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46권, 고종42년 1905년 12월
12월 1일 양력
【음력 을사년(1905) 12월 4일】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한 번 죽지 못하고 어제 또 구구한 생각을 호소한 것은 대체로 무익하게 다 죽느니 차라리 이 몸이 더 살아서 다 같이 살 계책을 세우고 망해 가는 종묘사직의 운명을 더 이어 나아가게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가 비지(批旨)를 받아보니,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하는 것은 서로 면려하고 수성(修省)하는 것만 못하니, 힘쓸 것은 자강(自强)에 있다.’ 하시고, 이어 서로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신들은 감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신들이 집에 물러가 있다 해도 역시 근심에 휩싸여 통탄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며 문을 닫고 자결할 따름인데,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신들에게 권면하며 신들은 또 어떻게 폐하에게 권면하겠습니까? 그리고 신들은 또한 성상의 뜻이 과연 수성하는 데 있는가 하는 것을 감히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5명의 적신(賊臣)들에게 한 나라의 정사를 전담하게 해서 신들과 몇 만 백성들을 모조리 죽게 하려는 것입니까? 신들이 여러 번 청한 것은 애초에 폐하께서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데도 여전히 윤허를 하지 않고 계십니다. 신들이 청하는 것은 폐하께서 쉽게 시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달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오늘 즉시 칙지를 내려 대소 신료들을 대궐 뜰에 소집하고 각각 당면한 급선무에 대해 진달하게 하여 가려 쓴다면 역적을 치고 나라를 보존하는 일이 그 속에서 시행될 것이니, 삼가 살피고 서둘러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의 말에 대하여 짐이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짐의 말에 대해서도 경들 역시 계속 생각하여 묵묵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난국을 타개할 대책은 요컨대 어제 내린 비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군신 상하가 한 마음으로 면려하여 각기 자신의 일을 맡아서 극복을 도모하는 데 달려 있다. 꼭 대궐 뜰에 불러 모아 공연히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 경들은 그리 알고 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원본】 50책 46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0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재판(裁判) / 외교-일본(日本)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한 번 죽지 못하고 어제 또 구구한 생각을 호소한 것은 대체로 무익하게 다 죽느니 차라리 이 몸이 더 살아서 다 같이 살 계책을 세우고 망해 가는 종묘사직의 운명을 더 이어 나아가게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가 비지(批旨)를 받아보니,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하는 것은 서로 면려하고 수성(修省)하는 것만 못하니, 힘쓸 것은 자강(自强)에 있다.’ 하시고, 이어 서로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신들은 감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신들이 집에 물러가 있다 해도 역시 근심에 휩싸여 통탄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며 문을 닫고 자결할 따름인데,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신들에게 권면하며 신들은 또 어떻게 폐하에게 권면하겠습니까? 그리고 신들은 또한 성상의 뜻이 과연 수성하는 데 있는가 하는 것을 감히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5명의 적신(賊臣)들에게 한 나라의 정사를 전담하게 해서 신들과 몇 만 백성들을 모조리 죽게 하려는 것입니까?
신들이 여러 번 청한 것은 애초에 폐하께서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데도 여전히 윤허를 하지 않고 계십니다. 신들이 청하는 것은 폐하께서 쉽게 시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달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오늘 즉시 칙지를 내려 대소 신료들을 대궐 뜰에 소집하고 각각 당면한 급선무에 대해 진달하게 하여 가려 쓴다면 역적을 치고 나라를 보존하는 일이 그 속에서 시행될 것이니, 삼가 살피고 서둘러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의 말에 대하여 짐이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짐의 말에 대해서도 경들 역시 계속 생각하여 묵묵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난국을 타개할 대책은 요컨대 어제 내린 비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군신 상하가 한 마음으로 면려하여 각기 자신의 일을 맡아서 극복을 도모하는 데 달려 있다. 꼭 대궐 뜰에 불러 모아 공연히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 경들은 그리 알고 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조 특진관(趙特進官 : 조병세(趙秉世))의 병세가 몹시 위중하다고 하니, 어의(御醫)를 보내서 자리를 떠나지 말고 간병하도록 하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새로운 한일 조약(韓日條約)에 분개해서 약을 먹고 죽었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대신의 돈후한 천품과 굳은 지조를 두루 중앙과 지방에 시험하니 명성과 업적이 무수히 드러났으며 조정에 벼슬하여서는 모두 그 위풍을 우러러보았다. 그리하여 짐은 큰집을 버텨주는 기둥과 대들보처럼 의지했었고 이 어려운 때에 직면하여서는 더욱 마음을 의탁했었는데 갑자기 이처럼 부고가 이르렀다. 굳은 충성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정은 후세에 빛날 것이지만 짐의 슬픈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졸(卒)한 특진관 조병세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궁내부(宮內府)에서 1등급의 예장(禮葬)을 기준으로 지급하여 겸장례(兼掌禮)를 보내 호상(護喪)하게 하고, 장사(匠事)는 영선사(營繕司)에서 거행하게 하라. 예식원(禮式院)에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시호를 주는 은전을 시행하게 하되,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정문을 세우기 전에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라. 성복(成服)하는 날 정경(正卿)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되 제문(祭文)은 마땅히 친히 지어서 내려 보낼 것이며, 모든 관리들은 나아가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졸한 특진관 조병세의 상에 각종 비단 10필(疋), 무명과 베 각각 5동(同), 돈 1,000환(圜), 쌀 30석(石), 전칠(全㓼) 1두(斗)를 특별히 수송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졸한 조 특진관의 상에 비서 승(祕書丞)을 보내 자식들을 구휼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이어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졸(卒)한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환(閔泳煥)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충성과 절개가 빛난다. 특별히 대훈위(大勳位)에 추증하여 서훈(敍勳)하고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외부 대신 서리 협판(外部大臣署理協辦) 윤치호(尹致昊)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난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자주권과 독립의 기초를 남에게 의지한 적 없이 여유 있게 지켜온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외교를 잘못하여 조약을 체결한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찮은 소인들에게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궁실을 꾸미는 데 힘쓰게 되니 토목 공사가 그치지 않았고, 기도하는 일에 미혹되니 무당의 술수가 번성하였습니다. 충실하고 어진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염치없이 조정에 가득 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 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개인 창고는 차고 넘치는데 국고(國庫)는 고갈되었으며 악화(惡貨)가 함부로 주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두 이웃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물자를 자뢰하니 온 나라가 입은 피해는 실로 우리의 탓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새 조약을 강제로 청한 데 대하여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끝끝내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굽실거리며 따랐기 때문에 조정과 재야에 울분이 끓고 상소들을 올려 누누이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强)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치안을 도모하며,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간사한 무당들을 내쫓으며 궁방(宮房)의 사재 축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궁인(宮人)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자강의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종합적이고 자세하며 시의 적절한 것들이다."
하였다.
12월 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졸(卒)한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는 나라를 근심하여 절개를 지켜 죽었다. 충성과 의리가 모두 완전하니 특별히 대훈위(大勳位)에 추증하여 서훈(敍勳)하고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수여하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근명(李根命)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역적들을 토벌하는 일에 대해 주사(奏辭)와 차자(箚子)로 하찮은 생각을 대강 아뢰었습니다. 또 대궐 뜰에 가득 모여 연명으로 아뢸 때 여러 번 물러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간곡한 타이름이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깨달을 줄을 모르고서 날마다 번거롭게 굴기를 마치 극력 항거하는 자들처럼 하였으니, 신하의 본분으로 헤아려볼 때 무슨 죄를 받아야 하겠습니까?
지금 스스로를 탄핵하는 글에 어찌 감히 다른 문제를 덧붙이겠습니까마는, 역적을 처단하고 강제 조약을 파기하는 것은 온 나라의 한결같은 공론입니다. 부녀자와 아이들, 하인들까지도 이를 갈며 통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도 아직 유음(兪音)을 지체하기만 하여 민심이 더욱 격해졌으니, 비록 연이어 금지하고 신칙하더라도 상소는 날로 쌓일 것입니다. 이야말로 백성들의 입을 막는다는 것은 내〔川〕를 막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일월 같은 밝음으로 응당 꿰뚫어 보아 아실 텐데 무엇 때문에 확연히 결단해서 나라를 팔아먹은 이 역적들을 처단하지 않는 것입니까? 대개 이 조약은 나라의 존망과 관계되는 것이니, 여러 역적들을 처단한 다음에야 조약 또한 파기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시어 국법(國法)을 바로 세우고 중론을 따라 이 망해가는 나라의 형세를 유지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대해 이미 여러 번 비답을 내렸으니 거의 이해했을 터인데 심지어 인혐(引嫌)하듯 하니 이럴 필요가 없다. 경은 그리 알라."
하였다.
종1품 이용직(李容稙)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의 장인인 원임 의정(原任議政) 신 조병세(趙秉世)가 오적을 처단하고 새 조약을 파기하는 일에 대해 유서로 남긴 상소문의 초본이 있어 의리상 차마 없애버릴 수 없어 이에 감히 봉해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이 글을 두고 잘 살펴 결연히 소청을 준허하여,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보전할 계책을 완수하시어 죽은 사람이 유감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 특진관(趙特進官)이 남긴 상소를 보고 더욱 마음이 슬퍼진다. 어찌 마음속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가 남긴 상소에 이르기를,
"신이 늘그막에 죽지 못하여 국가의 위망(危亡)이 목전에 임박한 것을 목격하고, 병든 몸을 끌고 도성에 들어와 주사(奏辭)와 차자(箚子)를 올려 여러 번 번거롭게 해드리면서 그칠 줄을 모른 것은 혹시 일말이나마 나라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변이 끝없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마침내 외국 군대에게 구속을 당하기까지 하여 나라에 거듭 치욕을 입히고서도 이렇듯 모욕을 참고 구차히 연명한 것은 행여 폐하께서 마음을 돌리시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처럼 수치를 무릅쓰고 백관들의 연명 상소 반열에 서명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논의하는 자들이 죄과를 한층 더 씌우리라는 것을 압니다.
