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38권, 고종35년 1898년 12월
12월 1일 양력
【음력 무술년(戊戌年) 10월 28일】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박정양(朴定陽),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내부 대신(內部大臣) 민영환(閔泳煥),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도재(李道宰),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권재형(權在衡),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규홍(金奎弘), 참찬(參贊) 이용직(李容稙)이 각각 상소를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원본】 42책 38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책 7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박정양(朴定陽),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내부 대신(內部大臣) 민영환(閔泳煥),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도재(李道宰),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권재형(權在衡),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규홍(金奎弘), 참찬(參贊) 이용직(李容稙)이 각각 상소를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태의원 경(太醫院卿) 이건하(李乾夏)를 시종원 경(侍從院卿)에, 특진관(特進官) 조병필(趙秉弼)을 태의원 경에, 시종원 경 이채연(李采淵)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법부 협판(法部協辦) 이만교(李萬敎)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도록 명하였으며 고등 재판소 재판장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協辦) 신태휴(申泰休)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종2품 민찬호(閔贊鎬)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현재 의정부(議政府) 내에는 틀림없이 적당한 인재가 있을 것이니, 잉임(仍任)시킬 만한 사람은 잉임시키고 승서(陞敍)할만한 사람은 승서하여 되도록 관직을 위해 인재를 선발하는 방도에 부합하게 할 것입니다.
무릇 주임관(奏任官) 이하에 속하는 관리들에 대해서는 각각 맡은 신하가 있으니, 오로지 관리 임명을 공정하게 하도록 당부하기만 하고 폐하께서는 아무개를 무슨 관직에 제수하라고 명하지 말며 어떤 사람을 어떤 관직에 차임해야 하는지 묻지도 말아서,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그것을 본받게 하는 도리를 보일 것입니다.
칙임관(勅任官)으로 말하면 의정부의 공론에서 그가 감당할 만하다고 하여 뭇사람들의 기대가 쏠리는 사람을 후보자로 추천하도록 해야 하니, 그런 뒤에 제수한다면 누가 감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마음이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궐 안을 엄숙히 하고 깨끗이 하여 승후관(承候官) 외에는 절대로 사사로이 만나는 신하가 없도록 하고, 한 달에 여섯 번 정승들을 빈대(賓對)하는 규례를 잘 지켜서 대신이 임금의 정사를 돕고 모든 관리들이 자기 직책을 다하도록 하소서. 그러면 옛날 어진 임금들이 팔짱을 끼고 앉아서도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하게 한 것이 이보다 낫겠습니까?
그리고 나라의 형편으로 말하면 정공(正供) 외에 각 항구에서 거두는 세금이 전에 비해 백배나 증가했는데, 비용이 쪼들리고 재정이 부족할까 근심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비용을 절약하고 쓸데없는 낭비를 없애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쓰는 데에 절도가 없으면 백성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방도는 쓰는 데서 절약하는 것뿐입니다. 심지어 각도(各道)의 세납은 장부를 청산할 날이 없으니 그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내부에서 사람을 제대로 선택하지 않으니 수령(守令)도 적임자가 임명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 수령을 출척(黜陟)할 때에 뇌물이 많고 적음만을 볼 뿐 그 사람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는 따지지도 않고 옮겨 차임(差任)하니 수령들이 어떻게 탐오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세금을 바칠 때에는 단지 장사치들의 이해만을 생각하고 실어다 바치는 것이 이른지 더딘지는 생각하지 않으니, 어떻게 나라의 비용이 궁색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제가 드린 말씀을 받아들여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내용에 받아들일 만한 것이 많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2월 2일 양력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과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박기양(朴箕陽)이 각각 상소하여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12월 3일 양력
정3품 이해만(李海萬)을 탁지부 사세국장(度支部司稅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3품 최석조(崔錫肇)를 탁지부 전환국장(度支部典圜局長)에, 정3품 오상규(吳相奎)를 철도 국장(鐵道局長)에 임용하고 모두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군부대신서리 중추원의장(軍部大臣署理中樞院議長) 이종건(李鍾健)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달에 칙명(勅命)을 받들고 군부(軍部)의 사무를 서리(署理)하였습니다. 그때 각 처의 파수(把守) 인원수를 적당히 늘렸는데 군사 인원수가 부족하다는 한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궁색함을 풀기 위해서 군부의 부서 안의 영관(領官)과 위관(尉官)에게 딸린 병졸들을 모두 잠시 동안 거두어들이게 하였다가 파수를 두게 한 후에 친위 연대(親衛聯隊)에 훈칙(訓飭)하여 본 부의 영관과 위관에게 딸린 병졸들을 종전대로 파견해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방금 해당 연대장(聯隊長) 김승규(金昇圭)가 해당 연대 제2대대 대대장(大隊長) 이한영(李漢英)의 청원에 근거해서 등보(謄報)한 것을 보니, 그 대대장의 보고 내용은 전혀 뚜렷이 밝힌 것이 없으며 장관을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리를 놓고 보거나 군사 기율을 참고해볼 때 놀랍고 한탄스럽기 그지없어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영관은 중한 형벌에 처해야 하겠지만 해괴망측한 일로 돌려버리고 특별히 용서하여 면관(免官)으로 징계해야 합니다. 해당 연대장으로 말하면, 자신이 우두머리로 있으면서 연대 아래의 영관의 해괴망측한 행동에 대하여 제대로 단속 통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의 글을 등보함으로써 이렇게 군사 규율을 파괴하고 손상시켰으니, 이에 대해서는 경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위 제1연대장 김승규(金昇圭)에게 일주일 간의 가벼운 근신 처벌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4일 양력
부장(副將) 민영환(閔泳煥)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특진관(特進官) 서정순(徐正淳)과 정2품 권재형(權在衡)을 의정부 찬정에, 종1품 박정양(朴定陽)을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에, 특진관 심상훈(沈相薰)을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정2품 한규설(韓圭卨)을 법부 대신(法部大臣)에, 부장 민영기(閔泳綺)를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에, 정2품 김명규(金明圭)를 학부 대신(學部大臣)에,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이근명(李根命)을 내부 대신(內部大臣)에, 종2품 박제순(朴齊純)을 외부 대신(外部大臣)에, 종1품 민영규(閔泳奎)를 경효전 제조에, 종1품 김규홍(金奎弘)과 정2품 이도재(李道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찬정 이윤용(李允用)에게 법부 대신과 내부 대신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종2품 이용직(李容稙)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내부 협판(內部協辦) 윤웅렬(尹雄烈)을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특진관 민병한(閔丙漢)을 내부 협판에, 정2품 박기양(朴箕陽)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종2품 이만교(李萬敎),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 황기연(黃耆淵), 경효전 제조 오익영(吳益泳)을 궁내부 특진관에, 정2품 이정로(李正魯)를 경효전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5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황기연(黃耆淵)을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에, 첨사(詹事) 민영주(閔泳柱)를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에게 고등 재판소 재판장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내부 협판(內部協辦) 민병한(閔丙漢)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12월 6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조병세(趙秉世)가 거듭 상소를 올려 본직과 겸직을 면직(免職)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높은 덕망으로 나라를 위해 애쓰고 수고해 주니, 짐은 경을 버릴 수 없고 경도 짐을 버려서는 안 된다. 유시(諭示)와 비답에서 이미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두 이야기한 만큼 반드시 서둘러 행장을 꾸려 기꺼이 경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병을 핑계대고 사직하는 상소를 또 올릴 줄을 생각했겠는가? 이처럼 곤란한 때를 당하여 짐이 장차 누구를 믿겠는가? 단지 추운 날씨에 경의 병이 실로 우려되니, 경의 몸조리를 위해서 의정(議政)의 직임과 태의원(太醫院)의 직함에 대해서는 우선 마지못해 사직을 허락한다. 그러니 벼슬자리에 있을 때와 떠나간 때가 다르다고 하지 말고 당면한 시급한 사무에 대해 자주 아뢰도록 하라. 또한 병이 좀 나아지거든 즉시 조정으로 돌아와서 짐이 미치지 못하는 점을 보완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정1품 조병세(趙秉世)와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민영규(閔泳奎)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윤용선(尹容善)을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종2품 이도재(李道宰)를 경효전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이재현(李載現)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고영근(高永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올해 10월 26일에 대가(大駕)가 대궐문에 직접 나온 것을 우러러보았는데 칙령 말씀의 간절함이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간곡히 타일러주는 정도일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 등은 감격의 눈물을 견디지 못하여 몸 둘 바를 모르면서 폐하의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있으나 티끌만한 성과도 내기 어려우니 더욱더 황송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건대 전날에 칙령을 내린 다섯 개 조항과 신 등이 헌의(獻議)한 여섯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기어이 실시하겠다는 유음(兪音)을 삼가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이 어제 관보를 읽는 가운데 심상훈(沈相薰)과 민영기(閔泳綺)를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과 군부 대신(軍部大臣)의 직책에 임명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곧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적합하지 않다고 하고 있으며 지난번에 신 등이 상소를 올려 규탄한 데 대하여 폐하가 세상의 공론을 따라서 이미 물리친 자들입니다. 그런데 며칠 되지도 않아 또 의정부(議政府)에 물어보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도 못했는데 급히 골라 뽑아서 다시 높은 관리로 임명하였습니다.
또한 김명규(金明圭)로 말하면 지난번 농상공부(農商工部)의 벼슬에 임명되었던 날에 이미 폐지한 보부상(褓負商)을 제 마음대로 인가하여 규정을 문란시켰으며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심지어 대궐문 가까이에서 회민(會民)의 백성들을 구타하여 상하게 함으로써 위로는 임금에게 근심을 끼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울분을 격동시킨 결과 오늘에 와서도 수도 안의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김명규가 미연에 화근을 방지하지 못한 죄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상께서 골라 다시 교육의 임무를 맡겼으니 폐하가 사람을 등용하는 방도에 있어서 어찌 현명한 것과 어리석은 것을 판별하지 못하고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뒤섞어 등용하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모두 내쫓음으로써 조정의 기율을 엄숙히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신 등이 생각건대 5흉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전날에 연명으로 올린 글에서 모두 이야기한 만큼 거듭 폐하의 귀를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폐하가 이미 나타나는 대로 재판한다는 칙유를 내린 지도 시일이 많이 지나갔는데 신 등은 아직 한 사람이라도 잡아왔다든가 염탐하여 찾고 있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법을 맡은 신하가 자유로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간사한 무리가 임금의 귀와 눈을 가려 중간에서 엄호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폐하가 이 무리들에게 의거하고 비호하며 꺼리는 데가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신 등이 의혹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이것입니다.
심지어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과 같은 자들은 애초에 재판한 일도 없이 급히 유배의 명을 내렸지만 오늘까지 많은 시일이 흘렀으나 압송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나라의 법이 진실로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에 당요(唐堯)가 4흉(凶)에게 죄를 준 것을 온 천하가 모두 승복하였던 것이니, 신 등의 오늘의 말은 바로 천하의 공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법을 맡은 관청에 명하여 조사하고 잡아다 징계함으로써 나라의 법을 확립하도록 하고 민심을 승복하게 하도록 할 것입니다.
신 등이 생각건대 보부상을 없애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명령을 내린 것이 있고 또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칙유한 만큼 마땅히 서둘러 빨리 물러가 흩어져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 저 한산하게 지내는 무뢰한들이 몇백 몇천 명씩 무리를 지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수도 안에 따로 소굴을 만들고 저마다 뜬소문을 내서 인심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를 금지하지 않으면 황명(皇命)은 시행될 길이 없으며 백성들의 의심은 풀릴 길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경찰을 맡은 신하에게 그들을 쫓아버리고 흩어지도록 하며 다시는 종전의 버릇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직업에 안착되도록 하고 폐단을 제거해 버리도록 할 것입니다.
신 등이 다시 생각건대 당일에 임금과 신하 상하 모두는 한결같이 믿음을 가지고 일해 나갈 것이라는 칙어를 만백성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였고 외국의 사신들도 참가하여 들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大韓)’이란 나라가 생긴 이래로 처음 있는 훌륭한 일입니다.
3신(臣) 물리치는 것과 5흉을 징계하는 것과 보부상을 없애는 것은 바로 오늘 폐하께서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고 일해 나가는 첫 번째 일입니다. 바로 이것은 만백성을 기쁘게 하고 여러 나라에 믿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유의하여 밝게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직접 유시한 이래로 짐(朕)은 한창 생각을 가다듬어 새로운 정사를 해나가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째서 직업에 안착하지 않고 또다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것인가? 3신의 문제는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탓할 것이 없이 앞으로의 성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5신을 재판하는 것은 법을 맡은 관청의 소관이고 상인들을 단속하는 문제는 해부(該部)가 원래 있다. 지금 이미 없애버린 만민회(萬民會)를 설치하자는 것은 다시 시끄럽게 구는 것이니, 이것은 명령에 항거하는 것이 아닌가? 특별히 참작하여 주겠으나 만약 또 고집부리면 나라의 법이 지극히 엄하다.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하였다.
