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8권, 고종35년 1898년 9월

싸라리리 2025. 1. 2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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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양력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38권】   【음력 무술년(1898) 7월 16일】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원본】 42책 3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음력 무술년(1898) 7월 16일】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원본】 42책 3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가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전환국(典圜局) 이건비(移建費)와 기계 구매비(機械購買費) 12만 원(元)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문제에 관해 회의를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9월 5일 양력

전 주사(前主事) 강희조(姜熙朝)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우리나라의 세금 거두는 정사는 옛날 은(殷) 나라의 조법(助法)이나 주(周) 나라 철법(徹法)과 비교하더라도 오히려 가벼운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자년(1840)에 다시 측량한 뒤로 세월이 오래되어 폐단이 거듭 발생하고 있습니다. 팔도(八道)의 신기(新起) 토지는 관리(官吏)들의 은결(隱結)이 되기에 족할 뿐이었고, 탁지부(度支部)의 경상비용에는 조금도 보탬이 없었습니다.
각군(各郡) 소재 둔토(屯土)로 말하면, 두락(斗落)의 수가 실지와 맞지 않는 것과 도세(賭稅)의 다과(多寡)에 대해서는 불문(不問)에 붙여 상납(上納)이 십분의 일도 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잇속을 노려 청탁하는 풍조가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별도로 청렴하고 공정하며 일을 잘 아는 몇 사람을 선발하여 13부(府)에 파견하여 보내 각둔(各屯)과 각역(各驛) 소속 전토(田土)를 적발되는 대로 샅샅이 조사하여 사실대로 도세를 집행하여 모두 모아서 별도로 보관하였다가 한편으로는 서울과 지방의 군수(軍需)에 보태고 한편으로는 각항(各項)의 공적인 비용에 보태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 중에 취할 만한 것이 많다."
하였다.

 

9월 6일 양력

비서원 경(祕書院卿) 오익영(吳益泳)을 시종원 경(侍從院卿)에, 태의원 경(太醫院卿) 박기양(朴箕陽)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민영준(閔泳駿)을 태의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권응선(權膺善)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으며,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이도재(李道宰)에게 비서원 경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9월 7일 양력

정2품 임상준(任商準)·이헌영(李𨯶永)·한규설(韓圭卨)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정익용(鄭益鎔)·이만교(李萬敎)·민영돈(閔泳敦)·상직현(尙稷鉉)·이진태(李鎭泰)를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방금 고등 재판소의 질품서(質稟書)를 보니, 피고 이유인(李裕寅)이 공초(供招)하기를, ‘음력으로 금년 2월경에 이대준(李大峻)이 와서 한 장의 녹지(錄紙)를 보이면서 지금 새로 오는 러시아 공사〔俄公使〕를 저로 하여금 중로(中路)에 가서 만날 것을 간절히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녹지만 보여 드리고 러시아 공사를 가서 만나는 일은 여쭈어 명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후 이대준이 편지로 물은 것에 대답할 때에는 거짓으로 국경에 가서 영접하는 일은 하교를 받든 것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죄를 압니다. 죄를 압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被告) 이대준이 이유인의 회답 편지를 보고 러시아 공사 마튜닌〔馬丟寧 : Matunine, N.〕을 동래항(東萊港)에 가서 만나보았을 때 칙령(勅令)을 받들고 내려간 것인 양 말한 후 김홍륙(金鴻陸)을 쫓아내는 일 및 절영도(絶影島)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말라는 일을 적은 녹지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기록한 두 가지 일은 두 나라의 교제상에 관한 문제인데 외국의 공사를 사적인 청탁을 쓴 녹지로써 중로에서 맞았으니, 매우 망령되고 소홀하기 그지없습니다. 피고 이유인은 《대명률(大明律)》〈사위편(詐僞編) 사전조지조(詐傳詔旨條)〉의 조지(詔旨)를 거짓으로 전달한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律文)에 따라 교형(絞刑)에 처하겠습니다. 피고 이대준은 《대전회통(大典會通)》 〈금제조(禁制條)〉의 외국 사신이 올 때 길을 막고서 호소하는 자는 다른 도에 원지 정배(遠地定配)한다는 율문에 따라야 하는데 징역으로 바꾸어 처리하자니 연한이 적혀 있지 않아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형률(刑律) 명례(名例)를 반행(頒行)할 때 정배하는 형률에 대해서는 미처 연한을 윤허받지 못하였는데 본부(本部)에서 모두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유인은 특별히 한 등급을 감하여 종신 유형(終身流刑)을 보내고, 이대준은 15년간 유형을 보내겠다."
하였다.

 

9월 8일 양력

종2품 민병승(閔丙承)과 민영주(閔泳柱)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민형식(閔炯植)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이, ‘특지(特旨)로 종신 유형(終身流刑)을 보내기로 한 죄인 이유인(李裕寅)을 고금도(古今島)로, 15년 유형을 보내기로 한 죄인 이대준(李大峻)을 임자도(荏子島)로 각각 배소(配所)를 정하겠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일본인에게 경부 철도(京釜鐵道) 부설권(敷設權)을 허락하였다.          【일본인이 설립한 경부 철도 회사(京釜鐵道會社)의 대리인 사사키 기요마로〔佐佐木淸麿〕, 호시나가 지로〔乾長次郞〕이다.】


【원본】 42책 38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4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교통-육운(陸運)

 

9월 9일 양력

종1품 유한중(劉漢重), 정2품 민종묵(閔種默)·김병익(金炳翊), 종2품 민치헌(閔致憲)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이헌경(李軒卿)·윤상연(尹相衍)·이종직(李宗稙)을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하고, 종2품 민경호(閔京鎬)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9월 10일 양력

함유재(咸有齋)에서 의정부 대신(議政府大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만수성절(萬壽聖節) 때문이다.

 

