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병진
호조가 아뢰기를,
"전부터 청나라 사람들이 발매(發賣)하는 것이 더할 수 없는 근심거리였는데, 정역(鄭譯)031) 이 역관들로 하여금 그 사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므로 시장 백성들이 끝없이 원망하면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들어주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매질까지 해대니 시장 백성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은 이치상 당연합니다만, 도피하여 본조에 욕을 끼치기까지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선은 평시서(平市署)로 하여금 잘 타일러 돌아오게 하고, 끝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기어이 잡아다가 율에 의거하여 죄를 주고 단연코 용서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청나라 사신이 한강에 나가 유람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관소(館所)에서 내관인 나업(羅嶪)·백대규(白大珪) 등을 불러 보았다.
정명수가 매부(妹夫) 임복창(林復昌)이 현재 성천(成川)에서 정병(正兵)으로 있으니 군역(軍役)을 면제해 달라고 말하였는데, 비국에서 그가 말한 대로 들어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익녕 부원군 홍서봉(洪瑞鳳), 영중추부사 이성구(李聖求), 영의정 최명길, 좌의정 신경진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잔치할 때에 문답한 말을 경들은 자세히 들었는가. 그들이 왜와 수교하겠다고 말한 것은 필시 보통으로 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의사는 반드시 수교하여 병기를 무역하려는 것이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우리 나라에 화를 끼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으레 은밀한 말로 뜻을 전달하는데, 우리도 난처하다는 뜻으로 은밀하게 말하여 황제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신경진이 아뢰기를,
"만일 왜국에서 보내온 옷을 보인다면 반드시 우리가 수교한 것으로 의심할 것입니다. 병풍은 보여도 무방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이번에 서쪽으로 침범한 일은 대장이 이미 죽었으니 군병들이 패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들이 아마도 우리 나라가 왜와 수교한 것으로 의심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 실정을 시험해 보려는 것입니다. 저들도 어찌 바다를 건너 수교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항간에 일설이 떠도는데 ‘일본은 의리를 좋아하는 나라이다. 우리 나라가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을 알리는 것이 옳다.’ 합니다. 이 말이 일리가 없지 않으니, 청인들이 만일 반드시 수교하려고 한다면 이것으로 겸해서 사신을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다. 일본에게 무슨 우리를 아끼는 뜻이 있겠는가. 지금이야말로 어려운 시기이니 결코 수교해서는 안 된다. 내 생각은 다시 제기하고 싶지도 않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옳습니다."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정명수를 동지중추부사로, 김돌시(金乭屎)의 종제(從弟) 김산해(金山海)를 수문장으로 임용하라는 관교(官敎)를 상신(相臣)의 분부에 따라 작성하여 정원에 보냈는데, 정명수가 연도를 소급해 달라는 말을 하기에 천계(天啓) 8년032) 으로 써서 주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7월 2일 정사
헌부가 아뢰기를,
"사천 현감(泗川縣監) 이원환(李元煥)은 온갖 짓을 다해서 백성을 착취하여 자신을 살찌웠습니다. 근일에 또 들으니, 쌀을 세선(稅船)에 몰래 실어다가 경강(京江)에 도착시켰다 하였는데, 본부에서 뱃사공을 추문(推問)해 보니 과연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부터 밝은 임금이 법을 제정하여 죄인을 처단할 때 장오죄(贓汚罪)를 범한 자를 가장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오죄를 범한 자는 비록 귀하거나 가까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오늘날의 법을 사용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장오죄를 범한 자가 있더라도 의금부에 잡아다가는 형장과 형틀을 헛되이 설치해 놓고 세월만 끌다가 모두 석방해 주니,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이원환을 법에 따라서 엄히 다스리는 한편 해사(該司)로 하여금 그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의 재정을 돕게 하소서.
지금 설치한 이 도감(都監)은 보통 때와는 달리 큰 난리를 막 겪어서 민생이 곤궁을 당하고 있는 판이니, 모든 조처를 십분 잘 살펴서 털끝만한 폐해라도 덜어내야 하는데, 서리(胥吏)가 폐단을 일으키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닭 한 마리를 바쳐야 하는 경우 반드시 1필의 면포를 바쳐야 하며 생선 20마리를 바쳐야 하는 경우 무려 면포를 70필이나 바쳐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백성의 원망이 하늘에 사무치고 울부짖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당해 관원이 직무를 매우 태만히 한 것이니 모두 명하여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원환에 대한 일은 논한 바가 옳지만 법례(法例)에 어긋나니 국문한 뒤에 처리하는 것이 옳다. 도감의 당해 관원은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심양(瀋陽)에 있는 재신 박로(朴𥶇) 등이 치계하였다.