12월 7일 양력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이, ‘올해 11월 23일 사전(赦典)을 받들어, 각 재판소의 징역 죄인 중에서 육범(六犯)을 제외하고 감등(減等)하는 적합한 대상자로서 황만기(黃萬己) 등 97명입니다. 이를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유진구(兪鎭九)를 특별히 징역을 면제시키고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윤용구(尹用求)와 종2품 한기동(韓耆東)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이채연(李采淵)에게 한성부재판소 수반판사(漢城府裁判所首班判事)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12월 8일 양력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이재극(李載克)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특진관(特進官) 윤용식(尹容植)을 경효전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칙령(勅令) 제38호,〈중추원 관리의 봉급에 관한 건〔中樞院官吏俸給所關件〕〉, 칙령 제39호, 〈주임관과 판임관 시험 및 임명 규칙〔奏判任官試驗及任命規則〕〉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종2품 고영근(高永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삼가 생각건대 오늘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운 것은 진실로 정승을 임명함에 있어서 적임자를 얻지 못하고 법률이 실시되지 못하며 백성들이 상호 의심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폐하에게 충성의 마음을 담아 감히 진달하였더니 어제 삼가 폐하의 비답을 받아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직접 유시한 이래로 짐은 정신을 가다듬어 새로운 정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한 마디의 말은 충분히 나라의 부흥을 오늘에 기대할 수 있게 하였으니, 신 등은 삼가 손을 모아 경축하는 심정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친히 유시한 지 열흘이 되었는데 신 등은 아직 하나의 정령이라도 실시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위로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삼가 폐하의 비답을 읽어보면, ‘너희들은 어째서 직업에 안착되지 못하고 또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가?’고 하였으므로, 신은 더구나 극도의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옷과 음식이 먹고 입는 데에 적합하고 부부간에 부르고 따르는 즐거움을 가지는 것은 진실로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며 신 등이 바로 생업에 안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굶주리고 풍찬 노숙(風餐露宿)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며 신 등도 즐겨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대한의 치하(治下)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생업에 안착하고 있는데 신 등만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일삼을 것이겠습니까? 위에서는 조정의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나라를 팔아먹을 꾀를 쓰고 있고 아래에서는 민간의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신 등이 장차 어디에서 생업에 안착하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삼가 폐하의 비답을 읽어보면, ‘세 신하의 문제는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탓할 것이 없이 앞으로의 성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폐하가 일단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탓하지 말라고 한 것은 즉 세 신하가 전날에 잘못한 죄를 폐하는 이미 환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을 용서해주는 대성인의 덕으로 앞으로의 성과를 기다리려고 하지만, 폐하가 백성들에게 믿음과 의리를 보이자고 몸소 유시를 내렸는데 어째서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세 명의 신하를 꼭 등용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세 신하가 하루를 정부에 있으면 만백성들은 하루의 해를 당하게 되며, 한 시각을 정부에 있으면 만백성들은 한 시각의 해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삼가 폐하의 비답을 읽어보면, ‘다섯 명의 신하를 재판하는 것은 법을 맡은 관청의 소관이다.’ 하였습니다. 아! 저 5흉들은 단지 폐하의 영토 안에 형적을 숨기고 있을 것이니 반드시 남쪽으로 달아나고 북쪽을 넘어서 오랑캐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특별히 단속하여 시간을 정해놓고 염탐하여 잡는다면 법망이 넓다고 해도 새어나갈 염려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도록 이에 대하여 들은 것이 없으니 이것은 바로 일부러 놓아준 폐단인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는 어째서 경찰을 맡은 신하에게 죄를 주지 않고 법을 맡은 관청에 핑계를 대는 것입니까?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삼가 폐하의 비답을 읽어보면, ‘상인을 단속하는 문제는 해부(該部)가 원래 있다.’ 하였는데, 보부상(褓負商)과 상민(商民)은 그 구별이 아주 현저합니다. 상민이라는 것은 곧 폐하의 네 부류의 백성 중의 하나이고 보부상이란 곧 오늘의 반란의 무리들입니다. 신 등이 전날에 진달한 것은 곧 보부상이지 상민이 아닌 것은 명백합니다. 저 보부상들은 이미 없어진 후에 이름을 고쳐가지고 패거리를 불러 모아 기어이 만백성의 마음을 사려고 하는 만큼 어찌 다만 해부에만 내맡기고 금지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등한히 볼 것 같으면 본래 간악하고 흉한 패거리들인지라 저것들은 제 마음대로 패악한 짓을 자행하여 어떤 형태의 재앙이 아침과 저녁 사이에 닥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위에 진달한 것은 곧 오늘 백성들과 나라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며 또한 신 등의 절박한 사정이기에 신 등은 일단 물러갔다가 다시 모여서 여러 날째 돌아갈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니, 어찌 감히 털끝만치라도 명령에 항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다시 한 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하니,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은 폐하는 가엾이 여기고 불쌍히 여겨 전날에 신 등이 올린 세 가지 조항을 굽어 따라서 빨리 실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데 대해서는 이미 전에 비답을 하였고 바야흐로 정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또다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것은 사체인가? 다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하였다.
12월 9일 양력
칙령(勅令) 제40호, 〈외교관 및 영사관 관제 중에서 통상사무서를 더 두는 건〔外交官及領事館官制中通商事務署增置件〕〉, 칙령 제41호 〈공사관, 영사관 직원령 중 일부 개정 건〔公使館領事館職員令中改正件〕〉, 칙령 제42호, 〈관등 봉급령 중 일부 개정 건〔官等俸給令中改正件〕〉, 칙령 제43호, 〈공사관, 영사관의 비용령 개정 건〔公使館領事館費用令改正件〕〉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전 헌납(獻納) 황보연(黃輔淵)이 상소를 올려 다섯 가지 조항을 진달하기를,
"첫째, 조종(朝宗)의 묘호(廟號)를 추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국모(國母)에 대한 깊은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관리가 될 재목을 골라서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넷째, 국가의 재화를 저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섯째,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금지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한 내용에 채용할 만한 것이 많으니, 지금은 우선 물러가 기다리라."
하였다.
전 참서관(前參書官) 안태원(安泰遠)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대저 이른바 민회(民會)에 대한 각 국의 규례에 대해서 신은 본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꼴 베는 아이나 나무꾼에게 묻기도 하고, 풍속을 담은 노래에서 채용하기도 하였으며, 항간에 떠도는 소문조차도 금지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한 취지는 아래의 실정이 위에 전달되도록 하며 위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즐겨 듣고서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더 힘쓰고자 하는 데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찌 일찍이 이른바 오늘의 민회와 같이 대신을 협박하고 위협하여 위엄을 보이고 복을 주고 하는 권한을 몰래 옮기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놀랍고 무서운 일과 위태롭고 두려운 기미에 대해서 지금 낱낱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에 대해서 논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머리를 흔들고 눈알을 굴리면서 서로 모여서 이야기하더니, 그런 일이 차츰 계속되다가 나중에는 눈썹을 곤두세우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공공연히 고함을 지르게 되었는데, 그 형세가 점차 확대되어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대궐문에서 떠들어대고 네거리에서 모임을 가지며 앞뒤에서 서로 소리로 화답하면서 수백, 수천 명이 무리를 이루니, 장사치, 기녀, 승려, 백정들까지 왁자지껄 모여들어 빙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습니다. 명성과 위세를 돋우는 데 핑계대고 각사(各社)의 신문(新聞)과 외국의 보도에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선전하여 드러내놓고 비방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마지막에는 곧 조목별로 규제를 제정하고 보고하여 승인할 것을 위협하여 요청하는데, 마치 강한 이웃 나라의 사나운 적이 힘으로 맹약을 요구하듯이 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만고에 없던 변고입니다.
무릇 오늘날 관리들이 홀을 드리우고 북쪽을 향해서 폐하의 조정에 선 사람들이 만일 조금이라도 타고난 떳떳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면 마땅히 깜짝 놀라서 피눈물을 흘리고 눈물을 삼켜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앉으라면 앉고 서라고 하면 서고 나오라고 하면 나오고 물러가라고 하면 물러가서 서로 이끌고 모임에 나와서는 말하는 대로 따르며 서명을 하여 승인하기를 마치 요구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이 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임금을 위협하는 논의를 임금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명령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관리들에게 통문을 돌려 시장바닥처럼 모이게 하는가 하면 혹은 파를 나누고 직임을 맡아 서로 엉키어 패거리를 지어 마침내는 한 덩어리로 되고, 돌아가면서 서로 주객이 되었는데 이를 ‘관민 공동회(官民共同會)’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취지를 물어보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며, 하는 일을 물어보면 바른 말로 극력 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바른 말로 극력 간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으면 오늘 바른 말로 극력 간하여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한 후에야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다음날 한 가지 잘못이 있으면 다음날 바른 말로 극력 간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은 후에야 비로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등극하신 뒤로 늘 곁에서 모시고 가까이 드나들면서 보좌하고 인도하며 진언하고 논의하는 직임을 맡고 있은 자들은 신이 보기에 이러한 무리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어도 바른 말로 극력 간하여 도와주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다음날 한 가지 잘못이 있었어도 바른 말로 극력 간하여 바로잡았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지 어느덧 3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사이에 화와 변고는 자주 일어나고 흉악한 역적이 잇달아 일어나서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부당한 논의들이 들끓고 일어났습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감히 뜻을 이루었다는 듯 흐뭇해하면서 서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은연중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바른 말로 극력 간한다는 이름을 자처하고는 임금의 형세가 고립되도록 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더욱 소란하도록 했으니, 그들의 마음이 참으로 딴마음이 없는 한결같은 충정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나간 일은 물론 뒤쫓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일은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잘못한 일을 바로잡아주고 도와주어 지난날 대세를 따라 부화뇌동하고 침묵을 지켰던 죄를 속죄하려고 한다면 왜 각각 자기 소견을 진달하고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말하기를 마치 수레를 미는 사람들이 서로 함께 험준한 곳을 넘어가는 것처럼 하지 않는 것입니까? 지금 바로 패거리를 불러 모아서 다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위세를 먼저 보이는 것은 또한 어째서입니까?
아! 슬픕니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으니, 벼슬에 있는 자들은 비유하자면 뱃사공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물에 갑자기 풍랑과 세찬 여울이라도 있게 되면, 키를 잡고 물살을 쫓아 배로 하여금 무사히 가도록 해야만 비로소 훌륭한 조수(助手)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물살을 쫓아 흘러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물살을 거슬러 물결을 일으키면서도 ‘내가 물에 배를 띄우고도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니, 앞으로 누구를 속이려는 것입니까? 하늘을 속이려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 역시 일찍이 지방에 나가서 관찰사(觀察使)나 수령(守令) 노릇을 한 자들입니다. 시험 삼아 관찰사나 수령의 경우를 두고 말한다면, 수령이 백성들의 마음을 거슬려서 백성들이 혹은 서로 원망을 품고 관청문 앞에서 떠들썩하게 소요를 일으키는데, 아전(衙前)이나 종복으로 있는 자들이 그것을 안정시켜 제지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서로 백성의 패거리들 속으로 몰고 들어갔다가 세월이 가고 일이 지나간 후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고 태연스레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을 초래한 것은 내 책임이 아니고 수령의 책임이다.’라고 한다면, 수령이 된 사람은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 무리들이 불행하게도 이런 경우를 만난다면, 아전과 종복들을 나에게 충성하고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여기면서 내버려둔 채 죄를 따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본래 지극히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또한 성상의 오늘날의 마음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을 것인데도 오히려 다시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비루한 사람과는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벼슬을 못하면 벼슬을 얻지 못해서 근심하고 벼슬을 얻은 뒤에는 벼슬을 잃을까봐 근심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리를 모르고 오직 이익만을 좇아서, 권력이 종실(宗室)과 외척(外戚)에게 있을 때는 종실과 외척에게 달라붙고, 권력이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에게 있으면 환관이나 궁첩과 결탁합니다. 심지어는 권력이 외국에 있으면 외국과 내통하는 자가 있으며, 권력이 외적에게 있으면 외적과 연계를 맺는 자까지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낱낱이 상고해 볼 때 어느 시대인들 이런 일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근년에 와서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요원한 것을 따르는 무리들이 우리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규례는 버리고 저들의 신기한 기술과 교묘한 재주만 좋아해서,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현란하게 해서 다른 나라의 민주와 공화의 제도를 채용하여 우리나라의 군주 전제법을 완전히 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끝내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의 변란도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군권(君權)과 민권(民權)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비록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군권과 민권의 실제를 은연중에 분리시켜서 두 갈래로 만들고 전자를 약화시키고 후자를 신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이 무리들은 권력이 백성들에게 있다고 여겨 백성들을 쫓아가기를 마치 옛날에 벼슬을 못하면 벼슬을 얻지 못해서 근심하고 벼슬을 얻은 뒤에는 벼슬을 잃을까봐 근심하는 자들이 외척에게 붙고 환관과 결탁하며 다른 나라와 내통하고 외적과 연계를 맺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백성이란 온 천하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한 군(郡)의 인구가 1만 명이라고 하면 뭇사람들이 이의 없이 모두 복종하는 사람 1, 2명을 뽑고 한 도(道)의 인구가 100만 명이라고 하면 뭇사람들이 따라 복종하는 사람 100명, 200명을 뽑아서 모두 서울에 모여 조정의 정사를 의논하게 한다면, 이는 또한 나무꾼에게 묻고 풍속을 담은 노래에서 채용하여 정치에 일조가 되게 하는 데에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른바 민회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임을 맡은 자들은 저잣거리 장사치의 자식들에 지나지 않는데, 더러는 외국의 종교에 젖고 더러는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자들로서 서로 모여 당(黨)을 결성한 것입니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말하기를, ‘백성은 수족(手足)이고, 백성은 자식이니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백성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손과 발에 종기가 생긴다 해도 터뜨려 짜내지 못하고, 자식이 마치 용과 뱀처럼 된다 해도 감히 몰아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더없이 간특한 자들이 많은 재물에 팔려 후한 잇속을 얻어먹게 되고 더러는 위엄에 겁을 먹고 더러는 은혜로 결탁되어서 서로들 모여들어 당이 결성됨으로써, 슬그머니 표창과 형벌의 권한이 그들의 손에 옮겨지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시원스레 잘 살피시어 한 세상의 이목을 새롭게 하여 온 천하로 하여금 폐하의 마음이 지극히 공정하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소서. 그리고 저들이 진달한 여섯 가지 조항은 현재의 폐단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모두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하나하나 속히 시행하도록 하소서. 이 밖에 안으로는 각부(各部)와 밖으로는 각도(各道)에 시행해야 할 일이 있거나 제거해야 할 폐단이 있으면 모두 거행하여 바로잡아 제거하도록 하소서.
