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실록9권 철종8년 1857년 12월
12월 1일 무신
삭전(朔奠)에 조전(朝奠)을 겸행하였다.
박내만(朴來萬)을 이조 참의로, 박제소(朴齊韶)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정시용(鄭始容)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12월 5일 임자
이희경(李熙絅)을 총융사(摠戎使)로, 이규철(李圭徹)을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12월 10일 정사
충청도 암행 어사 서승보(徐承輔)를 불러서 접견하고 서계(書啓)에 의하여 면천(沔川)의 전 군수(郡守) 이관영(李寬永), 임천 군수(林川郡守) 이진만(李搢萬), 비인 현감(庇仁縣監) 윤양호(尹養浩), 예산(禮山)의 전 현감 홍훈모(洪薰謀), 공주(公州)의 전전 판관(判官) 심원열(沈遠悅), 태안(泰安)의 전전 군수 오치영(吳致永), 홍산(鴻山)의 전 현감 김기석(金箕錫), 해미(海美)의 전 현감 정명행(鄭明行), 연산(連山)의 전 현감 강훈(姜薰), 보령(保寧)의 전 현감 이구동(李九東), 수우후(水虞候) 신종응(申鍾應), 원산 별장(元山別將) 강응주(姜應周), 공주(公州)의 전 영장(營將) 이정희(李定熙), 홍주(洪州)의 전 영장 강집(姜集), 안흥(安興)의 전 첨사(僉使) 김순근(金順根) 등은 죄주고, 서산 군수(瑞山郡守) 윤자승(尹滋承)에게는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하였다.
12월 11일 무오
충청좌도 암행 어사 김익용(金益容)과 황해도 암행 어사 이유석(李裕奭)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충청도 〈암행 어사의〉 서계(書啓)에 의하여 천안 군수(天安郡守) 유장주(兪長柱), 청안 현감(淸安縣監) 윤자명(尹滋命), 황간 현감(黃澗縣監) 김용현(金用鉉), 진천(鎭川)의 전 현감 이항신(李恒信), 괴산(槐山)의 전 군수 황유수(黃裕秀), 옥천(沃川)의 전 군수 유정환(兪廷煥), 성환(成歡)의 전전 찰방(察訪) 맹노술(孟魯述), 전전 병사(兵使) 이인희(李寅熙), 충주(忠州)의 전전 영장(營將) 이승명(李承命) 등은 죄주고, 진천 현감(鎭川縣監) 송병일(宋秉一)은 포장하여 승서(陞敍)하였다.
황해도 〈암행 어사의〉 서계(書啓)에 의하여 수안(遂安)의 전 군수 이용익(李容翼), 문화 현감(文化縣監) 이세익(李世翼), 김천 군수(金川郡守) 김기석(金箕錫), 서흥(瑞興)의 전전 부사 김의순(金宜淳), 봉산(鳳山)의 전 군수 오현우(吳顯佑), 평산(平山)의 전 현감 이관연(李觀淵), 강령(康領)의 전 현감 이양신(李亮信), 전전 현감 이민도(李敏道), 전전 병사(兵使) 조우석(趙禹錫), 전 중군(中軍) 임상현(林相賢), 전 병우후(兵虞候) 심병규(沈秉奎), 전전 병우후 황익훈(黃翼薰), 등산 첨사(登山僉使) 이명식(李命植), 정방 별장(正方別將) 임학진(林鶴鎭), 대현 별장(大峴別將) 노태정(盧泰錠) 등은 죄주고, 황주 목사(黃州牧使) 이시민(李時敏)에게는 새서(璽書)와 표리(表裏)를 내리고 초도(椒島)의 전 첨사(僉使) 이완희(李完熙)는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하였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차자를 올려 광혈(壙穴)에 임어하겠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경 등이 극력 청한 것은 인하여 대여(大轝)를 수행하여 성심(誠心)을 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아직도 슬프로 사모하는 마음 끝이 없다. 그런데 이제 날씨가 매우 춥다는 것으로 아울러 광혈에 임어하는 것까지도 안타깝게 만류하니, 나 소자(小子)의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통원(慟冤)이 더욱 그칠 데가 없다. 바라건대 경은 다시 이 일 때문에 서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12일 기미
납전(臘奠)에 조전(朝奠)을 겸행하였다.