현재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장 눈앞에 임박하였는데도 폐하께서는 단지 4, 5명의 역신(逆臣)들과 문의해서 일을 주선하니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미 폐하 앞에서 한 번 죽음을 결단하지 못하고 심지어 저들의 위협을 받아 잡혀감으로써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자신을 욕되게 하여 스스로 크나큰 죄를 자초했으니, 이것이 어찌 죽을 날이 장차 임박하여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비단 폐하의 죄인일 뿐 아니라 절개를 지키고 죽은 신 민영환(閔泳煥)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다시 천지 사이에 서겠습니까? 신은 죄가 중하고 성의가 얕아, 살아서는 폐하의 뜻을 감동시켜 역신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강제 조약을 파기하지 못한 만큼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폐하와 영결합니다.
신이 죽은 뒤에 진실로 분발하고 결단을 내려,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 오적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논하고 코를 베서 처단함으로써 천지와 신인(神人)에게 사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각국의 공관과 교섭해서 허위 조약을 회수해 없앰으로써 국운(國運)을 회복한다면 신이 죽은 날이 태어난 날과 같을 것입니다. 만일 신의 말이 망녕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신의 몸을 가지고 젓을 담가 역적들에게 나눠주소서.
신은 정신이 어지러워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아픈 마음이 하늘에 닿아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가 계신 곳을 바라보니 눈물이 샘처럼 솟구쳐 흐를 뿐입니다. 오직 성명께서 가엾게 여기고 용서하여 죽는 사람의 말을 채용해 주신다면 종묘사직의 매우 다행한 일이고 천하의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은 피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는 것을 금치 못하며 삼가 자결한다는 것을 아룁니다."
하였다.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 김완수(金完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정2품 윤용식(尹容植)을 예식원 장례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12월 3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의정 대신(議政大臣) 민영환(閔泳煥)에게 추증(追贈)한 시호(諡號)를 고쳐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시호를 충정(忠正)으로 고쳤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충정공(忠正公) 조병세(趙秉世),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과 절개가 매우 가상하니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치제(致祭)하는 의식을 예식원에서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해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연석(筵席)에서 다 칙유하여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여 사체(事體)에 손상을 주었으니,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 이하 입시한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모두 문외출송(門外黜送)하는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 특진관(李特進官) 이하 입시한 여러 재신들에게 문외출송의 형전을 시행하라는 조칙(詔勅)을 환수하라."
하였다.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 조병식(趙秉式)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방금 삼가 고(故) 중신(重臣) 민영환(閔泳煥)의 일을 들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절개와 높은 충성심은 늠름함이 가을 서리와 같았으니, 이는 옛적에 비추어도 짝할 자가 드물 것입니다. 때문에 길 가던 사람들이 통곡을 하고 이웃 나라에서도 애석해하니, 그는 오늘날의 참된 한 사람입니다.
뒤이어 고(故) 상신(相臣) 조병세(趙秉世)가 약을 먹고 자결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사직의 신하들입니다. 우리 폐하께서는 그들을 차례로 잃었으니 또 누구와 함께 정사를 하겠습니까?
관리들과 유생들이 굽히지 않고 항의 상소를 올리고 서로를 거느리고서 죽는 것은 그럴 만한 연유가 있으니, 또한 장차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이로써 충신과 역적이 분명히 가려지고 사라지고 자라나는 것도 시간 문제이니, 통곡하며 눈물을 흘려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 폐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찌 명백히 구분하지 않고 아직도 모호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다시 곰곰이 생각해서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신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글을 올리면서 다른 문제를 덧붙이지 말아야 하겠지만, 말미에 병에 대한 실상을 진달하니 굽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명철한 성상께서 굽어 헤아려 속히 신의 현직을 파면하는 동시에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시어 공사(公私)가 다 편안하게 되기를 크게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자세히 헤아려보지 않는가? 말미에 진달한 것도 꼭 이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육군 부장(陸軍副將) 이종건(李鍾健)을 시종 무관장(侍從武官長)에 임용하고 종2품 심상익(沈相翊)을 비서감 승(祕書監丞)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학부 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이 충의와 울분이 격발하여 강개한 심정에 목숨을 끊었다. 그의 뜻이 가엾고 그의 절개가 가상하니 관판(棺板) 1부(部)를 제급(題給)하고 특별히 학부 협판(學部協辦)을 추증하며 정문(旌門)을 세워주는 은전을 시행하라. 예식원(禮式院) 낭청(郎廳)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며, 장례에 필요한 것은 궁내부(宮內府)에서 넉넉히 제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징발되어 올라온 3대(隊)의 상등병(上等兵) 김봉학(金奉學)이 근심과 울분이 격렬해져 목숨을 바쳐 절의를 세우기에 이르렀으니 더욱 가상하다. 관판 1부(部)를 제급하고 특별히 비서감 승(祕書監丞)을 추증하며 정문을 세워주는 은전을 시행하라. 예식원 낭청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고 귀장(歸葬)하는 비용을 궁내부에서 넉넉히 제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학부 주사 이상철의 장례비로 무명과 베 각각 1동(同), 돈 400원(元), 쌀 10석(石)을 특별히 제급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상등병 김봉학의 장례비로 무명과 베 각각 30필(疋), 돈 200원, 쌀 5석을 특별히 제급하라."
하였다. 두 사람이 새로 조약을 맺은 일로 인하여 분개하며 자결하였기 때문이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전 연석(筵席)에서 대화할 때 이미 더할 여지없이 일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대궐 안에 남아 아직 물러가지 않으니, 이것은 사체상 매우 온당치 못한 것이다. 원로라고 해서 전적으로 용서할 수만은 없으니,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심순택(沈舜澤)에게 문외출송(門外黜送)의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방금 처분을 내린 것은 사체를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대신을 문외출송하라는 조칙(詔勅)을 도로 거두어들이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장지(葬地)를 용인군(龍仁郡)에 새로 정하였다고 하니 내부(內部)에서 경계를 정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학부(學部) 명령 제1호, 〈학교감독규정(學校監督規定)〉을 공포하여 시행하였다.
【교장(校長), 교관(敎官), 교원(敎員) 및 학도(學徒)들은 정사(政事)에 관여할 수 없으며 또 서로 결탁해서 제멋대로 휴학을 할 수 없다. 규례 조항을 위반함으로써 선동하는 데에 이르면 상당한 징벌에 처한다.】
【원본】 50책 46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10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법부령(法部令) 제5호, 〈법관양성소 감독규정(法官養成所監督規定)〉을 공포(公布)하여 시행하였다. 【조규(條規)는 위와 같다.】
【원본】 50책 46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10면
【분류】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사법-법제(法制)
12월 5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근명(李根命)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엊그제 연석(筵席)에서 감히 성토해야 한다는 의리를 진달하였는데 아직 처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적들을 처단하지 않으면 나라가 기울어져 망하게 될 기미가 당장 눈앞에 닥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윤허하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신이 번거롭게 하고 소란을 피운 죄를 다스림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비답과 전유(傳諭)로써 거듭 말하여 더는 여지가 없으니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다. 이로써 인혐(引嫌)하는 것도 옳지 않으니 경은 번거롭게 굴지 말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죽지 못한 신하 곽종석(郭鍾錫)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음력으로 지난달 30일에 지방관이 전하는 그달 9일 비답을 내린 것을 받아보니, 신에게 조정에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절을 하고 공손히 비답을 받고 나서 그날로 5리 밖의 민가에 나가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길을 떠나 10리쯤 가서 길가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일전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폐하를 뵈었는데, 우리의 외부와 내부를 비롯한 여러 부의 매국 적신(賊臣)들과 부동(符同)하여 보호 조약을 맺도록 협박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외부의 조인까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게 무슨 변입니까? 신은 물론 우리 폐하께서 확고하게 견지하여 적신들의 위협과 공갈에 비준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다만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는 것은 하늘의 법인 동시에 땅의 의리로서 영원히 마멸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엎어지며 걸어서라도 한 번 폐하를 뵙고 만에 하나라도 뜨거운 심정을 토로하려고 하였으나 발이 부르트고 숨이 헐떡거려 빨리 갈 방도가 없습니다. 겨우 옥천(沃川) 땅에 당도해서 들으니, ‘폐하의 결심이 확고히 정해져 종묘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였고 죽으려다가 살아난 듯하여, 이것은 한 마디로 나라를 일으킨 것이라고 할 만하며 또 폐하의 마음이 한결같다고 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늘에 있는 조상들의 영혼이 바야흐로 기뻐하며 위에서 말없이 도울 것이고 온 나라의 생령들이 바야흐로 고무되어 아래에서 다투어 분발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천하에 공법이 있는 만큼 영국이나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여러 대국들이 필경 같이 분해하면서 일제히 성토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킨다면 어찌 당초에 협약을 체결한 의리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천하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신은 절대로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만 번 죽을 각오를 하면서 가만히 생각하기를, ‘이제라도 빨리 결단해서 명백한 명령을 내려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 등 여러 역적들의 머리를 거리에 내걸어서 매국(賣國)한 자들에 대한 떳떳한 법을 바로세우며, 여러 나라 공관에 성명을 내고 크게 담판을 열어 천하의 공법으로 단죄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잠시라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주저하며 위축된다거나 잠시라도 구차하게 기다린다면, 폐하께서는 아무리 자기를 보전하려고 해도 높아봤자 안남왕(安南王)처럼 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며, 청성(靑城)이나 오국(吳國)과 같은 운명001) 이 차례차례 눈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저 일본이 맹세를 저버리고 신의를 배반하며 오만 가지로 기만하고 희롱하는 것을 폐하께서는 실컷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들의 오늘의 감언이설(甘言利說)이 내일에는 독인 것이니, 폐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신은 쓰러지고 넘어지며 가느라 대궐에 이르는 날이 오히려 늦어져 이 마음을 폐하께 아뢰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에, 먼저 이 상소를 마련하였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대충 적어 사람을 보내 속히 정원에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우리 폐하께서는 우리 2,000만 백성들과 함께 종묘사직을 위해 죽고 하늘의 도리와 땅의 의리를 위해 살면서, 일본의 신복이나 포로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내린 비답도 또한 보아야 할 것이니, 그대는 반드시 짐작하여 헤아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초야(草野)의 신하 송병선(宋秉璿)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겉으로는 유지한다는 명색에 핑계대고 속으로는 완전히 집어삼킬 계책을 품고서 방자하게 와서 꾀어내기를 마치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고 빈 고을을 타고 앉듯이 하였으며, 군사들로 대궐을 포위하고서 협박하여 조약(條約)을 체결하였다고까지 하니, 무엄하고 의리가 없기가 어찌 이처럼 극도에 달할 수 있겠습니까? 