9월 12일 양력

태의원(太醫院)에서 【도제조(都提調) 심순택(沈舜澤), 경(卿) 민영준(閔泳駿), 소경(少卿) 조병성(趙秉聖)이다.】 올린 구주(口奏)에,
"방금 삼가 대령하고 있는 의관(醫官)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담체(痰滯) 때문에 몸이 편치 않다고 하니 아랫사람들은 놀랍고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속히 신들이 의관들을 거느리고 입진(入診)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편치 않은 몸은 점점 차도가 있고, 탕제(湯劑)도 자내(自內)의 예(例)로 의논하여 정할 것이니, 경들이 입시(入侍)할 필요는 없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태자궁(太子宮)이 체증으로 설사를 하여 편치 않다고 하니, 삼가 근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속히 신들이 의관들을 거느리고 입진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설사증은 차도가 있다. 약에 대한 것은 자내의 예로 의논할 것이니, 경들이 입시할 필요는 없겠다."
하였다.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자내의 예로 입진할 것이니 경들은 본원(本院)에서 윤직(輪直)하라."
하였다. 3차로 아뢰니, 비답하기를,
"점차 차도가 있으니 입진할 필요는 없겠다. 그대로 윤직하라."
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이 아뢰기를,
"방금 삼가 듣건대, 전하(殿下)와 태자(太子)가 동시에 건강을 상하였다고 하는데 수라(水剌)를 진공(進供)할 때 애당초 신중히 살피지 못하여 몸이 편치 않게 되었으니, 너무나 놀랍고 송구합니다. 거행한 사람들을 모두 법부(法部)로 하여금 철저히 구핵(鉤覈)하게 하고 근본 원인을 조사하여 나라의 형률을 바로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무청(警務廳)으로 하여금 근본 원인을 엄히 밝혀내게 하겠다."
하였다. 【음력으로 올해 7월 10일 김홍륙(金鴻陸)이 유배 가는 것에 대한 조칙(詔勅)을 받고 그날로 배소(配所)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金光植)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서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凶逆)의 심보를 드러내어 친한 사람인 공홍식(孔洪植)에게 주면서 어선(御膳)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음력 7월 26일 공홍식이 김종화(金鍾和)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藥物)을 어공(御供)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땅히 1,000원(元)의 은(銀)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寶賢堂)의 고지기〔庫直〕로서 어공하는 서양 요리를 거행하였었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태거(汰去)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본】 42책 38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4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왕실-국왕(國王) / 의약-의학(醫學) / 사법-재판(裁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윤용선(尹容善) 등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방금 삼가 듣건대, 전하(殿下)의 옥체(玉體)가 편찮으시고 태자(太子)가 몸이 편치 않다고 하니 아랫사람들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수라(水剌)를 진공(進供)할 때 신중히 살피지 못하여 몸이 편치 않게 되었으니, 너무나 놀랍고 송구합니다. 응당 신문해야 할 사람들을 속히 법부(法部)로 하여금 철저히 사핵(査覈)하여 죄인을 잡아서 시원스레 전형(典刑)을 바로 잡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응당 신문해야 할 사람들은 이미 경무청(警務廳)으로 하여금 엄히 사핵하게 하였으니 경들은 양해하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심순택(沈舜澤)이 차자를 올려 처분을 내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이 엄정(嚴正)하니, 죄인을 잡아내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다. 경무청(警務廳)에서 사핵(査覈)하기를 기다려 처분할 것이니, 경은 양해하라."
하였다.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김춘수(金春洙) 등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처분을 내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정부(政府)에 내린 비답에서 칙유(飭諭)하였다."
하였다.

 

9월 13일 양력

태의원(太醫院)에서 구주(口奏)로 입진(入診)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자내(自內)의 예(例)로 약에 대해 의논할 것이니, 경들은 입시(入侍)할 필요가 없겠다."
하였다.

 

9월 14일 양력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이번에 궁중에서 일어난 사변은 옛날에 없던 것입니다. 신민(臣民)들은 놀라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대소(大小) 신료들도 똑같은 마음이었는데,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조병식(趙秉式)은 총상 회장(總商會長)으로서 방문(榜文)을 붙여 상인들에게 점포를 닫도록 일렀다고 합니다. 비록 경무청(警務廳)에서 효유(曉諭)하여 즉시 그전대로 점포를 열기는 하였지만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지나가버린 일이라고 해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견책(譴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방금 겸임 경무사(兼任警務使) 민영기(閔泳綺)가 보고한 것을 보니, ‘죄인을 신문하는 즈음에 종신 유형(終身流刑) 죄인 김홍륙(金鴻陸)이 구초(口招)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김홍륙을 지금 잡아다 심문(審問)하여야 하는데, 특지(特旨)로 인한 유배 죄인(流配罪人)이므로 감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삼가 아룁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잡아다 심문하라."
하였다.

 

9월 15일 양력

윤직(輪直)을 모두 철파(撤罷)하라고 명하였다.

 

태의원(太醫院)에서 올린 구주(口奏)에,
"윤직(輪直)하는 것을 철파(撤罷)하라는 명을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이미 완쾌되었고, 태자궁(太子宮)도 회복되었으니, 윤직할 필요가 없겠다."
하였다.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으며, 소경(少卿) 조병성(趙秉聖), 시독관(侍讀官) 이범익(李範翊)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9월 16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김병시(金炳始)가 졸(卒)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대신(大臣)은 장중(莊重)하고 진실한 자태와 정밀하고 겸손한 규범으로서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 이미 나라를 위해 진력한 것이 많았다. 임오년(1882)과 갑신년(1884)에 충성을 바치고서도 그 공을 자처하지 않았고, 어전(御前)에서 계책을 진달한 것은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짐(朕)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어려운 때에 널리 구제해 주기를 몹시 바랐었는데, 근래에는 병환이 심해간다고는 하였지만 어찌 갑자기 졸서 단자(卒逝單子)가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정색(正色)하고 입조(立朝)한 위의(威儀)와 어떠한 어려움에도 진력한 경의 정성을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상심한 마음을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
졸한 특진관 김병시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예장(禮葬) 등의 일은 규례대로 거행하라. 장례 때를 기다려서 비서 승(祕書丞)을 보내 치제(致祭)하되,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기다릴 것 없이 장례를 지내기 전에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게 하라."
하였다.

 

9월 17일 양력

종2품 임형준(任衡準)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군사란 나라를 다스리는 큰 정사입니다. 군사를 편성할 때 성(城)은 그 지역에 알맞게 쌓아야 하고 사람은 성에 알맞게 배치하여야 하므로 만승(萬乘)이 있고 천승(千乘)이 있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대한의 삼천리강토는 넉넉히 100만의 군사를 갖출 수 있는데 현존하는 군사는 수만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옛날의 승제(乘制)보다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미천한 생각에 단지 시험해 볼 만한 방도가 있는데, 옛날 주(周) 나라 왕실에서 실시한 군사와 농사를 서로 결합시킨 제도를 모방하되, 토지세는 이를 근거로 의논할 필요는 없고, 다만 백성들에게 부세를 가볍게 하고 용역을 덜어주어 각기 자기의 생업에 안주하게 하며, 때때로 한 가지 기술을 익히도록 하되, 상(賞)으로 권장하고 계속 우수한 자들을 뽑아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만 보건대, 큰 성과 큰 고을에 대병(隊兵)을 설치한 것은 시의(時宜)에 맞게 한 것인데, 해당 지방에서 주관하여 거느리는 자들은 새로 모집한 군사라고 해서 작은 은혜만을 베풀고 말류의 폐단에 대해 소홀히 하여 엄히 단속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손자(孫子)가 경계한 ‘사랑에 빠져서 제대로 호령 한 번 못하고 후하게 하여 제대로 부리지도 못하니 응석받이 같은 군사는 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절제(節制)한 군사는 아무리 변변찮은 장수라 하더라도 패배하지 않으며 절제하지 않은 군사는 아무리 지혜로운 장수라 하더라도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절제함이 없다면 어떻게 급한 때에 쓸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반드시 적임자를 얻어서 맡기되, 절제하는 방도에 힘써서 각기 자기의 그 직분을 지키게 함으로써 상하간의 의리를 밝히고, 백성들의 일에 간섭하지 말게 함으로써 침해하고 업신여기는 습성을 막는다면, 기예를 닦는 일은 저절로 전심하게 되고 군민(軍民)들의 마음도 하나로 화합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하찮게 여겨 버리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 중에 취할 만한 것이 많다."
하였다.

