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41권, 고종38년 1901년 8월
8월 1일 양력
【음력 신축년(辛丑年) 6월 17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일본 히즈야스왕〔博恭王〕이 인천(仁川)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성기운(成岐運)을 보내 영접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원본】 45책 41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18면
【분류】외교-일본(日本)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일본 히즈야스왕〔博恭王〕이 인천(仁川)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성기운(成岐運)을 보내 영접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8월 2일 양력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8월 5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철(閔泳喆)이 아뢰기를,
"방금 홍릉 영(洪陵令) 이승옥(李承玉)의 보고를 보니, ‘홍릉(洪陵) 해방(亥方)의 병풍석(屛風石) 윗면이 2촌(寸) 쯤 떨어져 나갔고, 임방(壬方)의 병풍석에 이미 석회로 보수한 자리가 4촌 쯤 떨어져 나갔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능의 병풍석이 이처럼 떨어져 나간 변이 생긴 것은 더없이 놀랍고 송구스러운 일이니 위안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안제의 날짜를 받을 것 없이 음력 6월 23일에 설행하되, 제문(祭文)은 시독관(侍讀官)에게 짓게 하고, 정부(政府) 이하가 즉시 가서 봉심(奉審)한 다음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능의 석물(石物)이 이렇게 떨어져 나간 변고가 생긴 것은 더없이 놀랍고 한탄할 일이다. 정부 이하가 즉시 가서 봉심하고 오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과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철(閔泳喆)을 소견(召見)하였다. 홍릉(洪陵)을 봉심(奉審)한 후 복명(復命) 하였기 때문이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능 주변의 해방(亥方)의 병풍석(屛風石)이 2촌(寸)쯤 떨어져 나가고, 임방(壬方)의 병풍석에 석회로 보수한 자리가 역시 4촌 쯤 떨어져 나갔습니다. 더없이 공경스럽고 더없이 삼가야 할 곳에 이처럼 떨어져 나간 변고가 생겼으니 황송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돌의 재질이 좋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개수(改修)를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되겠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8월이 되면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선선한 기운이 난 후에 공사를 시작하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이 몹시 심한데 지나오는 길 가의 농사 형편이 과연 어느 지경에 이르렀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런 가뭄은 근년에 보기 드문 것입니다. 벼가 말라들어 소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였다.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 민영환(閔泳煥)이 아뢰기를,
"흡곡 군수(歙谷郡守) 서재순(徐在淳)과 시위대 중대장(侍衛隊中隊長)인 정위(正尉) 이용구(李容九)는 난리 때 헌신적으로 임금을 호위한 특출한 공로를 세웠으니, 표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원(本院)에서 이미 의논하였는데 해당 두 관리들에게 모두 서훈(敍勳)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해당 두 관리의 특출한 공적에 대하여서는 응당 이런 공정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모두 특별히 훈(勳) 2등에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2품 이봉의(李鳳儀), 영평 군수(永平郡守) 홍태윤(洪泰潤), 평양 진위(平壤鎭衛) 4대 대대장(大隊長)인 참령(參領) 이창구(李昌九)는 난리 때에 보위한 공로가 있으니, 표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본 원에서 의논하였는데, 해당 관리들에게 모두 서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해당 세 관원의 공적은 표창할 만하니, 모두 특별히 훈 4등에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을 하사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종2품 김중현(金中鉉)은 위험을 무릅쓰고 충성을 다한 공로가 있고 종2품 민형식(閔炯植)과 상원 군수(祥原郡守) 현흥택(玄興澤)은 난리 때에 보위한 공로를 세웠으니, 표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본 원에서 의논을 했는데, 해당 관리들에게 모두 서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해당 3명의 공로에는 평가할 만한 것이 있고 이번 표훈원(表勳院)의 상주(上奏)에서도 공의(公儀)를 볼 수 있다. 김중현이 난리 때에 충성을 다한 것은 더구나 가상하니 특별히 훈 2등에 서훈하고, 민형식과 현흥택은 특별히 훈 3등에 서훈하는 동시에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이순익(李淳翼)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성근(金聲根)에게 규장각 학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성근(金聲根)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위하고 윤리를 지탱할 만한 충성이 있으며 바른 학문을 밝히고 간사한 주장을 물리칠 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부조(不祧)의 은전을 적용하여 은덕에 보답하는 원칙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그래서 열성조(列聖朝)에서 세상에 드문 은전을 베푼 전례도 이미 많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는 즉위하신 이래로 일체 충성을 표창하고 정당함을 내세워 주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으셨지만 아직도 미진한 것이 있기 때문에 감히 공의(公議)에 의거하여 폐하를 모독하니, 굽어 살펴주소서.