소문이 들끓고 인심이 불안합니다. 신(臣)은 이 소식을 듣고부터 넋이 빠져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아! 대체로 근년 이래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없고 한 번도 대의(大義)를 가지고 꺾어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형상을 허물고 우리의 복장까지 고치게 되었으니 애석해할 것이 없습니다. 저들의 마음에 우리나라가 없은 지는 참으로 이미 오래입니다. 오늘날의 변고는 돌아보건대 우리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원인을 따져보면 대체로 간사한 무리들이 몰래 서로 결탁해서 폐하의 총명을 가리고 자기들의 사적인 요구를 성취했지만 폐하께서 끝내 깨닫지 못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게 되고 백성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고인(古人)이 이른바 통곡하고 눈물을 흘려도 부족할 것이라고 한 것도 오히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말이 되었으니, 삼천리 강토의 500 년 내려오는 종사(宗社)에 이처럼 개벽 이래 처음 만나는 변고와 씻기 어려운 수치가 있으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같이 초야의 변변치 못한 사람도 이미 일찍이 스스로 죽지 못하고 숨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바로 폐하의 은택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이러한데도 끝내 온 몸에 가득한 피끓는 심정을 폐하 앞에서 토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신이 폐하를 저버리는 것이고, 폐하를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열성조(列聖朝)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이처럼 본분을 벗어나서 주벌 받을 죄를 범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아! 고금천하에 죽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영원히 존재한 나라도 없었습니다. 원수에게 머리를 숙여 요행히 살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군신 상하가 한마음으로 죽을힘을 다하여 사직(社稷)에 부끄러움 없이 한 목숨 바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국력이 비록 몹시 피폐하였다고는 하지만 선왕(先王)의 강토가 예전대로이고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며 나라와 운명을 같이할 자들도 있으며 군민(軍民)과 이서(吏胥)들 중에 선왕의 덕을 노래하면서 폐하께 보답할 것을 생각하는 자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저들이 만일 기필코 제멋대로 무례하게 굴려고 한다면 300주(州) 중에서 어찌 피눈물을 흘리며 몽둥이를 잡고서 폐하께 닥칠 어려움을 막을 자가 없겠습니까? 애초에 저들과 수호(修好)를 맺는 것에 대해 온 나라 신민(臣民)들은 분개했었습니다. 설사 수호를 맺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의리로 맞아주고 신의를 지켰다면 저들이 아무리 헤아릴 수 없이 사납고 탐욕스럽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군사로 위협하고 우리를 이처럼 기만하였겠습니까?
저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5개 조항은 폐하께서 나라를 위해 죽기를 맹세하고 시종일관 윤허하지 않은 것이며, 이른바 조인되었다는 것은 위조 문건을 사적으로 주고 빼앗고 한 것이지 나라의 조약으로 공정하게 결의(決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이것을 쥐고서 각국(各國)으로 왕래하는 사신들에게 증명한다면 원래 공의(公議)가 있는 만큼 당일 협박으로 체결된 조약은 자연히 폐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저들이 이렇게까지 억지를 썼기 때문에 앞서 이른바 몰래 서로 결탁한 무리들을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국노를 어찌 잠시라도 천지(天地) 간에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나라의 형률을 시행함으로써 국법(國法)을 펴고 울분을 씻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이미 무너진 나라의 기강이 조금이나마 진작될 수 있고 이미 동요된 인심이 조금이나마 진정될 수 있으며, 위태로움이 거의 안정되고 혼란이 거의 다스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폐하께 있어서 전환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이니 성명(聖明)께서는 결단을 내려 시행하시되, 의심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참으로 가납(嘉納)할 만하니 경은 이를 헤아리라."
하였다.
12월 6일 양력
비서감 경(祕書監卿) 이우면(李愚冕)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정2품 김병익(金炳翊)을 비서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12월 7일 양력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심순택(沈舜澤)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지난번 어전(御前)에서 외람되이 근심과 원통한 마음을 아뢰고 기꺼이 무람없이 행동하는 죄를 범하고서 교지(敎旨)를 받들기까지 하여 도성문 밖으로 쫓겨나 엎드려 오직 엄벌만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휩싸여 몸 둘 바를 몰랐었습니다.
아! 보잘것없는 신이 아직도 이처럼 구차하게 연명해 나가면서 끊임없이 호소하는 것이 어찌 다른 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우리 폐하의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둘째는 우리 종사(宗社)를 보존하며, 셋째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자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폐하의 죄인이고 종사의 죄인이며 백성들의 죄인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죽음을 무릅쓰고 기어이 폐하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폐하의 신민(臣民) 중에 몇 명의 역적들이 아직도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 것에 이를 갈며 눈을 흘기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비등된 울분이 진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폐하께서 살리기 좋아하는 덕의(德義)를 가지고 관대한 은전으로 그들을 보전하려 하더라도 그것이 천하의 공의(公議)에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윤허를 받지 않고서는 감히 그만둘 수 없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나라의 형률을 바로잡아 여론의 분한 마음이 풀리게 해 주시고, 강제로 체결된 조약을 폐기함으로써 우리의 종사와 백성들을 보전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차례의 비답과 칙유(勅諭) 그리고 어전(御前)에서 말할 때 더욱 장황하게 말해주었다. 짐(朕)은 내 마음을 이미 다 펼쳐 보였고 경도 숨김없이 말하였는데 뜻밖에 또 올라온 소장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인의(引義)한 것은 더욱 부당하니, 경은 이를 양해하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근명(李根命)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을 하여 아뢰기를,
"신들은 역적들을 토벌하고 조약을 폐기하는 일로 7차례나 연명으로 호소하였고 계속해서 연석(筵席)에서도 아뢰었지만 성의가 부족하고 말이 졸렬해서 폐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했으므로 서로 돌아보면서 근심스럽고 통분해하였으며 저도 모르게 창자가 찢어지고 가슴이 막히는 듯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단 하루라도 나라를 보존하자면 역적을 주벌하지 않을 수 없고 조약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들은 만 번 도륙을 받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차마 종사(宗社)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대궐 뜰에 나와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시원스럽게 오적(五賊)을 효수(梟首)하여 서울 안 네거리에 높이 매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外部)에 명하여 강제로 체결된 조약을 폐기시킴으로써 뭇사람들의 울분을 씻고 나라의 형세를 안정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번 거듭 하유(下諭)하였는데도 또 이처럼 지나친 태도를 보이니, 이것이 어찌 위아래가 서로 믿어주는 도리이겠는가? 경들은 노숙한 신하로서 어찌 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아뢴 것은 내가 자세히 생각해볼 것이니, 경들은 이를 헤아리고 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신들은 몇 차례나 상소를 올려 호소하였고 지금 또 정청한 데 대해 곧 삼가 자세히 생각해보겠다는 비지(批旨)를 받들었습니다.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강제로 체결된 조약을 폐기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역적들을 주벌하지 않으면 나라에 법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들이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감히 그만둘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에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거듭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과감히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처분을 내려 종사를 보존하고 신민(臣民)을 위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금 전에 칙유하는 비답을 내려 남김없이 모두 일러주었는데 어찌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이처럼 번거로움을 되풀이하는가? 경들이 쇠약한 몸으로 한지(寒地)에 있기 때문에 마음이 몹시 편치 않다. 속히 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의리가 있고 공의(公議)가 같아서 대신(大臣)들과 여러 신하는 모두 이미 물러갔는데 혼자서 전정(殿庭)에 남아 줄곧 버티고 있으니, 이 무슨 괴이한 태도인가?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 윤태흥(尹泰興)을 법부(法部)로 하여금 잡아다 징계하고 처분하게 하라."
하였다.
초야(草野)의 신하 전우(田愚)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생각건대,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국가를 유지하거나 변란을 만났을 때 강상(綱常)을 근본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강상이란 천지(天地)의 기둥이며 인민(人民)의 몸체입니다. 그러므로 강상이 서면 국가가 안정되고 황실(皇室)의 존엄이 유지되며, 강상이 무너지면 국가가 위태로워지고 황실도 위태로워지니, 근자의 변고를 가지고 보더라도 손바닥에다 올려놓고 보듯 환히 알 수 있습니다.
저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후로 만대(萬代)를 두고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를 지고 있었지만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병력이 진작되지 않아서 미처 도읍을 불태우고 종자를 멸살시키지 못하였지만, 군신 상하가 어찌 일찍이 한 순간인들 마음속에서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일본 대사(日本大使)가 청한 것이 바로 우리를 저들의 신하로 만들자는 것인데도 오히려 평화가 영원해지고 황실이 존엄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비록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지 알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우리의 바른 예의(禮義)를 버리고서 저 나라의 힘에 의지한다면 평화가 결코 영원할 수 없으며 황실이 결코 존엄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것이 폐하께서 재삼 준엄하게 거절하면서 차라리 종사(宗社)를 위해 죽을지언정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고 이르기까지 한 까닭입니다.