 

전 군수(前郡守) 최낙주(崔洛周)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황국(皇國)의 회(會)를 설치한 것은 황실(皇室)을 존경하고 높이며 백성과 나라를 보호하고 유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문득 삼가 태의원(太醫院)에서 입진(入診)할 것을 청하려고 아뢴 것을 보고, 황상(皇上)의 체후(體候)가 까닭 없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놀랍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잇달아 태자가 같은 때에 편치 않다니 더욱 저도 모르게 당황스럽고 두려워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밖에서 하는 말들은 떠들썩하고 자자하여 도저히 막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어찌 예로부터 듣도 보지도 못한 지극히 흉역(凶逆)한 이런 변고가 매우 가까운 주원(廚院)에서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음식을 조리하는 법을 신중히 살피지 못한 선부(膳夫)에 대해 해당 형률(刑律)로 처벌하는 것은 논의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금중(禁中)의 액정서(掖庭署)를 깨끗하고 엄숙히 하지 못하여 귀신과 물여우 같은 무리들로 하여금 깊고 엄한 궁궐 안에 몸을 숨기게 하였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해부(該府)의 신하들은 죄를 진실로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라에서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한 것은 불법(不法)을 살피기 위한 것인데 난신적자들이 서울에 자취를 감추고 몰래 흉악한 속임수를 품었으니 그 조짐이 반드시 있었던 만큼 검속을 잘못한 연유에 대한 책임은 귀결될 곳이 있을 것입니다. 황상을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는 관리들이 보좌하고 호위하는 정성을 다하지 않아서 하마터면 헤아리기 어려운 재앙을 가져올 뻔 하였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 또한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신들은 변고를 듣고 나서 오장(五臟)이 타드는 듯했는데, 병이 나은 경사는 하늘이 돕고 축복한 것이며 황상의 신묘한 식별이 매우 밝아 죄인을 잡아냈습니다.
통탄스럽고 통탄스럽습니다. 그는 먼 곳에 사는 천한 부류로서 너그럽게 용납하시는 대우를 지나치게 받았고, 분에 넘치는 은혜를 치우치게 받았으면서도 제멋대로 행동하고 꺼리는 것이 없었건만, 죄는 가볍게 처벌하여 유배(流配)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그러니 배은망덕한 심보는 회개하지 못했고, 마누라와 모의하여 윤리와 기강을 멸시하고 끝없는 변고를 빚어냈으니, 고금 천하에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흉악한 역적들은 결단코 모두 단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에 용납해 둘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철저히 조사해서 숨어 있는 근원을 없애고 옛 법으로 결단하여 속히 나라의 형률을 바로잡고 주모자와 추종자의 구분을 밝혀 노륙하는 형전을 적용함으로써 천하 만세로 하여금 왕법(王法)이 두려운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이 진달한 바는 진실로 충성스러운 울분에서 나온 것이지만, 죄인은 재판을 한 다음에야 법대로 처형할 수 있다."
하였다.

 

9월 18일 양력

전 부호군(前副護軍) 현학표(玄學杓)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세상에 더러 있기는 하였지만, 어찌 오늘과 같은 흉악하고 독살스런 무리들이 만고(萬古)에 들어보지 못한 변고를 일으킨 적이 있었겠습니까? 대체로 역적을 죽이고 친족을 멸족시키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바꿀 수 없는 정법(正法)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새 법이 나온 이후로 흉도(凶徒)들에 대해서 단지 본인만 교수(絞首)할 뿐 그 친족들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아 거괴(巨魁)들로 하여금 도망쳐 법망에서 빠져 나가게 하고, 남은 종자들이 버젓이 성상의 영역 내에 살면서 남몰래 새나 쥐 같은 짓을 하다가 끝내 독사나 물여우 같은 독을 풍겨 오늘의 일을 초래하게 한단 말입니까? 새 법이란 바로 을미년(1895)에 흉역한 무리들이 창시한 것이니, 이 법은 진실로 시행해서는 안 되며, 수사(收司)와 노륙(孥戮)하는 형전(刑典)은 원래 조종조(祖宗朝)의 더없이 엄격한 법입니다.
아, 역적의 괴수 김홍륙(金鴻陸)이 그동안 몇 년 동안 외람되게 융숭한 은혜를 입은 것이 실로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헤아릴 수 없는 흉악한 심보를 품고 남몰래 반역을 꾀한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군민(軍民)들을 많이 모이게 하여 그의 목을 베고 그 몸을 동강내서 온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각자 그 살을 씹어 먹고 그 살갗을 깔고 자도 시원치 않은 통분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풀게 해 주소서.
신들은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지 못하여 한창 절치부심하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또 군부(君父)를 해치려는 이 역적을 보니, 심장과 담이 모두 찢어지는 듯하고 손발이 떨려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러한 역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 함께 서 있고 싶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유사(有司)에게 엄히 명하시어 속히 연좌(連坐)하는 형률을 적용함으로써 악역(惡逆)의 종자들로 하여금 점차 퍼져 나가지 못하게 하고 흉악하고 독살스런 자들이 다시는 어둠 속에서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하소서.
또한 삼가 생각건대, 금중(禁中)은 폐하(陛下)께서 깊이 거처하시는 지엄한 곳입니다. 지금 작질(爵秩)이 없는 무리들이 특별히 입시(入侍)한다는 핑계를 대고 어려움 없이 금중에 출입하는 자들 중에 또 흉도와 내통하여 상(上)의 동정을 엿보고 몰래 나라의 기밀을 전하는 일이 없지 않으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엄금하고 가로 막는 것이 제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서양 요리는 바로 서양 사람들이 먹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장(臟)과 위(胃)는 서양 사람들과 달라서 범인(凡人)들도 마시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폐하께 진어(進御)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색다른 맛이 나는 특이한 음식을 드시지 마시고 정식으로 바친 것만 드신다면 금의(錦衣)와 옥식(玉食)에 대한 근심이 조금 덜어지고 합문(閤門) 안이 깨끗하고 엄숙해질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성토(聲討)한 것이 공분(公憤)에서 나온 것이니, 말미에 진달한 것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전 부사과(前副司果) 이세진(李世鎭)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난신적추(亂臣賊醜)들이 예로부터 무슨 한계가 있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 진어(進御)하는 찻주전자에다 아편을 집어넣는 변고를 일으킨 것과 같은 흉역(凶逆)한 자가 어찌 있었겠습니까? 지금 흉악한 짓을 한 괴수가 아직 누구라고 정확히 지적할 수 없지만, 김홍륙(金鴻陸)의 무리인 공가(孔哥)가 남몰래 사주를 받고 이런 변고를 일으킨 것입니다. 흉흉한 소문이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에 낭자하게 퍼졌으며, 심지어는 각 신문(新聞)에 실리기까지 하였으니, 그 사람임이 이미 확실하고 그 악행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아! 그는 궁벽한 시골의 천한 부류로서 외람되이 폐하의 은혜를 입어 지위는 높은 벼슬에 올랐고 재산은 막대한 양을 차지하였으니, 의당 몸을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목숨을 보존할 것을 도모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어지럽게 교섭을 하고 이를 구실 삼아 사리(私利)를 꾀하다가 절도 유배(絶島流配)를 갔는데 이것은 오히려 중한 죄를 가볍게 견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한때 찬축(竄逐)된 것을 가지고 마음속에 원망스러운 독기를 품고서 몸은 원지(遠地)에 있건만 성상을 모해하려는 악심을 품고 이런 천고(千古)에 들어보지 못한 흉악한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오늘 천 번을 죽이고 만 번을 죽이더라도 오히려 조금이라도 신민(臣民)들의 분을 풀어 주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나국(拿鞫)하고 효수하여 뭇사람을 경계시키소서. 그리고 사주를 받아 흉악한 짓을 한 공가와 당시 선부(膳夫)를 감독한 액정서(掖庭署)의 관원을 낱낱이 적발해서 참형(斬刑)에 처하소서. 또한 흉악한 괴수의 친척과 패거리들로서 조정에 있는 자들은 죽이거나 쫓아내서 폐하와 가까운 곳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함으로써 재앙의 싹을 막고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옥사에 대한 조사가 엄격하고도 은밀했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먼저 알고서 이렇게 성토(聲討)하는가?"
하였다.

