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0권, 인조 18년 1640년 1월

싸라리리 2026. 1. 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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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갑인

좌부빈객 신계영(辛啓榮)이 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이 죽었다. 동선은 사람됨이 순후하고 근실하였는데, 비록 굽히지 않는 강직한 자태는 없었으나 조정에 선 지 50여 년이 되도록 하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않았으며, 사람들도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1월 4일 병진

비국의 문랑청(文郞廳) 세 사람을 삼남(三南)에 보내어 주사(舟師)를 점검하게 하였다.

 

남이웅(南以雄)을 형조 판서로, 오준(吳竣)을 좌부빈객으로, 조정호(趙廷虎)를 우부승지로 삼았다.

 

1월 6일 무오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가 무주(茂朱)의 적상 산성(赤裳山城)을 수축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에 전선(戰船)을 분담하여 정해 주는 때에, 경기의 경우는 배를 사는 비용을 민결(民結)에서 마련해 내는 것이 불가합니다. 본국 여정(餘丁)의 면포(綿布) 15동(同)과 호조의 면포 10동과 병조의 면포 10동을 지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7일 기미

장령 유석(柳碩)이 상소하기를,
"신은 원래 성질이 차분하지 못하고 어리석어 기미를 살피지 못하는데다가 자신의 의견만 믿고서 굽신거리지를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김상헌은 벼슬이 높고 총애가 두터운 신하인데도 임금을 저버리고 국가를 배반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임금이 있다는 것만 알 뿐 권신(權臣)의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니, 차라리 모략에 걸려드는 한이 있어도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외람되이 본직에 있으면서 생각하고 있던 바를 대략 진술하였습니다마는, 신도 속이 있는 사람인데, 어찌 이러한 인간을 한 번 논하였다가는 곧바로 뜻밖의 화가 닥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대체로 광망(狂妄)한 신의 소견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조정에는 모두 상헌을 두둔하는 사람만 있어서 눈을 흘기고 이를 갈며 기필코 신을 죽이려 드는데, 다행히도 성상께서 천지 부모와 같이 분에 넘치는 관용을 베풀어 주신 덕택에 말단 직책이나마 채우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틈타 습격하려는 음모가 형체없는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물여우처럼 모래를 머금고 해독을 끼치려 그림자를 살피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으로서 신 역시 스스로 짐작하고 있는 바이니, 마음 씀씀이와 일을 행함에 있어 어찌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니, 어떻게 오늘날의 상황을 아시겠습니까. 상헌이 굳건한 형세와 타오르는 위세로 한 세상의 화복을 마음대로 해 온 지 18년 동안에 자기편이 아닌 자는 곤궁케 하고 자기와 같은 자는 영달케 하였습니다. 신 역시 인간의 정리가 있는 자로서 진실로 이미 얻은 직책을 잃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고 보면, 하필 이롭기 마련인 길을 버려두고 범하지 말아야 할 노여움을 돋구어서 스스로 전복되는 결과를 자초하겠습니까. 상헌의 소를 보건대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죽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일개 필부의 몸인데도 자결하지 못하고서 스스로 목을 매는 필부의 작은 절개를 종묘 사직을 받드는 임금에게 기대하고 있으니, 어찌 이렇게도 생각이 부족하단 말입니까.
신은 바로 전하의 신하로서 아낄 분은 오직 임금뿐이니, 비록 수만 번 주륙을 당하더라도 의리상 입을 다물고 있기가 어렵지만, 신 역시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간의 논이 바르지 못함을 내가 이미 통촉했으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책을 살피라."
하였다.

 

1월 8일 경신

이행원(李行遠)을 우부빈객으로,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유심(柳𥳍)을 장령으로 삼았다.