아! 위대합니다. 이것이 실로 천하 고금의 영원한 정리(正理)입니다. 멀고 가까운 데 있는 선비들과 백성들로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용기와 용맹이 솟구쳐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나라가 오늘날 굽혔던 것을 펴고 화를 복으로 만들 기회라고 합니다. 폐하의 백성된 사람으로서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참혹한 죽음을 당할지언정 누군들 감히 목숨이 두려워 의리를 잊고서 기꺼이 저들의 노예가 되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로 더욱 성의를 다해 받들어 행하면서 죽음이 닥쳐도 변치 않아야 할 텐데 지금 사사로이 상호 인준(認準)하였습니다. 이것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입니다. 저 무리들이 만일 강상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칠지언정 따를 수 없다고 한 군부(君父)의 가르침이 있는데도 신하로서 머리를 굽혀 좋다고 수락하는 변을 빚어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억조 창생이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않은 자가 없어 모두 역적들의 살점을 씹어 삼키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당일 날인한 여러 역적을 효수(梟首)하여 궁문(宮門)에 매닮으로써 귀신과 사람들의 울분을 씻어 주소서. 그리고 일본 대사가 맹약을 저버리고 법률을 초월하여 무력을 가지고 위협하면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를 천하에 공포하여 함께 배척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뛰어나고 현능(賢能)한 선비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그들과 함께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힘쓰고, 원수를 갚기 위해 괴로움을 참으면서 강상을 추켜세우고 맹세코 수치를 씻어야 할 것입니다. 요행으로 성공하면 종사와 신민(臣民)의 복이며, 불행하게 실패하더라도 정의를 얻고 죽기에는 충분하니 어찌 굴욕적으로 구차히 사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한 번 굴욕을 받으면 앞으로 종사를 반드시 보존할 수 없고 생민(生民)들을 반드시 온전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신 한 사람의 말일 뿐 아니라 실로 온 나라 만백성의 말이기도 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선뜻 생각을 움직여 크게 노기를 떨쳐 속히 나라의 형률을 바로잡으시고 천명(天命)을 돌리기 바랍니다. 만일 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청컨대 신의 목을 베는 것으로써 역적들에게 사죄하도록 한다면 신은 실로 달게 여기고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진달한 말은 가상히 여기지만 전후로 여러 상소에 대한 비답들도 서로 참작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觀察使) 이도재(李道宰)를 전라북도 관찰사(全羅北道觀察使)에, 육군 정령(陸軍旌領) 한진창(韓鎭昌)을 충청남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8일 양력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임시로 의정부 의정 대신(議政府議政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 윤용식(尹容植)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정2품 조명교(趙命敎)를 예식원 장례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시종원 경(侍從院卿) 민영휘(閔泳徽)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또한 사람의 몸, 사람의 본성을 대략 갖추었으므로 차마 조약 체결에 조인을 한 역적들과 같은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날마다 두 대신(大臣)이 와서 같은 목소리로 함께 호소하고 지루하게 항명(抗命)하는 것이 매우 황송하지만 충성을 위한 울분이 치밀어 오른 이상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파면을 시켜 꺾고 억누르려 하지만 신은 근심하고 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진실로 무수히 많았지만 이러한 무리들은 지나간 오랜 역사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국가 존망의 위기가 오늘날에 있는데도 이 무리들은 오히려 천지(天地) 간에서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즉시 그 죄를 밝히고 천하에 공포하지 않는다면 신은 국정(國政)을 더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에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널리 살펴 이번의 이 여러 역적들을 속히 사패(司敗)에 명하여 해당 형률(刑律)을 가(加)함으로써 여론의 분한 마음을 풀어 주고 천하에 사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충성을 위한 울분이 치밀어 올라 진실로 이와 같이 하였겠으나 여러 차례 칙유하는 비답을 내린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 이시영(李始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많은 어려움을 통하여 나라를 흥기시키고 깊은 근심을 통하여 성덕(聖德)을 계발시키는 법입니다. 지금 극도로 위태로운 형세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위태로움을 안전하게 만들 기회 또한 일찍이 여기에 달려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 가지 기미를 깊이 체찰하시고 때가 아니라고 해서 답습하고 고식적으로 하지 마시고, 또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스스로 그만두지 마소서.
지금부터 정신을 가다듬고 패한 일을 수습하며 군신 상하가 착실하게 잘 다스릴 것을 도모하여 서로 경계하고 조심해서 먹고 쉬는 것이 해이하게 되지 않는다면 국가가 자연히 부강해질 날이 머지않을 텐데, 폐하께서는 무엇이 두려워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정교(政敎)를 쇄신하면 필시 그것이 점차 추진될 것입니다. 무능하고 비루한 사람을 도태시키는 것은 마땅히 신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니, 속히 신의 벼슬을 체차시키고 적임자를 선발해서 맡기면 공사(公私) 간에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미에 진달한 것은 참으로 취할 만하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
하였다.
12월 9일 양력
칙령 제51호, 〈도량형법 실시국 직제(度量衡法實施局職制)〉, 제52호. 〈농상공부 도량형 제조소 직제(農商工部度量衡製造所職制)〉, 제53호, 〈농상공부 도량형 임검원 복식(農商工部度量衡臨檢員服式)에 관한 건〉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육군 부장(陸軍副將) 이윤용(李允用)을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에, 육군 정령(陸軍正領) 윤철규(尹喆圭)를 경무사(警務使)에, 정2품 민형식(閔炯植)을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김낙헌(金洛憲)을 법부 형사국장(法部刑事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정3품 서병규(徐丙珪)를 농상공부 상공국장(農商工部商工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12월 10일 양력
태의원(太醫院)에서 올린 구주(口奏)에,
"효혜전(孝惠殿)에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 대상(大祥)을 치르는 것은 친행(親行)하겠다고 이미 명(命)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겨울 날씨가 고르지 않고, 더구나 지난번 편찮으시던 끝인데 수고로이 거둥하시면 건강을 돌보는 방도에 어긋날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모두 명을 취소하고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의 정성이 이미 이와 같으니, 부득이 억지로 따르기는 하겠다만 인정과 예의에 있어 매우 서운하다. 조상식, 석상식, 주다례는 향관(享官)을 보내어 거행하되 백관(白官)이 참석하고, 대상을 치르는 것은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하는 것으로 마련하되 백관이 참석하라. 제관(祭官)은 그대로 쓰겠다."
하였다.
종1품 이근수(李根秀)를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 이근수(李根秀)가 아뢰기를,
"효정 왕후(孝定王后)를 부묘(祔廟)할 길일을 잡아 아뢴 것에 대하여 방금 재가(裁可)를 내리셨습니다. 삼가 을축년(1865), 신사년(1881), 정사년(1857), 무인년(1878), 경인년(1890)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대상(大祥)을 치른 다음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합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효정 왕후를 부묘할 때 도감을 설치하는 것은 대상을 치른 다음에 거행할 것을 취품(取稟)한 데 대해 그대로 거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은 효혜전(孝惠殿)의 상제(祥祭)를 치르고 나서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차출(差出)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1일 양력
효혜전(孝惠殿)의 상제(祥祭)를 섭행(攝行)하였다.
효혜전(孝惠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을 임명하여 부묘도감 도제조(祔廟都監都提調)로 삼고, 장례경(掌禮卿) 이근수(李根秀),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극(李載克), 특진관(特進官) 윤용식(尹容植), 정2품 성대영(成大永)을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로 삼았다.
효혜전(孝惠殿)의 상제(祥祭)를 치를 때의 향관(享官), 산릉(山陵)의 수릉관(守陵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수릉관 이재성(李載星), 향관 이완용(李完鎔)·이명직(李明稙)·서긍순(徐肯淳)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정3품 이상재(李商在)를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농상공부령(農商工部令) 제14호, 〈도량형기 판매 규칙(度量衡機販賣規則)〉을 공포(公布)하여 시행하였다.
12월 12일 양력
칙령 제54호, 〈대한국 적십자사 관제와 규칙〔大韓國赤十字社官制及規則〕〉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본사는 대황제 폐하의 지극히 높고도 인자하시며 거룩한 덕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적십자사는 대체로 전시 및 평상시의 상한 사람과 앓는 사람을 보살펴서 치료하는 데 힘씀으로써 그들의 고충을 덜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황태자빈 전하 및 황족의 존중과 보호를 받는다. 직원은 총재(總裁)로 황족 1인, 사장(社長)으로 칙임관(勅任官) 1인, 부사장(副社長)으로 칙임관 2인, 교육장(敎育長)으로 주임관(奏任官) 1인, 사무장(事務長)으로 주임관 1인, 교관(敎官)으로 주임관 3인, 사무관(事務官)으로 주임관 3인, 교원(敎員)으로 판임관(判任官) 3인, 사무원(事務員)으로 판임관 3인, 간호졸 감원(看護卒監員)으로 판임관 1인, 간호부 감원(看護婦監員)으로 판임관 1인이다. 본년 칙령 제47호, 〈대한 적십자사 규칙(大韓赤十字社規則)〉은 폐지한다.】
【원본】 50책 46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12면
【분류】구휼(救恤)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
의정부(議政府)에서, ‘광무(光武) 10년도 총예산을 세입(歲入) 총액 748만 4,744원, 세출(歲出) 총액 796만 7,388원으로 논의를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12월 13일 양력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심순택(沈舜澤)에게 칙유(勅諭)하기를,
"일전의 처분은 사체(事體)가 있기 때문에 내렸다가 곧이어 환수하였는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떠도는가? 날씨가 차서 더욱 염려가 되니, 경은 깊이 헤아리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대신 임시서리(議政府議政大臣臨時署理)인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임시로 외부 대신(外部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 이근수(李根秀)가 아뢰기를,
"충정공(忠正公) 조병세(趙秉世)와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절(忠節)이 가상한 만큼 마땅히 특별한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니, 치제(致祭) 의식은 예식원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여 마련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삼가 역대의 전례(前例)를 상고해 보니, 상사를 들은 날과 장례를 지내는 날, 백일, 돌이 되는 날, 상복을 벗는 날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상사를 들은 날에는 이미 치제하였으니 장례를 지내는 날과 백일, 돌이 되는 날, 상복을 벗는 날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육군 정령(陸軍旌領) 이희두(李熙斗)·이병무(李秉武)를 육군 참장(陸軍參將)에 임용하였다.
