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을묘
태백이 나타났다.
양사가 이어(移御)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빈청(賓廳)의 2품 이상이 아뢰기를,
"이번에 이어할 것을 계청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어소가 불편하다 하여 그만둘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근래의 예를 들어 보건대 창덕궁(昌德宮)에 잠시 이어하셨던 곳이 있고 여러 왕자(王子)나 부마(駙馬)의 집에도 임시로 계실 만한 곳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참작해서 하교하시어 즉시 수리한 다음 날짜를 잡아 이어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창덕궁은 집이 지금 매우 협소하고 궁가는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도 몹시 편치 못하니, 이 궁궐에 그대로 있는 것이 제일 편하겠다."
하였다. 세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2일 병진
밤에 번개가 번쩍였다.
의금부에 추국청을 설치하여 저주한 죄인을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내인(內人) 기옥(己玉)이 공초(供招)하기를,
"본래 영창 대군(永昌大君) 집의 내인으로 계해년 5월에 비로소 궐내에 들어왔는데, 자전(慈殿)께서 승하하시어 반혼제(返魂祭)를 지낸 뒤 궐 밖으로 나갔다가 그 해 겨울에 다시 궐내로 들어왔습니다. 상께서 어소를 옮기신 뒤로 색장(色掌)으로 차정되어 망극한 상의 신임을 받고 마음을 다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8월 20일 침(鍼)을 맞으실 때에 색장으로서 궐내에서 금훤(禁喧)하고 있었는데, 밥을 짓는 궁인이 학질을 앓고 있어 밥을 짓지 못하였으므로 해가 저물도록 밥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김 상궁(金尙宮)이 직접 궁인들을 불러 무녀(巫女)를 데리고 화단을 파고 있었는데, 김 상궁이 ‘너는 밥을 먹지 못했느냐?’고 묻기에 ‘못 먹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기운이 너무도 떨어져 안색이 붉어지고 땀을 흘렸는데 ‘며칠째 밥을 굶어 기색이 이상하였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23일 밤에 칠성제(七星祭)를 지내기 위해 제물(祭物)을 마련할 적에는 입번(入番) 중이던 색장 정숙(貞淑)과 함께 주방에서 음식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신 상궁(申尙宮)과 이 상궁(李尙宮)이 함께 감독하고 있었는데, 신 상궁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 중에 정결하지 못한 자는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하였으나, 신은 별로 정결치 못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차리고 있었습니다. 신 상궁이 또 ‘저 색장은 부르지 말아야 하는데 어째서 여기에 와 있느냐?’고 하였으나, 드러내 놓고 말하지도 않았으므로 그대로 남아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튿날 파지(巴只)와 흔개(欣介)가 말하기를 ‘무수리[水賜] 예금(禮今)의 말을 듣건대 신 상궁이 그에게 우리를 부르지 말게 했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 또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매우 들뜬 기색들이었습니다. 흔개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상전(上殿)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부르지 않으려고 한 것인가? 듣기에 놀랍다.’ 하고는 이때부터 음식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날 여러 궁인들이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파낼 때에 혼자 부름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이로 인해 더욱 걱정되어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신은 신의 일을 한 것 이외에는 교류한 사실이 없는데, 어찌 사주한 흉인(凶人)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24일 질그릇에서 나온 흰 가루에 대해서는, 그날 신이 출번(出番)이었기 때문에 흔개와 함께 출번하는 이들이 묵는 방에서 자고 해가 뜬 뒤에 세답방(洗踏房)으로 흔개와 같이 갔었습니다. 이 사실은 침실의 내인과 세답방의 하인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내시(內侍)가 기록해 놓은 별지(別紙) 2통을 보건대, 발견된 저주한 물건이 시어소(時御所)에 14곳, 동궁(東宮)에 12곳, 인경궁(仁慶宮)에 26곳, 경덕궁(慶德宮)에 4곳이나 됩니다. 예로부터 궁액(宮掖)들이 벌이는 무고(巫蠱)의 변고가 지금처럼 참혹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또 한두 해에 걸쳐 이루어진 일도 아닐 것입니다.