민영위(閔泳緯)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3일 경신
사시(巳時)에 찬궁(欑宮)을 열고 계빈전(啓嬪奠)을 올리면서 조전(朝奠)도 겸행하였다.
12월 14일 신유
김보근(金輔根)을 원접사(遠接使)로, 김병국(金炳國)을 관반사(館伴使)로 차하(差下)하였다.
12월 15일 임술
망전(望奠)에 조전(朝奠)을 겸행하였다.
조전(朝奠)을 행하였다.
12월 16일 계해
대행 대왕 대비전(大行大王大妃殿)의 영가(靈駕)가 출발하여 산릉(山陵)으로 나아갔다.
홍화문(弘化門) 밖에 나아가 영가(靈駕)를 봉사(奉辭)하였다.
12월 17일 갑자
산릉에 나아가 행례(行禮)하였다. 재궁(梓宮)에 나아가 봉심(奉審)을 끝마치고 나서 이어 능상(陵上)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비각(碑閣)도 봉심하였다. 아침 상식(上食)을 행하고 이어 인릉(仁陵)137) 에 나아가 정자각(丁字閣)을 봉심하였다.
견전(遣奠)을 행하였다.
대내(大內)에서 대행 대왕 대비의 행록(行錄)을 내렸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아! 우리 자성(慈聖)을 나 소자(小子)가 어떻게 감히 이름지어 말할 수 있겠는가? 기유년138) 선왕(先王)께서 승하하였을 때를 당하여 나 소자(小子)를 영종(英宗)의 혈손(血孫)이라 하여 어렵고도 큰 서업(緖業)을 맡기고서 열조(列祖)의 심법(心法)으로 계칙하였다. 종사(宗社)의 부탁과 생민(生民)의 기대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하다고 하시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 절검(節儉)해야 하는 것, 독서(讀書)하면서 유신(儒臣)을 인접해야 하는 것, 대신(大臣)을 예우(禮遇)하고 존경해야 되는 것에 대해 글자마다 분명하고 자세하게 해석하여 간곡하게 지금까지 귀에 대고 얘기하고 마주하여 명령하 듯이 부지런히 하여 마지 않는 여운이 쟁쟁하다.
나의 태모(太母)께서는 임·사(任姒)139) 의 부덕(婦德)으로 나의 황고(皇考)를 도왔고 나의 황형(皇兄)과 우리 헌종 대황(憲宗大王) 및 나 소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교회(敎誨)하였다. 소자는 9년 동안 태모를 의지하여 살아 왔고 힘입어 성취(成就)되었으므로 자은(慈恩)·자덕(慈德)을 부모처럼 믿었고 의지하였다. 나 소자가 불효(不孝)한 탓으로 하늘이 도와주지를 않아서 갑자기 망극한 슬픔을 당하였는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듯 몸부림치면서 통곡해도 딸라갈 수 없음을 한스러워 하는 가운데 삼가 자덕(慈德)의 만분의 일이나마 써서 내린다. 매양 진전(眞殿)의 다례(茶禮) 때에는 찬선(饌膳)을 반드시 직접 점검하여 조비(措備)했는데 공경스럽게 하고 신중을 기하였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친림(親臨)할 수는 없었어도 미리 기일에 앞서 경칙(警飭)하면서 항상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지내지 않은 것 같다는 성념(聖念)을 지니셨다. 능원(陵圓)과 침조(寢兆)가 흡족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항상 잊지 않고 생각했는데 면봉(緬奉)할 때에 이르러서는 진봉(進奉)하는 의대(衣襨)·복완(服玩) 등 제구(諸具)를 일일이 직접 점검하였다. 대내(大內)에서 조비(措備)하는 제전(祭奠)에 드는 각종 조제품(造製品)은 반드시 먼저 간품(看品)한 뒤에 봉진(封進)하였으며, 현궁(玄宮)140) 에서 꺼내는 날부터 봉하(奉下)하는 날에 이르기까지 따라가지 못함을 한하듯이 애통해 하면서 초상(初喪) 때처럼 지극히 공경스럽게 하고 지극히 정성스럽게 하였으므로 우러러 감동하고 흠모스러워 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입으시는 의대(衣襨)는 겨울에는 명주이고 여름에는 모시였는데 매양 깨끗이 세탁하여 입으셨으며, 진어하시는 선수(膳羞)도 상선(常膳)에 불과하였는데 기용(器用)은 절대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하지 말게 함으로써 몸소 솔선하는 검덕(檢德)을 보이셨다.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만백성을 인접하는 더없이 지극한 인택(仁澤)이 먼 지방에까지 미쳐 간 것은 우리 동방(東方)의 대소 신민(臣民)이 다같이 첨앙(瞻仰)한 바이다.