 

9월 19일 양력

산릉석의중수도감 도제조(山陵石儀重修都監都提調) 심순택(沈舜澤)을 소견(召見)하였다. 표석(表石)을 세운 후 봉심(奉審)한 것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칙령(勅令) 제35호, 〈국내의 철도 규칙 중 개정 안건〔國內鐵道規則中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교원(敎員) 윤태진(尹泰震)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근래에 창고의 곡식을 꺼내서 구황(救荒)한 은택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닌데 현재 나라의 재정이 딸려 계속해서 진휼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는 것은 신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니 나랏일을 근심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유망(流亡)하는 백성들을 태연하게 보면서 구휼할 생각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침내 뜻을 함께하는 16인(人)과 폐하의 생각을 우러러 본받아서 주제넘게 곧 궁한 백성을 돌보는 근심을 나누려고 이에 각각 본전(本錢) 몇 만 냥을 출자(出資)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몇 달 동안에 300여 명의 곤궁한 백성들을 불러 모은 다음 우선 선혜청(宣惠廳) 안 별창(別倉)의 공해(公廨)에다 진휼을 설행하여 날마다 두 끼의 밥과 각각 옷 한 벌씩을 주었으며, 병든 자는 고쳐주고 죽은 자는 장사(葬事)를 지내주어 폐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태평성세에서 함께 살게 함으로써 기뻐서 뛰고 춤추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애초에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 일을 무리하게 거행하여 약간의 식량과 땔나무마저 거의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경비의 부족으로 해서 그만두자니 표류하고 흩어져서 울부짖는 백성들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고, 죽어가는 것을 막고자 계속 진휼하자니 재력(財力)이 남은 것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합니까? 신들이 폐하의 뜻을 받들어 보답하는 데에 다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에 많은 공적인 의견을 채집하여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십시일반(十匙一飯)씩 추렴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하자는 뜻으로 장정(章程)을 만들어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내부(內部)에 명하시어 기한을 정하고 장정을 만들어 부유한 사람들에게 조금씩 덜어내도록 함으로써 안으로는 의지할 곳이 없는 곤궁한 생명을 살려주고, 밖으로는 다른 나라의 비웃음을 면하게 하며, 또한 도둑질하는 근심과 노략질하는 폐단이 민간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명색이 백성들에게서 추렴하는 것인데, 어찌 폐단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사사로이 장정을 만들고 이런 상소까지 올리는 것은 무엄하기 짝이 없다."
하였다.

 

장례원 주사(掌隷院主事) 황의철(黃義喆)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난신역자(亂臣逆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근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일전에 김홍륙(金鴻陸)의 처가 독을 넣은 변고를 가지고 논하면 신하된 마음에 누군들 말만 해도 살이 떨려오고 생각만 해도 뼛속이 오싹해지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이 흉역한 무리들이 감히 망측한 계책을 꾸미고, 이와 같이 반역을 꾀할 심보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행동한 버릇의 근원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연전(年前)에 새 법이 정해진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땅히 사지를 찢어 죽이고 목을 베어야 할 역적들에게 거리에서 공개 처형의 형전(刑典)을 적용하지 않고 옥 중에서 몰래 교형(絞刑)에 처하는 형률을 적용하게 하였으며, 또 노륙(孥戮)까지 연좌하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이것이 일정한 표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록 폐하(陛下)께서 형벌을 관대하게 하려는 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아! 저 흉역한 무리들은 국가가 너그럽게 용서해 준 은혜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귀신과 물여우가 출몰하는 것처럼 교묘하게 행동하였고 바다를 건너간 역적까지 있으며, 또한 서울에도 흉역한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가의(賈誼)가 이른바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일이라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를 논한 후 조정의 논의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마땅히 새로 정한 법을 고치고 옛날에 사용하던 법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대역(大逆)들은 때를 기다릴 것 없이 사람들을 많이 모아 놓고 서쪽 저자에서 사지를 찢고 거리에 목을 매달며 그 족속들과 연관된 패거리들을 잡아 가둠으로써 위로는 선왕(先王)의 법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 아래로는 훗날의 악을 징계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새로 정한 법률을 고치고 옛날의 법률을 따르자는 말을 어쩌면 그리도 쉽게 하는가?"
하였다.