고(故) 좌의정(左議政) 문정공(文靖公) 이관명(李觀命)은 바로 고 정승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형이며, 고 정승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의 사촌 아우로서, 충성과 효성은 타고났으며 일찍부터 경서(經書)를 공부하여 뜻이 대바르고 행동이 깨끗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숙종(肅宗)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전후하여 올린 글들은 모두 종묘와 사직을 중히 하고 소인들을 멀리하는 내용이었는데, 임금을 무함한 흉악한 역적들을 먼저 침으로써 나라의 법을 엄하게 만들어 윤리와 강상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였으며, 또 어진 선비들과 스승들을 멸시하고 배반한 간사한 주장을 공격함으로써 선비들이 바른 데로 나아가게 되고 성인의 학문이 다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고 세상의 교화(敎化)를 밝히는 원칙에 있어서도 매우 간절하여 무슨 일이 제기되면 감히 임금에게 바른 말을 올리고 속이지 않았으며, 임금이 진노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 떨 때마다 조용히 간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돌려세웠습니다. 어진 사람을 추천하고 간사한 자를 내리쳤으며 좋은 계책과 정당한 논의는 역사책에 환히 실려 있습니다.
경종(景宗) 때 흉악한 무리들이 끼어들어 네 정승이 모두 절도(絶島)에 찬배(竄配)되었을 때 이관명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찬배되었으며, 영조(英祖) 을사년(1725)에 흉악한 무리들을 모두 쫓아내고 오랜 신하들을 등용할 때 그도 용서받았으니, 세상 형편에 따라 운수가 막히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상소를 올려 흉악한 우두머리들을 처단함으로써 사람들의 격분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더니, 간절하고 측은해 하는 비답(批答)을 내려 네 정승의 벼슬을 회복시키고 시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관명을 발탁하여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하였다가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승급시켰는데, 임금의 정사를 돕고 나라의 규율을 세우는 것을 자신의 직분으로 여겼으며 역적들을 쳐서 복수하는 큰 의리에 더욱 엄하여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함께 당시 주춧돌이 되었으며, 10여 년 동안 경연직(經筵職)에 있으면서 진술한 논의들과 연석(筵席)에서 아뢴 계(啓)는 모두 의리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호위한 것으로 말하면 하늘에 물어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고, 백대(百代) 후에도 의혹을 살 것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 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있은 문간공(文簡公) 이의현(李宜顯)은 고 정승 충정공(忠正公) 이세백(李世白)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간공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벼슬에 나가고 물러서는 의리와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를 낱낱이 터득하고 연마하였습니다. 조정에 나서서는 엄정한 태도를 지녀 아부하지 않아서 청렴하고 높은 명망으로 인하여 선비들이 무수히 그에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만약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한 몸의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았으며, 네 정승이 자전(慈殿)의 명령을 받고 세자를 정할 때에도 함께 입대(入對)하여 큰 계책을 정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역적 신하가 상소를 올려 현혹시키자 또 그를 토죄할 것을 함께 청하였으며 삼사(三司)에서 토죄하고 복수하는 일로 3년 동안 서로 버틸 때에는 죄인들을 엄하게 치지 않으면 장차 윤리가 없어질 것이며 어물어물 지체하는 사이에 흉악한 모략을 꾸며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생길 것이라는 말을 올렸는데, 얼마 못가서 그 말이 과연 증명되었습니다.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네 대신을 재앙의 원흉으로 몰고, 네 대신이 정청(庭請)을 그만두자고 논의할 때 여러 재상들이 수긍한 것을 죄로 삼자 쫓겨났지만, 충성이 본래부터 임금에게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마침내 삼정승에까지 올랐습니다. 그가 벼슬에 나오고 벼슬에서 물러난 일들은 옛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으로서, 이관명과 다르면서도 같습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부조의 은전을 받았지만 유독 이 두 신하에게만은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시대의 법에 흠으로 되지 않으며 여론들이 한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는 널리 살피시어 종묘와 사직에 공로를 세운 두 신하의 충성을 추념하셔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미 베풀어준 대로 모든 부조의 은전을 베풀어 준다면 더없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8월 6일 양력
종1품 강건(姜湕)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장봉환(張鳳煥)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숙종(肅宗) 때의 유신(儒臣) 증 이조 판서(贈吏曹判書) 이유장(李惟樟)은 순결하고 바른 품성에다 평소에 스스로 애써 수양했는데 대체로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연원을 사숙하면서 성리학(性理學)에 깊이 파고든 결과 도(道)가 온전해지고 덕(德)이 수립되었습니다. 그의 친분관계를 말하면, 진선(進善) 정시한(丁時翰)이나 충간공(忠簡公) 이동표(李東標) 같은 사람이었는데 도의(道義)로 서로 연마하며 지냈습니다.