빈 궁궐에서 일어난 변고는 비록 시어소의 내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나,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반드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의 소행일 것입니다. 틀림없이 매우 사특한 사람이 대궐 안에 숨어서 안팎으로 교류하면서 그 무리들을 지휘하고 사주하여 흉역한 계획을 이루려고 한 일일 것이니, 어찌 신분이 낮은 하천배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가까이 모시고 있는 자들 중에서 이처럼 흉악하고 참혹한 계획이 있었으니, 지금 비록 저주한 일이 발각되었지만 후일에 지금보다 더 심한 화(禍)가 있지 않으리라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을 의심할 수도 없고 또 별달리 적발된 단서가 없으니, 이 일을 대처하는 방법이 정녕 쉽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지금 이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묻은 곳이 대부분 굴뚝과 연통 및 계단 사이에 있어 외부 사람들의 발길이 미칠 수 없는 곳이니, 이는 반드시 청소나 군불을 담당한 무리들의 소행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들을 지휘한 사람은 이 무리들 중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대내(大內)에서 숙직하거나 복역하는 무리들이 그 모의에 다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남들과 연락을 취하는 수상한 행적은 함께 있던 사람이라면 알지 못했을 리가 없을 것이니, 흉역을 행한 자의 죄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수상함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자 또한 사죄(死罪)에 해당됩니다. 이들을 아울러 신문(訊問)하는 것이 오늘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체제에 합당할 것입니다. 양궐(兩闕)에서 그동안 수직하였던 내관들도 아울러 나국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궐이 비어 불을 지핀 사실이 없는데 굴뚝에 묻어둔 저주물이 모두 불에 타버린 것을 보면, 오래 전에 묻었던 것임을 대략 알 수 있다. 각해[各年]마다 수직하던 내관은 그 숫자가 극히 많으니 모두 나국하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이다. 내인 중에 의심스러운 자를 적어서 내리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 후 여러 날 동안 하교가 없으므로 국청이 다시 품하자, 내수사의 옥에 수금되어 있는 시녀 소아(小娥) 및 하인 서향(西香)·춘향(春香) 등을 국청에 내렸다. 소아가 공초하기를,
"기옥(己玉)의 접주인(接主人)으로서 그전부터 가까웠던 것은, 궐내의 규례에 각방(各房)이 모두 서로 의지하는 법이 있기 때문이며, 취반(炊飯)한 일은 다만 규례에 따라 밥을 지어 준 것일 뿐입니다. 기옥과 두 차례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은, 변고가 생긴 이후 기옥이 와서 흉물(凶物)을 많이 얻었다는 소식을 말해 주기에 신이 ‘인경궁과 경덕궁에 그전에 이런 변고가 있었는데, 시어소 대내에도 그런 변고가 있느냐.’고 하여 한번 그의 말을 들었던 것일 뿐입니다.
별로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데리고 있는 비녀(婢女) 옥생(玉生)이 상의 하교로 인하여 여러 상궁(尙宮)들 앞에서 면질(面質)할 때에 신은 방에서 세면을 하고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즉시 나가 보니 벌써 사람들이 옥생을 에워싸고 갔으므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였을 뿐 마주 대해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기옥의 공사(供辭)를 미리 헤아려서 옥생을 시켜 서로 부합되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서향이 공초하기를,
"일찍이 기옥과 함께 대비(大妃)를 모시면서 한 곳에서 일했는데, 대비께서 승하하신 뒤에 신은 궐 밖으로 나가 시집을 갔습니다. 지난해 신의 남편이 전처(前妻)의 아들이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갔기 때문에 그를 속환(贖還)시킬 목적으로 단목(丹木)과 후추 등의 물품을 수매하고 또 바느질을 해주고 대가로 받은 것을 다시 자주(紫紬)로 바꾸기 위하여 여러 차례 글을 통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받는 은자(銀子)를 잃어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기옥으로 하여금 직접 받게 한 적이 있을 뿐 그 밖에는 다른 일이 없습니다."
