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0권, 인조 18년 1640년 2월

싸라리리 2026. 1. 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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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계축

좌의정 신경진이 아홉 차례나 정사(呈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김자점(金自點)과 심기원(沈器遠)을 호위 대장으로 삼고 예전에 거느렸던 군관(軍官)을 다시 거느리게 하였다.

 

병조가, 세자가 돌아올 때에 시강원과 익위사의 관원으로 하여금 벽제(碧蹄)에 나아가 맞이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청나라 장수 마부달(馬夫達)이 병으로 죽었다. 비국이 그의 집에 부물(賻物)을 보내고 그의 형인 만월개(滿月介)에게 위문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신경진을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으로, 이행원(李行遠)을 대사간으로, 이경직(李景稷)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2월 3일 갑인

검은 기운이 해 곁에서 일어나 오랫동안 해를 가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 반드시 위로 종묘 사직에 고하고 아래로 신민들에게 반포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과 경사를 함께 한다는 뜻으로 고금에 통행하는 법입니다. 이제 왕세자가 돌아오는 것은 실로 조종들께서 묵묵히 도우시고 만백성들이 지극히 원한 데서 나온 것으로 이는 예전에 없던 나라의 큰 경사입니다. 그런데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절목이 시행되지 못하므로 조정 신하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행(陪行)해 온 그들을 접대하는 예도 만장(滿將)에 비하여 낮춘 바가 있다고 하는데, 후하고 박하게 하는 것은 인정상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 측에서 접대함에 있어서 전 사람들보다 도리어 못하다면 화를 내면서 말썽을 부릴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정례(情禮)로 헤아려 볼 때 실로 타당하지 않으니 해조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잘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원손(元孫)이 그대로 평양에 머물렀다.

 

제주(濟州)의 진공선(進貢船) 5척이 바람을 만나 난파되었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었다. 상이 듣고는, 본도로 하여금 그들의 처자들을 잘 구휼하게 하고 배에 실었던 공물을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2월 4일 을묘

유성(流星)이 점대성(漸臺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 하늘가로 들어갔다.

 

2월 5일 병진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청나라가 글을 보내기를,
"우리 병사가 여러 섬에서 포획한 귀순하지 않은 종족 5백여 명을 경원(慶源)과 경흥(慶興) 사이에 있는 야춘(也春) 지방으로 옮길 것이다. 너희 나라에서는 사람 수를 헤아려 곡식을 내어 우리 차관(差官)에게 보내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북 병사(北兵使)로 하여금 창고의 쌀을 내어 주게 하였다.

 

2월 6일 정사

전라좌도의 서쪽으로 갈 배 4척이 바람을 만나 난파되어 좌수영 우후(左水營虞候) 변이진(邊以震)이 물에 빠져 죽었다. 상이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2월 7일 무오

충청도 서산(瑞山)의 서쪽으로 갈 배 1척이 강화(江華) 앞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난파되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세자가 돌아올 때에 호송해 오는 청인(淸人) 8인은 모두 내정(內庭)의 신임을 받는 사람들이니, 칙서가 없다고 하여 접대하는 예를 낮추어서는 안 됩니다. 안주(安州)와 정주(定州) 두 곳에서 칙사의 예에 의거해서 맞이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박로를 좌승지로, 유철을 사간으로, 조계원(趙啓遠)을 부수찬으로, 조복양(趙復陽)을 검열로 삼았다.

 