당시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과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모두 말하기를, ‘실천이 독실하니 한 세상의 모범이다.’라고 하면서 입을 모아 조정에 추천한 결과, 곧 별제(別提)와 좌랑(佐郞)으로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얼마 후 안음(安陰)의 수령으로 임명하였으나 또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익찬(翊贊)의 벼슬에 제수됨에 이르러서는 ‘한번도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는 것은 숨어있는 선비로 자처한 것이기는 하나, 도리상 온당치 못하다.’라고 하고는 비로소 대궐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입직(入直)한 지 7일 만에 〈백구가(白鷗歌)〉를 짓고는 그만 훌쩍 산으로 들어갔는데, 송파(松坡)로 길을 잡아 청나라 비(碑)를 지나면서 지은 시에,
‘선대 때의 일을 말하자니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한 조각의 비석을 시름겹게 보며
새벽을 타서 송파를 지나노라.’
하였습니다. 시의 넷째 구(句)는 응제시(應製詩)의 제목으로 내기까지 하였으므로 도성의 선비들이 지금도 외워 전하고 있습니다.
판서(判書) 정범조(丁範祖)는 그의 행장(行狀)에서 이르기를, ‘도덕과 학문은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자(顔子)에 비길 만하다.’라고 하였고, 증 이조 판서(贈吏曹判書) 이상정(李象靖)은 그의 문집(文集) 서문(序文)에서 이르기를, ‘경학(經學)을 대문으로 삼고 성실성을 기본으로 삼았으니, 그가 한 평생 실천해 온 실제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덕이 깊이 배이고 그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대체로 이러하였습니다.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어진 사람을 장려하는 조정의 도리로 보아 응당 시호를 내리는 은전이 베풀어져야 하겠는데, 대궐이 아득히 멀어서 말씀드릴 길이 없었으며 온 영남 사람들이 모두 몹시 섭섭해 하고 있습니다. 신은 우러나오는 양심으로 감히 한 마디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성명(聖明)께서는 백대의 공의(公儀)를 굽어 살펴 증 이조 판서 이유장(李惟樟)에게 시호를 내려주고 부조(不祧)의 은전을 베풀어줌으로써 유학을 빛내고 세상 교화를 부지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의관(議官) 안종덕(安鍾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임진년(1592)의 충신인 고(故) 진주 목사(晉州牧使) 서예원(徐禮元)은 올곧은 충성과 큰 지조로 온 가문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당시의 사적에 대하여 후세의 선비들이 그처럼 두드러지게 적어 놓았건만, 단지 후손들이 영락되고 세대(世代)가 점점 멀어진 결과 임금에게 말씀드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보고만 되었더라면 표창하는 은전이 어찌 혹시라도 그 때 난리 통에 한 목숨을 바친 여러 신하들의 뒤에 놓이겠습니까?
