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16권 헌종15년 1849년 2월

싸라리리 2025. 6. 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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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경자

해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2월 2일 신축

중비(中批)004)                                             로 윤정현(尹定鉉)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2월 5일 갑진

김영근(金英根)을 이조 참의로, 홍열모(洪說謨)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서대순(徐戴淳)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15일 갑인

월식(月蝕)이 있었다.

 

2월 20일 기미

이정신(李鼎臣)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2월 21일 경신

하교하기를,
"과장(科場)의 폐단은 예전에도 혹 있었으나, 예전 과장의 폐단은 고시(考試)를 명백히 하기 어렵고 정식(程式)을 공교히 하지 못하는 데에 있었을 뿐인데, 지금 과장의 폐단은 고시·정식 밖에 있는 것이 또 있다. 물색(物色)으로 뽑고 서찰(書札)로 꾀하여 허다히 법을 업신여기고 사(私)를 꾀하는 버릇을 예사로 행하며 심하면 막중한 국시(國試)를 농단(壟斷)하는 사화(私貨)로 삼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번번이 대과(大科)·소과(小科)를 겪으면 문득 중외(中外)의 희망을 잃어 어지럽고 해괴한 소문이 사방에 파다하니 이러하여 마지않으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답겠는가? 한 마디로 말하여 공변되고 사사로운 것은 오직 고시를 맡은 자에게 달려 있으니, 그 직임을 맡은 자가 능히 한 마음으로 공정을 지켜 명백히 대양(對揚)005)                                             하면 백 가지로 농간하고 천 가지로 뚫더라도 이른바 관절(關節)006)                                             이라는 것이 어찌 포로(包老)007)                                             에게 이를 수 있겠는가? 대저 선비의 추향(趨向)이 바르지 않은 것은 시관(試官)이 공정을 지키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시관이 공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여 꺼리는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 지금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의 복시(覆試)가 며칠 남았을 뿐인데 끝내 시취(試取)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아직 모르겠으나, 이처럼 특별히 하유(下諭)한 뒤에도 예사로 여기고 경계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리(人理)와 신분(臣分)으로 책망할 수 없는 자이다. 나라의 기강이 땅을 쓴 듯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태아(太阿)008)                                             가 이 손에 있지 않는가? 일이 지난 뒤에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데에 관계되었다는 말이 들리는 자가 있으면 과장에서 농간한 것으로 다스리는 외에 임금의 말을 따르지 않은 죄를 더 줄 것이다. 사자(士子)로 말하더라도 다 공경(公卿)이 되기를 스스로 기대하는 사람인데, 발신(發身)하는 처음에 이미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한다면 뒷날 임금을 섬길 때에 무엇을 자뢰(資賴)하겠는가? 그 부형인 자도 감히 집에 있으면서 몰랐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나타나는 대로 단연코 갑절 더한 율(律)로 그 가장(家長)을 죄줄 것이다. 각각 잘 알아서 척념(愓念)하여 거행해야 한다. 묘당(廟堂)에서는 각별히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2월 24일 계해

하교하기를,
"일전에 남김없이 죄다 칙유(飭諭)하였으므로 본디 그 하는 대로 맡겨서 동정을 살펴야 하겠으나, 일이 지난 뒤에 그 그르친 것을 꾸짖는 것은 사전에 신칙하여 힘쓰기를 바라는 것만 못하므로 또 이렇게 다시 밝혀 하유(下諭)하니, 이번 시취(試取)는 마땅하게 거행하도록 정원(政院)에서 일소(一所)009)                                             ·이소(二所)의 여러 시관(試官)들에게 이 전교(傳敎)를 돌려 보이라."
하였다.

 

2월 29일 무진

감시(監試)의 복시(覆試)에서 일소(一所)의 이연우(李淵愚)와 이소(二所)의 송약로(宋約老)가 으뜸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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