관리들 가운데서 지위가 높고 성상과 가까이 있으면서 금령을 무릅쓰고 민회에 나가서 조정을 욕되게 한 자들과 민회 중에서 전혀 두려움을 모르고 백성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의혹을 품게 한 자들은 비록 일일이 김매듯이 다스려서 백성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만, 이름이 드러나고 그 사실이 탄로 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굴면서 세력을 믿고 임금을 위협한 자의 경우는 진실로 분수를 어기고 기율에 저촉되는 것인 만큼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다 경무청(警務廳)으로 하여금 체포하고 법부(法部)에서 처벌하여 해당 형률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나쁘지는 않다."
하였다.
12월 10일 양력
의관(議官) 이남규(李南珪)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백성들이 협회를 설립하고 사안을 거론하는 일은 애초에 벌써 세력을 믿고 임금을 강요하는 혐의가 있는 것인데, 관직에 있는 사람이 어찌 말할 기회가 없을까 근심이 되어 도리어 백성들에게 달라붙는 것입니까?
옛날에 벼슬하는 사람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전하였는데, 오늘날 벼슬하는 사람들은 장차 백성들의 힘을 끼고 임금에게 강요하자는 것입니까? 세상이 변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민회(民會)로 말하면 앞서 이미 7명의 신하를 쫓아냈으며 뒤에 또 5명의 신하를 쫓아냈습니다. 이 열두 신하들의 현우(賢愚)와 사정(邪正)에 대해서는 신이 아는 바 없지만, 그들의 다섯 통의 상소문에서 조목을 들어 아뢴 것에 대해 한번 논의해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이르기를, ‘민의(民議)가 들끓고 공론(公論)이 행해진다면, 규정 이외의 근신(近臣)이 나아갈 수 없을 것이고, 사인(私人)의 벼슬 청탁이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며, 공공연히 뇌물이 오갈 수 없을 것이고, 외국의 권력을 빙자하는 일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말은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관리들과 백성들은 한 패거리가 되었으며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조종하는 권한이 아래에 있고 위에 있지 않습니다. 저 무리들이 떠받드는 자를 대신의 반열에 둔다면 근신이 위에 나아가지 않고 반드시 아래와 통할 것이며, 사인(私人)들이 위에 청탁하지 않고 반드시 아래에 모여들 것입니다. 뇌물은 관청에 들어가지 않고 반드시 개인집으로 들어갈 것이며, 대외적인 권한이 나라에는 없고 반드시 강한 신하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몇 가지 문제는 모두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 신민(臣民)과 임금과의 관계는 그림자와 형체의 그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변고는 본래 용서할 수 없는 신민들의 죄입니다만, 폐하께서 천성적으로 지니시고 있는 도리에 있어서는 또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대저 직임을 맡기고서 성과를 이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본래 훌륭한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는 큰 권한입니다. 임금이 신하가 할 일을 해서 자질구레해지면 신하들은 해이해지고 일을 잘 하려고 하지 않으며 만사가 어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폐하께서는 매번 이에 대한 경계를 더러 소홀히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령(政令)의 조치와 시행에 있어서는 여론의 기대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민의가 들끓게 되는 것이며 조정의 신하들 또한 백성들의 의견이 그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어질고 착한 사람을 선발해서 직임을 맡기고 그 일에서 성과를 이룩할 것을 요구하되 빨리 성과를 거두도록 채근하지 말고 사소한 문제를 따지지 말며, 신기한 것을 좋아하지 말고 아첨하는 자들을 가까이하지 않음으로써 들떠 있는 풍속을 진정시키고 무너져가는 기강을 진작시키소서.
벼슬아치로서 법을 무릅쓰고 모임을 개최한 자와 백성들로서 무리를 지어 명을 거역한 자는 잡아다 징계하되, 죄가 큰 자는 죽이고 작은 자는 유배함으로써 조정의 체모를 엄숙히 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
또 들으니, 상민(商民)의 패거리들이 수천, 수백 명씩 무리를 이루고는 하는 행동이 매우 해괴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이상한 소문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신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마땅히 농상공부(農商工部)에 명하여 타일러서 물러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바른 논의가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알겠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10여 가지 조항을 갖추어 어람(御覽)하시도록 하니, 성명(聖明)께서는 헤아려 살피소서.
첫째, 경연(經筵)을 열어 성상의 학문을 도우소서. 신은 지난번 상소에서 이미 성상의 한 마음은 나라의 흥망성쇠의 근본이 되니 그것을 먼저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한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마음을 바로잡는 근본이 된다고 하여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강론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우원하다고 신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제왕들이 치세(治世)를 이룩할 수 있었던 요점을 찾는다면 아마 이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말은 모두 주자(朱子)의 행궁 주차(行宮奏箚) 속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만약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들어와 강론하며 자세히 아뢰도록 한다면 그 요령을 터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음식을 삼가 성상의 옥체를 보호하소서.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공자(公子)께서는 시장에서 사온 술과 말린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계강자(季康子)가 약을 드렸을 때에도 그 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감히 먹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대저 공자께서 어찌 시장 사람들의 음식은 사람에게 반드시 해롭고, 계강자가 주는 약은 반드시 몸에 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습니까? 그러나 공자께서 오히려 신중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먹고 살 걱정 때문에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경계를 잊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외국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비록 산해진미(山海珍味)라고 하더라도 늘 올리던 물건이 아닌 만큼 맛은 이미 온전하지 않으며 또한 생산지도 같지 않아 위가 손상을 받게 됩니다. 성인의 일로 본다면 이 어찌 한 젓가락이라도 댈 수 있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니라 근일에 김홍륙(金鴻陸)이 일으킨 변을 놓고 보더라도 저 도망가서 숨어있는 역적이 김홍륙 한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만의 하나 감히 역적의 마음을 품고서 잇따라 그 남은 음모를 행한다면 성상께서는 장차 어떻게 그것을 살피시겠습니까? 선왕(先王)들의 법을 보면 무릇 외부로부터 오는 음식물은 모두 임금에게 직접 올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부터 무릇 음식물과 다과 중 외국으로부터 온 것은 일체 폐하께 올리지 못하게 하여 성상의 옥체를 보호하게 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셋째, 사사로이 폐하를 만나는 자들을 물리치시어 궁궐 안의 출입에 대한 단속을 엄숙하게 하소서.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선왕의 제도에서는 비록 종척이나 가까운 신하라 하더라도 승정원(承政院)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가 뵐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들어가 뵐 경우에는 사관(史官)과 간관(諫官)이 따라 들어가 상하 간의 언행을 모두 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군신 간에는 일절 사사로운 말이 없었고 공적인 원칙이 작용하여 조정의 체모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사사로이 임금을 뵙는 사례가 점점 많아져서 사관이 따르지 않고 간관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청탁하는 것이 풍조가 되고 뇌물이 권력을 잡는 수단이 되었으며, 무당, 점쟁이, 지관(地官)의 무리들도 모두 들어와 입시한다는 말을 하고 둔전(屯田)과 우세(牛稅)를 감독하는 무리들까지도 모두 폐하의 조칙(詔勅)을 전합니다. 폐하의 위엄을 떨어뜨리고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심지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어도 대신이 모르며 의정부(議政府)에서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어찌 이웃 나라에 이런 소문이 들어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일체 들어와 성상을 뵙는 사람들은 반드시 승정원을 거쳐서 알리도록 하며, 사관과 간관들로 하여금 그 뒤를 따르게 하여 진달하는 것이 원칙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간관이 반드시 탄핵하여 물리치며, 조칙이 의리에 합당치 않을 경우에는 승정원에서 다시 반대 의견을 올리도록 하여 간사한 소인이나 무뢰배들이 잡다하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넷째, 인재를 가려서 등용하여 조정을 바로잡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임금이란 모두 치세(治世)를 좋아하고 난세(亂世)를 싫어하며 복리(福利)를 즐기고 화해(禍害)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쓰는 데서는 또한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며, 충직한 신하를 싫어하고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니, 이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군자는 단지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자신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경우가 많고, 소인은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단지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만 알기 때문에 임금의 뜻을 따르기에 힘씁니다. 명철한 임금은 언제나 살피고 판단해서 말이 거슬리면 그것이 도리에 맞는가를 반드시 따져 보며, 말이 순하면 그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가를 따져서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항상 잘 다스려졌습니다. 어리석은 임금은 이와는 반대였으니 나라는 늘 어지러움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 기미를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모든 신하들을 차례로 꼽아볼 때 숨김없이 바른 말을 하여 임금을 도에 맞도록 이끈 사람은 누구이고, 성상의 뜻에 영합하여 지시를 다르기만 한 사람은 누구이며,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여 무수히 갖다 바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신이 지금 군자는 누구이고 소인은 누구라고 감히 지적할 수는 없으나, 성상께서 또한 신의 말을 가지고 시험 삼아 가려보신다면 곧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대신 이하로 하여금 폐하의 잘못을 숨김없이 아뢰도록 하소서. 그리고 또한 충성스럽고 바르며 행실이 좋은 사람을 추천하도록 해서 진실로 나라를 돕고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모두 위에 보고하게 하소서. 또한 관찰사(觀察使)에게 신칙하여, 유생 중에서 재주와 덕, 학식이 있는 사람을 살펴서 추천하기를 마치 한(漢) 나라의 ‘효렴법(孝廉法)’과 같이 하도록 해서 등용함으로써 조정에는 바른 선비들이 많도록 하고 재야에는 버려진 인재가 없도록 한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다섯째, 백관(百官)을 감독하여 실질적인 일에 힘쓰도록 하소서.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관직을 위해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지 사람을 위해서 관직을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왕들께서는 관직을 정하고 직임을 나누어 여러 가지 일을 다스려 나갈 때 각각 그 재주의 능한 바를 보아서 임명하였고 그 재주가 능하지 못한 것을 억지로 맡기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관직을 오래도록 맡겨서 일을 잘못한 사람은 내쫓고 잘한 사람은 승진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 사람이 능한가 능하지 못한가는 살피지 않고 그 직임에 있은 지 오래되었는가 오래되지 않았는가는 묻지 않고서, 아침에 임명하였다가 저녁에는 교체하며 저 사람에게서 빼앗아 이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므로 관리로 있는 자들도 관직을 잠시 머무는 여관집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탁지부(度支部)의 관원으로 있으면서 전곡(錢穀)이 출납되는 수량을 전혀 모르며, 법관(法官)된 자는 법률 조항을 살피지 않고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면서 구차하게 녹봉만 축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사무에 대해 묻기라도 하면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고, 또다시 따지기라도 하면 ‘나는 곧 체차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체차되어 가는 사람도 이와 같고 부임하여 오는 사람 역시 이와 같으니, 아! 이렇게 해서야 과연 그 직무가 잘 수행되고 정사가 잘 다스려질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옛날에 3년마다 성적을 고과(考課)하던 법을 시행하여 능하고 능하지 못한가를 전최(殿最)하고, 오랫동안 직임을 맡겨 성과를 거두도록 책임지우소서. 만일 쓸데없는 관리가 녹(祿)을 낭비하면서 실제 일에 보탬을 주지 못하는 자와 편안히 놀면서 세월을 보내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내쫓음으로써 정사의 기강을 진작시킨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여섯째, 법률(法律)을 바로잡아 기강을 세우소서. 신이 삼가 생각건대, 나라에 형률이 있는 것은 교화를 돕고 백성들이 규정대로 행동하도록 하자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법이 너무 너그러우면 백성들은 우습게 여겨 거행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엄격하면 백성들은 원망하면서 손발을 놀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너그럽고 엄격하며 강하고 부드러운 중간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은혜와 위엄이 병행되어 백성들이 시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요즘의 신법(新法)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데 형벌을 적용하지 않고 경한 죄와 중한 죄를 똑같이 처벌하는 것은 난을 초래하는 지름길입니다.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은 갑신년(1884)에 도망간 역적들로서 다시 나라에 돌아왔건만 정형(正刑)에 처하지 못했으며, 김윤식(金允植)은 을미년(1895) 국모 시해 사건에 관계된 역적인데 3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찬배(竄配)의 형전을 시행하였습니다.
