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임자
세자가 종묘와 숙녕전(肅寧殿)에 전알하였는데, 출발을 고하기 위해서였다.
우의정 강석기가 상소하기를,
"신이 내일 세자를 모시고 가 벽제에서 지송해야 됩니다만, 몸이 몹시 연로하여 멀지 않아 죽을 것입니다. 이 다음에 비록 세자께서 다시 돌아오는 경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다시 세자의 모습을 보는 것은 단연코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상께서 은혜를 내려 저로 하여금 앞서서 파주(坡州)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그러면 이틀간 배행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할 것이니, 신이 비록 갑자기 죽게 되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청나라 장수들이 주사(舟師)의 상장(上將)·부장(副將)과 함께 청천강(淸川江) 서안에 모여서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배를 진열하게 하고 살폈다. 끝날 무렵에 역관(譯官) 정명수가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부장이 전에 화살에 맞았는데 병근(病根)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머리를 수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마치 큰 병이 있는 사람과 같다. 만약 또 배 위에서 덧나 전쟁터에서 종사할 수 없게 된다면 그 책임은 병이 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보낸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상장은 황제께서 정한 바이므로 병이 있다 하더라도 개정할 수 없으나 부장과 같은 경우는 억지로 내몰아서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황제께서 ‘상장이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더라도 절도사(節度使)의 직임을 체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경호(申景琥)가 정 역관에게 은 6백 냥을 주고 부장이 되는 것을 모면하였다는 이야기는 귀가 있는 자이면 모두 들었습니다. 이번에 이완(李浣)이 또 그짓을 따라 했습니다. 이들을 만약 그대로 살려둔다면 6천 명의 군사들이 모두들 뒤를 돌아보며 돌아오려고 할 것입니다. 배가 출발하기를 기다려서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청나라 장수들이 정 역관에게 코가 꿰이어 부장을 체임하기를 청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사세는 체임하고 안하고가 전혀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참으로 가슴아픕니다. 부장을 서울에서 차임해 보낸다면 기일에 맞추어 가기가 어렵습니다.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직(李溭)은 품계가 높은 무신(武臣)으로 장수의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이 사람을 올려서 부장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우리 나라의 관제(官制)는 저들과 다릅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 싸움터로 나아가면 가까운 시일 내에 돌아오기를 기약할 수 없으니, 결단코 절도사의 직임을 그대로 띠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뜻으로 설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완의 일은 참으로 몹시 놀랍다. 별다른 병도 없고 사기(師期)도 이미 임박하였으므로 결단코 다시 바꿀 수 없다는 뜻으로 타이르라. 그런데도 끝까지 듣지 않으면 이직을 차임해 보내고 이완을 임경업의 군관으로 삼아라. 신경호도 역시 임경업의 군관으로 삼아 속히 출발시키라."
하였다. 그 후에 임경업이 정 역관에게 말하여 이완을 부장으로 삼았다.
4월 2일 계축
세자가 청나라로 돌아갔다.
4월 4일 을묘
헌부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은 부임한 뒤에 축성(築城)하는 일을 몸소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십분 신중히 하여 위임해 보낸 뜻에 부응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조처를 잘못하고 형장(刑杖)을 지나치게 썼습니다. 처음에는 승군(僧軍)을 쓰면서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절에 근거하여 인원 수를 억지로 배정하였습니다. 승군이 다하자 계속해서 연호(烟戶)를 썼으며, 연호가 다하자 초군(哨軍)을 썼으며, 초군이 부족하자 다시 전결(田結)을 썼습니다. 전후로 명목(名目)은 다르나 민정(民丁)들이 역사에 나아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호령이 전도되어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며 공사장에서 죽은 자가 몹시 많습니다. 만약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이 역사를 맡게 한다면 인화(人和)가 깨질 것이니 성이 있은들 어디다 쓰겠습니까. 이명웅을 파직하고 각별히 너그러운 사람을 뽑아보내 잘 처리해서 그 역사를 완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명웅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대사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틈을 타서 탄핵하다니, 몹시 부당하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대사헌 남이웅(南以雄)이 동궁을 모시고 벽제(碧蹄)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었다. 장령 유심(柳𥳍), 지평 윤득열(尹得說)·심세탁(沈世鐸) 등이 성비(聖批)가 엄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헌 남이웅도 이명웅과 친척이라는 혐의가 있어서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며 모두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장관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 맡은 사람을 가볍게 논하다니, 내가 헤아려 보건대 옳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간원의 처치가 이러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세자가, 이사(貳師) 김신국이 노병(老病)이 들었다는 이유로 그로 하여금 조리하고 오도록 하였다.
