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5권 헌종4년 1838년 윤4월

싸라리리 2025. 5. 2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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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4월 1일 임신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희정당에서 소대(召對)하고 《사략(史略)》을 강(講)하였다.

 

정기선(鄭基善)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윤4월 2일 계유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각신(閣臣)                     정원용(鄭元容)이 말하기를,
"듣건대, 어제 소대(召對)에서 《사략(史略)》을 강(講)하였다 하니, 매우 좋습니다. 강규(講規)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하자, 정원용이 말하기를,
"상번(上番)한 옥당(玉堂)이 독주(讀奏)한 후에 제신이 차례차례 연속해서 읽었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상번한 옥당이 읽은 글을 돌아가며 읽게 하였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로 하여금 상번한 옥당이 읽은 글을 돌아가며 읽게 하였다."
하였다. 정원용이 말하기를,
"뜻을 해석하여 아뢰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니, 정원용이 말하기를,
"비록 뜻을 해석하지 않더라도 전하께서는 그 뜻을 모두 이해하셨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하였다. 정원용이 말하기를,
"독서(讀書)하는 것은 거기에 대한 지식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상번한 옥당이 읽은 후에 그들로 하여금 한 번 뜻을 해석하여 상세하게 아뢰도록 하고, 또 돌아가며 숙독(熟讀)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진강(進講)할 때와 같이 해석하여 아뢰게 하는 것이 좋단 말인가?"
하였는데, 정원용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후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하겠다."
하였다.

 

윤4월 3일 갑술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4일 을해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5일 병자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6일 정축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7일 무인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성대(尹聲大)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윤4월 8일 기묘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각신(閣臣)                     정기선(鄭基善)이 말하기를,
"신 등이 진시(辰時) 초에 합(閤)에 나아갔는데, 사시(巳時)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인접(引接)을 받았습니다. 삼가 대내(大內)에서 무슨 시사(視事)가 있어서 개강(開講)의 시각이 이렇게 지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료(臣僚)를 연접(延接)하시는 체모는 본래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또 아침의 일기가 청명(淸明)한 시기를 놓치면 바로 몹시 더운 한낮을 당하게 되므로, 강독(講讀)에 방해될 뿐만 아니라, 절선(節宣)하시는 방법에도 손상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명일(明日)부터는 좌목 단자(座目單子)016)                                             를 들어가 바치면, 곧 불러 연접하여 정시(正時)에 개강(開講)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윤4월 9일 경진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10일 신사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11일 임오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홍학연(洪學淵)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윤4월 12일 계미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13일 갑신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순종대왕실록(純宗大王實錄)》이 완성되었다.

 

윤4월 14일 을유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15일 병술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16일 정해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17일 무자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18일 기축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19일 경인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20일 신묘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21일 임진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22일 계사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23일 갑오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실록 총재관(實錄摠裁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베풀고, 도청 당상(都廳堂上)                     신재식(申在植), 도청(都廳)                     심의승(沈宜升)·서원순(徐元淳)·조운철(趙雲澈)·남헌교(南獻敎)를 아울러 가자(加資)하였다.

 

부수찬(副修撰)                     강시영(姜時永)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는데, 사국(史局)에 사진(仕進)하여 오랫동안 부지런히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윤4월 24일 을미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25일 병신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26일 정유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윤4월 27일 무술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강계(江界) 마마해진(馬馬海鎭)의 진장(鎭將)이 작년 가을에 피인(彼人)에게 잡혀 갔다는 말이 풍문으로 전해진 지 이미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인(家人)들의 소첩(訴牒)이 있기까지 하였으므로, 본도(本道)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조사하도록 하였더니, 비록 전해진 말과 어긋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본 사건을 알 만한 명확한 근인(根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수령(守令)을 이미 도(道)에서 아뢰어 논죄(論罪)하여 감단(勘斷)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록 순영(巡營)과 병영(兵營)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 일이 부내(部內)에서 발생한 지 1년이 넘도록 숨겨 두고 있었으니, 그 당시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도 아울러 견파(譴罷)의 법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下敎)하기를,
"전에 없던 일이라 매우 경탄(驚歎)할 만하다. 이 일을 주문(奏聞)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자세히 상의(商議)하여 뒷 일차(日次)에 품정(稟定)하도록 하라."
하였다.

 

중비(中批)로 김조근(金祖根)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윤4월 28일 기해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정기선(鄭基善)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함평현(咸平縣)                     사직단(社稷壇)의 신위판(神位板)을 걸식(乞食)하는 아이가 불태웠으므로, 명하여 다시 만들어 봉안(奉安)하고 의율(議律)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대신(大臣)들로 하여금 재량(裁量)하여 계문(啓聞)하도록 하였는데, 나이가 어리다 하여 차율(次律)을 시행하였다.

 

서희순(徐憙淳)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
"순종조(純宗朝)의 시정기(時政記)와 실록(實錄)의 초초(初草)017)                                             와 중초(中草)를 한두 번 보고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洗草)018)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4월 29일 경자

희정당에서 진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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