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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2권 순조1년 1801년 5월

싸라리리 2025. 6. 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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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자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주강(晝講)하였다.

 

윤대(輪對)하였다.

 

5월 2일 정축

정종 대왕(正宗大王)의 크고 작은 영정(影幀) 2본(本)을 화령전(華寧殿)에 봉안(奉安)하였는데, 큰 것은 펴서 봉안하였고 작은 것은 궤짝에 봉안하였다. 헌관(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권강(勸講)하였다.

 

5월 3일 무인

권강하였다.

 

5월 4일 기묘

권강하였다.

 

서미수(徐美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5일 경진

효원전에 나아가 단오제(端午祭)를 행하였다.

 

5월 6일 신사

권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이경일(李敬一)을 형조 판서로, 서정수(徐鼎修)를 판의금부사로, 신사운(申思運)을 한성부 판윤으로, 조진관(趙鎭寬)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5월 7일 임오

권강하였다.

 

5월 8일 계미

소대하였다.

 

5월 9일 갑신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아! 지금 이 한재(旱災)가 어찌하여 이렇게 몹시 심한가? 보리 농사는 이미 큰 흉년이 판정되었고, 논에는 모를 심을 길이 없으니. 슬프다, 이 나라 백성들의 목숨이 장차 그치게 되었다. 황천(皇天)의 경고(警告)는 어찌 그 까닭이 없겠는가? 스스로 생각건대, 이 미망인(未亡人)은 식견이 어둡고 덕(德)이 적으면서도 조정에 모람되게 임한 지 달수를 헤아려 보니 벌써 한 해가 되었는데, 정령(政令)을 내리고 거조(擧措)하는 사이에 반드시 인심과 하늘의 뜻을 어긴 것이 많아서 이런 큰 경고를 초래하여 우리 백성들에게 화를 끼쳤으니, 부끄럽고 두려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궁위(宮闈)의 한적하고 외로운 가운데에서 사사로운 뜻이 점점 방자해져 공도(公道)가 날로 어두워졌는가? 근신(近臣)들이 점점 방종해져 올바른 길이 더러 막혔는가? 현사(賢士)가 나오지 않아 충년(冲年)의 임금을 보익(輔翼)하는 데 경술(經術)을 다하지 못하였는가? 흉추(凶醜)들이 아직도 치성한데 현관(顯官)을 숙청하여서 끝내 그 효과를 보지 못하였는가? 은미한 가운데 화얼(禍孼)이 이미 조짐을 보였는데도 내가 반성하여 깨닫지 못하였는가? 환하게 드러난 곳에 공의(公議)가 억압당하였는데도 내가 채택하여 듣지 않았는가? 생민(生民)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한 처지가 이미 극도에 달했는데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는가? 관리들의 탐독이 바야흐로 방자한데도 살피어 거용하는 정사(政事)를 행하지 못하였는가? 사건의 단서가 끝이 없어서 진실로 다 열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몇 가지 일에 대해 반드시 어두워 살피지 못하여 여러 가지 시행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족히 인심과 하늘의 뜻을 어긴 후에야 이렇게 드러난 견노(譴怒)를 초래하였으니, 한밤중에 스스로 점검하다 보면 날이 새도록 잠을 자지 못한 것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깊은 궁중에 있는 부인으로서 무슨 지식(知識)이 있겠는가마는, 잘못을 광구(匡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오직 한두 신료(臣僚)가 있을 뿐이니, 이에 진심을 널리 알려서 나의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다하노라. 아! 조정에 있는 대소 신료들은 내가 광구하는 데 부족하다고만 하지 말고 무릇 주상과 나의 궐덕(闕德)에 관계된 조정에서 거조(擧措)하는 사이의 실수는 각각 정성을 다 펴서 숨김없이 밝게 진달하도록 하라. 비록 초야(草野)의 먼 지방에 있는 자라도 혹시 외방(外方)에 있음을 혐의하지 말고 모두 소견(所見)을 진달함으로써 위태로운 나라의 형편을 구원해서 황천(皇天)에 믿음을 보이는 마음을 쓰도록 하라. 나의 이러한 말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니, 각각 마땅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민태혁(閔台爀)·박길원(朴吉源)·이문회(李文會)·권선(權襈)·김명순(金明淳) 등이 연명(聯名)하여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삼가 내리신 자교(慈敎)를 보고서 신 등이 머리를 맞대고 공경히 읽어 보았더니, 상심하신 듯한 자성(慈聖)의 생각을 우러러볼 수 있습니다. 아! 천하의 일은 사(私)가 공(公)을 해치는 것보다 더 근심되는 것이 없으니, 만약 혹시라도 가슴속에 한 사(私)자를 머물러 두신다면 인욕(人慾)이 방자해져 천리(天理)가 어두워질 것입니다. 이는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이 사욕을 버리고 마음을 전일하게 가지는 뜻을 서로 전수(傳授)한 것이고, 공자(孔子)와 안연(顔淵)이 극기 복례(克己復禮)하는 뜻을 서로 전한 것입니다. 인주의 한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이 되는 것인데,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본원(本源)의 바탕이 과연 청명하고 순수하여 조금도 찌꺼기가 없어 한결같이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이치에서 나왔습니까? 정자(程子)는 그 임금에게 고하기를, ‘어진 사대부를 접견하는 때를 많이 하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접촉하는 때를 적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지금 법연(法筵)을 자주 열어 강학(講學)을 매우 부지런히 하시니, 신 등은 진실로 흠앙(欽仰)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세히 알지 못하겠지만, 편안하고 한가하게 물러나 계시는 가운데에서도 역시 연석(筵席)에 임하여 접견할 때와 같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 임금의 덕(德)이 성취됨은 경연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건대, 지금 대신이 날을 바꾸어 가면서 강학을 권하고 유신이 번을 나누어 진대(晋對)하였으니, 계옥(啓沃)하는 도리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이 아직까지 조정에 나올 기약이 없으니, 성상께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정성에 혹시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죄 있는 자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지금 의리를 크게 밝혔으나 백성의 뜻은 오히려 정해지지 않았고, 징토(懲討)를 약간 행하였으나 큰 괴수는 오히려 복주(伏誅)되지 않았으므로, 여정(輿情)의 울분함이 족히 천노(天怒)를 범할 것인데, 일종의 음추(陰醜)한 무리가 방자하게 금수(禽獸)의 행동을 하기에 이르러서는 맥락을 서로 관련 맺고 마음을 서로 맺어 한데 뭉쳐서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으니, 신 등은 참으로 어떠한 양상의 화기(禍機)가 은미한 가운데 숨어 있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생민(生民)의 휴척(休戚)은 장리(長吏)에게 달려 있으므로, 한 번이라도 혹시 잘 선택하지 못하면 백성이 그 재앙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선조(先朝) 때부터 이런 폐단을 깊이 진념(軫念)하셔서 탐욕을 징계하는 뜻을 누누이 사륜(絲綸)의 사이에 발표하셨고, 백성의 근심과 즐거움을 살피는 정사를 위해 늘 암행 어사[繡衣]를 보내어 염찰(廉察)하게 하는 데 부지런하셨는데, 사유(四維)194)  가 어지러워져 상실되니, 일정한 법도를 두려워하지 않음이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습니다. 한(漢)나라의 관리가 청렴하고 신중하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고, 우(虞)나라의 사악(四岳)195)  이 관리의 성적을 평정함이 분명하지 않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족히 화기(和氣)를 범할 만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몇 가지 일에 성의(聖意)를 깊이 두셔서 홀로 있을 때에도 몸가짐을 삼가는 공부를 엄중하게 하여 공(公)과 사(私)의 분별을 먼저 살피시고, 군자다운 사람은 진출시켜 보익(補益)하는 효과를 충분히 거두시고, 건단(乾斷)을 널리 발휘하여 나라의 형세를 반석(磐石)·태산(泰山) 같은 위치에 두게 하고, 탐오(貪汚)한 풍습을 영원히 그치게 하여 민생(民生)을 임석(袵席)에 두게 한다면, 재앙(災殃)이 바뀌어 상서(祥瑞)가 되는 방도가 참으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옥당(玉堂) 【부응교 김선(金銑), 교리 한흥유(韓興裕)·이경삼(李敬參), 부교리 이인채(李寅采)·신서(申漵), 수찬 정노영(鄭魯榮), 부수찬 정만석(鄭晩錫)·김재창(金在昌)이다.】 에서 연명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이 극심한 가뭄의 재앙이 어찌하여 이르게 되었겠습니까? 재앙은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초래하게 되는 바가 있습니다. 아! 언로(言路)가 열리고 열리지 않음에 따라 치정(治政)의 득실(得失)이 판단되고, 징토(懲討)가 엄하고 엄하지 않음에 따라 종사(宗社)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자성께 우러러 여쭈고 건단(乾斷)을 널리 발휘하여 이인(李䄄)196)  과 홍낙임(洪樂任) 두 역적은 빨리 대계(臺啓)를 윤허하여 흔쾌하게 왕법(王法)을 바룸으로써 여러 사람들의 울분을 덜어 주고 하늘의 견노(譴怒)에 보답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이미 처분한 것인데, 어찌하여 다시 번거롭게 하는가?"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가뭄을 민망스럽게 여기는 이때에 죄가 무거운 죄수를 작처(酌處)하는 것도 역시 답답함을 소통시키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추판(秋判)197)  은 일이 익숙하지 못한 사람에게 맡기기 곤란하니, 전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진관(趙鎭寬)을 유임[仍任]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0일 을유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좌의정 이시수(李時秀)·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연명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삼가 자성께서 하교하신 것을 읽어 보건대, 가뭄을 가엾게 여기시어 도움을 구하는 지극한 정성과 괴로워하시는 마음은 우둔한 돼지와 미물인 물고기에게도 신의(信義)가 미치고 나무와 돌까지도 감동시킬 만하였으니, 은교(殷郊)의 자책(自責)198)  은 옛날에 그 말을 들었고, 원우(元祐)의 성덕199)  은 지금 그 일을 보았습니다. 자성께서 하교하신 가운데 여덟 목을 정녕(丁寧)하게 거듭 타이르셨는데, 비록 현량 방정(賢良方正)하고 직언 극간(直言極諫)하는 선비로 하여금 대궐의 뜰에서 대책(對策)하여 임금의 과실을 지적해서 아뢰게 한다 하더라도 아마 여기에서 벗어남이 없었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현사(賢士)가 나오지 않아 충년(冲年)의 임금을 보익(輔翼)하는 데 경술(經術)을 다하지 못하였는가?’라고 하셨는데, 곧 그것은 큰 줄거리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데도 그 경술을 다할 수 있다면 공도(公道)가 날로 어두워지는 것을 무엇 때문에 걱정하며, 근신(近臣)이 점점 방종해지는 것을 무엇 때문에 근심하며, 흉추(凶醜)가 아직도 치성한 것을 무엇 때문에 염려하겠습니까? 화얼(禍孼)의 짐은 저절로 미리 꺾일 수 있을 것이고, 공의(公議)의 억울함은 저절로 흔쾌하게 펴질 수 있을 것이고, 생민(生民)의 위태로움은 자연히 풀릴 수 있을 것이고, 관리의 탐독함은 자연히 징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은 모두 선조(先朝) 때의 묵은 인물로서 가만히 앉아 있거나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차마 문득 결별(訣別)하지 못하고 벼슬에 탐련(貪戀)하는 듯함이 있는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진실로 어진 사류(士類)를 이끌어 진출시켜서 우리 임금을 도와 날마다 정론(正論)을 듣고 날마다 올바른 일을 행하게 하며, 화얼의 근본이 되는 바탕을 숙청하고 나라의 간우(艱虞)한 형편을 부지시켜서 마음속으로 잊지 않고 늘 간직한 일념(一念)은 오직 앞날에 서광(曙光)이 있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아! 나라에서 힘써 할 일은 인재를 임용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고 대관(大官)의 책임은 어진이를 진출시키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근일에 강학(講學)하시는 것은 곧 우(虞)·하(夏)·상(商)·주(周)나라에 관한 글인데, 성군(聖君)과 어진 보필이 도유 우불(都兪吁咈)200)  하면서 일념으로 부지런히 힘쓴 것이 어느 것도 인재를 채용하고 어진이를 진출시키는 일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공자(孔子)는 구경(九經)201)  을 논하면서 자신의 몸을 닦는 것[修身]과 어진이를 존경하는 것[尊賢]에 대해 서로 의뢰함을 삼았으니, 어진이를 존경한 다음에야 자신의 몸을 닦을 수 있는 것이지 어진이를 존경하지 아니하고 그 자신을 닦을 수 있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신 등이 임금을 보필함에 있어 그 경술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서, 여덟 조목의 자성께서 하교하신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재앙이 바뀌어 상서가 되게 하는 기틀은 진실로 여기에 달려 있는데, 신 등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성명(聖明)께서 위임하신 중책을 저버리고 자성께 계속 걱정만 끼쳤으니, 첫째도 신 등의 죄이고 둘째도 신 등의 죄입니다. 만일 작은 일을 주워 모아 하늘의 뜻에 응하는 도구로 삼는 데 이르러서는 이는 하늘을 속이는 것이니, 신 등이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먼저 신 등의 은혜를 저버린 죄를 바로잡아 크게 출척(黜陟)을 밝힘으로써 하늘의 견노(譴怒)에 보답하고, 사방의 바람에 부응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좋다. 나는 당연히 힘쓸 것이니, 또한 경들도 협력하여 도와서 이 난국(難局)을 함께 구제하기 바란다."
하였다.