임자년141) 내구(內舅)를 매복(枚卜)142) 할 때 여쭈니 사문(私門)이 너무 성만(盛滿)하다는 것으로 만류하여 저지하기를 마지 않았으며 침식(寢食)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한 것을 여러날 동안 풀지 않았었다. 이는 평일 가득차면 덜림이 있고 겸손하면 유익이 있다는 성덕(盛德)인 것으로 흠앙(欽仰)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어머니에 대해 누군들 3년 동안의 사랑을 받지 않았겠는가마는 소자는 태모(太母)에게 9년 동안 사랑을 받았으니, 종신(終身)토록 하늘처럼 끝없는 사모가 있게 되었다. 나를 돌보아 감싸주고 나를 길러주어 의복(衣服)·음식(飮食)·질병(疾病)·한난(寒暖)·주소(晝宵)에 품안에 있는 어린 아기처럼 생각하였으니, 이 생명 이 세상에 살면서 그 은덕을 갚을 방법이 없다. 하늘이여, 원통하여 그저 망극하기만 할 뿐이다."
하였다.
입주전(立主奠)을 행하였다.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재우제(再虞祭) 축문(祝文)의 구어(句語)를 전혀 신중히 살피지 않았습니다. 사전(祀典)은 지극히 중한 것이어서 왜곡되이 용서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으니, 지어 올린 해당 옥당(玉堂)에게는 찬배(竄配)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18일 을축
재우제를 행하였다.
아침 상식(上食)과 사릉례(辭陵禮)를 행하고 영여(靈轝)를 모시고 반우(返虞)하였다.
하교하기를,
"대례(大禮)를 잘 치루었으나 아픈 마음은 깊고도 간절하다. 호번(浩繁)한 능역(陵役)은 도감(都監)에서 거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기읍(畿邑)에 끼쳤을 허다한 폐단을 반드시 없을 것임을 보장하기 어렵다. 더구나 또 광주(廣州)에서 전적으로 담당했는 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지난번 종당(終當)에는 뜻을 보이겠다는 것으로 하교한 바가 있었으니, 진휼(軫恤)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상례(常例)를 적용하겠는가? 해유수(該留守)를 이미 비당(備堂)에 겸임하게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대신(大臣)들과 의논하게 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는 모든 일은 사의를 헤아려 구별하여 기어이 아래에까지 미치는 혜택이 있게 하라. 그리고 인로(靷路)가 경유한 곳은 각항(各項)을 진배(進排)한 고을과 함께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울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방향으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여사군(轝士軍)이 분주히 정성을 다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가상하게 다한 적에 대해서는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시민(市民)들이 힘을 바친 것은 가장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공인(貢人)들이 대령(待令)하면서 진배(進排)할 즈음에도 반드시 폐단이 있었을 것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오래된 포흠(逋欠)이나 요역(徭役)을 헤아려 견감(蠲減)시킴으로써 조정에서 돌보아 구휼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12월 19일 병인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로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현수(玄隧)143) 가 영원히 막혔으니 더욱 망극함이 새롭다. 이런 때 이런 말을 나는 듣고 싶지 않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재계(再啓)하니, 비답하기를,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억지로 번거롭게 하는가?"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앞서의 비답에서 이미 다 이야기 했으니 양지(諒知)하기 바란다. 양전(兩殿)의 상선(常膳)은 마땅히 우러러 권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2월 20일 정묘
효정전(孝正殿)에 나아가 삼우제(三虞祭)를 행하였다.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로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나의 지극한 애통함에 있어 참으로 행할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재계(再啓)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는데도 오히려 이렇게 번거롭게 진달하니, 실로 이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다."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차마 무슨 마음으로 즉시 따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21일 무진
약원에서 구계(口啓)로 복선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 등의 정성이 이렇게 간절하고도 지극하니, 마땅히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
전라우도 암행 어사 성이호(成彛鎬)를 불러서 접견하고 서계(書啓)에 의하여 금산(錦山)의 전 군수 김재헌(金在獻), 무안 현감(務安縣監) 이상억(李象億), 만경 현령(萬頃縣令) 김원희(金遠喜), 영광(靈光)의 전 군수 김회면(金會明), 진도(珍島)의 전 군수 정극현(鄭克鉉), 부안(扶安)의 전전 현감 홍긍주(洪兢周), 무장(茂長)의 전 현감 정기면(鄭基勉), 전전 현감 홍종운(洪鍾雲), 해남(海南)의 전 현감 유종(柳淙), 함평(咸平)의 전전 현감 홍선용(洪選容), 태인(泰仁)의 전 현감 이승경(李承敬), 청암(靑巖)의 전 찰방(察訪) 조창교(趙昌敎), 제원(濟原)의 전 찰방 안시협(安時協), 나주(羅州)의 전 영장(營將) 홍봉주(洪鳳周), 법성 첨사(法聖僉使) 심의영(沈宜泳), 군산(群山)의 전 첨사(僉使) 조존항(趙存恒), 이진 만호(梨津萬戶) 홍기영(洪基永), 임자도 첨사(荏子島僉使) 최문철(崔文哲), 금모포 만호(黔毛浦萬戶) 이명록(李命祿) 등에게는 죄를 주고, 용안 현감(龍安縣監) 윤태철(尹泰喆)에게는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하였다.
