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9권, 인조 17년 1639년 8월

싸라리리 2026. 1. 3. 15:28
반응형

8월 1일 병술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치계하기를,
"도내의 농사가 7월 이후로부터 자못 풍년들 조짐이 있으니, 앞으로 재해에 손상만 입지 않는다면 풍년이 들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제도(諸道)가 모두 수재가 들었다고 계문하였는데 명웅이 홀로 이렇게 치계하자, 본도의 사람들이 대부분 원망하고 욕했다.

 

8월 2일 정해

상이 사직 대제(社稷大祭)를 거행하려 했는데, 예조가, 가을 장마가 들어 비가 그칠 희망이 전혀 없어서 직접 지내기 어려운 상황이니 대신을 보내어 섭행(攝行)하도록 청하고, 또 아뢰기를,
"가을 장마가 이미 오래되어 벼가 손상되고 있으니, 사문(四門)에 영제(禜祭)를 지내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충청도 평택(平澤) 등 25개 고을에 큰물이 져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었다.

 

8월 3일 무자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 조정에서 경차관(敬差官)을 보낸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관례에 따라 복심(覆審)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외부의 의논을 듣건대, 병화(兵火) 이후에 기전(畿甸)의 탕잔이 가장 심한데 양전(量田)하는 일을 오늘날 다시 거행하자, 모든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들면서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사목(事目)을 가져다 보니, 이름은 복심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양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경기 백성이 사신의 행차를 갓 겪어서 주리고 곤고한 정상은 차마 말하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가뭄의 뒤끝에 수재가 잇따라서 논에 모래가 뒤덮여 온갖 곡식이 썩어서 추수할 가망이 이미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양전한다는 것은 비록 은결(隱結)을 많이 얻는다 하더라도 민심을 크게 잃을 것입니다. 경기에 경차관을 보내라는 명을 중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정축년 이후로 경기에는 근거할 만한 전안(田案)이 없고, 오직 농부들의 고장(告狀)만을 쓰고 있어 전결이 대부분 누락되어 있습니다. 금년에 비록 수재가 들었다고는 하나 만일 정도를 따져본다면 재해를 입은 곳이 적고 재해를 입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막중한 전정(田政)을 그들이 소요할까 꺼려서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면, 경기 일도는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의 복심은, 다만 본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를 살펴서 누락되는 전결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관하는 사람이 없이 일체 수령이 하는 대로 맡겨 버린다면 허술하게 될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비록 큰 난리를 겪은 뒤라 하더라도 지금 이 전정(田政)이 한번 정돈된 뒤에는 저절로 안정될 것이니, 비록 백성들의 말썽이 있다 하더라도 몇 달 안 가서 그칠 것이라 여깁니다. 다만 현재의 이러한 논의는 양사만 그렇게 주장할 뿐만 아니라 실로 조정에 있는 관원들이 똑같이 말하는 것이니, 성상께서 재량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그 뒤에 양사가 논쟁하여 마지않으니, 그제서야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지금부터 비국 당상과 빈청에서 회좌한 일 및 인견한 일을 모두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8월 4일 기축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이므로 군국(軍國)의 대사를 모르는 바가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런 비국의 공사(公事)를 감히 알지 못하게 하고 심상한 일도 비밀로 처리해 버리니, 인심이 이 때문에 두려워하고 거짓말이 이 때문에 성행합니다. 이는 후일의 폐단이 염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아무 문제가 없는 가운데 문제를 일으키는 단서가 반드시 이에서 말미암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국의 당상을 인견할 때에 반드시 삼사(三司)의 장관을 입시하도록 한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인데, 근래에는 역시 폐지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묘당이 실책을 범했는데 성상께서 지나쳐 버리신다면, 사기(事機)가 이미 잘못된 뒤에 누가 바로잡겠습니까. 청컨대, 비국을 인견하실 때에 특별히 삼사가 전례에 따라 입시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5일 경인

태백이 나타났다.

 

8월 6일 신묘

태백이 나타났다.

 

이명한(李明漢)을 도승지로, 원두표(元斗杓)를 전라 감사로, 이시영(李時英)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상이 양화당(養和堂)에 거둥하여 이형익(李馨益)에게 침을 맞았다.