삼가 상고하건대, 선무 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 증 병조 참의(贈兵曹參議) 서예원은 이천(利川) 사람으로서 선조(宣祖) 때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고 곽산 군수(郭山郡守)로 임명되었습니다. 호란(胡亂)을 당하자 종군하여 많은 싸움에서 승리하는 공로를 세웠으므로 선조는 가상히 여겨 그의 화상(畵像)을 그리도록 명하여 그것을 보고는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임명하였습니다. 그 때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였는데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모아서 적들을 맞받아 많은 적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그의 공로를 보고하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때 적들이 장차 곧바로 진주(晉州)로 향하려 하자 서예원은 급히 성으로 돌아가 적들과 여러 번 싸웠는데, 27일이 되어 외부의 지원이 끊어져 말먹이와 군량이 모두 떨어지는 통에 군사들과 말이 굶주려서 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예원은 여전히 기운을 가다듬고 싸움을 지휘하여 동쪽 성문을 지켰습니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과 의병장(義兵將) 장윤(張潤)이 탄환에 맞아 죽고 적들이 성으로 달려들어 성이 그만 함락되자 서예원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고 남쪽 문에 가서 앉았습니다. 적들이 항복시키려고 하니 이에 예원은 꾸짖으면서 항복하지 않았으며, 적들이 칼로 찌르는 바람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맏아들 서계성(徐繼聖)은 두 명의 남자 종 금이(金伊), 춘년(春年) 그리고 관아의 종 5명과 함께 곧장 앞으로 내달려 치면서 싸워 적 수십 놈을 죽이고, 모두 적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처 이씨(李氏), 맏며느리 노씨(盧氏), 시집가지 않은 딸 그리고 여종 몇 사람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몸을 묶은 다음 앞을 다투어 강에 뛰어들었습니다. 같은 날 한 성에서 죽은 장수들과 군사들이 6만여 명이나 되었으니, 아! 비통한 일입니다.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된 사실을 명(明) 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보고하였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목사(牧使) 서예원은 8일 동안 피 흘리며 싸우다가 외부의 지원이 끊어졌으나 모든 사람들이 적의 칼날을 피하지 않았으며 구차스럽게 살아보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군사를 거느린 장관(將官)이 수 십리 밖에 안 되는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지체하고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동남쪽 변경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원임 좌의정(原任左議政) 정철(鄭澈)은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명나라 사신에게 올린 보고에서, 힘껏 싸워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 중에서 지조와 의리가 뛰어난 사람들을 들었는데, 서예원을 고경명(高敬命)과 조헌(趙憲)의 아래, 김시민(金時敏), 송상현(宋象賢), 유극량(劉克良)의 위에 놓으면서 말하기를, ‘적의 칼날에 몸이 가루가 되어도 구차스럽게 살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서예원의 충성과 절개가 당시 의리를 제창한 여러 신하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여기에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훗날 공로를 평가할 때 유독 원종 2등 공신(原從二等功臣)에 넣었고 벼슬을 추증한 것은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그쳤으니 그것은 당시 공로에 대한 조사가 대체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지원하지 않은 자들의 손에 의해 진행되었고, 유성룡이 자기 죄를 규탄한 데 대한 분풀이를 서예원에게 하여 그 사실을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 원통합니다.
그 후 여러 신하들은 차례차례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주며 부조(不祧)의 은전을 받았지만 유독 같은 날에 나라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서예원에게만은 미치지 않았으니 더욱이 억울한 일입니다. 어찌 오래된 일이라고 해서 표창하지 않겠습니까? 황상께서는 속히 고 충신 서예원에게 높은 벼슬을 추증하고 훌륭한 시호를 주는 동시에 진주의 충렬사(忠烈祠)에서 추향(追享)하도록 하여 같은 때에 목숨 바쳐 절개를 지킨 충신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경건히 봉안하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억울하게 되었던 충성스러운 넋을 위로하고 한 시대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8월 7일 양력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이도재(李道宰)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오늘 법원(法院)에서 김기문(金基文)을 조사한 일에 대한 사법서(司法書)를 보니, ‘신이 백성들의 허위 고소를 듣고 위관(尉官)의 죄를 논감(論勘)하였지만 죄의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놓아주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조사하는 마당에 뜻밖에 해당 영관(領官)이 앞뒤 말이 달라서 도리어 위관(尉官)을 두둔하게 되었고, 그 말이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에 신이 전보(電報)와 조회(照會) 문건으로 두세 가지 증거와 증인을 일일이 들면서 법원과 연계를 취한 결과 단서가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더 구핵(究覈)하지 않은 채 서둘러 마감하여 위관에게는 죄가 없고 사령관(司令官)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평소 신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 탓이니 다시 어찌 감히 남을 탓하겠습니까?
사령관이 죄가 있는 일개 위관을 감처하자고 청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므로 애당초 구구하게 상소를 올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관이 영관(領官)을 위협하고 백방으로 허위를 날조하여 마침내 무죄로 벗어나기까지 하였으니, 가만히 생각건대 이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지금 서쪽 변경의 각군(各郡)에는 군대들이 허다히 나뉘어 있으며 여러 위관(尉官)들의 불법 행위가 왕왕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령관의 입장으로 말한다면 불법적인 행위를 단속하는 것은 원래 그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해당 위관들이 모두 요행으로 모면할 생각을 품고 김기문의 소행을 본뜨려고 한다면 사령관으로서는 두려워서 과오를 바로잡지 못할 것이고, 한 명의 위관도 다시는 규탄하여 추궁하지 못할 것이니 앞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폐단이 생길 것입니다. 더없이 엄한 군사 규율이 신 때문에 무너지게 되었으니 이 역시 신의 죄입니다.
