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부록9권, 순종11년 1918년 9월

싸라리리 2025. 2. 21. 12:44
반응형

9월 2일 양력

【음력 무오년(戊午年) 7월 27일】 왕세자가 토쿄〔東京〕의 별저(別邸)로 돌아갔다.


【원본】 7책 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603면
【분류】왕실-종친(宗親)
왕세자가 토쿄〔東京〕의 별저(別邸)로 돌아갔다.

 

9월 5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도 따라갔다.

 

9월 6일 양력

고양군(高陽郡) 연희면(延禧面)에 일금 100원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면사무소의 신축을 보조한 것이다.

 

왕세자가 치바현〔千葉縣〕 아래 나라시노〔習志野〕에 행계(行啓)하였다. 연습 때문이었다.

 

9월 11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도 따라갔다.

 

9월 13일 양력

양궁(兩宮)에서 특별히 궁인(宮人) 조종응(趙鍾應)  【봉보 부인(奉保夫人)이다.】 의 상(喪)에 일금 3,000원을 하사하였다.

 

9월 14일 양력

태왕 전하가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이하 봉사하였던 직원(職員) 및 전의(典醫)와 별입직(別入直) 등 36인에게 오찬을 내렸다. 태왕 전하의 환후가 평복(平復)되었기 때문이다.

 

9월 17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도 따라갔다.

 

후작(侯爵) 이재각(李載覺)·이해창(李海昌),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 남작(男爵) 조동윤(趙東潤)·이재극(李載克) 및 이달용(李達鎔)·민영찬(閔泳瓚) 등과 내전(內殿)에 근무하는 궁인(宮人) 등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태왕 전하 환후 시에 봉사하는 일에 힘썼기 때문이다.

 

9월 18일 양력

종척(宗戚)과 귀족(貴族) 및 이왕직 고등관(李王職高等官) 등을 소견(召見)하고 이어 인정전(仁政殿)에서 축하연을 베풀었다. 태왕 전하의 환후가 평복되었기 때문이다.

 

9월 20일 양력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 찬시(贊侍) 자작(子爵) 윤덕영(尹德榮), 조민희(趙民熙) 및 박주빈(朴胄彬), 조지호(趙志鎬), 다나카 도쿠타로〔田中德太郞〕와 덕수궁(德壽宮)에 근무하는 속관(屬官)과 전의(典醫)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태왕 전하가 환후에 있을 때 봉사하기에 수고했기 때문이다.

 

9월 25일 양력

선정전(宣政殿)에 왕비와 함께 나아가 종척(宗戚)과 귀족(貴族)과 이들 부인 및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이하 고등관(高等官)을 인견(引見)하고 이어서 오찬을 베풀었다. 왕비의 탄신 축하 행사가 궁중의 유고로 미루어졌다가 금일 행사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9월 30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도 따라갔다.

 

특별히 전 참봉(參奉) 조정식(趙鼎植)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 외증손이다.】 에게 일금 100원을 하사하였다. 그의 누이 혼례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아이치현〔愛知縣〕 아래 토요하시시〔豐橋市〕에 행계(行啓)하였다. 진지공방 연습을 견학하기 위해서였다.

 

경성 신사(京城神社)에 일금 200원을 기부할 것을 명하였다. 예제(例祭) 비용 및 채무 정리 때문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