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0권, 인조 18년 1640년 윤1월

싸라리리 2026. 1. 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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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1월 1일 계미

태백이 나타났다.

 

이조 참판 이경의(李景義)가 풍비(風痺)로 면직되었다.

 

윤1월 3일 을유

태백이 나타났다.

 

헌부가 김자점(金自點)을 강도 유수(江都留守)에 임명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인재난은 더욱 심각하고 지방관의 임무는 무겁지 않으니, 지금 우선 다시 임용하여 그가 행하는 바를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월과(月課) 가운데 백해 무익한 시(詩)는 과차(科次)002)  하지 말라."
하였다. 이는 이빈(李彬)의 시에 ‘어느 날에나 다시 명나라 대통의 세월을 볼 것인가[幾日重瞻大統年]’라는 글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1월 4일 병술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이식(李植)을 이조 참판으로, 이경여(李敬輿)를 대사성으로, 변호길(邊虎吉)을 장령으로, 김광혁(金光爀)을 부응교로, 유영(柳潁)을 이조 정랑으로, 유심(柳淰)을 이조 좌랑으로, 김진(金振)을 수찬으로, 이래(李䅘)를 정언으로, 이확(李廓)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윤1월 5일 정해

태백이 나타났다.

 

경상도 함창(咸昌) 유생 채이항(蔡以恒)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오늘날 국가의 일을 보건대 반드시 망하고 말 길을 걷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국가를 피폐하게 하고 재물을 쏟아 부어 저들의 끝없는 욕심을 채우다 보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재물이 바닥나고 힘이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지나간 공로를 모두 무시해 버리고 우리를 더욱 다그칠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망하는 길입니다. 지금 서둘러 그 길을 되돌려 재물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기 전에 보존할 계책을 바꿔 강구해야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 때를 당하여 큰 뜻을 분발하시고 대의를 밝게 드러내시어 긴밀하게 대신들과 더불어 경악에서 계책을 세우소서. 그리하여 세자가 돌아올 기한을 암암리에 계산해 보고 급히 강도(江都)의 계책을 정하시어 천연의 요새를 의지하여 굳게 지키고 삼남(三南)을 이끌어 조운(漕運)을 하는 한편, 명나라를 치려던 주사(舟師)로 하여금 그대로 방비하게 하소서.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겨 쓰이고자 할 것입니다.
오랑캐가 만약 우리에게 대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반드시 먼저 사신을 보내어 힐문할 것이고, 감히 곧바로 대병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복하며 엿보는 사이에 반드시 한두 달은 지체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조치가 이미 이루어져 형세가 견고하게 될 것이니, 저들이 비록 쳐들어 온다 한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는 응당 명나라 조정에 알려 관(關)에 있는 대군으로 하여금 허점을 틈타 배후를 공격하는 형세를 보이게끔 해야 할 것인데, 그러면 저들의 형세는 저절로 약해지고 우리의 형세는 자연 강해져서 저들이 대군과 빈궁을 받들어 보내기를 마치 천순(天順) 때 야선(也先)이 취한 행동처럼 할 것입니다003)  . 이렇게 해서 위급한 상황이 한번 변하여 끝내는 인심이 열복하고 종묘 사직이 영구히 보전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머물려 두고 내리지 않았다.

 

윤1월 6일 무자

정조(正朝)의 부사(副使) 이경헌(李景憲)과 서장관 신익전(申翊全)을 의금부에서 붙잡아 신문토록 하였는데, 곤장을 쳐서 남양(南陽)·양주(楊州) 등으로 정배하게 하였다. 이는 이경헌 등이 상의 분부를 따르지 않고 세자를 돌려 보내 줄 것을 청함으로써 원손(元孫)을 심양으로 들여 보내는 일이 생겼으므로 상이 이렇게 명한 것이다. 헌부와 간원이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재자관 이혼(李俒)이 대군과 원손의 출발 기일을 심양에 알리니, 청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세자의 출발은 대군이 심양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진퇴의 계책을 삼겠다."
하고, 이혼에게 말하기를,
"지난번에 그대 나라가 웅도(熊島) 부락의 경하창(慶河昌) 등을 붙잡아 보냈으나 그대로 남아 있는 자가 5백여 명이나 되기에 이곳에서 1백여 기(騎)를 파견하여 이미 모두 체포하였는데, 모두들 식량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대 나라는 모름지기 연로(沿路)에 위치한 가까운 고을의 쌀을 참작해서 지급해 주도록 하라. 그러면 후일의 세폐미(歲幣米)를 역시 이에 의거하여 감하여 주겠다."
하였다. 조정에서 부득이 경성(鏡城) 등의 고을로 하여금 그들이 와서 요구하거든 인원을 계산해서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종자 볍씨 50석을 봉황성에 보냈는데, 청나라 사람이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윤1월 8일 경인

