이 어려우며, 봄가을로 백성에게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흩어주기가 더욱 어렵다고 합니다. 설치하기 전에 모름지기 충분히 살펴야 하므로 이미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늦가을 잎이 진 뒤에 친히 살펴보고, 양곡을 저축하는 일을 다시 익히 강구하여 아뢰게 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대구의 공산 산성(公山山城)과 성산(星山)의 독음 산성(禿音山城)이 형세가 아주 좋으며 본도의 사람도 축성하기를 원하는 자가 많다 합니다. 이 두 성도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모두 살펴보아서 성을 쌓을 만한 곳을 가려 먼저 쌓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접사가 치계하였다.
"칙사가 대동역(大同驛)의 말 2필, 어천역(魚川驛)의 말 1필, 양재역(良才驛)의 말 4필을 탈취하여 안주(安州)에 머물러 두고 별도로 기르게 하여 돌아갈 때에 가져갈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일행의 노복들이 분주히 애쓰느라 기갈이 들어 쓰러지는 자가 서로 잇따르고 역마도 죽은 것이 많습니다."

 

6월 20일 병오

원접사가 치계하였다.
"용강(龍岡)의 방기(房妓) 1인이 스스로 목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칙사가, 감사와 수령이 사주한 것이라고 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공갈하여 마지않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재상(災傷)을 복심(覆審)하는 것은 민간의 막대한 폐단인데도 응당 행해야 할 법전으로 보아 사람들이 감히 의논하지 못합니다. 신들은 항상 조종조에서 무슨 연유로 이러한 번거롭고 행하기 어려운 법을 설치하여 국가에 도움이 없고 민생에 해가 있게 함이 이에 이르게 하였는지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한번 변통하려 하였으나 일이 중대하므로 감히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근래 가정(嘉靖)계해년030)   명묘조(明廟朝)의 수교(受敎)를 보고 이어서 《대전(大典)》의 수세조(收稅條)를 상고해 보고서야 비로소 전지마다 답사하는 것은 원래 《대전》의 본문이 아니고 특별히 후일의 잘못된 관례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 명묘조 수교가 이미 이처럼 간절한데도 후일에 와서 준행하지 못하고 그대로 잘못된 관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좋은 법은 지키기 어렵고 폐습은 고치기 어려움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국가에 일이 많아서 부역이 날로 번다해져 생민의 고통이 극도에 이르렀다고 할 만합니다. 매우 딱하나 사세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은 또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부세의 공납, 삼수미(三手米), 서방 양곡의 운반, 결포(結布)의 징수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에 도움이 없고 생민에 해가 있는 일에 이르러서는, 선왕의 법전이 아니고 또 선왕조의 수교도 아닙니다. 한번 호령하는 사이에 온 나라의 생령을 살릴 수 있는데, 잘못된 관례에 구애되어 변통하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마침내 은혜를 입을 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대전》의 수세조 및 가정 연간의 수교를 모두 별지에 써서 보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법전에 의거하여 5면(面)으로 나누어 살펴 정하면 일은 간편한 듯하나, 실은 또한 복심(覆審)인 것이다. 전지 사이로 출입하지 않으면 이것이 저것보다 나은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지금 5면으로 고하를 정하면 세력있는 자가 많은 곳은 반드시 고등(高等)에 들지 않을 것이니, 나는 빈민에게 도움이 없고 경비에 손해가 있을까 염려된다. 나도 그 이해를 알지 못하겠으니, 다시 자세히 강구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이상형(李尙馨)을 집의로, 김대건(金大乾)을 경기 수사로, 성이성(成以性)을 사간으로, 이천기(李天基)를 대교로, 이시해(李時楷)를 교리로, 엄정구(嚴鼎耉)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6월 21일 정미

간원이 아뢰기를,
"북병사 이시영(李時英)은 사람됨이 경망하고 조급하며, 벼슬살이할 적에 탐학(貪虐)하였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6월 23일 기유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병조의 보목(步木)을 바칠 때에 비록 42∼43척이 되어도 척수가 모자란다 하여 물리치므로 외방 사람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모두 담당 관원이 봉직(奉職)을 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해당 낭청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그리고 담당 아전은 법문(法文)을 농간한 죄가 더욱 놀랍습니다. 또한 수금하여 다스려 후일의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4일 경술

위원 군수(渭原郡守) 이구(李球), 고산리 첨사(高山里僉使) 이여각(李汝覺)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는데, 위원 백성들이 월경해서 삼을 캤기 때문이다.