안경수(安駉壽)는 갑오년(1894)에 변란을 일으킨 우두머리이고 또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으려는 불측한 마음을 품었으니 이는 마땅히 대역(大逆)으로 논죄해야 하는데도 단지 난을 일으키려고 꾀하였다고만 하였습니다. 그나마 또한 도망쳐서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단지 그 패거리들만 잠깐 찬배하였으니 이것은 죄가 있는데도 형벌을 적용하지 않은 사례 중 큰 것입니다.
이유인(李裕寅)은 폐하의 조칙을 위조하였고 역적인 김홍륙은 폐하의 옥체를 해치려고 꾀한 만큼, 그 죄의 경중이 현격하게 다릅니다. 그런데 똑같은 형률을 적용하여 교수형에 처하기로 하였다가, 끝내 이유인은 사형에서 감면하고 역적인 김홍륙에게는 형률을 적용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는 죄의 경중에 따라 형률을 잘못 시행한 사례 중 큰 것입니다.
대개 형벌의 경중은 그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논할 뿐이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 의하여 형벌이 높아지고 낮아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黥), 의(劓), 비(剕), 궁(宮)은 죽이지 않는 형벌로서 경중이 있으며, 사사(賜死), 교수(絞首), 효수(梟首), 요참(腰斬), 거열(車裂), 노륙(孥戮)은 죽이는 형벌로서 역시 경중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형률은 그렇지 아니하여, 죄가 큰가 작은가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일체 다 교수형에 처하여 더 가감이 없으며, 도(盜), 음(淫), 살인(殺人), 모반(謀叛), 시역(弑逆)을 뒤섞어서 동일한 죄안으로 처리하고 더는 차등이 없습니다. 어찌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일반 백성들이 서로 죽인 것과 같이 보는 것을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죄인의 처자를 죽이지 않는 것은 진실로 문왕(文王)의 선정(善政)이지만, 역시 극악무도한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너의 처자까지 죽이겠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 새 도읍에 후손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모조리 죽여 없애서 남은 후손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역적 김홍륙을 의율(擬律)할 때에 듣자니, 두세 명의 신료들이 상소를 올려 형(刑)을 가하자고 청한 것은 바로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의 대소를 적용하자고 하는 논의에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민당(民黨)’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하니, 신은 실로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며, 간사하고 충성스럽지 못한 무리들이 연이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며, 또한 어떻게 천만 가지로 각이한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율문(律文)을 거듭 밝히고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워 무릇 악역(惡逆)과 대고(大故)에 관계되는 사람들은 모두 옛 법대로 처리하여, 참수(斬首)해야 할 자는 참수하고 노륙(孥戮)해야 할 자는 노륙함으로써 기강을 한결같이 하고 미련한 자들을 격려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일곱째, ‘민당’을 혁파하여 변란의 발판을 막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비방하는 것을 써놓는 나무와 진언(進言)할 때 치는 북이 있었으며,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유생들이 대궐문에 엎드리고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시위(示威)의 표시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으니,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가 있고 절제가 있어서, 차라리 정사에 대해 비방은 할지언정 대신을 협박해서 내쫓는 일은 없었으며, 차라리 소장을 올려 호소는 했을지언정 임금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 이른바 ‘민당’이라는 것은 시정(市井)의 무식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구차하게 패거리를 규합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분을 빌려서 대신(大臣)들을 멋대로 명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지적하여 탓하며 나라의 정승을 능욕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저들끼리 결탁하여 고함을 지르며 위엄을 보이고 생색을 내는 것이 굉장하여 그 기세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아! 이로부터 정사에 관한 권한과 권세가 모두 백성들에게 옮겨가 앞으로 조정에서는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일도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가의(賈誼)가 말한 바, ‘발이 도리어 위에 있고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비슷합니다. 이와 같은데도 금지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어찌 법과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외국에는 이른바 자유 의원(自由議員)과 민권(民權)을 주장하는 당(黨)이 있고, 심지어는 직접 선거하는 민주(民主)의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이 무리들이 이미 대신을 협박해서 쫓아낸 것이 여러 번 되는 만큼, 비록 여기서 한층 더한 일인들 또한 무엇이 두려워서 못하겠습니까? 설령 이 무리들이 진심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도리를 놓고 생각해볼 때, 그런 징조를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성상께서 분발하시고 큰 결단을 내리시어 모두 제거하신다고 하니, 진실로 더할 나위 없는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잘 처리하지 못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허물을 자신에게서 찾고 지극한 정성과 측은한 마음으로 충분히 생각을 고칠 뜻을 보이시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사랑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 간에 신임하며 임금을 공경하고 윗사람을 친근하게 대하는 도리로써 깨우쳐 그들을 감복시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더욱 심한 자 몇 사람을 다스리고 나머지는 법사(法司)로 하여금 해산시켜 보내도록 하며, 서둘러 정사와 형벌을 밝히고 교화를 힘껏 시행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이 과연 우리를 속이지 않고 진실한 마음과 실질적인 정사로 시종여일하는구나.’라고 분명히 알게 한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안정되지 않을까 근심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함께 불복하는 마음을 품고서 도리어 윗사람을 원망하는 뜻을 쌓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그들을 꺾자고 한다면 화(禍)의 기미를 촉발하게 되고 내버려둔 채 따지지 않고자 한다면 교만이 자라날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백성은 물과 같고 임금은 배와 같으니,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으며, 또한 배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매우 절절하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이것을 보고서 속히 도모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여덟째, 기복(起復)을 금지하여 풍속을 바로잡으소서. 신은 생각건대, 주(周) 나라 시(詩)에 이르기를,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그 은혜를 갚고자 하나 드넓은 하늘처럼 끝이 없어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자식의 삶은 부모의 막대한 은혜를 받았기에 비록 살아계실 때 날마다 세 가지 고기반찬으로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 종신토록 상복을 입는다 해도 오히려 그 은혜의 만 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선왕의 제도에서 거상 기간을 3년으로 정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상복을 벗도록 한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대체로 슬퍼하는 마음은 한량이 없지만 기한을 정하여 절제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고 선왕들이 제정한 법은 감히 그 한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효자들의 애통한 심정은 끝이 없으며 비록 많은 녹봉을 받는 경상(卿相)들도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지 구차하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자는 것은 아닙니다.
신은 들으니, 요즘 관청에서 이른바 복기(復期)라는 것이 있어서 부모의 상사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상복을 벗어버리고 버젓이 벼슬에 나오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고 합니다. 인심이 잘못에 빠지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나라에 큰 일이 있어서 부득이 기복하더라도 군자는 오히려 그르다고 여기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무리들도 부모의 사랑을 받기는 받았습니까?
옛날에는 거상(居喪) 중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진실로 풍속에 손상을 준다고 하여 나라의 먼 끝 변방으로 내쫓아서 중국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청하였는데, 만일 애초에 거상하지 않은 사람을 본다면 다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 이렇게 사학(邪學)이 충만한 때를 당해서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떳떳한 윤리를 두터이 하고 예의를 밝혀서 백성들을 이끌더라도 오히려 교화를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인륜을 무시하고 오상(五常)을 해치는 법을 만들어 오랑캐와 금수의 지경에 스스로 달려 나가는 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무릇 중앙과 지방의 관리로서 기복하여 벼슬에 나오는 자들은 모두 내쫓고 복기의 규례를 영원히 혁파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아홉째, 쓸데없는 낭비를 절약함으로써 국가의 재용을 넉넉하게 하소서. 신은 생각건대, 국가에 있어서 재용은 사람에게 혈기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혈기가 다 마르면 사람이 죽고 재용이 떨어지면 나라가 피폐해지는 것은 불변의 이치입니다.
우리나라의 재정은 오직 부세(賦稅)뿐인데, 부세는 모두 농민들에게서 나옵니다. 대저 농민들은 일년 내내 부지런히 일하지만 두서너 식구의 일년 분 식량도 대줄 수가 없는데 그나마 그 절반을 팔아서 부세로 바칩니다. 진실로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비록 한 알의 낟알과 한 푼의 돈이라도 어찌 절약하지 않고 남용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요즘 탁지부(度支部)에 쌓아놓은 것이 늘 부족하여 심지어는 외국에서 차관(借款)까지 한다고 합니다. 대저 올해에 부족해서 차관을 도입하면 내년에 또다시 부족해서 차관을 도입하게 되어, 차관을 미처 갚기도 전에 나라의 재용은 오히려 쪼들려서 마침내는 땅을 떼어주게 될 것이고, 땅을 떼어주고도 부족하면 또 다시 나라를 통째로 줄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급하지 않은 공사는 중지하고, 공로가 없는 상(賞)은 주지 말며, 사치한 마음을 제거하고, 기호품을 끊으며, 경상 지출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들여가지 말게 하며, 나라의 창고를 개인의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열째, 군법(軍法)을 바로 세워 군사와 관련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소서.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나라에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우리나라에는 군사가 없으며, 군사는 장차 쓰려고 해서인데 우리나라 군사는 쓸모가 없습니다.
대개 군사들은 병영(兵營)에서는 장수를 위해서 죽고 싸움터에 나가서는 적들과 싸우다 죽는 것이 그들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군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친위대(親衛隊), 시위대(侍衛隊)라는 명칭을 달았으며 임금으로부터 세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원수(都元帥), 원수(元帥)라는 칭호가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군사들은 모두 거만해져서 자기의 장수를 보며 말하기를, ‘저 역시 대장이 아니다.’라고 하고, 죄가 있어서 태형(笞刑)을 치면 반드시 말하기를 ‘나의 몸에는 ‘친(親)’자와 ‘시(侍)’자가 있는데 어째서 감히 나에게 태형을 치는가?’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자들이 장수에게 목숨을 맡기겠습니까? 장수에게 목숨을 맡기려고 하지 않는 자가 적들과 싸우다 죽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상과 벌을 명백히 하고 은혜와 위엄을 병행해서, 팔이 손가락을 부리듯 하고 입이 혀를 놀리는 것과 같이 해야만 비로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옛날의 5영(營)과 절도사(節度使)를 두던 제도를 회복하고 친위대와 시위대, 원수의 명칭을 없애어 장수들로 하여금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하고, 그들에게 생살(生殺)의 권한을 부여하며 무예를 가르치고 충성과 의리를 권장하여 위급할 때 쓰도록 한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열한째, 원수와 역적을 토죄하여 대의(大義)를 밝히소서. 신은 가만히 생각건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는 만세의 신하들과 자식들이 꼭 갚아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법에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장사 지냈다고 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원수를 갚는 대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장사를 지내는 상례(常禮)를 가볍게 여겨 만세의 신하와 자식들에게 이러한 특별한 변고를 만나면 반드시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한 후에야 그 임금과 부모를 장사 지낸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을 지극히 후하게 하더라도 실은 시체를 구덩이에 내버려 여우와 승냥이가 파먹게 하고 파리와 구더기가 그것을 빨아 먹도록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 신은 일찍이 이것을 읽으면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신하들의 죄는 너무나 커서 천지에 용납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을미년(1895) 8월의 변고는 그 원통함이 어떠했고 또한 뼈에 사무친 깊은 원수가 어떠했습니까? 그러나 3년이 되도록 원수를 갚기 위해 하나의 계책을 실시하고 하나의 조치를 취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부자간의 윤리와 군신간의 의리가 이로부터 영원히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어 사람은 짐승과 다름없게 되었고 살아 있는 것이 빨리 죽는 것만 못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평범한 사람인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되면 그 자식들은 모두 그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 500년간의 선왕의 종부(宗婦)이시고 삼천리강토 백성들의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이런 망극한 변고를 당하였는데도, 평범한 사람들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과 같이 하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현재 사형을 당한 자는 겨우 김홍집(金弘集)과 정병하(鄭秉夏) 두 역적뿐인데 아직도 소급하여 그 죄를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우범선(禹範善)의 무리들은 비록 도망쳐서 잡지는 못하였지만 오히려 그 부형과 처자가 있는데, 이에 한결같이 역적들의 가족을 연좌시키지 않는 법을 준수하여 곡진히 보호하고 보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김윤식(金允植)은 역적의 우두머리인데도 능지처참(凌遲處斬)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슬픈 생각을 거두지 못하여 상식(上食)하는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마 그만두지 못하고, 능의 의장도 옛날에 비해 더욱 성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끝없이 극악한 원수에 대해서는 이미 털끝만치도 복수를 하지 못하였으니, 주자의 말에 입각해 볼 때 이 허례허식(虛禮虛飾)은 이웃 나라의 웃음을 자아낼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한 하늘에 계신 왕후의 혼령도 필시 이런 허례를 가지고는 그 원한의 마음을 조금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찌 한 가지 정사라도 부지런히 하고 한 가지 은혜라도 베풀어서 백성들과 함께 마음을 가다듬고, 차라리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원수를 갚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으며 차라리 자신이 망하는 한이 있어도 원수를 갚지 못하면 살지 않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나라의 큰 원수를 잊어버리고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정사가 안 되고 백성들이 흩어져도 구원할 줄을 모르며, 외부의 우환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내란도 날로 심해 가건만 태연이 일이 없는 듯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신은 차라리 죽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고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은 또 할 말이 있습니다. 을미년(1895)에 동쪽과 남쪽에서 일어난 백성들로 조직된 군사를 당시 비도(匪徒)라고 말하였습니다. 삼가 《춘추》의 의리를 생각건대, 난신적자는 누구나 토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 책의(翟義)가 왕망(王莽)을 죽이고 관동에서 동탁(蕫卓)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강목(綱目)》에는 모두 대서특필하여 알렸는데 이 뜻을 헤아려 추구한 것입니다.
