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13권 철종12년 1861년 7월

싸라리리 2025. 5. 1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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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정해

이돈영(李敦榮)을 이조 판서로, 이종우(李鍾愚)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7월 3일 기축

금천(金川)·신계(新溪) 등 고을의 표몰(漂沒)하고 무너진 민호(民戶)에 휼전(恤典)을 주었다.

 

7월 4일 경인

곡산부(谷山府)의 표몰한 민호에 휼전(恤典)을 주었다.

 

7월 6일 임진

심의면(沈宜冕)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7월 7일 계사

서흥(瑞興)·곡산(谷山)·평산(平山) 등 고을의 표몰한 민호에 휼전을 주었다.

 

7월 8일 갑오

비변사(備邊司)에서 계언(啓言)하기를,
"곡산(谷山) 한 고을 안에서 5백여 호(戶)가 표몰했거나 무너져서 가산이 탕진되고 실업(失業)하였으므로, 놀랍고 참혹함은 견딜 수 없었는데, 따뜻한 윤음(綸音)을 특별히 내리시어 덕의(德意)로 가엾게 여겨, 집을 지어 정착(定着)하게 하는 방도와 공전(公錢)을 회감(會減)하라는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도백(道伯)과 수령(守令)이 반드시 모든 것을 다 극진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유(慰諭)하는 사행(使行)을 비록 보내지는 않았더라도 근례(近例)에 의하여 공전(公錢)을 집집마다 나누어 주되,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몸소 촌리(村里)에 다니면서 이 전교(傳敎)를 가지고 일일이 선유(宣諭)하게 하며, 되도록 빨리 집을 지어 정착하는 방도를 영읍(營邑)에서 힘써 동독(董督)하고 돕게 하여 그 거행한 형편을 속히 아뢰도록 하라는 뜻을 청컨대 해당 도신(道臣)에게 신칙(申飭)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유계(遺戒)를 비록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군명(君命)도 또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데, 한결같이 머뭇거리고 나와서 명을 받을 뜻이 없으니, 사체(事體)로써 헤아리건대 어찌 이와 같음을 용납하겠는가? 이조 판서 이돈영(李敦榮)에게 간삭(刊削)의 전(典)을 시행하라."
하였다.

 

서유훈(徐有薰)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7월 9일 을미

공주(公州)·정산(定山) 등 고을의 표몰(漂沒)한 민호에 휼전(恤典)을 주었다.

 

7월 10일 병신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회령(會寧)의 행 호군(行護軍) 오갑량(吳甲良)이 현충사(顯忠祠)의 팔의사(八義士)에게 증직(贈職)을 더하는 일로써 진소(陳疏)하였습니다. 옛날 임진란(壬辰亂) 때에 왜병(倭兵)이 북변을 유린(蹂躪)하자 토적(土賊)의 내응(內應)하는 자가 왕자(王子)와 재상(宰相)을 잡아 보내는 불측(不測)한 변(變)이 경각(頃刻)에 박두하여 있을 적에 사인(士人) 신세준(申世俊)·오윤적(吳允迪) 등 8인이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토적과 왜병을 섬멸하였으므로 행조(行朝)에서 모두 당하직(堂下職)을 제수하였고, 뒤에 숙종(肅宗)·영조(英祖) 양조(兩朝)에서 특별히 사액(祠額)026)  을 내려 주셨습니다. 단지 그 외걸(嵬傑)했던 공(功)으로써 증직하였기 때문에 참의(參議)와 정랑(正郞)에 그쳤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한(恨)을 품어 세대가 지나도 오히려 잊지 못하고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오니, 가포(加褒)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함이 합당합니다. 신세준·오윤적에게는 모두 병조 참판을 가증(加贈)하고, 최언영(崔彦英) 등 6인에게는 병조 참의를 가증하며, 선고(宣誥)하는 날에는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현충사에 치제(致祭)하게 하여 북방(北方)의 풍성(風聲)을 격려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고(故) 판서(判書) 신(臣) 김위(金鍏)는 효행(孝行)이 순독(純篤)하였으니, 청컨대 작설(綽楔)의 전(典)027)  을 베푸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홍원섭(洪元燮)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심의원(沈宜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12일 무술

중화부(中和府)에 찬배(竄配)한 죄인(罪人) 임백수(任百秀)를 방면(放免)하였다.

 

7월 16일 임인

이돈영(李敦榮)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7월 18일 갑진

윤치수(尹致秀)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7월 20일 병오

혜성(彗星)이 소멸(消滅)하였다.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도당 회권(都堂會圈)028)  을 행하여, 한치용(韓致容)·기경현(奇慶鉉)·이돈우(李敦禹)·정현덕(鄭顯德)·유도휘(柳道彙)·이운익(李雲翼)·홍순학(洪淳學)·김익현(金翼鉉)·조병식(趙秉式)·임승준(任承準)·이인명(李寅命)·정기회(鄭基會)·이정로(李正魯)·신단(申檀)·윤우석(尹宇錫)·윤태건(尹泰健)·조성교(趙性敎)·김원성(金元性)·박이도(朴履道)·홍철주(洪徹周)·송철만(宋徹萬)·이기정(李基正)·강건(姜鍵)·임희진(林喜鎭)·이응진(李應辰)·김민수(金民秀)·민희식(閔羲軾)을 뽑았다.

 

7월 21일 정미

선산(善山)·합천(陜川) 등 고을의 표몰하고 무너진 민호에 휼전(恤典)을 주었다.

 

7월 26일 임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칠석제(七夕製)를 행하였다.

 

김병필(金炳弼)을 이조 참판으로, 이경재(李經在)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후조(柳厚祚)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기세(鄭基世)를 예조 판서로, 서상직(徐相稷)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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