하고, 춘향이 공초하기를,
"모든 궐내에 있는 사람들은 일이 생기면 서로 돌봐 주고 없는 것을 서로 도와 주게끔 되어 있습니다. 기옥과 서로 가깝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기옥이 비록 흉모(凶謀)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일인데 신에게 말했겠습니까. 신은 동궁(東宮)의 궁인으로서 홀로 빈 동궁을 지키면서 해가 뜨나 달이 뜨나 다만 세자께서 돌아오시기를 축원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세 여인의 공사(供辭)가 이와 같으니, 바로 청형(請刑)을 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신 등이 명을 받들고 옥사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세히 살펴 옥사의 체모에 맞게 하는 것이 그 직분입니다. 신 등의 어리석은 소견을 말씀드린다면 소아의 잘못은 기옥과 두 차례에 걸쳐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는 것인데, 그 말한 내용이 흉물(凶物)을 찾아낸 일을 말한 것에 불과하니, 궁중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 얘기를 서로 주고받지 않았겠습니까.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이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그 사실은 그다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춘향이 기옥과 서로 가까웠던 것은 그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만, 달리 의심이 가는 곳도 없는데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서둘러 형신(刑訊)을 가하는 것은 미안한 일인 듯하기에 우선 수금시켜 놓고 다른 단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향이 기옥과 서로 내통한 사실은 명백한 듯합니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기옥의 족속도 아니면서 사사로이 궐내에 내통한 것이 너무 낭자하였는데, 궁궐의 엄숙하지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더구나 잡물(雜物)을 싸가지고 직접 주고받은 행동이 매우 잦았으니, 이 사람은 우선 형추(刑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의 공초(供招) 내용에 그가 이모자(異母子)라고 말했던 천순(天順)이란 자는 나이가 이미 15세가 되었다고 하니, 이 아이를 아울러 나문(拿問)하여 그의 말이 사실인가를 살펴 보고 난 다음 처치하는 것도 진실을 얻는 방법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런데 소아의 행적은 자세히 살피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국청이 천순을 추문하니, 천순 스스로 나이가 지금 12세라고 말하였으며, 그의 공초는 서향의 공초와 같았는데, 흉예한 물건을 궁중으로 들여 보낸 일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이튿날 국청이 결박을 엄히 지우고 형추할 모습을 보이자, 천순은 두려워 울부짖기만 하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국청이 아뢰기를,
"신 등이 천순을 나문할 것을 계청한 것은 어린아이는 진솔한 만큼 사실을 얻어 낼 수 있는 단서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였기 때문인데, 지금 이와 같습니다. 법전(法典)에 의하면 16세 이상이라야 형추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아이의 나이를 비록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형추를 받을 나이가 안 된 것은 분명합니다. 놓아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내수옥(內需獄)에 수금되어 있는 죄인도 꽤 있다고 들은 듯합니다. 이 옥사는 전에 없던 변고로서 온 나라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으니 모두 외정(外廷)에 맡겨 명백히 처치하는 것이 어찌 옥사의 당연한 체모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같은 죄를 지은 사람들을 두 군데 옥으로 나누어 두고 있으므로 비록 참고하여 물을 내용이 있어도 증명할 수가 없으니, 옥사를 다스리는 방법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일체 잡아다 국문하라고 답하고, 옥생(玉生)·춘개(春介)·차귀현(車貴賢)·중생(重生) 등을 국청에 내렸는데, 귀현은 바로 기옥의 아비이고 중생은 기옥의 남동생이었다. 옥생이 공초하기를,
"8월 10일경부터 기옥이 과연 식음을 폐하고 있었으므로 하문(下問)할 때 사실대로 대답하였는데, 면질(面質)할 때에는 눈물이 떨어져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 밖에 교유(敎誘)한 일은 전연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고, 춘개가 공초하기를,
"수진궁(壽進宮)의 수사비(水賜婢)로서 궐내에 출입하기는 하였으나 기옥에게 여러 물건을 직접 주었다는 것은 실상 헛소문입니다."