 

헌납 송문술(宋文述)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근래 여러해 동안 한재(旱災)가 자주 잇달았는데, 올해에 와서 더욱 심하여 봄 석 달 동안 일찍이 흡족하게 비가 온 적이 없었고, 긴 여름 50일 동안에는 가랑비도 뿌리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비가 많이 내린다면 그래도 풍년을 점칠 수 있을 것인데, 연일 구름만 낀 채 아직 택우(澤雨)를 아끼고 있으니,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도를 당연히 불에 타는 것을 구하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는 것같이 하여야 하며, 하늘을 감응케 하는 방도는 정성을 쌓아 화기(和氣)를 인도하는 것이 귀중합니다. 신은 청컨대, 하나 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소견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진달하니, 성명(聖明)께서는 굽어살피소서. 김이재(金履載)가 범한 죄는 그것이 얼마나 심중한 일이며, 그의 형 김이교(金履喬)는 또한 어찌 감히 ‘집에 있어서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늙은 어미가 집에 있는데 형제가 찬배되었으니, 소문을 들어보건대, 정리가 불쌍합니다. 지금 만약 특별히 효리(孝理)의 정치를 미루어 김이교의 귀양을 방면하여 그의 병든 어미를 돌아가 간호하도록 명하신다면, 어찌 성덕에 빛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김이도(金履度)는 벼슬길에 오른 지 오래 되지 않았고 죄상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대관(臺官)의 소장에 들어 곧바로 견적(譴謫)되었습니다. 의리를 배치(背馳)함이 얼마나 무거운 죄이겠습니까마는, 사대부를 유배시키는 것 또한 가벼운 형전(刑典)이 아니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신임하는 바가 서로 반반씩이니, 이 또한 참작하여 처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일의 사옥(邪獄)은 곧 천고에 없던 흉변(凶變)입니다. 나라의 절반 사람이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흘러 들어가고 팔방의 어리석은 백성이 점점 감염되는 해독을 입으니, 세도(世道)를 해치고 종국(宗國)에 화(禍)를 끼침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었는데, 다행히 성상께서 밝게 결단하여 천토(天討)를 크게 행하셨으므로, 요요 난령(妖腰亂領)202)  들이 차례로 주륙을 당하게 되어 백성의 뜻을 징계할 수 있었고, 나라의 형세가 안정될 수 있었으니, 신은 대단히 흠앙(欽仰)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안치(按治)할 때 남상(濫觴)을 이르게 되기 쉬우니, 뜻밖에 죄에 걸린 백성이 혹시 원망을 품게 된다면, 또한 족히 화기(和氣)를 범하는 단서가 될 것입니다. 금번에 추국이 공평하고 신실했던 것은 진실로 여러 사람들에게 칭송받았습니다. 그러나 포청(捕廳)에서 추핵(推覈)하는 즈음에 이르러 이미 널리 만연되어 매우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으므로, 결안 정법(結案正法)한 외에도 형옥(刑獄)에서 많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죄가 있고 없는 것과 당연히 죽여야 되는지 죽이지 않아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신이 추관(推官)이 아니어서 어떻게 상세히 알겠습니까마는, 만일 한 백성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있었다면, 어찌 성치(聖治)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원컨대, 좌우의 포장(捕將)과 각도의 도신을 엄히 신칙하여 조금이라도 지나치고 외람된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에게 하순하겠다."
하였다.

 

정언 원재명(元在明)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을 돕고, 의리를 밝히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는 데 대한 세 조항을 말하고, 말미에 말하기를,
"어제 자성 전하께서 내리신 언교(諺敎)를 삼가 보았더니, 앞뒤의 3백여 말씀이 정녕하고 간곡하여 족히 목석(木石)과 귀신도 감동시킬 만하였습니다. 아! 한 번 말씀하신 것이 성대하여 천심(天心)을 돌이킬 수 있으니, 대저 한때 극심한 가뭄이 재앙이 될 것을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하교하신 여러 조항은 신과 같은 신진(新進)의 천박한 자질로 감히 어떤 일을 광구(匡救)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여 일일이 앙대(仰對)할 수는 없지만, 생각건대, 여러 조항 중에 가장 큰 것은 곧 근신(近臣)이 점점 방자해지고 있다는 하교입니다. 아! 저 근신들 중에는 대의(大義)를 농락하고 세도(世道)를 그르친 자가 있으니, 온 세상에서 지목하여 자연히 귀결(歸結)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찌 우리 명성(明聖)하신 전하와 깊은 자덕(慈德)으로서 오히려 통촉을 누락하실 바가 있겠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성지(聖志)를 분발하셔서 호오(好惡)를 밝게 보여 청명(淸明)한 길을 넓히신다면, 이 밖의 여러 조항은 아마도 성충(聖衷)에 수고를 초래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말 가운데 품처할 수 있는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예조 판서 윤행임(尹行恁)에게 전라 감사를 제수하니, 당일로 사조(辭朝)203)  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1일 병술

