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갑신
청역(淸譯) 정명수(鄭命壽)·변란(卞蘭) 등이 병조 좌랑 변호길(邊虎吉)을 끌고 들어와 큰 몽둥이로 때렸다. 이때 변호길은 관소(館所)를 파수하는 낭청(郞廳)으로 관소 문 밖에 있었는데, 정명수의 방기(房妓)가 문을 나와 폐단을 일으키므로 변호길이 통렬히 금지하자 방기가 정명수에게 호소하여 욕보인 것이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에 칙사가 와서 이미 속은(贖銀)을 면제시켜 주고 기병(騎兵)도 감해 주었으며 군량미를 보조하는 일 역시 본래 운송해야 할 세공미(歲貢米)의 수량을 그쪽으로 납부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사(馬使)는 스스로 자신이 잘 주선해 준 공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니, 별도로 선물을 기증하여 기쁘고 고맙다는 뜻을 나타내소서. 그리고 역관 정명수에게도 물품을 주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명수가 칙사의 말을 전하였다.
"군사들을 통솔하는 상장(上將)과 부장(副將)은 한결같이 중조(中朝)를 위해 군대를 동원했던 무오년의 전례에 따라 도원수(都元帥)와 부원수(副元帥)의 칭호를 사용하되 임경업(林慶業)을 부장으로 삼고 문관(文官)을 상장으로 삼도록 하라. 그리고 그곳에 당도하거든 임경업은 군병들을 영솔하고 전장터로 가고 문관은 황제가 계신 곳을 왕래하면서 분부만 듣게 하라."
12월 4일 병술
영접 도감(迎接都監)이 문관 중에는 병사(兵事)를 아는 자가 없다는 뜻으로 마사(馬使)에게 말하니, 대답하기를,
"만일 문관으로 상장을 삼을 수 없다면 조발하는 병사들이 양서(兩西) 지방 사람들이니, 장령(將領)도 양서의 총병(摠兵)으로 차정하라."
하였는데, 조정이 허락하였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전식(全湜)을 대사간으로, 오단(吳端)을 동부승지로, 정치화(鄭致和)를 사간으로, 이만(李曼)을 부교리로, 유심(柳淰)·남로성(南老星)을 이조 좌랑으로, 김상헌(金尙憲)을 행 부호군으로 삼았다. 【 김상헌은 죄를 입은 지 1년 만에 비로소 거두어 서용하는 명이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7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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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정해
삼전도 비(三田渡碑)의 일을 완료하고 감역관(監役官)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살펴 보건대, 상을 받은 사람이 만일 사대부의 마음을 지녔다면 어찌 수치로 여기지 않겠는가.
12월 6일 무자
비국이 아뢰기를,
"신 등이 백관들과 더불어 일제히 관소(館所)로 나아가 칙사에게 글을 올리고 세자(世子)가 돌아와 시질(侍疾)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심양에 돌아가 보고해 달라고 요청하고자 합니다. 또 칙사가 떠날 때에 방민(坊民)들이 교외로 나가서 길을 막고 간청하게 하는 일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해로움만 있고 이익이 없을 것이니 하지 말라."
하였다. 비국이 또 정부(政府)에서 특별히 자문을 보내 간청하게 하는 동시에 영상으로 하여금 글을 올려 힘써 청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청사(淸使)가 삼전도 비(三田渡碑)를 가서 보고는 사냥한다는 핑계로 남한 산성에 들어가 성첩(城堞)을 두루 살펴본 다음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그리고 승지(承旨)와 중사(中使)를 관소로 불러 도환인(逃還人)·채삼인(採蔘人)·향화인(向化人) 등에 관한 일을 제기하면서 수없이 책망하고, 또 소리를 높여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당초의 약조(約條) 중에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를 다시 수축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뒤로 왜적을 방비한다는 거짓 구실로 산성을 수리하려 하고 있다. 왜병이 만약 남한 산성까지 들어온다면 그 동안에 우리들이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일찍이 절대 수축하지 말라는 뜻으로 간곡히 말했는데, 오늘 산성을 두루 보니 산성 안에 네 곳이나 곡식을 쌓아 두었고 또 추초(蒭草)도 저장하였으며 성기(城基)를 물려 쌓고 포루(砲樓)도 개설하였으니, 너희 나라가 어떤 간계(奸計)를 가지고 있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또 강도(江都)를 수치(修治)하고 군량미를 많이 비축하였는데, 이렇게 해 놓고서 스스로 계획대로 잘 되었다 생각하고 딴 마음을 품어 각종 호령(號令)을 이를 믿고 거절하는 것인가."