하고, 차귀현이 공초하기를,
"기옥에게 흉예한 물건을 원래 구해 준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옥의 의금(衣衾)도 그전과 달리 주단(紬段)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마련해 준 것은 목면금(木綿衾)과 식기 등 물건뿐이었습니다. 기옥은 궐내에 있으면서 항상 의식(衣食) 때문에 외방으로 많이 나다니는데 어떻게 누구와 절친하게 왕래하는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중생은 공초하기를,
"본래 빈천하여 품팔이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내인 서향(西香)이 궐 밖으로 나간 뒤에 고용되어 품삯을 받고 있었는데, 그때 서향이 기옥과 서로 절친하다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기옥이 서향에게서 흉물을 전해 받았다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들이 공초(供招)한 뒤에 국청이 모두에게 형신(刑訊)을 가할 것을 청하였다. 기옥에게 형문(刑問) 6차, 압슬(壓膝) 1차, 낙형(烙刑) 1차를 가하고, 소아에게 형문 6차, 압슬 1차를 가하고, 서향에게 형문 7차, 압슬 1차를 가하고, 차귀현에게 형문 6차를 가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상이 국청에 명하여 옥에 있는 죄인을 의계(議啓)하도록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다스리기 어려운 옥사는 저주에 관한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은밀한 곳에 흉악한 짓을 하는 것이라서 그 자취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이 옥사를 다스리는 자는 의심이 가는 비슷한 형적을 가지고 하는 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정범(正犯)을 잡아 다스린다 해도 그가 실토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서 그 실상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기옥이 제일 의심이 가는데, 소아와 서향도 그와 서로 물건을 주고받은 흔적이 있으니,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전에 없는 변고는 결코 두세 명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가지를 자른다 하더라도 근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상 후일에 헤아릴 수 없는 근심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기옥 등이 지금 자복하지 않고 죽어서 단서를 찾을 수가 없으니 어찌 통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옥에 있는 죄인 4명 중에 춘향은 비록 기옥과 절친한 흔적이 있으나 별로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고, 춘개는 기옥에게 물건을 전해 준 일이 있으나 서향처럼 낭자하지는 않고, 옥생은 세 차례나 말을 바꾸다가 끝내 실토하여 그 정상이 심히 가증스러우나 사람 됨됨이가 못나서 남이 시키는 대로 한 데에 불과할 뿐으로 흉모(凶謀) 같은 것은 이들과 함께 하지 않은 듯하고, 중생은 곧 기옥의 동생이므로 당초 청형(請刑)하는 대상에 들어 있었으나 상께서 특별히 정형(停刑)을 명하셨으니, 아마도 상께서 따로 뜻하시는 바가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이들은 모두 신 등이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춘향·춘개·중생 등은 모두 정배(定配)하고, 옥생은 석방하라."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번에 일어난 저주의 변고는 궁궐 내부에서 발생한 일인 만큼 지극히 엄하고 비밀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내척(內戚) 한두 명이 맹인(盲人) 한충건(韓忠建), 요무(妖巫) 앵무(鸚鵡) 등과 함께 안팎으로 선동하여 흉물을 발굴했는데도 뭇사람들이 모두 헤아리지 못하였다.
9월 3일 정사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규성(奎星) 위에서 나와 위성(胃星) 아래로 들어가고, 정성(井星) 위에서 나와 북하성(北河星) 위로 들어가고, 호성(弧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함경도 암행 어사 정치화(鄭致和)가,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취도(鄭就道)가 형장(刑杖)을 남용하고 관미(官米)를 절취한 죄를 계문(啓聞)하니, 상이 나문(拿問)을 명하였다.
