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실록15권 헌종14년 1848년 9월
9월 1일 신미
해에 일식(日蝕)이 있었는데, 일식은 지하(地下)에 있었다.
9월 4일 갑술
임금이 수릉(綏陵)에 전배(展拜)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9월 6일 병자
중비(中批)로 김학성(金學性)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선침(仙寢)에 지알(祗謁)하니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매우 새로우나, 국내(局內)에 심은 나무가 거의 무성하여졌으니, 어찌 희행(喜幸)을 견디겠는가? 전후에 감독한 도신(道臣)·장신(將臣)으로서 공로가 가장 많은 사람에게 특별히 뜻을 보이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전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정신(李鼎臣)에게 형조 판서를 제수하고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응식(李應植)에게 공조 판서를 제수하라."
하였다.
9월 7일 정축
수릉(綏陵)에 친제(親祭)할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집례(執禮) 부사과(副司果) 이인석(李寅奭)·대축(大祝) 부사과 김만근(金萬根)을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친제 때의 예방 승지(禮房承旨) 한정교(韓正敎)를 가자하라."
하였다.
정기세(鄭基世)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9월 8일 무인
성정각(誠正閣)에서 소대(召對)하였다.
9월 9일 기묘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036) 를 행하였다.
9월 10일 경진
임금이 성정각(誠正閣)에 나아가 대신(大臣)·비국 당상(備局堂上)과 입격(入格)한 유생(儒生)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계술(繼述)에 힘쓰기를 아뢰니, 비답(批答)하기를,
"보감(寶鑑)이 이어 이루어져서 장차 친히 올릴 것이니, 어찌 경행(慶幸)을 견디겠는가? 경(卿)이 아뢴 것이 매우 좋다. 내가 비록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계술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요, 경은 승필(承弼)037) 로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위아래가 함께 힘써 함께 대도(大道)에 이르는 것이 매우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문신 제강인(文臣製講人)을 더 뽑아 들여 다음달부터 두 차례 시취(試取)하라고 명하였다. 조기영(趙冀永)·이약우(李若愚)를 종1품(從一品)으로 발탁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백성을 보전하는 책임은 목민관(牧民官)에게 있으므로 우리 나라에는 잘 다스리고 잘 진휼(賑恤)한 자에게 가자(加資)하는 법이 있습니다. 근년에 수령(守令)을 따로 천거하라는 조령(朝令)이 여러 번 있었으나, 그 수용(收用)할 때가 되어서는 잔폐(殘弊)한 고을을 맡기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한 번도 표장(表奬)한 일이 없었으니, 장차 어떻게 권장하겠습니까? 지난해에 또 전후천(前後薦)을 합초(合抄)하여 들이라는 특교(特敎)가 있었는데, 신념(宸念)이 부지런하고 지극하시니 뭇사람의 바라는 것이 더욱이 특이합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많이 천거된 가운데에서 전 목사(牧使) 정만교(鄭晩敎)·나주 목사(羅州牧使) 윤치응(尹致膺)·장흥 부사(長興府使) 김기석(金箕晳)·부사과(副司果) 최황(崔璜)은 모두 특별히 승자(陞資)하여 내직(內職)으로는 좌이(佐貳)에, 외직(外職)으로는 번선(藩宣)에 막힘 없이 시용(試用)하고 그 나머지 전함인(前銜人) 정문승(鄭文升)·조태순(趙台淳)·이시민(李時敏)·한정(韓珽)은 모두 내직·외직 가운데에서 벼슬자리가 나는 대로 등용하여 국가에서 수령을 중히 여기고 출척(黜陟)을 밝히는 정사를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2일 임오
서상오(徐相五)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9월 22일 임진
임금이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9월 29일 기해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묘 동향(太廟冬享)의 서계(誓戒)를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