태백이 나타났다.

 

교리 조계원이 상소하여 김자점이 국난에 달려온 곡절을 갖추어 아뢰고 억울한 상황을 호소하면서 그의 재주가 유수(留守)의 직책을 감당하기에 넉넉함을 아뢰니, 상이 일이 외람되다 하여 상소를 도로 내렸다. 계원은 일찍이 병자년 난리 때에 자점의 종사관으로서 거취를 함께 하던 자이다.

 

병조 판서 이시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지난번에 망령되이 한 가지 소견을 진술하여 성상께서 뜻을 돌리기를 바랐으나 성상의 비답은 내려오지 않고, 원손의 북쪽 행차가 이제 겨우 하룻밤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온 나라 백성들의 망극한 정성을 또한 필시 통촉하고 계실텐데 은혜를 잘라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끊어 버리는 일을 차마 하신다니, 신은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바친 비책(秘策)을 반복하여 생각해 보건대 완전 무결하여 하나도 해로울 리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성스러운 마음을 결단하시어 속히 유음(兪音)을 내려 주시기만 한다면, 앞으로 설령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임기 응변하는 계책은 신이 스스로 담당하겠습니다. 내일 출발하기 전까지는 미처 주선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도중에서라도 계책을 쓴다면 역시 늦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거듭 생각하시어 큰 계책을 정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윤1월 9일 신묘

원손이 북행(北行)하고, 대군과 부인도 함께 떠났다. 정원과 옥당의 관원들이 차비문 밖에서 서서 전송하고 백관들은 모화관에 나와 전송하였는데, 서울의 백성들이 모두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윤1월 10일 임진

헌부가 아뢰기를,
"교리 조계원은 일찍이 김자점 막하의 사람이었으니 원래 감히 그 사이에서 더불어 의논할 자격이 없는데도, 공론이 바야흐로 성하게 일어나는 때를 당하여 비호하려는 상소를 올려 시비를 혼란시켰으니, 공론을 무시하고 조정을 능멸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리 조계원을 파직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도성문 밖에 나가 원손의 행차를 공경히 전송하였습니다. 온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는데, 전하의 마음이야 어떠하였겠습니까. 재신(宰臣)이 이미 원손이 나이가 어리고 병이 많아 먼 행차를 견디지 못한다고 말하였고 청나라에서도 그다지 촉박하게 재촉하지 않고 있는 이상, 아무리 오랑캐의 성질이 포악하다 하더라도 어쩌면 우리의 말을 들어줄 이치도 있고 또 우리의 행차를 이미 출발시켰으니 믿음을 얻을 만한 단서가 충분히 있다 할 것입니다. 다섯 살 된 어린 아이가 먼 길을 가면서 안개와 이슬에 상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꼭 보장하겠습니까.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묘당에 명하여 은밀하게 잘 조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세상 온당치 못하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세자가 돌아올 때의 호행관(護行官) 오목도(梧木道)는 저들 중에서 관직이 높고 권세가 중한 인물인데, 세자를 배행(陪行)하니, 그 뜻을 살피건대 기대가 필시 작지 않을 것입니다. 접대하는 일체의 예절을 만장(滿將)의 경우과 같이 해야 마땅할 것이니, 예전대로 계하하여 접대 도감(接待都監)을 설치하고 호조 판서 이명(李溟)을 관반(館伴)으로 차임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세자가 강을 건넌 뒤에는 빈객 이하의 궁료 및 익위사 등의 관원이 배종해 와야 마땅하니, 해조로 하여금 속히 차출하여 의주에서 기다리게 하소서."
하니, 일로(一路)의 인마(人馬)가 해를 입을 것이라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