나라에 난신적자가 있는데도 대군(大君)이 죽이지 못하고 관찰사(觀察使)가 죽이지 못할 경우에는 벼슬이 없는 미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한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역적이 조정을 세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어 성상의 옥체 또한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니 더구나 무슨 겨를에 복수하는 거사를 벌이겠으며, 관찰사는 모두 역적의 앞잡이가 되어 물건을 바치기에 여념이 없는데 하물며 기꺼이 복수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행히 하늘의 이치와 백성들의 양심이 전부 땅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아서 동쪽과 남쪽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한두 명의 관리들이 그 사이에서 일어나 성상의 권위가 다시 빛나도록 하였고 후세 사람들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리를 알도록 하였습니다.
아! 천지가 어둡고 막힌 이때 만약 이들의 호령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천하에 대고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미천한 무리들의 침략을 보고서 마침내 비도라고 하면서 전혀 분별하지 않으니, 이것을 통해서 또다시 사람들의 마음이 심하게 거칠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성상께서 근심스러이 홀로 생각하시고 이미 외국에 가 있는 신하들을 도로 불러들이셨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차례로 용서해주셨으니 이것은 진실로 뛰어난 덕입니다. 그러나 이미 불러다놓고는 그 말을 채용하지 않으시고 이리저리 유리 방황하도록 내버려 둔 채 돌보지 않으시니, 이는 덕을 끝까지 베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사망한 여러 사람들은 비록 초야의 미천한 선비들이지만 역시 모두 의롭고 장렬하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이니, 조정에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배양하는 방도로 볼 때에 역시 표창하고 구휼(救恤)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충성과 의리를 격려하는 것은 후일에 원수를 갚는 기초가 될 것이니, 오직 밝으신 성상께서 재결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열두째,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구분을 하여 큰 한계를 세우소서. 아! 명(明) 나라가 멸망하고부터 만주 사람들이 중국을 더럽힌 지 오늘까지 이미 200여 년이 되었으니, 천하에 비색한 운수가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만은 유독 중국의 옛 법을 보존하여 박괘(剝卦)의 상구 효(上九爻)에서의 큰 과일의 형상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외국 사람들이 기회를 틈타 괴이한 짓을 하면서 온 천하를 동등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일을 주관한 신하들은 깊은 식견과 원대한 생각이 없어서 이미 문호를 개방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또한 조약을 분명히 결정하지도 않아 저들로 하여금 종교를 넓히고 학문을 전달하는 계책을 제멋대로 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변란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왕후를 죽이고 머리를 깎는 극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을미년(1895) 12월 28일 조칙에서 애통한 마음을 보이시고 다시 머리를 기르도록 하셨으며, 의복에 있어서도 편의대로 하라고 명하셨으며, 그 후에는 또다시 머리를 깎는 일과 관련하여 내린 위조된 조칙을 도로 거두어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군인들과 학도들은 종전대로 머리를 깎았으니, 이것은 누가 시킨 것입니까? 소매가 넓은 옷은 영원히 폐지하였으니 이것은 또 누가 금지하도록 하였습니까? 온 나라의 신하들은 폐하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는데, 저 군인들과 학도들만이 유독 한 임금의 신하가 아니란 말입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조령을 널리 선포하시어 무릇 군인과 학도들 중에서 머리를 깎은 자는 모두 망건을 쓰도록 하고, 또한 소매가 넓은 옷을 입도록 하는 명령을 거듭 내리심으로써 땅바닥에 떨어진 제도를 부지시키소서.
신이 출처(出處)의 도리와 거취(去就)의 마땅함을 깊이 헤아려 보았으나 벼슬에 나아갈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다행히 현직을 체차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편안히 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논의한 내용은 진실로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짐이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는 바이다. 시행할 방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품 이복헌(李復憲)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예로부터 나라에 화를 끼친 간악하고 흉악한 자치고 애당초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은 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임금 주변의 흉악한 무리를 말끔히 없앤다는 핑계를 대거나 백성들의 폐단을 제거한다고 빙자하기도 하면서 패거리들을 날로 번성하게 하고 임금의 형세는 날로 고립되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하루사이에 나라의 권세를 썩은 나무를 꺾는 것보다 쉽게 가로채어 제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데 누구도 감히 시비하지 못했으니, 전날의 독립협회(獨立協會)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들은 충성과 애국이라는 두 마디 말에 목적을 걸어두고 있으며 논하는 내용도 전혀 채용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속내와 말이 달라 나라에 화를 끼치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적신(賊臣) 안경수(安駉壽)와 서재필(徐載弼)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도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저 두 흉적과 한 패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이야기를 해서 그간의 죄상을 밝히고자 하니, 폐하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삼가 생각건대, 이 무리들은 패거리를 결성하여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며 거리낌이 없었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을 능사로 삼고 감히 해서는 안 될 짓을 하여 온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첫 번째 부도(不道)한 죄입니다.
지난번에 안경수가 흉역을 저질러 화란의 기틀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도 그들은 애초에 흉적을 토죄하는 문제를 진달하여 청하지 않은 채 도리어 청년 애국회(靑年愛國會)의 통문에 기탁하여 장황하게 날조하기를 마치 함양(咸陽)의 아이들이 수의요(繡衣謠)를 부른 것처럼 하여 여러 사람들의 이목을 선동하고 현혹시켰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두 번째 부도한 죄입니다.
게다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불경스러운 자를 보면 마치 새매가 참새를 쫓듯이 그를 처벌하는 것은 윤리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그렇지 않아, 말이 혹 안경수와 서재필에게 미치게 되면 반드시 아무개씨라고 부르며 예로써 존대하였으니, 서로 마음이 통하였다는 것을 바로 이것으로 증명할 수 있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세 번째 부도한 죄입니다.
네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그 패거리들이 지존을 핍박하는 말을 하여도 방관하며 못들은 체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네 번째 부도한 죄입니다.
지난번에 저들이 대궐문을 떠나지 않고 상소를 올렸을 때 성상께서는 동궁의 몸이 편치 않은 것을 매우 염려하여 여러 번 간절하게 신칙하여 우선 물러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더욱더 제멋대로 고함을 치고 밤낮으로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면서 임금의 근심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다섯 번째 부도한 죄입니다.
대소 신료들을 출척(黜陟)하는 것은 으레 조정의 명령이 있어야 하며 누구나 참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권세를 부려서 순종하면 아무 일도 없지만 거슬리면 곧바로 소란을 일으켜 제 마음대로 대신을 잡아들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축출하고 있습니다. 그 계책은 옛 신하들을 제거하고 저들이 좋아하는 자를 등용하려는 데에 있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여섯 번째 부도한 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확고한 결단을 내리시어 여론을 따르소서. 이른바 만민공동회를 맨 먼저 발기한 사람들과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이에 아부하면서 맞장구를 친 사람들은 일체 법사(法司)에 속히 회부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조율(照律)하여 감단(勘斷)함으로써 간흉의 싹을 근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너무 장황하다."
하였다.
전 부호군(前副護軍) 오계수(吳桂秀)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할 때에 명확한 결단을 내려 권신(權臣)을 내쫓고 중신(重臣)을 임명한다면 관직은 바로잡히고 조정의 위신은 높아질 것이며, 폐단을 바로잡고 고질적인 병폐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은혜를 베풀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단하여 사치를 금지하고 금광을 봉쇄한다면 비축은 넉넉해지고 나라의 근본은 견고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어질고 의로운 정사의 결과이며 절검을 행한 효과입니다. 대체로 이와 같이 한다면 요(堯) 순(舜)의 명철함에도 미칠 수 있으며 삼왕(三王)의 공적도 쉽게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였다.
12월 11일 양력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권재형(權在衡)을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에, 종1품 박정양(朴定陽)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에게 호위대 총관(扈衛隊總管)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민영환(閔泳煥)이 아뢰기를,
"조칙(詔勅)이 내렸는데도 백성들이 모이는 것을 제대로 금칙(禁飭)하지 못했고 명령이 거듭 내려진 뒤에도 조사해야 할 죄인들을 서둘러 염탐하여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니, 직무로 헤아려 볼 때 너무나 허술하게 하였습니다. 경무사(警務使) 이근호(李根澔)에 대해서 우선 7일간 감봉(減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유학(幼學) 이문화(李文和)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간특한 말과 난폭한 행동이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아 신하로서 차마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수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경현수(慶賢秀), 김석제(金奭濟) 등이 연달아 상소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매우 간절하고 격하여 세도(世道)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는데, 얼마 있다가 도약소(都約所)를 혁파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물러나 침묵을 지키면서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용서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독립협회는 무리를 모아 집단을 결성하여 명성과 위세를 크게 떨치고 있습니다.
대체로 임금의 더없이 중요한 상벌(賞罰)의 권한은 신민(臣民)들이 털끝만큼도 침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들은 구미(歐美)의 공화(共和) 정치를 우리의 전제(專制) 정치의 옛 법에 옮기려고 하며, 대신을 제멋대로 쫓아내는 것을 식은 죽 먹기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입니다.
저잣거리의 가게들을 철폐하고 임금을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임금을 협박한 것입니다. 임금을 협박하는 것은 윗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회장(會長) 윤치호(尹致昊) 등이 의정부(議政府)를 날카롭게 규탄하여 황상께 저촉되는 짓을 하였고, 6개 조항을 약정하고는 억지로 서명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남녀의 구별을 두는 것은 중요한 예(禮)인데 늙은이와 젊은이, 부녀자들이 모임에 한데 뒤섞여 국정(國政)을 논의하는 데 참여하여 윤상(倫常)을 멸절시키고 사람의 도리를 짐승과 같이 하였으니, 이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무릇 이 네 가지 죄는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으며 국법으로도 반드시 죽여야 하는 바입니다. 지난날 집회에 나가 서명한 신하들과 오늘날 법부의 장관 및 경과 사대부로서 협회에 들어간 자들에게 모두 유배의 형전을 시행하여 징계하는 뜻을 보이소서. 그리고 네 가지 죄를 함께 범한 17명에 대해서는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분하여 유배의 형률을 속히 시행하소서.
흉역의 우두머리 윤치호에 대해서는 독촉해서 잡아다가 효수(梟首)함으로써 만백성들을 깨우칠 것이며 선왕(先王)의 아름다운 법을 회복하여 예의를 밝히소서.
교육에 관한 제도를 수립하여 인심을 바로잡고, 토목 공사를 그만두어 나라의 재용을 비축하며, 벼슬을 파는 길을 막아 정치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외국으로 달아난 흉적과 국내로 도망친 흉적들을 잡아들여 원수를 갚고, 민생을 풍족하게 할 방도를 강구하여 백성들의 생산이 이루어지게 하며, 석탄(石炭)과 금(金), 철도(鐵道)에 관한 조약을 개정하여 외국인들이 엿보고 탐내는 것을 막고, 위험이 닥쳐오기 전에 각별히 대비하여 이웃 나라와의 불화를 막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이단(異端)을 공격하는 태도에 거의 가깝지 않은가?"