"용장(龍將)이 말을 전하기를 ‘이번 칙사를 내보낼 때에 비문을 쓰는 사람과 몽어(蒙語)를 아는 사람을 미처 내보내지 못하고 칙사로 하여금 비석만 보고 오게 하였다. 비문 쓰는 사람은 후일에 내보내겠다. 그리고 전일에 쇄송(刷送)해 보냈던 귀화한 사람 중에서 도망한 자는 칙사가 출발하기 전에 다시 쇄송하라.’고 하였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도망해 돌아온 사람을 쇄송(刷送)하는 일에 대하여 청나라가 매양 말하는데,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인정과 의리상 차마 못할 바가 있기 때문에, 저번에 성상의 하교대로 평안 감사에게 이문(移文)하여 다시 잡아서 알리지 말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어제 접견할 때에 청나라 사신이 또 이 문제를 제기하여 몇 마디 말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임시로 변통하여 입을 막는 조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제 풀이 무성해질 때이므로 반드시 달아나 돌아오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평안 감사로 하여금 특별히 기찰하여 몇 사람을 붙잡아 가두고 알리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내관(內官)들이 칙사를 가서 보았는데, 그들의 말은 입조(入朝)에 관한 일이었다. 또 그들이 말하기를 ‘귀화한 사람을 쇄송하는 일에 대하여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국왕이 만일 입조하여 대면하고 말한다면 황제의 오해가 어찌 풀리지 않겠는가.’ 하였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것은 필경 좋지 못한 짓을 하려는 의도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그들이 또 말하기를 ‘지난날 산성 아래에서 군사가 삼엄하게 나열해 있을 때에도 오히려 잘 대우했으니, 지금 입조한다 하더라도 어찌 위태로운 사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는데, 경들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을 갑자기 들으니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미 단서를 꺼내었으니, 반드시 그냥 그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시백이 아뢰기를,
"지금 이 말을 듣고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합니다. 저들이 여러 해 동안 중국을 엿보다가 지금 패배하여 돌아왔기 때문에 우리 나라를 노리는 것입니다. 어찌 그저 세폐(歲幣)만 받으려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대사를 가벼이 의논할 수 없으니, 지금은 우선 칙사의 일행을 잘 대우하여 보낸 뒤에 차분히 의논하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차 어떻게 회답해야겠는가?"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 일은 헤아리기 어려운 바가 있지만, 그 회답하는 내용은 ‘상국(上國)이 다시 세워준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비록 이 말이 없었다 하더라도 내 생각에는 본래 들어가 사례하려 하였습니다만, 국가에 일이 많은데다가 남쪽 지방의 근심이 있으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자가 만일 나오면 내가 마땅히 힘써 따르겠습니다.’라는 식으로 해야 되지, 지금 따르기 어렵다는 뜻으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당초에 성을 나왔던 것은 혹 만에 하나라도 요행이 있기를 바라서였는데, 지금의 형세로써 살펴보면 감당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비록 한 번 입조해서 별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해마다 입조하게 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명길이 말한 변통하는 말로 답한 뒤에 별도로 계책을 세우자는 것이 좋은 계책인 듯합니다."
하고, 명길이 아뢰기를,
"만일 입조한 뒤에 의심이 확 풀리고 세자와 대군도 모두 돌아오게 된다면 진실로 좋겠습니다."
하고, 박황이 아뢰기를,
"회답하는 말은 모름지기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니, 결코 쾌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따르기 어렵다는 뜻으로 말하고, 그 다음에 거절하기가 곤란하다는 말로 답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 가운데 혹 흐느끼며 우는 자도 있었는데, 명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절대로 경거 망동하지 마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황의 말이 옳다. 그리고 이 일은 두 가지 단서가 있는데, 불측한 일을 저지르려는 의도이거나 쇄환(刷還)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성의를 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말을 꺼낸 듯하다."
하자, 시백이 아뢰기를,
"이 말은 반드시 쇄환의 일 때문에 꺼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명길이 빙 둘러보며 말하기를,
"이 말이 만약 칙사가 떠나기 전에 누설되면 인심이 반드시 동요할 것이니, 따르든 따르지 않든 간에 가벼이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입시한 사람들은 모두 사리를 아는 사람들이니, 비록 지친(至親) 사이라도 말하지 말도록 하시오."
하였다.
상이 인정전에서 청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7월 3일 무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서 청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장(馬將)이 말하기를,
"도망해 돌아온 사람 및 귀화한 사람을 쇄송(刷送)하는 일에 대해서 만일 신칙(申飭)하지 않으면 세월이 점차 흘러 저절로 지체될 것이니, 우리들도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국이 이 일에 대하여 마음을 다하고 있지만, 수색해 잡기가 쉽지 않으니 그저 부끄럽고 두려움만 더할 뿐이오."
하였다. 드디어 술을 돌려 오랜 시간 마시고 나서 끝냈다.
7월 4일 기미
역관 정명수가 세 사신(使臣)의 뜻으로 장예충(張禮忠)에게 말하기를,
"지난 정축년에 왕을 책봉하는 한 가지 일로 세 사신에게 각 1천 냥씩을 주었는데, 지금은 왕비와 세자를 책봉하는 두 가지 일이니 어찌 그때의 예(例)를 쓸 수 있겠는가. 너희 나라의 사신은 방물(方物)을 싸가지고 온 경우에도 각각 상을 받지 않는가. 이는 실로 역관들도 아는 일인데, 어찌 감히 청을 거절할 계책을 꾸미는가."
하였다. 마장(馬將)이 또 장예충에게 좋은 말 한 필을 얻고 싶다고 살짝 말했는데, 예충 등이 반복하여 명수에게 타일렀더니, 명수가 답하기를,
"으레 주는 말 이외에 또 세 사신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면, 반드시 그 일로 인하여 은을 요구하는 청을 거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비국이 그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따랐다.
7월 5일 경신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위에서 나와 남두성(南斗星) 아래로 들어갔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거둥하여 상마연(上馬宴)을 베풀었는데, 마장이 또 쇄환에 관한 일을 말하자, 상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일일이 거행하게 하겠다고 답하고, 이어서 술을 마시고 끝냈다.
7월 6일 신유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는데,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전송하였다.