 

1월 9일 신유

대사헌 박황(朴潢)이 아뢰기를,
"삼가 유석의 사람됨을 살펴보건대, 일생토록 처신함이 경박하고 음흉하며, 말을 들어보고 눈동자를 살펴보아도 착한 사람이나 올바른 선비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신이 평소에 늘 말하던 것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같은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보면 제멋대로 탄핵하며 악을 물리치고 선을 드러내는 시늉을 약간 보임으로써 그저 체면이나 유지하려고 할 뿐이었습니다. 지금 유석이 자책한 상소를 살펴보건대, 자신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내용으로 낭자하게 채워졌으니, 사람으로서 어찌 이토록까지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의 논이 김상헌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 말을 붙잡아 강령으로 삼는단 말입니까. 그 마음을 살펴 보면 상의 뜻을 미리 헤아리고는 선수를 쳐서 상의 노여움을 격발시킬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 유석이 김상헌에게 배척을 당한 지는 오래 전부터였습니다.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자기의 감정을 풀며, 팔뚝을 걷어붙이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식자들이 모두들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기는데도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한 채 도리어 상헌을 기화로 입신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한편 사람을 빠뜨리는 함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옛날 소인들이 당시의 임금을 경동시켜 화를 불러들이고 난의 실마리를 만들었던 말들을 주워 모아 장황한 문자로 성상을 현혹시켰으니, 이 또한 임금을 가벼이 여기고 조정을 업신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헌이 조정에서 물러나와 전야에 묻혀 있는데도 오히려 그를 권신(權臣)이라고 일컬었는데, 그도 이 말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직 일망 타진하려는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사람들이 그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인데, 그와 더불어 서로 따지자니 신은 실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치우친 마음을 끊어 버리시고 안정된 마음으로 성찰하신다면 시비와 선악이 모두 성상의 살피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대간의 논이 바르지 못하다.’고까지 분부하셨으므로 신은 참으로 황공하고 의아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말씀드려야 할 일이 어찌 한두 가지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일개 미세한 일을 논하였다가 오히려 군부에게 의심을 갖게 하였으니,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을 반성해 볼 때 창피하여 죽고만 싶은 심정이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대각(臺閣)에 들어가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남을 이토록 의심하니, 남들이 경을 의심하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리고 김상헌은 죽는 척하면서 사람을 속이고 형의 죽음도 돌보지 않았으니 그의 마음과 행실을 알 수 있고, 낙토(樂土)에 편안히 누워 고량 진미를 실컷 먹고 있으니 그의 고절(苦節)도 알 만한 일이다. 그의 소행은 이런 식에 불과하니, 경들은 그를 고귀하게 여기지도 말고 또 번거롭게 사직하지도 말라."
하였다. 지평 윤득열(尹得說)도 이 문제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심희세(沈熙世)가 아뢰기를,
"유석이 공론에서 버림받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헌부가 체직을 청한 것도 가볍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석이 스스로 반성하여 이에 따르지는 않고 도리어 김상헌의 일을 가지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기발하게 적중시키려는 계책을 삼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또 ‘신은 전하의 신하’라는 등의 말까지 있는데,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렇듯 아첨하는 말이 있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처치할 즈음에 아울러 논핵하려 하였으나, 동료에게 저지를 당하였으니, 파척(罷斥)을 명하소서."
하고, 헌납 이만(李曼)이 아뢰기를,
"동료가 ‘유석의 상소를 보건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날조하여 모함하려는 태도가 뚜렷이 드러났다.’는 이유로 논핵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생각하기를 ‘논핵을 당한 사람은 오직 허물을 인정하고 조용히 기다려야 마땅하니, 스스로 변론을 제기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리고 그 상소의 말도 과격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격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되겠지만, 끝내 날조하여 모함했다는 죄를 씌운다면 같은 조정에서 자기를 미루어 남을 생각해 주는 도리가 못 될 듯싶다. 그리고 이것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도 아닌데, 처치하는 날에 여전히 논핵한다면 자못 조용히 대처하는 자세가 못 된다. 요컨대 다시 더 함께 상의하여 합당함을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평소부터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려는 것으로서 사람을 너무 각박하게 대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그를 비호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신과 유석의 관계는 공개 석상에서 겨우 한두 번 접하는 정도의 것으로서 본래 왕래하며 사귄 교분이 없기 때문에 실로 그 사람됨이 어떠한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신 또한 모두 옳다고 감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급급하게 다시 거론하여 시비의 단서를 더욱 야기시키기까지 한 것에 대해서는 신은 그것이 과연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본래 분분하게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싫어합니다만, 자신의 의견을 굽혀 가며 남의 주장을 따르는 것 또한 신이 감히 마음 편히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거듭 논변하여 기필코 진정시키려고 하였습니다만, 일이 생각과 어그러져 끝내는 한층 더 풍파를 일으켜 도리어 사소한 일로 번독케 하고 소요를 일으킨 결과를 면치 못하였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말하고 답하였다. 대사간 최혜길(崔惠吉)이 ‘윤득열(尹得說)과는 상피 관계로서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인퇴(引退)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경박하고 음험한 작태를 미워하여 실증을 들어 논핵한 것은 실로 간관으로서 악을 없애려는 뜻에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상식에 어긋난 일이 생기는 것은 함께 따질 거리도 못 됩니다만, 미안한 분부를 내리신 것은 실로 실정 밖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중한 논박을 당한 몸으로 방자하게 상소를 올려 장황하게 떠벌리며 성상을 현혹시킨 일에 대해 그 죄를 거론하여 바로잡는 것은 바로 간관의 직분입니다. 이에 반해 근거없는 말과 실속없는 글로 시비를 어지럽히고, 진정시킨다는 말을 빙자하여 은근히 비호하려는 의도를 둔 것은 그 마음이 가증스럽니다. 그리고 상피하는 처지인 바에야 형세상 처치하기는 곤란합니다. 지평 윤득열, 대사헌 박황, 정언 심희세, 대사간 최혜길은 출사시키고, 헌납 이만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대사헌 박황, 지평 윤득열, 정언 심희세도 체차하라."
하였다.