비가 내렸다. 하교하기를,
"애타게 바라던 나머지 이번의 흡족한 단비를 얻었으니, 백성을 위해 매우 다행한 일이다. 골고루 비가 왔는지의 여부를 사관(史官)과 선전관(宣傳官)을 나누어 보내어 상세하게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서미수(徐美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헌납 송문술(宋文述)이 상소한 것을 보았더니, 내용이 변화 무상하였으므로, 절반도 보지 아니하여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의혹되고 두려워하여 근심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작년 섣달에 자교(慈敎)로 성단(聖斷)을 크게 발휘하여 음험하고 간사한 자들을 물리쳤으니, 이에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지고 백성의 뜻이 하나로 뭉쳐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송문술과 같은 자가 있어 넌지시 속마음을 떠보는 소장을 느닷없이 올리고 감히 뒤엎으려는 계책을 썼으니, 아! 이것이 어떠한 변괴입니까? 생각건대, 저 김이교(金履喬)·김이도(金履度)는 명분과 의리를 배치하고 간사한 무리들을 부호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지목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대개 그가 평일에 한 언의(言議)는 이미 함닉(陷溺)시킴이 심하였고, 평소에 취미는 스스로 감염됨이 많았었는데, 동조(東朝)204)  께서 처분이 지엄하고 대소(臺疏)의 논열이 긴중하였으니, 오늘날 선(善)을 향하고 악(惡)을 미워하며 양(陽)을 돕고 음(陰)을 누르는 자로서 누군들 감히 그사이에 이의(異議)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런데 저 송문술이란 자는 갑자기 정상을 참작해 용서해 주자는 의논을 내어 방자하게 영구(營救)하는 말을 발설하였으니, 어찌 통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미 ‘집에 있었으니 반드시 알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전석(全釋)을 청한 것은 말한 것이 큰 차이가 있으며, 감히 ‘죄상(罪狀)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의심하고 믿는 자가 서로 반반씩이다.’라고 하기에 이르러서는 뜻이 현란(眩亂)시키는 데 있었으니, 반드시 공의(公議)와 승부를 겨루려 한 것은 은연중에 의지하여 믿는 데가 있는 듯합니다. 이와 같은 흉괴(凶魁)가 잠시 숨쉬어 걱정이 많이 생기는 때를 당하여 내버려 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국시(國是)는 안정될 날이 없을 것이고, 백성의 뜻은 뭉쳐질 기약이 없을 것이니, 대각(臺閣)의 응지(應旨)라 하여 그대로 굽혀서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신은 헌납 송문술에게 우선 절도 정배(絶島定配)의 전형을 베푸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자전의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작년 겨울에 내렸던 처분은 어찌 내가 즐거워서 한 바이겠는가? 곧 선조(先朝) 때의 의리가 무함당한 것을 통분스럽게 여기고 선조 때의 지사(志事)가 펼쳐지지 못한 것을 개탄하여 작년 5월 그믐의 유교(遺敎)를 받들어 한 세상의 미혹되고 우둔함을 깨우쳐 준 데 지나지 않는다. 장차 그 당시 분부를 따르지 않은 더욱 심한 자 몇몇 사람에게 그 목숨을 특별히 용서하여 찬배의 벌을 약간 더하려 하는데, 처음부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그사이에 엇걸려서 뒤섞여 있겠는가? 그러나 저 일종의 당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배반하는 무리들이 오히려 징계하여 두려워하지 않은 채 더욱 서로 굳게 뭉쳐 선왕의 유교를 정신이 혼미할 때의 유언으로 보고 나의 처분을 망령된 거조라고 하면서, 오직 흉도(凶徒)들을 힘써 부호하고 국시(國是)에 배치(背馳)하여 서로 전수(傳授)하면서 죽을 때까지 뉘우치지 않고 있는데, 심지어 이번 송문술(宋文述)의 흉소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그는 본래 서캐같이 보잘것 없는 비천한 인품을 가진 자인데, 어찌 혼자서 이 일을 판비하였겠는가?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빙자하여 속마음을 넌지시 떠보는 계책을 행하려 하였으니, 뒤에서 마음대로 부리며 꾀어서 맡긴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 북면(北面)한 자로서 감히 내놓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생각할수록 분하고 한탄스러워 곧바로 말하고 싶지 않다. 지금 만일 언자(言者)를 죄주지 않는 관례의 법 때문에 불문(不問)의 과목에 내버려 둔다면, 선대왕께서 굳게 지키던 의리와 착한 일을 드러내고 악한 일을 병통으로 여기는 지사(志事)가 그 장차 백세(百世)에 어두워져 드러내 밝힐 날이 없을 것이다. 헌납 송문술을 우선 절도(絶島)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이회상(李晦祥)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인(李䄄)·홍낙임(洪樂任) 두 역적이 흉모(凶謀)를 남몰래 꾀한 것이 지극히 요망하고 참혹하였으니, 이미 대계(臺啓)와 정청(庭請)에서 죄다 드러났습니다. 지금 비록 법으로 처치하였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제로 간교함을 꺾을 방책이 없었으므로, 우러러보고 굽어 계획하는 간특한 뭇 여얼(餘孼)들이 문득 암암리에 불러 모아 몰래 투합(投合)하고 있는데, 구름같이 많이 모여들어 주창(主唱)에 따라 행동을 함께 하면서 이르지 않는 계책이 없고 도모하지 않는 변괴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위태로움이 풀밭에 매복하고 있는 군사와 같을 뿐만 아니라, 그 위급함이 거의 벌판에 타고 있는 불보다 더 심하니, 이 때문에 민심이 날로 더욱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데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흉도(凶徒)가 반드시 다시 제멋대로 날뛰어 종국(宗國)이 탈가(稅駕)205)  할 데가 없을 것이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게 됩니다. 신이 또 듣건대, 호남의 옥사는 그 정절이 매우 위태롭고 참혹한데, 단지 포청(捕廳)에만 맡겨 안핵(按覈)하게 하니, 옥정(獄情)은 헛되이 세월만 보내게 되어 나라의 체면이 구간(苟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일찍이 뵙기를 청하여 한마디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은 참으로 근심스럽고도 의혹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자성께 여쭈어 건단(乾斷)을 널리 발휘하여 역적 인과 홍낙임을 왕법(王法)으로 흔쾌하게 바루고, 포청에 있는 여러 역적들은 왕부(王府)206)  로 이송해서 국문하여 엄중히 조사해서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삼사(三司)에서 문후(問候)를 철폐한 대신의 수범(首犯)을 조사해 내라는 계사(啓辭)가 있었는데, 그 당시의 여러 일기(日記)를 상고해 보아도 징거할 바가 없다고 하니, 만일 문후를 철폐한 일이 없었다면, 이 계사는 정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제호탕(醍醐湯)을 추봉(追封)한 일을 말하건대, 맨 처음에 궐봉(闕封)한 것은 문후를 철폐한 죄와 거의 차등이 없습니다. 이미 추봉한 일이 있었으면 자연히 궐봉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빨리 조사해 내도록 명하여 왕법으로 결단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신은 당장의 일에 대해 또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헌납 송문술(宋文述)이 김이교(金履喬)를 방송하자고 청한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 자성께서 김이교를 특별히 귀양보낸 것은 실로 의리를 엄하게 하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려는 심원한 근심과 염려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어찌 한 대신(臺臣)이 용서하여 석방하자고 곧바로 청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그의 소장에 말한 것을 가지고 보건대, 이미 ‘김이재(金履載)가 범한 죄는 그것이 얼마나 심중한가?’라고 말하였고, 또 말하기를, ‘김이교(金履喬)가 또한 어찌 감히 「집에 있어서 알지 못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김이교의 죄가 있고 없음은 그도 또한 알고 있는데, 곧바로 은혜를 베풀어 석방하기를 청한 것은 앞뒤로 일관성이 없고 말뜻이 분명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김이교를 방송하게 된다면, 분수에 넘친 것을 바라는 무리가 함부로 날뛸 계책을 다시 내어서 성세(聖世)의 제방(隄防)이 차후로 흔적도 없어질 것입니다. 신은 헌납 송문술에게 견파(譴罷)의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여러 조항은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김조순(金祖淳)을 예조 판서로, 김재찬(金載瓚)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5월 12일 정해

송문술(宋文述)을 거제부(巨濟府)에 유배하였다.

 