 

윤1월 11일 계사

상이, 묘당에서 세자의 귀환을 청했다가 결과적으로 원손과 대군을 아울러 이역 땅에 들여보내게 된 것 때문에, 미안한 분부를 내렸다. 이에 좌의정 신경진이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남이웅(南以雄)·이현영(李顯英)을 좌·우의 빈객(賓客)으로, 윤이지(尹履之)를 도승지로, 정치화(鄭致和)를 사간으로, 유철(兪㯙)을 응교로, 이회(李禬)를 지평으로, 김시번(金始蕃)을 수찬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설서로, 이천기(李天基)를 겸 설서로 삼았다.

 

윤1월 12일 갑오

태백이 나타났다.

 

예조가 아뢰기를,
"단오 부채는 하삼도(下三道)의 토산품인 관계로 이를 생산하고 있는 고을에서만 봉진(封進)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 수효가 많지 않으니 백성의 힘을 크게 허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봉진하는 수량을 줄인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실로 봉상(奉上)하는 예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삼도의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전란 이전의 예대로 봉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선은 지난 해의 예에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윤1월 13일 을미

비국이 아뢰기를,
"강화는 등한하게 오래도록 비워 두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김자점을 유수로 임명한 것은 특별히 가려서 한 것인데, 대간이 끊임없이 논하여 위와 아래가 서로 버티면서 이미 날을 많이 허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입장에서는 한결같이 기다리기만 하고 변통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김자점을 체차하고 속히 그 대임자를 뽑아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별로 긴급한 일도 없으니, 우선 그대로 두라."
하였다.

 

윤1월 15일 정유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가 돌아오는 것은 실로 온 나라의 전에 없던 경사이며,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들께서도 필시 저 세상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왕세자가 언제 서울에 올지 미리 예견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큰일은 종묘 사직에 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예문(禮文)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고한다.[有事必告之]’는 뜻입니다."
하니,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윤1월 16일 무술

이조 판서 이경석(李景奭)이 세 차례 정사(呈辭)하니, 겸대한 대제학만 체차하였다.

 

윤1월 17일 기해

충청도에서 서쪽으로 가던 군량선 1척이 죽도(竹島)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풍랑을 만나 침몰하여 군량 3백여 석을 유실하였다.

 

김응조(金應祖)를 장령으로, 이시해(李時楷)를 교리로, 윤득열(尹得說)을 정언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윤1월 18일 경자

예조가 동궁이 귀환할 때의 절목(節目)을 조목별로 갖추어 아뢰었다. 그 내용은 산선(繖扇)을 미리 의주(義州)로 보내고 여(輿)와 연(輦) 및 의장(儀仗)은 벽제(碧蹄)로 보내며, 입경(入京)하는 날 백관을 반으로 나누어 융복(戎服) 차림으로 영서(迎曙)에 나가 영접하고 서울에 있는 백관도 융복 차림으로 대궐에 나가 문위례(問慰禮)를 행하며, 세자도 융복 차림으로 대전(大殿)과 중전(中殿)을 배알하고 이어 종묘와 숙녕전(肅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예를 행하며, 입경한 다음날 전국에 교서를 반포하고 백관이 전(箋)을 올려 하례한다는 것이었는데, 상이 하교하였다.
"하례하는 일은 하지 말라."

 

판의금부사 구굉(具宏)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그의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강족(强族)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이경헌(李景憲)과 신익전(申翊全)을 하옥시켜 조율(照律)할 때에 곤장을 치고 도형(徒刑)에 처하는 것으로 임금께 아뢰어 시행하였는데, 옥당이 과중하게 율을 적용하였다고 말하고 밖의 의논도 많이 비난하였다.