9월 4일 무오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번개가 번쩍였다. 평안도 용강현(龍岡縣)에 크게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렸으며 우박이 섞여 내렸다.
특명으로 이목을 종성 부사로 삼았다. 이목이 자못 청론(淸論)을 가지고 자주 상의 뜻을 거스렸으므로 이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
9월 5일 기미
간원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에서 위급함을 당했던 때에 김자점(金自點)과 심기원(沈器遠)은 모두 사명(司命)을 맡은 사람으로서 수년 동안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는데, 적이 쳐들어 와도 조처하지 않은 채 혹 외진 산속에서 머뭇거리는 등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모른 체함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끝내 차마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군부를 망각하고 국가를 저버린 죄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 상께서 특별히 관전(寬典)을 내려 유배하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방유(放宥)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국사(國事)의 위태로움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군율을 어긴 장수를 이렇게 가벼이 용서해 준다면 어떻게 군율을 진작하고 후인을 경계할 수 있겠습니까. 석방해 시골로 돌아가게 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자점 등이 지금은 비록 죄가 있으나 그전의 공이 적지 않으니, 의당 내 뜻을 몸받아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9월 6일 경신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번개가 번쩍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신다는 명이 신민들이 갈망하던 참에 나왔으니, 참으로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이곳을 보수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하신 뒤에 창경궁(昌慶宮)도 다시 수리하고 소제하여 정결히 해야 환어(還御)하실 수 있으니, 이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호조·병조·공조의 판서와 남양군(南陽君) 홍진도(洪振道)를 수리소 당상(修理所堂上)으로 차정하여 속히 수리하게 하고 이어하실 날짜도 해조로 하여금 미리 가려 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창덕궁은 협소하다. 따라서 내인(內人)들이 그곳에 많이 있게 되면 조관(朝官)들의 출입이 불편할 것이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목은 유자(儒者)의 풍도를 지닌 서생(書生)으로 나이가 70에 가깝습니다. 뜻밖에 지금 본직에 제수한다는 특명이 계시니, 수천 리의 길을 늙은 몸을 끌고 가면 풍상(風霜)에 쓰러져 결코 당도할 수 없을 것이며 또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성상께서 아랫사람을 사랑하시는 마음에 비추어 볼 때 어찌 돌보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으시겠습니까. 환수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목이 본래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으니 북민(北民)으로 하여금 그 은혜를 입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과 우의정 심열(沈悅)도 이 일로 차자를 올렸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7일 신유
번개가 쳤다.
충청 수사 김술(金述)이 치계하였다.
"보령(保寧)의 어부들이 눌이도(訥伊島)에 갔다가 갑자기 적선(賊船)을 만나 배와 의복, 양식 등을 모두 약탈당했는데 어부들을 섬 속에 버려 두고 가서 겨우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 도적들은 모두 청의(靑衣)를 입고 있었는데 작은 모자를 쓰기도 하고 머리를 싸매기도 하였으며 한선(漢船)인지 적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합니다."
9월 8일 임술
번개가 쳤다.
9월 9일 계해
번개가 쳤다. 달이 견우(牽牛)의 남성(南星)을 범하였다. 유성이 옥정성(玉井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남이웅(南以雄)을 대사헌으로, 강대수(姜大遂)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고 통정(通政)을 가자(加資)했다.
9월 11일 을축
유성이 성성(星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9월 12일 병인
심양(瀋陽)의 팔왕(八王)이 은밀히 은자(銀子) 5백 냥을 보내오면서 면포(綿布)·표피(豹皮)·수달피(水獺皮)·청서피(靑鼠皮)·청밀(淸蜜)·백자(栢子) 등의 물품을 무역할 것을 요구하니, 조정이 허락하였다.
9월 13일 정묘
상이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
9월 15일 기사
이경증(李景曾)을 대사간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사간으로, 안시현(安時賢)을 장령으로, 조중려(趙重呂)를 헌납으로, 윤양(尹瀁)을 정언으로 삼았다.