 

정명수(鄭命壽)가 정주(定州)의 관노(官奴) 봉영운(奉永雲)을 본도의 수령으로 삼기를 청하므로 조정에서 그 말을 들어주었는데, 봉영운이 서장(書狀)을 올려 말하기를,
"저는 천한 노예로 공로도 없는데다가 바야흐로 어미의 상중에 있는데, 정명수의 처족(妻族)이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관인(官印)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청을 달갑게 여겨 어미의 상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민망합니다. 직첩(職牒)을 거두어 주소서."
하고, 끝내 임소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누차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분수를 이유로 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8월 8일 계사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증산 현령(甑山縣令) 김수인(金壽仁), 풍천 부사(豊川府使) 이극화(李克華)를 잡아들이도록 명하였는데, 암행 어사 유영·홍무적(洪茂績) 등이 탐욕한 정상을 아뢰었기 때문이다.

 

충청도에 큰물이 져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었다. 상이 휼전(恤典)을 거행하고 모래가 뒤덮은 곳에 급진(給陳)하도록 명하였다.

 

8월 9일 갑오

태백성이 나타났다.

 

영의정 최명길, 참판 이경증(李景曾)에게 숙마(熟馬) 1필씩을 하사하였는데, 칙사(勅使)가 왔을 때 주선한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8월 10일 을미

유성이 군정성(軍井星) 아래에서 나와 천원성(天園星) 위로 들어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모든 능(陵)의 정자각(丁字閣)은 일정한 제도가 있기 때문에, 영릉(英陵)043)  의 정자각이 건원릉(健元陵)044)  의 제도와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신유년045)  에 개조할 때 좌우의 협실(夾室)과 앞뒤를 1간씩 더 늘려 다른 능보다 3간을 더 만들어 조종조의 제도와 다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마침 개조하려 하니 재량하여 줄여야 하는데,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조종조의 능침(陵寢)은 정해진 제도가 있는데, 영릉의 정자각만은 예전 제도를 어겼다. 지금 개조하는 날을 만났는데, 이미 그 잘못된 점을 깨달았으니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옳지 않다. 건원릉의 제도를 따라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따랐다.

 

이명한을 병을 이유로 체직하고, 이기조(李基祚)를 대신 도승지로 삼았다.

 

비국이 사은사가 갈 적에 왜의 서계(書契) 원본을 보내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1일 병신

유성이 등사성(騰蛇星) 아래에서 나와 천진성(天津星) 아래로 들어갔고, 또 천애성(天哀星) 위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8월 12일 정유

태백이 나타났다.

 

이전에 영릉(英陵)의 정자각에 불이 났는데, 상이 수호군(守護軍)이 변을 일으켰다고 여겨, 중건할 때에 경기의 백성을 쓰지 말고 다만 수호군으로 하여금 그 역사를 담당하도록 하고 예조 참의 홍득일(洪得一)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자 수호군들이 원망하여 마지않다가 그 이튿날 새벽에 득일에게 몰래 언문(諺文)으로 투서하기를 "수호군 최경남(崔敬男)이 수악(首惡)이고 박응계(朴應戒)가 그 다음입니다." 하였는데, 득일이 이 사실을 계문하였다. 의금부에서 삼성(三省)을 베풀어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최경남이 지레 죽었다. 양사에서 "익명서(匿名書)로 옥사를 구성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나니,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다시 조사하소서." 하였다. 이에 경차관 심택(沈澤)이 수호군과 여주(驪州) 고을 사람들을 추문(推問)하니, 모두 "최경남·박응계 두 도적이 재랑(齋郞)에게 죄를 얻었는데, 그 앙갚음으로 변을 낸 것이 틀림없다." 하였다. 상이 응계를 엄히 형추(刑推)하도록 하였으나, 응계가 끝내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변방 원지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홍득일이 처음 계문했을 때 정원이 아뢰기를, "익명서를 전하지 않는 것은 그 법이 매우 엄하고, 곧바로 불태워버린다는 근래의 규례가 이미 있습니다. 그런데 홍득일은 계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였고, 양사가 파직하기를 청하여 누차 계를 올렸는데, 그제야 따랐다.

 

8월 13일 무술

이전에 특진관 이시백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영장(營將)이 긴요치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진달하였거니와, 진관(鎭管) 수령은 반드시 문·음·무관 가운데 전쟁에 나가서 직접 군병을 거느려 본 경험이 있는 자로 가려 보낸다면 매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이미 영장 제도를 없애 놓고 또 진관의 사목도 신명(申明)하지 않으시니 되겠습니까."
하니, 비국에 말하라고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앞으로는 진관 수령을 차출할 때에는 더욱 잘 전형(銓衡)하여 뽑되, 문·무·음관을 따지지 말며 작질(爵秩)의 고하에도 구애하지 말고 오직 재능만을 따져서, 기어이 효과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유심(柳淰)을 이조 좌랑으로, 정광경(鄭廣敬)을 동지경연(同知經筵)으로 삼았다.