영의정 최명길이 대면하기를 청하니, 상이 불러서 접견하였다. 명길이, 내관 나업(羅嶪)이 칙사와 문답한 일에 대해 듣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지금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군사 원조에 관한 일은, 저들이 만일 강제로 결정한다면 결코 어기고 거절할 형편이 못 되는데, 저들이 처음 말할 때 이처럼 공갈을 했으니 실로 대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였다. 명길이 또 나업이 뭐라고 대답했으며 칙사가 또 뭐라고 말했는지를 물으니, 상이 이르기를,
"나업이 다만 따르기 어려운 형편으로 말했는데, 그가 말한 내용도 자못 나업의 말을 옳게 여긴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는 벽제(碧蹄)로 따라가서 또 칙사를 만나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신이 갈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 칙사를 전송할 때에 동서의 반열(班列)에 걸출한 조정 인사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상께서 뜻을 굽혀 그들을 우대하는데도, 조정의 일이 이런 식이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죄를 주려면 번거로울 듯하니 모름지기 별도로 신칙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번거로움이 있겠는가. 벌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7월 7일 임술
종묘서의 관원이 도제조(都提調)의 뜻으로 아뢰기를,
"종묘의 예는 더할 수 없이 엄숙하고도 중대한 것입니다. 삼가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하건대, 종묘 사시제 섭사의(宗廟四時祭攝事儀)의 말단에 ‘묘사(廟司)와 전사관(典祀官)은 각각 그 소속 인원을 거느리고 초선(初膳)을 함께 거두며, 궁위령(宮闈令)이 문을 닫은 뒤에라야 물러난다.’는 절목(節目)이 있는데, 어느 때부터 폐지되어 행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사관과 궁위령이 다른 제관과 한꺼번에 나가버리고는 묘사(廟司) 홀로 담당하게 합니다. 이에 각실(各室)에 진설된 제기들이 매우 많으므로 거두어 물릴 때에 무질서하여 미안하게 됨을 면치 못합니다.
또 실문(室門)을 닫은 뒤에 번육(膰肉)을 올리는 것이 옛 관례인데, 근래에는 진상(進上)에 급급하여 상을 거두고 문을 닫기도 전에 곧바로 실문 밖에서 싸서 봉하기 때문에 더욱 시끄러우니,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절포(折脯)하는 일은 실로 간사함을 막기 위한 것인데, 감찰이 제사가 끝난 뒤에 곧바로 행랑에 와서는 절포하도록 독촉하므로 수복(守僕)들이 묘사(廟司)에게 알리지도 않고 지레 먼저 가져오니, 예로 찬선(饌膳)을 거두는 의식에 크게 어긋납니다. 앞으로는 특별히 신칙하여 지금까지의 습관을 따르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춘천(春川)은 인구가 많고 지역도 넓은데다가 또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 제수된 부사(府使) 신경진(申景珍)은 일찍이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있으면서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문책을 당한 사람입니다. 본국이 정조(政曹)에 신칙하여 특별히 잘 고르도록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처럼 적합하지 못한 사람을 주의(注擬)하여 임명했으니, 해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여 깨우치고 채찍질하는 터전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8일 계해
하늘이 울렸고 서남쪽에 벌레가 나는 것 같은 기운이 있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제 7월 9일은 곧 입추절입니다. 전례에 따라서 정전(正殿)으로 돌아오시고 상선(常膳)을 드시며 피고(皮鼓)를 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순검사(巡檢使) 박황(朴潢)을 일찍이 농사가 한가해진 뒤에 순찰케 하자고 결정하였는데, 지금 가을철이 되었으니 출발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9일 갑자
장령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장령 조중려(趙重呂)는 본부(本府)가 좌기(坐起)하던 날,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담배를 피워 동료를 태만히 대하는 태도가 있었으며, 또 다시(茶時)에 남의 정장(呈狀)을 받아 법과 규례를 어겼는데, 이는 신이 동료에게 가볍게 보인 소치입니다. 또 신이 교외에서 칙사를 전송할 즈음에 길 왼쪽으로 나아가려 했는데, 눈물이 마구 흘러 저도 모르게 벌렁 넘어졌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장령 조중려(趙重呂)가 인피하면서 변명하였다. 대사간 김수현, 사간 성이성(成以性), 집의 이상형(李尙馨), 헌납 유철(兪㯙), 정언 박수문(朴守文), 지평 조한영(曺漢英) 등이 모두 칙사를 배송할 때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그들을 모두 체차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1일 병인
정치화·이시매(李時楳)·유영(柳潁)·성이성·이시해(李時楷)·남노성(南老星)·임전(林)·박수문·홍무적 등을 암행 어사(暗行御史)로 명하여 행장을 꾸리게 하고, 이틀 지나서 팔도에 나누어 파견하였다. 살펴보건대, 음관(蔭官)이 암행 어사에 선발된 것은 국조(國朝) 이래로 드물었다. 진실로 적임자라면 문관과 음관을 어찌 구분하겠는가마는 무적은 적임자가 아니었으므로 당시에 음관 어사라는 비난이 있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딸이 정혼했다고 하는데, 해조로 하여금 혼수를 헤아려 주도록 하라."
김영조(金榮祖)를 대사간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집의로, 김응조(金應祖)·이원진(李元鎭)을 장령으로, 윤양(尹瀁)을 지평으로, 신익전(申翊全)을 헌납으로, 이상형(李尙馨)을 부교리로, 이만(李曼)을 수찬으로, 정태제(鄭泰齊)를 정언으로, 이필행(李必行)을 사간으로 삼았다.
필행은 정축년 이후로부터 여주에 물러가 살며 병을 핑계로 밖에 나오지 않으면서, 전후의 제배(除拜)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이때 대간과 시종으로 재야에 물러나 있는 사람으로는 호남에 신천익(愼天翊), 영남에 김령(金坽)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에 혹 한 차례 왔다가는 곧바로 물러가 이와 같이 한 지 10년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필행과 더불어 3인이 있게 되었다.
7월 12일 정묘
상이 하교하였다.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를 1년 더 그대로 유임하도록 하라."
윤방·김자점(金自點)을 향리로 방귀(放歸)하도록 명하였다.