육군 참장(陸軍參將) 이희두(李熙斗)를 군부 협판(軍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육군 참장 권태익(權泰益)을 군부 군무국장(軍部軍務局長)에 보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서상교(徐相喬)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14일 양력
전 찬정(前贊政) 홍만식(洪萬植)이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 체결된 데 분개하여 약을 먹고 죽었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재신(宰臣)은 과묵한 자품과 신중하고 성실한 뜻을 지녔는데 시국이 위태로워짐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통분한 마음으로 강개하여 마침내 자살하였으니 매우 애통스럽다. 졸(卒)한 종2품 홍만식의 상(喪)에 장례 비용을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넉넉히 보내주게 하고, 특별히 종1품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의 직(職)을 추증하라. 예식원(禮式院)으로 하여금 정려(旌閭)를 내려 주는 은전과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게 하되, 시장(諡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며, 비서원승(祕書院丞)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군부협판 육군참장(軍部協辦陸軍參將) 이희두(李熙斗)에게 육군연성학교 교장(陸軍硏成學校校長)을 겸임(兼任)하도록 하였으며, 육군 참장 이병무(李秉武)를 군부 교육국장(軍部敎育局長)에 보임하였다.
전선사 장(典膳司長) 김대진(金大鎭)을 봉상사 장(奉常司長)에, 종2품 김종원(金宗源)을 전선사 장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의정대신임시서리 외부대신임시서리 학부대신(議政府議政大臣臨時署理外部大臣臨時署理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이 아뢰기를,
"올해 11월 17일에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 이미 성립되었으니, 각국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나라 공사(公使)들을 모두 즉시 소환한다는 내용으로 신칙(申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죽지 못한 신하 곽종석(郭鍾錫)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부르튼 발을 끌고 병을 앓으면서 가다가 수원(水原)에 당도하여 삼가 폐하의 비답을 받들었습니다. 또 근자의 일보(日報)를 통해서 대체적인 조약 체결 전말과 역적들의 정상(情狀) 그리고 대료(大僚)와 여러 관원이 연명으로 올린 글과 여러 차례 호소한 것들을 살펴보니, 목숨을 내놓고 충성을 표한 것이었지만 폐하의 비답은 모두 참작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처리하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길거리나 항간(巷間)의 아녀자들까지도 탄식하고 비분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고 모두들 살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신은 넋이 빠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두려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비록 참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하교를 받고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또 이미 반복해서 누차 참작해 보았지만 결국 폐하께서는 역적들에게 속았고 역적들은 또한 일본 사람들에게 속았을 따름입니다.
저들이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잘잘못을 의논하여 결정한 것으로 말하면 천지신명이 증명을 한 것처럼 금석(金石)같이 견고한 것이었는데 곧 취지가 점차 변하고 말마디가 차츰 고쳐지면서 날이 갈수록 마치 불로 쇠를 녹이듯 급하게 굴더니 오늘날에 와서는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각부(各部)에 고문(顧問)을 두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정사(政事)를 빼앗고 사령관(司令官)을 주둔시키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신민(臣民)을 부려먹었습니다. 지금 또 통감(統監)을 설치하여 우리나라를 저들의 영지(領地)로 만들려고 합니다.
대체로 토지(土地)와 인민(人民)과 정사(政事)는 나라의 삼보(三寶)인데 우리가 그중 한 가지도 가지지 못하고 모두 저들에게 넘겨준다면 폐하께서는 장차 무엇을 놓고 임금 노릇을 한단 말입니까? 체결된 조약에서 이른바 ‘황실을 엄히 존중한다.’고 한 것이 설사 일단 이룩된 채 변함이 없다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마치 로마〔羅馬〕 말세(末世)의 교황(敎皇)이나 안남국(安南國) 근자의 국왕처럼 한갓 허호(虛號)나 끼고 앉아있는 데 불과할 것입니다. 신의 과도한 생각에는 저들의 맹약을 저버리는 배신 행위는 또 이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듯합니다. 비록 오적(五賊)으로 말하더라도 저들은 필시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황실(皇室)이 헤아릴 수 없는 참화를 입고 저들 자신도 즉시 참혹하게 처형당하리라 여기므로 이 때문에 임시 방편으로 당장의 화를 막는 것을 계책으로 삼는 것만 함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일본인들이 바라는 대로 되어 일이 일단 정해지면 황실이 구차한 안녕을 바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 오적들도 쓸모없게 되어 길거리에 내버려 짓밟히거나 불타 없어지게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찌 일본의 조정에 한 치의 공로나 단 하루의 영예나마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폐하를 위하여 통곡하였고 또 오적을 위해서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신이 반복해서 참작해보고도 아직도 감히 알지 못하는 점입니다. 그 밖의 것은 대료와 여러 신하의 소장(疏章)에서 이미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성명(聖明)의 이해를 얻지 못하였으니 성의가 부족하고 말이 졸렬한 신으로서 더욱 어떻게 폐하의 마음을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단지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예컨대 원로(元老)와 두 세 명의 경재(卿宰)들이 절개를 지켜 죽고 의리를 위해 죽은 데 대해서는 폐하께서 이미 슬퍼하시며 시호(諡號)와 부의(賻儀)를 내려주는 은전으로 날마다 성대하게 하여 귀신을 울리고 떳떳한 도리를 떨쳤습니다. 이에 원로와 여러 재상들, 충직한 신하나 뜻있는 선비로서 다투어 하나같이 통곡하면서 충성과 울분을 토한 자들이 번번이 제멋대로 법을 어기는 일본 군사들에게 포박되고 구속되고 포로가 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는데도 폐하께서는 막연하게 보지 못한 것처럼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생을 마치게 할 뿐입니다. 심지어 온 세상이 이른바 오적이라는 자들을 아규(亞揆)에 승서(陞敍)하기도 하고 공공연히 구직(舊職)을 맡기기도 하니, 바람과 구름이 서로 긴밀하듯이 군신(君臣)이 서로 뜻이 맞게 잘 만난 듯합니다. 이것은 상벌(賞罰)을 주는 데 기준이 없는 것이고 취사(取捨)하는 데 뒤섞어놓은 것입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폐하께서 과연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리석은 신이 더욱 어떻게 이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폐하께서 부르는 비답을 받들었고 또 종사(宗社)가 위급한 때에 감히 처자가 있는 집에 편안히 누워있을 수 없어서 정신없이 허둥지둥 달려와 어제 도성 밖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천하에 해볼 만한 일이 없고 신의 한 몸이 죽을 곳도 없습니다. 단지 한 번 폐하를 뵙고 폐하께서 지니고 있는 뜻에 대하여 물어보고 싶습니다. 만일 천하의 일이 여기에서 끝난다면 폐하께서는 신이 소용없을 것이고 신 또한 폐하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구렁텅이에 빠져 죽는 것으로써 위로 선왕(先王)과 선성(先聖)에게 아뢸 수 있을 뿐입니다. 창황하고 정신이 흐릿하여 무어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가 처분만을 기다리니 성명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앞서 올린 상소에 진달한 것을 어찌 각성해서 보지 않았겠는가? 전에 내린 비답에 하유한 것 또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추운 날씨에 분주하게 길을 오자니 어찌 몸이 상하지 않았겠는가? 참으로 염려스럽다."
하였다.
12월 15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군인(軍人)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병서(兵書)에만 전념하게 함으로써 위급한 때에 쓰려는 것이다. 근래에 군기(軍紀)가 해이해져서 군인들이 본분을 지키지 않고 망녕되게 조정의 잘잘못을 논의하니, 입법(立法)의 본의에 크게 어긋난다. 이제부터 정부에 책임 있는 군부 대신(軍部大臣)을 제외하고 안으로는 시종무관(侍從武官) 배종무관(陪從武官)으로부터 밖으로는 부대(部隊)의 장졸(將卒)에 이르기까지 분쟁을 일으키거나 시비하지 말라. 규례를 위반하고 제멋대로 굴면서 범하는 자가 있으면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 이상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각기 유념하고 뒤늦게 후회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16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궁인(宮人) 하씨(河氏)는 다섯 임금을 두루 섬겼고 나이가 이미 팔순이 지나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지난 시기 평가할 만한 공로도 많았다. 지금 죽었다고 하니 슬픔을 금할 수 없다. 관판(棺板) 1부(部)를 골라 보내고 상장(喪葬)의 비용은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넉넉하게 거행하게 하며 성복(成服)하는 날 봉시(奉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전 참찬(前參贊) 곽종석(郭鍾錫)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협박으로 체결된 조약을 폐기하는 처분이 없고 역적들은 아직도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있으며, 종사(宗社)와 백성(百姓)들이 아득히 옮겨가려는 데도 폐하께서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시며, 대궐을 지척에 두고 신을 한번 가까이 불러서 의견을 물어주시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을 텐데 폐하께서는 또한 내버려둔 채 가타부타 말이 없으시니, 이것은 폐하께서 천하의 일에 대해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을 벼슬에 나오게 하고 물러가게 하는 일이 저들의 자유에 맡겨졌으니 폐하께서 지난날에 부르신 것은 우연일 뿐이고 반드시 나오게 하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 신이 폐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서도 어려운 때를 만나서는 일찍이 폐하를 위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방비하지 못하여 나라가 쓰러지는 판국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종사가 뒤흔들리고 강역(疆域)이 쇠퇴해져서 폐하의 위태로움은 누란지위(累卵之危)보다 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조병세(趙秉世)와 민영환(閔泳煥) 등 여러 신하들의 한결같은 죽음에 보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은 여기에 이르러 의분(義分)이 땅을 쓸 듯이 없어졌습니다. 다만 죽어 저승에 가는 것으로써 이 세상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뿐이니 폐하께서도 더 이상 신을 가엽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떠나갈 때가 되어 글을 올리니 눈물이 옷자락을 적십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는 불쌍히 여겨 살펴주소서. 강연(講筵)의 허함(虛銜)으로 말하면 그대로 외람되이 지니고 있음으로 인하여 성덕(聖德)에 결코 누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관직을 삭탈하시어 이 세상의 신하된 자로서 너무도 형편없는 자들을 경계시키소서. 이것이 누를 수 없는 구구한 소원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상소를 통해 그대가 성문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절히 고대하던 터라 기쁨에 넘쳐 이제 조석(朝夕)으로 경연에서 응대하려고 하였는데 지금 보내온 글을 보니 갑자기 기대가 꺾여 나도 모르게 놀라서 매우 당혹스럽다.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려 즉시 들어옴으로써 옆자리를 비워놓고 간절히 기다리는 짐의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의정부의정대신임시서리 학부대신(議政府議政大臣臨時署理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현(權重顯),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신들이 성조(聖朝)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황상(皇上)께서 특별히 더 관대하게 우선 폐하의 위엄을 늦춘 것은 참으로 하해(河海)와 같은 도량으로 너그럽게 포용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들이 버젓이 묘당(廟堂)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요즘 상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서 탄핵(彈劾)하고 논열(論列)한 것들은 신들이 스스로 폄하(貶下)한 것과 크게 다르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宗社)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人民)들은 노예로 되고 강토는 영지(領地)로 되었다고 인정하는데 이렇듯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 무리들이 과연 새 조약의 주지(主旨)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것이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 흐리멍덩하게 하는 말이니 상대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철저하게 힘껏 해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하면, 독립(獨立)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帝國)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皇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국교 문제에서 감정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올 때에 아이들과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중대한 문제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11월 15일 두 번째로 폐하를 만나본 뒤에 심상치 않은 문제를 제출하니, 폐하께서는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고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셨습니다. 이튿날 16일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및 신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은 대사가 급박하게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이 우관(寓館)에 가서 모였고, 경리원 경(經理院卿) 심상훈(沈相薰)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박제순은 주둔한 공사(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의 급박한 요청에 의하여 혼자서 이 주관(駐館)에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 어제 제출한 문제를 가지고 문답을 반복하였으나 신들은 끝내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어 파하고 돌아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뵙고 응답하였는데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아뢰었고 이어 아뢰기를, ‘내일 또 일본 대사관에 가서 모여야 하는데 만약 그들의 요구가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라면 신들도 응당 오늘 대답한 것과 같이 물리쳐 버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왔습니다.
