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실록12권 헌종11년 1845년 11월
11월 1일 무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동향(冬享)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중희당(重熙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11월 3일 경신
좌의정 김도희(金道喜)가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휘정전(徽定殿)에서 옮겨 봉안하는 의절(儀節)을 한결같이 영소전(永昭殿)에서 옮겨 봉안할 때의 전례를 따르면 대신(大臣) 1원(員)과 각사(各司)의 당상(堂上)·낭관(郞官) 각 1원이 지영(祗迎)한 뒤에 그대로 배종(陪從)하고 백관(百官)이 지송(祗送)하는 절차는 없습니다. 전례가 무엇 때문에 이러하였는지 모르기는 하나, 신여(神轝)가 이미 궐외(闕外)에 나갔으면 신하의 도리로 헤아려도 사가(私家)에 누워 있지 않아야 할 듯하고 또 경릉(景陵)의 인산(因山)·발인(發靷)·반우(返虞) 때에 서울에 있는 백관은 다 문밖에서 영송(迎送)한 절차가 있었으니, 이것을 참작하면 이제만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유음(兪音)을 내려 해조(該曹)로 하여금 이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아뢴 것이 사체(事體)에 맞으니 이대로 시행하라."
하고, 이어서 춘조(春曹)046) 를 시켜 의주(儀註)를 고쳐 들이게 하였다.
이시재(李時在)를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영춘헌(迎春軒)에서 소대(召對)하였다.
11월 4일 신유
영춘헌에서 야대(夜對)하였다. 《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포의(布衣)의 서졸(書卒)은 그 어진 것을 아까워하였으나 쓰이지 않았다. 황헌(黃憲)을 썼다면 안제(安帝) 때에 반드시 볼 만한 정치가 많았을 것이다."
하매, 승지 이경재(李經在)가 말하기를,
"황헌(黃憲) 한 사람뿐이 아니라 한(漢)나라는 이 때에 어진 선비가 가장 많았습니다. 순숙(筍淑)·원낭(袁閬)·진번(陳蕃)·주거(周擧)는 다 한때의 명사인데 안제가 이런 사람을 쓰지 않았고 쓴 자는 환관(宦官)뿐이었으니, 한 나라의 기업(基業)이 점점 기울어져 간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환관을 신임한 것은 이미 화제(和帝) 때부터였다."
하였다.
11월 6일 계해
영춘헌(迎春軒)에서 야대(夜對)하였다.
11월 7일 갑자
휘정전(徽定殿)의 신련(神輦)을 경희궁(慶熙宮)의 영소전(永昭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임금이 홍화문(弘化門) 밖에서 지송(祗送)하였다.
11월 8일 을축
임금이 중희당(重熙堂)에 나아가 전 충청 감사 강시영(姜時永)을 소견(召見)하였다.
중희당에서 소대(召對)하였다. 《갱장록(羹墻錄)》을 강독(講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종(英宗) 때에는 태묘(太廟)의 제향(祭享)을 반드시 몸소 행하셨다."
하매, 승지 이시우(李時愚)가 말하기를,
"영종(英宗) 때에는 춘추가 이미 높아지신 뒤에도 사전(祀典)에 정성을 다하시는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때에는 춘추가 이미 높으신데도 제향에 쓴 음식을 반드시 곤의(袞衣)를 입고 법관(法冠)을 갖추고서 맛보셨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 태조의 이름을 휘(諱)하라고 명하신 것은 매우 성덕(盛德)의 일인데, 이름이 무슨 자인가?"
하매, 옥당(玉堂) 임긍수(林肯洙)가 말하기를,
"건(建)자입니다."
하였다.
11월 9일 병인
영춘헌(迎春軒)에서 야대(夜對)하였다. 《갱장록(羹墻錄)》을 강독(講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숙주(申叔舟)는 어찌하여 육신(六臣)이 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
하매, 승지 이시우(李時愚)가 말하기를,
"육신은 명절(名節)이 실로 백세(百世)에 특립(特立)한 무리인데, 어찌 사람마다 여기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하다, 육신의 절개여!"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것은 요(堯) 순(舜)의 일이니, 행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매, 이시우가 말하기를,
"힘써서 행하면 요순의 일을 사람들이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의 이 말씀에 신(臣)들은 적이 억울(抑鬱)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렵다고는 하나, 행하려 하면 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매, 이시우가 말하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실로 종사(宗社)의 그지 없는 복입니다."