살펴보건대, 강도(江都)의 참화에 종묘 사직의 신주가 더럽혀지고 산실된 치욕은 자손과 신하의 입장으로는 차마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으니, 아, 참혹하다. 윤방이 이미 종묘 사직의 신주를 모시라는 명을 받았으면서 마침내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비록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 것이다. 삼사가 소장을 번갈아 올려 비난하기도 하고 중지하기도 하면서 파면했다가 서용하고 유배했다가 사면해 주더니 마침내 원래의 봉작을 회복하여 대신의 반열에 두었다. 그리고 김자점이 군부를 해치고 유기한 죄는 한 차례의 유배(流配)로는 진실로 징치하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시골의 집에서 편히 쉬게 해서야 되겠는가. 조정의 형정(刑政)이 아이들 장난과 같으니,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 인심이 복종하고 국세가 진작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7월 13일 무진
정광경(鄭廣敬)을 대사헌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우부승지로, 김광혁(金光爀)을 집의로, 유철을 부교리로, 이회(李禬)를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본도 두 진관(鎭管)의 속오군(束伍軍)을 동원하여 선산(善山) 금오 산성(金烏山城)을 더 쌓겠다고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7월 14일 기사
상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저 사람들이 저번에 말했던 입조(入朝)하라는 일에 대하여 신하로서 누군들 우려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가만히 살펴보니, 모두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니 속히 대계(大計)를 결정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신은 이 일이 올해에는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의 입장에서는 장차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는가?"
하니, 익녕 부원군(益寧府院君)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신하의 입장에서 어떻게 군부(君父)를 불측한 곳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영중추부사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저번에 뜻을 굽히고 치욕을 참으면서 원수가 시키는 대로 했던 것은 다만 동궁(東宮)이 만에 하나라도 돌아오기를 바라서였습니다. 이제 이미 가망이 없으니, 우리 국가라도 보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고사(古史)에 ‘의논이 정해졌을 때에는 오랑캐가 이미 강을 건넜다.’ 하였는데, 오늘날의 일이 이와 같습니다. 저들이 만약 일개 사신을 시켜 불의에 협박이라도 한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자, 서봉이 아뢰기를,
"성구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만약 의외의 변고가 상의 곁에서 생긴다면 지혜로운 사람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고려 충혜왕(忠惠王)의 일033) 을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박황(朴潢)에게 이르기를,
"경이 저들의 지역에 오래 있었으니, 반드시 그들의 사정을 자세히 알 것이다."
하니, 박황이 아뢰기를,
"심양(瀋陽)의 사정은 보안을 철저히 하여 알기가 어려웠습니다만, 신의 생각으로는, 마침내는 불측한 화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일찌감치 대비를 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신이 심양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범문정(范文程)의 말을 은밀히 전해 주기를 ‘성에서 나왔을 때에 아들로 바꾸어 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망측한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범문정이 말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하니, 박황이 아뢰기를,
"징병에 관한 일을 거절한 이유로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부제학 김반(金槃)이 아뢰기를,
"정축년의 일은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말을 듣고 보니, 저들이 호의(好意)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남의 성지(城池)를 이미 수선하였으니, 강도(江都)도 보장(保障)으로서 울타리가 되는 곳이니 모름지기 미리 잘 조처하여 후일의 진양(晋陽)으로 삼아야 됩니다034)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뜻은 이러하나, 나는 오히려 호의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환란에 대한 방비는 미리 헤아려서 해야 한다. ‘바꾸어 세운다.’는 말은 공갈에서 나온 것이니 깊이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가 아뢰기를,
"저들은 일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조금만 어겨도 문득 화를 내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뒷일을 잘 도모하는 계획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옛말에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먼저 소문나는 것은 위태롭다.’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으로도, 적국에게 이미 시작했다는 형세를 먼저 보이는 것은 좋은 계획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군사 원조에 관한 한 가지 일도 또한 매우 난처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칙사가 관소(館所)에 있을 적에 군사의 수효에 대해 미처 묻지 못한 것이 이제야 후회가 된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군사 원조에 관한 허락 여부를 모름지기 속히 결정해야 되지만, 상께서 머무를 곳은 남한 산성과 강도 중 한 곳으로 결정하여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하자, 성구가 아뢰기를,
"신의 의견으로는 징병에 관한 요청은 허락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문제는 쉽게 말할 수 없다. 우리 나라가 비록 끊어 버릴 계책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자취를 뚜렷이 보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원접사(遠接使) 이경증(李景曾)이 저들과 자못 친숙해졌으니, 그들이 의주에 도착하여 머무는 날, 그로 하여금 군병의 실제 숫자를 은밀히 묻게 하라."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사가 형편없기 그지없으니 죽느니만 못하다. 아무 것도 모르고 죽은 사람이 부러울 뿐이다. 귀화한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일은 말할 필요가 없다. 도망해 돌아온 백성을 쇄환하기까지 한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해 돌아온 우리의 백성들을 도로 잡아 보내는 것이니, 어찌 백성의 부모된 도리이겠는가."
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렸다. 김류가 강도에 토성(土城)을 급히 쌓고 또 병선(兵船)을 전투용 선박으로 바꾸어 만들자고 청했는데,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모두 쉽게 할 수가 없는 일들이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다만 이·호·병 3조(曹)에 달려 있을 뿐이니, 이조는 양리(良吏)를 선발하고, 호조는 저축에만 뜻을 두고, 병조는 군정(軍政)을 정비하여 깨끗하게 하라. 그런데 요점은 인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하여금 거북선을 제조하여 시험해 보도록 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이순신이 창제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신이 시험삼아 무신 이완(李浣)을 병조 및 승지에 의망(擬望)하려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명길이 아뢰기를,
"이완은 용감하고 청렴해서 용렬한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도 무신으로 승지를 임명한 때가 있었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시사(時事)가 나날이 점차 위태로워지니 의지할 만한 심복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영군(御營軍)을 김자점(金自點)에게 맡긴다면 급할 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가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미 용서하여 귀향하도록 했던 것이다."
하였다.
7월 16일 신미
예조가 아뢰기를,
"입추(立秋)가 지난 뒤인데도 장마가 계속되어 벼가 손상되고 있으니 영제(禜祭)035) 를 지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명하여 제주(濟州)036) 에 겨울철 옷감을 보내게 하였다.