 

1월 11일 계해

교리 조석윤(趙錫胤), 수찬 조계원(趙啓遠)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장령 유석(柳碩)은 본래 성질이 사악하여 온갖 음험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자로서 행실은 편벽되고 말은 번지르르한데 모략을 장기로 삼고 당파 만들기를 능사로 삼았으므로, 발신(發身)하기 전부터 식자들이 벌써 그의 상서롭지 못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벼슬길에 막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동지 몇 사람과 더불어 괴이한 논을 빚어 냈습니다. 그의 마음의 형적을 추측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평소 절친했던 자도 모두 곁눈질로 흘겨볼 정도이니, 그가 매우 간악하고 사특한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꺼려하여 감히 말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상헌만이 홀로 엄한 말로 배척한 결과 유석이 이에 저촉되어 10여 년간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동안 악감정을 품고 칼날을 감춘 채 기회를 엿보아 온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상헌이 시의(時議)에 죄를 얻게 되자 입술을 놀리고 혀를 내둘러 묵은 감정을 마음껏 풀면서 임금을 무시한 부도(不道)의 죄명으로 덮어 씌웠습니다. 유석의 원래의 정체가 이에 이르러 모두 드러났다고 하겠는데, 유독 성상께서만 밝게 보시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가 국가에 해를 끼치는 것이 어찌 좋은 곡식을 갉아 먹는 해충의 피해 정도뿐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살펴보실 때 오늘날 조정의 신하 중에 과연 임금을 무시하고 스스로 전횡하면서 위엄과 복록의 권한을 점거하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오늘 유석을 논하는 자가 있어도 유석은 상헌으로써 막아 내고 내일 유석을 논하는 자가 있어도 또 상헌으로 빌미를 삼아 막아 내면서 한결같이 상헌을 이용물로 삼아 종신토록 자신을 보호할 계책을 삼을 것이니, 아, 역시 교활하다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유석은 ‘신은 전하의 신하’라는 등의 말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혼조(昏朝) 때 적신(賊臣)이 남긴 영향으로서 그 당시에도 듣고 경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또 성명의 조정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황(朴潢)이 아뢸 적에 김상헌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유석이 들쑤셔 낸 상소에 의거하여 낱낱이 거론하고 상헌의 죄를 지적하셨으니, 아, 성명께서 치우쳐 얽매인 것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또 이토록 한결같이 잘못된 분부를 내리실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유석의 마음가짐과 행실이 화를 빚어 내고 국가의 발전을 방해한 죄는 버려두고라도, 조정을 경멸하고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현혹시킨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비워 이치를 살피시고 시비를 밝게 분변하시어 속히 파직을 명하심으로써 조정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석의 상소가 비록 과격하다 할지라도 그 말이 모두 꼭 옳지 않다고는 못할 것이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과연 상소의 말과 같다면 마땅히 더욱 힘쓰기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 감히 이렇듯 아름답지 못한 행동을 하여 위복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말을 실증하려 하는가."
하였다.