9월 16일 경오
태백이 나타났다. 평안도 평양부의 백성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였다.
"한선(漢船) 1척이 용강현(龍岡縣)에 와서 정박하였기에 통관(通官)을 보내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진 도독(陳都督)의 사인(使人)으로 물화(物貨)를 녹도(鹿島)로 실어 보내는 중이었는데 바람에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다. 이제 북쪽으로 갈 예정이다.’ 하였습니다."
9월 17일 신미
태백이 나타났다.
9월 18일 임신
금성(金星)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다. 유성이 구진성(句陳星) 아래에서 나와 천봉성(天棓星) 위로 들어갔다.
9월 19일 계유
신익량(申翊亮)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9월 20일 갑술
태백이 나타났다.
9월 21일 을해
황해도 재령군(載寧郡)에 우박이 내렸다.
심양(瀋陽)에 있는 배종 재신(陪從宰臣)이 치계하기를,
"황제가 상후(上候)가 불편하시다는 말을 듣고 차관(差官)을 보내 문질(問疾)하려 한다고 용장(龍將)과 마장(馬將)을 보내 알려왔습니다."
하였는데, 접반사 정태화(鄭太和)를 보내 중로에서 만장(滿將)을 맞게 하였다.
9월 22일 병자
상이 번침(燔鍼)을 맞았다.
영산 현감(靈山縣監) 권정중(權正中)을 의금부에 잡아들였는데, 경상도 암행 어사의 서계(書啓)에 권정중이 저지른 범법 사실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만장(滿將)의 행차가 비록 칙사(勅使)와 다르나 그가 대관인데다가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오는 것이니 각별히 우례(優禮)를 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1명 및 승지가 벽제(碧蹄)에 나가 맞이하고 또 대신 1명이 교외에 나가 맞이하게 하는 한편, 연례(宴禮)도 모두 칙사의 예에 따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장이 문안하러 온다고 명분을 삼고 있으나 실제로는 성후(聖候)가 얼마나 위중한가를 탐색해 보려고 하는 것인 듯하니, 상께서 나가서 맞으실 수는 결코 없습니다만 또한 한번 만나지 않으실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침전(寢殿)에서 편복(便服)을 입고 대하시더라도 그는 반드시 혐의를 삼지 않고 우리가 성심껏 자기를 접대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의당 반신(伴臣)으로 하여금 이러한 뜻을 미리 만장에게 말하게 하고, 그가 만일 근래의 변고에 대해 물어 온다면 그 사실을 대략 말해 주는 것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3일 정축
번개가 쳤다. 유성이 묘성 위에서 나와 벽성(璧星) 아래로 들어가고, 또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필성(畢星) 위로 들어갔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일호(黃一皓)가 치계하였다.
"이달 19일 저녁에 만장(滿將) 및 두목(頭目) 4인과 청역(淸譯) 1인이 강을 건너 왔습니다."
9월 24일 무인
번개가 쳤다. 유성이 태양수성(太陽守星)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비국이 아뢰기를,
"상후(上候)가 이토록까지 불편하신데 동궁(東宮)이 시약(侍藥)을 못하니 이것이야말로 신민들의 지극한 통한입니다. 이번에 만장이 오로지 문병을 위해 오니 그가 돌아갈 적에 종실 대신 이하 백관들이 모두 교외에 모여서 정문(呈文)하여 청하고자 합니다."
하니, 타당하지 않은 일이라고 답하였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정광경(鄭廣敬)을 대사간으로, 정치화(鄭致和)를 집의로, 성이성(成以性)을 사간으로, 박안제(朴安悌)를 장령으로, 유철(兪㯙)을 헌납으로, 성초객(成楚客)을 정언으로, 이극인(李克仁)을 지평으로 삼았다.
9월 25일 기묘
번개가 쳤다. 유성이 북두성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평안 병사 임경업(林慶業)이 치계하였다.