하였는데, 승지 구봉서(具鳳瑞)가 변론하려고 하였으나 더욱 성을 내며 한 마디 말도 못하게 하고, 세 사신이 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많은 말 할 것 없이 국왕이 알도록 아뢰어 해도를 수축한 곳과 남한 산성을 우선 허물어 버린 다음 우리가 국경을 넘어가기 전까지 치보(馳報)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심양에 돌아가 보고해서 내가 용장(龍將)과 함께 즉시 다시 나와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등을 두루 순행하고 각도(各島)와 각성(各城)의 수축 여부를 일일이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차 너희 나라에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하였다.
12월 9일 신묘
청사(淸使)가 출발하려고 하자, 상이 승지 구봉서 및 중사를 보내 질병 때문에 대면하여 이별하지 못한다는 뜻을 전유(傳諭)하게 하니, 마부달(馬夫達)이 말하기를,
"국왕의 질병이 고질화되어 심각한 상태를 심양에 돌아가 보고하겠다."
하였다. 봉서가 잇따라 말하기를,
"도환인(逃還人)과 향화인(向化人)에 관한 일 등은 앞으로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찾는 대로 보내겠습니다."
하니, 마부달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진실로 마음을 다해 하려고만 하신다면 우리들이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봉서가 또 말하기를,
"대국의 모든 명령은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곡진하게 따라야 할 것인데, 더구나 이 산성을 허무는 일을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소방의 심정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해부터 왜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현저히 근심할 만한 점이 있으므로 이미 한수(漢水) 남쪽의 성지(城池)를 수축하겠다는 뜻으로 아문(衙門)에 보고하였고 그 후로 남한 산성을 약간 수리하여 왜구를 방비하였던 것이니 어찌 별다른 생각이 있겠습니까. 산성 내에 곡식을 모아 놓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전부터 광주(廣州)에서 거둬들이는 곡식으로 가을에 수합하여 보관하였다가 봄에 나누어 주는 것이며, 마초(馬草)를 쌓아 놓은 것은 실로 군읍(郡邑)의 상규(常規)일 뿐인데 하필 여기에 의심을 가지십니까?"
하니, 마부달이 말하기를,
"이 산성을 수축해서 무슨 공을 이루려고 그렇게 급급히 더 수축하였는가?"
하였다. 봉서가 말하기를,
"소방의 뜻이 왜구를 방비하는 데에 있으니 대국에서도 수축하도록 권해야 할 일인데, 어째서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을 의심하십니까. 산성이 깊고 외진 곳에 있지 않고 비(碑)를 세운 곳과 매우 가까워 대국의 사신이 으레 비 있는 곳에 이르러 산성 근처를 왕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찌 대국이 알지 못하고 사신이 보지 못한다 하여 그렇게 했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명조(明朝)를 섬겨 온 지 오래 되었는데, 강물 하나가 막혀 있을 뿐인 의주(義州)에 성로(城櫓)를 크게 설치하고 병갑(兵甲)을 많이 배치했어도 명조에서는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정의(情義)에 간격이 없는 부모의 나라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니, 마부달이 말하기를,
"의주의 성지는 변성(邊城)인 까닭에 헐어 버리게 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이 금단하는 것은 변성이 아니고 내지(內地)에 수축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산 등지에는 이미 수축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지금의 남한 산성은 헐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봉서가 말하기를,
"대국의 명을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헐어버리는 것도 수축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우니, 다시 헤아려 주시어 새로 설치한 포루(砲樓)만 헐어버리게 해 준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마부달이 이에 허락하였다.
청사가 출발하여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렀을 때에 백관들이 길에 늘어 서서 상의 건강이 좋지 못하니 동궁을 돌려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세 사신이 말을 세우고 한참 있다가 서로 쳐다보며 의논한 다음 정명수(鄭命壽)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였다.
"그대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남한 산성에서 국왕을 보좌하여 오늘이 있게 되었다. 당초 약조하였던 제반 일들을 모두 수행하고 위반하지 않는다면, 세자와 대군이 어찌 지금까지 체류하고 있겠는가. 약조를 수행하는 것은 힘쓰지 않고 속히 돌아오기만 바라고 있으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
12월 10일 임진
유성이 좌각성(左角星) 아래에서 나와 고루성(庫樓星)으로 들어갔다.