 

1월 12일 갑자

간원이 아뢰기를,
"탄핵을 받은 사람은 오직 스스로 반성해야 마땅한데, 장령 유석은 감히 상소를 올려 대간과 서로 겨루면서 끌어들이면 안 될 일을 억지로 끌어들여 스스로를 변명하고 남의 입을 막을 발판을 삼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더구나 이미 대간의 비평을 받고도 오래도록 헌부의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은 일의 체모로 볼 때 더욱 타당치 못한 바가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경여(李敬輿)를 대사헌으로, 정태제(鄭泰齊)를 지평으로, 임전을 헌납으로, 심세탁(沈世鐸)·이빈(李彬)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13일 을축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1월 15일 정묘

길주 목사(吉州牧使) 최유해(崔有海)가 별도로 3천여 석의 곡식을 장만하였다고 본도 감사가 보고하니, 숙마 1필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봄 추위가 겨울철보다 심하니, 해조로 하여금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나누어 주도록 하라."

 

홍서봉(洪瑞鳳)을 영의정으로, 김수현(金壽賢)을 대사간으로, 민응협(閔應協)을 부교리로, 이만(李曼)을 수찬으로, 신천익(愼天翊)을 사간으로 삼았다.

 

1월 16일 무진

영의정 홍서봉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부드럽게 타이르며 윤허하지 않았다.

 

왕세자가 사서 정지화(鄭知和)를 보내와서 문안하였는데, 정월 초하루의 하례를 위함이었다.

 

1월 17일 기사

사은 부사(謝恩副使) 이경헌(李景憲)이 예부관(禮部官)에게 면대(面對)를 청하여 ‘국왕의 병이 날로 깊어 가는데 세자를 대군과 교체하여 생전에 세자를 보고자 한다.’고 갖추어 개진하였다. 용골대(龍骨大)가 호부(戶部)로 사신을 불러서 사은 방물(方物)은 받지 않고 말하기를,
"지난번 만장(滿將)이 떠날 때에, 다만 왕의 병세가 어떠한가만을 살피고 왕래에 따른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이곳에서 엄하게 단속하였는데, 그대 나라가 뇌물을 많이 가져 왔으니, 역시 매우 옳지 않다. 더구나 이번 방물은 정조(正朝)나 하절(賀節)에 비교할 바가 아니니, 예로 보거나 이치로 볼 때 받을 수가 없고, 또 잘못된 사례를 만들어 뒤폐단을 끼칠 수도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 조정이 이미 세자가 귀근(歸覲)하는 일로 이렇게 진달하여 청했는데, 지금 또 사신이 간절하게 고하니, 국왕의 병세가 매우 중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 이곳에서 사신을 보내 문안해야 마땅하겠지만, 그대 나라가 바로 얼마 전에 만장(滿將)의 사행(使行)을 맞이하느라 필시 접응하는 폐단이 많았을 것이기에 지금 사람을 보내지 않겠다. 그대가 돌아가거든 그대 나라에 말을 하여 별도로 한 사람을 뽑아서 병세가 어떠한지 보고해 오도록 하라. 그러면 이곳에서 조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심양(瀋陽)의 재신(宰臣)들이 치계하기를,
"용골대(龍骨大)와 범문정(范文程) 등이 함께 관소(館所)로 와서 남한 산성을 증축한 일과 귀화한 도주자를 곧바로 추쇄(推刷)하여 송환하지 않은 일 등을 힐문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한결같이 처음의 약속대로만 한다면 세자나 대군이 자신들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까지 나가지 못하는 것은 자초한 결과 아닌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이번에 온 신문(申文)은 국왕이 알지 못하는 일로서 조정에서 임의대로 한 일이다. 세자의 생각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하자, 세자가 남한 산성 등에 관한 일을 반복해서 논변하고, 또 말하기를 ‘신문에 관한 일은 그 곡절을 알지 못하겠으나, 국왕이 알지 못하는 것은 필시 병세가 점차 위독하여 그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용골대가 한(汗)이 있는 곳에 들어 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와서 말하기를 ‘본국에 있는 대군(大君)이 아직 한번도 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오도록 하라. 원손도 함께 오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이 출발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뒤에야 세자를 출발시켜 봉황성(鳳凰城)에서 서로 교체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세자가 떠나더라도 빈궁은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러한 뜻으로 급히 본조(本朝)에 통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선전관을 파견하되 밤새 달려 두 대군이 출발하는 시기를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원손은 나이가 어려 아직 강보에 있고 또 질병이 많아 결코 먼 길을 가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이 내 뜻을 따르지 않고 억지로 사람을 보내자고 청을 하였다가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일까지 당하게 되었는데, 이제야 그대들의 마음이 흡족한가. 슬하에는 오직 이 두 아이밖에 없는데, 이제 모두 이역(異域)으로 쫓아 보내고 나면 병든 몸으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곧바로 사신들의 행차가 또 오고 갈 것인데 양서(兩西)의 백성들이 무슨 수로 이것을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1월 18일 경오