호조 판서 이명(李溟)이 차자를 올리기를,
"순검사(巡檢使)를 보내는 것은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닌 듯합니다. 지난해 기근(飢饉)이 들었고 새 곡식도 아직 익지 않았으며, 국경에는 급히 대처해야 할 만한 변고가 없으나 삼남(三南)에는 소요가 일어날 걱정이 있습니다. 또 왜관(倭館)에서 우리 나라의 동정(動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데, 이런 무고한 날에 특별히 재신(宰臣)을 보내어 수군을 검열한다면, 반드시 의심을 초래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겠다."
하였다.
7월 17일 임신
승지 이경의(李景義)가 상소하기를,
"신이 등대(登對)하여 나눈 이야기에 대해 어제 들었는데,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으며 또한 전하께서 차마 물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온 나라가 미봉(彌縫)하는데도 만일 벗어나지 못한다면 신하된 자는 오직 몰래 업고 달아나서 기어이 성궁(聖躬)을 보전해야 할 것이니, 이는 누구나 같은 마음이고 매우 분명한 의리인데, 어찌 이러쿵저러쿵 논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축년 이후로 공물로 바치는 금 은 비단 등이 해마다 불어났지만, 충신 열사(忠臣烈士)가 감히 다른 의논을 제기하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한쪽 귀퉁이라도 보전하여 국맥(國脈)을 조금 연장하면서 세자가 환국하기를 행여나 바라서였으니, 그 형세와 정상은 참으로 절박하고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마침내 승냥이와 이리처럼 의심하면서 온갖 흉측하고 교활한 짓을 해댔으며, 심지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을 감히 이곳에서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너무나도 우리를 무시한 것입니다.
환란을 방비하는 방도를 반드시 미리 정해야만 의귀할 곳이 있게 되고 적절하게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강도(江都)가 최선이나 토성(土城)과 목책(木柵)을 수축하는 일은 급선무가 아니고, 기계와 양곡에 관한 일은 비록 급히 해야 할 일이기는 하나 이 역시 부차적인 일입니다. 종묘 사직을 한 조각 조그만 섬에 맡겨 두었다가 적이 만일 전역에 가득 차게 된다면,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득하게 푸른 바다만 보일 뿐이니 인심이 무엇을 믿고 안정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강도를 근본으로 삼고 덕물(德物)의 여러 섬과 남양(南陽)의 대부(大富), 인천(仁川)의 자양(紫陽)을 【 모두 섬 이름임.】 좌우 울타리로 삼으며, 해서(海西)는 연안(延安)·해주(海州)를 대진(大鎭)으로 삼아 백령도(白翎島)에 이르고, 호서는 수영(水營)·서산(瑞山)·태안(泰安)을 우익(羽翼)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안변(安邊)·난지(蘭池)·원산(圓山) 등의 섬 및 서천포(舒川浦)와 고군산(古君山) 제도를 열둔(列屯)하는 곳으로 삼으며, 부안(扶安)·변산(邊山)에 또 대진(大鎭)을 설치하고 여기에서부터 남쪽으로 뻗어 영암(靈巖)·나주(羅州)에 이르러 끝나게 합니다. 그리하여 그 형세를 헤아리고 그 토지를 살펴서,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았던 유민을 모집하여 바닷물로 소금을 제조하기도 하고 둔전(屯田)에 여러 곡식을 심기도 하고 어전(魚箭)을 쳐서 고기를 잡기도 하면서, 그 먹는 것을 공동으로 하고 그 판매도 공동으로 하게 합니다. 이리하여 1년이 지나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어 기꺼이 이익을 추구할 것이니, 그런 뒤에 모인 민정(民丁)을 계산하여 격군을 헤아려 배를 만들어서, 평상시에는 장사를 하다가 변고가 있으면 강도(江都)로 달려가 구원하게 합니다. 이리하여 해도(海島) 사이에 한 줄기 판도(版圖)를 설치하되, 대략 중국이 연해를 방어하던 제도처럼 한다면, 탐라(耽羅) 위쪽이 원근의 문호가 되어 서로 의지하며 앞뒤로 구원할 수 있어서, 서남의 도적은 근심거리가 못 될 것이니, 이는 아주 완전한 방법입니다.
이것을 시행하는 방법은 별도로 아문(衙門)을 세울 것이 아니라, 그 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관(朝官)의 자제와 한산 품관(閑散品官)과 출신(出身) 가운데에서 재국(才局)이 있는 자를 가려서 별장 감관(別將監官)이라 호칭하고, 재능에 따라 각각 적합한 사람을 얻되, 후한 상을 약속하고 품계를 아끼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또한 조정에 품신하지도 않으며 주군을 번거롭게 하지도 않고 방편대로 처치하게 하되, 그 출입에 대해 묻지 말도록 하는 것입니다. 금년 가을부터 소금 판매를 시작하면 명년이 지나기 전에 일의 두서가 마련될 것이니, 무슨 적의 귀에 들어가거나 백성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혹시 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나주(羅州) 이하의 전선(戰船)은 각각 그 맡은 곳을 지켜 남쪽을 방비하게 하고, 나주 이상의 전선은 강도의 난에 달려와 구원하게 한다면 참으로 편리하고도 효과적일 것입니다.
무릇 오랑캐와 교제하는 방법은,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동요하지 않고 개·말·진주·옥 등으로 성의를 다하며, 침입해 오면 막고 물러나면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상황은 세자가 그곳에 있으니, 경솔하게 끊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도록 힘써야 될 뿐입니다. 정예로운 기운을 축적하여 은연중에 범할 수 없는 기세가 있게 된다면, 저들이 어떻게 오늘날처럼 손바닥에서 가지고 놀 수 있겠습니까. 세자가 돌아오느냐의 관건도 사실은 여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일 따르기 어려운 일로 짐짓 틈이 생기게 하더라도 조치해 놓은 예비책이 있어 믿고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근본이 되는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인심이 안정될 수 있고, 인심의 향배(向背)에 따라 성패가 바로 판정되는 법입니다.
