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갑인
유성이 낭성(狼星) 아래에서 나와 옥정성(玉井星) 아래로 들어갔다.
상이 전옥서의 죄수들을 관대하게 처결하도록 명하였다.
11월 2일 을묘
유성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우성(牛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였다.
"내년 정조(正朝)의 물선(物膳)도 방물(方物)과 같이 봉진(封進)하지 말라."
안시현(安時賢)을 장령으로 삼았다.
11월 3일 병진
번개가 쳤다.
11월 4일 정사
유성이 천상성(天相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에 비추었다.
11월 5일 무오
형조 판서 민형남(閔馨男)이 병으로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당시 육경(六卿)으로 있던 자들은 아들을 인질로 보내는 것을 기피하여 체면(遞免)되기를 힘써 구하였는데, 형남이 체면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11월 6일 기미
유성이 문창성(文昌星) 위에서 나와 북방(北方)으로 들어갔다.
김수현을 대사헌으로, 신익량(申翊亮)을 우부승지로, 유영을 교리로 삼았다.
11월 7일 경신
대전(大殿)과 중전(中殿)의 탄일에 백관들의 하례(賀禮)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11월 8일 신유
비국의 유사 당상 및 호조 판서를 모두 추고하라고 명하였는데, 세폐미(歲幣米) 3천 석이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11월 9일 임술
우박이 내리고 우레와 번개가 쳤다. 유성이 섭제성(攝提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성 위로 들어갔다.
11월 10일 계해
종실(宗室) 순평군(順平君) 이선봉(李善鳳)이 문안하기 위하여 대궐로 가던 중 길에서 창을 매고 전도(前導)하던 어영군과 마주쳤는데, 그가 가금(呵禁)을 피하지 않아 선봉의 창에 잘못 찔려 피를 흘렸다. 종친부 당상이 진계하여 창을 맨 어영군을 다스릴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뒤 끝내 깊이 다스리지 않았다.
11월 11일 갑자
유성이 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재신(宰臣) 신득연(申得淵)이 밀계(密啓)하였다.
"근일에 사정을 은밀히 탐문해 보건대, 황제가 말하기를 ‘국왕의 병이 과연 기동을 못하여 칙명을 맞을 수 없을 정도라면 이는 칙명을 결과적으로 욕되게 하는 일이요, 병으로 일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빈 나라에 칙사를 보내는 것이다. 만일 차도가 있다면 칙사를 속히 보내야 하겠으나, 상태가 여전하다면 반드시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보낼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지금 와서는 사기(事機)가 매우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또 정역(鄭譯)이 말하기를 ‘상후(上候)가 그렇게 편안치 못하신데 한번도 관소(館所)에 특사(特使)를 파견하여 통지해 오지 않고 있으므로 이곳 사람들이 의아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11월 13일 병인
이조 참판 이경여(李敬輿)를 형조 판서로, 이조 참의 이경의(李景義)를 이조 참판으로, 유철을 이조 정랑으로, 유영을 헌납으로, 김세렴을 우부승지로, 정치화(鄭致和)를 사간으로 삼았다.
좌의정 신경진이 빈청(賓廳)에서 개좌(開坐)하였을 때에 비국 당상 중에 오직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만이 와서 참여하였으므로 식자들이 해괴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다.
11월 15일 무진
원접사(遠接使)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였다.
"칙사가 강을 건너 온 뒤에 그의 임무를 탐문해 보았더니, 전일의 속은(贖銀)을 탕감하는 일과 앞으로 기병(騎兵) 동원을 감면시켜 주는 일이었습니다. 또 정명수(鄭命壽)가 말하기를 ‘청대죽(靑大竹) 15태(駄)와 홍시(紅柿) 20태와 생리(生梨) 10태를 아울러 봉황성(鳳凰城)까지 수송하라. 그리고 삼전도 비(三田渡碑)의 전면(前面)은 마땅히 몽고(蒙古) 문자로 쓰고 후면은 우리 나라의 비문(碑文)을 새겨야 할 것이니, 칙사가 서울에 들어가기 전까지 먼저 후면을 새겨 놓고 기다려 오래 지체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11월 16일 기사
월식(月食)이 있었다.