평안도 자산(慈山)·성천(成川)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 경기 양주(楊州)의 수락산(水落山)이 무너졌다.

 

청나라 칙서가 심양으로부터 왔는데, 그 대략에,
"원래 그대 나라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반복하기에 두 왕자를 인질로 삼았다. 그대가 만약 명을 준수하려 했다면 올량합(兀良合)의 인호(人戶)와 이곳에서 도망해 돌아간 자들을 모두 쇄환해 보내고 징집이나 조발(調發)하는 일을 지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직접 와서 조근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아들을 보내어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하게 했다면, 나의 의심도 절로 풀려 반드시 두 왕자를 끊임없이 왕래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두 아들이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가 돌아가지 못하게 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스스로 의심한 나머지 나에게까지 의심을 사게 되어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또 지난번의 지시를 어기고 남한 산성과 평양성을 마음대로 수축하여 말 먹이와 식량을 저축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곳의 성지(城池)들도 이와 같이 수선하고 있다. 이는 내가 응당 그대를 의심해야 할 일인데 그대가 오히려 나를 의심하니, 이것은 무슨 심사인가. 왕의 토지를 내가 이미 얻었고, 왕의 군사를 내가 이미 패배시켰으며, 왕 자신과 왕의 처자 및 여러 신하의 처자들을 내가 이미 모두 거두었다가 다시 놔두었다. 지금 또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다시 전쟁의 실마리를 일으키려고 하는가.
만약 그대의 충성심이 확인되기만 하면 세자를 돌려 보낼 뿐만이 아닐 것이니, 여러 아이들이 이곳에 있거나 그곳에 있거나 간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지금은 그대로 세자를 보내어 귀성케 할 것이니, 그대는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아들과 세자의 아들을 속히 봉황성으로 출발시켜 도착하도록 하라. 나도 곧바로 세자를 출발시켜 봉황성에서 서로 교체하게 하였다가 문병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곳에 있는 아들도 역시 귀근하도록 할 것이니, 삼가 하늘을 배반하고 명을 어기지 말라."
하였는데, 비국이 여러 대신을 불러 탑전에서 결정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병이 아직 차도가 없으니, 인견할 수 없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이 문서를 살펴보건대, 허다한 말들이 우리를 협박하고 의심하는 뜻이 숨어 있고 심상하게 졸지에 한 말이 아닌 듯하니, 뒷날 처리하기 어려운 근심이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군의 행차를 중지할 수 없다는 뜻은 신들이 이미 지난번에 모두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원손(元孫)의 경우는 나이가 어리고 병이 많아 아직도 강보에 있으니 어찌 수천 리의 먼 길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우리쪽에서 변명할 말이 있으니, 저들도 혹 들어줄 가망이 있습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급히 중사(中使)를 차출하여 밤낮으로 달려가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오늘 도착한 문서를 보건대 원손도 가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두 대군의 행차만큼은 정지시키기 어려울 듯하니, 일을 아는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대군이 들어간다는 뜻을 어쩔 수 없이 먼저 보고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더 자세히 살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9일 신미