 

윤1월 19일 신축

이조 판서 이경석(李景奭)이 서북 지방의 무사 가운데 쓸 만한 자를 선발하여 서전(西銓)에 등록시켰다가 결원이 생기는 대로 주의(注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리하여 함경남도와 북도로 하여금 시재(試才)케 하여 31인을 얻어 뒷날 임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윤1월 20일 임인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달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비인현(庇仁縣)에서 서쪽으로 가던 양곡선이 홍원곶(紅元串)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해적선 두 척을 만났는데, 모두 검은 옷에 당모(唐帽)를 쓰고 낫이나 긴 창을 들고 있었다. 2백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에 난입해 들어와서는 7, 8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적재하고 있던 군량미를 모두 노략질해 갔다.
조운선이 바다를 지날 때에는 연해(沿海)의 진장(鎭將)이 으레 관할하고 있는 지역을 탐색하여 호송하는 법인데, 마량 첨사(馬梁僉使) 김극겸(金克謙)이 애초에 망을 보고 수색하지 않아 이러한 변고가 있게 되었으므로 붙잡아다 추문하도록 명하였다.

 

비국이 대제학을 속히 차출하여 심양에 보낼 문서를 찬술하게 할 것을 계청하니, 대신, 의정부의 동벽(東壁)과 서벽(西壁), 육경(六卿), 판윤(判尹)을 명초하여 권점(圈點)하게 한 결과, 정홍명(鄭弘溟)과 이명한(李明漢)이 모두 당상으로서 추천에 끼었다. 선조(宣祖) 때부터 금상의 조정에 이르기까지 통정(通政)으로서 대제학에 승진되어 임명된 경우는 이덕형(李德馨)과 이식(李植) 두 사람뿐이었다.

 

강석기(姜碩期)를 우의정으로 삼고, 다시 이식(李植)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윤1월 21일 계묘

여주(驪州) 등 한강 상류 다섯 고을에 기근이 더욱 심하게 들었으므로 강화(江華)의 쌀 1천 석으로 나누어 진휼하게 하고 추수 때에 갚도록 하였다.

 

윤1월 22일 갑진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위에서 나와 북두성 아래로 들어갔다.

 

윤1월 23일 을사

교리 이시해(李時楷)와 부교리 조석윤(趙錫胤) 등이 모두 상소하여 원손(元孫)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극언하였으나, 모두 답하지 않았다.

 

김육(金堉)을 형조 참의 겸 대사성으로, 성태구(成台耉)를 지평으로, 김진(金振)을 부교리로, 정지화(鄭知和)를 수찬으로 삼았다.

 

윤1월 24일 병오

우의정 강석기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은 덕행과 인망이 모두 중하니 진실로 이 직책에 합당하다. 마땅히 사직하지 말고, 관청에 누워서라도 도를 논하여 상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윤1월 25일 정미

유성이 대각성 위에서 나와 북두성 아래로 들어갔다.

 

경상좌도의 민정(民丁) 2천 4백여 명을 일괄 차출하여 정축년 전투에서 사망한 군액(軍額)을 보충하였다.

 

윤1월 26일 무신

헌부가 아뢰기를,
"전 병사(兵使) 신경호(申景琥)는 장수로 정해진 뒤에 바다에서의 복무를 꺼려하여 거짓으로 병이 있다고 칭탁하고 많은 뇌물로 계책을 행하여 자기의 뜻을 끝내 이루었습니다. 그리고는 파직되어 돌아올 때에 버젓이 교자(轎子)를 타기까지 하였으니, 임금의 명을 멸시하고 조정을 가벼이 여긴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작을 삭탈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강석기가 세 차례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상이 온유하게 타이르며 윤허하지 않았다.

 

윤1월 27일 기유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용만(龍灣)004)  에서 돌아와 병 때문에 사은 숙배하지 못하였으므로 상소하여 대죄하니, 상이 위로하며 타일렀다.

 

원손(元孫)이 도중에 병이 들었다. 비국이 행차를 서둘지 말고 평양에서 머물면서 서서히 원기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나아가게 할 것을 계청하니, 따랐다.