 

9월 20일 양력

유학(幼學) 정기호(鄭基鎬)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공(功)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충성을 다함이 있으면 반드시 포상(襃賞)을 하는 것은 조정의 권장하는 방도이고 문벌에 구애하지 않고 오직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명철한 임금이 인재를 택하는 방법입니다.
옛날 백리해(百里奚)는 소 먹이는 데에서 발탁되었는데, 진 목공(秦穆公)이 그를 정승(政丞)으로 등용하여 마침내 패업(霸業)을 이루었고, 위청(衛靑)은 천한 종에서 기용되었는데 한 무제(漢武帝)가 그를 장수로 등용하여 흉노(匈奴)에 위엄을 떨쳤습니다. 만약 두 임금이 사람이 천하다는 데 구애되어 이 두 사람을 등용하지 않았다면 어찌 임금의 패업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으로 본다면 재예(才藝)가 시대의 쓰임에 알맞은 사람 및 훈업(勳業)이 남보다 한 등급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관계(官階)의 차서에 관계없이 발탁하여 등용하고, 권면하고 포상하는 것은 바로 종사(宗社)의 하나의 큰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보고 기억하는 바는 바로 본도(本道)의 진주부 만호(晉州府萬戶)인 윤순백(尹順伯) 한 사람 뿐입니다. 윤순백은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 졸오(卒伍)에 편입되었는데, 비록 나라를 경영할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좁디좁아 무예를 쓸 곳이 없었으니, 마치 질풍처럼 달리는 말이 소금 수레나 끄는 일에 시달리고 창공을 나는 매가 끈에 묶여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난 갑신년(1884) 봄에 화적(火賊)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도당(徒黨)을 불러 모아 낮에는 노략질을 하고 밤에는 무덤을 도굴하였지만 당시 관장(官長)이 된 자들은 두려워하며 감히 그들을 토벌하거나 체포하는 일에 대해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윤순백만이 앞장서서 적의 소굴로 들어가 단신으로 적들과 고전하였는데, 몸이 아홉 군데나 창에 찔리고도 끝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당시 병사(兵使) 한규설(韓圭卨)이 그를 포상하여 곧 영교(營校)에 차임(差任)되었습니다. 그 해 7월, 적도(賊徒) 수천 명이 호남(湖南)의 덕유산(德裕山) 아래에 모였다는 소문이 돌자 관리와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런데 윤순백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포수(砲手) 300명(名)과 장사꾼으로 구성된 장정 400명을 사사로이 모집하여 적의 소굴로 쳐들어가 수십 놈을 잡으니, 나머지는 모조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해도(該道) 병사(兵使) 한규설이 이를 포계(褒啓)하여 특별히 오위장(五衛將)에 차임되었습니다.
갑오년(1894)에 이르러 이른바 동학(東學)의 대란이 극도에 달하여 성과 고을을 공략하고 관원과 백성들을 찔러 죽였는데, 온 나라 가운데 호남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이에 윤순백은 장정 400명을 모집하여 함양(咸陽)과 운봉(雲峯)으로 달려가 구원하였는데, 첫 번째 싸움에서는 70명을 사로잡았고 수백 명을 포로 쏘아 죽였으며, 두 번째 싸움에서는 곧장 남원(南原)에 당도하여 얼마 걸리지 않아 승리하였습니다. 해도 병사 이항의(李恒儀)가 또한 포계하였습니다. 전에는 도적을 잡았고 후에는 동학을 토벌하였으니, 천 명 중에 혹은 만 명 중에 하나 있을 뛰어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단지 지위가 낮고 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아래로는 포상하고 추천하는 미덕이 없고 위로는 수용(收用)하는 은전이 없으므로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은 공로가 있는데도 옛날 그대로 먼 시골에서 천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사자가 원통해할 뿐만 아니라 곧 조정의 흠전(欠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사람을 쓰면 의심치 않는다는 성충(聖衷)을 특별히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군부(軍部)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서 조용(調用)하게 하겠다."
하였다.

 

9월 21일 양력

의관(議官) 조병식(趙秉式)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방금 삼가 들으니, 폐하와 황태자가 동시에 몸이 편치 않았던 것이 실로 진찬(進饌)을 살피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하니, 놀랍고 원통하여 저도 모르게 머리칼이 곤두서고 간담이 떨렸습니다. 오늘날 폐하께서 외롭고 위태로운 것이 한결같이 이 먼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폐하의 좌우에 진실로 명철하고 신중하며 엄격하고 공정한 사람이 지성으로 받들어 호위하였다면 어찌 이런 역적의 무리들이 측근에서 흉계를 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틀림없이 을미년(1895) 역도(役徒)들 중 외국으로 도망한 자와 국내에 숨어 있는 자가 서로 연결하여 재앙의 싹을 빚어내고 틈을 엿보아 종사(宗社)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꾀한 지 이미 오래라고 생각합니다. 흉악하고 독살스런 심보로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끝내 제대로 행해지지 않자 남몰래 이처럼 중독시키려는 계책을 꾸미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의리에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먼저 그 동조자를 다스린다고 한 것이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이미 난신적자라는 것을 안 이상 누구나 그를 죽일 수 것이며,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당여(黨與)로 말하면 비록 한통속이기는 하지만 혹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서 금수(禽獸)처럼 낮에 숨어 있다가 밤에 행동하기도 하고, 연줄을 맺어 서로 다니면서 서울과 지방에 두루 퍼져 있다가 기회를 타서 뜻을 실현하기도 하는데 마치 포위를 뚫고 달아나는 토끼와도 같아 사람들이 막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발생한 각종 옥사(獄事)는 본래 형태만 바뀐 것으로, 그 근원을 캐보면 모두 을미년 8월의 남은 잔당으로 인한 것입니다. 을미년 8월의 흉도(凶徒)들에 대해 모두 노륙(孥戮)의 형전을 행하여 그 종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화유(化囿)의 안에서 길러지는 일이 없게 한 뒤에야 화(禍)의 단서를 막을 수 있고 재앙의 싹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이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또한 근밀(近密)한 자리를 출입하면서 동정을 엿보아 역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이 단지 수라(水剌)를 진공(進供)하는 자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다시 어떤 형태의 화의 기미가 어느 틈에 불숙 튀어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궁금(宮禁)을 엄숙히 하고 깨끗이 하여 간사한 무리들로 하여금 폐하의 가까운 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궁궐을 엄숙히 하고 깨끗이 하는 데 대해 어찌 경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죄인들은 잡는 대로 응당 법대로 처형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유치원(兪致元)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들으니, 폐하(陛下)의 체후가 갑자기 편안치 않으시고 황태자(皇太子)의 기후도 위험한 고비를 크게 겪었는데, 그 까닭은 실로 어공(御供)을 삼가하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다고 하니, 이 무슨 변고란 말입니까?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몹시 사악함이 무엇이 이보다 극심하겠습니까? 우레와 같은 위엄과 부월(鈇鉞)과 같은 주벌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형장(刑章)이 엄하면 사람들이 범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형장이 느슨하면 사람들이 범하는 것을 쉽게 여기니, 난적(亂賊)들의 화(禍)가 옛날에는 드물었는데 지금에 와서 빈번한 것은 실로 형법(刑法)을 경장(更張)할 때에 무거운 형벌을 버리고 가벼운 형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형벌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떤 변인들 나오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끝까지 조사하고 엄격히 다스려서 그 근원을 뽑아 버리지 않는다면 그 흉악한 음모와 놀라운 기미가 또 조만간에 불쑥 튀어나오게 될 것이며, 갈수록 더욱 못하는 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이에 천위(天威)를 드러내시어 엄히 밝혀내고 국문(鞫問)하여 다스려 그 족속들을 멸족시킴으로써 훗날의 폐단을 막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론이 격발한 상태이니, 마땅히 이런 논의가 있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다.