 

8월 15일 경자

우의정 심열(沈悅)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사명을 봉행하고 돌아오자마자 병이 들어 성 밖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묘당의 논의를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심양에 있을 때에 이미 금년에 또 서쪽으로 중국을 침범하려는 계책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우리 국경에 당도하여 칙사가 군사 징발에 관한 일로 말했다는 것을 또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그들이 반드시 그만두지 아니할텐데, 우리 나라에서 조발(調發)할 준비를 한다는 소식은 아직도 깜깜하여 신은 나름대로 걱정했습니다.
반송사(伴送使)가 의주에 이르러서 마장(馬將)에게 군사 출동 시기를 물으니, 마장(馬將)이 다만 속히 조발하라고 말하였을 뿐이고, 군사 출동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 비록 다시 물어본다 하더라도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일 군사 출동 시기를 정확히 알고 나서 군사를 조발한다면 아마도 기일에 미치지 못할 근심이 있을 듯한데, 지난해에는 비록 기일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핑계를 댈 수가 있었지만, 금년에 또 기한에 미치지 못한다면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근심이 있을 것이니, 염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되 마치 아침에 영을 내려 저녁에 출발하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 다행히 기한이 연기된다면 진실로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 갑자기 칙령(勅令)을 내려 출동을 독촉하는 일이 있으면 뒤늦게 이르렀다는 견책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올 때에 임경업(林慶業)과 민성휘(閔聖徽)의 말을 들으니 ‘지난해에 조발된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는데, 그들은 조만간에 이러한 역(役)이 또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알고 있었으니, 오직 미리 알리어 행장을 꾸리게 해야 된다.’ 하였습니다. 임경업이 또 말하기를 ‘마군(馬軍)을 징발하라는 요청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다. 우리 나라에 전마(戰馬)가 없다는 상황은 저들도 알고 있다. 군병 원수(元數) 안에 약간을 마군으로 이름하여 조발에 응하되 느린 말을 태워 보내서, 그들이 부리는 대로 맡겨 버리면 된다. 싸움에 합당하든 합당하지 않든 우리가 근심할 바가 아니다.’ 하였는데, 그의 말이 쉬운 처리 방법인 듯합니다. 마군에 관한 일은 본도의 감사와 병사(兵使)에게 다시 물어 좋은 방도대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군사 수효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 이것이 심히 염려됩니다. 그러나 우선 지난해의 수효에 의거하여 조금 더 여유있게 뽑아 놓고, 그때 가서 가감(加減)하는 것이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관서와 해서의 백성들만 편파적으로 징발의 고통을 입고 있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민망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삼도(下三道)는 길이 멀어서 사세가 불편하기 때문에 비록 군사를 뽑을 수 없다 하더라도, 함경남도는 관서와 경계가 접해 있으며 현재 방수(防守)하는 일도 없습니다. 다 같은 국가의 백성인데 서북 지방 사람만 고생하여 타도의 수월한 사람들과는 천지 차이가 나니, 아마도 평등하게 대우하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남도(南道)의 군사 1천 명도 역시 조발해 놓아,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수효가 많지 않으면 관서와 해서에서 이미 조발한 군사만을 보내고 많으면 남도의 군사를 보태도록 하는 대비책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군사 원조에 관한 말은 칙사가 사적으로 말한 것일 뿐이고 애당초 황제의 칙령이 아닙니다. 앞으로 만일 명백한 분부가 있다 하더라도 관서와 해서에 이미 군장을 차린 군사가 있으니 조발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관서와 해서의 감사와 병사에게는 이 뜻을 미리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병(馬兵)에 관한 임경업의 말은 견해가 없지 않고, 군사 징집이 만일 5천 명을 초과하면 조발을 모름지기 남도에서 먼저 해야 하는데, 모두 형세를 보아 처리해야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이 심양에 갔을 때에 청나라가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지 않았는데, 나의 생각으로 헤아려 보건대 그들이 우리 군사를 쓰는 일은 당장에 있지는 않을 듯하다. 따라서 금년에 조발을 요구하지 않을 것 같다면 어찌 꼭 미리 말하여 민간의 소요를 초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임경업이 치계하였다.
"신이, 의주 사람 최효일(崔孝一)이 배를 타고 도망하여 서해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곧 군관을 보내어 그의 향리를 사문(査問)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효일은 지금까지 별로 지은 죄도 없는데 남녀 19인과 당을 지어 도망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8월 16일 신축