하였다. 이시우가 말하기를,
"제12판(板)에 있는 권여불승(權輿不承)의 뜻을 전하께서 이미 아시겠지요?"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전(詩傳)》에 있다."
하였다. 각신(閣臣) 홍순목(洪淳穆)이 말하기를,
"진풍(秦風)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 큰 집이 깊고 넓더니 이제는 매양 먹을 때에 여유가 없다. 아! 권여(權輿)047) 를 잇지 못하는구나.’라는 것이 바로 그 시(詩)이겠지?"
하였다. 이시우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아까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일이라 하셨는데, 이것이 이른바 한 마디 말을 하여 나라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감격하여 우러러 권면할 것이 있습니다. 대개 무사(武事)는 국가가 전쟁에 대비하여 폐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마는, 수시로 연습하는 것은 장신(將臣)의 책임이고 본디 전하의 천직(天職) 안에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신의 집은 대궐 밖에 가까이 있는데, 접때 듣자옵건대, 전하께서 후원(後苑)에서 무사를 연습시키고 임석하여 보셨다 합니다. 대저 병기(兵器)라는 것은 볼 만한 물건이 아닌데, 사(射)만이 육예(六藝)의 하나를 차지한 것은 군자(君子)가 자기를 바루기 위한 것입니다. 화포(火炮)로 말하자면 성세(聲勢)가 웅렬(雄烈)하여 번번이 성궁(聖躬)을 경동(驚動)할 염려가 있는 것이 거의 한문제(漢文帝)가 비탈에서 말을 타고 달린 위험048) 보다 심합니다. 전하의 한 몸은 종사(宗社)와 백성이 관계되는 바인데, 어찌 스스로 가벼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뭇 신하가 함께 근심하는 바인데, 신이 외람되게 전석(前席)에 등대하였으니, 일찍부터 마음에 잊혀지지 않던 것을 한 번 아뢰지 않는다면 이는 신이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단연코 구호(舊好)를 버리고 강학(講學)에 전념하신다면 이는 전하께서 이미 허물을 고치신 것입니다. 일식(日蝕)·월식(月蝕)에 잠시 조금 이지러졌다가 곧 회복되는 것과 같으니, 어찌 본체(本體)의 광명(光明)에 손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또 잘못 생각할 우려가 있습니다.정명도(程明道)049) 의 절제는 거의 타고난 것이어서 명도가 나이 열예닐곱 때에는 사냥을 좋아하였으나 그 뒤에는 스스로 이 마음이 없어졌다 하였더니,주무숙(周茂叔)050) 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말을 쉽게 하는가? 다만 이 마음이 숨어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니, 어느 날 싹터 움직이면 처음과 같을 것이다.’ 하였는데, 12년 뒤 저물녘에 전야(田野)로 가다가 사냥하는 자를 보고 절로 기뻐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과연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숙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실로 먼저 안 것인데 명도는 12년 뒤에 경험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신이 어찌 감히 전하의 이 마음이 뒷날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더욱 더 살피소서."
하였다.
11월 11일 무진
대호군(大護軍) 조병귀(趙秉龜)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훈장(訓將)이 죽었으니, 지극히 놀랍고 슬프다. 이 중신(重臣)은 왕실(王室)을 위해 충성심을 다하여 공적(功績)을 나타냈으므로, 내가 의지하였는데, 이제는 그만이다. 졸한 대호군 조 병귀에게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역명(易名)051) 의 은전을 빨리 거행하며 동원 부기(東園副器)052) 1부(部)를 실어 보내고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며 상수(喪需)도 해조(該曹)로 하여금 후하게 실어 보내게 하라."