그 사이의 세세한 조치 문제는 다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이 대신들과 상의하여 일찌감치 조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부질없는 의논에 동요되지 않으신다면, 그지없는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가상하게 받아들였다.
7월 18일 계유
상이 하교하였다.
"저번에 영상이 비국의 제신(諸臣)과 빈청(賓廳)에 개좌(開坐)하려 하였는데, 내가 여러 재신(宰臣)의 노고를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지금 다시 생각하니 그 말이 실로 유익한 것이었다. 앞으로는 매월 3일, 13일, 23일에 빈청에서 개좌하여 소대(召對)에 편리하도록 하라."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馳啓)하였다.
"동궁(東宮)이 심양으로부터 영을 내리기를 ‘불의에 칙사의 행차가 있으니 서도(西道) 백성들의 일이 진실로 애처롭다. 예전에 황제가 하사한 은 1백 냥과 각종 비단 10필을 본도에 보내어 칙사가 돌아올 때에 들어갈 비용을 도우라.’ 하였고, 대군(大君)도 은 1백 냥과 각종 비단 10필을 보냈습니다."
이덕형(李德泂)을 예조 판서로, 이경의(李景義)를 이조 참의로, 정태제(鄭泰齊)를 지평으로, 심세탁(沈世鐸)을 정언으로, 이후원(李厚源)을 충청 감사로, 이완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국조(國朝) 이래로 무신으로서 승지의 자리에 발탁된 자는 반드시 일시의 명망을 지니고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완은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의 아들로서 가전(家傳)의 업인 활쏘기와 말타기의 무예로 출세하였으나, 그 사람됨은 특이한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예로운 자리에 발탁되어 그 실지보다 지나치게 등용되었으니, 애석하다.
7월 19일 갑술
한강의 물이 넘쳐서 강가에 있는 민가 10여 호가 떠내려 갔다.
평안 감사 민성휘가 치계하였다.
"숙천(肅川)의 백성이 들에 가서 김매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7월 20일 을해
평안 감사 민성휘가 치계하였다.
"칙사 등이 연로의 여러 고을에서, 벌여 놓은 기물들을 모두 빼앗아가고 쇠붙이·가죽·쌀·찹쌀·꿀 등의 물건을 더욱 요구하여 짐바리가 날로 늘어나 지금 이미 5백여 바리나 됩니다. 아울러 역마를 빼앗아간 수효도 대동역(大同驛)의 말이 6필, 어천역(魚川驛)의 말이 1필, 황해도의 역마가 2필이나 됩니다. 또 정명수(鄭命守)는 동지부사(同知府事)의 고신첩(告身帖)을 얻은 까닭으로 자못 기뻐하는 빛이 있으나, 김돌시(金乭屎)는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함경도 홍원(洪原)·함흥(咸興) 등지에 충해가 들었다.
7월 21일 병자
심기원(沈器遠)을 향리로 내려가도록 명하였다.
어영청(御營廳) 아뢰기를,
"본청의 군병에 대하여 난리를 치른 뒤의 유고자를 조사하여 제외하고 나니 현재 남아 있는 실제 수효는 5천 4백 23인이며, 정축년 이후의 출신(出身)·봉족(奉足)·승호(陞號) 및 자원자가 모두 7백 62인이며, 체찰부(體察府)의 아병(牙兵)037) 으로 본청에 이속(移屬)된 자가 8백 24인으로, 총계 7천 9인인데 그 가운데 출신이 8백 15인입니다. 그런데 근래 번을 세울 때 한 차례에 8백 인으로 정했으니, 그렇다면 1년에 두 차례의 번을 서는 사람은 1천 6백 인이 됩니다. 이 숫자를 가지고 그 번을 서는 기한을 계산하면 7천 인의 군병이 4년에 한 차례씩 돌아가니, 번을 서는 기한이 너무 동떨어지므로 군사 훈련을 시키는 의의가 없습니다. 이제 군병의 수효를 전보다 더 뽑아 금년부터 시작하되, 한 차례의 번군(番軍)을 1천 1백여 인으로 정하면 3년에 한 차례씩 번들게 될 것이니, 이로써 훈련시킴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번드는 기한을 각각 반 달씩 감하여 군량을 공급하기 어려운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7월 22일 정축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와 천진성(天津星) 아래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다음달 10일쯤에 교외에서 관사(觀射)하고자 하니 해조(該曹)에 말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모화관(慕華館)에 전례에 따라서 시험장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진년 관사(觀射) 때에 당상 이상인 무신과 훈련 도감의 장관(將官)은 그 수효가 많지 않았으니 다 입시(入試)하게 해야 할 듯합니다만, 내삼청(內三廳)의 금군, 각 아문의 군관, 한산(閑散) 무사는 그 수효가 매우 많으니 하루 안에 다 시험치르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미리 시재(試才)하여 합격한 뒤에 시험을 치르도록 허락한 것은 분명히 전례가 있으니, 지금의 경우도 이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7월 23일 무인
경기의 광주(廣州)·수원(水原)·부평(富平)·안성(安城)·양천(陽川)·양성(陽城)·금천(衿川)·과천(果川) 등의 고을에 장마가 개지 않아 벼가 손상되었다.
