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부록10권, 순종12년 1919년 2월

싸라리리 2025. 2. 2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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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양력

【음력 기미년(己未年) 정월 초 1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 겸 별전(晝茶禮別奠),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원본】 7책 10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60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 겸 별전(晝茶禮別奠),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2월 2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2월 3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2월 4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정무 총감(政務總監)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공작(公爵)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 식부관(式副官) 오카노 헤이타로〔岡田平太郞〕, 장전(掌典) 사에키 아리요시〔佐伯有義〕, 궁내 서기관(宮內書記官) 오키 쓰네오〔大木彛雄〕를 덕홍전(德弘殿)에서 접견하였다.

 

2월 5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총호원(總護員)이, ‘재궁에 칠을 한 포(布) 위에 덧칠하는 일을 각 년의 예에 의하여 10번씩 이틀에 한 번 진행하려 합니다.’라고 아뢰니, 답하기를,
"이번에는 날마다 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6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2월 8일 양력

장의 제관 부장(葬儀祭官副長) 윤덕영(尹德榮)을 면직시키고 남작(男爵) 조동윤(趙東潤)을 임명하였다.

 

상민(商民) 사일환(史一煥) 등이 봉도회(奉悼會)와 봉도단(奉悼團)을 만들어 인산(因山) 때, 대소 상여(喪輿)의 담배군(擔陪軍)과 인군(引軍) 등 각 항에 필요한 군정(軍丁)을 자원하여 거행하기로 하였다.

 

2월 9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국장(國葬)의 봉고식(奉告式)을 행하였다. 이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2월 10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2월 11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2월 12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홍릉(洪陵)에서 현궁(玄宮)을 꺼냈다. 찬시(贊侍) 김관호(金觀鎬)를 보내어 봉심(奉審)하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왕세자(王世子)를 따라온 전의(典醫) 고야마 젠〔小山善〕에게 일금 50원을 하사하였다. 처상(妻喪)을 당했기 때문이다.

 

2월 13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홍릉(洪陵)의 빈전(殯殿)에 친히 진향(進香)하는 것은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를 보내어 섭행(攝行)토록 하였다. 친히 지은 제문(祭文)에,
"인자한 모습이 떠나보낸 지 이에 2기(紀)가 되었는데, 휘음(徽音)은 어제와 같도다. 유쾌한 얼굴빛은 어느 때였든가? 시와 노래로 자식을 보살펴 기르셨도다. 하늘과 땅은 끝이 없는데 동성(東城)은 밀접하고 가까웠도다. 능(陵)의 잣나무는 이미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데 근심을 품고 걱정하니, 훌륭하신 아버님에 의지할 뿐이다. 금일 아버님이 돌아가셔 거듭 재앙이 내리니, 황황(皇皇)한 슬픔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뼈를 사무치는도다. 빠른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 장차 발인(發靷)하려 하는데 금곡(金谷)에 아버님이 생전에 정하신 무덤자리는 그 점괘가 길조로다. 어찌 부우산(鮒隅山)에서 점을 치고 어찌 상설(象設)로 옮겨 오묘한 조화를 다시 보겠는가? 옥음(玉音)을 받들자니 정신이 혼미하여 슬픔에 의지하였다. 찬궁(欑宮)과 장막(帳幕)은 고요하기만 한데 보이는 곳마다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도다. 슬픔에 빠져 어찌 맡은 일을 감당하겠는가? 영세토록 편안하게 받들고자 하니 우뚝 선 저 오잠(烏岑)에 감히 향을 마련하여 비오니 높으신 영혼은 흠향하소서."
하였다.