12월 22일 기사
효정전(孝正殿)에 나아가 사우제(四虞祭)를 행하였다.
산릉(山陵)의 안릉제(安陵祭)를 행하였다.
12월 24일 신미
효정전에 나아가 오우제(五虞祭)를 행하였다.
묘호(廟號)와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할 때의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이하와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에 보토(補土)할 때 이를 감동(監董)한 당상(堂上)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제조인 상호군(上護軍) 이돈영(李敦榮), 좌참찬 남병철(南秉哲), 호군(護軍) 김병학(金炳學), 도청(都廳)인 응교(應敎) 이면우(李勉愚), 부사과(副司果) 박도빈(朴道彬), 대축(大祝)인 헌납(獻納) 윤치성(尹致聖), 독옥책관(讀玉冊官)인 호군(護軍) 이공익(李公翼), 독금보관(讀金寶官)인 호군(護軍) 임백경(任百經), 욕주 대축(浴主大祝)인 헌납 윤치성(尹致聖), 존호를 추상할 때의 독옥책관인 형조 참판 한정교(韓正敎), 독금보관안 부호군 박제소(朴齊韶), 보토(補土)할 때의 당상(堂上)인 여주 목사(驪州牧使) 이병문(李秉文)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였다.
조연흥(趙然興)을 이조 참판으로, 김대근(金大根)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12월 26일 계유
효정전(孝正殿)에 나아가 육우제(六虞祭)를 행하였다.
12월 27일 갑술
효정전에 나아가 칠우제(七虞祭)를 지냈다.
12월 29일 병자
효정전에 나아가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을 불러서 접견했는데 졸곡(卒哭) 뒤에 문후(問候)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자성(慈聖)께서 평일 인덕(仁德)으로 감싸는 자애로운 은택이 생민(生民)들에게 입혀져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공장(工匠)들도 정성을 다하여 일에 나아와 모두 힘을 바치려고 했고 날씨도 또 잇따라 좋아서 대례(大禮)를 순조롭게 완수하였다."