 

6월 25일 신해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장예충(張禮忠)의 말을 들으니, 이른바 ‘중전이 친히 받는다.’는 한 조항은 매우 놀랍고 괴이하나,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기의 의견을 반드시 행하려 한 것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이에 한 대신으로 하여금 홍제원(弘濟院)에 달려가서 힘을 다해 논변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내전(內殿)이 전혀 예를 행하지 아니하면 저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없으니 ‘여관(女官)을 거느리고 궁중에서 예를 행하겠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주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청나라 사신을 모화관(慕華館)에서 영접하였다. 먼저 영의정 최명길을 보내어 중전이 친히 받는 것이 예가 아님을 개유하게 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그를 허락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속히 인쇄하여 보내야 폐단 끼침을 면할 수 있다. 서사관(書寫官)은 서로 미루고 핑계해서는 안 되니 오준(吳竣)으로 하여금 쓰게 해서 말을 주어 발송하고, 전문(篆文)은 신익성(申翊聖)으로 하여금 쓰게 하라."

 

영접 도감이, 연향 때에 소를 잡아 베풀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상마연(上馬宴)이나 하마연(下馬宴)이 아니면 그렇게 베풀지 말라."

 

6월 26일 임자

유성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대각성(大角星) 위로 들어갔다.

 

사령(赦令)을 반포하고 백관의 자급을 올려 주었다. 청나라 사신이 와서 내전의 고명(誥命)을 전했기 때문이다.

 

상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하마연을 베풀었다. 상이 청나라 사신에게 이르기를,
"지난해 군사를 징집할 때에 선처하지 못하여 기일 뒤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웠소."
하니, 마부달(馬夫達)이 말하기를,
"군사 징집의 기일 뒤에 이르면 마땅히 그 벌이 있으니, 사관(査官)이 가을에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하고, 또 수군·육군을 징집하고 또 양곡을 도우라는 뜻으로 말하자, 상이 답하기를,
"대국에서 명하면 소방이 어찌 감히 어기겠소. 다만 보병은 혹 조발해 보낼 수 있겠으나 마군(馬軍)은 결코 보내기 어렵소. 양곡을 돕는 것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어 계책이 나올 데가 없으나 힘대로 돕겠소."
하였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을 삼전도 비문 서사관(書寫官)으로 삼으셨으나, 신은 이미 임금이 욕을 당하시던 날 죽지 못하여 항상 깊은 한을 품었으므로 결단코 병든 몸으로 이 일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쓰지 않았다.

 

6월 27일 계축

상이, 익령 부원군(益寧府院君) 홍서봉(洪瑞鳳), 영중추부사 이성구(李聖求), 영의정 최명길, 좌의정 신경진 등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어제 청인이 의외의 말을 제기하였는데 내가 잘 대답하지 못하였다. 청인의 끊임없는 욕심이 한이 없어 이미 은을 요구하려 하고 또 군사를 보조하게 하려 하니, 형세가 지탱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내가 마지못해 ‘힘대로 돕겠다.’고 답하였다."
하였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정명수(鄭命壽)를 논상하라는 전교가 계셨으니, 지금 무슨 벼슬로 상주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정역(鄭譯)을 첨지(僉知)로 삼았더니, 그가 처족에게 옮겨 주기를 청하였다."
하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청나라가 들으면 반드시 큰 화가 있을 것이니, 그가 어찌 따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물어서 처리하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정명수의 어미가 바야흐로 관서에 있으니, 식물(食物)을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은 서서히 하라."
하였다.

 

6월 28일 갑인

신경진을 사은사로 삼았다.

 

신경진이 정역에게 몰래 통하여 관직으로 상주는 뜻으로 말하였더니, 정명수가 기뻐하는 빛이 있었고, 관교(官敎)에 지난해의 날짜로 써주기를 원하였으며, 또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또 그의 처남인 정주(定州) 사람 봉영운(奉永雲)을 서로(西路)의 변장에 제수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김돌시(金乭屎)도 그의 족속 2인을 말하였는데, 한 사람은 벼슬을 주고 한 사람은 사은사의 일행과 같이 보내기를 원하였다.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6월 29일 을묘

상이 관소에 거둥하여 익일연(翌日宴)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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