이튿날 17일 오전에 신 등 8인(人)이 함께 일본 대사관에 모였는데, 과연 이 안건을 가지고 쟁론한 것이 복잡하였습니다. 권중현은 ‘이 문제는 비록 대사가 폐하께 아뢰었고 공사가 외부(外部)에다 통지하였지만 우리들은 아직 외부에서 의정부에 제의한 것을 접수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당장 의결(議決)할 수 없으며 또 중추원(中樞院)의 새 규정이 이미 반포된 만큼 반드시 여론을 널리 수렴해야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는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 정치(專制政治)인데 어찌하여 입헌 정치(立憲政治)의 규례를 모방하여 대중의 의견을 수렴합니까? 나는 대황제(大皇帝)의 왕권이 무한하여 응당 한 마디 말로써 직접 결정하는 것이지 허다한 모면하려는 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게 전통(電通)을 하여 곧바로 폐하를 만나볼 것을 청하였으니, 여러 대신(大臣)은 함께 대궐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여러모로 극력 반대하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먼저 의정부 내의 직소(直所)에 와서 기다렸으며, 일본 공사는 관원을 데리고 뒤따라와서 휴게소에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다가 신들이 입대(入對)하여 폐하께 각기 경위를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폐하께서는 몹시 괴로워하시며 이후의 조처에 대해 여러 번 신중히 하문(下問)하셨으나, 신들은 다만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말로써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자 폐하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그렇지만 감정을 가지게 할 수는 없으니 우선 늦추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이에 이완용이 아뢰기를, ‘이 일은 나라의 체통과 관련되는데 폐하의 조정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누가 감히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군신(君臣)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으니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숨김없이 다 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사가 찾아온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며 공사가 와서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안건의 발락(發落)하는 것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군신 간에 서로 묻고 대답하는데 다만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다 밀어치우니, 사체(事體)를 가지고 논한다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겠지만 이 또한 형식상 처리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여덟 사람이 아래에서 막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 대사가 폐하를 나아가 뵐 것을 굳이 청하는데 만약 폐하의 마음이 오직 한 가지로 흔들리지 않는다면 국사(國事)를 위하여 진실로 천만 다행일 것이지만, 만일 너그러운 도량으로 할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폐하께서 하교하신 것은 없었으며 여러 대신도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이완용이 또 아뢰기를, ‘신이 미리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할 수 없이 허용하게 된다면 이 약관(約款) 가운데도 첨삭(添削)하거나 개정(改正)할 만한 매우 중대한 사항이 있으니, 가장 제때에 잘 헤아려야 할 것이며 결코 그 자리에서 구차스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토오 히로부미 대사도 말하기를, 이번 약관에 대해서 만일 문구를 첨삭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응당 협상하는 길이 있을 것이지만, 완전히 거절하려고 하면 이웃 나라간의 좋은 관계를 아마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그 약관의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바랄 수도 있을 듯하니 학부 대신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지금 이 학부 대신이 말한 것은 꼭 허락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한 번 질문할 말을 만들어서 여지를 준비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런 것은 모두 의사(議事)의 규례이니 구애될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때 여러 대신이 아뢴 것이 모두 권중현이 아뢴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면 이 조약 초고(草稿)는 어디 있으며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고치겠는가?’ 하셨습니다. 이하영이 품속에서 일본 대사가 준 조약문을 찾아내어 연석(筵席)에서 봉진(奉進)하였습니다. 이완용이 나아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 조약 제3조 통감(統監)의 아래에 외교라는 두 글자를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훗날 끝없는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 외교권을 도로 찾는 것은 우리나라에 실지 힘의 유무(有無)와 조만(早晩)에 달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그 기간을 억지로 정할 수 없지만 모호하게 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 짐(朕)도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머리의 글 가운데서 「전연 자행(全然自行)」이라는 구절은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신이 외부에서 얻어 본 일본 황제의 친서 부본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약관은 나라의 체통에 크게 관련되지만 일찍이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부득이해서 첨삭하거나 고치게 된다면 이것도 응당 따로 한 조목을 만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건 과연 옳다. 농상공부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 하셨습니다. 이에 여러 대신 가운데는 폐하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는 사람 이완용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 권중현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모두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연석에서 아뢰는 것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우리 여덟 사람이 똑같이 아뢰기를, ‘이상 아뢴 것은 실로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물러나가 일본 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물리쳐야겠습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한규설과 박제순이 아뢰기를, ‘신들은 한 사람은 수석 대신이고 한 사람은 주임 대신으로서 폐하의 하교를 받들어 따르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 8인(人)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과 박제순은 폐하의 명을 받들고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봉칙(奉勅)하고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소에 모이니, 일본 공사가 어전(御前)에서 회의한 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우리 황상 폐하(皇上陛下)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셨으나, 우리들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복주(覆奏)하였습니다.’ 하니, 공사가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국(專制國)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大權)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알지만 여러 대신은 정부(政府)의 책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여 한결같이 군명(君命)을 어기는 것을 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러한 대신들은 결코 묘당(廟堂)에 두어서는 안 되며 참정대신(參政大臣)과 외부 대신(外部大臣)은 더욱 체차(遞差)해야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공사가 이미 이렇게 말한 이상 나는 태연스럽게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여러 대신이 만류하면서 해명하기를, ‘공사의 한 마디 말을 가지고 참정대신이 자리를 피한다면 그것은 사체(事體)에 있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규설이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조금 뒤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사가 군사령관(軍司令官) 하세가와〔長谷川〕와 함께 급히 도착하였고, 헌병 사령관(憲兵司令官)과 군사령부 부관(軍司令部副官)이 뒤따라 왔습니다. 일본 공사가 대사에게 전후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대사가 궁내부 대신(宮內部大臣) 이재극(李載克)에게 폐하의 접견을 주청(奏請)한다는 것을 전해 주도록 여러 번이나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돌아와서 ‘짐(朕)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를 전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또 참정대신 이하 각 대신에게 성지를 널리 퍼뜨렸습니다. 대사가 곧 참정대신에게 토의를 시작하자고 요청하니, 한규설이 여러 대신에게 각기 자기의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사가 먼저 참정대신을 향하여 말하기를, ‘각 대신들은 어전 회의의 경과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한 번 듣고자 합니다. 참정대신은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반대한다고만 상주(上奏)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하였는지 설명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한규설이 말하기를, ‘설명할 만한 것이 없지만 반대일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외부 대신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물으니 박제순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부 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外交權)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미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칙령(勅令)이 아니겠습니까? 외부 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민영기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반대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사가 묻기를, ‘절대 반대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탁지부 대신은 반대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하영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의 세계 대세와 동양의 형편 그리고 대사가 이번에 온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가 있는데 이제 또 하필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우리나라의 체통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지만 이미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완용에게 물으니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하교에 대하여 이미 참정대신의 통고가 있었으니 이 안건의 요지가 이미 판결된 셈이다.’라고 하고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금 전 연석(筵席)에서 여차여차하게 아뢴 바가 있을 뿐이고 끝내 찬성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그만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권중현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연석에서 면대하였을 때에 대체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딴 의견은 바로 황실(皇室)의 존엄과 안녕에 대한 문구였습니다. 그러나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충신과 역적이 즉시 판별되기 때문에 참정대신이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반대한다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황실의 존엄과 안녕 등에 대한 문구는 실로 더 보태야 할 문구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심근택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도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으나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충신과 역적이 갈라지기 때문에 농상공부 대신과 같은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지용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 또한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또 내가 일찍이 작년 봄에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공사(公使)와 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의 약관 중 독립을 공고히 하고 황실을 편안히 하며 강토를 보전한다는 등의 명백한 문구가 있으니, 애당초 이 사안에 대하여 가부를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곧 이재극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미 삼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그 실제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 대신 뿐입니다. 주무대신(主務大臣)에게 성지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한규설이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으니 대사가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울려고 합니까?’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폐하의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협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다.’ 하고, 이어 또 이하영에게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약관 중에 첨삭할 곳은 법부 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하였습니다. 각 대신 중 오직 한규설과 박제순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심근택 및 민영기, 이하영은 모두 자구(字句)를 첨삭하는 마당에서 변론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때 한규설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에 갓도 쓰지 않고 지밀(至密)한 곳으로 뛰어들었다가 외국인에게 발각되어 곧 되돌아 들어왔습니다. 