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15권 헌종14년 1848년 2월

싸라리리 2025. 6. 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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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을사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춘향(春享)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2월 4일 무신

윤정현(尹定鉉)을 황해도 관찰사로, 박용수(朴容壽)를 강원도 관찰사로, 김상우(金相宇)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신소(申紹)를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신관호(申觀浩)를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이민교(李敏敎)를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2월 10일 갑인

임금이 성정각(誠正閣)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아뢰기를,
"무릇 과거(科擧)의 폐단에 관계되는 것으로 공(公)을 업신여기고 사(私)를 따르는 것보다 큰 것이 없는데, 근래의 풍기(風氣)는 공도(公道)라는 미명(美名)에 구애되어 오직 방안(榜眼)이 혹 화사(華奢)할까 염려하여 반드시 모양을 이루지 못한 가장 뒤지고 잡된 시권(試券)을 마음 써서 거두어 뽑으므로 방목(榜目)이 아닌게 아니라 거무튀튀하며, 글을 잘하고 참으로 재주가 있는 자는 모두 떨어지고 하찮고 남의 손을 빌린 자는 모두 시권(試券)이 입선(入選)에 참여되니, 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며, 방목에 낀 사람은 수종(隨從)하는 상천(常賤)이 절반도 넘습니다. 이제부터는 주시관(主試官)을 엄중히 신칙하여 감히 다시는 그릇된 버릇을 답습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근일 과시(科試)의 폐단은 어찌할 수 없을 지경이라 하겠다. 전후로 신칙한 것이 끝내 실효(實效)가 없으므로, 늘 개탄하는 바이다. 아뢴 것이 과연 절실하게 맞으니, 이 뒤로는 각별히 신칙(申飭)하여 그릇된 버릇을 통렬히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이돈영(李敦榮)·김기만(金箕晩)·김학성(金學性)을 정경(正卿)으로 발탁하였다.

 

김학성(金學性)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조병준(趙秉駿)을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으로 삼았다.

 

대사성(大司成)                     이우(李㘾)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이 공무 때문에 반궁(泮宮)에 들어가 강예당(講藝堂)을 살펴본 즉 위는 비가 새고 옆은 바람이 불어 들며 서까래는 썩어 있었습니다. 한 차례 여름 장마를 겪으면 무너지고 말 것이니, 한심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지금 국용(國用)이 넉넉하지 못하고 경비도 어려우나, 이 일로 말하자면 참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에 관계됩니다. 혹 지금 시기를 잃고 수리하지 않아 점점 세월이 갈수록 무너져 내려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앞으로 공사를 하는 비용이 몇 배가 될 뿐이 아닐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빨리 해사(該司)로 하여금 좋은 방법에 따라 조치하여 무너진 것을 수리함으로써 면목(面目)을 일신(一新)하게 하여 성화(聖化)에 빛이 있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반궁의 수개(修改)는 과연 급한 일에 관계되니, 묘당(廟堂)을 시켜 좋은 방법에 따라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2월 12일 병진

이약우(李若愚)를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이헌구(李憲球)를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2월 13일 정사

도당 회권(都堂會圈)012)                                             을 행하였다. 4점(點)인 이정서(李鼎敍)·정유(鄭鎏)·이휘규(李彙圭)·김우수(金禹洙)·유내유(柳來維)·유흥길(柳興吉)·남종삼(南鍾三)·윤행복(尹行福)·심의원(沈宜元)·목인재(睦仁纜)·이정신(李鼎信)·이유겸(李維謙)·박효묵(朴斅默)·윤철구(尹哲求)·박준우(朴浚愚)·홍우명(洪祐命)·권영수(權永秀)·윤육(尹堉)·이승수(李升洙)·이종호(李鍾浩)·홍병수(洪秉壽)·조헌영(趙獻永)·김병운(金炳雲)·김유연(金有淵)·서당보(徐堂輔)·정석조(鄭錫朝) 26인을 뽑았다.

 

2월 15일 기미

김기만(金箕晩)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2월 16일 경신

월식(月蝕)이 있었다.

 

2월 18일 임술

임금이 목릉(穆陵)과 원릉(元陵)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2월 19일 계해

하교하기를,
"올해는 우리 영묘(英廟)께서 무위(武威)를 드날려 난(亂)을 평정(平定)하신 지 두 번째 회갑(回甲)이다. 선릉(仙陵)에 지알(祗謁)하니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매우 절실하다. 접때 대신(大臣)이 아룀에 따라 이미 표충(表忠)·포충(褒忠) 두 사당에 치제(致祭)하였거니와, 난을 다스린 여러 신하의 충성과 노고에 대해서도 어찌 뜻을 보이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의 집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두 집의 사손(祀孫)을 모두 복직(復職)시켜 조용(調用)하라. 또 생각건대, 충성을 다하고 공훈을 세운 사람은 이들뿐이 아니나, 죄다 거론할 수 없으니, 다들 알아야 한다."
하였다.

 

목릉(穆陵)·원릉(元陵)에 친제(親祭)할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주었다. 집례(執禮) 부사과(副司果)                     김건수(金建銖)·대축(大祝) 부사과(副司果)                     유진오(兪鎭五)·예방 승지(禮房承旨)                     강기(姜𣹡)를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2월 25일 기사

이노병(李魯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백수(任百秀)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수안군(遂安郡)의 불탄 집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2월 30일 갑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총위영(總衛營)의 장관(將官)·장교(將校)의 별시사(別試射)013)                                             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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