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갑신
삼성(參星) 왼쪽 위 벌성(伐星) 동쪽에 혜성이 있었다.
만장(滿將)이 돌아갔다.
10월 2일 을유
객성(客星)이 삼성 왼쪽 아래로 옮겨 갔다가 이름없는 별을 가렸는데, 그 모습이 흰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유성이 삼성 아래에서 나와 호성(弧星) 위로 들어갔다.
심양(瀋陽)에 있는 재신(宰臣) 박로 등이 치계하였다.
"이번 9월 22일 이른 아침에 세자 책봉례를 행하였는데, 고명은 별지(別紙)에 등서하여 올려 보냅니다."
10월 3일 병술
유성이 입성(立星) 위에서 나와 천구성 위로 들어갔다. 객성이 정성(井星) 구역 안쪽 천시성(天矢星) 위로 옮겨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흰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유대화(柳大華)를 동부승지로, 이행우(李行遇)를 집의로, 유심(柳𥳍)을 장령으로, 박수문(朴守文)을 정언으로, 이명한(李明漢)을 강원 감사로 삼았다.
10월 4일 정해
유성이 여어성(女御星) 위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다. 또 객성이 정성(井星) 구역 안쪽 자성(子星) 아래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흰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유성이 누성 위에서 나와 헌원성(軒轅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을 비추었다.
상이 침(鍼)을 맞았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과 우의정 심열(沈悅) 등이 차자를 올려 이목을 종성 부사로 제수한 명을 환수할 것을 거듭 청하고, 또 아뢰기를,
"만일 자목(字牧)을 소중히 여기시어 성명(成命)을 고치기 어려우시다면 조금 남쪽 지방으로 옮기소서. 그리하여 유신(儒臣)을 보전하고 피로한 백성을 소생시킨다면 어찌 둘 다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힘써 따르겠다고 답하였다.
10월 5일 무자
헌부가 아뢰기를,
"동부승지 유대화(柳大華)는 본래 명성도 없는데다가 경력도 부족합니다. 지난번 수령으로 있을 적에는 근실하지 못하다는 비난도 많았으니,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맞지 않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대화는 이미 제수된 이상 체차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여러번 아뢰니, 따랐다.
10월 6일 기축
유성이 구진성(鉤陳星) 아래에서 나와 묘성 위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달 10일경에 창경궁(昌慶宮)으로 환어(還御)하고자 하니 날짜를 가려 아뢰라."
빈청의 2품 이상이 재계(再啓)하기를,
"삼가 정원에 내리신 분부를 보건대 10일경에 창경궁으로 환어하고자 하신다 하니, 신 등은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다른 곳을 구해도 합당한 곳이 없기 때문에 성상께서 환어하고자 하시는 것이겠습니다만, 창경궁이 환어하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이 창덕궁에 그대로 거둥하심이 합당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부득이하다면 우선 창경궁·정원(政院)·옥당(玉堂)·총부(摠府)·약방(藥房) 등지에 임시로 이어하실 곳을 만드는 것이 지금의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하니, 해사로 하여금 즉시 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7일 경인
유성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유성(柳星) 아래로 들어가고, 또 낭성(郞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10월 8일 신묘
번개가 쳤다. 유성이 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성 아래로 들어가고, 또 정성 아래에서 나와 북하성(北河星) 아래로 들어가고, 또 사독성(四瀆星) 아래에서 나와 유성(柳星) 아래로 들어갔다.
비국이 계청하기를,
"무주현(茂朱縣)의 적상 산성(赤裳山城)을 수리한 다음, 본 고을 및 금산(錦山)·용담(龍潭)·진안(鎭安)·장수(長水)·운봉(雲峯)·진산(珍山) 등 7읍을 본 산성에 분속(分屬)시키고 대략 입암(笠巖)에 시행했던 옛 규례와 같이 승려 각성(覺性)에게 도총섭(都摠攝)의 칭호를 주어 항상 성내에 거주하면서 일이 없을 때에는 수호하고 유사시에는 협수(協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는 곧 순검사(巡檢使) 박황(朴潢)의 의논이었다.