전 참판 정온(鄭蘊)이 상소하기를,
"죄를 지은 신은 병들어 깊은 산골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접하지 않은 탓으로 뒤늦게서야 세자께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는데도 신은 천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다고는 하나 또한 사람인데 어찌 간절히 바라는 정성이 다른 사람보다 못해서 은혜를 저버리는 죄를 지은 것이겠습니까. 신은 나이와 병이 모두 깊어 뻣뻣한 시체와 같으니 어찌 다시 대궐 아래로 나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북녁을 바라보며 통곡해도 흘릴 눈물조차 없으니, 신의 사정이 딱하지 않습니까. 신의 죄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신의 죄를 대략 열거하고서 처벌을 기다리고자 합니다.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못하고 황당하고 무리한 말을 여러 차례 전하께 올린 것이 신의 첫번째 죄입니다. 단도(短刀)로 거짓 찔러서 임금을 속이려 한 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마음 편히 시골로 돌아와서는 달려가 문안하지 않은 것이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옥후(玉候)가 편안하지 못할 때에 문안하지 않은 것이 신의 네 번째 죄입니다. 무릇 신하로서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있으면 용서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은 겸하여 모두를 범하였습니다. 다행히 전하의 크신 도량에 힘입어 대론(臺論)이 여러 차례 발하였는데도 성상께서는 오히려 용서하셨습니다. 심지어는 허물이 있는 몸에 자급을 올려주시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낯부끄러움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비방이 쌓인 나머지에 또 오늘과 같은 일이 있으니, 신하의 분수와 의리가 모두 없어져 버렸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아끼면서도 그의 나쁜 점을 아는 밝음을 넓히시어 속히 신의 죄를 바로잡아 불충스런 신하들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안심하고 대죄(待罪)하지 말라."
하였다.
4월 5일 병진
유성이 천상성(天床星) 아래에서 나와 열사성(列肆星) 위로 들어갔다.
전 이조 참판 김반(金槃)이 졸하였다. 김반은 김장생(金長生)의 아들이며 김계휘(金繼輝)의 손자이다. 사람됨이 충후하여 가훈(家訓)을 잘 지켰으며, 청현직을 역임하였다. 사람들이 근신(謹愼)하다고 칭하였다.
4월 6일 정사
임경업이 치계하기를,
"문신(文臣) 종사관은 별로 중요한 임무가 없는데도 청나라 사람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전 도사(都事) 허관(許灌)을 종사관으로 삼아서 청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출발에 임하여 개유해서 뒤쳐지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허관은 끝내 가지 않았다.
4월 7일 무오
유성이 섭제성(攝提星) 아래에서 나와 항성(亢星) 위로 들어갔다.
4월 8일 기미
청원군(靑原君) 심기원(沈器遠)을 남한 산성 수어사(南漢山城守禦使)로 삼았다.
4월 9일 경신
조정호(趙廷虎)를 우부승지로, 이필행(李必行)을 집의로, 이빈(李彬)·김상(金鋿)을 정언으로, 안헌징(安獻徵)을 장령으로, 민응협(閔應協)을 교리로, 유심(柳淰)을 이조 정랑으로, 민형남(閔馨男)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4월 12일 계해
유성이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의성(平義成)이 배로 재목을 싣고 와 동래 왜관(東萊倭館)을 수리하였다.