경옥(京獄)에 구금되어 있는 향화 호인(向化胡人)을 사은사(謝恩使)가 가는 길에 압송해 보냈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 세폐(歲幣)로 바치는 금(金)을 은으로 대체하였는데, 청나라에서 물리쳤다. 비국이 아뢰기를,
"왜국(倭國)의 금이 우리 나라에 통행하고 있는 것을 청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아무리 주선한다 해도 필시 들어 주지는 않고 도리어 그들의 노여움만 사게 될 것입니다. 해조에 남아 있는 황금으로 수량에 맞춰 들여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7일 경오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가 차자를 올리기를,
"어영군 사목 가운데 본 고을의 잡역을 면제시켜 준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각읍에서는 사목을 무시하고 어영군에게 잡역을 시키는 일이 항상 많습니다. 저번에 의성(義城)의 군병 40 여 명이 본읍의 침해하는 정상을 호소하기에 신이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계문하게 하자는 의견으로 두 차례 초기(草記)를 올렸었는데, 정원(政院)에게 퇴짜를 맞았습니다. 이는 실로 신의 인망이 가벼운 소치이니, 삼가 바라건대 체직하여 체면을 중히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원의 일이 자못 온당치 못하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중신(重臣)의 계사를 시종 기각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당해 승지를 추고하라."
하였다. 도승지 이기조(李基祚) 이하가 모두 대죄(待罪)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근래에 주인을 배반한 종들과 역(役)을 기피하는 백성들이 어영군에 투속(投屬)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외방에서의 시끄러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서울에서도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폐단이 한둘이 아닙니다. 궐문 아래에서 공족(公族)이 몸을 상하기도 하고 성균관 유생이 성묘(聖廟) 안에서 힐책을 받기도 하니, 이것을 보면 그 나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장령(將領)이 된 자가 이와 같은 것을 금단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저 고식적인 정사만을 숭상하는가 하면, 군졸들의 말을 듣고 본관의 죄를 청하고 있습니다. 신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곧 부민(部民)들이 고소하는 것과 같은 종류이니 사리를 살펴볼 때 진실로 타당하지 못하다. 더구나 지금은 옥후(玉候)가 불편하셔서 조섭하고 계시는 중인 만큼 각종 문서들을 될 수 있으면 생략해야 하니, 해도(該道)에 공문을 발송하여 조사해서 처리하게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한두 명 아래 군졸들의 호소 때문에 천청(天聽)을 번거롭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라고 여겨, 계사를 도로 내주면서 반복하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구인후는 드러내 놓고 신들을 협박하고 윽박질렀습니다.
신들이 아무리 보잘것없으나 가까이에서 전하를 모시면서 서무(庶務)를 규찰하는 직무를 맡고 있는데, 훈귀(勳貴)의 신하라 하여 어찌 감히 권세를 믿고 짓밟을 수 있겠습니까. 구인후를 추고할 것을 계청하고 싶었으나 시끄러운 일이 생기게 될까 염려하여 잠자코 있었던 것인데, 지금 구인후가 노여움이 가시지 않아 차자를 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즉시 당해 승지를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신들의 신중한 생각이 도리어 전하의 귀를 가리운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의 의논이 그러했던 것으로서 해방(該房)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신들은 황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1월 18일 신미
예조가 문례관(問禮官) 의주(儀註) 가운데에 칙사(勅使)가 성묘(聖廟)를 배알하는 조항을 두었는데, 상이 없애라고 명하였다.
11월 19일 임신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홍시(紅柿)·생리(生梨)·청죽(靑竹)을 심양으로 보냈다.
이덕수(李德洙)를 좌승지로, 유심(柳𥳍)을 장령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사간으로, 유심(柳淰)을 교리로, 이원진(李元鎭)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21일 갑술
헌부가 아뢰기를,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는 토주(土主)를 고소한 어영군의 일로 인하여 초기(草記)를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그것만도 이미 번독스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잘 설명해 주면서 계사를 도로 내 준 정원의 행동은 실로 일의 체모에 맞는 것인데, 도리어 입계하여 죄를 청하겠다는 등의 말로 후설(喉舌)의 신하를 협박하고 조금도 꺼리지 않았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23일 병자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 사은사가 가는 길에 대군(大君)을 교체하는 일을 심양에 말하게 하라."
11월 24일 정축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청사(淸使) 마부달(馬夫達)·오다하(吳多河)·초고로(焦古老) 등이 서울에 들어와 칙서를 반사(頒賜)하였다. 상이 침전(寢殿)에서 접견하고 다례(茶禮)를 행한 뒤에 파하였다.