비국의 신하들이 아뢰기를,
"원손(元孫)의 행차는 결코 가벼이 허락할 수 없으니, 의당 ‘나이 어리고 병이 많아서 먼 길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청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달리 좋은 방도가 없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그들의 말을 흔쾌히 따라서 의심과 노여움을 풀어주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세자의 왕래가 주사(舟師)를 정비하고 온갖 곡식을 파종하는 때에 해당되니, 서쪽 지방 백성들이 형세상 필시 농사철을 놓치고 말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다 하더라도 백성을 보호하는 정치는 더욱 중대한 것이다. 문서 가운데 대군과 원손이 들어가고 나서 세자는 6, 7월 쯤에 내보내라는 뜻으로 글을 지어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성상께서 이런 면까지 염려하시어 말의 뜻이 간절하고 측은하니, 보고 듣는 자로서 누구인들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승문원으로 하여금 성상의 분부대로 문서를 지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저들이 세자를 돌려보내기로 허락한 목적이 성후(聖候)를 살피게 하기 위함인데, 지금 민폐가 된다는 것을 거론한다면, 저들이 필시 의아해하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민의 정리(情理)로 말하더라도 세자가 진실로 돌아 올 수만 있다면 한때의 폐단은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백성을 위하는 성상의 뜻이 아무리 절실하다 하더라도 여론은 섭섭함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또 6, 7월경에 내보내라는 말은, 이곳에서 기일을 정하는 것이 되니 역시 타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저 그 곡절만을 진술하여 저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일의 이치상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이와 같으니, 농한기에 하도록 써서 보내라."
하였다.

 

1월 20일 임신

비국이 아뢰기를,
"전에 아뢴 대로 ‘원손이 어리고 병이 있다.’는 것을 말하면 이것은 변명하는 말이 아니어서 저들이 혹 우리의 말을 들어 줄지도 모릅니다. 필시 크게 거슬리게까지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저들이 응답하는 바를 살펴보고 나서 대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저들이 만약 ‘이곳에서는 한 살도 채 안 된 아이를 내보내도 모두 제대로 도착하는데, 대여섯 살이나 된 아이가 어찌 유독 먼 길을 감당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고 말꼬투리를 잡는다면,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그리고 그 의도를 살펴 보건대, 저들이 의심하고 노여워한 나머지 이렇게 한 것만은 아니다. 나의 병세가 가볍지 않기 때문에 미리 불러들여 훗날의 계책으로 삼으려 하는 것인데, 끝내 면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후회만 있게 된다면, 무슨 계책으로 뒷일을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인평 대군(麟坪大君)은 병이 많아 형세상 홀로 가기 어려우니 권솔을 거느리고 가도록 하라."

 

전식(全湜)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정태화(鄭太和)를 우윤으로 삼았는데 특지(特旨)였다. 조계원(趙啓遠)을 장령으로, 남로성(南老星)을 교리로, 윤미(尹敉)를 정언으로, 김시번(金始蕃)·박안제(朴安悌)를 수찬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 응교 이시해(李時楷), 수찬 조계원(趙啓遠) 등이 모두 상소하여 원손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으니 궁중에서 다른 아이를 보내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월 21일 계유

헌부가 아뢰기를,
"기강이 한번 해이해져 국가의 법이 엄하지 않게 되자 무뢰배가 멋대로 행하며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전 현감 석지형(石之珩)의 처가 홀로 서울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산성의 출신(出身) 조사립(趙士立)이란 자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이라는 것을 얕잡아 보고 감히 강포한 꾀를 내어 여러 날 밤 와서 겁탈하였습니다. 이에 이웃에 살고 있는 총융 중군(摠戎中軍) 신경원(申景瑗)의 벽인(壁人)이 붙잡아서 포도청에 고발하였는데, 대장 신경인이 군관배의 말을 잘못 듣고 엄하게 신문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풀어 주었으니, 일이 매우 해괴합니다. 대장 신경인은 중하게 추고하고, 조사립은 율대로 처단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22일 갑술

영의정 홍서봉과 좌의정 신경진이, 세자가 돌아오는 시기를 우리쪽에서 농한기로 늦출 경우 필시 저들이 의아해 할 것이라고 차자를 올려 간쟁하고, 우의정 심열(沈悅)도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극언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지평 조한영(曺漢英)이 상소하여 주사(舟師)를 조발하여 보낼 수 없다는 것과 원손을 심양(瀋陽)으로 보내는 것이 옳지 못함을 극언하였으나, 안에 머물려 두고 답하지 않았다.

 

1월 23일 을해

간원과 헌부가 모두 원손의 행차를 가볍게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동궁이 돌아오는 시기를 농한기까지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지고 묘당에서 다시 충분히 강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우윤 정태화가 상소를 올려 새로 제수한 관자(官資)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경의 재주는 실로 발탁해 쓰기에 합당하니, 사직하지 말라."