마침 그 때 양편에 분분하던 의견이 조금 진정되어 대사가 직접 붓을 들고 신들이 말하는 대로 조약 초고를 개정하고 곧 폐하께 바쳐서 보고하도록 하여 모두 통촉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는 이 조약이 당연히 무효로 되어야 하니 이러한 뜻의 문구를 따로 첨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폐하의 칙령을 전하니 대사가 또 직접 붓을 들어 더 적어 넣어서 다시 폐하께서 보도록 하였으며, 결국 조인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의 사실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그런즉 신들이 정부의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의 체통이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극력 간쟁하지 않았으니 신하의 본분에 비추어볼 때 어찌 감히 스스로 변명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 조약에 대한 죄를 정부에다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어찌 꼭 5인만이 전적으로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 한규설로 말하면 수석 대신이었습니다. 만일 거센 물살을 견디는 지주(砥柱)와 같은 위의와 명망, 하늘을 덮을 만한 수단이 있었다면 비록 자기 혼자서라도 앞장서 밤새도록 굳게 틀어쥐고 갖은 희롱을 막는 등 술수가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이 없겠지만, 연석에서 면대할 때에는 전적으로 상(上)의 재가(裁可)만 청했고 외국의 대사와 문답하는 자리에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말이 성지였다는 것을 성대하게 말함으로써 전제(專制)하는 데 구실이 되게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의 숱한 말들이 무력한 지경에 똑같이 귀결되게 하고 빈 말로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울고 싶고 도망치고 싶다고 하며 거짓으로 명예를 꾀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대의(大議)가 이미 결정됨에 미쳐서 조약 초고를 찢어 버리거나 인신(印信)을 물리칠 수 없었으니 신 등 5인과는 애당초 같다 다르다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외국 대사가 일을 끝내고 돌아간 후 정부에 물러가 앉아서는 정해진 규례도 준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상소하여 신들에게 죄를 떠넘김으로써 허실(虛實)이 뒤섞이게 하였습니다.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다만 죄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도모한 것에 불과합니다. 시험 삼아 한규설의 잘못을 논해 보면 응당 우리들 5인의 아래에 놓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밖에 반대한다고 말한 대신들로 말하면, 처음에는 비록 반대한다고 말하였지만 끝내는 개정하는 일에 진력(盡力)하였으니, 또한 신 등 5인과 고심한 것이 동일하며 별로 경중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걸핏하면 5인을 들어 실제가 없는 죄명을 신들로 하여금 천지(天地)간에 몸 둘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까? 신 등 5인은 스스로 목숨을 돌볼 겨를이 없이 하였건만 당당한 제국의 허다한 백성들 속에 깨닫고 분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마치 한 마리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모든 개가 따라 짖듯이 소란을 피워 안정되는 날이 없으니 이 어찌 한심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탄핵하는 글로 말하면 반드시 증거를 확실하게 쥐고서야 바야흐로 등철(登徹)할 수 있는데 저 무리들에게 과연 잡은 증거가 있습니까? 사실을 날조하여 남에게 죽을죄를 씌운 자에게는 의당 반좌율(反坐律)이 있는 것이 실로 조종(祖宗)의 옛 법입니다.
무릇 위 항목의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곡진하게 관대히 용서하고 차마 신들에게 죄를 더 주지 않았으며,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뢸 때에는 사임하지 말라고 권했고, 스스로 인책할 때에는 인책하지 말라고 칙유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들의 몸이 진토가 되어도 기어이 보답하여야 할 기회이건만 저 무리들은 폐하께서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날로 더욱 떠들어대면서 치안(治安)에 해를 주고, 정령(政令)이 지체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의 체통을 깊이 진념하시고 속히 법사(法司)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이런 혼란스런 무리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구함(構陷)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모두 죄의 경중을 나누어 형률을 적용하여 징계함으로써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신 등 5인에게만 다행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나라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하라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마는, 혹 부득이한 상황으로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여론이 당사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또한 해명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오직 다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될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들은 각기 한층 더 노력함으로써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
하였다.
12월 1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웃 나라와의 교제에서 우의와 화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예의로 서로 왕래해야 할 것이다.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을 특별히 일본국 보빙대사(日本國報聘大使)로 임명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사신으로 보낼 일이 긴급하여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기복(起復)하도록 하는 것은 규례가 있으니 일본국 보빙대사 이재완에게 특별히 명하여 빨리 길을 떠나게 하라."
하였다.
정2품 윤용식(尹容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나라가 나라를 영위하는 것은 인민(人民)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심이 복종하면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민심이 이탈되면 그 나라가 혼란해지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혼란하면 종사(宗社)가 위태로워지는 법이니 이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나라를 팔아먹은 여러 역적을 성토하는 문제를 가지고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연속으로 간절한 상소를 올리고 지방에 있는 대신(大臣)들까지도 창황히 입성(入城)하여 서로 이끌고 연명으로 호소하였건만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론이 억압된 울분으로 인해 더욱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감히 우리 황상 폐하(皇上陛下)께서는 무엇을 생각해 줄 것이 있고 무엇이 아까운 것이 있어서 아직도 드러내놓고 처단하지 않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여러 역적이 아직도 의연하게 정부의 반열에서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안하게 지내고 있으니, 참으로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공의(公議)가 이로 인해 더욱 답답하고 국법이 이로 인해 펴지지 못하니 신민(臣民)이 통분함을 풀 곳이 없습니다.
이른바 새 조약이라는 것은 바로 위협에 의해 조인된 것이고 또 폐하의 재가(裁可)도 거치지 않은 것인 만큼 자연히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사패(司敗)에 명하여 이 여러 역적을 주벌함으로써 국법(國法)을 바로잡고 국민들에게 사죄하게 할 것이며, 다시 현능(賢能)한 사람을 선발해서 정부의 각종 사무와 벼슬을 맡기고 해당 조약 조항을 다시 교섭하여 폐기시킴으로써 종사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보전해야 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도하(都下)의 민심이 울분을 이기지 못해서 우왕좌왕하며 안정되지 못하는 상황은 조석(朝夕)도 보존되지 못할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명철한 조령(詔令)으로 사랑하고 돌봐주는 지극한 뜻을 보임으로써 각기 마음을 진정하고 안거(安居)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태가 더욱 소란스럽게 되는 한탄이 없게 하는 것이 또한 오늘날의 긴급하고도 절실한 문제입니다.
신은 병으로 교외의 집에 누워 있는데 통증이 줄어들지 않은 데다가 울분이 격해져서 이에 감히 두려움을 헤아리지 않고 외람되이 폐하를 번거롭게 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혁연히 위엄을 떨쳐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19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윤용식(尹容植)을 비서감 경(祕書監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내부 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최석민(崔錫敏)을 내부 지방국장(內部地方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20일 양력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민종묵(閔種默)을 임명하여 부묘도감 제조(祔廟都監提調)로 삼았다.
비서감 경(祕書監卿) 윤용식(尹容植)을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에, 특진관(特進官) 조정희(趙定熙)를 비서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전라북도 관찰사(全羅北道觀察使) 이도재(李道宰)를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觀察使)에, 육군 정령(陸軍旌領) 한진창(韓鎭昌)을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6품 채범석(蔡範錫)을 학부 편집국장(學部編輯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김연식(金璉植)을 내부 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초야(草野)의 신하 송병선(宋秉璿)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사람과 집과 나라를 망하게 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나라가 생긴 이래 어찌 박제순(朴齊純),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이완용(李完用), 권중현(權重顯)의 무리와 같은 극악무도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삼천리 강토는 조종(祖宗)의 토지이고 수많은 백성들은 조종의 백성들이므로 비록 폐하의 존엄을 가지고도 오히려 사적으로 남에게 줄 수 없는데 더구나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제멋대로 주고 빼앗고 하면서 우리 500년 종사를 망하게 한단 말입니까?
아! 저 오적(五賊)들은 종실(宗室)의 지친(至親)이면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오는 신하들로서 저들의 아비와 할아비들이 열성조(列聖祖)의 은혜를 많이 받은 것도 생각하지 않고 군부(君父)를 협박하며 결론을 위조하여 동의를 표하고 마음대로 조인(調印)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이것이 얼마나 큰 변고입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아직도 처단을 내려 시원스레 신민(臣民)의 울분과 원한을 씻어주지 않고 환히 천지의 신령들에게 사죄하지 않았으니, 또 어떤 화기(禍機)가 언제 생기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은 어떻게 되며 천하 후세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이른바 5조약은 바로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를 통치하려는 것입니다. 선왕(先王)의 종묘를 어느 땅에다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며 온 나라 백성들을 어찌 차마 남에게 도륙을 당하도록 내맡길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의 막중한 보좌(寶座)인들 장차 어디에 가서 구차하게나마 보존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영부사(領府事) 조병세(趙秉世), 보국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민영환(閔泳煥), 참판(參判) 홍만식(洪萬植), 주사(主事) 이상철(李相哲) 및 징집되어 올라온 군사(軍士) 김봉학(金奉學)은 울분을 안고 풀길이 없어서 순절(殉節)로써 나라에 보답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관원들과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울부짖다가 저들에게 수모와 치욕을 당하고 인민(人民)들이 말때문에 미움을 사며 다들 같다고 의심을 받고서 저들의 군사들에게 구속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져 그 수가 수백 인(人)이나 더 됩니다. 포학하고 간사한 저들은 우리가 무력함을 멸시하고 온 세상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허위를 진실로 날조하기를 마치 귀를 막고 방울을 도적질하듯 하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에서는 아무리해도 시비를 가려내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한 번 열국(列國)의 공판(公辦)에 붙여 잘잘못을 가릴 것 같으면 한 마디 말이 끝나기 전에 천하의 맹약 앞에 저들이 용납되지 못할 것이며, 우리에게 허위 날조된 명색없는 조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고심하며 간하는 것은 여기에서 보는 것이 있어서입니다. 폐하 앞에서 바른 말을 올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죽기를 무릅쓰고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신의 말일 뿐 아니라 곧 온 나라의 공론(公論)입니다. 폐하께서 분연히 결단하는 것은 폐하의 독단이 아니라 실로 천하의 본래 그러한 의리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국법을 시행하여 오적의 죄를 다스리고 속히 열국에게 단죄 결판해 줄 것을 요청해서 거짓 조약을 폐기함으로써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를 회복하여 천하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당장의 위태로운 형편은 기울어져 엎어지기 쉽게 생긴 물그릇이나 물이 새는 배에 비길 정도가 아닌데 덕망이 있고 충성스러운 경(卿)이 어찌 이렇게까지 화락하지 못할 수가 있는가? 진달한 것은 가납(嘉納)하겠지만 앞서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을 통해 거의 이해하였을 텐데 어찌하여 다시 제기하는가? 이처럼 극도로 어려운 때에는 더욱 잘 이끌어줄 훌륭한 사람이 그리우니, 원컨대 경은 속히 나의 뜻을 따를 것을 생각하고 한 번 조정에 모범을 보임으로써 옆자리를 비워놓고 간절히 기다리는 짐(朕)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12월 21일 양력
법령 제6호, 〈사설 철도(私設鐵道) 규정〉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12월 22일 양력
배종 무관장(陪從武官長) 조동윤(趙東潤)에게 시종 무관장(侍從武官長)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3일 양력
정2품 이헌경(李軒卿)을 임명하여 부묘도감 제조(祔廟都監提調)로 삼았다.