하니, 영부사 정원용(鄭元容)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듣건대 8월 이후이 궤전(饋奠)은 모두 직접 행하였고 곡(哭)은 반드시 애통스럽게 하여 절제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광혈(壙穴)에 임어했을 때 곡읍(哭泣)하는 절차를 보니 슬픔이 목소리에 발현되어 억제할 수 없었으니, 타고 난 천성(天性)이 가슴에서 우러 나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 등은 여항(閭巷) 사이에서도 이같은 지극한 효행은 보지 못했습니다. 옛날 등문공은 한번 슬픈 안색으로 곡읍(哭泣)한 일이 있었는데144) 성인(聖人)이 허여하여 경서(經書)에 실리는 데 이르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행한 것은 옛날의 일보다 월등히 뛰어나 위사(衛士)·군도(軍徒)까지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신 등이 흠탄(欽歎)하는 마음이 어찌 그지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8월에서부터 어선(御膳)에 소식(素食)을 행하여 염장(塩醬)을 진어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변함없이 하였으며 일전에 상선(常膳)을 회복시키라는 청을 힘써 따르겠다고 하였으나 아직껏 복선(復膳)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데 성궁(聖躬)이 어찌 손상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예법에 절도(節度)가 있는 것은 대나무의 마디를 넘을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 성경(聖經)에 기재되어 있으니, 굽혀서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법은 또한 차등이 있는 것이어서 제왕(帝王)의 효도와 경대부(卿大夫)의 효도와 사서인(士序人)의 효도가 있는 것입니다. 경대부는 우제(虞祭)·졸곡(卒哭) 뒤에는 공사(公事)를 언급해야 하기 때문에 사서인이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입니다. 더구나 제왕은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중함을 소유하고 있는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것은 이에 종사를 위하고 생민을 위한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국세(國勢)가 위태롭고 생민이 지칠대로 지쳐 있으니, 부탁할 데와 우러러 의지할 데가 전하의 한몸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 내키는 대로 경솔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봄날의 햇살이 점차 길어지고 있으니 부지런한 마음으로 학문과 정무(政務)를 강론하고 혹 의난점(疑難點)이 있으면 승지(承旨)·유신(儒臣)·각신(閣臣)을 불러서 접견하여 일에 따라 자문하소서. 그 가운데 중대한 것은 묘당(廟堂)에 순문(詢問)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보전하는 방도에 대해 부지런히 힘쓴다면 이것이 지효(至孝) 가운데 큰 것이고 또한 자은(慈恩)·자덕(慈德)을 추보(追報)하는 도리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대신(大臣)의 말을 들으니 마땅히 더욱 힘쓰도록 하겠다. 그러나 슬픈 마음이 오랠수럭 더욱 간절하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슬퍼하면서 따라갈 수 없어 마음 아파하는 것은 이것이 사람의 아들로서는 자연스러운 인정인 것이다. 내가 평소 받들어 섬길 때에도 항상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지금은 더욱 미칠 길이 없다."
하니, 정원용이 아뢰기를,
"성실하고 전일하게 하면서도 부족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이것이 대효(大孝)의 지정(至情)이요 지성(至誠)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의 아들이 부모에 대해 누군들 효도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어버이가 생존해 있을 적에는 일에 따라 뜻을 받들면서 정성을 다해 봉양(奉養)해야만이 바야흐로 효성을 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버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부질없이 곡읍(哭泣)하면서 슬퍼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그리고 인정에서 발현된 것이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인데 슬피 곡읍하는 것만을 효도로 여긴다면 듣기에도 부끄러운 것이니, 이것을 어찌 효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얼굴을 가리고 우느라고 말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예경(禮經)에 슬픔을 절제(節制)하라는 글이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굽어 따르소서. 지금 성교(聖敎)를 받드니 참으로 하늘에 뿌리한 효성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정리(情理)로 지금껏 버티어 오느라니 망극한 마음만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인산(因山) 때에 배종(陪從)했던 승지(承旨) 이인기(李寅夔)·한계원(韓啓源), 애책(哀冊)·옥백(玉帛)을 올릴 때의 예방 승지(禮房承旨) 홍우길(洪祐吉), 대거 승지(對擧承旨) 이유응(李𥙿膺), 섭통례(攝通禮) 김규서(金奎瑞) 박규서(朴奎瑞)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였다.
삼도감(三都監)의 총호사(摠護使) 이하와 대여(大轝)를 배진(陪進)한 대신(大臣)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빈전 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인 지사(知事) 김대근(金大根) 대호군(大護軍) 윤치정(尹致定), 우참찬 조병기(趙秉轝), 병조 판서 김병국(金炳國), 도청(都廳)인 사성(司成) 이재원(李載元) 종척 집사(宗戚執事)인 형조 참의 김병주(金炳㴤), 병조 정랑 박제인(朴齊寅), 부호군(副護軍) 정해상(鄭海尙), 산릉 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인 공조 판서 김학성(金學性), 대호군 조득림(趙得林), 광주 유수 홍열모(洪說謨), 도청인 부사직(副司直) 이윤하(李崙夏), 부수찬 강난형(姜蘭馨), 국장 도감 당상(國葬都監堂上)인 예조 판서 김정집(金鼎集), 도청인 부사과(副司果) 김병집(金炳潗)·성재구(成載球), 우주 서사관(虞主書寫官)인 부호군(副護軍) 신석희(申錫禧), 봉폐관(封閉官)인 집의(執義) 정유(鄭鎏)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였다.
12월 30일 정축
종묘(宗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