비국이 아뢰기를,
"상께서 옥체가 편치 못하신 지 오래되어 온 나라가 허둥지둥하는데, 하물며 동궁(東宮)과 대군(大君)이 이역에 머물러 계시니, 인정과 사리상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일을 심양에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이미 침을 맞은데다가 이어서 저주하는 변고까지 있었으니, 청국에서 이 사실을 듣고는 반드시 마음이 움직일 것이고 보면, 귀근을 허락할 가망성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유달(柳達)이 침술(針術)로 청나라에서 신임을 받고 있는데, 이제 다른 의원으로 교체하고 속히 불러올 것 같으면, 귀근을 허락케 하는 데 일조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성상의 병환이 차도가 일정하지 않으시니 약방(藥房)에 내리는 비답을 조보(朝報)에 내어 원근에 보이는 한편 참작해 비답을 내림으로써 청국으로 하여금 그 허실(虛實)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도 혹 하나의 계책이겠습니다."
하니, 계사대로 시행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최효일이 도망한 뒤로 한선(漢船)이 잇따라 출몰하여 일의 자취가 수상한데, 사은사의 행차가 마침 이때와 겹치니, 이 사실을 용골대(龍骨大)·마부달(馬夫達)에게 은밀히 말하는 것이 아마도 성의와 믿음으로 서로 교제하는 도리에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숨길 만한 일이 아니니, 은밀히 말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임담(林墰)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8월 18일 계묘

상이 침을 맞으려 하였는데,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이형익(李馨益)·반충익(潘忠翼) 등으로 하여금 혈색을 살펴보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형익에게 이르기를,
"저번날 침을 맞은 혈수(穴數)가 적은 듯하다."
하니, 형익이 아뢰기를,
"지금 하교를 받고 보니, 감히 진달하겠습니다마는, 신이 침술을 제 소신껏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아마도 효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충익이 아뢰기를,
"오늘 안색을 살펴 보니 사수(邪祟)의 기운이 있는 듯합니다. 이는 형익이 참작하여 치료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침을 놓게 하면서 침술을 다 발휘하지 못하게 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살펴보건대, 반충익은 음성(陰城)의 촌의(村醫)이다. 이형익과 서로 수작하여 날마다 요사스러운 말을 올려 주상의 의혹을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대체로 제왕(帝王)이 병에 걸리는 것은 기욕(嗜欲)을 절제하지 못한 데에서 연유하는데, 오직 약을 가까이하며 심성(心性)을 수양하여 원기를 점차 완전해지게 하고 영위(榮衛)046)  를 충실하게 한다면, 저절로 치료가 되는 경사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질(邪疾)이라고 하면서 요괴(妖怪)한 무리들을 널리 불러와 망령되이 번침(燔鍼)을 놓게 한단 말인가. 가령 만일 사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스리는 방도는 마땅히 정도로 해야 할 것이지, 어찌 사술(邪術)로 사수를 다스리게 하면서 능히 그 효험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일반 신하들이 마음속으로 은근히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대신과 대간도 감히 한 마디도 말을 하여 구제하지 못했으니, 어찌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8월 19일 갑진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치계하였다.
"신이 산성의 형세를 가서 살펴 보았더니, 대개 공산(公山)·독음(禿音) 두 성은 민정(民情)도 모두 축조하기를 원하는데, 그 의견들이 일리가 있습니다. 이 두 성 및 어류성(御留城) 등처에 몇 년을 기한으로 하여 차례로 수축하면, 다른날 기각지세를 취하는 데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성 축조가 최우선인데, 산성은 일찍 추워지니 역사를 더욱 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어느 성을 먼저 축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묘당으로 하여금 조속히 지휘하게 하소서. 그리고 가산(架山)·공산·독음산을 모두 도형으로 그려 올립니다."

 

8월 20일 을사

헌부가 아뢰기를,
"자산 군수(慈山郡守) 이준(李浚)은 일찍이 병자년의 난리 때에 영변 부사(寧邊府使)였는데, 외창(外倉)의 곡식을 훔쳐내어 물화(物貨)로 바꾸어 스스로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서로(西路)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자자하게 말을 하는데 지금 본직을 제수하였으니, 물정이 몹시 놀라워합니다. 어찌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여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나국하여 정죄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8월 21일 병오

이전에 호조 판서 이명(李溟)이 아뢰기를,
"양전(量田)한 뒤에 일찍이 서량(西粮)047)  에 관한 수량을 줄이라는 영이 계셨으나, 현재 수응(酬應)할 대책이 없으니, 전대로 거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국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바야흐로 해마다 공미(貢米)하는 일이 있는데, 금년은 각도의 흉황(凶荒)으로 인하여 서로(西路)에 저축해 둔 군량을 옮겨다가 썼습니다. 그런데 이는 계속할 수 있는 방도가 못 되어 명년에는 민간에 분정(分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색목(色目)을 별도로 만든다는 것은 더욱 폐단이 있을 것이니, 계사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례대로 거두는 것은 균평하지 못할 듯하니, 해조로 하여금 참작해 정하여 처음에 가감(加減)토록 했던 의도를 잃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2일 정미