 

2월 14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2월 15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부무관(附武官) 강필우(康弼祐)에게 홍릉(洪陵)에 나아가 봉심하고 오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찬시(贊侍) 윤형구(尹逈求)에게 홍릉을 천봉할 때 큰 상여를 배종하도록 명하였다.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영여(靈轝)가 금곡(金谷)의 산릉을 향해 떠나는데, 【능호(陵號)를 홍릉(洪陵)이라 하였는데, 옛날 이름을 그때로 쓴 것이다.】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2월 16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홍릉(洪陵)을 천봉(遷奉)하여 현궁(玄宮)을 내리고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애책문(哀冊文)과 지석(誌石)은 옛것에 22년 기미년(1919) 정월 16일 양주군(楊州郡)        미금면(渼金面)        금곡리(金谷里) 을좌(乙佐)에 옮겨 모셨다는 것을 더 새긴 후 그대로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능을 옮기고 능소(陵所)에서 우제(虞祭)를 지내고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2월 17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2월 18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2월 19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수여 재궁원(帥舁梓宮員)은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이, 식재 궁원(栻梓宮員)은 백작(伯爵) 이완용(李完用)이 맡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0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2월 21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자작(子爵) 임선준(任善準)의 상(喪)에 특별히 일금 250원을 하사하였다.

 

2월 22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고, 겸하여 결과(結裹)를 한 후 별전(別奠)을 행하였다.

 

육군(陸軍), 해군(海軍)의 제병 지휘관(諸兵指揮官) 육군 중장(陸軍中將)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육군 소장(陸軍少將) 오노 호시〔大野豐四〕, 보병 중좌(步兵中佐) 야마모토 쓰루이치〔山本鶴一〕, 포병 대위(砲兵大尉) 우에무라 세이타로〔上村淸太郞〕, 보병 소좌(步兵少佐) 다자키 코사부로〔田崎孝三郞〕, 보병 대위(步兵大尉) 고조 다네히데〔古城胤秀〕, 해군 대좌(海軍大佐) 벳부 유지로〔別府友次郞〕, 해군 소좌(海軍少佐) 아사이 가네타다〔淺井謙只〕, 해군 대위(海軍大尉) 이치키 마사아키〔市來政章〕, 해군 소좌 야마우치 도요나카〔山內豐中〕, 해군 대위 쓰치다 히토시〔土田齋〕 등이 장례 의식에 참여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2월 23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친히 진향(進香)하였다. 친히 지은 제문(祭文)에,