호조가 녹계(錄啓)하였다.
"을해년 양전(量田)한 이후 삼남 지방의 전결(田結)은 51만 4천 9백 76결인데, 1결에서 내는 서량미(西糧米)는 1두(斗) 5승(升)으로 총계가 5만 1천 4백 97석입니다."
비국이 남한 산성에 새로 수축한 곳을 헐어 버려 통보할 수 있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1일 계사
월식(月食)이 있었다.
경상도 경주(慶州)·울산(蔚山)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비국이 서선(西船)에 대포를 실어 보내지 말게 할 것을 계청하여 아뢰기를,
"이 일이 비록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지만 책임을 메꾸기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6천 명의 목숨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 등은 남의 말에 동요되지 말라."
하였다.
정광경(鄭廣敬)을 도승지로, 김육(金堉)을 동부승지로, 이상형(李尙馨)을 집의로, 조계원(趙啓遠)·박안제(朴安悌)를 장령으로, 조한영(曺漢英)·김시번(金始蕃)을 지평으로, 김수현(金壽賢)을 부제학으로, 이시해(李時楷)를 응교로, 심희세(沈熙世)를 정언으로, 정태제(鄭泰齊)를 헌납으로, 성이성(成以性)을 교리로, 유영(柳潁)을 수찬으로 삼고,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에게 충정(忠定)이란 시호를 내렸다.
12월 14일 병신
김반(金槃)을 대사헌으로, 민응협(閔應協)을 사간으로, 윤득열(尹得說)을 지평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15일 정유
비국이 아뢰기를,
"평안도 군병 4천 명에게 지난해 심양으로 간 군병들의 전례에 따라 1인당 무명 10필을 지급하고 1결(結) 30부(負)를 급복(給復)하되, 바닷길로 종정(從征)하는 일이 육로로 전쟁터에 가는 것보다 고생이 더 심하니 1인당 무명 2필씩 더 지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6일 무술
양서(兩西)에 선전관 2인을 나누어 파견하고 본도 감사로 하여금 각읍에 신칙하여 도환인(逃還人)을 색출한 뒤 청사(淸使)가 가는 길에 내어주도록 하였다.
12월 17일 기해
상이 하교하였다.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를 주사(舟師)를 정돈하여 발송할 때까지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동궁(東宮)을 배종(陪從)하고 있는 원역(員役)들은 모두 정삭(定朔)이 있어 돌아가면서 교대하고 있는데, 유독 재신(宰臣) 및 강원(講院)과 익위사(翊衛司)의 관원만은 정삭이 없으니 균등치 못한 일인 듯합니다. 또 듣건대 관소(館所)로 나오는 공급이 날마다 줄어 들어서 묵은 곡식만 먹고 있다 하니, 결코 오래 있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원역과 마찬가지로 정삭하소서."
하니, 상이 1년씩으로 한정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8일 경자
비국이 본사의 문낭청(文郞廳)을 파견하여 삼남 지방을 두루 순시하면서 전선(戰船)을 단속하고 그 근만(勤慢)을 상고하게 하여 경책(警責)할 수 있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9일 신축
유심(柳𥳍)을 장령으로,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임전을 수찬으로, 이시매(李時楳)를 부응교로, 심액을 동지경연으로, 이완을 동부승지로, 허계(許啓)를 경기 감사로 삼았다. 이완은 수일(守一)의 아들인데 무예로써 등용되어 본래 재능도 없이 승선(承宣)에 발탁되었는데도 한 차례 사양만 하고 취직하여 조금도 겸손해 하는 뜻이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무식함을 비루하게 여기고 동렬(同列)들이 함께 있기를 부끄러워하였다. 허계는 본래 명성도 없던 자인데 갑자기 그 자리에 부임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시하였다.
12월 20일 임인
의주(義州)의 도환인(逃還人)인 출신(出身) 최효일(崔孝一)이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녹도(鹿島)에 당도하였을 때에 한선(漢船)을 만났는데, 한인(漢人)들이 재물을 약탈하고 배는 버리고서 겁을 주며 자기들 배에 같이 태워 용천(龍川) 지방에 내려 놓고 갔다. 그 무리들은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최효일은 다시 도망쳐 바다로 들어갔다.
