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11권 헌종10년 1844년 10월

싸라리리 2025. 5. 3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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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갑오

휘정전(徽定殿)의 담제(禫祭)를 행하였다.

 

10월 3일 병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동향(冬享)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충청 감사                     강시영(姜時永)이 장계(狀啓)하기를,
"문의 현령(文義縣令)                     윤화(尹禾)는 모반(謀叛)한 죄인 이원덕(李遠德)의 누이의 사위이므로 연좌되어야 할 친족이 아니기는 하나 자목(字牧)의 직임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파출(罷黜)하소서."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금백(錦伯)이 문의 현령을 파출하기를 계청(啓請)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미 연좌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면, 이렇게 사람을 논하는 것은 법률에 어찌 제한이 있는 것이겠는가?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뒷 폐단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충청 감사                     강시영에게 월봉(越俸)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김영순(金英淳)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삼았다.

 

10월 4일 정유

흥정당(興政堂)에서 주강(晝講)하였다.

 

10월 5일 무술

흥정당에서 소대(召對)하였다.

 

10월 6일 기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납채례(納采禮)를 행하였다.

 

조기영(趙冀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계조(李啓朝)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10월 9일 임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납징례(納徵禮)를 행하였다.

 

10월 10일 계묘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10월 12일 을사

이정현(李定鉉)을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로, 이의식(李宜植)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0월 15일 무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고기례(告期禮)를 행하였다.

 

10월 16일 기유

개기 월식(皆旣月蝕)이 있었다.

 

관록(館祿)을 행하였다. 4점(點)을 얻은 권혐(權馦)·유치숭(兪致崇)·박제선(朴齊璿)·홍우건(洪祐健)·홍재중(洪在重)·김영수(金英秀)·윤치현(尹致賢)·조병준(趙秉駿)·김세균(金世均)·이삼현(李參鉉)·김경현(金敬鉉)·유진한(柳進翰)·유치선(兪致善)·엄석정(嚴錫鼎)·이교영(李敎英)·박영보(朴永輔)·정익조(鄭翊朝)·유안(柳晏)·심희순(沈熙淳)·홍희종(洪羲宗) 20인을 뽑았다.

 

10월 18일 신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홍씨(洪氏)를 왕비(王妃)로 책봉하였다.

 

10월 19일 임자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북평사(北評事)                     이현문(李玄文)은 내려갈 때 남의 청탁을 받고 양주(楊州) 사는 백성 이만정(李萬貞)을 남곤(濫棍)하여 죽게 하였습니다. 봉명 사신(奉命使臣)일지라도 사사로이 사람을 죽인 자는 또한 목숨을 갚은 것이 이미 본율(本律)에 있으므로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이현문은 평사의 직임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우선 파직(罷職)하고, 범한 죄상을 도신(道臣)을 시켜 법대로 거행하게 하고 본도의 수령(守令) 가운데에서 가평사(假評事)를 차정(差定)하여 감시(監市)하게 하라는 뜻으로 해도(該道)의 도신에게 알리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1일 갑인

임금이 본궁(本宮)에 나아가 친영(親迎)하였다.

 

광명전(光明殿)에서 동뢰연(同牢宴)039)                                             을 행하였다.

 

10월 22일 을묘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진하(陳賀)를 받았으며 사유(赦宥)하였다.

 

10월 24일 정사

김흥근(金興根)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0월 25일 무오

하교하기를,
"진규(進圭) 도승지(都承旨)                     홍학연(洪學淵)·전교관(傳敎官) 예방 승지(禮房承旨)                     홍종응(洪鍾應)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진하(陳賀) 때의 선교관(宣敎官)                     조도순(趙道淳)에게 가자하라."
하였다.

 

가례 도감 도제조(嘉禮都監都提調) 이하의 상전 별단(賞典別單)을 판하(判下)하고, 도청(都廳)                     응교(應敎)                     정세기(鄭世基)·부응교(副應敎)                     이시우(李時愚)·사옹원 정(司饔院正)                     김양근(金穰根)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10월 26일 기미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세 사신(使臣)                        【동지 정사(冬至正使)                           흥완군(興完君)                           시응(是應)·부사(副使)                           권대긍(權大肯)·서장관(書狀官)                           윤찬(尹穳)이다.】                      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했기 때문이다.

 

지평                     이교영(李敎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접때 민치문(閔致文)을 특진관(特進官)으로 초계(抄啓)하였는데, 어찌 무고(無故)한 자와 같이 보아 이렇게 혼동하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 형제에게는 벌이 서로 미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혹 참작하여 용서할 수 있는 작은 잘못이나 가벼운 허물을 가리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저 어찌 그 아들의 이름이 나국(拿鞫)하는 가운데에 있어 대론(臺論)이 바야흐로 준렬하고 율(律)이 감사(減死)에 그쳐 공론이 여전히 비등한데, 그 아비가 태연히 연신(筵臣)을 선택하는 데 참여할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기강으로 헤아려도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특진관                     민치문을 빨리 삭제하도록 명하고 전 부제학(副提學)                     김영순(金英淳)에게 경책(警責)을 시행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 일은 나도 의아하게 여겼는데, 네 말이 이러하니, 삭제하기를 청한 것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전 부제학을 경책한다는 것은 말이 매우 모호하니, 장차 무엇을 표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였다.

 

10월 29일 임술

임금이 태묘(太廟)와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고, 중궁전(中宮殿)이 묘현례(廟見禮)를 행하였다.

 

10월 30일 계해

난언(亂言)한 죄인 김재화(金載華)를 효수(梟首)하여 뭇사람을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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