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12권 철종11년 1860년 4월

싸라리리 2025. 5. 1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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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을축

소대(召對)하였다.

 

4월 2일 병인

종묘(宗廟)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심의면(沈宜冕)을 도총관(都摠管)으로 삼았는데, 중비(中批)에 의한 것이었다.

 

이종우(李鍾愚)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강난형(姜蘭馨)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3일 정묘

종묘(宗廟) 하향제(夏享祭)를 행하였다.

 

4월 4일 무진

소대(召對)하였다.

 

4월 5일 기사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심경택(沈敬澤)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한권(翰圈)을 행하여, 정기회(鄭基會)·김익현(金翼鉉)·조병식(趙秉式)·윤우석(尹宇錫)·조희일(趙熙一)·정범조(鄭範朝)·김완수(金完秀)·남일우(南一愚)를 뽑았다.

 

4월 7일 신미

정건조(鄭健朝)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4월 8일 임신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윤우석(尹宇錫)·조병식(趙秉式)·정기회(鄭基會)·김익현(金翼鉉)을 뽑았다.

 

4월 10일 갑술

오길선(吳吉善)을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이신영(李信泳)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권용(權容)을 삼도 수군 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로, 신명온(申命溫)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4월 11일 을해

이원하(李元夏)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4월 12일 병자

심의면(沈宜冕)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백희수(白希洙)를 전라도 병마 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장인식(張寅植)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정두원(鄭斗源)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안주목(安州牧)의 소호(燒戶)에 대해 휼전(恤典)을 내리게 하였다.

 

4월 14일 무인

명천부(明川府)의 불탄 가호(家戶)에 대해 휼전(恤典)을 내리게 하였다.

 

4월 17일 신사

박제소(朴齊韶)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4월 20일 갑신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위유사(慰諭使)의 사행(使行)이 지금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과연 모두 일일이 집을 지어 안도(安堵)하고 있는가? 관북(關北)008)                                             의 재해를 입은 제읍(諸邑)에 대해서는 지난날 존휼(存恤)하는 거조가 있었다. 감영(監營)과 고을의 신하들도 또한 마음을 다하여 대양(對揚)하여 혹시라도 이산(離散)하여 유랑(流浪)하는 우환이 없게 하라. 매양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한밤중에 나도 모르게 여러 번 일어나곤 한다. 은자(銀子) 1천 냥(兩), 단목(丹木) 3천 근(斤), 백반(白礬) 5백 근(斤)을 별도로 대내(大內)로부터 내려 주니, 묘당(廟堂)에서 강원·함경 양도(兩道)에 분배하여 다친 사람처럼 보고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려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2일 병술

조태현(趙台顯)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4월 27일 신묘

김병운(金炳雲)을 형조 판서로, 조연창(趙然昌)을 경기 관찰사로, 김세균(金世均)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4월 29일 계사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의 주사(主祀)를 정하여 세우고 인하여 부조지전(不祧之典)009)                                             을 베풀며, 증 지평(贈持平)                     이기지(李器之)는 아경(亞卿)010)                                             으로 뛰어 올려 증직하고 인하여 작설지전(綽楔之典)011)                                             을 베풀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음사인(蔭仕人)이 통정(通政)이 된 뒤에는 돈도(敦都)012)                                             에 차제(差除)하는 것을 구규(舊規)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내만(朴來萬)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서형순(徐衡淳)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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