 

1월 24일 병자

태백이 나타났다.

 

우의정 심열이 열세 번째 정사(呈辭)하니, 답하기를,
"경이 이토록까지 사직하니, 지금은 우선 억지로 따르겠다."
하고, 인하여 사관을 보내 유시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작상(爵賞)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니, 옮기고 발탁하는 일체의 일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해야 마땅한 것으로서 임금이 독단적으로 사사로이 할 성질이 아닙니다. 우윤 정태화는 출신한 지 얼마 되지 않고 업적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몇 해 사이에 아경(亞卿)의 직질(職秩)을 제수받았으므로 제수 명단이 나오자마자 여론이 모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새로 제수한 관자(官資)를 속히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사람은 명민하고 재주가 있으니, 이와 같이 서용해도 안 될 것이 없다."
하였다.

 

1월 25일 정축

심열(沈悅)을 판중추부사로, 강석기(姜碩期)를 예조 판서로,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심택(沈澤)을 정언으로, 조계원(趙啓遠)을 교리로, 유심(柳淰)을 수찬으로 삼았다.

 

1월 26일 무인

북부 참봉(北部參奉) 하익(河榏)이 원손의 행차를 다른 아이로 대신케 할 것과 주사(舟師)의 역(役)을 먼저 명나라에 보고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소를 들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1월 27일 기묘

태백이 나타났다.

 

김자점(金自點)을 강화 유수로 삼았는데, 비국이 청하였기 때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시들시들해져 기운을 못 차리고 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하고 마는 까닭은 실로 기율이 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날 군법이 제대로 행해졌다면 자점이 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는가. 국론이 자자하여 그 당시의 형벌이 마땅함을 잃었다고 여전히 통탄하고 있는데, 지금 몇 년이 지나자 버렸던 인물을 다시 기용하여 강도(江都)의 중임을 맡겼으니, 장차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키고 외적을 방비할 것인가.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7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시들시들해져 기운을 못 차리고 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하고 마는 까닭은 실로 기율이 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날 군법이 제대로 행해졌다면 자점이 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는가. 국론이 자자하여 그 당시의 형벌이 마땅함을 잃었다고 여전히 통탄하고 있는데, 지금 몇 년이 지나자 버렸던 인물을 다시 기용하여 강도(江都)의 중임을 맡겼으니, 장차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키고 외적을 방비할 것인가.

 

비국이 아뢰기를,
"원손의 나이가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지금 다른 나라로 떠나는 행차에 백관들이 전송하는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강구해 정하여 시행케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의주(儀註)를 가지고 입계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배송(拜送)은 예가 지나친 듯하니, 입송(立送)하는 것이 적당하다."
하였다.

 

1월 28일 경진

안산군(安山郡)은 병자 호란 이후로 출역(出役) 대상 전결(田結)이 겨우 3백 30여 결밖에 없었는데, 사옹원의 어전(漁箭)이 다시 설치됨으로써 어전용으로 3백 결을 복호(復戶)하자 30결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군수 이문헌(李文憲)이 어전용 전결의 생산물을 쌀로 거두어 어물(魚物)로 교환해서 바치고자 하여 사옹원에 첩보(牒報)하였는데, 본원이 외람되다는 이유로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금년에 한하여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1월 29일 신사

이덕형(李德泂)을 예조 판서로, 김수현(金壽賢)을 부제학으로, 성태구(成台耉)를 지평으로, 허적(許積)을 부수찬으로, 황집(黃緝)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수찬 박안제(朴安悌)는 제수된 후에 유지(有旨)가 집에 도착하였는데도 곧바로 공경히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유지를 가지고 간 사람을 힐책하였습니다. 유지를 공경히 받는 것은 원래 그 예가 있으니, 이는 대불경죄로서 신하의 예가 없는 것입니다.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잡아다 추문하라고 답하였다. 금부가, 신하의 예가 없는 것은 일죄(一罪)001)  에 해당되니 결안(結案)하여 공초(供招)를 받을 것을 청하니, 상이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1월 30일 임오

순검사(巡檢使) 박황(朴潢)이 부안(扶安) 격포(格浦)에 진을 설치하여 호남 수로(水路)의 요충을 제어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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