평안 병사(平安兵使) 임경업이 치계하였다.
"근일 한선(漢船)이 연이어 왕래하여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8월 23일 무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전 황주 판관(黃州判官) 정지호(鄭之虎)를 본주(本州)에 정배하였다. 그가 황주 판관의 자리를 꺼려서 회피한 자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8월 24일 기유

태백이 나타났다.

 

8월 25일 경술

태백이 나타났다.

 

8월 27일 임자

태백이 나타났다.

 

8월 28일 계축

헌부가 아뢰기를,
"근일 소명(召命)을 받고도 나아오지 않는 자가 전후로 속출하고 있는데, 그 병의 경중을 비록 알 수는 없으나 분의(分義)로 헤아려 볼 때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궁관(宮官)의 직을 지녀 마땅히 심양에 가야 할 사람에 이르러서도 한 번 파직되어 심양에 가는 것을 모면하니, 장차 어떻게 다른 사람을 깨우치고 후일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조처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필선(弼善) 권임중(權任中)은 파직하지 말고 그대로 청나라에 들여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전후로 명소(命召)에 나아오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조사해내어 중률로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상이 여러 차례 번침(燔鍼)을 맞았는데,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듣건대, 궁중에 저주의 변고가 있다 합니다. 의관(醫官)들이 거처를 옮기시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신하들의 심정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달리 옮길 만한 곳이 없고 이미 소제하였으니,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도승지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거처를 옮기시는 일을 상께서 폐단이 있다고 여기시나, 신하들은 모두 매우 답답하게 여깁니다. 잠시 옮기시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형익(李馨益)도 말하려 하자, 명길이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는 조정의 논의에 관계되는데, 네가 어찌 감히 나선단 말인가."
하니, 형익이 아무 말 못하고 물러갔다.

 

8월 29일 갑인

빈청(賓廳)의 대신과 육경(六卿)이 아뢰기를,
"듣건대, 대내(大內)에 저주의 변고가 있어 침소 가까운 땅에서 사특하고 더러운 물건을 찾아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하니, 신들은 지금도 놀라움이 뼈에 사무쳐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보우하사 일이 발각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종사와 신민의 복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아직도 의심이 없지 않은 것은, 흉특한 자들이 궁궐 가까이 있으면서 그 모의를 꾀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더러운 물건을 묻어 놓은 곳이 필시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찌 더러운 물건을 이미 소제하였다 하여 그대로 이 궁궐에 계실 수 있겠습니까. 즉시 다른 곳으로 옮기시고 다시 수색해서 남은 물건이 없게 하여 궁궐 안에 있는 더러운 기운이 말끔히 없어지게 하소서. 그런 뒤에 돌아와 계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른바 더러운 물건은 이미 다 수색해 내었으니 비록 옮기지 않더라도 저절로 회복될 것이다."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비답을 받았는데, 신들의 의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근래로 경외(京外)의 인가에 이런 변고를 만난 자가 매우 많은데, 다 찾아내었거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를 따지지 않고 으레 모두 나가 피합니다. 이는 대개 더러운 기운이 뜰과 문 사이에 붙어 있어서 그것이 스며들어 빌미가 되므로, 만일 깨끗한 곳으로 옮겨 피하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장부(臟腑)와 혈기는 신분 고하에 상관이 없는데, 게다가 상께서는 바야흐로 침을 맞고 약을 드시는 중이니 병환을 근신하는 데 모든 방도를 다 강구해야 하는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들이 지금 청하는 일은, 진실로 입술을 태우며 성의를 다하여, 기어이 거처를 옮기게 한 뒤에야 그만두어야 되며, 성상께서 어렵게 여기신다 하여 묵묵히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거로움을 피하지 아니하고 다시 신하들의 심정을 아뢰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뜻을 이미 일렀으니 경들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삼공이 아뢰기를,
"저주하는 일이 대궐 안에서 발생하였으니 이는 막대한 변고입니다. 만일 범인을 찾아내어 그 죄를 분명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후환이 염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떻게 신인(神人)의 분을 풀고 악역(惡逆)을 징계하겠습니까. 의심스러운 사람을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엄히 국문해서 실정을 캐내어 국법을 뚜렷이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