하였다.
유학(幼學) 김용철(金鎔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천지가 화합한 뒤에 만물이 생겨나며 부부가 화합한 뒤에 집안의 법도가 융성하게 일어나는 법입니다. 아! 삼천 리 우리 황국(皇國)에 수많은 신민(臣民)들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없으니, 만물이 어떻게 생겨나며 집안의 법도가 어떻게 융성하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형세는 안팎의 다스림이 모두 갖추어진 뒤에야 더욱 나랏일을 도울 수 있을 터인데, 황후의 자리가 빈 지 오래되어 인자한 사랑이 두루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간택하여 예식을 갖추어 맞이하여 황후의 자리를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삼강(三綱)을 바로잡고 오륜(五倫)을 밝히는 방도로 문묘(文廟)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제사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를 다시 복구하여 성인을 존대하고 인륜을 밝힐 방도를 더욱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 역시 임금을 정당한 길로 인도하는 것인가?"
하였다.
12월 12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서 〖신주(神主)를〗 환안(還安)한 후 전작례(奠酌禮)를 거행하였다.
경효전(景孝殿)의 신탑(神榻)을 개수하고 전폐(殿陛)를 수리할 때의 감동 당상(監董堂上) 이하, 경효전의 위패를 이안(移安)하고 환안(還安)할 때의 비서원 경(祕書院卿) 이하, 경효전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 및 작헌례(酌獻禮)를 섭행할 때의 헌관(獻官) 이하에게 모두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대축(大祝) 심후택(沈厚澤), 영선사장(營繕司長) 박용대(朴容大), 별감동(別監董) 검사과장(檢査課長) 오현기(吳顯耆), 궁내부 참서관(宮內府參書官) 신태무(申泰茂), 부위(副尉) 김중규(金重圭), 내부 기사(內部技師) 심의석(沈宜碩), 6품 김재순(金在珣)·정영두(鄭永斗)·윤우선(尹寓善),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피상범(皮相範)·박희진(朴熙鎭), 6품 윤규섭(尹奎燮)·안준옥(安駿玉), 정3품 민영선(閔泳璇), 국장(局長) 정준시(鄭駿時), 6품 정인한(鄭寅漢), 4품 이병응(李秉膺), 6품 윤필(尹泌)·홍정섭(洪正燮)·홍세영(洪世泳), 5품 송태현(宋泰鉉)·조정윤(趙鼎允), 6품 신정식(申廷植), 정위(正尉) 박제칠(朴齊七), 참령(參領) 한진창(韓鎭昌), 기사(技師) 윤방현(尹邦鉉), 향관(餉官) 백남신(白南信), 6품 서상집(徐相潗), 군수(郡守) 홍필주(洪弼周), 6품 장화식(張華植), 법부 참서관 권재운(權在運), 군수 이윤재(李允在)·민술호(閔述鎬)·김영준(金永準)·이희하(李熙夏)·김성규(金星圭), 검사(檢事) 김정목(金正穆), 학부 참서관(學部參書官) 홍우관(洪禹觀), 4품 민치순(閔致純), 6품 조예석(趙禮錫), 참령(參領) 신태휴(申泰休)·백성기(白性基), 교섭국장(交涉局長) 이응익(李應翼), 정위(正尉) 유진형(兪鎭瀅)·민홍식(閔弘植), 경무사(警務使) 이근호(李根澔)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민병석(閔丙奭)을 부장(副將)에 임용하고, 군부 대신(軍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비서원 승(祕書院丞) 심상황(沈相璜)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13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지내고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학교 교원(敎員) 최종록(崔鍾盝)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폐하는 중흥의 운수에 응하여 지존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추숭(追崇)하는 예식을 속히 거행하시어 태조(太祖)와 열성조(列聖朝)의 휘호(徽號)를 높이 받들도록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큰 예식을 거행한다면 정리(情理)로 보나 예의(禮儀)로 보나 합당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3주기도 이미 지나갔는데, 경효전(景孝殿)의 조상식(朝上食)과 석상식(夕上食)을 지금도 받들어 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동궁 전하의 애통하고도 절박한 심정으로 차마 갑자기 그만두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들이 제정한 예법은 감히 넘을 수 없는 만큼 억제해야 하니, 지금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은 어진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부류를 따지지 않았으니, 진실로 재능과 덕망의 유무만 따지고 그 문벌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부당하게 여겼습니다. 어진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고 유능한 사람이 직임에 포진해 있다면 나라가 어찌 부강해지지 않겠습니까? 문벌에 구애하지 말고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방도와 형벌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 반드시 나라 사람들의 가부를 살펴보아야 하니, 그런 뒤에 시행한다면 좋아하는 바도 같고 논하는 바도 공정할 것이니, 이 또한 시의에 맞게 조처하는 데 일조하게 될 것입니다.
지방 군수는 한결같이 장정(章程)에 의거하여, 각부의 판임관(判任官)으로서 36개월간 계속 근무한 사람에 한하여 결원이 생기는 대로 충원한다면, 장정에 익숙하고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쓸데없이 번잡하게 될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한 먼 지방의 기이하고 교묘한 물건을 가져오지 말 것과 궁궐을 엄숙하고 깨끗이 하는 등의 일을 말미에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말한 내용이 받아들일 만한 점이 없지는 않다."
하였다.
전 사과(前司果) 김석제(金奭濟)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통탄스럽습니다. 이른바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사람들도 폐하의 신하이며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협회 회장 윤치호(尹致昊)가 상소를 올려 진달할 때에 수천, 수백 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거리를 메우듯이 대오를 지어 다니면서 거리낌 없이 날뛰었으며, 국도(國都)의 시장을 제 마음대로 철폐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궐을 지척에 두고 떠들어대며 대내(大內)를 뒤흔들어 태자의 병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이는 임금을 공경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임금을 위협하는 것으로, 신은 이 점이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일곱 명의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체차된 뒤에도 버젓이 의정부(議政府)에 투서를 하였는데, 거기에는 중추원(中樞院)의 벼슬을 절반으로 나누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무리를 이끌고 소리를 질러대며 임금을 협박하는 것을 벼슬에 나아가는 지름길로 여기고 있으니, 그 행동을 돌아볼 때 비루하여 꾸짖을 나위도 없습니다. 관리를 임용하는 일로 말하면, 이는 황상(皇上)에게 출척(黜陟)의 권한이 있는 것이지 백성들이 위협하고 제어하여 억지로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임금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백성들로 무리를 조직하고 벼슬을 억지로 차지하려고 도모하니, 앞으로 점점 만연하여 막아내지 못할 근심이 있게 될 것이므로, 신은 이 점이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지난날 의정부의 신하들로 말하면, 그들이 반드시 모든 일을 다 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신이란 의정부의 중임을 맡고 있으며 폐하께서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처음에는 비방을 하다가 나중에는 협박하여 쫓아냈으니, 일곱 명의 신하들이 체차된 것은 바로 그들의 악을 조장시킨 것이고 욕심을 채워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그들의 뜻에 맞지 않을 경우 하루에 열 번을 체차시키는 것도 필시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엔 폐하께서 고립될 것입니다. 그런 뒤에 그들은 의관(議官)의 자리를 억지로 차지하려던 그 버릇으로 다시 대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것이니, 대신의 자리를 차지한 다음에는 또 어떤 자리를 억지로 차지하려 할지 신들은 알 수 없습니다. 신은 이 점이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독립협회를 윤허한다는 명령을 속히 거두시고 회장 윤치호에게 찬배(竄配)의 형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이치에 맞는 듯하니 조처하는 데 반드시 방도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14일 양력
군부 대신 임시서리(軍部大臣臨時署理) 민병석(閔丙奭)이 아뢰기를,
"삼가 조칙(詔勅)을 받들고 본부(本府)에서는 유배 보낼 죄인들에 대해 즉시 감등(減等)을 해야 합니다만, 어떤 범죄 이하를 감등해야 할지 본 부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삼가 성상의 처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육범(六犯) 속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더라도 본래의 죄상으로 보아 불쌍히 여겨 용서해줄 만한 것은 각각 1등씩 죄를 감해 주라."
하였다.
12월 15일 양력
일본 전권공사(日本全權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를 접견하였다. 국서를 봉정하였기 때문이다.
종2품 윤치호(尹致昊)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비서원 승(祕書院丞) 김영준(金永準)을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고영근(高永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전후하여 상소를 올린 것이 대체로 십수 차례 되는데 연이어 너그러운 비답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칙유를 받은 것이 수천 마디의 많은 양에 이릅니다. 생각건대 우리 대성인께서 간하는 말을 흐르는 물과도 같이 거침없이 따르는 덕은 옛날의 훌륭한 임금과 명철한 왕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형세가 점점 더 위급해지고 백성들이 점점 더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 등의 성의가 천박하여 성상께 도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폐하가 신 등의 말을 결국 문구(文具)로 간주해서 그런 것입니까? 신 등은 한 번 비답을 받을 때마다 모두들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제부터 펴질 것이며 백성들의 생업이 이제부터 안착될 것이라고 하면서 밤낮으로 우러러 기대하였으나 아직 실시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시 일전에 번거롭게 구는 일이라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연명으로 된 상소를 올려 삼가 폐하의 비답을 받아 읽게 되었는데, 이르기를 ‘바야흐로 의정부(議政府)에서 실시하고 있다.’고 하였기에, 신 등은 거기에서 확실히 금일 아니면 명일에는 실시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라의 형편과 백성들의 근심은 아침저녁으로 급하여 결코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가 꺼리는 것이 있어서 실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구애되는 것이 없으면서 진실로 실시하려고 한다면 탁지부(度支部), 군부(軍部), 학부(學部)의 세 개 부(部)에 적임자를 얻어서 임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재정이 늘 풍족하고 군사들이 잘 단련되며 교육에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아! 저 민영기(閔泳綺), 심상훈(沈相薰), 김명규(金明圭) 세 신하는 폐하의 총명을 가리고 백성들에게 해독을 퍼뜨려서 여러 사람의 의논이 승복하지 않고 규탄하였으며 폐하가 환히 살피고 쫓아버렸는데 어찌 다시 이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들은 영원히 깨끗한 조정의 반열에 나란히 세울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결단성 있게 단안을 내려 빨리 이 무리들을 쫓아버리고 다시 슬기 있고 착한 사람을 선발하여야 모든 정령이 비로소 실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5흉(凶)들이 지은 죄는 일찍이 재판하여 법조문대로 처결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2흉(凶)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을 편파적으로 입어 앞질러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것 역시 신 등이 의심스럽게 여기는 것인데 더구나 3흉(凶)들을 아직도 징계하여 처결하지 않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법을 맡은 관청을 엄격히 신칙하여 기한을 명확히 정하고 잡아다가 재판에 넘김으로써 나라의 법을 밝히소서.
보부상(褓負商)의 폐단에 대해서는 신 등이 이미 전에 올린 글에서 상세히 진달한 바 있습니다만, 아직도 이들은 뭉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민간에서는 이들 때문에 소란이 나고 도로는 이로 말미암아 막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뿌리를 뽑아버리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앞으로 그것이 점점 늘어나고 퍼지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당해 관청의 신하에게 명하여 엄격히 단속하여 나쁜 버릇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신 등은 모두 폐하의 백성으로서 오직 한마음으로 정사를 새롭게 해나가는 이 때에 좋은 법과 아름다운 규례가 실시되도록 하여 독립의 기초가 날로 확고해지고 문명한 정치가 날로 발전해나가도록 하려는 것이 지극한 소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세세히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비답을 내렸는데도 이와 같이 시끄럽게 구는가? 사체(事體)를 헤아려 볼 때 매우 무엄하다.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하였다.
12월 16일 양력
군부 대신(軍部大臣) 심상훈(沈相薰),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윤용구(尹用求)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特進官) 박정양(朴定陽), 법부 협판(法部協辦) 윤웅렬(尹雄烈)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부장(副將) 민병석(閔丙奭)을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윤용식(尹容植)을 궁내부 특진관에, 특진관 김석근(金晳根)을 경효전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17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서상조(徐相祖)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1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호위대(扈衛隊)의 편제(編制)와 경비는 군부(軍部) 각대(各隊)의 규례대로 하며 일체 조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조병식(趙秉式)과 민종묵(閔種默)을 유배하라는 명을 내린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아직도 잡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매우 놀랍다. 법부(法部)로 하여금 경무청(警務廳)에 엄히 신칙하여 기한을 정해 놓고 기찰하여 잡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박정양(朴定陽)을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에,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명규(金明圭)를 의정부 찬정에, 특진관(特進官) 윤용구(尹用求)를 학부 대신에, 부장(副將) 민영기(閔泳綺)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 황기연(黃耆淵), 군부 협판(軍部協辦) 조동윤(趙東潤),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 민영주(閔泳柱)를 궁내부 특진관에, 특진관 민영기(閔泳綺)를 평안남도 관찰사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조종필(趙鍾弼)을 함경남도 관찰사에, 경무사(警務使) 김영준(金永準)을 강원도 관찰사에, 참장(參將) 주석면(朱錫冕)을 군부 협판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찬정 윤웅렬(尹雄烈)에게 경무사(警務使)를 겸임시켰다.