12월 22일 갑진
간원이 아뢰기를,
"종묘 직장(宗廟直長) 최유지(崔攸之)는 춘궁(春宮)을 모시고 가야 할 익위사(翊衛司)의 관원으로서 정원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 놓고 말하기를 ‘나는 부모와 같이 이 산성에 들어와 부모를 받들기에도 겨를이 없으니 결코 모시고 갈 수 없다.’고 하여 이로 인해 체면(遞免)되었습니다. 아, 배종(陪從)한 여러 신하 중에 부모가 있는 자들이 많으며 모두 생사조차 모르면서도 감히 사은(私恩)을 돌보지 않고 배종을 감수하였던 것은 그것이 신하로서의 직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유지는 부모가 성내에 탈없이 있었으니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보다 훨씬 나은 형편인데 감히 방자히 큰소리로 말하여 기필코 체면되고서도 오히려 아직도 의관(衣冠)의 대열에 끼어 다시 침랑(寢郞)이 되었으니, 어떻게 임금을 망각하고 국가를 저버리는 무리들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랑(銓郞)을 척리(戚里)로 삼는 것은 성대(盛代)의 일이 아닙니다. 지난번 정사(政事) 때에 척리 2인을 모두 첫째로 의망(擬望)하였으므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습니다. 이조 당상을 추고하고 당해 낭청을 파직하여 신중히 선발하지 못한 폐단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정태제(鄭泰齊)는 강석기(姜碩期)의 사위이고, 신익전(申翊全)은 조창원(趙昌遠)의 사위였다.
12월 23일 을사
사은사 최명길(崔鳴吉)은 병으로 만상(灣上)에 머무르고 부사 이경헌(李景憲)과 서장관 신익전(申翊全)이 강을 건너 심양으로 들어갔다.
12월 25일 정미
헌부가 아뢰기를,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정(李靖)은 갑자년에 적에게 빌붙었다는 소문이 지금까지 선비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행히 법망(法網)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보존하고서도 오히려 아직 의관(衣冠)의 대열에 끼어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에 제수되었는데, 그 제목(除目)이 한번 내려지자 여론이 놀라고 분통해 하고 있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박황(朴潢)을 대사헌으로, 유영(柳潁)·조석윤(趙錫胤)을 교리로, 조계원(趙啓遠)을 수찬으로, 심택(沈澤)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26일 무신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기를,
"신은 뼈에 사무치는 비방을 받고 거친 외방에 버려짐을 달게 여기고 있었는데, 삼가 천지 부모와 같으신 은혜를 받아 죄를 면해주시고 직첩(職牒)이 또 돌아왔으나 죽을 때까지 초야에서 칩거할 마음으로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늙고 병든 이 목숨은 아침 저녁으로 죽기만 기다리고 있으니,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방법이 없어 오직 밤낮으로 감격하며 눈물을 흘릴 따름입니다. 지난번에 상후(上候)가 불편하시어 오래도록 회복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삼가 듣고 신하된 자의 마음에 근심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나, 본래 의술(醫術)에 어두워 정성을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근래 또 떠도는 소문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에 따라 장차 5천 명의 군병을 징발하여 심양을 도와 대명(大明)을 침범한다고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랍고 의심하는 마음이 정해지지 못한 채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릇 신하로서 군주에 대하여 따를 수 있는 일이 있고 따를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계씨(季氏)에게서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따르지 않을 바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050) 당초 국가의 형세가 약하고 힘이 다하여 우선 눈앞의 보존만을 도모하는 계획을 하였던 것이나, 지금은 전하께서 난을 평정하고 바르게 되돌리려는 큰뜻을 가지고 와신 상담해 오신 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머지 않아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찌 가면 갈수록 미약해져서 일마다 순순히 따라 끝내 하지 못하는 바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오늘날 계획하는 자들이 예의(禮義)는 족히 지킬 것이 못 된다고 하니 신은 예의로써 분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해만 가지고 논한다 하더라도 강포한 이웃의 일시적인 사나움만 두려워하고 천자(天子)의 육사(六師)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원대한 계책이 못 됩니다.