2월 8일 기미

헌부가 아뢰기를,
"미면(米綿)을 관장하는 각사에서 청대(請臺)하여 개폐(開閉)하는 것은, 그 법이 상세합니다. 임진 왜란 이후에 별영(別營)을 설치하여 삼수미(三手米) 등의 곡식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소관(所管)의 중함이 광흥창(廣興倉)이나 군자창(軍資倉)과 차이가 없는데도 임시로 설치한 것이라는 핑계로 평소 청대하는 규례가 없습니다. 출납하는 즈음에 담당하는 관원들 중에 신중히 하는 자와 신중히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며 쓰고 남은 것을 보고함에 있어서 많게도 하고 적게도 하는 것은, 모두가 임의대로 높이고 낮추는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중간에서 소모되는 폐단도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두 창고의 예에 의거해서 청대하여 출납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일을 호조에 내렸다. 호조가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도감이 아뢰기를,
"도감의 체면은 특별하여 자그마한 각사(各司)의 규례와 같지 않습니다. 만약 감찰(監察)로 하여금 감독하게 한다면 일의 체모에 있어서 손상될 뿐만 아니라 인원을 갖추어 청대할 경우 으레 지체되어 군병(軍兵)에게 요미(料米)를 나누어 줄 즈음에 문제가 생기므로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비밀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주사(舟師)를 보내는 이 일은 참으로 국가에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인데,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비록 위협이 심해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역시 양쪽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시의에 따라 응변하여 선처할 방도를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어찌 기일에 앞서 몰래 통보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 도독(陳都督)이 김육(金堉)에게 말한 것이 다섯 가지인데, 그 하나는 주사를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말되 부득이하여 허락할 경우에는 반드시 기일에 앞서 통보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비록 불행하여 어쩔 수 없이 따르기는 하나 앞서 통보해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고 천하 사람들은 또 무엇이라 하며, 전하의 마음 역시 어떠하겠습니까. 비록 저들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로서는 차마 통보해 주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저들이 말한 바가 간절하기 그지없는데이겠습니까. 지금 어쩔 수 없어 주사(舟師)를 보낸다는 뜻을 미리 통보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대비하게 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가 통보해 주는 것을 기뻐하면서 우리의 사정을 가련하게 여길 것이며, 역시 뒷날에도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심사 숙고하여 후회가 없게 하소서."
하니, 정원에 머물려 두고 내리지 않았다.

 

2월 9일 경신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였다.
"이번 주사를 보내는 데 있어서 곽산 군수(郭山郡守) 홍세호(洪世虎)를 전영장(前營將)으로, 덕천 군수(德川郡守) 이흡(李洽)을 좌영장(左營將)으로, 중화 부사(中和府使) 이경안(李景顔)을 중영장(中營將)으로, 순천 군수(順天郡守) 구양승(具陽升)을 우영장(右營將)으로 삼았습니다."

 

민성휘가 기병(騎兵) 1백 인을 추가 배정하여 동궁(東宮)의 의위(儀衛)를 갖추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2월 10일 신유

영의정 홍서봉이 윤방을 풀어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에 윤방이 쫓겨나 시골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원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남한 산성에 계셨을 때에는 흉금을 터놓고 간언을 받아들여 부지런히 자문을 구하시었으므로 미관 말직도 모두 나아가 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도한 뒤부터는 당폐(堂陛)가 저절로 높아져 신하를 만남이 드물어졌습니다. 비록 옥후가 편치 못하여 그럴 겨를이 없어서라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와내(臥內)로 불러들여서 조용히 접견하소서. 그러면 치도(治道)에 도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답답한 마음을 풀고 조섭하는 데에 보탬이 되는 것이 부시(婦寺)들과 비교해 볼 때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사세는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고 단지 성상께서 몸소 힘쓰시는 덕만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만물과 통하지 않고 상하가 교류하지 않는다면 삼백 년 종묘 사직과 동방의 온 백성들이 다시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의 말에 견해가 없지 않다. 유념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상에게 병이 있어서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은 지가 한 해가 넘었는데, 간원이 이 말을 아뢴 며칠 뒤에 비로소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2월 11일 임술

평안 감사 민성휘가 월삭 물선(月朔物膳)을 세자의 관소에 보내었는데 물량이 정해진 한도를 넘었다. 상이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헌부가 조율하여 아뢰니, 상이 하교하였다.
"매삭(每朔)의 찬물(饌物)에 대해 물량을 정해 놓은 것은 정(情)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폐단을 제거하는 데에 뜻이 있었던 것이다. 방백으로 있는 자가 어찌 감히 명목을 속여서 더 보낸단 말인가. 계해년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정직해져서 더러운 습관이 완전히 변하고 간악한 마음이 영원히 없어졌다고 여겼었는데, 지금 갑자기 다시 보게 되었으니 한심함을 금치 못하겠다. 그 마음씀이 좋지 못하니 마땅히 벌을 주어 사람들을 경계시켜야 할 것이지만, 지금 체직시키는 것이 적당치 않으니 우선은 내버려 두라."

 

경기 감사 허계(許啓)가 군사를 배정하여 삼전도(三田渡)의 비각(碑閣)을 수직(守直)할 것을 계청하였다. 병조가 범죄자 3, 4인을 배정하여 수직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였다.
"본도로 하여금 엄히 타일러 잘 지키도록 해서 소홀히 하는 걱정이 없게 하라."