그리고 세상일이란 원래 양쪽이 다 옳거나 양쪽이 다 그른 경우란 없는 법입니다. 신은 이미 근거도 없이 죄를 따졌다는 지목을 받은 이상 마땅히 남의 죄를 농간질한 율(律)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설사 법원에서 아주 무난하게 처리하여 준다 하더라도 신이 어떻게 감히 구차히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태연하게 그대로 있겠습니까? 더없이 황송한 마음으로 감처(勘處)를 기다리니 황상께서는 신의 관찰사(觀察使)와 사령관(司令官) 의 직임을 면직(免職)시키고 해당 율을 시행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에게 잘못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인책하는가? 번거롭게 말하지 말고 변경을 굳건히 하는 대책에 더욱 힘쓰라."
하였다.
8월 8일 양력
유배 죄인 주석면(朱錫冕), 제갈형(諸葛炯), 민경식(閔景植), 김규희(金奎熙), 김규필(金奎弼)을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종2품 이인영(李寅榮)을 서북 철도국 감독(西北鐵道局監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으며, 르페브르〔盧飛鳧 : Lefèvres〕 【뢰패불】 를 서북 철도국 감독에 임용하였다.
8월 9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가을철이 이미 되었건만 비 올 기미는 막연하며 들판은 거북등처럼 갈라 터지고 개울과 못은 모두 말라 버렸다.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타는 것만 같다. 모레 북쪽 교외에서 지내는 별우제(別雩祭) 때 대신(大臣)을 보내어 성의껏 설행하되, 제문(祭文)은 문임(文任)에게 지어 바치게 하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근수(李根秀)를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제갈형(諸葛炯)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들로서는 물론 이런 말을 해야 하겠지만 나 역시 참작한 바가 있다. 노숙한 경들로서도 아마 이해할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8월 10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김영준(金永準)의 문제에 대하여 참작할 바가 없지 않으니 특별히 죄명을 벗겨주는 동시에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라."
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등이 올린 상소에,
"김영준(金永準)의 죄명을 벗겨 주고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대한 명령을 취소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들의 말은 응당 이러해야 하겠지만 또한 참작할 바도 있으니 이해해주고 거듭 제기하지 마라."
하였다.
8월 11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사충사(四忠祠)에 치제(致祭)하는 날이 하루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무릇 의리를 동경하고 충성을 숭상하는 관리들은 모두 참반(參班)할 것인데 하물며 종손(宗孫)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 일본주재 공사(公使) 조병식(趙秉式)은 충익공(忠翼公)의 후손이고 전 경상 감사(前慶尙監司) 이용직(李容直)은 충민공(忠愍公)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두 신하들은 모두 호조(戶曹)의 주핵(奏劾)을 받고 있어 제사에 참가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그 정리를 따져보면 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까? 옛날 정조(正祖) 신축년(1781) 8월 20일에 영의정(領議政) 서명선(徐命善)의 계(啓)에 의하여 남을 잘못 규탄한 죄를 진 김문순(金文淳)을 서임(敍任)하여 치제에 참반케 하였습니다. 그 크고 훌륭한 덕은 고금에 없었던 것이었는데 이것이 어찌 오늘날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문순은 충헌공(忠獻公)의 지손(支孫)에 불과하였는데도 이렇게 생각하여 주었는데, 지금 이용직은 더구나 충민공의 사손(祀孫)이니, 그 절박한 마음이 여느 사람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입니다.
조병식은 품계가 높고 나이가 많은 관리로서 김문순보다 예의로 대하는 데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또 그가 걸려든 문제로 말하면 조병식이 사행(使行)할 때 쓴 돈 1만 6,000여 원(元)을 독촉하여 받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법부(法部)에서 제기한 안건을 가져다 보니, 지출한 데는 다 구별이 있고 모두 외부(外部)를 통하여 마감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한 가지 문제는 애당초 논의할 것도 없습니다.