"하늘이 큰 임무를 내렸으니 때에 맞추어 할 일이 있다.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은 땅을 다스리고 오행(五行)의 운행을 고르게 하였으며, 물을 잘 흐르게 하고 산을 평평하게 하였고, 이어서 탕왕(湯王)과 문왕(文王), 무왕(武王)이 난세(亂世)를 치세(治世)로 바꾸었고, 이 세상을 돌봐주어 도(道)가 변하고 풍속에 스며드니, 앞 사람이 끼친 은택이 거듭 쌓였도다. 융성함이 극에 달하여 장차 쇠퇴하려 하였다. 부왕이 이루신 것은 실로 이에 맞춘 것이니, 밝음이 발하여 어두움을 움직여, 양의(兩儀)가 순환하고, 의(義)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판별하였으며, 예(禮)는 화이(華夷)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였다. 뜻이 작은 것에 있지 않으니 꾀하는 바가 여러 번 발흥하였다. 슬프다. 이제는 돌아가셨으니 어찌 차마 이를 참을 수 있으랴? 오호라 슬프도다. 소자가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함을 알지만, 가만히 부왕(父王)의 덕성을 살펴보니 공손하고 총명하여 학문과 생각이 깊었으며, 효성은 신명(神明)과 통하였고, 학문은 독실하여 윤리에 밝으셨다. 따뜻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검소하여 정치를 계발하고 인(仁)을 베푸셨도다. 제사(祭祀)와 전범(典範)을 더욱 엄히 하여 살찐 희생과 깨끗한 곡물을 바치셨다. 일을 처리함은 인정과 이치에 합치하였고, 부지런히 강구하여 조정의 의식(儀式)과 나라의 예절(禮節)은 오직 옛것을 으뜸으로 삼으니, 일국의 전범(典範)이 아닌 것이 없었다. 모든 관리들에게 명하여 가르쳐 주거나 혹은 의심나는 바를 자주 물어, 만기(萬機)를 모두 살펴서 부지런히 정치를 하면서도 피로해하지 않았다. 여러 번 어려운 근심거리를 겪었으나 모두 알맞게 조치하여 큰 명호가 이미 융성하였다. 명령을 밝혀 스스로 남기니, 그 표준이 있어 영원히 굳건한 왕업(王業)의 기틀이 세워졌도다. 일에 싫증이 나면 저녁 경치를 즐기면서 서쪽 대궐로 멀리 나가시니 곤룡포(袞龍袍)는 아름답고 의젓하였다. 망망한 허공에 한 점의 구름처럼 홀연히 가시니 오호라 슬프도다, 사람으로 부친이 없는 사람이 누구이며, 누가 이 슬픔을 알겠는가? 남은 음덕을 욕되게 이은 즉 못난 아들의 모습이다. 자식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보살펴 기르셨는데, 사랑하면서도 엄격한 자세를 늦추지 않았고, 대하는 물건마다 가르쳐 알게 하였으니 아버지의 도리와 임금의 도리, 스승의 도리를 겸하였도다. 45년을 한결같이 모범을 이루니 소자는 기로(耆老)에서 늙기를 기약하였다. 양지가 거의 이루어지고 해이(解頤)를 잇기를 바랐다. 한밤중에 창황하게 신께 묵묵히 기도하였으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어 외로운 고아가 되었다. 두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이 에워싸고 가슴을 치며 서로 끌어안고, 거리에서 부르짖고 골목에서 울어대며,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 흩어지니, 현명한 사람과 친하고 이로움을 즐거워하는 것을 이에서 보겠도다. 오호 슬프도다. 예에 마땅하기가 아직 머니 지체할 수가 없다. 저 금곡(金谷)의 동산은 일찍이 구의산(九疑山)에서 점을 쳐 노(魯)나라가 공자(孔子)와 안자(安子)를 모신 곳과 같이 길한 곳이다. 치세의 운명이 여기에 있으니 의심하는 것 같고 구하는 것 같다. 지극한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슬픈 바람은 무덤 위에 쓸쓸하다. 붉은 깃발을 세운 흰 천막에서 감히 마음으로 향을 올리니 피눈물이 흐르는도다. 오호 슬프도다."
하였다.