"만장(滿將)의 행차가 정주(定州)에 당도했기에 신이 가서 만났는데, 그와 대화할 때에 신이 말하기를 ‘과군(寡君)께서 세자(世子)·대군(大君)과 이별하신 지 오래되어 그 생각에 병환이 나셨으니, 신민들의 망극해 하는 모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만장이 대답하기를 ‘내가 이번에 온 것이 실로 국왕을 문안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황제께 돌아가 고하면 자연 결말이 있을 것이니 기다려 보라.’고 하였습니다."
비국이, 한결같이 칙사와 마찬가지로 만장에게 백금(白金)을 지급하고 강도(江都)에서의 공덕을 얘기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명분으로 별도로 황금(黃金)을 줄 것을 청하고, 또 청역(淸譯) 이잉질석(李芿叱石)에게 백금 수백 냥을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9월 26일 경진
유성이 태일성(太一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北斗)의 괴(魁) 속으로 들어갔다.
청사(淸使) 만월개(滿月介)가 서울에 들어왔다.
9월 27일 신사
유성이 벽성(璧星) 아래에서 나와 위성(危星) 아래로 들어가고, 또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옥정성(玉井星) 위로 들어가고, 또 천일성(天一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접대소(接待所)가 아뢰었다.
"의관(醫官) 유달(柳達)이 아침에 만장을 만났습니다. 만장이 성후(聖候)에 대해 묻고 있을 때에, 이잉질석(李芿叱石)이 곁에 있다가 ‘심양에 있을 적에 요변(妖變)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듯하다.’고 물었는데, 유달이 상께서 어소를 옮겨 번침(燔鍼)을 맞으시는 까닭에 그 사실을 숨기지 못하였다 합니다."
상이 만월개(滿月介)를 와내(臥內)에서 접견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렇게 큰 병을 얻어 침구(鍼灸)도 효험이 없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하니, 만장이 침구를 맞은 곳을 보고 황제에게 돌아가 고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만장에게 앞으로 오게 한 다음 내 보이니, 만장이 말하기를,
"병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허언(虛言)이겠습니까. 오래 앉아 계시면 옥체를 상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이 이번에 뜻밖에 나와 주어서 잠시나마 대화하고자 하였소. 정축년에 대인이 우리 아들들을 돌봐 주어서 잘 보전될 수 있었소. 아들들이 대인의 덕을 매우 감사하고 있으니, 과인이 어찌 잊을 수 있겠소. 심양에 있는 아들들도 오늘까지 두터운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소."
하니, 만장이 말하기를,
"세자와 대군은 황제께서 나를 시켜 보호하게 하고 계시니, 이것은 황제의 은혜입니다. 내가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물러가겠다고 청하였는데, 상이 재삼 만류하였다. 다례(茶禮)를 마친 뒤에 환도(環刀)와 표피(豹皮) 등의 물건을 주었다.
9월 28일 임오
선산 부사(善山府使) 이각(李恪)에게 통정(通政)을 가자(加資)하였는데, 이각이 금오 산성(金烏山城)을 축성(築城)한 공로 때문이었다.
9월 29일 계미
번개가 쳤다.
접대소가 아뢰기를,
"이잉질석(李芿叱石)이 신에게 은밀히 통지하기를 ‘만장이 들어가면 동궁이 나오게 될텐데 그때 칙사(勅使) 3, 4명이 모시고 나올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민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차에 이 기쁜 소식을 들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물(賞物)을 적당히 주어 기뻐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39권, 인조 17년 1639년 11월 (0) | 2026.01.03 |
|---|---|
| 인조실록39권, 인조 17년 1639년 10월 (0) | 2026.01.03 |
| 인조실록39권, 인조 17년 1639년 8월 (0) | 2026.01.03 |
| 인조실록39권, 인조 17년 1639년 7월 (1) | 2026.01.03 |
|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6월 (0) | 202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