평안도의 평양·상원(祥原)·강서(江西) 등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다. 예조가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 해괴제(解怪祭)를 지낼 것을 청하였다.
10월 9일 임진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귀성(鬼星) 아래로 들어갔다.
구봉서(具鳳瑞)를 우부승지로, 민응협(閔應協)을 부교리로, 임효달(任孝達)을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삼고 통정(通政)을 가자(加資)하였다.
10월 11일 갑오
유성이 정성(井星) 위에서 나와 북하성(北河星) 아래로 들어가고, 또 삼태성(三台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이래(李䅘)를 지평으로 삼았다.
청국이 신력(新曆) 1백 부를 반사(頒賜)하였다.
심양(瀋陽)에 있는 재신(宰臣)이 치계하였다.
"수일 전에 회은군(懷恩君)의 딸이 신 등에게 은밀히 통지하기를 ‘앞서 징병(徵兵)을 은(銀)으로 속(贖)하게 한 조치가 있었는데 황제가 징병의 면제를 특별히 명하고 칙사를 파견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10월 12일 을미
번개가 쳤다.
10월 14일 정유
의금부에 추국청을 설치하고, 향교동(鄕校洞)의 본궁(本宮) 고직노(庫直奴) 춘이(春伊), 입역노(入役奴) 춘금(春金)·계생(繼生), 비(婢) 수리개(愁里介)·사춘(四春) 등을 국청에 내리라고 명하였는데, 그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본궁에 흉예한 물건을 묻은 곳이 10곳이나 된다. 이곳은 창고를 관리하는 곳으로서 흉인(凶人)이 생각을 낼 곳이 아니니 반드시 원손(元孫)이 이곳에 우거(寓居)할 기미를 미리 알고서 감히 손을 쓴 것이 분명하다. 만일 내응(內應)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렇게도 많은 요얼을 조작할 수 있었겠는가. 모두 실토하게 하라."
하였다. 춘이가 공초(供招)하기를,
"복개당(福介堂)의 무녀(巫女)가 금년 4월 신당(神堂)을 철거할 적에 본궁 안에 숨어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제가 감히 들어가 있으라고 허락할 수 없기에 비접소(避接所) 내인(內人)에게 품하였더니, 내인도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다시 대전(大殿)의 김 상궁(金尙宮)에게 품하여 그 글을 받고서야 들어가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 밖에 드나든 사람은 없고, 영안위(永安尉) 방의 내인 박씨(朴氏) 및 색장(色掌) 내인이 번갈아 말을 타고 무녀가 있는 곳을 왕래하면서 혹 말을 보내 무녀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러면 10여 일을 머물다가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 수사비(水賜婢)는 하루 걸러 오고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씩도 왔는데, 올 때마다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곤 하였습니다. 영안위 내인이 드나들 때에 제가 능히 금지시키지 못했을 뿐이지, 흉예한 물건을 묻은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춘금과 계생 등의 공초도 대략 서로 같았다. 비(婢) 수리개의 공초도 춘이의 공사와 서로 같았는데, 박씨가 비를 피해 본궁에 와서 묵고 간 일이 있다고 덧붙였다. 비 사춘의 공초도 그러했는데, 그 무녀는 원래 원손을 위해 기도하던 무녀로서 그 어미를 데리고 궁내에 들어와 살았다는 내용이 더 있었다. 국청이 아뢰기를,