4월 13일 갑자
조경을 사간으로, 유철을 응교로, 유경즙(柳景緝)을 장령으로, 정태제(鄭泰齊)·정유(鄭攸)를 지평으로 삼았다.
좌부승지 구봉서(具鳳瑞)가 아뢰기를,
"국가의 오늘날 일은 참으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관련 문서에 있어서 편의에 따라 비밀로 하는 방도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이번에 주사(舟師)가 가면서는 지형(地形)이나 형세를 모두 미리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상례(常例)로 행군하는 것 같이 두 장수가 유서(諭書)를 펼쳐들고 간다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유서에 쓴 글도 구구절절이 온당치 않으며, 또한 피차간에 문서로 인한 번거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청나라에서는 필시 유서가 있고 없고의 경중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단지 ‘부절을 합해 보고 명에 나아간다.[合符就命]’는 뜻만 써서 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4월 15일 병인
임경업이 치계하였다.
"신이 비밀히 역관 정명수에게 주사를 징발한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이번 일은 오로지 수군과 육군이 한꺼번에 나아가 성세를 크게 보이려는 것일 뿐, 결코 교전할 뜻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당선(唐船)을 만나더라도 접전하지 말라. 해변을 따라가되 깊이 들어가지 말고 곧장 여순구(旅順口)로 향하는 것이 옳다. 황제의 분부가 정녕스럽기 그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중국 사람들은 정탐을 잘한다. 여순구가 필시 가로막힐 것이니 어쩌면 되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운량(運糧)하기가 편리한 곳으로 나아가 군량을 풀면 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너의 말대로 하자면 육로(陸路)로 운량하기가 편리한 봉황성(鳳凰城) 근처로 곧장 향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하니, 정 역관이 웃으면서 답하지 않았습니다."
4월 17일 무진
경기 연천(漣川)·영평(永平)·적성(積城) 등지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4월 18일 기사
심즙(沈諿)을 예조 판서로, 정태화(鄭太和)를 대사간으로, 권즙(權諿)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9일 경오
빈객 이행원(李行遠)이 치계하기를,
"청나라에서 담배[南草]를 금함이 요즈음 더욱 심하고 조정의 사목(事目) 역시 몹시 엄준합니다. 그런데 이익을 탐하여 목숨을 걸고 온갖 방법으로 숨겨 가지고 가서 나라를 욕되게 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금법을 범하는 자를, 1근(斤) 이상은 먼저 참수한 다음에 아뢰게 하고 1근 미만인 자는 의주(義州)에 가두고서 경중에 따라 죄를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2일 계유
충청도 서천(舒川)에 지진이 있었다.
주사가 출발한 지 수일만에 전복된 배가 8척이라고 평안 감사가 아뢰었다.
비국이 면포 1백 동(同)과 목화(木花) 수천 근을 육진(六鎭)에 들여보내어 북쪽 변방의 군민(軍民)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김광혁(金光爀)을 집의로,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삼았다.
4월 23일 갑술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상들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처음에는 서쪽으로 간 배를 반드시 깊이 들어가게 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저들이 하는 일을 보니 군량을 운반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중국과 싸우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 나라의 지극한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몹시 많아 아주 참담하였는데 또 10여 척이나 전복되었다고 한다. 사공(沙工)들이 행역(行役)을 싫어하여 고의로 전복되게 한 것은 아닌가?"
하니, 우의정 강석기가 아뢰기를,
"필시 감군(監軍)이 독촉한 탓에 수세(水勢)를 헤아리지 않고 빨리 가려고만 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청나라의 밀서(密書)를 보니, 그 두 가지 일은 알 수 있겠으나 제1조는 말뜻이 범연하지 않은 것 같아 이해하지 못하겠다. 【 제1조에 이르기를 ‘모든 징발하는 일에 있어서 지체되지 않게 하라. 국왕이 몸소 와서 조근(朝覲)하지 않았으나 이미 왕의 충성을 보았으므로 의심이 저절로 풀렸다. 왕의 두 아들을 반드시 끊임없이 왕래하게 하겠다.’ 하였다.】 대개 그 뜻은 만약 뒷날에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집정자(執政者)에게 죄를 돌리겠다는 것이니, 몹시 염려된다."
