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2권 헌종1년 1835년 10월

싸라리리 2025. 5. 20.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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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병진

임금이 혼전(魂殿)에서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서 권강(勸講)하였다.

 

10월 2일 정사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3일 무오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김난순(金蘭淳)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4일 기미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5일 경신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6일 신유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증광 문무과 복시(增廣文武科覆試)를 설행하여 문과에서 신좌모(申佐模) 등 33인을 선발하고, 무과에서 선시영(宣時永) 등 2백 18인을 선발하였다.

 

10월 7일 임술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8일 계해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9일 갑자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는데, 《소학(小學)》을 강(講)하였다. 각신(閣臣) 서유구(徐有榘)가 말하기를,
"이 문단(文段)에서 논한 바는 척불(斥佛)의 말입니다. 불도(佛道)는 본래 서이(西夷)에서 나온 것인데,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에 처음으로 중국(中國)에 들어왔고, 훨씬 내려와 육조(六朝)에 이르러서는 점점 더욱 치성(熾盛)해져 깊이 파고 들었고, 당송(唐宋)에 즈음하여서는 총명하고 준수한 인재들이 그에 유인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아뢰기를 채 마치지 않아 임금이 말하기를,
"불도에 어떤 즐거워할 만한 것이 있기에 이와 같이 깊이 빠져든 것인가?"
하니, 서유구가 말하기를,
"거기에 이른바 신묘(神妙)함을 극도로 연구하여 변화(變化)의 도(道)를 두루 안다는 것인데, 이는 모두가 그 총명하고 준수한 인재들이 즐겨 듣는 바이나, 실제로는 그것이 마침내는 허무하고 적멸(寂滅)하여 이륜(彝倫)을 훼절(毁絶)하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주(程朱)가 불도를 배척한 공이 하우(夏禹)가 홍수(洪水)를 막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조(我朝)에 들어온 이후로 치교(治敎)가 크게 밝아져 이단(異端)의 설(說)이 횃불이 꺼지는 것과 같았을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정도(正道)와 이단의 분변은 반드시 사물(事物)의 이치를 궁구한 연후에야 비로소 마음과 눈이 환히 밝아지는 것인데, 깊이 연구하여 안다는 것도 또 한갓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구하는 공부란 모름지기 독서(讀書)를 바탕으로 해야 하고 독서의 요체는 오직 의심스럽고 어려운 것들을 캐묻고 밝혀내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 한 조목에 성의(聖意)를 두소서."
하였다.

 

10월 11일 병인

별과(別科)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신은(新恩)을 희정당에서 소견(召見)하였다.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보토(補土)를 맡았던 당상(堂上) 김유근(金逌根)·권돈인(權敦仁)을 희정당에서 소견하였다. 산릉(山陵)에 보토를 한 뒤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김유근이 아뢰기를,
"신(臣)이 이번 길에 들으니, 본군(本郡)의 유망호(流亡戶)가 마땅히 바쳐야 할 신구(新舊) 환곡(還穀)의 각종 곡물이 꼭 4백 석이 되어 장차 형세상 이웃과 친족에게 침급(侵及)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본군은 봄부터 지금까지 치우치게 큰 역사를 맡아 이미 실농(失農)한데다가 또 흉년을 만났으니, 만약 유망(流亡)한 사람들의 환곡을 이웃과 친족에게 가중시킨다면, 백성들이 구렁에 넘어져 죽을 것은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탕감하는 거조는 아래서 우러러 청할 것이 아니나, 본 바가 지극히 딱하기 때문에 감히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것은 백성들의 뼈를 깎는 듯한 원통함이다. 또 능침(陵寢)을 받들고 있는 곳이니, 특별한 은전(恩典)이 없을 수 없다. 특별히 탕감하라."
하였다.

 

10월 12일 정묘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산릉(山陵)의 보토(補土)를 담당했던 당상(堂上)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10월 13일 무진

증광 문·무과 전시(增廣文武科殿試)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설행하여, 문과에서 이진익(李晋翼) 등 37인을 뽑고 무과에서 허운로(許雲老) 등 4백 10인을 뽑았다.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14일 기사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15일 경오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16일 신미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17일 임신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김기은(金箕殷)을 이조 판서로, 정원용(鄭元容)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경재(李景在)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8일 계유

세 사신(使臣)을 희정당에서 소견(召見)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박회수(朴晦壽)·부사(副使) 조두순(趙斗淳)·서장관(書狀官) 한진정(韓鎭庭)이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19일 갑술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20일 을해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고, 친히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희정당에서 주강(晝講)하였다.

 

10월 21일 병자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심상규(沈象奎)를 종묘 증수 도감 도제조(宗廟增修都監都提調)로,김유근(金逌根)·이지연(李止淵)·박기수(朴岐壽)를 제조(提調)로 삼았다.

 

10월 22일 정축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23일 무인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24일 기묘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증수 도감 도청(增修都監都廳)으로 김대근(金大根)·윤흥규(尹興圭)를 차하(差下)하였다.

 

10월 25일 경진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26일 신사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27일 임오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28일 계미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29일 갑신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0월 30일 을유

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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