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6권 철종5년 1854년 3월

싸라리리 2025. 5. 1. 08:29
반응형

3월 5일 갑진

김보근(金輔根)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3월 7일 병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정시(庭試) 문무과(文武科)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3월 8일 정미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새로 급제한 이들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3월 9일 무신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3월 10일 기유

파주목(坡州牧) 행궁(行宮)에 나아가 유숙(留宿)하였다.

 

3월 11일 경술

인릉(仁陵)에 나아가 친제(親祭)하고, 이어서 장릉(長陵)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으며, 3읍 유생(三邑儒生)의 응제(應製)를 파평관(坡平館)에서 베풀고, 부(賦)에 합격한 유학(幼學) 이종률(李鍾律)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들은즉 교하(交河)의 옛날에 있었던 포흠(逋欠)을 나누어 받아 폐해가 소민(小民)에게 미친다고 하니, 특별히 탕감(蕩減)하여 조정의 우휼(優恤)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3월 12일 신해

은언군(恩彦君)·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용성 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의 묘소(墓所)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환궁(還宮)하였다.

 

3월 13일 임자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조연흥(趙然興)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3월 16일 을묘

돌아온 세 사신(使臣)을 소견(召見)하였다.

 

3월 17일 병진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이경재(李經在)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남석규(南錫圭)를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3월 18일 정사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함흥(咸興)·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의 의대(衣襨)와 향촉(香燭)을 친히 전하고,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성원묵(成原默)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서유훈(徐有薰)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3월 19일 무오

북원(北苑)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참반 유무(參班儒武)에게 응제(應製)와 시사(試射)를 행하여, 명(銘)에 현감(縣監) 이경호(李京鎬)·진사(進士) 김병시(金炳始)·사용(司勇) 김병필(金炳弼)·한량(閑良) 김병상(金炳商) 등 6인을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3월 20일 기미

입격(入格)한 유생(儒生)을 소견(召見)하였다.

 

3월 21일 경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서총대과(瑞葱臺科)를 행하였다.

 

3월 22일 신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춘도기(春到記)를 행하여, 강(講)에 진사(進士) 박영(朴鍈)과 부(賦)에 진사(進士) 정천화(鄭天和)를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오일선(吳一善)을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3월 24일 계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 하향(夏享)의 서계(誓戒)012)  를 행하였다.

 

3월 25일 갑자

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수원(水原)·광주(廣州)의 유수(留守)는 혹 원임 대신(原任大臣)으로 차견(差遣)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의 주청(奏請)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3월 27일 병인

혜성(彗星)이 사라졌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