 

9월 22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희일(趙熙一)이 아뢰기를,
"하늘과 조종(祖宗)이 음으로 돌보아 주시어 대황제 폐하(大皇帝陛下)의 건강이 회복되시고 황태자 전하(皇太子殿下)의 병세가 화평해졌으니, 이는 진실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에게 있어서 전에 없던 크나큰 경사입니다. 그러므로 천지(天地), 종묘(宗廟), 사직(社稷)에 고하고 조서(詔書)를 반포하며, 진하(陳賀)하는 등의 일을 즉시 길일(吉日)을 잡아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잠깐 앓다가 곧 나은 것이니 굳이 경하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이어 원임 의정 대신(原任議政大臣),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原任閣臣),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을 소견(召見)하였다.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연석(筵席)에 나아가 용안을 뵈니 평상시와 같았습니다. 신민(臣民)으로서 기쁜 마음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철에 따라 조섭하고 건강을 돌보는 방도에 있어 전에 비해 더욱 조심하고 삼가시기를 우러러 빕니다."
하니, 상(上)이 이르기를,
"지금은 조금 괜찮아졌으나 위급한 증세를 겪은 듯하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폐하와 황태자의 건강이 동시에 편찮으시어 약원에서 윤직(輪直)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던 중에 오직 하늘과 조종(祖宗)이 묵묵히 도우시어 며칠 내로 건강이 회복되시고 약원에서 윤직도 이미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서로 돌아보며 기뻐서 춤을 추니, 이는 실로 종사(宗社)의 끝없는 복이고 신민(臣民)들의 더없이 큰 경사입니다.
장례원(掌隷院)의 신하가 경하 의식을 거행할 것을 주청한 것은 실로 나라의 떳떳한 법을 따르자는 것인데, 우리 폐하께서는 겸손한 덕을 깊이 간직하신 채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지금 병이 나으신 경사를 폐하에게만 연관된다 여기시어 크게 벌이는 의식을 행하려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신들의 생각에는 폐하께서는 위로는 열성조(列聖朝)의 중요한 부탁을 받았고 아래로는 조민(兆民)의 바람에 관계되니, 지금 매우 기뻐하시는 열성조의 영령께 우러러 고하고 기뻐하며 축하하는 조민의 정성에 굽어 답하는 것은 실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볼 때 당연한 바입니다. 그리고 윤직을 철수하고 나서 훌륭한 의식을 거행하는 전례가 바로 우리 왕가(王家)의 예법에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들의 청을 허락하시어 종사에 고하고 조서(詔書)를 반포하는 의절(儀節)을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길일(吉日)을 잡아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시기는 다른 때와는 다르니 크게 벌이는 의식을 행하고 싶지 않다."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이르기를,
"이는 의식을 크게 벌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지금 주청한 바에 대해서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어찌 원통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민들이 경하하려는 것은 혹 괴이할 것이 없으나 짐(朕)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참정(參政) 윤용선(尹容善) 등이 아뢰기를,
"대료(大僚)가 이미 우러러 아뢰었듯이 이는 사실 종사의 더없이 큰 경사로서 백관(百官)과 만민(萬民)이 똑같이 원하는 바입니다. 백관과 만민의 마음을 어찌 굽어 살펴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국법을 상고해 보니 거기에는 징험할 만한 것이 있기에 기필코 윤허를 받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더 신중히 생각하시어 속히 밝은 명을 내림으로써 온 나라 신민들의 간절히 바라는 정성에 부응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청이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실로 윤허하여 따르기는 어렵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들이 오늘날 청한 것은 신들의 말일 뿐만 아니라 곧 온 나라 백성들이 두 손 모아 일제히 축원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이에 대해 어찌하여 굳이 거절하면서 다같이 원하는 바를 따르지 않으십니까? 충심에서 우러나온 말이기에 또 이렇게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굳은 간청이 한결같이 간절하고 정성스러운데, 이와 같이 윤허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도리어 사체(事體)가 아닐 것이니, 부득이 마지못해 따르겠다."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희일(趙熙一)이 아뢰기를,
"위로 종사에 고하고 아래로 조서를 반포하는 일에 대해 이미 명을 받들었습니다. 진하(陳賀)할 날짜를 본원(本院)으로 하여금 택일(擇日)하여 거행하게 합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희일이 아뢰기를,
"이번에 경하하는 칭호는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환후가 회복되고 태자궁(太子宮)의 기후가 회복된 두 경사’라고 합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은 연로하고 병까지 들어 근년의 궁금(宮禁)의 일이 어떠하며 조정의 일이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입성(入城)하여 며칠을 지내면서 여론을 들으니 놀랍고도 탄식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만고(萬古)에 없었던 이런 큰 변괴가 생겨 초조하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으니, 단지 늙어서 죽지 않고 차마 이러한 때를 만나게 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궁금으로 말하면 비록 승후관(承候官)이라 하더라도 문후하는 일이 아니면 감히 들어가서는 안 되고 비록 각부(各部)의 대신(大臣)이라 하더라도 아뢰는 일이 아니면 감히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비천한 부류가 각국(各國) 말을 조금만 알아도 대뜸 관작을 제수하고 은밀한 곳에 출입하게 하는데, 이 무리들이 어찌 조정의 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의리를 알겠습니까? 구중(九重)은 그윽하고 엄숙한 곳인데 동정을 살피거나 발언을 삼가지 않아도 아무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혹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가 있어서 흉역(凶逆)한 심보로 꺼리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게 되면 어찌 뜻밖의 변고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매일 소접(召接)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현명한 사대부는 아닙니다. 그중에는 거간꾼으로 벼슬 한 자도 있고 세금을 만들어내서 백성들을 착취한 자도 있으며, 나라를 팔아 자기 잇속을 채운 자도 있습니다. 일월(日月)처럼 밝으신 우리 폐하께서 어찌 통촉하지 못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조정으로 말하면 무릇 고등관(高等官)이 되어 사람을 등용하고 관직을 제수할 때에 스스로 새 법이라고 하면서 공도(公道)를 어기고 사당(私黨)을 부식(扶植)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니, 장차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언로(言路)를 활짝 열고 포용하고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이 일찍이 모두 성덕(聖德)에서 나온 일인데, 요즈음 상소를 올리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고 자기의 지위를 벗어나 논하는 일을 다반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청(廳)을 설치하고 무리를 모아 조령(朝令)에 힘껏 대항하는 것은 모두 목적을 갖고 협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은 관원이 애초에 헤아리지도 않고, 소장이 올라오는 대로 그대로 올려 한갓 번거롭게 수응하게 하였을 뿐이니, 어찌 이와 같은 사체가 있단 말입니까? 궁금은 깊고 엄한 곳이며 조정은 표준이 되는 곳인데, 모든 일이 계속 이와 같이 된다면 어떤 형태의 재앙의 기미가 언제 발생할지 몰라 나라가 장차 편안할 소지가 없게 될 것이니 어찌 애통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늙은 신하의 구구한 우려가 그칠 바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천하를 큰 법으로 다스리시어 간사한 무리들을 물리침으로써 궁금을 엄숙하고 깨끗하게 하시매, 기강을 엄격히 세움으로써 조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충정과 사랑에서 우러나온 노숙한 신하의 말이 이와 같이 간절하고 정성스러우니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하였다.