장령 홍병신(洪秉臣)이 아뢰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송문술(宋文述)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본래 서캐같이 미천한 자로서, 천성이 음흉하고 비밀스러운데다가 몸가짐이 흉악하고 간사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변화 무상한 행적으로 귀역(鬼蜮)이 되어 은밀하게 넌지시 속마음을 떠보는 계책을 부려서 느닷없이 괴란(乖亂)한 소장을 올렸으니, 고금을 통해 어찌 이와 같이 극도로 흉악한 자가 있겠습니까? 작년 겨울에 처분하신 것은 선조(先朝) 때의 의리가 무함당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선조 때의 지사(志事)가 펴지지 못한 것을 민망하게 여긴 데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아! 저 김이교의 무리들은 죄를 범한 것이 어떠했으며 관계됨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어 대략 유배(流配)시키는 형전(刑典)을 더한 것은 이미 크게 실형(失刑)한 것이었는데, 지금 이 송문술은 조금도 징계되어 두려워함이 없이 더욱 화심을 품어 5월 그믐의 연교(筵敎)와 섣달의 명지(明旨)에 대해 마음에 불만을 품었던 것이 밝고 환하여 가리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어찌 시골의 한 천류(賤類)가 혼자서 판별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종용하고 지시한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인데, 이와 같이 나라를 저버리고 당(黨)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무리들을 그냥 버려두고 추핵하지 않는다면, 깨뜨려지지 않은 소굴의 근원이 장차 다시 위세를 떨쳐 어떠한 모양의 변괴가 어느 곳에 잠복했다가 어느 때에 나타날지 알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절도 정배한 죄인 송문술을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포해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내게 하여 나라의 형률을 흔쾌하게 바루고, 종용하고 지시한 무리들은 엄중히 핵실(覈實)해서 실정을 알아내어 합당한 형률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사간 박서원(朴瑞源)이 아뢰기를,
"작년 겨울에 처분을 내리신 이후 의리가 크게 밝혀지고 세도가 정착되었는데, 대저 어떤 일종의 불령한 무리들이 옛 습성을 고치지 않은 채 본거지를 잊기 어려워하며 흉도를 힘껏 도우며 공의를 배치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송문술(宋文述)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는 시골의 서캐같이 미천한 인품으로서, 지금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빙자하여 감히 속마음을 넌지시 떠보는 버릇이 생겨서 찬배된 자 중의 두어 사람을 끄집어내어 ‘화기(和氣)를 범한 하나의 단서가 된다.’고 말하며 소방(疏放)의 은전을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저 김이교(金履喬)의 무리들은 죄를 범한 것이 어떠했으며 관계된 바가 어떠하였는데, 이에 도리어 암암리에 은밀하게 보호하여 마음에 달갑게 여겨 한통속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보통의 심정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평일의 따르지 않던 습성이 반드시 작년 5월 그믐께의 연교(筵敎)와 섣달의 처분에 대해 늘 불만스런 마음을 품었던 것이 밝고 환하여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의 당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의 은의를 저버린 음모와 비계(秘計)는 어찌 그렇게 된 까닭이 없겠습니까? 이는 그 소굴이 깨뜨려지지 않은 채 근원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흉악한 무리로서 좋은 기회를 포착하여 분수에 넘치는 일을 넘겨다보는 짓을 가만히 행하려는 자들이 때만 있으면 느닷없이 나타나서 어려움 없이 고의로 범하는 것이니, 그 심장을 헤아려 보건대, 절절이 통탄스럽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 혼자서 판비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뒤에서 종용하고 지시한 자가 또한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내버려 둔다면 어떤 모양의 흉계가 다시 어느 곳에 나올 지 알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절도 정배한 죄인 송문술을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포해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내게 하여 전형(典刑)을 흔쾌하게 바루고, 지시하고 종용한 무리들도 엄중히 조사해 내어 합당한 율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연명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작년 5월 그믐께 내리신 연교(筵敎)와 우리 자성 전하께서 작년 겨울에 내리신 언륜(諺綸)은 곧 우리 동방의 대의 명분(大義明分)을 밝힌 일부의 춘추(春秋)로서, 어두운 길거리를 일성(日星)처럼 밝혔고, 왕부에 공정하게 처리하게 하였으므로, 도깨비 같은 무리가 그 자취를 도피할 수 없었고 난적(亂賊)들이 거의 두려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흉도(凶徒)의 소굴이 그냥 있고 화근(禍根)이 뽑히지 않았기 때문에, 뒤돌아보는 자가 다시 옛날과 같이 국시(國是)라면 반드시 승부를 다투려 하고 공의(公議)라면 반드시 생사를 돌보지 않고 싸우니, 이번에 송문술(宋文述)의 흉소(凶疏)가 나오기에 이르러 의리가 무너지고 세변(世變)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아! 김이교(金履喬)는 요사한 제 아우를 단장해 내어 패려한 소장(疏章)을 올렸고, 김이도(金履度)는 스스로 맹주(盟主)가 되어 흉론(凶論)을 창도(唱導)하였으니, 그들의 평소에 마음먹은 것이 의리에 배치되고, 성기(聲氣)가 적도(賊徒)의 편에서 힘쓴 것을 여정(輿情)이 모두 분개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왕법에서 용서해서는 안될 것인데, 죄가 찬배하는 데 그쳤으므로, 너무 관대하게 한 실형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 송문술이란 자는 감히 구언하는 기회를 의뢰하여 속마음을 넌지시 떠보는 계책을 드러나게 행하면서, 혹은 ‘정리가 불쌍하다.’고 말하고, 혹은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하여, 마치 죄 없이 뜻밖의 재앙에 걸려 들어서 재변(災變)을 당하여 소방(疏放)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듯함이 있으니, 인심의 함닉(陷溺)과 흉악한 무리들의 함부로 날뜀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한결같이 이 지경에 도달할 줄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어리석은 송문술 한 사람이 혼자서 판비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반드시 뜻을 잃은 불령한 무리가 몰래 원한을 품고 공공연하게 현란(眩亂)시키며 은밀한 곳에서 종용하고 기회를 틈타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뒤에서 지시한 자를 명확히 추핵하여 진장(眞贓)을 잡아들일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윈 돼지가 뛰려는 생각을 품고207)  , 서리를 밟으면 반드시 단단한 얼음이 이르는 것208)  과 같이 앞으로 몇 사람의 송문술이 뒤를 이어 다시 나와서 우리의 의리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윤강(倫綱)을 멸절시킬지 알지 못하며, 세도(世道)와 조상(朝象)이 장차 어느 곳에서 탈가(稅駕)할지 알지 못합니다. 신 등은 절도 정배한 죄인 송문술을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먼저 국청을 설치하여 엄중히 국문해서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고, 뒤에서 지시한 사람을 조사해 내어 흔쾌하게 전형(典刑)을 바루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으나,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5월 13일 무자

지평 이윤행(李允行)이 아뢰기를,
"아! 현재 의리가 얼마나 엄정한데, 저 불령한 무리는 오히려 두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국시(國是)를 빙자하고 속으로는 실제로 사사로운 뜻으로 협잡(挾雜)하고 있습니다. 비록 근일의 정주(政注)하는 사이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혹 중죄를 범한 지친이나 혹은 제 자신 잘못이 있는 무리들이 어려움 없이 통망(通望)되어 남몰래 넌지시 속마음을 떠보는 계책을 행하는 자가 있으니, 대단히 해괴합니다. 이번 의리를 천명(闡明)하는 때를 당하여 심상하게 여겨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이조 판서 한용귀(韓用龜)에게 우선 견삭(譴削)의 전형을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승지 권선(權襈)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경연(經筵)의 직책에 있으면서 눈앞에 일이 닥쳤으므로 이에 감히 덧붙여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간신(諫臣) 원재명(元在明)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이르기를, ‘대의(大義)를 농락하고 세도(世道)를 그르쳤으니, 자연히 귀착(歸着)되는 곳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성명은 비록 지적하지 않았지만 온 세상이 모두 그 사람을 알고 있으니, 다만 구어(句語)가 너무 간략하여 그 정상을 죄다 알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신은 평일에 보고 들은 것으로써 대략 진달하고자 합니다. 아! 저 윤행임(尹行恁)은 선조(先朝)께서 총애하던 신하로서, 한 번 초기에 청명(淸明)한 다스림을 도왔는데, 그가 의뢰했던 바도 의리이고 여러 사람들이 바랐던 바도 또한 의리였으므로, 그의 언어에 드러나고 문자에 나타난 것이 빛나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그의 행동을 공평하게 상고해 보면 서로 어긋날 뿐만이 아닙니다. 음양(陰陽)에 대해 수단이 익숙하고 청문(聽聞)의 향배(向背)에 대해 현란시켜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풍성한 의리를 농락하여 이리저리 현혹시킬 계책을 이루었으니, 그가 의리를 해친 것은 도리어 의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심함이 있었음을 쉽게 보아 쉽게 공박할 수 있습니다. 역신(逆臣)의 주고(奏稿)의 간역(刊役)을 이미 처음에 바로 그만두었으므로, 골목길 사이에서도 오히려 의심하여 현혹된다는 말이 있으며, 홍낙임(洪樂任)을 섬에 귀양보내어 천극을 바야흐로 더하였는데도 강개한 선비들은 모두 다시 제기(提起)하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주로 이 사람의 용사(用事)에 말미암았습니다. 천백 마디의 그의 말 중에 두세 가지 그의 덕(德)으로 면대해서는 비록 기뻐하여 다정하나 마음속으로는 원수같이 미워하며, 겉으로는 초월(楚越)과 같이 여기는 듯하나 속으로는 실제로 친밀한 교제를 맺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이 다행스럽게 우연히 성사되면 저절로 이루어진 공을 자기 것으로 삼고, 일이 혹시 성취되지 않으면 사람을 배척하여 죄과를 삼고 있으니, 사람으로서 성실하지 않으면 어떻게 임금을 섬기며 또 어떻게 백성을 부리겠습니까? 호남(湖南)의 번얼(藩臬)이 비록 외직이라 하여 가볍게 말하고 있으나,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위임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는 재량해 처분하시어 먼 지방으로 물리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사은 정사(謝恩正使) 조상진(趙尙鎭) 등이 치계(馳啓)하기를,
"황제(皇帝)가 황귀비(皇貴妃) 뉴호록씨(鈕祜祿氏)를 책봉하여 황후(皇后)로, 영빈(瑩嬪) 후가씨(侯佳氏)를 화비(華妃)로, 동가씨(董佳氏)를 순빈(淳嬪)으로, 춘귀인(春貴人) 왕가씨(王佳氏)를 길빈(吉嬪)으로 삼았는데, ‘책봉하는 예(禮)는 사체가 중하여 관례에 따라 돌아오는 인편에 부탁할 수 없으므로 정사에 산질 대신(散秩大臣) 송영(松齡)과 부사에 내각 학사(內閣學士) 길윤(吉綸)을 황제가 직접 낙점(落點)하여 뽑아 보낸다.’고 합니다."
하였다.

 