하였다.
4월 24일 을해
세자가 강을 건넜다.
야춘(也春)의 차호(差胡) 사을규(沙乙糾) 등 90여 명이 웅도(熊島)에서 사로잡은 남녀 1백여 구(口)를 거느리고 심양으로 돌아갔다.
정언 권즙이 아뢰기를,
"전 판서 이경석(李景奭)은 이성(異姓)인 처족(妻族)의 친척을 아들 대신 인질로 보내어 나라를 욕되게 하고 일이 생기도록 하였습니다. 추감(推勘)한 뒤에는 장황하게 핑계를 늘어놓아 전하를 속이려 하였습니다. 그 죄가 이시백·홍보보다 더한데 조정이 논죄하면서는 파직 추고하는 데 그쳤습니다. 형벌이 전도되어 물의(物議)가 놀라고 분해 합니다. 이에 신이 사실에 의거하여 논핵하려 했는데, 동료에게 저지당하였습니다. 체직을 명하소서."
하고, 대사간 최혜길(崔惠吉)이 아뢰기를,
"이경석은 바로 신의 사촌 매부여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 혐의스러울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핑계를 댄다고 하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남이웅(南以雄)과 장령 홍무적(洪茂績) 등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5일 병자
장령 정복길(鄭復吉)이 아뢰기를,
"동료의 간통(簡通)을 보니, 바로 간원을 처치할 일이었습니다. 신은 ‘이경석이 비록 논할 만한 일은 있으나 임금을 속인 데 비할 것은 아니며, 그 죄도 이미 바루었다. 그리고 권즙은 홍보와 상피할 관계는 아니나 이미 절친한데 조금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출사하게 하기는 곤란한 듯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이러한 뜻으로 답해 보내었는데, 논의가 통일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지레 먼저 입계하였습니다.
신이 권즙을 체직하기를 청한 것은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일찍이 듣건대, 이경석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권즙이 청직(淸職)에 제수되는 것을 가로 막았다고들 합니다. 이 말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는데 권즙이 혐의스러움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논계하려고 하였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진실로 공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지난해의 논의를 주워 모아 전랑(銓郞)을 곤궁에 빠뜨리려고 계획하다가 대사간에게 저지되었다고 하니, 그가 마음먹은 것을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신이 형편없어서 대간의 풍도를 떨어뜨렸으니, 신의 직을 체직하소서."
하고, 장령 홍무적은 아뢰기를,
"신이, 정언 권즙이 이경석을 논핵한 말을 보니 ‘장황하게 핑계를 늘어놓으면서 전하를 속이려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로 근사하지 않은 말입니다. 신은 그것이 크게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다만 이경석이 인질을 바꾸어 보낸 한 가지 일은 이미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니 한차례 탄핵함은 불가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상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정복길이 인피한 말을 보건대, 과연 그의 말과 같다면 권즙의 논핵은 사감을 품은 것이지 공심(公心)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터 대간이 사기(私忌)가 있어서 들어갈 때에는 동료의 간통을 보지 않는 것이 전례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그 통보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정복길이 이것으로 흔단을 야기시킬 줄 알았겠습니까. 신의 처사가 전도되어 동료의 배척을 받았으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남이웅이 처치를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정언 권즙이 아뢰기를,
"정복길이 인피한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홍보는 과연 신의 오촌 숙모부(叔母夫)입니다. 홍보가 전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경석은 처족의 이성(異姓) 친족으로 자기의 이성 친족이라고 하였으니 홍보나 이시백에 비하여 한층 더 심합니다. 그런데 당초에 벌을 준 것이 파직 추고하는 데 그쳤습니다. 신이 논핵하고자 한 것은 단지 공적인 마음에서였습니다.