 

종1품 박정양(朴定陽)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9월 23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을 의정부 의정(議政府議定)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9월 24일 양력

의관(議官) 서상우(徐相雨)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외람되이 국사를 논의하는 반열에 있으나 장정(章程)을 정하지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송구스럽습니다. 낭묘(廊廟)의 회의하는 자리의 말석에 있기에 진실로 감히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이번 역적들의 변고는 곧 우리나라 4,000년 역사에 없었던 극심한 변고였습니다.
신이 들으니, 많은 어려움은 나라를 흥왕시키고 큰 근심은 성덕(聖德)을 계발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위험을 전환시켜 안정되게 하고 울음을 돌이켜 웃음으로 만드는 것은 그 요점이 풀을 자르되 뿌리까지 제거하고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맑게 하며, 이미 드러난 간사한 싹을 꺾어 앞날을 밝게 경계하는 데에 있습니다.
대체로 오형(五刑)은 오교(五敎)를 도와서 형벌이 없기를 목적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고(上古) 시대의 성왕(聖王)들이 형법(刑法)을 제정하면서 경형(黥刑), 월형(刖刑), 의형(劓刑), 참형(斬刑)에 더 나아가 후손을 모조리 없애기까지 하였는데 어찌 참지 못해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이미 그렇게 된 뒤에는 그것을 다스려서 앞으로 그렇게 되기 전에 금지하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경장(更張)한 이후로 형법이 너무 관대해져서 사형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데 그치고 노륙(孥戮)의 형전도 반역의 무리들에게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취지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결국 선량한 마음을 권장시키지 못하고 다만 난적의 음모를 조장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로 변란이 여러 차례 일어나 형법에 저촉된 자가 더욱 많아졌으니, 그것은 이른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바로 백성들을 헤쳤기 때문입니다. 식견있는 사람들이 근심하고 탄식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오늘날 흉악한 역적들의 변고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오늘날 논자(論者)들은 오히려 똑같은 사형(死刑)이므로 교형이나 참형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죄에 대소(大小)의 구분이 있듯이 형벌에도 경중(輕重)이 있는 만큼 오형에 다섯 가지를 적용하여 각각 차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싸우다 살인한 자에게 교형에 처하고 강도질을 한 자에게도 교형에 처하며, 함부로 살인한 자에게 교형에 처하고 시역(弑逆)한 자에게도 교형에 처하니, 이것이 어찌 천토(天討)에 있어 죄의 경중에 맞게 하는 의리이겠습니까? 더구나 오늘날 여러 적들의 악행은 천지(天地)와 우주(宇宙)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입니다. 신은 마땅히 옛 법을 따라서 이괄(李适)과 신치운(申致雲)에게 적용했던 형률을 시행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정부(政府)로 하여금 조율(照律)하여 시행하는 것을 잠시도 지체하지 말게 함으로써 천지와 신인(神人)들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씻게 해 주시고, 이어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국가의 법으로 만드소서.
지금부터 모든 일을 맡아보는 신하들이 일로 인한 주대(奏對) 및 경연관(經筵官)들의 강독과 소대(召對)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들어와 독대(獨對)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고 종척(宗戚)들이 문안하는 것 또한 제한을 두어 외람되게 아무 때나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무릇 음식을 진어(進御)하는 데 있어서는 어주(御廚)에서 일상적으로 진공(進供)하는 것을 제외한 외국의 색다른 맛의 음식이라던가 사가(私家)의 음식은 절대로 금중(禁中)에 들이지 못하게 하시어 대성인(大聖人)의 철에 따라 조섭하는 방도를 신중히 따르소서. 모든 환첩(宦妾)과 액례(掖隷)는 일정 인원수를 정해 두고 그들에 대한 규찰을 엄하게 하고 그들의 출입을 살펴서 한잡인(閒雜人)과 서로 내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 궁금(宮禁)이 엄숙하고 깨끗해지도록 힘씀으로써 비상 사태에 대비하소서. 모든 외국 사신들을 소접(召接)할 때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은밀히 아뢰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서 나라의 체통을 높이소서. 이어 신이 진달한 여러 조항을 정부에 내려, 법률을 바로잡아 옛법을 다시 밝히고 궁금을 깨끗이 하여 그릇된 폐단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정사(政事)와 치화(治化)로 하여금 온통 새로워지게 하소서. 그러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기틀과 오래도록 편안하게 할 방도가 진실로 이번 조치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역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법률이란 시대에 따라서 적절하게 제정하는 것인데, 어찌 쉽게 개혁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가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원구단(圜丘壇) 황궁우(皇穹宇)의 역비(役費) 3만 3,288원(元) 남짓, 13도(道) 및 제주목(濟州牧) 4개 항구 죄수들의 식비(食費)와 피복비(被服費) 2,875원 남짓, 괴산군(槐山郡)의 표호(漂戶)와 퇴호(頹戶) 및 익사(溺死)한 사람들에 대한 휼금(恤金) 182원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문제 및 금년도 예비금 20만 원을 국고금(國庫金) 중에 첨산(添算)하여 배용(排用)하는 문제에 관해 회의를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9월 27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진하(陳賀)할 때, 문관(文官) 3품 이상, 음관(蔭官)과 무관(武官) 2품 이상으로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은 비록 현직(現職)이 없더라도 진하하는 반열에 참석하는 것을 지금부터 정식(定式)으로 삼아 시행하라."
하였다.

 

9월 28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희일(趙熙一)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윤용선(尹容善)에게 장례원 경(掌禮院卿)을 겸임(兼任)하도록 하였다.