12월 28일 양력
칙령 제55호, 〈지방 제도(地方制度) 중 일부 개정 건〉, 제56호, 〈지방 관리(地方官吏) 직제 중 일부 개정 건〉, 제57호, 〈한성부 관제(漢城府官制)〉를 【한성부 직원(漢城府職員) 윤(尹) 1인은 칙임관(勅任官)이고 참서관(參書官) 1인은 주임관(奏任官)이며 주사 5인은 판임관(判任官)이다.】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정1품 이순익(李淳翼)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으며, 특진관 남정철(南廷哲)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특진관 이우면(李愚冕)을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12월 29일 양력
특진관 이근명(李根命)에게 칙유(勅諭)하기를,
"경이 병을 핑계 대지만 몸조리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응당 회복되었을 것이다. 이번에 종사(終事)의 중요성은 정례(情禮)로 보나 도리로 보나 이렇게 누차 번거롭게 글이 오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경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치사(致仕)에 대해 핑계 댈 수 없는데 굳이 고집하면서 공연히 날짜만 허비하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짐은 이 정도로 말하겠으니, 경은 잘 헤아려보라."
하였다.
칙령 제58호, 〈통신원 관제(通信院官制) 중 일부 개정 건〉, 제59호, 〈육군 견습 참위(陸軍見習參尉)의 봉급에 관한 건〉, 제60호, 〈농상공 학교 부속 농사과장(科場) 관제(農商工學校附屬農事試驗場官制)〉, 제61호, 〈본년(本年) 관등 봉급령 중 의정대신(議政大臣), 참정대신(參政大臣), 각 부의 대신,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을 친임(親任)으로 개정하는 건〉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포달(布達) 제129호, 〈궁내부 관등 봉급령(宮內府官等俸給令) 중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시종원 경(侍從院卿),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태의원(太醫院), 봉상사 도제조(奉常司都提調)를 친임으로 개정하는 안건〉을 반포하였다.
의정부의정서리 학부대신(議政府議政署理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이 아뢰기를,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철(閔泳喆)이 군임(軍任)을 맡고 있으면서도 제멋대로 국경을 넘었으니, 기율(紀律)로 헤아려 볼 때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 면직하여 징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이 각 재판소에서 심리한 강도, 살옥(殺獄), 사주(私鑄) 죄인 서운일(徐雲一)과 이군직(李君稙) 등 83명을 교수형에 처하는 안건에 대하여 개록(開錄)하여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강릉군(江陵郡)의 살옥을 범한 죄인 모녀(母女)를 모두 하나같이 사형에 처단한다면 사건의 진상으로 보아 참혹한 점이 있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뜻으로 미루어 그의 어미 이 조이〔李召史〕는 특별히 용서하여 목숨을 살려 주라. 사주 죄인 서완진(徐完辰) 등 6명으로 말하면 대사령(大赦令) 이전의 사건이니, 모두 죄를 1등을 감하라."
하였다.
12월 31일 양력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觀察使) 이도재(李道宰)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바야흐로 사정이 급하여 면직을 청하는 마당에 응당 다른 말을 덧붙이지 말아야 하겠지만, 근심과 울분이 치밀어 올라 묵묵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새 조약과 같은 문제로 말하면 온 나라 백성들이 누구나 통분한 생각으로 죽고 싶어하며 모두 말하기를, ‘해당 조약을 도로 없애버리지 않는다면, 종묘사직이 장차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원로들과 사대부들이 서로서로 이끌고 대궐 뜰에 나아가 부르짖으며 호소하고 잇달아 죽은 것은 혹시라도 폐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리려 했던 것인데, 폐하는 어째서 죽은 사람들의 고심과 온 나라의 공론을 헤아리지 않고 아직도 결단을 내리기를 주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지난번에 신은 지방에 있으면서 비록 연명 상소를 올리는 말미에도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 의리상 달리할 수 없기 때문에 때가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감히 뒤에나마 진달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종묘사직과 생민들을 위한 대책으로 속히 여러 신하들의 청을 승인해 주시고 또한 응당 분발하여 큰 일을 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시급히 자강책(自强策)을 강구하소서.
대체로 저들이 이른바 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실지 독립이 아니라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마관조약(馬關條約)에서 말한 조선 독립이란 청나라에서 따로 갈라놓게 하여 고립시키려는 것이었으며, 일아선전서(日俄宣戰書)에서 말한 대한 독립이란 우리가 러시아에 대하여 거절하도록 만들어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는데,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장애가 되는 것들을 없앤 뒤에 하고 싶은 대로 자행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지금 그 간사하고 능청스러운 꾀가 여지없이 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독립이라는 빈 명색을 빌려 우리를 약탈할 생각만 하는 것은 또한 우리가 독립을 위한 실질적인 일과 때에 맞는 대처 없이 두려워하며 세월만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 지경에 이른 데 대하여 신은 너무도 통탄스럽습니다.
옛사람들은 이르기를,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였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만일 진심으로 잘 다스릴 길을 찾고 실속 있게 진보하되 대외적으로는 남에게 의탁하지 않고 대내적으로는 우리의 실력을 쌓으면 이것이 바로 저절로 독립을 가져오는 길입니다. 만국이 공인한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월(越)나라 구천(句踐), 위(衛)나라 문공(文公)이 검소하게 해서 나라를 부흥시킨 것을 본받아, 뜻을 굳게 정하시고 분연히 결단해서 간사한 자들을 벼슬에서 내쫓고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등용하여 생각을 가다듬고 정사를 잘하여 전화위복이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은 울분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해한다. 말한 내용은 백성들의 소원이니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경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관찰사의 직책에 더욱 힘써라."
하였다.
봉상사 전사(奉常司典事) 김병도(金秉燾)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철(閔泳喆)로 말하면 대대로 벼슬한 큰 가문의 사람으로서 두터운 은혜를 받고 두루 중외(中外)의 벼슬을 지냈으므로 세상에서 중신(重臣)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나라가 곤경에 처한 때에 외부로부터의 모욕을 막고 전후로 고락을 함께하는 의리를 지킬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한갓 편안히 목숨이나 부지할 계책만을 일삼으면서 몰래 지경 밖으로 넘어가 살림을 차리고 집을 꾸렸습니다. 자신이 높은 관리로 있으면서 망명한 것처럼 하였으니, 법의(法義)로 헤아려 볼 때 무슨 죄에 처해야 하겠습니까? 속히 처분을 내려 중한 형벌에 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만일 말한 바와 같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종2품 김재순(金在珣)을 통신원 총판(通信院總辦)에, 종2품 박의병(朴義秉)을 한성 부윤(漢城府尹)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강기복신(降朞服臣) 이재완(李載完)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귀신과 하늘에 죄를 지고 지난번에 본생모(本生母)의 상사를 만나 너무 슬퍼하던 나머지 자리에 누워 신음하던 차에 지금 뜻밖에도 칙명(勅命)을 받아보니 신에게 대사(大使)의 직함을 제수하시고 이어 기복출사(起復出仕)를 명하셨습니다. 신은 깜짝 놀라 꿈을 꾸는 듯하였으니, 자애로운 성상께서 어찌하여 이러한 명을 신에게 내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본래 시의(時宜)에 완전히 어둡습니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벼슬은 바로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화목하게 가지는 것입니다. 이웃 나라의 우의가 돈독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시국의 형편은 날이 갈수록 험악한 지경에 빠지게 되어 점점 수습을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의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정사에서는 마땅히 쓸데없는 형식이나 허식을 없애고 우리의 실심(實心)과 실정(實政)에 힘쓰면서 크게 분발하고 크게 계책을 내어, 날마다 시각마다 일을 벌이고 추진시킴으로써 실력을 배양하고 난국을 극복하여 기초를 공고히 하면 될 뿐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잘 가지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좋아질 것이고 예물을 바치거나 연향을 베푸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니, 무엇 때문에 꼭 대사를 보내겠습니까?
신이 외람되이 폐하의 친척되는 반열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사신으로 가는 수고를 꺼리겠습니까? 하지만 맡은 일이 백성과 나라의 큰 계책에 관한 것이 아니고 다만 쓸데없는 형식과 허식일 따름인데 인정을 억제하고 거상복을 벗음으로써 염방(廉防)을 무너뜨린다면 신으로서 작은 일이 아닐 뿐더러 효로써 다스리는 성상의 정사를 헤아려 볼 때 유감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의 말이 망령되지 않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고 인정상 억지로 할 수 없는 신의 사정을 널리 살펴 주셔서 속히 새로 임명한 명령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원래 전례가 있을 뿐 아니라 사신의 일이 긴요하고 중하니, 경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
하였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46권 끝】
【원본】 50책 46권 6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17면
【분류】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