 

승지 구봉서(具鳳瑞)가 아뢰기를,
"양호(兩湖)의 전선이 잇따라 난파되어 죽은 자가 거의 80여 명이나 되어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된 자가 적지 않습니다. 휼전을 베풀라는 명은 참으로 애통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생각건대 외방의 휼전은 약간의 쌀과 베를 주는 데에 불과할 뿐이니 죽을 지경이 된 자에게 혜택이 미칠 리가 만무합니다. 병자년에 전사한 자들의 경우를 말하면, 도리어 그 처자들로 하여금 대립자(代立者)를 정하게 하고 또 번포(番布)를 징수하였으므로, 원통해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까지 사무쳤으니 참으로 애처로웠습니다.
이번에 익사한 자들 가운데 이름이 군안(軍案)에 올라 있는 자의 경우에는 대정(代定)할 때에 그 집에다 책임지우지 말고, 대정하지 못한 경우에도 고아나 과부에게 번포를 징수하지 말며, 정군(正軍)이 아닌 경우에는 결수(結數) 내의 세(稅) 이외의 역(役)을 헤아려 줄여 주도록 해도에 이문하여 신칙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그러면 관례에 따라 휼전을 베푸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처자에 대해서도 이 예에 의거하여 침탈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2일 계해

심양인(瀋陽人)이 경흥부(慶興府)의 북안(北岸)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호장(胡將) 사을규(沙乙糾)가 경흥에 와서 "현재 오랑캐 1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서 야춘(也春) 지방에다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있으니 인마(人馬)의 양료(糧料)와 농사지을 종자 곡식 3천 4백여 석을 보내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 숫자를 봉황성(鳳凰城)의 폐미(幣米)에서 감하겠다."
하였다. 부사 신응재(申應材)가 말하기를,
"이는 심양의 문서 가운데 있는 말이 아니며, 또 조정의 분부가 없어서 감히 마음대로 허락할 수 없다."
하니, 사을규가 화를 내면서 부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나가 창고를 열어 곡식 50여 석을 꺼내 가지고 갔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속히 곡식을 실어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마음대로 약탈해 가겠다."
하였다. 이에 앞서서 심양인이 "경흥의 북안에다 장차 둔전을 설치할 것이니 귀국에서 공급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연 와서 요구한 것이다. 야춘은 경흥과의 거리가 겨우 1백여 리에 지나지 않아 이로부터 북방의 걱정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사을규가 요구하고 있는 종자는 심양의 자문(咨文)에서 언급한 것이 아니니 온갖 방법을 다해서라도 막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불화가 생길 것 같으면 적당히 헤아려 보내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신응재는 변방을 지키고 있는 신하로서 뜨내기 사람이 들어오도록 멋대로 용납하였으니 그 죄를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자문에는 종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니 사리에 의거하여 깨우쳐 주고 다시는 보내주지 말아서 뒤폐단을 막게 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이경여(李敬輿)는 다른 사람보다 재학(才學)이 뛰어나 평소에 명망이 있었는데, 지금 그의 사사로운 청으로 인하여 갑자기 외직에 제수하였습니다. 머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얼마 뒤에 경여는 상(喪)을 당하였다.

 