5월 14일 기축

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풀밭에 매복한 여러 흉악한 무리와 사중(社中)에 의뢰하는 권간(權奸)이 기질은 다르면서 취미(臭味)를 같이하여 다투어 일어나서 번갈아 일을 일으키고 있으니, 섬에 있는 역적은 머리를 들고 하늘까지 뒤덮을 흉계를 이루려 하고, 요망한 홍낙임(洪樂任)은 이를 갈면서 임금을 욕보일 계책을 품고 있으며, 사옥(邪獄)이 윤리를 멸절시킴이 홍수를 막는 어려움보다 갑절이나 되므로, 대소 신료들이 분개하여 한탄하고 조야(朝野)에서 근심하여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윤행임(尹行恁)이란 자가 나와 국가의 위태로운 형편은 더욱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아! 그의 못된 짓을 쓰려면 죽간(竹簡)이 다하여도 부족하고 그의 죄를 논하려면 털을 뽑아서 세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께서는 일월(日月) 같은 명철로 무릇 어질고 간사함과 착하고 악함을 분변함에 있어서 혹 털끝만큼도 조람(照覽)을 빠뜨리지 않으셨으나, 그가 충신의 후예이기 때문에 그의 글귀를 수식하는 조그마한 재주를 임시로 빌리고, 남몰래 나쁜 짓을 하는 자취를 감싸서 덮어 측근의 자리에 두고 청연(淸燕)의 시강(侍講)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간교한 마음이 일찍 열린 것을 통촉하시어 늘 위복(威福)을 의뢰하여 농간을 부릴까 걱정하셔서 조정의 반열에 오래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고, 문득 집에서 틀어박혀 있게 하였으니, 곧 현명하신 지혜와 굽어 보호하신 은택을 대저 가까운 반열에 있던 자로서 그 누군들 헤아려 보지 않았겠습니까? 아! 작년 6월의 화변(禍變)은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성 전하께서 한없이 원통하여 부르짖으시는 가운데에도 그가 평일에 복사(服事)한 것이 오래 되었음을 생각하시어 특별히 거두어 녹용하셨는데, 당시에 그는 상제(喪制)를 마치지 않았었으니,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면 의리상 무릅쓰고 나아오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틈탈 만하다고 생각하여 대궐 안에 뛰어들어갔으며, 예방(禮防)을 내버리면서 오직 혹시 제체될까 두려워하였으니, 이미 명교(名敎)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청요(淸要)한 자리를 차지하여 더욱 기탄함이 없었으니, 문병(文柄)을 외람되게 차지하여 한 세상을 조종하였고, 전권(銓權)을 잡아 백관을 농락하였으며,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을 제마음대로 농간한 것은 오히려 그 밖의 일에 속합니다. 벼슬을 제배(除拜)하는 일이 있으면 들어가 고하고 나와서 반포하기를, "선조(先朝)의 유의(遺意)이다.’ 하고, 제도를 경장(更張)할 일이 있으면 눈썹을 쳐들고 뽐내어 말하기를, ‘선조께 명을 받은 바이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임금의 뜻이 이렇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자교가 이렇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은전(恩典)이 있으면 자신의 공으로 삼고 원망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등 자취가 변화 무상하여 알 수 없고, 의심하여 어지럽혀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공의(公議)에 혹시 화협하지 않음이 있으면 감추어 스스로 가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아무가 한 일이다.’ 하고, 청론(淸論)이 혹시 서로 나뉘어지면 성을 발끈 내면서 말하기를, ‘이는 나를 해치려는 것이다. 누가 시킨 짓인가?’ 하였습니다. 얼굴을 대하면 마음을 드러내지만 얼굴을 돌리면 비웃고, 이익으로 남을 꾀고는 혼자 이익을 독점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허다하게 용서할 수 없는 죄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자질구레한 사건에 속하니, 드러나게 의리란 이름을 핑계대어 은밀하게 괴란(壞亂)시킬 계책을 부렸습니다.
시험삼아 그의 형적이 크게 드러난 것으로써 말해 보건대, 이른바 역신(逆臣)의 주고(奏稿)의 간인(刊印)에 대해 공좌(公座)에서 큰소리 친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작년 섣달 26일 빈대(賓對)하였을 때 홍낙임(洪樂任)을 토죄하자고 청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얼마나 안위(安危)에 관계된 기틀인데, 그가 갑자기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박소(薄昭)를 죽인 것209)                  은 이것이 덕이 적은 소치이다.’라고 하면서 그 어맥(語脈)을 모호하게 하여 그 간교한 마음을 번드르르하게 꾸몄으니, 감히 향안(香案)에서 가깝고 염유(簾帷)210)                  의 근엄하게 임하신 때에 이랬다저랬다 반복함이 이와 같이 무엄하였습니다. 하물며 사실(私室)에서 속삭이고 암암리에 선동하여 무슨 말인들 터무니없이 주장하지 않겠으며, 무슨 계책인들 배포(排布)하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송문술(宋文述)의 흉소(凶疏)가 나오게 되었는데, 지시하고 부추겨 시킨 것이 불을 보듯 환합니다. 신이 비록 감별하는 식견은 없더라도 주선한 지 수십 년이 되어 그의 사람됨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근일에 와서 미처 알지 못하던 것을 더욱 알게 되고서는 참으로 손수 공격하고 싶었으나, 신이 용부(庸夫)로서 곧바로 이를 처치하지 못하여 다만 가슴 속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하였습니다. 일단 지방으로 보낸 이후로 자성의 밝은 판단에 대해 신은 진실로 흠앙하고 두 손 모아서 축하하였었으나, 신이 걱정하는 바가 도리어 전일보다 심한 것은 대개 그가 매우 영리하고 지극히 간교하여 일을 도모하는 기관(機關)과 궤비(詭秘)한 설계가 진실로 귀역과 같아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웅번(雄藩)을 안치(按治)하여 중화(重貨)를 손아귀에 넣게 되었으니, 그가 고개를 숙이고 팔짱을 낀 채 두려워하여 좌결(坐決)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 섬211)                  에 위리 안치한 역적 이인(李䄄)과 요악한 홍낙임(洪樂任)과 사옥(邪獄)은 이미 궁벽한 먼 곳에서 서로 화응하는 세력을 이루었는데, 윤행임(尹行恁)의 좌우를 농단(壟斷)하는 것이 또 그 사이에서 나왔으니, 나라의 위급(危急)과 존망(存亡)은 신이 지나치게 헤아린 근심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윤행임을 남번(南藩)에 제수한 명을 거두시고, 유사(有司)에게 거듭 명하여 그에게 마땅히 시행해야 할 율을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전의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

 

지평 이윤행(李允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은 곧 한 번 처음으로 청명(淸明)하게 할 기회입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자성 전하께서 여요(女堯)212)  의 덕(德)으로 권섭(權攝)하는 정치를 행하여 작년 겨울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출척(黜陟)을 크게 행하시고 호오(好惡)를 밝게 보이셨는데, 하나는 선왕의 의리를 준수한 것이었고 하나는 선왕의 지사(志事)를 행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전하의 만년토록 무궁한 왕업(王業)을 밝게 계도하셨으니, 오늘날 신자된 자 가운데 올빼미의 심장과 이리의 성질을 지닌 자를 제외하면, 누가 감히 두 마음을 품고 의란(疑亂)시킬 계책을 행하려 하겠습니까? 아! 저 윤행임(尹行恁)은 본래 요사스러운 성격으로, 부화(浮華)한 재주가 조금 있어서 선조(先朝)께서 비록 은총을 더하기는 하셨으나, 권세를 부리는 자취가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최절(摧折)하고 견책하여 농신(弄臣)으로 대우하시고 중용하여 정권을 잡게 하지 않으셨으니, 지니셨던 뜻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난번에 변고(變故)로 인연하여 높은 반열에 외람되게 오르자, 근심하여 두려워하며 함께 구제하려는 뜻에는 아주 어둡고, 함부로 날뛰며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습성이 현저하게 있었습니다. 국시(國是)를 빙자하여 안으로 음흉한 짓을 하면서 겉으로는 의리를 드러내고, 상대의 기색을 엿보아 아침에는 동쪽에 붙었다가 저녁에는 서쪽에 붙었으며, 조정에서 한 가지 일을 내놓으면 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공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제류(儕流)가 한 가지 원한을 품으면 반드시 암암리에 모해하였습니다. 문형(文衡)213)  의 전병(銓柄)을 차지하는 데 오로지 뜻을 두어 전형할 때를 당해서는 사사로움을 따르고 공평함을 무시하여 성헌(成憲)을 무너뜨려 구분하였고, 시험관이 되어서는 권세를 팔아서 국시를 탁란시켰습니다.
이번 송문술(宋文述)의 흉소(凶疏)에 이르러서는 과연 누가 한 짓이고 누가 제창했겠습니까? 송문술을 권장하여 발탁하고는 화현(華顯)한 자리를 두루 거치게 한 것은 모두 윤행임이 한 것이었으니, 만약 윤행임이 지시하여 부추긴 바가 아니면, 그가 어찌 감히 이것을 마음 속에 품어 입으로 발설할 수 있겠습니까? 윤행임의 본래의 기량과 평일의 심장이 여기에서 다 노출되어 다시 여지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내직(內職)의 책임은 무겁고 외직(外職)의 책임은 가볍다 하여 번얼(藩臬)의 직임에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전라 감사 윤행임에게 빨리 도배(島配)의 전형을 시행하여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소인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권문(權門)을 붙좇아 그의 지시를 받는 것은 우리 선대왕께서 평소에 대단히 미워하셔서 몹시 배척하셨던 것인데, 누가 사류(士類) 중에서 한 사람의 한용귀(韓用龜)가 나왔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저번에 윤행임에게 중독되어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면하려고 꾀한 것과 그 조카를 등제(登第)시킨 것은 이미 이것이 한 세상 사람들의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긴 바입니다. 그가 전조(銓曹)에 있게 되어서는 무릇 주의(注擬)하는 즈음에 한결같이 그의 사사로움을 따르고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은 채 이보천(李普天)과 같이 허물이 있는 자와 신사운(申思運)과 같이 죄를 지어 귀양간 가까운 친척을 어려움 없이 통의(通擬)시키고,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은 한시유(韓始裕)를 경솔하게 부사(府使)의 직임에 주의하고, 선조(先朝) 때에 죄로써 기색(枳塞)된 윤사국(尹師國)을 갑자기 한성 판윤의 의망에 들게 한 것은 윤행임의 지시한 짓이라고 다 들었으니, 그 행적을 깊이 구명해 보면 어찌 청명(淸明)한 조정의 수치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어제 허둥지둥 논계(論啓)한 것은 너무 가벼운 전형으로 잘못 아뢴 것이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이조 판서 한용귀에게도 역시 찬배의 전형을 시행하여 여러 당악자(黨惡者)들의 경계를 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의 복주(覆奏)한 말이 옳았다. 너를 파직하겠다."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이조 판서 한용귀(韓用龜)는 평일에 지키던 바를 종전에 수립하였습니다. 한 세상의 공의(公議)는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선조(先朝) 때에 있어서는 간발(簡拔)이 이미 은근하였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의지하고 신뢰함이 또한 무거웠습니다. 정주(政注)하는 사이에 사소한 착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조검(照檢)을 우연히 잘못한데 불과한데, 기회를 틈타 계획을 이루려는 무리에게 만약 호오(好惡)하는 뜻을 밝게 보이지 않는다면, 세도(世道)와 인심이 앞으로 안정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해당 대신(臺臣)에게 삭직(削職)의 전형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옥당(玉堂)에서 연명 차자를 올려 전라 감사 윤행임(尹行恁)에게 절도 안치(絶島安置)의 전형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동조(東朝)의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