평안도 숙천부(肅川府)에 사는 한 여인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김집(金集)을 우부승지로, 민응협(閔應協)을 장령으로, 윤양(尹瀁)을 지평으로, 유심(柳淰)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최명길이 아뢰기를,
"금년 농사가 비록 한재를 만나기는 했지만 씨앗을 뿌린 곳은 수확을 거의 바랄 수 있었는데, 이제 또 수재로 대부분 손상되었으니 참으로 애가 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농사가 만일 풍년이 든다면 백성들이 거의 살아갈 길이 있을 터인데,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염려스럽기 짝이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경들이 요즈음 처리하는 것들은 무슨 일인가?"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모두 군정(軍政)을 포기한 것이라고 여기고 해마다 가을철 곡식이 익기만 기다렸습니다만, 올가을 농사가 또 이와 같아서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또한 진정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때의 사무는 참으로 잘 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사를 버려두고 하지 않으면서 어찌 진정시킨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믿을 만한 실상이 없는데 부질없이 진정시키기를 힘쓴다면, 인심이 반드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포기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칙사가 떠난 뒤에 유언 비어가 마구 떠돌아 사대부 사이에도 떠도는 말이 있는데, 심지어는 왜인을 청해 오려 한다느니, 또 강도(江都)에 들어가 보전하려 한다느니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강개한 마음에서 나온 말들이지만 또한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재가 없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송 고종(宋高宗)의 중흥은 오로지 인재에 힘입은 것이었다.038) 감사와 병사(兵使)를 모름지기 적합한 사람을 얻어 맡긴 뒤에라야 큰일을 할 수가 있는데, 항상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다. 일찍이 선조조(宣祖朝)에는 상신 노수신(盧守愼)이 권율(權慄)·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여 장수로 삼았는데, 이 또한 사람을 알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인재는 반드시 정규 관원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니 한신(韓信)에게서 또한 볼 수 있다. 만일 재지와 용모가 영리한 것으로 취할 뿐이라면 반드시 저처럼 큰일을 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지금은 오로지 이력으로 사람을 쓰기 때문에 적합한 사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수에 합당한 사람으로 재능도 있고 성의도 있다면 적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변사기(邊士紀)가 쓸 만한 사람인 듯합니다. 일찍이 듣건대 토산(兎山)의 싸움에서 자못 공효가 있었다 하니 범상한 부류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또 근래 당상 가운데 재능이 있는 자로 7, 8인이 있는데, 마침내는 반드시 판서도 되고 정승도 될 것입니다. 내직에 들어와 묘당(廟堂)의 계책을 돕게 하느냐 외직으로 나가서 외방 진영을 안찰(按察)하게 하느냐는 오직 상께서 부리시는 바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은 또 조계원(趙啓遠)을 쓸 만하다고 여깁니다만,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감히 쉽게 상달하지 못하겠습니다. 조계원은 가는 곳마다 모두 백성의 원망이 있으니 참 알 수 없습니다. 큰 고을의 수령으로 임용하여 그를 살펴보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망을 초래한 연유를 살펴보면 그가 한 일의 시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관원은 세 유형이 있는데 본래 재능이 없는 자와, 일을 벌이지 않아서 명예를 얻으려는 자와, 일을 벌여서 원망을 초래하는 자이다. 또 경이 말하는 7, 8인은 누구누구인가?"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김세렴·이경의(李景義)·이후원(李厚源)·임담(林墰)·목성선(睦性善)·정태화(鄭太和)·이명한(李明漢)·이기조(李基祚) 등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명한은 문장에 능한 사람이다. 그 가운데 또 문장에 능한 사람이 있는가?"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문장이라면 이식(李植)이 으뜸인데 이명한도 진실로 문장에 능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한은 사람 됨됨이가 자못 세상일에 어두운 듯하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평안도 관찰사를 어찌 매번 한 사람에게만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 대임에 정태화나 구봉서(具鳳瑞)가 적합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봉서는 경솔하고 침착성이 적은 듯하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관무재(觀武才)를 급급히 하여 원근의 의심을 초래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가 조금 길어진 때에 거행하려고 막 분부해 놓았다. 경의 말에 과연 깊은 생각이 담겨 있으니 거행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7월 24일 기묘
유성이 이궁성(離宮星) 위에서 나와 우림성(羽林星) 아래로 들어갔다.
전라도에 큰바람이 불고 큰물이 져서 인가가 떠내려 갔다.
충청도에 큰물이 졌다.
헌부가 아뢰기를,
"삼남(三南)의 백성들이 다행히 병화(兵火)를 벗어나 국가의 재정을 오로지 이에 의지하고 있는데, 온갖 역(役)이 다 모여서 장차 명을 감당하지 못할 형편이니, 진실로 어루만져 안정시키면서 약간의 은혜라도 보여야 됩니다.
지금 들으니, 순검사(巡檢使)가 세 종사관(從事官)을 거느리고 나가 순검한다고 하는데, 수군의 정리는 각각 해당 부서가 있으며 순찰사와 통제사도 수시로 합조(合操)039) 하여 근만(勤慢)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만일 본도의 관원들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본다고 여겨서 두려워하도록 하는 조치를 행하려 하는 것이라면, 별도로 중신을 보내어 한번 순검(巡檢)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어찌 해마다 파견하면서 연례의 정식(定式)처럼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물며 대관을 접대하는 데에는 체면이 있는 법이어서, 음식과 거마(車馬)의 제공 및 맞이하고 보내는 데 따른 폐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소식이 전달되는 곳마다 원근이 떠들썩하여 기일에 앞서 모이면서 여러 달 생업을 폐지하게 됩니다.
한번 점열(點閱)하는 것은 착실하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없으며 그에 따른 백성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순검사를 보내지 말고 불시에 어사를 보내거나 종사관을 보내어, 경계 신칙하는 소지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순검사가 가는 것은 도움이 없지 않다. 잘 생각해 보아 번거롭게 다시 논하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5일 경진
이시매(李時楳)를 헌납으로, 한형길(韓亨吉)을 병조 참의로, 윤겸선(尹兼善)을 판결사(判決事)로 삼았다.
