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8권 헌종7년 1841년 2월

싸라리리 2025. 5. 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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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경신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2월 8일 계해

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2월 9일 갑자

김대근(金大根)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11일 병인

조병헌(趙秉憲)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13일 무진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대왕 대비(大王大妃)에게 책보(冊寶)를 올렸다.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사유(赦宥)하였다.

 

2월 14일 기사

상호 도감(上號都監)의 당상(堂上)·낭청(郞廳)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주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위(金鍏), 대거 승지(對擧承旨) 성수묵(成遂默), 도감 제조(都監提調) 서희순(徐憙淳)·조병현(趙秉鉉), 도청(都廳) 조운승(曹雲承)·신석우(申錫愚), 옥책문 서사관(玉冊文書寫官) 홍경모(洪敬謨)를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흥인군(興寅君) 최응(最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호숭(呼嵩)022)  하는 반열(班列)에서 물러나와 특별히 자급(資級)을 제수하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의 형 시응(是應)과 신은 같은 품계(品階)인데, 신이 만약 먼저 오르면 한 부(府) 안에서 아우가 수당(首堂)이 되고 형이 차당(次堂)이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경의 말이 당연하다. 청한 대로 시행하겠다."
하고, 이어서 흥완군(興完君) 시응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2월 15일 경오

하교하기를,
"자덕(慈德)이 더욱 융성하시므로 책보(冊寶)를 삼가 올려 내가 기뻐하는 정성을 조금 펼 수 있었다. 널리 경하하는 도리에 있어서 특례라 하여 구애받음은 마땅하지 못하니, 공인(貢人)의 묵은 미납(未納) 3천 석과 시민(市民)의 한 달 요역(徭役)과 반인(泮人)의 10일 현방속(懸房贖)과 각도의 묵은 환자곡[還上穀] 10만 석을 모두 탕감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행회(行會)023)  하게 하라."
하였다.

 

2월 16일 신미

하교하기를,
"고(故) 판돈녕(判敦寧) 김유근(金逌根)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9일 갑술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돈영(李敦榮)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견(召見)하였는데, 사폐(辭陛)하기 때문이다.

 

2월 20일 을해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아뢰기를,
"연전에 문신(文臣)이 수령(守令)이 되는 열 고을을 도로 본래의 벼슬자리로 만들 것을 연석(筵席)에서 계품(啓稟)하였었는데, 지금 음사(蔭仕)의 허사과(虛司果)를 보면 자못 적체(積滯)될 염려가 있으므로, 조금 변통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음직(蔭職)을 구처(區處)할 동안은 문신이 수령이 되는 열 고을을 전례대로 우선 편의에 따라 배정하여 의망(擬望)하고, 사직영(社稷令) 중의 문신 한 자리는 으레 승문원(承文院)의 참상(參上)을 의망하므로 번번이 구차하고 어려운 것을 걱정하게 되니, 이것은 이제부터 영구히 음직 자리로 만들도록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대저 천선(薦選)하는 법은 정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조금이라도 외람된 것이 있으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접때 청백리(淸白吏)를 수합(收合)하여 천거할 것을 연석에서 계품하여 윤허받았습니다. 삼가 《대전통편(大典通編)》을 상고하니, 천거조(薦擧條)에, ‘염근리(廉謹吏)는 2품 이상으로 하여금 각각 아는 바를 천거하게 하여 묘당(廟堂)에 써서 보낸다.’ 하였고, 또 정조(正祖) 때에 천주(薦主)가 된 사람들을 상고하니 또한 육조(六曹)의 당상(堂上)이 모두 참여한 듯한데, 때에 따른 조치는 고금(古今)이 다르고 벼슬자리의 많고 적은 것이 같지 않으므로 참작하여 절충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우선 정경(正卿) 이상과 비국 당상과 육조·한성부의 당상이 각각 천거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되, 또한 한 달 동안 한정하여 수합하라는 뜻으로 다시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이광정(李光正)을 형조 판서로, 이헌구(李憲球)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2월 26일 신사

김흥근(金興根)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27일 임오

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2월 28일 계미

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2월 29일 갑신

임금이 종묘(宗廟)·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는데, 춘알(春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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