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실록14권 헌종13년 1847년 9월
9월 1일 정축
일식(日蝕)이 있었다.
9월 2일 무인
박영원(朴永元)을 공조 판서로, 김상우(金相宇)를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이희승(李熙昇)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9월 7일 계미
영부사(領府事) 조인영(趙寅永)이 상소하여 스스로 인퇴(引退)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이 추향(楸鄕)043) 에 머물러 있을 때 전함(前銜)이승헌(李承憲)의 소(疏)를 얻어 보았습니다. 그 견사(遣辭)가 패망(悖妄)하고 지의(指意)가 음험(陰險)한 것은 이미 천감(天鑑)에 통촉되었고 조정에서 성토한 것이 남김이 없었으니, 신은 외방에서 뒤미처 들어왔으므로 다시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습니다마는, 조신(朝臣) 이하의 어맥(語脈)을 미루어 보면, 신은 워낙 어리석거니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그날 청대(請對)한 자 가운데에서 신이 실로 수석(首席)이고 오늘날의 조신 가운데에서도 신이 실로 수석인데, 신도 이성(彝性)을 대강 갖추었으므로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의리를 대략 아니, 어찌 감히 전석(前席)에서 한 번 말씀드린 것을 가지고 직분을 다하였다고 핑계하여 스스로 인퇴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신이 문죄받아야 할 율(律)로 문죄하여 만세의 사책(史冊)을 빛내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 지났어도 아직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매우 서운할 뿐이다. 접때 도리에 어그러지는 소(疏)가 조신을 협잡하여 논한 것은 핑계이며 속에 감춘 생각에 뜻이 있었으니, 경(卿)이 이처럼 인퇴하는 것은 참으로 매우 지나치다. 더구나 경이 전석에서 간절히 아뢴 것은 오직 의약(醫藥)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말하는 자의 말은 그 뜻이 의약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어서 근거없이 헐뜯어 일망타진하려고 못하는 짓이 없다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경은 다시 제기하지 말라. 이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9월 10일 병술
임금이 수릉(綏陵)과 휘경원(徽慶園)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홍재철(洪在喆)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3일 기축
이약우(李若愚)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9월 20일 병신
임금이 성정각(誠正閣)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박회수(朴晦壽)가 아뢰기를,
"요즈음 듣자옵건대, 대내(大內)에서 영조(營造)하는 일은 새로 세우는 것이건 옛것을 수리하는 것이건 물론하고 일이 서로 잇달아 지금도 아직 그치지 않는다 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지금 영조하는 것은 반드시 장려(壯麗)하고 기교(奇巧)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경비(經費)에 손해를 끼치고 민력(民力)을 괴롭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은 보탬이 없고 급하지 않은 일이며 또 재용(財用)을 소모하고 검덕(儉德)을 손상할 만한 것입니다. 그 비용이 내장(內藏)에서 나오고 외부(外府)를 번거롭히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내외의 재물을 물론하고 다 백성에게서 나왔으니, 어찌 두 근원이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절약하는 일을 다하도록 힘쓰고 보탬이 없고 급하지 않은 일은 일체 줄여서 나가는 것이 들어오는 것보다 많지 않도록 힘쓰소서. 그러면 절로 백성과 국가에 보탬이 있을 것인데, 이것은 전하께서 뜻을 세우고 규례를 정하시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신의 구구한 희망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것이 매우 절실하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이목연(李穆淵)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원달(李源達)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21일 정유
중비(中批)로 조두순(趙斗淳)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조병현(趙秉鉉)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삼았다.
경상 감사 김공현(金公鉉)이 진주(晋州) 등 열세 고을에서 떠내려가고 무너진 민가가 1천 6백 3호(戶)이고 물에 빠지고 눌려 죽은 사람이 12명임을 아뢰었는데, 특별한 예로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9월 22일 무술
임금이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9월 23일 기해
청주(淸州) 등 고을의 떠내려가고 무너진 집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9월 24일 경자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총위영(總衛營)의 사방 기예(射放技藝)의 대비교(大比較)를 행하였다.
성정각(誠正閣)에서 함경도 암행 어사(咸鏡道暗行御史) 홍우건(洪祐健)을 소견(召見)하였다. 길주 목사(吉州牧使) 이주철(李周喆)·함흥 전전 판관(咸興前前判官) 조운시(趙雲始)·무산 전 부사(茂山前府使) 남석우(南錫禹)·고원 전 군수(高原前郡守) 정유목(鄭裕睦)·홍원 전 현감(洪原前縣監) 이한용(李漢容) 등을 차등을 두어 죄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이미 보았다마는,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이 과연 어떠한가?"