"무녀와 영안위의 궁녀가 서로 출입한 자취가 낭자한 듯하니, 그 무녀 및 박씨, 색장 내인, 수사비, 무녀의 어미를 모두 나문(拿問)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고, 열이(烈伊)·명례(明禮)·향이(香伊)·천금(賤今)·무인(戊仁)을 국청에 내렸다. 열이는 바로 박씨이고 명례는 색장 내인이고 향이는 수사비이고 천금은 무녀이고 무인은 천금의 어미이다. 천금이 공덕리(孔德里) 조춘금(趙春金)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을 도사(都事)가 붙잡으러 가자, 춘금의 아내가 용산(龍山)에 가 있다고 속였는데, 이웃에 살던 사인(士人) 유학립(柳學立)이 천금을 포박하여 고하였다. 상이 유학립은 논상(論賞)하고 춘금의 아내는 정죄(定罪)하라고 명하였다. 열이가 공초하기를,
"어릴 때부터 상전(上殿)에 들어가 일하다가 계축년에 병으로 궐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침 폐궁(閉宮)048) 의 변을 만나 다시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폐주(廢主)가 그때 자수(刺繡)를 잘 놓는다 하여 불러 들였습니다. 계해년에 대비전(大妃殿)이 영안위의 궁으로 가서 일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영안위의 아들 딸이 누차 요절(夭折)하고 또 생존해 있는 자도 질병이 많아 부득이 신사(神祀)를 설치하고 신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으므로 자주 여러 신당을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금년 4월 신당들을 철거할 적에 복개당 무녀가 자기를 잡아들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어미를 데리고 본궁 안으로 들어와 살았는데, 또 칙사(勅使)가 수색하자 영안위 궁으로 와서 피하여 6, 7일을 머물다가 본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안위의 자녀가 병이 있어 신사(神祀)를 지내려 했습니다만, 무녀가 법부(法府)의 금령(禁令)을 두려워하여 혼자서 가지 못하므로 신이 데리고 갔는데, 이렇게 한 것이 두세 번 됩니다. 그 뒤에 또 위급한 병이 있어 기도하는 일 때문에 저녁 때 본궁에 갔다가 마침 비를 만나 묵고 온 적이 있으며, 8월 초에 한 번 술과 음식을 보내 주었을 뿐입니다. 여러 궁가(宮家)의 사람들이 원손에게 문안하기 위해 본궁에 왕래하였는데, 이것은 보통 있는 일입니다. 흉악한 짓을 행한 일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명례와 향이 등의 공사도 대략 서로 같았다. 천금의 공사는 본궁 노비 및 영안위 방의 내인 등과 대략 서로 같았는데, 말하기를,
"본래 일정한 거처가 없어 서로 절친한 사람 집으로 찾아다니며 유숙하다가 오늘은 공덕리 조씨네에 가서 머물고 있었는데, 체포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아보기 위해 들어 오던 중 대현(大峴)에서 붙잡힌 것일 뿐 별로 도피한 일은 없으며, 흉악한 짓을 했다는 것은 너무나 원통합니다."