 

양사 【사간 박서원(朴瑞源), 장령 홍병신(洪秉臣)·조태영(趙台榮), 지평 유전(柳烇), 정언 이회상(李晦祥)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권간(權奸)이 위복(威福)을 빙자하여 팔면서 나라의 은혜를 저버린 것이 옛부터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어찌 윤행임(尹行恁) 같은 자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본래 간사한 성품으로, 교활한 습관을 이루어 숨겼다 드러냈다 하는 수단과 변화 무상한 말씨로 의리를 핑계대어 번복(翻覆)할 계책을 품었고, 은총(恩寵)을 빙자하여 억제하는 술책을 현저하게 더하였습니다. 주고(奏稿)의 간행은 이미 처음에 바로 폐지하였으므로, 아직도 그것을 믿고 의심하는 의논이 있으며, 홍낙임(洪樂任)을 죄주며 도극(島棘)에 그치게 하였으므로 오히려 다시 일어나려는 생각을 품도록 한 것은 모두 이 사람이 중간에서 용사(用事)하며 남몰래 돕고는 겉으로 억압하여, 종사(宗社)는 걱정하지 않고 당사(黨私)를 몰래 구제하였던 소치가 아닌 것이 없으니, 그가 은혜를 저버린 채 권력을 부리고 의리를 배반한 채 사욕을 꾀한 죄는 이미 온 나라의 공통된 의논입니다. 개국 승가(開國承家)하여 소인을 등용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같이 간세(奸細)한 무리 또한 번임(藩任)에 둘 수는 없으니, 청컨대, 전라 감사 윤행임에게 절도 안치의 전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동조(東朝)의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윤행임(尹行恁)은 곧 선조 때 총애하여 대우하던 신하이다. 또 대상(大喪)을 마친 뒤 그의 언의(言議)를 관찰하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건대, 총애하여 대우하시던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아 국가를 저버리지 않는 것 같았으므로, 나 또한 믿어 의심치 않고 과연 두 차례에 걸쳐 특별히 발탁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뜻밖에 근일에 오면서부터 술책을 부리고 처신하는 데 있어 점점 의심스러운 단서가 많이 있었다.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방자한 행동이 숙달되고 안팎 어느 곳에서나 몰래 엿보는 데 익숙해져 의리를 부지한다는 미명(美名)을 핑계대어 암암리에 흉당(凶黨)을 보호하려는 간교한 죄를 가만히 부렸다. 따라서 성덕에 누를 끼치고 세도(世道)를 의란(疑亂)시켜 정적(情迹)을 가리기 어렵게 되어 여정(輿情)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가 은총을 받은 것이 대단히 두터웠는데도 어찌 이와 같이 은혜를 저버리는가? 내가 일전에 하교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는데, 소장과 계사가 잇따라 나왔으니, 공의(公議)를 볼 수 있다. 또 우상의 차자를 보건대, 그 나열한 말이 모두 증거가 있으니, 어찌 이 사람의 무상(無狀)하고 망측함이 이에 이를 줄 생각하였겠는가? 그의 죄상이 이와 같이 남김없이 환하게 드러났으니, 내가 비록 굽혀서 후하게 용서하고자 한들 할 수 있겠는가? 그 의리를 밝히고 조상(朝象)을 안정시키는 도리에 있어서 외지에 보임하여 벌을 가볍게 하는 데 그칠 수는 없으니, 전라 감사 윤행임에게 도배(島配)의 전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정언 이회상(李晦祥)이 약원에서 제호탕을 궐봉(闕封)했던 사람에 대해 그 이름을 조사해 내어 왕법(王法)으로 죄를 처단할 것을 상소하여 청하였습니다. 제호탕을 궐봉한 일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하니, 청컨대,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일기(日記)를 상고해 내어 그때의 제조(提調)를 지명해서 현고(現告)하게 하고, 그 죄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정언 원재명(元在明)이 정민시(鄭民始)를 상소하여 논하기를, ‘기해년214)   여름 사이의 일은 홍국영(洪國榮)의 심복과 조아(爪牙)가 되어 흉모(凶謀)·역절(逆節)을 여러 차례에 걸쳐 상의하였다.’ 하였는데, 대신(臺臣)으로서 이미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함문(緘問)하여 처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행임(尹行恁)을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에 유배하였다.

 

5월 15일 경인

경연관 김일주(金日柱)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새로 천명(天命)을 따르시어 선비를 구하시는 데 정성스럽고도 절실하셨으니, 신과 같이 못난 사람에게도 역시 두터운 예우(禮遇)를 아울러 베푸셔서 이르지 않으면 내버려 두지 않는 성의(聖意)를 보이셨습니다. 신은 이에 곤궁함이 눈앞에 닥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다가, 하는 수 없이 몽매함을 무릅쓰고 몸을 진출하여 도성 안에 들어와서 한 번 전석(前席)에 올라 다행히 천감(天鑑)으로 밝게 살피심을 입게 되기를 그윽이 바랐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향리(鄕里)에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시면 수초(遂初)215)  의 본래 계획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하명(下命)을 기다린 지 3일이 되도록 진지(進止)에 대한 명을 받들지 못하였으므로, 궁궐의 섬돌이 지척(咫尺)에 있으나 마음은 동떨어지고 발길이 막힙니다. 이는 대개 신이 불초(不肖)하고 무상(無狀)하여 성충(聖衷)에 비속하게 보인 소치로서, 진실로 얼굴을 들고 백료(百僚)의 뒤에 섞일 수 없는 일인데, 시골에 있는 선비들도 또한 신의 헤아리지 아니하고 들어온 것을 비웃을 것입니다. 신은 참으로 부끄러워서 위축되어 스스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만,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위급한 마음을 진달하고 바로 도성 문을 나갑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본직(本職)의 체면(遞免)을 허락하시어 보잘것없는 직분을 편안하게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도성에 들어오던 날 불러서 접견하려 하였는데, 마침 서감(暑感)으로 인하여 경연(經筵)을 중지하였으므로, 지체하게 된 까닭에 마음이 불안했었다. 이러한 때에 그대의 소장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끄러움을 깨닫게 된다. 이는 내가 나이 어린 잘못이 아님이 없으니, 너무 허물하지 말고 곧바로 돌아오도록 하라. 수일 간에 강연(講筵)에 입참(入參)시키겠다."
하고, 인하여 사관을 보내어 유지(諭旨)를 전하도록 명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전라 감사 윤행임(尹行恁)에게 이미 절도 정배(絶島定配)의 전형을 시행하였습니다. 지금 본도의 사무를 보건대, 일이 미숙한 자에게는 맡기기 어려움이 있으니, 청컨대, 전 감사 김달순(金達淳)을 유임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승지를 보내어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사판(祠版)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대신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김관주(金觀柱)를 이조 참판으로, 서미수(徐美修)를 이조 참의로 삼으니, 비국의 추천이었다. 얼마 안 있어 윤광보(尹光普)와 임희존(任希存)으로 대체하였다.

 

5월 16일 신묘

하교하기를,
"곧바로 불러서 접견하지 못한 까닭을 어제 내린 유지(諭旨)에 대략 밝혔으나, 밤새도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동안 마땅히 기거(起居)하는 예(禮)가 있었어야 했는데도 또한 빠뜨렸으니, 이는 다 내가 나이 어려서 알지 못한 데 말미암은 것이다. 스스로 부끄러워서 한탄할 뿐 타일러서 이해시킬 도리가 없다. 내일의 권강(勸講)은 그대를 기다려서 할 것이니, 모름지기 곧바로 도로 들어오기를 바란다."
하고, 아침을 기다려 등연(登筵)하라는 일을 사관을 보내어 경연관 김일주(金日柱)에게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경연관 김일주가 상소하기를,
"황감(惶感)하는 정성으로 삼가 마땅히 도성 안에 나아가서 공손히 진지(進止)에 대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던 나머지 그대의 소장에서 이제 곧 입성(入城)하려 한다는 말을 보니, 기쁘고 다행스러움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명일에 마땅히 상견할 것이다."
하였다.

 

전라 감사 김달순(金達淳)의 장계(狀啓)에, 도내의 사학 죄인 김유산(金有山)은 승려와 속인 사이를 들락거리면서 사교(邪敎)에 빠지고 미혹되어 유항검(柳恒儉)과 윤지헌(尹持憲)이 다른 나라와 교통하는 즈음에 그들로 하여금 역졸의 무리에 투탁(投托)하여 서찰을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전하게 하였는데, 정절이 극도로 흉악하고 배포(排布)한 것이 매우 은밀하다 하였으므로, 포청(捕廳)에 잡아 보내어 여러 제수들과 함께 일체로 반핵(盤覈)하게 하였다. 죄인 한정흠(韓正欽)·최여겸(崔汝謙)·유항검의 종 천규(千圭)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련하여 마음을 고치지 않은 채 계획적으로 교를 넓히며 점점 서로 빠져 들어갔으므로, 모두 용서하기 어려운 데 관계되니 일률(一律)을 시행함이 합당하다 하여 결안 정법(結案正法)하게 하였다. 죄인 신경모(申景模)·양언주(梁彦柱)·종 낙선(樂善)·윤상득(尹尙得)·임시형(林時亨)·손도홍(孫道弘)·고시윤(高時允)·이선문(李善文)은 처음에는 비록 미혹되어 빠졌으나, 종내에는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원하였으므로, 모두 감사(減死)의 은전을 베풀어서 등급을 나누어 발배(發配)하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 1백 37명의 죄수는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더 엄중히 추핵하여 아울러 즉시 감단(勘斷)하게 하였다.

 

5월 17일 임진

권강하였다.

