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실록2권 철종1년 1850년 9월
9월 2일 경인
김병기(金炳冀)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으니, 중비(中批)였다.
9월 4일 임진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9월 5일 계사
김위(金鍏)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학수(李鶴秀)를 형조 판서로, 권대긍(權大肯)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9월 6일 갑오
태백성이 나타났다.
9월 7일 을미
이가우(李嘉愚)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원내(院內)에 있는 승지를 불러 보았다.
9월 8일 병신
인정전(仁政殿)에서 추도기(秋到記)를 행하였다. 강경(講經)으로 유학 임헌대(任憲大)와 부(賦)로 유학 박효정(朴孝正)을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9월 10일 무술
약원에서 희정당에 입진하였다.
이기연(李紀淵)을 판의금부사로, 구장화(具鏘和)를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9월 11일 기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를 행하였다.
9월 13일 신축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9월 15일 계묘
효정전(孝定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희정당에서 약원의 입진과 차대를 하였다.
전 정(正) 김동헌(金東獻)·이휘령(李彙寧)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라 명하였으니, 대신의 주청으로 인한 것이었다.
9월 17일 을사
서리가 내렸다.
진강하였다.
9월 18일 병오
진강하였다.
조기영(趙冀永)을 판의금부사로, 홍기섭(洪耆燮)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9일 정미
진강하였다.
9월 20일 무신
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의 입진(入診)과 진강을 하였다.
9월 20일 무신
소대하였다.
9월 21일 기유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9월 22일 경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진강하였다.
9월 23일 신해
진강하였다.
9월 24일 임자
진강하였다.
9월 24일 임자
춘당대에 나아가 삼청(三廳)027) 과 서북 별부료 군관(西北別付料軍官)028) 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9월 25일 계축
진강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윤가기(尹可基)에게 신리(伸理)029) 의 은전을 베풀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26일 갑인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9월 27일 을묘
진강하였다.
김양순(金陽淳)의 일에 대하여 정계(停啓)할 것을 명하였다.
원의(院議)에서 성명(成命)030) 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啓請)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원의가 필요하단 말이냐? 바로 반포(頒布)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연차(聯箚)하여 【대사헌 김위(金鍏), 대사간 이교영(李敎英), 지평 유정환(兪貞煥), 헌납 이양신(李亮信)이다.】 성명을 빨리 거둘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본래 간쟁(諫爭)할 만한 단서도 없는 일이니, 빨리 정계하라."
하였다.
9월 28일 병진
진강하였다.
옥당에서 연차하여 【응교 김경현(金敬鉉), 부응교 이인기(李寅夔), 교리 김회명(金會明)·이승수(李升洙), 부교리 김세호(金世鎬)·이삼현(李參鉉), 수찬 강노(姜㳣), 부수찬 박승수(朴昇壽)이다.】 빨리 성명을 거둘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양사의 비답에 하유하였다."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들이 연차하여 빨리 성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이 어찌 삼사(三司)의 직책과 같겠는가? 경 등의 말은 더욱 뜻밖이니, 번거롭게 할 것이 없다."
하였다.
9월 29일 정사
진강하였다.
9월 30일 무오
진강하였다.
위원군(渭原郡)의 탕은(帑銀)을 금년부터는 대전(代錢)으로 상납케 하라고 명하였다.
서좌보(徐左輔)를 한성부 판윤으로, 심의면(沈宜冕)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정신(李鼎臣)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