2월 13일 갑자

검열 조복양(趙復陽)이 상소하였다. 대략에,
"전하의 세 아들과 한 손자 가운데 현재 한 손자와 한 아들만이 곁에 있습니다. 지금 또 함께 인질로 들여보낼 마음을 내어 온 가족이 청나라로 들어가는 이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차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원손(元孫)은 나이가 다섯 살도 채 못 되어 강보에 싸여 있습니다. 궁궐 안에서도 함부로 움직이기가 곤란한데, 이번 걸음이 무슨 걸음이며, 심양이 어떤 곳입니까. 한번 호랑이 굴로 들어가면 어느 날에나 다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가 가기 어렵다는 것은 저들도 역시 알고 있습니다. 간절히 말하면서 힘껏 다툰다면 이치상 혹 들어줄지도 모릅니다. 들어주지 않을 경우에는 영저(嬰杵)의 계책007)   역시 무슨 안 될 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한 가지 계책도 내지 못한 채 머리를 숙이고 손을 묶고는 한결같이 저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으니, 원손이 무슨 죄가 있으며, 종사가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시골 농부도 나이 어린 자식이 있으면 보전하고자 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도모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만승의 대국을 다스리면서도 다섯 살 난 원손을 보전하지 못하여, 이국(異國)으로 보내면서도 괘념치 않으시고 국본(國本)을 영원히 끊고서도 후회하지 않으시면서, 한갓 끝없이 욕심을 부리는 오랑캐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하고 계십니다. 부모가 되어서 어찌 차마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만약 주사(舟師)를 보내는 것을 파하고 원손을 되돌아오게 한 다음 급히 대계(大計)를 정하여 대의(大義)를 편다면 참으로 크게 좋을 것입니다만, 비록 갑작스럽게 이와 같이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편의에 따라 변통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바닷길이 험하기가 저와 같으니 이 소식은 퍼져나가 저들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배를 여러 섬에 숨겨두고 다시 들여보내지 않은 채 다만 바닷길이 험하여 배가 난파되었다고 사실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반드시 갑작스럽게 대병(大兵)을 가해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연시키면 자연 잘 도모할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속히 밀사(密使)를 파견해서 몰래 독부(督府)에게 통보하여 중국 군사와 함께 도모하면서 주선한다면 천하의 분노를 면할 수 있고 뒷날에도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속히 원손을 받들어 내지(內地)로 되돌아와 머무르게 하고는, 우선은 말을 겸손히 하여 떠날 기일을 늦춘 다음 서서히 세자가 환국하기를 기다려 대사를 결정하소서. 그러면 인심이 감동하여 분발하고 하늘이 도움을 줄 것이니, 전화 위복됨이 여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고 그 소를 불살랐다.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이시백의 비밀 차자를 내어 보이면서 이르기를,
"차자의 내용이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홍서봉이 아뢰기를,
"시백은 그보다 더 성실하게 봉공(奉公)하는 사람이 없고 신과 더불어 상의한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배 한 척을 내어 통보해 준다는 의도는 참으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이며,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본심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임경업이 이쪽과 저쪽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이 사람에게 맡긴다면 노출될 걱정이 없습니다."
하고,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임경업으로 하여금 사적인 편지로 통보하게 한다면 설령 누설되더라도 큰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리에 있어서나 인정에 있어서나 통보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 다만 대사(大事)에 대해서는 이미 부득이하여 따랐는데 소사(小事)에 대해 이와 같이 한다면, 우리가 누설시키지 않더라도 중국인들이 반드시 우리 나라를 위하여 비밀을 지켜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호인(胡人)들이 장성(長城)에 들어가 중국인을 잡으면 반드시 우리 나라의 일에 대해 묻는다고 한다. 만약 누설된다면 큰 화가 있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하니, 판중추부사 김신국이 아뢰기를,
"이 일을 대의(大義)라고 여겨 애초에 발병(發兵)하지 않았다면 모르거니와 한편으로는 발병하고 한편으로는 몰래 통보해 주면서 청나라로 하여금 모르게 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구굉(具宏)이 아뢰기를,
"신국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에서 우리 나라를 깊이 믿어 이미 복종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이 말을 듣더라도 혹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를 한창 의심하고 있으니 어찌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만약 천지 신명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된다면 어찌 나라를 보전하는 장구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일의 변화는 무궁한 것이고 강약(强弱)은 무상한 것입니다. 뒷날의 걱정 역시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으로는 중국에서 반드시 크게 허물로 여기지는 않을 듯하다. 호인이 만약 우리가 2백 년간 섬기던 나라라고 여겨서 우리의 정상을 헤아려 준다면 괜찮겠으나, 우리가 중국과 힘을 합한다고 의심한다면 어찌 큰 화가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2월 15일 병인

원손이 숙천(肅川)에 있었다. 빈객(賓客) 오준(吳竣)이 내일 안주(安州)로 향하고자 한다는 뜻으로 치계하였다. 비국이 병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나아가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8일 기사

빈객 신득연(申得淵)이 치계하였다.
"인평 대군(麟坪大君)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양에서 질가왕(質可王)과 구왕(九王) 등이 그들의 집에 세자를 초청하여 송별연을 행하였습니다. 봉림 대군(鳳林大君)과 신들도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인평 대군이 들어올 때에는 용골대 등이 곤하(混河)에 나가 맞이하였습니다. 12일 아침에 말을 전하기를 ‘세자는 내일 출발하라.’고 하였습니다. 오후에 황제가 세자를 불러서 송별연을 행하였는데 봉림 대군도 참여하였습니다. 용골대가 뜰안으로 세자를 데리고 들어가 먼저 안마(鞍馬)를 주고 다음으로 의복을 내어 주었는데, 대홍망룡의(大紅蟒龍衣)를 입게 하였습니다. 세자가 이것은 국왕의 장복(章服)이라 하면서 예에 의거하여 굳게 사양하자, 용골대가 한(汗)에게 고하고 그대로 따라 주었습니다. 침소(寢所)에서 잔치를 행하고 이어서 따라간 신하들에게 은(銀)과 초(貂)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13일에 출발하였는데, 호장(胡將) 오목도(梧木道)가 호위하여 간다고 합니다."