 

9월 29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추석 제사에 쓸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定)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이달 14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조병식(趙秉式)이 총상회장(總商會長)이라 칭하고 방문(榜文)을 붙여 상인들에게 점포를 닫도록 한 일은 본부(本部)에서 견책(譴責)을 주청(奏請)하였으며, 계속해서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경무사(警務使) 및 한성판윤(漢城判尹)을 훈령(訓令)으로 신칙하여 상회(商會)라는 명색(名色)을 금지하도록 하였습니다.
방금 삼가 들으니, 이달 26일 밤에 시민(市民) 7, 8십 명이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이도재(李道宰)의 집에 모여 회장의 신칙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른바 규칙(規則)을 적은 책자(冊子)와 청원서(請願書)에 대하여 허락하는 지령(指令)을 얻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대치하였는데 전 의관(前議官) 안명호(安明鎬)와 상공 국장(商工局長) 송헌빈(宋憲斌)이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모두 끌려나오게 되었으나 형세가 험악하게 조성되는 바람에 막아낼 계책이 없어 끝내 그 규칙을 허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조병식은 고관(高官)의 신분으로서 상회에 들어간 것이 이미 옳지 않은 것이고, 견책이 내려진 상황에서 도리상 뉘우치고 반성해야 하거늘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사주해서 대관(大官)을 위협하였습니다. 농상공부 대신은 앞에서 이미 금지하였다가 후에 다시 허락하였는데, 아무리 부득이한 형세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연약하게 처리하는 잘못인 줄 알면서 잘못을 저질렀으니 심상한 일에 비길 것이 아닙니다. 경무사 민영기(閔泳綺)는 이미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고 또 3, 4시경에 금단(禁斷)시키지도 못하였으니, 모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의관 조병식, 농상공부 대신 이도재, 경무사 민영기는 모두 본관(本官)을 면직(免職)하소서. 한성 판윤 이채연(李采淵)으로 말하면, 이미 농상공부의 훈령이 있었는데도 제때 금단시키지 못하여 이런 소란을 초래하였으니, 또한 경책(警責)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엄한 견책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병식은 고관의 신분으로서 조처한 것이 놀랍고 패악스러우니, 법부(法部)로 하여금 경기 연해 지역에 찬배(竄配)하게 하고, 이도재, 민영기, 이채연은 모두 그대로 윤허한다."
하였다.

 

정2품 김석진(金奭鎭)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부장(副將) 민영환(閔泳煥)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 종1품 김성근(金聲根)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심상훈(沈相薰)에게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고,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민병석(閔丙奭)에게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며, 의정부 찬정 이종건(李鍾健)에게 경무사(警務使)를 겸임하라고 명하였다.

 

전 참봉(前參奉) 이종래(李鍾來)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근래에 외국인의 상업은 날로 더욱 흥성하는데 본국인(本國人)의 상업은 날로 더욱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하(都下)의 상점계는 모조리 저들이 점유하고 있고 중앙에 겨우 손바닥만큼의 한 조각만 남아 있어 많은 백성들이 분개하고 한탄하였기에, 총상회(總商會)를 설치하게 된 것입니다. 회(會)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면 대중의 뜻을 안정시킬 수 없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의관(議官) 조병식(趙秉式)을 회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변고를 만나 폐하의 체후가 편안치 않게 되어 신들이 천지(天地)에 빌면서 초조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하다가 잠시 시장 점포를 닫았던 것인데, 경솔하게 대처한 죄과에 돌아가 견책(譴責)을 받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농상공부(農商工部)에 인가(認可)를 청하기 위하여 해부(該部)의 대신(大臣)에게 가서 하소연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政府)의 탄핵으로 인하여 마침내 유배(流配)의 엄명을 받게 되었으니, 신들이 반복하여 생각건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저 서민(庶民)의 집에서도 그 부모가 조금이나마 병이 들어 조심할 일이 생기게 되면 손님을 사절하고 하던 일도 그만두어 감히 편안히 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공경하고 사랑하는 자손들의 마음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禮)는 인정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어찌 여기에 대소(大小)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또 가서 인가를 청한 일로 말하면 농상 대신(農商大臣) 이도재(李道宰)는 절실하고 급한 상무(商務)는 엄두에 두지 않고 세월을 허비하는 것만 일삼으며 허가에 인색하였고, 이미 허가하고는 도로 반대하는 말을 두세 번이나 하였습니다. 회민(會民)들이 일제히 나아가 간절하게 요청한 것은 상정(常情)의 당연한 것으로 족히 괴이할 것이 없는데 정부에서 필히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과연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미약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 것이 진실로 어떠한데, 대신이라는 자가 그렁저렁 내버려둔 채 진작시킬 방도는 생각지 않고 영업(營業)을 하는 자들까지도 이를 저지하고 있으니, 이것이 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속히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서릿발 같은 위엄을 우로(雨露)와 같은 은택으로 바꾸어 조병식에 대해 특별히 은혜를 내려 용서해 주심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병식을 찬배(竄配)한 조치는 곧 조정의 체통과 관계되는 것이지 상회 때문이 아니었는데, 지금 이렇게 제멋대로 글을 올린 것은 매우 놀랍다. 상회의 규칙을 해부로 하여금 조처(措處)하도록 할 것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안심하고 상업에 종사하라."
하였다.

 

9월 30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추석 제사를 지냈다.

 

정2품 이건하(李乾夏)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이재영(李載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극역무도(極逆無道)한 자가 예로부터 무수히 많았지만, 김홍륙(金鴻陸)처럼 극악하고 패려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먼 시골의 보잘것없는 자로서 어떤 일을 계기로 대궐에 들어와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면서 벼슬이 높아지고 녹봉이 많아졌으니, 그에게 있어 폐하의 은혜는 강과 바다처럼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총애를 믿고서 위세를 부려 조정의 신하들을 능멸하고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쳤는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폐하의 살피심이 매우 밝으시어 방축(放逐)하고 찬배(竄配)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너그럽게 용납하시는 큰 덕은 만물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이 자는 도리어 올빼미와 같은 악독한 마음을 품고 살무사 같은 독을 길러 폐하를 모해할 계책을 자행하고 더없이 흉악한 짓을 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온갖 귀신이 놀라고 만백성이 울부짖도록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나라에 지금까지 없었던 변고이고 흉역(凶逆)으로서도 지금까지 없었던 역적이니, 모든 사람치고 그의 살갗을 깔고 자고 그의 살점을 씹어 먹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 역적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은 지가 이미 여러 해 되는 관계로 심복과 앞잡이들이 서울과 지방 도처에 널려 있고, 더구나 또 외국과 연결되어 소식이 서로 통하고 있어 그들의 권력은 모든 것을 제멋대로 조종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배소(配所)로 떠나면서도 입으로는 앞잡이들에게 사주하여 감히 이러한 하늘에 가득 찬 대죄(大罪)를 저질렀으니, 지금 비록 잡히긴 하였지만 또 어떤 화란의 기미가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잡아올 때에 각별히 더 단속하여 뜻밖의 변고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새 장정(章程)에는 교형(絞刑)에 처하는 것 외에 더 이상 극형(極刑)이 없습니다. 비상의 변고에 대해서는 또한 비상의 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극악한 역적은 다른 죄인처럼 심상하게 교형에 처하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거리에 거적을 깔고 도끼로 찍어 죽이는 법을 적용함으로써 신인(神人)들의 통분함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작년부터 이 역적의 사주로 내부(內部)에서 주본(奏本)하여 외임(外任)에 된 자들을 낱낱이 조사해 내어 태거(汰去)함으로써 원망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민정(民情)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이 글을 정부(政府)에 내리시어 하나하나 취하여 쓰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공분(公憤)으로 말한 것이지만 진달한 내용 중에 잘못 헤아린 것이 많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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