정축년 이후로 중조(中朝)의 사람들이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데, 특별히 용서해 주고 있는 까닭은 우리를 구해 주지 못하여 패배하였고 우리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것이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관하(關下) 열둔(列屯)의 군병들과 해상 누선(樓船)의 병졸들이 오랑캐를 쓸어내고 옛 강토를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잘못을 금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 나라 사람들이 호랑이 앞에서 창귀(倀鬼)051) 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죄를 문책하는 군대가 벽력같이 달려와 배를 띄운 지 하루면 곧바로 해서(海西)와 기도(畿島) 사이에 당도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두려움이 심양에만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세력이 한창 강하여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하는데, 신은 명분과 의리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것인 만큼 이를 범하면 반드시 재앙이 이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끝내 망하는 것보다는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이 순조로우면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고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면 근본이 공고해집니다. 이렇게 나라를 지키고서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적은 아직 없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2백 년의 공고한 기업(基業)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宣祖昭敬大王)께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임진 왜란 때에 구원해 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만일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일을 한다면, 천하 후세의 의론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 계신 선왕(先王)을 뵐 것이며 또 어떻게 신하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단연코 다시 도모하고 서둘러 대계(大計)를 정하시며 강포함에 뜻을 뺏기지 말고 사특한 얘기에 두려움을 갖지 마시어 충신과 의사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신이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대부(大夫)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 되었습니다. 비록 폐하여 물러나 있는 중이나 이 국가의 막대한 일을 당하여 의리상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번 유림(柳琳)이 갈 적에는 신이 원방에 있었고 일도 급박하여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여한이 뼈에 사무쳐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고 어리석은 정성을 진달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
하였는데, 회보하지 않았다.
12월 27일 기유
청사(淸使)가 의주에 이르러 말하였다.
"군사 출동 시기가 점점 박두해 오고 있어서 병사를 다스리는 일이 하루가 급한데, 황해 병사 신경호(申景琥)는 병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국왕께 아뢰어 이완으로 대신하게 하라. 우리들은 이완의 이름으로 심양에 돌아가 보고하겠다."
당초 칙사가 나올 적에 마호(馬胡)는 자기 말을 의주(義州)에 두고 기르게 하였는데, 그가 의주로 돌아 갔을 때에는 말이 이미 병들어 죽어 있었다. 마호가 그 피육(皮肉)을 가져 갔다가 베어 낸 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말을 맡아 지키던 자를 힐문하자, 귀신에 기도드리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하였다. 마호가 성을 내며 말하기를,
"내 말을 죽이고 성황(城隍)에 나를 저주하였으니 내 병은 반드시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급히 국왕에게 치계(馳啓)하여 말을 지키던 자와 부윤의 죄를 다스리고 심양에 즉시 보고하라."
하였다. 반송사(伴送使)가 이 일을 보고하니, 비국이 아뢰기를,
"고기를 베어 귀신에 기도하였다는 말이 말을 지키던 자의 입에서 나와 마호가 진노하고 있으니, 심상하게 처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의주의 신임 부윤을 서둘러 차출하고, 황일호(黃一皓)를 또한 붙잡아 와 말을 지키던 자와 함께 중하게 다스린 다음, 이러한 내용으로 먼저 심양에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황일호는 교대자가 내려 간 뒤에 붙잡아 오라."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청나라사람이 이미 이완으로써 신경호(申景琥)를 대신하여 부장(副將)으로 삼게 하였으니, 이완이 비록 근시(近侍)의 반열에 있긴 하나 속히 내려 보내 해역(海役)의 제반 일을 처리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인하여 신경호를 붙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12월 28일 경술
도승지 이기조(李基祚)의 파직을 명하였는데, 구인후(具仁垕)가 올린 차자 때문이었다.
12월 29일 신해
청죽(靑竹)·생강(生薑) 및 벼 종자를 심양에 보냈다.
12월 30일 임자
헌부가 아뢰기를,
"장령 유석(柳碩)은 본래 경박한데다가 술을 좋아하여 체면이 없는 자로서 그전의 마음 씀씀이와 하는 일을 보면 길인(吉人)이나 정사(正士)가 결코 되지 못한다 할 것입니다. 저번에 본직(本職)에 의망(擬望)되었을 적에 전조(銓曹)의 당상이 재삼 어려움을 표명했다고 하는데, 태연히 출사(出仕)하여 도무지 염치가 없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강화(江華) 마니산(摩尼山)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산신(山神)에 제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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