이용직으로 말하면, 진주(晉州)의 천포결(川浦結)에 대한 조세를 징수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평리원(平理院)의 청원서를 가져다 상고하여 보건대, 호조에서 석방하자고 결정한 것을 다시 대조한 데 의하면, 해당 금액이 설사 정말 바쳐야 할 것이라고 하더라도 당오전(當五錢) 4만 냥(兩)은 을미년(1895)에 다 바치고, 석방되도록 한 당오전 30여만 냥의 총액 중에 이미 포함된 것인 데다가, 얼마 후인 그 해 6월에 또 특별히 탕감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이제 두세 번 거듭 물리는 것은 사실 법의 의도에 맞지 않습니다. 이용직은 빨리 법부에서 석방하게 하며 조병식에 대해서도 같은 규례로 용서하여 치제에 참반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8월 12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모레 선농단(先農壇)의 별우제(別雩祭)는 대신(大臣)을 보내어 성의껏 지내게 하고 제문(祭文)은 문임(文任)에게 지어 올리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의 찬정(贊政) 김성근(金聲根)이, 고(故) 좌의정(左議政) 문정공(文靖公) 이관명(李觀命), 고 영의정(領議政)인 문간공(文簡公) 이의현(李宜顯)은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북돋웠으니 응당 부조(不祧)의 은전을 시행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려 글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는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신이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이관명은 바로 고 상신(相臣)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형이며 고 상신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의 사촌 아우로서, 뜻이 바르고 행동이 깨끗하였기 때문에 숙종(肅宗)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임금을 무함한 흉악한 역적들을 먼저 쳤으며, 또 어진 선비들과 스승들을 멸시하고 배반한 간사한 주장을 공격하였습니다.
경종(景宗) 때 흉악한 무리들이 끼어들어 네 정승이 모두 절도(絶島)에 찬배(竄配)될 때 이관명도 삭탈되고 찬배되었으며 영조(英祖) 초기에 구 관리들을 등용할 때 이관명도 용서받았는데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함께 모두 당시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10여 년 동안 경연직(經筵職)에 있으면서 진술한 논의들과 연석(筵席)에서 아뢴 계(啓)는 모두 나라의 역적을 치고 의리를 밝히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충성을 다하고 임금을 호위한 것으로 말하면 천지에 내세워도 어긋날 것이 없고 백대 후에도 의혹을 사지 않으리라고 할만 합니다.
이의현(李宜顯)은 충정공(忠貞公) 이세백(李世白)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원래 엄정한 태도가 있었으며 조정에 나서서는 한 몸의 이해관계를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네 정승이 자전(慈殿)의 명령을 받고 세자(世子)를 정할 때에도 함께 입대(入對)하여 큰 계책을 질정(質定)하였습니다.
그 후 정청(庭請)과 관련하여 수긍한 것 때문에 찬출(竄黜)되어 떠돌아 다녔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무신년(1728) 역적들의 변고로 나라의 형편이 매우 위태롭게 되었을 때 단신으로 막아 나서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반석같이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정승의 공로와 덕을 잊지 않는 큰 은혜에는 오히려 채 미치지 못한 점이 있으니 이렇게 상소를 올려 청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특별히 부조의 은전을 베풂으로써 한껏 보답하는 조정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조병식(趙秉式)이 일본 공사(日本公使)로 갔을 때 관청 돈을 돌려 쓴 문제에 대하여 탁지부(度支部)의 주청(奏請)으로 인하여 신의 부(部)에서 독촉하여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병식(趙秉式)의 청원에 의하여 당시의 수원(隨員)인 이준상(李濬相)을 조사한 결과 써버린 각종 비용은 모두 외부(外部)를 통하여 마감하였다는 것이 명세서에 정확히 씌어 있으며, 심지어 일상적으로 쓰지 않고 수시로 쓴 것에 대해서는 낭비했는가 낭비하지 않았는가를 깊이 따져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예산을 거치지 않은 채 지출하여 규례를 어겼다는 것이 해부(該部)에서 논주(論奏)한 이유지만 그 때 일의 기미를 소급하여 생각해 보건대 떠날 날짜가 급해서 미처 정부의 의논을 거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이제 까다롭게 논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뢴 글을 내려 보낸 것을 보니 사충사(四忠祠)에 치제(致祭)할 때 종손들을 참가시키는 일과 관련하여 조병식을 잡아들이는 것을 그만두자고 청하였습니다.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한 가지 문제도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14일 양력
황태자가 상소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부황(父皇) 폐하는 거룩하고 신령스러우며 문명하고 용맹한 자질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만대를 내려가도록 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하늘이 주는 복을 받아 경사로운 일과 상서로운 일들이 몰려듭니다. 올해에는 연세가 50세가 되었으니 천만년 끝없이 장수할 보록(寶籙)이 사실 이 해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올해의 경사는 단지 우리나라의 큰 경사만이 아니며 아래 위로 수천 년의 지나간 역사를 두루 상고하여도 일찍이 이런 경사는 드물었습니다. 대체로 연회를 차려 장수를 송축하는 일로 말하면 역대 임금들이 이미 시행한 예식(禮式)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으로는 오늘날 하늘이 도와준 뜻에 보답하고 신하들의 기뻐 날뛰는 간절한 정성을 대충이라도 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으니, 화려하고 성대한 의식이 응당 이보다 더해야 할 것입니다.