 

부교리 이인채(李寅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을 위하는 계책은 바로 전국(全國)을 규합하고, 사류(士類)를 이끌어 진출시키고, 정백(精白)한 일심(一心)을 가지고 아름다운 덕(德)을 대양(對揚)함으로써 우리의 한 번 처음으로 청명(淸明)하게 하는 교화(敎化)를 돕고, 우리의 영원한 후세까지 태평하게 할 터전을 공고히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심이 험악하고 세변(世變)이 겹쳐 발생하는데다가 남을 모함하는 계책이 시기를 틈타 느닷없이 나오니, 며칠 전 이윤행(李允行)의 소장이 곧 그 조짐인 것입니다. 신은 처음에 그 소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래져 놀라서 속이 썩고 뼈가 아팠습니다. 우리 문모(文母)께서 수렴 청정(垂簾聽政)하시는 것을 어떻게 감히 권섭(權攝)에 견주고, 우리 선조(先朝)의 성덕(聖德)으로 농신(弄臣)을 두었다고 말하였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분의를 가진 자가 마음에 품어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들추어내는 데 근사하여 신이 감히 말을 다하지 않았었는데, 그가 전 이조 판서 한용귀(韓用龜)를 논핵한 데에 이르러서는 또 어찌 파착(把捉)함이 없고 조리(條理)가 없음이 이와 같이 심하단 말입니까? 이 중신이 전부터 마음 속에 굳게 지켜 온 것은 본디 청의(淸議)가 창찬한 바였고, 지나간 해에 수립했던 것은 흉당(凶黨)에게 미움받던 것이었는데, 하물며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지고 군자(君子)의 도(道)가 신장되는 시기를 당하여 갑자기 평생 동안 지키던 바를 바꾸어 권간(權奸)에게 투합(投合)했다는 것은 결단코 그렇게 할 이치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한두 번 정주(政注)하는 사이에 과연 지적할 만한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금 만약 그 일을 평범하게 말하여 적절하게 감죄(勘罪)할 것을 청한다면, 관잠(官箴)의 규율이 소대(昭代)를 위하는 아름다운 일에 해롭지 않겠지만, 이것을 가지고 곧바로 망측한 죄과에 몰아서 오늘 발계(發啓)하고 내일 상소하면서 계사(啓辭)로는 삭직할 것을 청하고 상소로는 찬배할 것을 청한 것은 행동 거지가 급작스럽고 율명(律名)이 모순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훈유(薰蕕)를 분변할 수 없고 옥석(玉石)이 장차 뒤섞여질 것인데, 한 자[尺] 정도 썩었다 하여 아름드리 재목을 버리고 한 점의 티가 있다 하여 구슬 전체를 잃게 되는 것과 같아서 한 세상의 사람으로서 법망(法網)을 면할 수 있는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니, 세도가 어느 때에 안정되며 조상(朝象)이 어느 때에 화평해지겠습니까? 신은 전 지평 이윤행(李允行)에게 빨리 병예(屛裔)216)  의 전형을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금번의 사옥(邪獄)은 옛날에 없던 큰 변고인데, 당초에 포청(捕廳)에서는 세월을 헛되이 보내며 옥(獄)의 실정을 누설하여 사당(邪黨)으로 하여금 혹은 도망하거나 요서(妖書)를 많이 숨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신대현(申大顯)이 그때의 포도 대장으로서 유독 찬배시키는 전형에서 벗어난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신대현은 본래 비루하고 패려한 무부(武夫)로서, 오로지 윤행임(尹行恁)에게 붙좇기만을 일삼아 모든 말과 행동이 모두 윤행임의 지시를 받았던 자이므로, 곧 온 세상에서 침을 뱉아 욕하고 있으니, 갑절을 더하는 형률을 받아야 마땅할 것인데, 지금까지 안연(晏然)하게 어영 대장(御營大將)의 중임을 무릅쓰고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찌 형정(刑政)의 큰 실책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광익(李光益)이란 자는 곧 매위(韎韋) 중의 한 윤행임입니다. 오랫동안 지존(至尊)을 가까이 모시는 곳에 있으면서 치우치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는데, 은혜를 값을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더욱 함부로 날뛰던 습성을 늘어놓아 윤행임과 안팎으로 화응(和應)하고,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여 권병(權柄)을 팔며 농락한 것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는데, 나라 안에 말이 퍼져서 떠들썩하니, 물정(物情)이 분개해 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작년 여름 망극(罔極)한 변을 당하였을 때에는 진실로 조금이라도 상도(常道)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그 누군들 역적 심인(沈鏔)을 직접 칼로 찌르고 싶어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저 이광익은 또한 유독 무슨 심정이기에 불공 대천(不共戴天)의 분개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고, 은밀하게 비호하려는 뜻을 드러나게 가지고 이에 빈전(殯殿)에 옮겨 모실 때에 방자하게 역적 심인의 이름을 우림위(羽林衛)의 반열에 의의(擬議)하였으니, 이를 용인할 수 있다면 무엇을 용인할 수 없겠습니까? 만약 권흉(權凶)을 보좌하는 조아(爪牙)의 세력을 절단하고 국가의 가까운 복심(腹心)에 대한 근심을 제거하려면, 이 두 사람을 처치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 신은 어영 대장 신 대현과 행 호군 이광익에게 아울러 멀리 찬배하는 전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윤행에 대한 일은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신대현과 이광익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정수(徐鼎修)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5월 18일 계사

권강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연관이 이미 들어왔고 또 대신과 응참(應參)할 여러 사람들이 있으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각신(閣臣)의 권강은 정파하도록 하라. 판돈녕 박준원(朴準源)은 처지가 남보다 특별하여 처음부터 권학(勸學)하여 동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원정 특진관(原定特進官)으로 임명하여 날마다 권강에 참여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대겸(申大謙)을 어영 대장으로, 이한풍(李漢豐)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김관주(金觀柱)를 발탁하여 병조 판서로 삼고,  【새로 자급을 받고서 새로 통의(通擬)되었다.】 오정원(吳鼎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부교리 이인채(李寅采)가 이윤행(李允行)의 소장에 대해 상소하여 논하기를, ‘우리 문모(文母)께서 수렴 청정(垂簾聽政)하시는 것을 감히 권섭(權攝)에 견주었고, 우리 선조(先朝)의 성덕으로 감히 농신(弄臣)을 두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권섭 따위의 문자는 처음부터 정희 성모(貞熹聖母)217)  의 가까운 예나 선인 태후(宣仁太后)218)  의 고사(故事)에 근사(近似)하지도 않지만, 농신이란 명칭은 오히려 한나라 문제(文帝)의 겸덕(慊德)과 같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감히 불경(不敬)한 말로써 도리어 우리 선조의 광명 성대하신 덕업(德業)에 누를 끼치는 것이겠습니까? 그가 말한 것이 아주 패려하여 윤리에 어긋남은 보통 문자 사이의 과실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옥당(玉堂)의 상소에 의거하여 그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대현(申大顯)을 이원현(利原縣)에, 이광익(李光益)을 벽동군(碧潼郡)에 유배하고, 이윤행(李允行)을 웅천현(熊川縣)에 병예(屛裔)하였다.

 

