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조선이 망한 이유를 입체적으로 분석해보자

싸라리리 2025. 3. 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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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세기 후반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

19세기 후반,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중국(청나라), 일본, 러시아,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서 세력 확장을 노리며 조선을 둘러싼 정치·외교적 환경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청나라는 오랫동안 조선의 상국으로 군림해 왔지만, 19세기 중반 아편전쟁(1840~1842)과 태평천국의 난(1851~1864) 등을 거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서구 열강에게 여러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국력이 약화되었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러시아는 극동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을 세우며 조선과 만주 지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특히 조선이 청과 일본 사이에서 약해진 틈을 타 남하 정책을 펼쳤고, 이는 일본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서구 열강(영국, 프랑스, 미국 등)은 중국에서의 이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조선에도 관심을 보였다. 미국은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었고, 영국과 프랑스도 조선의 개항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조선은 서구 열강보다는 여전히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 속에서 외교적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을 통해 빠르게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서구식 군대와 산업을 도입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당시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하면서 군사력과 인구가 늘었다. 1869년 병부성(兵部省)을 설치하고, 1873년에는 영국에서 더글러스 교관단을 초빙하여 육군의 근대적 제도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1872년에는 제2차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빙해 해군의 근대화를 도모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일본은 1883년부터 '군확 8개년 계획'에 따라 국가 예산의 20% 이상을 군사 부문에 투입하며 군비를 확장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혁명에 따른 근대적 인구 증가가 나타났습니다. 에도 시대 말기인 19세기 중반 일본의 인구는 약 3,300만 명이었으며, 메이지 초기인 19세기 후반에는 약 4,400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899년 대한제국이 조사한 전국 인구는 약 1,600만 명 정도로(실제 인구보다 적게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1,800만 명을 넘지 않는다고 본다)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조선인구의 3배가 조금 안되는 인구를 가진 강대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아시아 내에서 서구 열강들 처럼, 주변 국가들을 식민지화하는 전략적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정한론 등을 핵심기조로 하여 아시아 대륙으로 진출하려했다. 정한론(征韓論, 1870년대)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일본이 군사력을 키우고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조선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 계층의 불만을 해소하는 정치적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을 서구 열강만큼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1880년 김홍집이 청나라에서 돌아오며 가져온 『조선책략(朝鮮策略)』은 일본을 새로운 위협으로 경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서구 열강과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개화파 관료들은 오히려 비판을 받았고, 이후 이를 계기로 1881년 이언적·이항로 등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며 반외세 운동을 벌였다.

 


 

 

2. 세도정치에 의한 정치 체제의 붕괴와 개혁의 실패

조선 후기 정치 체제는 점차 기능을 상실하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무너지고, 세도 정치가 극심해지면서 국정 운영은 특정 가문에 의해 좌우되었다. 정치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부패와 무능이 쌓여갔고, 이에 대한 반발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조선 후기 정치의 붕괴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세도 정치의 심화이다. 정조가 사망한 후, 왕권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특정 가문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본격화되었다. 

특정 가문(주로 왕의 어머니쪽 가문)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능한 왕을 옹위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부패한 관리들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조선을 지배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세도 가문은 국왕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린 왕을 즉위시키거나, 정치적 감각이 부족한 왕을 옹립했다. 정조가 사망한 후, 그의 개혁 정책을 이어갈 수 있는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 세도 정치는 지속될 수 없었기에, 세도 가문은 왕권이 약한 국왕을 세우는 데 집중했다.