소자가 해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 번 올린 글들이 혼자서는 들 수 없을 정도로 많건만 부황 폐하는 지나치게 겸손하시어 모두 못하도록 막으시고 단지 진연(進宴)만을 허락하였습니다. 대체로 연회를 벌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술을 차려 임금 앞에 올라가 술잔을 올리면 상쾌한 기운과 기쁨의 환성이 화기애애하게 넘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온 나라 사람들이 발을 구르고 용약하며 마치 자신이 화려한 연회에 참가하여 구경하듯이 하며, 장수를 축원하여 올리는 만세 소리가 우레처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주(周) 나라의 음악과 연회에 관한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법연(法筵)에서 축하하는 의식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 조가(朝家)의 예식을 상고하여 보건대, 임금의 탄신일에 치사(致詞)를 올리는 규례가 있는데 그것이 비록 축하하는 의식에 완전한 것은 못되더라도 참작하고 절충하여 타당하게만 한다면 성의를 만분의 일이나마 펼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황 폐하께서도 지극한 성의에 대하여 통촉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일을 크게 벌리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저 한 장의 종이에 글자 몇 자를 쓸 뿐입니다. 예법을 적용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화순(和順)한 것으로써 경서(經書)에서도, ‘부모가 편안해 하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래에서 바라는 것을 위에서 들어주는 것이 바로 화순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외람됨을 생각지 않고 간절한 심정을 진술하는 것이니, 부황 폐하는 굽어 살펴 소자에게 만수성절에 치사를 올리게 함으로써 예법을 지키고 정성을 표시할 수 있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극진한 정성과 효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전날 진연(進宴) 연회를 차리도록 허락하기는 하였지만, 짐(朕)은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더구나 지금 가뭄 때문에 보이는 것마다 걱정거리이고 백성들의 농사와 나라의 재정 형편이 말이 아닌데, 이런 판에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어찌 한갓 짐의 마음에만 불안할 뿐이고 너의 마음은 편안하겠는가? 전번에 내린 비답에서 이미 다 말했지만 모든 의식물(儀式物)을 다시 더 간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치사에 대해서는 크게 벌려놓는 일이 아니므로 청한 대로 윤허한다."
하였다.
8월 15일 양력
원수부 검사국 총장(元帥府檢事局總長) 민영철(閔泳喆)이 아뢰기를,
"방금 특별 파견 검사관(檢査官)인 원수부 군무국 부장(元帥府軍務局副長) 육군 부령(陸軍副領) 장화식(張華植)의 계본(啓本)에 대한 계하(啓下)를 보니, 그 내용의 대략에, ‘각 대대(大隊)의 저치미(儲置米) 500석(石)은 불의의 사변에 대처하기 위한 군수 물자로서 내탕고(內帑庫)에서 내도록 삼가 특지(特旨)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느 물건에 비할 바 없이 중한 것인 만큼 모든 석으로 하여 창고에 넣을 때와 석을 풀어 쌀을 바꿀 때에 갑절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侍衛) 제2대대 대대장(大隊長) 전우기(全佑基)는 석으로 만들거나 쌀을 바꾸는 과정에 서슴없이 농간을 부려, 창고에 넣을 때에는 2, 3승(升)씩 덜어 석으로 만들어 국고에 흠결을 냈으며, 쌀을 나누어줄 때에는 8, 9합(合)씩 깎아 됨으로써 군사들로부터 원망을 샀습니다.