 

2월 19일 경오

비국이 원손(元孫)을 영유(永柔)로 옮겨 머물게 하고 형세를 보아 가면서 전진하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오랫동안 머무는 것이 이로울 것이 없으며, 옮겨가는 것도 어려울 듯하다."

 

정치화(鄭致和)를 집의로, 김시번(金始蕃)을 교리로, 조경(趙絅)을 부응교로, 이상형(李尙馨)을 교리로, 신천익(愼天翊)·박종부(朴宗阜)를 수찬으로 삼았다. 특지로 이목(李楘)을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예조가, 왕세자가 돌아올 때에 장릉(長陵)에 전알(展謁)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0일 신미

좌승지 박로를 보내어 오목도에게 문안하게 하였다.

 

내의원이, 세자가 행차하여 오는 중도에 어의(御醫)를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일이 형식적인 데 가깝다 하여 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2월 21일 임신

충청도 임천군(林川郡)의 서쪽으로 갈 배가 장산곶(長山串)에 도착하여 바람을 만나 난파되었는데, 5인이 물에 빠져 죽었다. 휼전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2월 22일 계유

크게 바람이 불었다.

 

2월 23일 갑술

영의정 홍서봉과 우의정 강석기가 재변이 있다는 것으로써 상께 수성(修省)하기를 청하고, 이어 인책하면서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내가 덕이 부족하여 재변이 연달아 일어나니, 걱정스러움이 날이 갈수록 깊어져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생각해 보건대,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으니, 경들은 사직하지 말라."

 

시강원의 관원들이 사마(私馬)로 며칠 노정(路程) 밖에서 세자를 맞이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24일 을해

날이 어두컴컴하였다.

 

경상도 선산부(善山府)에 바람이 크게 불고 천지가 어두컴컴하였으며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렸다. 전라도 일대의 10여 고을에도 이런 재변이 있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4년 동안 청나라에 있다가 돌아오는 경사(慶事)를 보게 되어 신민들이 좋아하고 성상께서 기뻐하고 있으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신령께서도 역시 말없는 가운데서 반드시 흐뭇해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묘사(廟社)에 고하고 진하(陳賀)하는 절목에 대해 모두 부표(付標)하여 시행하지 않으시고, 돌아오는 길에도 여연(輿輦)과 의물(儀物) 및 궁료(宮僚)들 중 어느 하나도 맞이하는 의식이 없습니다. 이것이 비록 백성들을 아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세자의 행차가 어떤 일인데 이와 같이 간략하게 한단 말입니까. 해조의 계사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27일 무인

옥당이 재변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상께서 수성하고 원손의 행차를 정지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매우 가상하다. 두렵게 여기면서 받아들여 시행하겠다."

 

서쪽으로 갈 충청도 배 6척이 평안도 영유현(永柔縣) 앞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난파되었다. 영선장(領船將)인 충청도 수군 우후(忠淸道水軍虞候) 한질(韓晊)과 소근 첨사(所斤僉使) 최덕인(崔德仁) 이하 1백 12인이 물에 빠져 죽었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실종되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몰랐다. 보고가 도착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애통함을 금치 못하겠다. 각별히 휼전을 거행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한질과 최덕인은 모두 남한 산성에서 힘을 다해 싸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노모와 처자에게는 특별히 후한 휼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전일에 물에 빠져 죽은 우후와 마찬가지로 시행하라."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삼남(三南)의 배가 지난번에 난파된 것이 10척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는데, 이것은 그래도 적당하게 조정하여 숫자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심양에 통보하여 알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난파된 수가 몹시 많고 장관(將官) 이하 죽은 자가 1백 10인이나 되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간 곳도 모릅니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다시 조처할 가망성이 전혀 없습니다. 청나라에서 어떻게 처치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입장으로는 실상대로 미리 통보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재주관(齎奏官)을 급히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며칠 뒤에 이완이 또, 충청도의 배 12척이 난파되어 죽은 자가 1백 19인이고, 경상도의 김해(金海)와 울산(蔚山)의 배 2척 역시 난파되었다고 보고하였다.

 

2월 28일 기묘

평안도 순안(順安)과 영유(永柔) 등에 흙비가 내려 지붕 위의 기와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

 

우의정 강석기를 세자부(世子傅)로, 이상형(李尙馨)을 사간으로, 이래(李崍)를 장령으로, 허적(許積)을 수찬으로, 정지화(鄭知和)를 교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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