12월 19일 양력
군부 대신(軍部大臣) 민병석(閔丙奭)에게 호위대 총관(扈衛隊總管)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0일 양력
학부 대신(學部大臣) 윤용구(尹用求)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을 학부 대신에,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민영환(閔泳煥)을 탁지부 대신에,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서정순(徐正淳)을 의정부 참정에, 종1품 조병호(趙秉鎬),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이도재(李道宰)를 의정부 찬정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시종원 경(侍從院卿) 이건하(李乾夏)를 경효전 제조에, 궁내부 특진관 민영주(閔泳柱)를 시종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김주현(金疇鉉)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2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도망간 죄인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다. 이제 듣건대, 박영효(朴泳孝)를 임용하는 문제를 가지고 버젓이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신하와 백성으로서 입 밖에 낼 말이겠는가? 너무도 놀랍고 한탄스러워서 차라리 말하고 싶지도 않다. 원래의 상소는 비록 비서원(祕書院)에서 물리쳤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 엄격히 징계하지 않으면 법은 시행되지 않고 나라는 나라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법부(法部)로 하여금 경무청(警務廳)에 신칙해서 소두(疏頭) 이석렬(李錫烈) 등 여러 범인들을 염탐하여 체포하도록 한 뒤에, 철저히 조사하여 실정을 캐낸 다음 조율(照律)하여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법률이라는 것은 나라 안에 신뢰를 밝히는 것으로서, 죄가 있는 자는 처벌하고 죄가 없는 자는 처벌을 면제하는 것이 바로 고금의 통용된 원칙이다. 짐(朕)은 왕위를 물려받은 이래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하늘의 덕을 본받고 너그럽게 형벌을 적용하려 했던 선왕(先王)들의 가르침을 좇아서, 죄상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여 형벌이 아예 없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런데 요즘 기강이 해이해져 국사범(國事犯)들이 번번이 망명을 능사로 여긴 채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고 나라의 체모를 훼손시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생각이 이에 미치고 보니 어찌 통분하고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무릇 국외로 도망친 자는 죄의 대소(大小)와 경중(輕重)을 막론하고 또 해당 범인이 수범(首犯)인지 종범(從犯)인지 따질 것 없이 난신적자(亂臣賊子)라는 점에 있어서 매한가지이다.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만큼 영원히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관직을 설치하고 직임을 분담한 것은 정치를 시행하고 명령을 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즘 듣자 하니, 대소 관원들이 거리낌 없이 사진(仕進)하지 않아 여러 날 사무가 적체되었다고 한다.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진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각부(各府)에 신칙하여 매일 사진해서 예전처럼 사무를 보게 하라. 만일 소송 청구를 핑계로 출입을 막고 사무를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엄격히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종정원 경(宗正院卿) 이재순(李載純)을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윤웅렬(尹雄烈)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재판장(法部大臣兼高等裁判所裁判長)에, 특진관(特進官) 한규설(韓圭卨)을 의정부 찬정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첨사(詹事) 이재극(李載克)을 종정원 경(宗正院卿)에, 특진관 이재현(李載現)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이등감독(二等監督) 장화식(張華植)을 군부 경리국장(軍部經理局長)에 보임(補任)하였다.
12월 22일 양력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서정순(徐正淳)이, ‘이제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이종건(李鍾健)의 통첩(通牒)을 보니 해원(該院)의 부의장(副議長)을 새로 임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회의를 열고 권점을 많이 받은 윤치호(尹致昊)의 단자를 천망하여 드렸다고 합니다. 이를 인준하여 주십시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천망한 대로 임명하라."
하였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윤치호(尹致昊)를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2품 이채연(李采淵)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종2품 이근호(李根澔)를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23일 양력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서정순(徐正淳)이 아뢰기를,
"방금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을 대리하는 의관(議官) 윤시병(尹始炳)의 통첩을 보니, 재주와 기량 면에서 의정부 각 대신의 직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 11인(人)을 투표로 선발하겠다는 내용이었으며, 또한 본부(本府)에서 안건을 갖추어 상주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중추원 관제를 삼가 조사해 보니, 제1조 제5항에, ‘중추원의 임시 건의 사항’이라는 한 구절이 있는데, 건의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정령과 법률상 이로운가 해로운가, 적합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논의하는 것뿐이고, 인재를 추천하고 관리로 임명하는 것은 해원(該院)의 부의장(副議長)을 제외한 다른 관직에 대해서는 원래 해원에서 논의하여 추천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해당 통첩은 즉시 반환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이른바 투표로 선발된 명단 가운데 망명한 죄인들이 버젓이 섞여 천거되었으니,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무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날 그 문제를 제기하고 좋다고 한 의관 최정덕(崔廷德)과 의정부에 통첩한 의관 윤시병은 모두 본관에서 면직시키며, 가부를 결정하는 마당에서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한 여러 의관들에 대해서는 현고(現告)를 받고 일체 본관에서 면직시킬 것입니다. 그날 의장을 대리한 의관 이시우(李時宇)는 투표로 선발된 명단이 드러난 것을 보고서도 즉시 금지시키지 않았으니, 책벌로 1개월의 감봉(減俸)을 시행할 것입니다.
의장(議長) 이종건(李鍾健)으로 말하면, 투표하고 선거하는 데는 비록 참가하지 않았지만 법을 위반하여 안건을 제기하는 것을 보고도 막지 못했으니, 또한 경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견책(譴責)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이종건(李鍾健)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귀족원 경(貴族院卿) 이하영(李夏榮)을 중추원 의장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박내동(朴來東)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모두 일개 서생으로서 본래 경력도 없이 외람되게 중추원 의관의 직임을 맡게 되었으니,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지 않아 자신을 돌이켜볼 때 부끄럽고도 두렵습니다.
일전에 의논하는 모임에 참가하였을 때 동료인 최정덕(崔廷德)이 안건을 제기하기를, ‘현재 의정부(議政府)의 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문제는 없으니, 오늘 우리들은 각각 무기명 투표로써 인재를 추천하되 각기 11인씩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의원들이 모두 좋다고 하여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11인 중에는 박영효(朴泳孝)와 서재필(徐載弼)이 끼어 있습니다. 이는 최정덕 등의 간사한 계책으로서 겉으로는 인재를 추천한다는 핑계를 대고 속으로는 이 두 사람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의장(議長)과 신 등 두 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였으나 최정덕, 어용선(魚瑢善), 신해영(申海永), 변하진(卞河璡) 등은 한 목소리로 좋다고 하여 서로 버티다가 결정을 짓지 못한 채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 때문에 의장은 스스로 탄핵하고 물러날 것을 청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다시 회의를 열었는데, 의관 이교석(李敎奭)이 의장을 대리하였습니다. 최정덕 등이 전의 의견을 극력 주장하자 이교석 역시 스스로 벼슬을 내놓고 도피하였습니다.
이때 최정덕 등은 그 패거리의 의관 윤시병(尹始炳)을 추대하여 의장일을 대리하게 하고서는, 한 마디를 외치면 열 마디로 화답하여 그 계책을 실현하였으며, 끝내는 의정부에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가슴이 섬뜩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설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본원(本院)의 장정(章程)에는 원래 인재를 추천하는 권한이 없고, 또한 의정부를 조직한 전례가 없으니, 이른바 인재를 추천한다고 운운하는 것 자체가 원래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은 저들이 처음 안건을 제의할 당시에 일찌감치 그 간사한 계책을 저지하지 못하여 함정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는 신들이 똑똑하지 못한 잘못이며 죽어도 죄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런데 최정덕은 유독 무슨 마음으로 두 사람을 극력 추천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하가 비록 작은 잘못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탕척(蕩滌)하여 징계를 사면하기 전에는 추천하여 등용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나라의 법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박영효의 일로 말한다면, 을미년(1895) 5월에 반역 음모를 한 죄상003) 에 대해 조칙(詔勅)이 매우 엄격하였는데, 해외로 도망가고 법망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아직도 처벌이 지연되고 있으니, 이에 대해 귀신도 사람도 모두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최정덕 등은 도리어 그와 내통하면서 투표할 것을 궁리해 간사한 행위를 도왔으니, 이런 짓도 차마 하는데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저 을미년(1895)의 조칙을 폐하께서 아직 철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나라가 다 알고 있는 바이니, 저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왕권을 함부로 빼앗아 제멋대로 농간을 부리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에 황제의 조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저들의 논의가 도리어 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심보를 캐볼 때 어찌 저들의 안중에 임금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서재필에 대해서 논한다면, 외국 국적을 취득하여 외국의 신하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대한(大韓)의 신민(臣民)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후보자로 추천하려고 하니, 이것은 또 무슨 심산입니까?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동조자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최정덕 등이 박영효, 서재필의 동조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먼저 신들의 똑똑하지 못한 죄를 다스린 뒤에 결단성 있게 단안을 내려 최정덕 등이 역적을 비호한 죄를 속히 다스림으로써 나라의 화란의 싹을 막고 먼 훗날을 위한 생각을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옳다. 논의를 주도한 사람들은 의정부의 규탄에서 이미 탄핵하고 면직하였다."
하였다.
12월 2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효전(景孝殿)의 3주기 제사를 지낸 뒤 어느덧 여러 달이 흘렀다. 능침(陵寢)이 눈에 선한데, 그동안 사세(事勢) 때문에 미처 전배(展拜)할 겨를이 없었으니, 짐(朕)의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번 음력 12월 5일에 홍릉(洪陵)에 나아가 직접 제사를 지내야 되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동궁의 효성스럽고 사모하는 마음에 오랫동안 능을 전알(展謁)하지 못하였으니, 그리운 마음과 허전한 생각이 더욱 어떻겠는가? 이번 음력 12월 5일에 홍릉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여 정리(情理)와 예의(礼儀)를 펴도록 하라."
하였다.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이정로(李正魯)를 영희전 제조(永禧殿提調)에, 영선사장(營繕司長) 박용대(朴容大)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태복사장(太僕司長) 이재곤(李載崑)을 경효전 제조에, 영희전 제조 윤태흥(尹泰興)을 귀족원 경(貴族院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고영근(高永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일전에 세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었는데 폐하의 비답을 삼가 받고 보니 명령 내용이 하도 엄하여 더없이 두려운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다시 폐하에게 상소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으니, 폐하는 유의하여 밝게 살펴주기 바랍니다.
보부상(褓負商)을 혁파하라는 조칙은 분명 거듭 있었던 것인데, 아! 저 흉악하고도 미련한 무리들은 즉시 흩어지지 않고 또다시 어제 패거리를 불러 모아 기어이 만민(萬民)을 죽이려고 소매 속에 방망이를 감추어 가지고 몰래 살피는 과정에 만민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전 군수(前郡守) 신(臣) 원직(元稷), 전 군수 신 이재화(李在華), 전 의관(議官) 신 공석조(孔錫祚), 전 주부(主簿) 신 나규섭(羅圭燮) 등 4인은 곧 현장에서 발각되었기에 경관(警官)이 만민이 많이 모인 가운데서 그 이유를 따져 물었습니다. 원직은 공술에서 없애버린 보부상들을 다시 이름 지어 ‘상무협회(商務協會)’라고 하고 길영수(吉永洙)와 박유진(朴有鎭)이 이미 처분을 받들었으며 그 비용은 나라에서 준 것과 탁지부(度支部)에서 낸 것인데 돈의 액수는 19만 냥으로서 대궐에서 길영수에게 내려보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 공술에서는 흉악한 짓을 자행할 차례를 말하였는데 먼저 신하 고영근과 종2품 윤치호(尹致昊)를 제거하며 다음은 지난번에 체포된 의정부(議政府)의 총무 국장 신 이상재(李商在) 등 17명이며 그 나머지는 보잘것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재화의 공술에서는 백민회(白民會)를 설치하여 만민회(萬民會)를 반대한다고 하였으며 전 문안(文案) 신 권동수(權東壽)와 군부 대신서리(軍部大臣署理) 신 민병석(閔丙奭)이 함께 들어가 입시(入侍)하였는데 지출해준 돈이 2,000원이 된다고 하였으며 그 떼어주는 일을 맡아서 처리한 것은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였다고 하였습니다.