 

2월 24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2월 25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2월 26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의례(儀禮)에 따라 종묘(宗廟)에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시책문(諡冊文)에,
"높은 하늘이 재앙을 내리쳐서 오랫동안 풍류를 그치고 조용히 해야 할 슬픔에 매이게 되었다. 큰 덕은 명칭을 얻는 것이니, 어찌 높은 은혜에 대한 예를 밝히고, 식은 오백년의 전범(典範)을 준수하여도 어찌 만분의 1일인들 형용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지혜로운 모습과 중흥(中興)의 운을 타고 탄생하셨습니다. 어려서 잠저 하였을 때는 한(漢)나라 선후(宣后)와 같은 좋은 평판을 넘어섰으며, 종사를 이어서 통솔함은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이 처음 정치를 할 때와 거의 같았습니다. 성인(聖人)을 배우고 경연(經筵)에 근면하고 힘쓰는 법도는 선왕(先王)들에 비교할 만하였습니다. 궁궐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었고, 서족(敍族)들과 친목하였으며, 이를 미루어서 백성을 다 같이 밝게 다스려 협화(協和)를 이루었습니다. 양기를 돋우고 음기를 억제하였고, 간사함과 바름, 간특함과 정숙함을 엄하게 구분하였습니다. 효성은 윗분들을 드러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아름다운 책문(冊文)을 여러 번 올리셨습니다. 제사를 지냄에 진실로 정결하게 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규찬(圭瓚)은 공경스럽게 올리셨습니다. 법도는 모두 옛것에 따라 조종(祖宗)을 본받고 잊지 않았고, 명령을 다만 새롭게 하였습니다. 이웃 나라와 통교(通交)함으로써 먼 곳의 백성을 화목하여 순종하게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면 정령(政令)의 사이에 베푸는 조치는 정밀하여 의(義)에 맞게 변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갑주와 무기를 출입문 밖에 묶어놓고, 의관(衣冠)과 옥백(玉帛), 외교상의 담판과 연회는 올바른 격식을 다하였습니다. 운세는 평안함과 어려움이 있어 때로는 어려움과 아픔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도(道)는 대소가 없이 움직임은 모두 경법(經法)과 권도(權道)에 합치하여 삼황(三皇)과 오제(五帝)가 한결같이 융성한 것보다 더하여, 그 마땅함은 천년에 한 번 있을 아름다운 모임에 속하여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악(禮樂)과 정형(政刑)이 이로부터 나오니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성대함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정벌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처음으로 원구단(圜丘壇)을 세워 제사(祭祀)를 지내는 제도를 시행하여 여러 조상들이 천명(天命)을 받은 증거를 아름답게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선원전(璿源殿)의 보정(寶幀)에 사모함을 더하니 이에 세상이 깨끗하게 다스려지기에 이르렀고, 조경단(肇慶壇)의 세밀한 예의가 일어나 깊고 영원히 모시기에 이르니 이로 인하여 옛날의 도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인(仁)을 다하는 것이고 의(義)의 지극함이니 여러 사람들의 칭송하여 모시기를 원하여 다만 열렬히 오래 사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제 보록(寶籙)의 신령스러운 잣대로 춘추(春秋)의 높은 곳에 나아감을 바라며, 임금의 태도를 강건하게 세웠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정치를 하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았습니다. 임금의 자리를 자손에게 물려주고는 오직 저녁의 경치를 즐기는데 전념하였습니다.
「나는 비자(丕子)의 책임이 있으니 만 가지 기틀에 수고로움 끼칠 수 없다. 천하의 높은 것으로써 기르고, 일기(一紀)동안 한가함을 취하여 자연스럽게 거쳐하며, 항상 위대한 노인에게서 즐거움을 이어 본뜨니 어찌 작은 병에 고달픈 뜻을 보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저 하늘의 뜻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백신(百神)이 주단(周壇)의 벽(璧)에 숨는 새벽에 휘(諱)를 받드니, 남은 백성들이 형호(荊湖)의 활을 슬퍼하여 골목에서 목이 메이고 거리에서 구르니 하늘과 땅에서 슬픔이 가득합니다. 깊은 어짐과 두터운 은택을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을 갱장(羹牆)에 부칩니다. 아득한 소자는 이 일이 힘겹도록 큰 것을 근심하나, 오직 큰일은 본래 스스로 다하는 바가 있으니 가르침이 이어지는 바가 없음을 슬퍼할 뿐입니다. 아침과 저녁은 영원히 어긋나는 것이니 슬퍼하는 것인즉 기약이 있음과 먼 것입니다. 열흘과 한 달이 쉽게 바뀌니 둥근 언덕을 이에 점칩니다. 슬픈 부르짖음은 상순(湘巡)에 미치지 못하나, 금곡(金谷)에 옛날 정해 놓은 자리는 공자(孔子)와 안자(安子)를 합장한 곳처럼 신묘하고 이치에 맞습니다. 이에 성대한 의식을 마지막 뜻을 받들어 따르고자 하니, 어찌 상덕(象德)의 아름다운 칭호를 열거하겠습니까? 문(文)과 무(武)에 빛나고 문채가 있으며, 어질고 효성스러워 법을 이루고 바르게 살펴서 날로 하늘을 사모하였음을 표현하여 여덟 글자를 들어서 믿음을 빛내니, 금(金)을 칠하고 옥(玉)에 새겨 칠묘(七廟)에 보이고 아름다움을 드날립니다. 삼가 사신(使臣)을 보내 시호(諡號)를 높이는 옥책문(玉冊文)을 받으니 이르기를, ‘문헌 무장 인익 정효(文獻武章仁翼貞孝)’라 하였고 묘호(廟號)를 이르기를, ‘고종(高宗)’이라 하였습니다. 공경하고 은혜로우며 도리에 밝아 심신(心身)을 삼가며, 자세하고 정성스럽게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였습니다. 성덕(盛德)과 대업이 천추(千秋)동안 국사(國史)에 빛나고, 아름답고 빛나는 넉넉한 책략은 백세(百世)토록 후손들에게 이어질 것입니다. 오호 슬프도다. 삼가 말씀 올립니다."
하였다. 【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이재곤(李載崐)이 제술하였다.】


【원본】 7책 10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0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2월 27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시호 책보(諡號冊寶)를 올리고 이어 개명정 별전(改銘旌別奠)을 행하였다.

 

2월 28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덕홍전(德弘殿)에서 정부 총대(政府總代) 체신 대신(遞信大臣) 노다 우타로〔野田卯太郞〕 이하를 접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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