  • 순조(재위 1800~1834):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11세의 순조가 즉위했다. 당시 정조의 개혁 정치가 이어질 경우 세도 정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정순왕후 김씨(정조의 계비)**와 안동 김씨 세력이 국정을 장악했다. 이들은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며 권력을 독점했다. 이후 순조가 성인이 된 뒤에도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 없도록 주변을 친인척 세력으로 채우고, 그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차단했다.
  • 헌종(재위 1834~1849): 순조가 사망한 후, 안동 김씨 세력은 또다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8세의 헌종을 즉위시켰다. 어린 왕이 즉위하면 실질적인 권력은 왕이 아니라 외척들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세도 가문에게 유리했다. 헌종이 성인이 된 후에도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며, 결국 그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
  • 철종(재위 1849~1863): 철종은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정치적 배경이 없는 인물이었다. 순조의 서자(庶子)였던 은언군의 후손으로, 강화도에서 일반 백성처럼 살던 인물을 왕으로 세운 것은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삼기 위해 철종을 즉위시켰다. 그가 왕이 된 후에도 정국 운영에 개입할 능력이 없었으며, 풍양 조씨 세력이 모든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처럼 세도 정치 가문은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린 왕이나 정치 경험이 없는 왕을 즉위시켰으며, 국왕을 철저히 무력화했다.

 

세도 정치가들은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대신,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관리로 임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중앙과 지방에서 철저한 권력 독점을 유지할 수 있었다.

  • 매관매직(賣官賣職):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만연했다. 세도 가문은 국왕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가문과 친척들에게 주요 직책을 몰아주었다. 높은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세도 가문에 막대한 뇌물을 바쳐야 했으며, 이를 위해 지방 관리들은 백성을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극심해진 것도 이와 같은 부패 구조 때문이었다.
  • 정실 인사(情實人事): 관리를 임명하는 기준은 능력이 아니라 혈연과 인맥이었다. 예를 들어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김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 주요 관직을 독차지했고, 풍양 조씨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조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했다. 이는 국가 운영의 전문성을 저하시켰고, 정국이 무능한 관리들로 채워지면서 행정 마비를 초래했다.
  • 비효율적인 행정 구조: 세도 정치하에서 관직은 단순한 권력의 도구로 전락했다. 지방 관료들은 중앙 세도 가문에 뇌물을 바치기 위해 백성을 더욱 가혹하게 수탈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지방에서의 행정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세도 가문은 왕이 실질적인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여러 견제 장치를 두었고, 정치적 감시망을 가동했다.

  • 내부 감시 체계 운영: 국왕이 자주적인 정치를 시도할 경우 이를 감시하고 차단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순조가 친정을 시도하려 할 때마다 안동 김씨 세력은 신하들을 동원하여 정치 개입을 막았다.
  • 붕당 정치의 완전한 종말: 정조가 탕평책을 통해 붕당 정치의 폐해를 줄이려 했으나, 세도 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사실상 정당(붕당)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 모든 정치는 특정 가문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반대 세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구조로 변질되었다.
  • 국왕의 인사권 박탈: 정상적인 정치 체제에서는 왕이 신하들을 직접 임명하고 국정을 운영해야 하지만, 세도 정치는 이를 원천 차단했다. 모든 주요 인사는 세도 가문 내부에서 결정되었으며, 왕은 단순히 서류에 도장을 찍는 형식적인 역할만 수행했다. 

둘째, 정치 개혁의 실패이다. 19세기 중반,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세도 정치를 종식시키려 했지만, 급진적인 개혁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경복궁을 중건하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지만, 결국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지 못한 채 권력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민씨 세력이 득세하면서 개혁은 좌절되고, 오히려 외세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명성황후(민비)는 국왕인 고종을 대신하여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는 개혁보다는 권력 유지와 외세 의존에 초점이 맞춰졌고, 결과적으로 조선의 정치적 붕괴를 가속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세도 정치의 연장선에서 친인척 위주의 정치를 펼쳤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으나, 명성황후가 점차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그녀에 의한 세도 정치가 다시 부활하였다. 민승호, 민겸호, 민영익 등의 친척들이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매관매직 등을 통해 조선 정부의 체제와 기능을 무너뜨렸다.