하매, 홍우건이 말하기를,
"바로잡아야 할 폐단은 이미 별단으로 아뢰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으로 말하면 오직 환정(還政)044) 과 전정(田政)일 뿐입니다. 본도는 부역이 자못 가볍고 상납해야 할 것은 거의 다 저축하여 두었으니, 이것은 실로 국가에서 특별히 염려한 덕의(德意)입니다. 오직 환정의 폐단 한 가지가 북방 백성의 뼈에 사무치는 고통인데 그렇지 않은 고을이 거의 없으니, 빨리 먼저 바로잡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환정의 폐단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매, 홍우건이 말하기를,
"북관(北關)의 열 고을은 공사곡(公私穀)에서 같이 녹봉(祿俸)을 내어 주고 한 창고에 섞어 두기 때문에 관장(官長)은 옮겨서 대여하기 쉽고 향리(鄕吏)는 따라서 나쁜 짓을 본뜨므로 점점 공고(公庫)가 비고 축나는 것이 날로 더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사곡을 한 창고에 섞어 두어서 그러한가?"
하매, 홍우건이 말하기를,
"북관은 과연 이 때문에 폐단이 됩니다마는, 남관(南關)은 이런 폐단이 없기는 하나 관장이 범용(犯用)하고 향리가 농간을 부려 간사한 방법이 갖가지로 나오므로 그 꼬투리가 한결같지 않습니다. 전정으로 말하면 본도에는 재상(災傷)을 잡는 규례가 없고 전년의 총수(摠數)에 비교하는 규례를 쓰므로, 묵은 밭이나 무너진 갯벌도 모두 재상으로 잡지 않고 해마다 백징(白徵)합니다. 북방 백성의 고통은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한번 개량(改量)하여 이 폐단을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연로(沿路)의 농사 형편은 어떠하던가?"
하매, 홍우건이 말하기를,
"북관은 지난해의 큰물 때문에 좋은 밭과 기름진 들이 모두 사태(沙汰) 안에 들어갔으므로 보기에 참으로 참혹한데 춘궁(春窮) 때의 생활은 더욱 황급하므로 얼마 안되는 곡식은 일할 때의 양식에 미치기 어렵고 가난한 백성은 경작할 겨를이 없었으니, 묵은 밭은 태반이 다 그렇습니다. 여름 곡식이 잘된 것을 비로소 보고 가을 농사가 흉작을 면하였다는 것을 뒤미처 들었으나, 백성의 식량이 어려운 것은 아직도 남은 근심이 많습니다. 남관은 야지(野地)에서는 많이 여문 것을 자못 기뻐하나 산협(山峽)에는 말라죽은 것이 여기저기 많습니다. 삼수(三水)·갑산(甲山)·후주(厚州)·장진(長津) 네 읍진(邑鎭)은 일찍이 서리가 내리는 탓으로 이미 흉년들 염려가 있으니, 참으로 매우 근심스러워 못 견디겠습니다. 연로의 각 고을은 관동(關東)의 네 고을이 흉년을 면하기가 또한 어렵고 경기의 고을들은 관동보다 조금 낫습니다."
하였다.
명천(明川)의 박종윤(朴宗允)의 옥안(獄案)은 상세하고 신중히 살펴서 품처(稟處)하고 그 아내는 본도(本道)를 시켜 각별히 돌보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암행 어사(咸鏡道暗行御史) 홍우건(洪祐健)이 아뢰기를,
"명천부(明川府)에 한 의옥(疑獄)이 있습니다. 네 번 검사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박종윤을 정범(正犯)이라 생각하여 신장(訊杖)을 때리다가 죽이게 되었는데, 그 아내 김조이(金召史)가 지아비의 비명(非命)을 슬퍼하고 억울함을 씻으려 마음에 맹세하여 여러 번 영읍(營邑)에 정소(呈訴)하여 세 번 천청(天聽)에 전달되었습니다. 천리 길을 여행하여 길에서 빌어먹으며 신이 종적을 나타내는 고을에는 가는 곳마다 와서 하소연하고 성문까지 따라와서 그 억울함을 씻어 주기를 바라니, 정상이 가엾고 절의(節義)가 정성스러운 것이 신명(神明)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습니다. 또 그 어린 딸은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인데 어미에게 복수를 권하고 그가 홀로 빈소(殯所)를 지키며 다섯 해 동안을 한결같이 밤낮으로 울부짖습니다. 먼 지방의 어리고 어리석은 자가 능히 윤리를 아는 것이 더욱 뛰어나니, 격려하는 도리로서 포미(褒美)하는 법을 시행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번 검사를 거쳐도 오히려 밝히지 못하였으므로 옥정(獄情)이 의심스러움을 알 수 있고, 김녀(金女)가 여러 해 동안 억울함을 호소하고 어린아이가 밤낮으로 울부짖는 것은 가엾을 뿐더러 또한 매우 가상하니, 본도에 신칙(申飭)하여 각별히 돌보라. 본안(本案)은 이미 도계(道啓)가 있으니, 추조(秋曹)를 시켜 충분히 상세하고 신중하게 살펴서 빨리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6일 임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묘 동향(太廟冬享)의 서계(誓戒)를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