하였다. 무인의 공사도 그와 같았으며, 애옥(愛玉)은 공초하기를,
"바느질을 맡아서 영안위 궁내에 오래 있었고 본궁에 왕래한 사실은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죄인들을 모두 신문해야 하겠습니다만, 애옥의 경우는 당초 춘이 등의 공초에 그 이름이 나오지도 않았고 또 천금과 열이 등도 애옥을 말하지 않았으니, 우선 단서가 나온 뒤에 끝까지 캐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형추(刑推)하라고 답하였다. 천금·무인·열이·명례·향이·애옥 등이 6차 혹은 8차에 걸쳐 형신(刑訊)을 받았는데,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에도 모두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상이 국청에 의계(議啓)하라고 명하였는데, 국청이 아뢰기를,
"춘이가 공초한 내용 가운데 무녀를 본궁에 살게 해 준 사실은 이미 사실대로 공초한 것입니다. 신 등이 춘이를 형신할 뜻으로 두 번이나 아뢰었는데, 성비(聖批)에 억지로 계속 청하는 것은 자못 타당치 못한 일이라고 분부하셨으므로 신 등이 황공하여 감히 다시 청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의계하라는 명을 받들고 다시 헤아려 보건대, 무녀 천금이 자복하지 않고 죽어서 그와 내통하였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착실히 수직(守直)하지 않아 요무(妖巫)를 끌어 들인 죄는 모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춘이는 변방에 정배(定配)하고, 춘금 이하는 모두 어리석어 지각이 없는 자들이니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춘이를 정배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니, 금부로 하여금 곤장을 치고 석방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무술
초저녁에 상이 열담(熱痰)이 상승하여 급히 약방(藥房)으로 하여금 죽력(竹瀝) 두 사발을 올리게 하니 열담이 다소 내렸다. 약방 제조 및 어의(御醫) 등이 금호문(金虎門) 밖까지 달려와 땅에 앉아 있자, 승지 구봉서(具鳳瑞)가 표신(標信)을 내보이기를 청하고서 문을 열고 들어 오게 하였다. 도제조 최명길(崔鳴吉) 등이 들어와서 차비문(差備門) 밖에 앉아 있고, 백관과 여러 재상들이 궐문 밖에 둘러 앉아 있었는데, 궐내의 소식이 막혀 상의 병세가 얼마나 위중한지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도성 안이 흉흉하였다.
10월 16일 기해
파루(罷漏) 후에 정원이 인평 대군(麟坪大君)·능원 대군(綾原大君)·좌상·우상 및 도승지 이기조(李基祚)가 모두 궐문 밖에 와 있다는 뜻을 아뢰니, 문을 열고 모두 불러 들이라고 하교하였다.
10월 19일 임인
이날 상이 회복되어 정무를 살폈다.
병조의 목면(木綿) 1천 필을 꺼내 기내(畿內)의 각역에 나눠 주어 청사(淸使)가 올라 올 적에 입파마(入把馬)049) 를 고용하는 값으로 쓰게 하였다.
10월 20일 계묘
형조 판서 홍보의 파직을 명하였는데, 회계(回啓)한 내용에 착오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비국이 여정포(餘丁布) 3백 20필을 함경남도에 내려 보내 4보(堡)의 토병(土兵)들에게 나눠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1일 갑진
상이 하교하기를,
"이번에 청나라에서 병 문안 온 것을 일단 황제의 특별한 배려라고 한다면 사은(謝恩)하는 예를 폐할 수 없을 듯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니, 비국이 사신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최명길을 사은사로 삼았다.
10월 23일 병오
세폐미(歲幣米)를 봉황성(鳳凰城)에 운송하였는데, 청나라 호부(戶部)의 관원이 즉시 점검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두 달간이나 끌었으므로 인마(人馬)가 많이 죽었다.
10월 24일 정미
상이 하교하였다.
"내년 정조(正朝)의 방물(方物)도 그대로 정파(停罷)하게 하라."
10월 25일 무신
유성이 성성(星星) 위에서 나와 북두 아래로 들어갔다.
성이성(成以性)을 집의로, 이필행(李必行)을 사간으로, 이행우(李行遇)를 부응교로, 유영(柳潁)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0월 26일 기유
유성이 상태성(上台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군자감 정 양만고(楊萬古)가 상소하여 치욕을 씻을 수 있는 네 가지 계책을 조목별로 진달하니, 상이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10월 28일 신해
왜차(倭差) 등지승(藤智繩)이 작은 종이를 가지고 벽암(碧菴)이라는 두 글자를 써 줄 것을 요구하면서 김세렴의 글씨를 얻고자 하였는데, 상이 써 주라고 명하였다.
10월 29일 임자
강화(江華) 마니산(摩尼山) 제단(祭壇)을 다시 수축하였다.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대동법(大同法)을 우선 1도(道)에 시험삼아 시행해 볼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0월 30일 계축
유성이 서쪽 하늘 가운데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다. 유성이 상태성(上台星)에서 나와 북극성 아래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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