공석조, 나규섭 등의 공술도 일체 말한 내용이 같았습니다. 아! 저 무리들이 상무회(商務會)라고 말하는 것과 백민회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난동을 부린 백성들이 하는 짓입니다. 뱀처럼 서리고 지렁이처럼 엉키어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모해한 계책에 대해서는 해와 같이 밝게 비치는 폐하의 성스러운 덕으로는 신 등의 쓸데없는 진달을 기다리지 않고도 환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궐에서 내려보냈다거나, 떼어주었다거나 하는 말에 대해서 신 등은 매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며 저 무리들이 허물을 위에 돌리는 것을 통탄스러워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꼽아보아도 어찌 저 무리들과 같은 흉악하기 그지없는 자들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백성들을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고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지극히 어질고 훌륭한 덕을 지닌 폐하가 보잘것없는 무리들에게 이러한 모함을 당하였으니, 신 등은 폐하의 백성으로서 저 무리들에 대해 매우 속상하며 이를 갈게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원직, 이재화 등을 법을 맡은 관청에 넘겨 조종하는 우두머리를 조사하며 협박에 따른 난동의 무리들을 적발하여 모두 법조문에 비추어 징계하소서.
민영기로 말하면 본래 간사하고 능청스러운 무리들의 영수로서 기꺼이 난동을 부린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더없이 중요한 공적인 돈을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제멋대로 농간을 부려 거액의 돈을 지출함으로써 민심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나라의 창고가 바닥나는 것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해당한 법조문을 적용함으로써 백성들과 나라를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그리고 대체로 신 등이 전날에 연명으로 올린 글에서 제기한 민영기(閔泳綺), 심상훈(沈相薰), 김명규(金明圭) 세 신하를 아직도 내쫓지 않은 것과 조병식(趙秉式), 민종묵(閔種默), 김정근(金禎根) 3흉을 아직도 징계하여 처결하지 않은 것,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 2흉을 앞질러 귀양 보낸 것, 보부상(褓負商)들을 아직도 금지시키지 못한 것이 진실로 신 등이 여러 차례 폐하를 시끄럽게 굴면서도 그만둘 줄을 모르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능히 신의(信義)를 보인다고 한 칙서의 내용을 생각하여 빨리 처분을 내림으로써 나라의 법을 펴며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신 등이 다시 생각건대 속 좁은 간사한 패거리들은 임금께 대한 신 등의 바른 말과 정직한 충고를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백 가지로 날조를 하면서 그칠 줄을 모르고 있다는 소문이 낭자하며 풍설이 떠들썩합니다. 이에 대해 신 등은 더 없는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 등의 딴 마음이 없는 확고한 한 가지 신념에 대해서는 하늘이 환히 보고 있으며 또한 신명(神明)에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세세히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조칙으로 유시하였다. 알았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유학(幼學) 김찬규(金燦奎)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이른바 독립협회(獨立協會)라는 것은 겉으로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목을 빌리고 있지만 속으로는 흉역의 선봉이 되고 있습니다. 임금의 명령에 항거하고 대신을 내쫓으며 음모를 꾸며 마치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외국 공관에 투서를 하여 임금의 잘못을 조작하여 드러내고 공천(公薦)하듯 역적들을 권점(圈點)하여 대신의 직임에 제수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연설에서 말하기를, ‘박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전에 역적이었는가 아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고 그 사람들에게 재주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만 논하라.’고 하였으니, 저 흉역들이 흉한 기틀을 빚어내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대체로 왕망(王莽)이 선비들에게 굽히는 공손함이 있었다면 한(漢) 나라의 자리를 찬탈하지 않았을 것이고, 안녹산(安祿山)이 가슴 가득 충성심이 있었다면 당(唐) 나라 왕실이 어지럽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며 불순한 마음을 품은 것이 이미 매우 심합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난역들이 있으며, 오늘 신하로 있는 자들이 차마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있겠습니까?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신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죄를 다스리신다면 신들은 비록 사형을 받아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충성과 울분에 북받쳐서 이런 말을 했겠지만, 마지막 부분의 맺는 말은 진실로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유학(幼學) 심의승(沈宜承)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난번 중추원(中樞院) 회의석상에서 협회 사람으로서 의관(議官)으로 들어온 몇 사람이 박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 안경수(安駉壽)를 공공연히 투표하여 대신(大臣)의 후보로 의망(擬望)하였습니다. 차마 이런 짓까지 하니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아! 저 의관이 이 세 역적을 감히 의정부(議政府) 대신의 후보에 추천한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협회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간 흉역들의 심복으로, 그들과 내통하여 모든 행동을 다 그들의 지시대로 따른 것이며, 사전에 떠보는 계책을 써본 것입니다.
대신을 출척(黜陟)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중추원에서 가부(可否)를 제멋대로 결정하여 이에 세 흉적의 이름을 추천자 명단에 섞어 의망하고 의정부에 통제하여 제멋대로 임금에게 여쭙는 자리에서 의의(擬議)한단 말입니까?
의관 가운데 맨 먼저 세 흉적을 추천한 자를 속히 법사(法司)에 회부하여 흉역을 다스리는 형률을 시행하소서. 그리고 의심 없이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주저 없이 간사한 자를 제거하여 궁궐을 엄숙하게 하고 조정의 기강을 세우소서. 그리하여 중흥할 수 있는 기반을 열고 전제(專制)의 권한을 높임으로써 단연 우리나라가 문명을 이룩하는 기회가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은 충성스러운 의분에서 나왔고, 채용할 만한 사안도 있다."
하였다.
12월 25일 양력
민회(民會)에 칙유(勅諭)하기를,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백성들은 짐(朕)의 말을 분명히 들으라. 단문(端聞)에서 대궐 문에 직접 유시(諭示)한 지 며칠 안 되었기에, 짐은 너희들이 다시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 너희들의 죄는 너희들 자신이 알고 있을 것이다.
관소를 이탈하여 모임을 개최하는 데 대해서 이미 금령이 있었는데도 도처에서 모여들며 전혀 그만둘 줄 모르는 것이 첫 번째 죄이고, 독립협회(獨立協會)에 대해서는 이미 승인하였는데 ‘만민공동(萬民共同)’이라는 명목을 마음대로 내건 것이 두 번째 죄이고, 신칙하기도 하고 비지를 내리기도 하여 물러가도록 타일렀는데 줄곧 명령에 항거하면서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이 세 번째 죄이고, 쥐를 잡으려다 그릇을 깰까 염려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경계하던 것인데 대신(大臣)을 능욕하는 것을 다반사로 여기는 것이 네 번째 죄이고,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으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외국 공관에 투서를 하여 스스로의 죄를 숨기려고 한 것이 다섯 번째 죄이고, 백성과 관리는 체모(體貌)가 원래 다른데 관리를 위협하여 억지로 모임에 나오도록 한 것이 여섯 번째 죄이고, 부(府)와 부(部)의 행정은 어떤 경우에도 비워서는 안 되는데 관청에 난입하여 사무를 보지 말라고 외친 것이 일곱 번째 죄이고, 재판 사건은 힘 겨루는 일이 아닌데 소송할 것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무리를 지어 사단을 일으킨 것이 여덟 번째 죄이고, 군병을 파견하여 문을 막으라는 명령이 원래 있었는데 분풀이로 돌을 던져 중상을 입힌 것이 아홉 번째 죄이고, 여러 차례 명소(命召)했으므로 즉시 와서 대령했어야 하는데 요사스러운 말로 선동하며 줄곧 명을 거역한 것이 열 번째 죄이고, 도망간 역적은 용서할 수 없으며 사람마다 누구나 죽일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꺼내어 임용할 것을 기도한 것이 열한 번째 죄이다. 기타 자질구레한 범죄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아! 너희들은 스스로 위에 열거한 죄상에 입각할 때 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너희들 역시 스스로 모면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고 하늘이 매우 진노하고 있는 만큼 엄격한 징벌을 가할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들의 본뜻을 세세히 따져 볼 때 어찌 진실로 죄에 빠지는 것을 달갑게 여겨 그런 것이겠는가? 처음에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취지에 입각하여 착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결국에는 도리에 어긋나고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죄명에서 피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의구심이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짐은 너희들의 부모로서 단지 너희들이 처음에 착했던 것만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그동안 저지른 모든 죄를 일체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니, 너희들은 더 머뭇거리지 말고 서로 이끌고 물러갈 것이다. 아! 너희들 중 짐의 이 말을 듣고 눈물 흘리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본연의 양심이 반드시 왕성하게 일어나야 할 것이니, 각각 이전의 잘못을 씻어버리고 모두 함께 새롭게 나아갈 것이다. 짐은 더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이 민회(民會)의 일로 방금 칙유(勅諭)를 내렸다. 만일 우둔한 무리들이 오만무례하게 두려워할 줄 모른 채 다시 지난날의 버릇을 답습하여 열 명, 다섯 명씩 거리에 모여 모임을 열려고 하는 자들이 있으면, 파수 순검(把守巡檢)과 순찰 병정(巡察兵丁)으로 하여금 철저히 규찰하여 즉시 엄격히 금지시키도록 하라. 또한 거리와 마을에서 일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백성들로서 방청(傍聽)한다는 핑계로 빙 둘러서서 구경하는 자들도 역시 금단(禁斷)하며, 불량하고 잡된 무리들 중 보부상(褓負商)에 가탁하는 행동거지가 수상한 자들도 일체 엄격히 단속하라고 내부(內部)와 군부(軍部)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6일 양력
종2품 윤상연(尹相衍)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27일 양력
지진이 있었다.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지냈다.
12월 28일 양력
월식(月食)이 있었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믿음이라는 것은 다섯 가지 덕의 근간이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나라에 믿음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다. 지난번에 짐(朕)이 흉금을 터놓고 백성들에게 효유했건만 아직도 의구심이 채 풀리지 않았을까 저어하여 또다시 이렇게 널리 알리는 바이다.
무릇 백성들은 한두 명씩 고립되어 있을 때면 누구나 다 분수를 지키고 마음을 안정되게 지니지만, 수백, 수천 명씩 무리를 이루게 되면 그 속에서 자연히 들뜬 기운이 생겨나, 처음에는 감히 말하지 못할 말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된다. 전날의 이른바 민회(民會)라는 것 역시 그러했으니, 처음에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다가 결국에는 발언과 행동에서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게 되었다. 해산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잡힐까봐 두려워하여 도피만 일삼은 채 임금의 위엄은 수효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두루 미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진실로 모여 있던 날에 용서를 해주려고 하다가 해산된 뒤라 하여 약속을 어기게 된다면, 어찌 나라에서 백성들을 대하는 도리라고 하겠는가?
오늘부터 의구심을 말끔히 풀고 각자 돌아가 생업에 안착하라. 만일 다시 뜬소문을 퍼뜨리면서 혼미하여 되돌아갈 줄 모르고 열 명, 다섯 명씩 떼를 지어 이전의 버릇을 되풀이할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바로 스스로 죄를 초래하는 것이다.
국법은 지극히 엄하여 더는 용서하기 어려우니, 내부(內部)로 하여금 경무청(警務廳)과 한성부(漢城府)에 신칙하여 백성들에게 분명히 효유함으로써 모두 다 잘 알아듣도록 하라."
하였다.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주현(金疇鉉)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29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윤용식(尹容植)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30일 양력
육군 복장 규칙(陸軍服裝規則) 가운데서 견장 규정(肩章規定)을 개정해서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참령(參領) 이근용(李根)을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직학사(直學士) 이용선(李容善)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3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10년 유배(流配)의 처분을 받은 죄인 박명환(朴明煥)과 이유인(李裕寅), 7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이대준(李大峻),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을 모두 특별히 풀어 주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신기선(申箕善), 종2품 이인우(李寅祐)에 대해 모두 특별히 징계를 사면하라."
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윤웅렬(尹雄烈)이, ‘금년 11월 26일 특별 대사령(大赦令)에 관한 조칙(詔勅)을 받들고 유배(流配)할 죄인 가운데 육범(六犯) 내외에서 등급을 낮추는 데 적합한 대상자로서 이용한(李用漢) 등 16인과 각 재판소의 징역 죄인 가운데 등급을 낮추는 데 적합한 대상자 황만기(黃萬己) 등 64인입니다. 이를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고, 또 ‘각 재판소에서 심리한 살옥 강도 죄인인 이춘명(李春明) 등 58인을 교수형(絞首刑)에 처할 것에 대한 안건입니다. 이를 개록하여 상주합니다.’라고 아뢰니, 모두 윤허하였다.
종1품 정낙용(鄭洛鎔), 정2품 김가진(金嘉鎭)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시종원 경(侍從院卿) 민영주(閔泳柱)를 궁내부 특진관에, 비서원 경(祕書院卿) 박기양(朴箕陽)을 시종원 경에, 특진관(特進官) 민영주(閔泳柱)를 비서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내부 협판(內部協辦) 민병한(閔丙漢)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38권 끝】
【원본】 42책 38권 6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8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