이경석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청직에 제수되는 것이 가로막혔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듣지 못하였는데,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고 하는 것은 역시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복길은 이경석이 범한 바를 모르지 않을 것인데도 이와 같이 급급히 일어나서 공격하니 그의 속마음을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조 정랑 유심이 물의는 돌아보지 않고 염치를 무릅쓰고 행공하고 있으므로 신은 먼저번에 대략 이러한 내용으로 대사헌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는 벼슬아치들이 서로 규계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어찌 곤궁에 빠뜨리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정복길은 이미 지나간 일을 끌어대어 모함하려는 계획을 삼고 있습니다.
신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시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 물러나려고 하였지만 전랑(銓郞)을 구원하려는 무리들이 교묘하게 헐뜯기를 이와 같이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배척을 당하였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남의 시비를 논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실상에 의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공격하는 데 의도가 있었으니 몹시 좋지 못한 일입니다. 동료가 다른 의견이 있으면 반드시 통일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레 먼저 전계(傳啓)하였으니 상규(常規)에 어긋난 것입니다. 이성(異姓)의 친족을 대신 인질로 보낸 것은 물의가 일어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임금을 속였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정복길·홍무적·권즙을 모두 체차하고, 남이웅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6일 정축
유성이 관색성(貫索星) 위에서 나와 낭성(郞星) 위로 들어갔다.
원손(元孫)이 심양에 도착하였다. 용골대가 자식과 장수 5인을 거느리고 출문(秫門)에 와서 맞이하였다. 이어서 오준(吳竣)에게 말하기를,
"원손이 출발한 지 이미 네 달이나 되었다. 무슨 이유로 중도에서 지체하였는가? 빈객은 중한 처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니, 오준이 답하기를,
"원손이 나이가 어리고 병이 많아 쉽게 전진할 수 없었다."
하자, 용골대가 즉시 말에서 내려 가마 앞으로 가서는 말하기를,
"다른 아이로 바꾸어 보내지는 않았는가? 내가 살펴보겠다."
하고는,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장막을 걷게 하고서 살펴보았다.
4월 27일 무인
남이웅을 예조 판서로, 허휘(許徽)를 형조 판서로, 전식(全湜)을 대사헌으로, 박황(朴潢)을 대사간으로, 정태화(鄭太和)를 평안 감사로, 여이징(呂爾徵)을 함경 감사로 삼았다.
4월 29일 경진
빈객 이행원(李行遠)이 치계하기를,
"의주 부윤 황윤후(黃胤後)는 처음 세자가 강을 건너던 날 배를 잘 정비하지 않아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생기게 하였습니다. 또 강을 건넌 뒤에는 태연히 강가에서 하직하고 물러났습니다. 사리로 헤아려 볼 때 참으로 놀랍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논죄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이치에 가깝지 않은 듯하니 우선 먼저 추고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정언 권즙은 이경석에 대하여 드러나게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혐의를 피하지 않은 것이 과연 공정한 도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먼저 앞장 서서 전랑(銓郞)을 배척하는 의논을 낸 일에 있어서도, 대사간에게 저지당하자 도리어 은연중에 말을 하면서 몰아낼 계획을 꾸몄으며, 심지어는 석상(席上)의 말을 주위에 사는 사대부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권즙이 간사한 술수를 부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배척하려고 하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경석이 인질을 대신 보낸 일은 몹시 그르다. 권즙이 논핵하려 한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장령 안헌징(安獻徵)이 인피하기를,
"신이 조일(朝日)에 권즙을 논할 때 이경석의 일을 함께 거론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간원에서 논하는 것이 결말이 나지 않았으므로 미처 논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신의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신의 직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대관(臺官)의 임무는 규핵(糾劾)하는 데 있는 것으로, 논할 만하면 논하고 논할 만하지 않으면 논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범(情犯)에 따라서 논하고 안하는 것은 소견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이며, 결말이 났느냐의 여부도 다른 사람이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성상의 비답을 받고서 이경석을 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으니, 언관이 일을 논함에 매우 구차하게 되었습니다. 안헌징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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