11월 25일 무인
사은사(謝恩使) 최명길(崔鳴吉)과 부사(副使) 이경헌(李景憲) 등을 심양으로 파견하고 겸하여 정조(正朝)를 하례하게 하였다.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를,
"상궁(尙宮) 김씨(金氏)는 혼조(昏朝) 때에 권세를 부리던 사람인데 아직 궐내에 있다는 것은 성조(聖朝)의 누(累)입니다. 향교동(鄕校洞) 본궁에 요무(妖巫)를 거주시킨 사실이 죄인의 초사(招辭)에 이미 나왔으니, 그가 이번 저주의 변고에 대해 내용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내(大內)의 여시(女侍)로서 외간 사람들과 밀통한 간사하고 외람된 행동은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축출하도록 명하여 궐내를 맑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요무에 미혹되지 않는 것을 이 여시들에게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계사가 이와 같으니 안에서 벌을 내리겠다."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상이 도승지 이기조(李基祚)와 내관 나업(羅嶪)·백대규(白大珪) 등으로 하여금 관소(館所)로 칙사를 찾아가 보게 하였다. 칙사가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전일 나왔을 때에 국왕께서 회답한 말을 돌아가 황제에게 고하였더니, 황제가 ‘마병(馬兵)은 과연 전투용으로는 합당하지 않다. 수군(水軍) 6천 명만 12개월의 군량을 준비하여 전함을 갖추어서 얼음이 풀리는 2월까지 안주(安州) 등지의 해변에 모이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황제가 차관(差官)을 보내 인솔해 가게 할 것이다. 양향(粮餉)은 내년 공미(貢米) 1만 포(包)를 실어 보내어 삼차하(三叉河)의 소릉하(小陵河)와 대릉하(大陵河) 사이에 정박시키도록 하라. 그리하여 영원(寧遠)·금주(錦州)로 군량을 운반하는 길목을 차단하여 저절로 곤란해지게 하면, 귀국에는 폐단을 제거하는 혜택이 있게 되고 군병들도 전쟁터에서 죽는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회의하도록 명하였는데, 회계하기를,
"지난해에 조병(助兵)의 요청을 허락한 이상 지금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사(舟師)를 동원하여 보내는 것은 육로(陸路)보다 배나 더 어려운데, 6천 명이 타고 가려면 1백 척의 배가 필요하고 12개월 동안 먹을 군량미만도 수만여 석에 이르며 격군(格軍)과 타수(柁手)의 숫자도 필시 많을 것입니다. 세공미(歲貢米)도 아직 다 수납하지 못했는데, 또 내년 봄에 군병들이 있는 곳까지 운반하라고 요구하니, 일의 형편으로 헤아려 보건대 결코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당 군병과 양향의 수량을 감해 달라는 뜻으로 잘 말하여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세공미를 먼저 상납하라는 얘기는 진심이 아닌 듯하니, 힘이 닿는 대로 군량미를 보조하겠다는 뜻으로 답하라. 일단 주사라고 말한다면 격군과 타수도 원액(元額) 속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하였다.
11월 26일 기묘
유성이 북두성 위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에 비추었다.
상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칙사가 말한 것들을 모두 거절할 수만은 없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여름철에 우리가 이미 군량미를 보조하겠다고 말했는데, 저들이 군량미를 보조하지 말고 세공미를 대신 보내라고 하니, 신은 별다른 의도는 없다고 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약간의 군량미를 보조하는 것을 적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 말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군병의 숫자를 감해 줄 것만 청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12개월의 양향을 한꺼번에 운송하기도 어려우니, 이것도 아울러 언급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주사를 조발하면 왜인(倭人)들이 이 틈을 타서 올지도 모른다는 뜻을 대화하는 도중에 은연중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1월 27일 경진
도승지 이기조(李基祚)가 칙사를 찾아 가서 군병의 숫자를 감해 줄 것을 청하고 세공미 수송의 어려운 점을 말하니, 칙사가 답하였다.
"군병이 비록 6천 명이나 1천 명은 사격(沙格)이니 징발하는 군사는 실제로 5천 명이다. 세공미는 감할 수 없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탄(李坦)에게 숙마(熟馬) 1 필을 하사하였는데, 세폐미(歲幣米)를 운송하여 상납할 적에 주선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세렴을 이조 참의로, 신계영(辛啓榮)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이빈(李彬)을 정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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