하였다. 조병귀는 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아들이다. 나이가 한창이고 뜻이 굳세어 자용(自用)을 좋아하고 해학(諧謔)을 잘하며 응대하는 것이 매우 민첩하였다. 신축년053) 이후로 사무의 부담이 매우 긴중(緊重)하였으나 여유 있게 처리하였으니, 대개 숙성한 재주 때문이다. 다만 일을 당하면 매우 각박하여 지나치게 자세히 살피는 것은 또한 그 성질이 그러한 것인데, 서사(胥史)054) 가 떼 지어 원망한 것은 아닌게 아니라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집안끼리 환담하는 자리에 출입하며 일에 앞서 규면(規勉)한 공로는 그가 죽고 나서 몇 해 뒤에 조금씩 알아 주는 바깥 사람들이 있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홍재룡(洪在龍)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았다.
11월 12일 기사
유기상(柳基常)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11월 13일 경오
김영근(金英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유창근(柳昌根)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이인희(李寅熙)를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윤희열(尹羲烈)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서상오(徐相五)를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11월 14일 신미
중희당(重熙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11월 15일 임신
중희당에서 소대하였다.
판부사(判府事) 권돈인(權敦仁)에게 다시 상직(相職)을 제배(除拜)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6일 계유
중희당에서 소대하였다.
11월 17일 갑술
중희당에서 소대하였다.
임금이 중희당에 나아가 승지(承旨)들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중희당에 나아가 전 함경 감사 성수묵(成遂默)을 소견(召見)하였다.
유상필(柳相弼)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11월 18일 을해
중희당에서 소대하였다.
11월 19일 병자
중희당에서 조강(朝講)하였다. 《논어(論語)》를 강독(講讀)하였다.
임금이 중희당에 나아가 전 경상 감사 홍종영(洪鍾英)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청북(淸北) 백성의 일에 대하여 늘 염려하는 바이나, 이 연말의 추위를 호소하는 때를 당하여 재해를 입은 끝에 과연 유리(流離)하여 살 곳을 잃는 백성이 없을 수 있겠는가? 방백(方伯)·수령(守令)이 반드시 뜻을 다하여 대양(對揚)하리라고 생각하나, 병침(丙枕)055) 의 근심에 불안하여 못 견디겠다. 발창(發倉)056) 할 만한 것은 발창하고 이전(移轉)할 만한 것은 이전하며 모든 조치에 관계되는 것을 제때에 장문(狀聞)하여 우리 서토(西土)의 백성을 살리라고 묘당(廟堂)을 시켜 삼현령(三懸鈴)으로 알리게 하라."
하였다.
11월 23일 경진
중희당에서 소대하였다. 《갱장록(羹墻錄)》을 강독(講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절용(節用)하기를 바라면 검약(儉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사치하려 하면 재물이 다하게 될 것이다."
하매, 옥당(玉堂) 임긍수(林肯洙)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번번이 검약을 숭상하는 방도를 염려하시며 근일에는 경연(經筵)에 나오실 때면 무명 옷을 입으시므로, 항간에서 이 말을 들은 자는 모두 기뻐하고 기리며 서로 경계하여 다시는 사치하고 화려한 옷을 가까이하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뜨는 것이 영향(影響)보다 빠르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열성(列聖) 때에는 검약을 숭상하는 덕이 성대하였거니와, 순 무명으로 갓끈을 만든 일까지 있었다."
하매, 승지 이경재(李經在)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묘(英廟) 때의 검덕(儉德)은 과연 탁월하였는데 옛일이 있었던 때로부터 오래 되지 않았으므로 또한 들은 것이 많다."
하매, 옥당 서상교(徐相敎)가 말하기를,
"당우(唐虞)057) 의 정치도 검약을 숭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요의 토계(土階)와 순의 진의(袗衣)058) 가 그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검약에서 사치로 들어가기는 쉬우나 사치에서 검약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매, 서상교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치는 위령(威令)으로 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매, 임긍수가 말하기를,
"이것은 엄준한 법령으로 금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전하께서 몸소 앞서서 아랫사람을 이끄시기에 달려 있고 한 번 전이(轉移)하는 사이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11월 26일 계미
중희당에서 소대하였다.
김정균(金鼎均)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정신(李鼎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28일 을유
중희당에서 주강(晝講)하였다.
영춘헌(迎春軒)에서 야대(夜對)하였다.
11월 29일 병술
중희당에서 소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