이 과정의 진상이 남김없이 다 드러난 이상 검열 원칙상 한시도 덮어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향실(餉室)의 하사(下士)를 잡아 가두고, 손을 댄 쌀 16석 3두(斗) 4승과 종래부터 매 석당 1승씩 떼어낸 몫을 일일이 받아두고 보고하도록 해당 부대에 신칙하라는 유지(有旨)가 있었습니다. 검사국에서 문서에 준하여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대대장(大隊長) 전우기가 군수 물자의 중요함을 생각하지 않고 서슴없이 농간질을 하여 축낸 것이 드러나기까지 한 것은 군사 기강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더없이 통탄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육군 법원(陸軍法院)에서 그의 죄상을 조율(照律)하여 징판(懲辦)하며 손을 댄 곡식은 일일이 독촉하여 받아가지고 도로 채워 넣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우선 본 관을 면직하고 법원(法院)에서 조율하여 징판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7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김사철(金思轍)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8월 19일 양력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학진(金鶴鎭)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特進官) 이순익(李淳翼)을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겸 시강원 일강관(侍講院日講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성근(金聲根)에게 홍문관 학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8월 20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경부 철도 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社)가 북부행 철도 기공식(起工式)을 영등포(永登浦)에서 행하였다.
8월 21일 양력
경부 협판(警部協辦) 이근택(李根澤)을 법규 교정소 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에 차하하라고 명하였다.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이 아뢰기를,
"미국인 니담 〔禮覃 : Needam〕을 미국주재 공사관(公使館)의 참서관(參書官)에, 독일인 헤르만〔海路萬 : Karl hermann〕을 독일주재 공사관의 참서관에 임용하여 모두 공사(公使)의 사무를 돕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2일 양력
종1품 이헌직(李憲稙)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2품 이승순(李承純)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김용규(金用圭)와 김석규(金錫圭)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8월 24일 양력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상소하여 재상직을 사임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정1품 윤용선(尹容善)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명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8월 25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법전(法殿)을 아직도 짓지 못한 것은 사실 나라의 재정 때문이지만, 일의 체모로 보아 역시 그대로 둘 수 없는 문제이다.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즉시 시행하되, 도감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은 궁내부(宮內府)에서 차출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관왕묘(關王廟)를 높이 모시고 공경스럽게 제사지낸 지가 지금 300여 년이 되었다. 순수하고 충성스러우며 지조 있고 의로운 영혼은 천년토록 늠름하여 없어지지 않고, 중정(中正)하며 굳세고 큰 기백은 천하에 차고 넘쳐 오가면서 말없이 짐의 나라를 도와 여러 번 신령스러운 위엄을 드러냈으니, 경모하고 우러르는 성의를 한껏 표시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역대로 행해온 예법(禮法)이 있음에랴. 황제로 칭호를 높이는 제반 의식 절차를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고 택일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을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윤용선(尹容善)을 영돈녕원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윤정구(尹定求)를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로 삼았다.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칙유하기를,
"경(卿)이 벼슬을 사양하고 시골집에 내려가 있는 때부터 경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근년 이래로 경이 도와주던 지난날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는데, 방금 경이 도성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자 마치 잃었던 물건을 얻은 듯이 기쁘다. 즉시 다시 중서(中書)의 직임을 제수하니 여러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짐(朕)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연회를 차리는 것은 사실 황태자가 정성과 효성으로 해마다 여러 번 간절히 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지금 가뭄으로 백성들이 근심에 싸여 경황이 없으니 짐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요컨대 경은 이 연회에 함께 참가하여 나의 편치 않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고 속히 수습 대책을 취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경은 즉시 등대(登對)하여 자리를 비워놓고 간절히 기다리는 나의 마음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8월 26일 양력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을 소견(召見)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성수(聖壽)가 50을 채워 나라에 큰 경사가 생기고, 황태자가 큰 효성으로 이번 연회를 차리니 축하하는 심정이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8월 27일 양력
성진 감리(城津監理) 김교석(金敎碩)을 경흥감리 겸 경흥부윤(慶興監理兼慶興府尹)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3품 심후택(沈厚澤)을 성진감리 겸 성진부윤(城津監理兼城津府尹)에 임용하고 주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8월 28일 양력
종1품 심상훈(沈相薰)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경무관(警務官) 엄진우(嚴鎭祐)를 경부 서무국장(警部庶務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8월 30일 양력
비서원 경(祕書院卿) 이재극(李載克)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조동희(趙同熙)를 비서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8월 31일 양력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