  • 민겸호(閔謙鎬), 명성황후의 친척이자 고위 관리였던 그는 주요 관직을 돈을 받고 판매하며 국가 재정을 개인적으로 착복했다. 지방 수령직(목사, 부사)도 매관매직을 통해 임명되었으며, 이를 구매한 관리들은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극심한 백성 수탈을 자행했다.
  • 1883년 민씨 정권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기존 동전보다 가치가 5배 높은 당오전을 대량 발행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기존 화폐와 큰 차이 없는 가격에 거래되어,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경제적 혼란을 심화시켜 백성과 상인들의 피해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재정을 더욱 파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 민겸호는 군자금을 횡령하고 병사들의 봉급을 밀가루나 썩은 쌀로 지급했다. 이에 구식 군대(별기군에 밀려 차별받던 군인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 민영익, 민영환 등 명성황후의 친척들은 각 지방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양반 토지 소유자들도 피해를 입었으며, 농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3. 무력한 왕권과 무능한 군주

세도정치의 관성에서 왕으로 선택된 고종은 이 과정에서 스스로 정치적 무능을 보여준다. 아버지 대원군과 처인 명성왕후의 갈등 속에서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개항 이후 조선은 점차 자주적인 정책을 펴기 어려워졌다.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하면서 국정 운영이 혼란에 빠졌고, 일본, 청나라, 러시아 등 외세가 조선 내정에 개입하게 된다. 특히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는 외세의 간섭 속에서 추진되었고 결국 지속되지 못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주성을 회복하려 했지만, 이미 일본이 실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흥선대원군은 섭정 기간(1863~1873) 동안 강력한 왕권 강화를 추진하며 외척 세력을 억제하고, 삼정(三政) 개혁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인해 서양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와 같은 외세와의 충돌이 발생했다. 또한, 지나친 경복궁 중건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으며, 대원군의 강압적인 개혁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 결과적으로 왕권강화는 실패하고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며 대원군은 실각했다.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이 다시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임오군란의 진압 후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요청하여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청나라로 압송시켰다. 동학농민운동 발생 시에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왔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고, 청나라와 전쟁(청·일 전쟁, 1894~1895)을 벌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고, 일본이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연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大使)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러시아 군대의 조선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일본은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을미사변)했다. 이후 일본은 고종에게 강요하여 친일 내각을 구성하게 했고, 조선의 정치권력은 사실상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고종의 행보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는 대한제국 선포와 헤이그 특사 파 역시 고종의 강한 의지보다는 주변 상황과 측근들의 압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임기중에 국가의 체제가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두 눈 뜨고 지켜보면서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했으며, 이미 모든 개혁과 세력의 견제가 실패한 상황에서 의미 없는 근대제국 선포나, 국제 회의에 특사를 파견한다고 다른 나라들이 관심가져줄 리 없다. 이런 제도와 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주변 관리들의 젊은 혈기에 동조하는 정도의 선택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리하고 나서의 감상? 반성?

 

19세기 후반, 조선을  노리는 세력은 많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서구 열강들과 일본, 러시아... 청나라는 애매하니까 뺀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세도정치처럼 자신의 지위만을 지키려했던 민비도 문제고, 쇄국으로 눈과 귀를 닫고 국제정세를 살피지도 않은 채 왕권강화만 하려했던 흥선대원군도 칭찬하긴 어렵다고 본다.

 

그래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생각 없이 누군가에게 의존하기만 했던 고종의 무능이라고 생각한다. 집권 초기 어려서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 대원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조금 큰 후에 와이프가 아버지를 폐위 시킨 후에는 와이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서는 러시아에, 결국엔 일본 관료들에게 의존하기만 했다. 고종은 43년 7개월동안 왕으로 있었다. 조선에서 영조(52년) 다음으로 오래 집권한 왕이다. 고종 다음은 숙종(45년3개월)이다. 특징적이지 않은가? 왕권이 강했고, 장수했던 영조를 제외하면, 무능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국가의 흥망은 하나의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능한 군주는 그 모든 이유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할까? 군주가 무능할 수록 집권은 길어진다. 백성들의 삶은 그만큼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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