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실록부록4권, 순종6년 1913년 7월
7월 1일 양력
【음력 계축년(癸丑年) 5월 27일】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전의(典醫) 홍철보(洪哲普)에게 금(金) 70원(圓)을 내렸다. 회갑이었기 때문이다.
【원본】 6책 4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76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전의(典醫) 홍철보(洪哲普)에게 금(金) 70원(圓)을 내렸다. 회갑이었기 때문이다.
7월 6일 양력
위인친왕(威仁親王)의 병이 위독하여 왕세자부 무관(王世子附武官) 김응선(金應善)을 무자(舞子)에 보내어 물품을 증정(贈呈)하고 위문하였다.
7월 8일 양력
비원(祕苑) 수정(水亭)에 나아갔다. 왕비(王妃)도 함께 나아가 반딧불을 관람하였다.
7월 9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7월 10일 양력
위인친왕(威仁親王)이 훙거(薨去)하였다. 양궁(兩宮)께서 조전(弔電)을 보냈다.
왕세자(王世子)가 유년 학교(幼年學校) 예과(豫科)를 졸업하였다.
창덕궁(昌德宮)과 덕수궁(德壽宮)에서 친히 왕세자(王世子)에게 전보하기를,
"오늘 유년 학교(幼年學校) 예과(豫科)를 졸업하고 영어 전수 우등생으로 강연하였다는 것을 고희경(高羲敬)으로부터 보고받아 잘 알고 있다. 이는 바로 여러 해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이니 기쁨을 감당할 수 없다. 앞으로도 뜻이 꺾이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더욱 더 열심히 하여 기어이 국은(國恩)에 보답하여라."
하였다.
7월 13일 양력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토쿄〔東京〕에 보냈다. 양궁(兩宮)의 특사(特使)로서 위인친왕(威仁親王)의 장의(葬儀) 때 참렬(參列)하기 위해서이다.
7월 14일 양력
특별히 총독부 의원장(總督府醫院長) 후지타 쓰구아키〔藤田嗣章〕 등 5인(人)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렸다. 환후(患候) 때 입진(入診)하여 수고하였기 때문이다.
7월 16일 양력
칙령(勅令) 제259호는 다음과 같다.
대정(大正) 원년(元年) 칙령(勅令) 제19호 중 천장절(天長節) 8월 31일 다음에 다음과 같이 더한다.
천장절 축일(祝日) 10월 31일.
7월 18일 양력
왕세자(王世子)는 삼도(三島)의 별저(別邸)에서 전지휴양(轉地休養)을 하였다. 여름 휴가였기 때문이다.
궁내성 고시(宮內省告示) 제15호는 다음과 같다.
천장절(天長節)에 대하여 지금부터 8월 31일에는 천장절 제(祭)만 행하고, 특별히 10월 31일을 천장절 축일(祝日)로 정하여 궁중에 있는 배하 연회(拜賀宴會)는 같은 날 행한다고 앙출(仰出)하였다. 천장절에 대하여 궁중에 참하(參賀)하며 또는 하표(賀表)를 봉정(奉呈)하려는 자는 10월 31일에 이를 행하는 것이 옳다.
총독(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양궁(兩宮)에 알현하였다. 토쿄〔東京〕로 가기 때문이다.
자작(子爵) 고영희(高永喜)가 양궁(兩宮)에 알현하였다. 귀족 총대(貴族總代)로서 토쿄〔東京〕에 가서 명치 천황(明治天皇)의 1년 제사 때 참렬(參列)하기 때문이다.
7월 19일 양력
이왕직 사무관(李王職事務官) 현백운(玄百運)을 부산역(釜山驛)에 보내고, 덕수궁(德壽宮)에서도 찬시(贊侍) 남작(男爵) 김춘희(金春熙)를 보내어 총독(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토쿄〔東京〕로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7월 20일 양력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에게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다. 철종 장황제(哲宗章皇帝)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7월 21일 양력
이달용(李達鎔)에게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다. 순조 숙황제(純祖肅皇帝)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7월 22일 양력
이강 공(李堈公)에게 미리 토쿄〔東京〕에 가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양궁(兩宮)의 대리로서 명치 천황(明治天皇)의 1년 제사 때 참렬(參列)하기 때문이다.
7월 23일 양력
백작(伯爵) 이완용(李完用)이 양궁(兩宮)에 알현하였다. 귀족 총대(貴族總代)로서 미리 토쿄〔東京〕에 나아가 명치 천황(明治天皇)의 1년 제사 때 참렬(參列)하기 때문이다.
7월 25일 양력
이재현(李載現)에게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다.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7월 27일 양력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덕안궁(德安宮)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권업모범소 기사(勸業模範所技師) 이하에게 금(金)을 차등 있게 내렸다. 양잠(養蠶) 때 근로(勤勞)하였기 때문이다.
7월 28일 양력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덕안궁(德安宮)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군사령관(軍司令官) 안도 사다미〔安東貞美〕, 부관(副官) 노즈 요타로〔野津要太郞〕가 양궁(兩宮)에 알현하였다. 여름 문안이었다.
7월 30일 양력
찬시(贊侍) 자작(子爵) 윤덕영(尹德榮)을 용산(龍山) 연병장(練兵場)에 보내고 덕수궁(德壽宮)에서도 찬시 남작(男爵) 김춘희(金春熙)를 보내어 명치 천황(明治天皇) 1년상 요배식(遙拜式) 때 참렬(參列)하게 하였다.
7월 31일 양력
정무 총감(政務總監)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총무국장(總務局長) 백작(伯爵)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 비서관(祕書官) 구와바라 하치시〔桑原八司〕, 토지조사국장(土地調査局長) 요시무라 야소조〔吉村八十三〕가 창덕궁(昌德宮)과 덕수궁(德壽宮)에 알현하였다. 요시무라가 새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