형길과 겸선은 모두 형벌을 엄혹하게 쓰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한 사람은 기성(騎省)040) 에 들어가고 한 사람은 송관(訟官)의 장(長)이 되었으니, 대개 상의 생각은 이 두 사람이 원망을 받으면서도 직무를 다하였다고 여긴 것이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박황(朴潢)에게 이르기를,
"경은 순검(巡檢)을 어느 날 떠나려 하는가?"
하니, 박황이 아뢰기를,
"속히 떠나려 합니다만, 대간의 논의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 중이어서 감히 떠날 것을 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병에게 포목을 거두는 일에 관해서는 조정에서 모두 그 폐단을 말하면서 척수(尺數)를 줄이기를 청하나, 수군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듯이 방치하고 있으니, 어찌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박황이 아뢰기를,
"신은 평소에도 군사들 가운데 편파적으로 고생하는 부류가 있음을 항상 말해 왔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사람마다 모두 포목을 내서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를 원정하여 토벌하는 일은 진실로 감히 바라지 않으나, 보장(保障)도 믿을 만한 곳이 없으니, 어찌 염려스럽지 않겠는가. 근일 묘당은 무슨 일을 조처하고 있는가?"
하니, 박황이 아뢰기를,
"묘당의 계책은 모두 ‘형세를 관망한다.[觀勢]’는 두 글자로 세월을 보내는 소지로 삼고 있는데, 참으로 답답합니다."
하였다.
7월 26일 신사
전에 경연관 이상형(李尙馨)·유심(柳淰) 등이 아뢰기를,
"근래에 군국(軍國)의 일 및 경연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두 조보(朝報)에 내지 못하게 한 것은 그 의도가 있겠습니다만, 양사(兩司)의 관원도 따라서 알지 못하게 되어 일의 체모가 온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후일의 폐단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주서(注書)로 하여금 비밀히 써서 보내게 하거나 아니면 초책(草冊)을 봉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는 묘당의 시조(施措)가 평시와 약간 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인이 ‘중요한 일은 은밀하게 하지 않으면 해가 생긴다.’고 한 것은 아마도 이유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만일 비밀 문서를 양사(兩司)에 써서 보내게 한다면 비밀로 하는 의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초책(草冊)을 봉해 보내는 일에 이르러서는, 예전부터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창시하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7일 임오
반송사(伴送使) 이경증(李景曾)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비국의 별지(別紙)에 따라서 의주에 당도하여 마사(馬使)041) 에게 묻기를 ‘저번에 국왕이 접견할 때 군사 원조에 관한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의 군병은 결코 아침에 명령을 내려 저녁에 출발시키기는 어렵다. 모름지기 군사 출동 시기를 미리 알아야 조발(調發)할 수 있다.’ 하였더니, 세 사신이 서로 의논하여 답하기를 ‘벌써 가을이 되어 기온이 써늘하니 바로 용병(用兵)할 때이다. 속히 조발하여 정돈해 놓고서 기다려라.’ 하였습니다. 신이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전마(戰馬)가 없어 기병(騎兵)은 얻기 어려우며 군사 수효가 얼마인지 미리 알아야 조발할 수 있다.’ 하였더니, 마사(馬使)가 발끈 성내어 말하기를 ‘기병을 얻기 어렵다는 말을 어찌 감히 입에 담는가. 그리고 군사 수효도 어찌 감히 그렇게 가벼이 묻는가.’ 하였습니다. 마사(馬使)가 또 신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왜차(倭差)가 중국의 명을 듣고 장차 조선에 나오려 한다고 들었는데, 소식이 있거든 모두 바로 심양으로 통보하라.’ 하였습니다."
비국이 면포 80동(同)과 목화 1천 5백여 근을 함경남·북도에 보내어서 두 병사(兵使)로 하여금 군병들에게 나누어 주어 겨울옷을 갖추도록 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아뢴 대로 하라. 그냥 나누어 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할 듯하니, 각진(各鎭)의 군병들을 시재(試才)하여 나누어 주되 그 가운데 아주 빈한한 자는 비록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주도록 하라."
7월 28일 계미
유성이 등사성(騰蛇星) 위에서 나와 규성(奎星) 아래로 들어갔다.
삼전도 비(三田渡碑)의 비문을 탁본하여 청국에 보냈다.
7월 29일 갑신
상이 하교하기를,
"청국에 사신가는 내관(內官)은 늘 세자의 관소(館所)에 문안하는 중사(中使)와는 차이가 있으니 노자로 하사하는 물품을 외조(外朝) 문안사(問安使)의 예대로 마련해서 지급하도록 하라."
하니, 간원이 아뢰기를,
"내관이 사신의 임무를 맡는 것은 조정 신하와 자연 구별이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전례를 열어 놓으면 나중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외신(外臣)의 예대로 행장을 차리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작질(爵秩)과 노고는 피차 다를 것이 없는데 하사하는 물품은 현격하게 다르니, 예전의 규례가 실로 공평하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7월 30일 을유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의 원주(原州) 등의 고을에 큰바람이 불고 큰물이 졌다.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의성(平義成)이 차왜(差倭) 평지련(平智連)·등지승(藤智繩) 등을 보내어 서계(書契)를 전해오고, 이어서 말하였다.
"지난 을해년에 조흥(調興)·현방(玄方) 등이 죄를 입어 유배된 뒤로 크고 작은 일을 대군에게 숨길 수가 없으므로, 조흥·현방 등의 도서(圖書)042) 와 장복(章服)을 모두 되돌려 보낸다."
진하사(進賀使) 우의정 심열(沈悅)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심양에 도착하여 방물과 표문(表文)만을 전달하고, 세자의 봉전(封典) 및 환국을 요청하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출발합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39권, 인조 17년 1639년 9월 (0) | 2026.01.03 |
|---|---|
| 인조실록39권, 인조 17년 1639년 8월 (0) | 2026.01.03 |
|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6월 (0) | 2026.01.03 |
|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5월 (1) | 2026.01.03 |
|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4월 (1) | 202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