 

직강 조한영(曺漢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원손이 이미 길을 떠났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국경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래도 잘 대처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오직 전하께서 스스로 마음을 결단하여 큰 계책을 속히 결정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신임하는 신하 가운데 지략이 있는 자를 평안 감사에게 보내 그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선처하게 하면 될 것이니, 그 사이의 계책은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병가(兵家)의 책략은 기밀(奇密)을 귀하게 여기므로 군대에 관한 사항은 밖에 나가 있는 장수에게 전담하여 절제하도록 위임하는 것이니, 임기 응변하여 전화 위복함은 오직 임무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뜻으로 주사(舟師)를 지휘하는 대장에게 은밀히 유시하기만 하면 그 사이에서 편의에 따라 자연 처치하게 될 것이니, 여기서 멀리 제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금 천하에 오랑캐를 섬기는 신하가 되어 예측 못한 화를 면하였던 적이 없었으니, 변송(汴宋) 때 유예(劉豫)의 일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005)  . 따라서 백성의 힘이 완전히 고갈되고 국가의 형세가 이미 기울어 온 종족이 모두 북쪽으로 끌려가도 반드시 망하게 되느니 일찌감치 후회해도 소용없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세자가 이제 막 도착하고 원손이 아직 출발하지 않은 이 때에, 팔도에 애통해 하는 조서를 내리고 5천 주사(舟師)의 역을 파한 뒤 군신(君臣) 상하가 먼저 강화에 들어가고 연해의 백성들을 모두 섬으로 옮기며 산골 백성들은 전부 산성으로 대피시켜 각도의 방백으로 하여금 요해처를 굳게 지키게 하는 동시에 별도로 대장을 선발하여 남한 산성과 강도에 주둔케 하면서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게 하고 삼남 지방과 영동과 영북 지방을 제압하여 성세(聲勢)를 삼는 한편 여러 장수들을 파견하여 각기 형편대로 점거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그러면 적이 다시 오더라도 우리가 어찌 저들만 못하겠습니까. 쳐들어 오는 군사가 적으면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고, 크게 군사를 일으키자면 아마도 명나라가 배후를 도모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저들이 필시 진퇴 유곡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수치와 두려움에 떨며 항우가 태공(太公)과 여후(呂后)를 돌려 보낸 것처럼006)   강화를 요청할 것이니, 빈궁과 대군도 돌아올 수 있고 치욕도 설욕할 수 있으며 큰 원수도 갚게 되어 나라를 중흥한 업적이 선왕보다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를 들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영중추부사 이성구(李聖求)가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급히 내관(內官) 한 사람을 보내어 ‘원손이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가 중한 병을 얻게 되어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고하게 함으로써 평양에 머물면서 동궁의 귀환을 기다리게 하소서. 만약 오랜 기간 머무르지 못하고 바로 북쪽으로 보내야 할 경우 원손을 함께 들여보내지 않더라도 저들은 필시 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에서 세자를 돌려 보내기로 허락하면서 반드시 생색을 낼 것이니, 우리 쪽에서도 그들을 영접하는 예를 넉넉히 베풀어 환심을 얻도록 함으로써 뒷날 다시 귀근(歸覲)하게 하는 바탕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청나라 사람들이 현재 우리 나라에서 산성을 증축하고 섬에 식량을 저장하고 있는 데 대하여 꼬투리를 잡으려 드는데, 만약 저들이 폐하였던 김자점을 기용하여 강도 유수로 삼았다는 것을 듣게 된다면 필시 의아해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예로부터 군사적 요새지는 관대함으로 힘을 얻는 법이지 맹렬하게 다구쳐 일을 이루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자상하고 염근(廉謹)한 사람을 택하여 그 임무를 맡기도록 하소서.
이완은 주사 부장(舟師副將)으로서 장차 해역(海役)에 복무할 예정인데 아직도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만큼 설령 때에 임박하여 군대에 이르더라도 필시 촉박할 염려가 있으니, 군정(軍丁)을 선발하여 장비를 정돈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또 이경헌(李景憲) 등은 교지를 어긴 실책이 있다고는 하나 오래도록 감옥에 있었던 만큼 역시 뒷사람에게 교훈을 남기기에 족합니다. 중하게 견책을 내리기까지 하는 것은 여론과 어긋날 듯하니 석방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고, 비국에 계하하였다. 비국이 그 말을 따르는 것이 온당하겠다고 회계하니, 왕이 명하여 김자점을 체직케 하고, 이완을 속히 떠나도록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따르지 않았다.

 

윤1월 28일 경술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치계하여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강호(江戶)에서 본도(本島)로 돌아왔다고 아뢰니, 조정이 역관 홍희남(洪喜男)을 파견하여 글을 보내 위문하고 아울러 일본의 사정을 탐문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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