양사 【사간 박서원(朴瑞源)·장령 홍희운(洪羲運)·지평 채지영(蔡趾永)·헌납 조항진(趙恒鎭)·정언 이회상(李晦祥)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윤행임(尹行恁)의 죄를 이루 다 주토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백면(白面)에서 몸을 일으켜 갑자기 경대부(卿大夫)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우리 선왕께서 장려하여 선발하신 은총과 우리 동조(東朝)께서 특별히 발탁하신 은권(恩眷)이 아님이 없었으니, 은혜를 베푸신 바가 어떠하였으며 국정을 맡기신 바가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은혜를 갚을 방도는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함부로 농간을 부릴 계책만 늘어놓고 거짓 의리를 핑계대어 몰래 속마음을 제멋대로 풀려고 한 짓은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리고 창황한 즈음에 명을 받았으면 진실로 슬픔을 머금고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 마땅한데, 사사로운 복제(服制)를 마치지도 않은 채 시기를 이용하여 뛰어들어가서 양양하게 조심스러워하는 뜻이 없었으며, 유밀(宥密)한 지위에 가까이 위임하였으면, 오직 내 일신을 잊고 충성을 다해야 마땅한데, 제가 바라던 일이 성취된 지 얼마 안되어 손발을 마구 놀려 점차 패합(捭闔)하는 술책을 행하였으니, 사람의 도리가 없어지고 신하의 분의가 무너진 것이 또한 한심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올빼미 같은 심장이 더욱 독기를 부리고 원숭이처럼 속이는 것이 더욱 교묘해져서 권세를 훔쳐 축적하고 은총을 의지해 믿었으나, 재능이 부족하여 무거운 직임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낭자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조(先朝)의 유의(遺意)를 망령되게 일컫고 주의(注擬)하는 것이 흐릿하여 공의(公議)가 떠들썩해져도 이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공로를 자기 것으로 삼고 남을 배척하여 이득을 도모하는 데 이르러서는 뇌물을 받는 문을 넓게 열어 놓고 조금도 돌아보아 꺼리는 바가 없었으며, 사변(邪弁)의 저택을 옮겨 차지하고도 추악한 짓인 줄 알지 못하였었으니, 이것은 그에게 있어 도리어 자질구레한 일들이었습니다.
또 더욱이 주고(奏稿)의 간역(刊役)은 공좌(公座)에서 그것을 말하여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현혹됨이 더욱 심하였으며, 섬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한 역적을 암암리에 영호(營護)할 것을 꾀하여 풀숲에 군사가 매복한 것과 같은 위기가 점차 급박해졌었습니다. 흉괴(凶魁)를 위해 힘을 다하는 계책에는 손발이 바빠서 쩔쩔 매었고, 박소(薄昭)를 죽인 것은 덕(德)이 적은 소치라는 장주(章奏)에서 마음보가 죄다 드러났습니다. 뒷날을 돌아보아 범을 기르는 데에 마음 달갑게 여겼고 은밀한 곳을 경영하여 토끼의 굴속에서 계책을 세웠는데, 심지어 흉악한 송문술(宋文述)의 소장을 꾸며낸 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으니, 그 죄를 논하려면 죽간(竹簡)에 다해도 쓰기 어렵고 머리털을 다 뽑는다 하더라도 그 죄를 세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대신이 진달한 차자에 증거가 확실하였고, 문모(文母)께서 윤음(綸音)을 내려 결단하심이 밝고 빛나셔서 도배(島配)의 형벌을 시행하였으니, 비록 왕장(王章)을 조금이나마 펴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약간 덜었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이 나라를 배반하고 제 당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의리를 무시하고 난역을 도모한 대간 거특(大奸巨慝)을 결코 하늘과 땅 사이에 잠시라도 용납되게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지도(薪智島)에 도배한 죄인 윤행임(尹行恁)을 빨리 왕부(王府)에 명하여 잡아다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내어 전형을 흔쾌히 바루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계(院啓)에 이르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윤행(李允行)의 소장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명칭은 비록 난적(亂賊)을 징토하는 데 가탁하였으나, 계책은 의리를 괴란(壞亂)시키는 데에 행하여졌습니다. 그의 소장 가운데 ‘권섭(權攝)’이라는 두 글자와 ‘농신(弄臣)’이라는 한 구어는 이 어찌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서 북면(北面)하는 자로서 감히 마음에 품어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우리 자성 전하께서는 태모(太母)의 존귀함으로 여요(女堯)의 덕을 갖추셨는데, 국가의 위태한 형편을 몹시 염려하시어 뭇신하들의 수렴 청정하시라는 청에 힘써 따르셨으니, 이는 곧 국조(國朝)의 가까운 예와 원우(元祐)의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나라 전체를 둘러보아도 생명을 가진 무리 가운데 누가 감히 이런 이치에 어긋난 말을 장주(章奏)의 사이에 느닷없이 불쑥 올리겠습니까? 그의 마음에 있는 바는 길 가는 사람도 아는 것입니다. 또 농신이란 말 같은 것은 어찌 무엄하기가 그렇게 심합니까? 전사(前史)에 일컬은 바는 오히려 후세의 비웃음만 끼치는 것인데, 그가 감히 이것을 문자에 드러내어, ‘스스로 권간(權奸)을 토죄할 것을 청한다.’ 하면서 은연중에 선왕의 성덕(聖德)과 지선(至善)에 누가 돌아가게 하였으니, 진실로 조금이나마 사람으로서의 심정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 같은 패만한 말을 전하의 조정에서 발설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비천하고 몽매한 자가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마는, 이는 대개 일종의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항상 평일에 불만스런 마음을 품고 있다가, 사사로이 스스로 비방하고 서로 화응(和應)하여 큰 의리를 거스르고 선류(善類)를 살해하고자 하여 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말이 자성을 핍박하고 무함이 선조(先朝)에 미치기에 이르렀으니, 이를 만약 버려두고 묻지 않는다면, 장차 몇 명의 이윤행이 뒤를 연달아 일어나서 의리를 현란시키고 세도(世道)를 어긋나게 할지 알 수 없으니, 어찌 늠연(凛然)하여 한심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병예 죄인(屛裔罪人) 이윤행에게 빨리 왕부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해 실정을 알아내어 흔쾌하게 전형을 바루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5월 19일 갑오

주강하였다.

 

양사(兩司) 【사간 박서원(朴瑞源)·장령 홍희운(洪羲運)·헌납 조항진(趙恒鎭)·정언 이회상(李晦祥)이다.】 에서 연명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민시(鄭民始)가 역적 홍국영(洪國榮)에게 사주받아 무핍(誣逼)할 계책을 세운 것이 극도로 흉패(凶悖)하여 한 세상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여염집에서도 숙덕거렸던 것을 귀가 있는 자라면 누가 들어서 알지 못하겠습니까? 아! 통분스럽습니다. 정민시가 역적 홍국영의 조아(爪牙)와 심복이 되었으니, 무릇 역적 홍국영에 관계된 흉도(凶圖)와 역절(逆節)을 정민시가 알지 못하고 그 누구가 알겠습니까? 대개 기해년219)   여름 사이의 변을 당해서는 체포한 것이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미쳤었는데, 동참한 자는 정민시이고, 흉언(凶言)이 하인들에게 두루 미쳤는데, 악을 조장한 자는 정민시였습니다. 심지어 송덕상(宋德相)이 등연(登筵)하여 패려하게 아뢴 것과 홍국영이 지휘한 흉설(凶說)은 정민시가 안팎에서 화응(和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건대, 가슴과 뼛속이 함께 써늘합니다. 그리고 그가 설시하고 배포한 흉적(凶跡)에 대해서는 신 등이 그 일이 궁액(宮掖)에 관계되기 때문에 비록 감히 다 말할 수 없으나, 수많은 입에서 같이 전하고 부녀자나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분노하는 데에야 어찌하겠습니까? 아! 그가 망극한 은총을 받고서도 흉적의 앞잡이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겨 이에 차마 하지 못할 흉모(凶謀)를 늘어놓았으니, 지금 이 사람들의 말은 오히려 늦었다고 할 만합니다. 어찌 귀신의 주벌이 먼저 미쳤다 하여 왕법(王法)이 막히어 펴지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고 판서 정민시에게 빨리 관작을 추탈하는 전형을 베풀고, 연좌된 여러 사람들도 똑같이 사방에 유배함으로써 신인(神人)의 분노를 덜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병조 판서 김관주(金觀柱)는 등과(登科)한 지 비록 오래 되었지만 자력(資歷)이 많지 않은데, 갑자기 정경(正卿)에 올리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아야 될 듯하다. 대신의 의천(擬薦)이 어찌하여 이와 같이 대단히 급한가?"
하니,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현재 조정에는 인재가 아주 적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사람됨이 견고하고 확실한데다가 문식(文識)도 넉넉하며, 그동안 묘당(廟堂)의 추천으로 외임(外任)도 겪었으니, 또한 이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그가 마음속에 잡아지키는 바가 우뚝하니, 실로 이때에 끌어올려 쓰는 데 합당하므로, 신 등이 의망(擬望)해 천거한 것입니다. 진실로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뜻을 그 사이에 용납한 바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김치묵(金峙默)에 대한 일은 누누이 하교하였으나, 경 등이 끝내 받들지 않았다. 김치묵은 죄가 크지만, 그의 본정(本情)을 추구해 보면 또한 참작하여 용서할 만한 것이 있으니, 지난달에 처분한 것과 지금의 이 하교는 실로 이 두 가지를 시행한 것이 이치에 어그러짐이 없다. 이에 언교(諺敎)를 반포해 내리니, 모름지기 곧바로 정계(停啓)하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뜻을 대간(臺諫)에게 말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언교를 내리기를,
"김치묵에 대한 일을 늘 유시(諭示)하려고 하였으나 지금까지 아직하지 못하였었다. 대저 그의 행적을 논하면 족히 말할 만한 것이 있고 그의 마음을 추구해 보면 역심(逆心)에서 나오지는 않았으니, 이는 선조(先朝)께서 깊이 통촉하셨던 바이고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다. 하물며 지난번 박재원(朴在源)을 포증(褒贈)하였을 때 김치묵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성의(聖意)가 있었음을 우러러 추측할 수 있고, 5월의 대계(臺啓)는 공의(公議)를 한번 폈으니, 특별히 정계할 일을 대각(臺閣)에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병조 판서 김관주(金觀柱)는 한 번 패초(牌招)를 어긴 뒤에 곧바로 고향길을 찾았다고 하니, 조정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매우 미안(未安)합니다. 더욱이 이 사람은 또한 과거를 거쳐 출신하였으므로 관직에서 물러나고 나아가는 데에 자연히 격례(格例)가 있어야 할 것이니, 어찌 산야에서 지조(志操)를 숭상하는 선비와 같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올라오도록 엄중히 신칙하여 부신(符信)을 받는 처지만 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수찬 이존수(李存秀)가 상소하여 윤행임(尹行恁)의 죄를 논하면서 빨리 대계(臺啓)에 윤허하여 흔쾌하게 왕법(王法)을 펼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자전(慈殿)께서 이미 처분하셨다."
하였다.

 

옥당(玉堂) 【응교 민명혁(閔命爀), 부응교 김선(金銑), 교리 한흥유(韓興裕)·이경삼(李敬參), 부교리 이인채(李寅采)·신서(申漵), 부수찬 정만석(鄭晩錫)·김재창(金在昌)이다.】 에서 연명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이 무오년220)  에 저질렀던 일과 장희재(張希載)·민암(閔黯)이 기사년221)  에 저질렀던 일의 그 극도로 흉참함은 진실로 천지(天地)와 만고(萬古)를 통해 살펴 보아도 없던 바입니다. 그런데 효음(梟音)을 고금에 서로 물려받고 경심(獍心)을 전후에 함께 관통하여 또 홍국영(洪國榮)과 정민시(鄭民始)가 나오게 될 줄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아! 저 홍국영의 천만 가지 죄악을 소계에 나열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자질구레한 일에 속할 뿐입니다. 기해년222)   여름 사이의 일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골(骨)이 떨리고 담(膽)이 흔들립니다. 그도 또한 우리 동방의 신하로서 감히 국모(國母)를 섬겨야 할 처지인데, 몰래 원한의 심사를 품어 위핍하는 계책을 드러나게 행하여, 설시(設施)하고 배포(排布)한 바가 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심복이 되었던 자는 정민시였고, 그의 조아(爪牙)가 된 자도 정민시였습니다. 그는 본래 간교한 성질로 몹시 잔인한 악행(惡行)을 이루는 자인데, 붙좇으며 사주받아 함께 그 악행을 이루면서 단지 역적 홍국영이 있는 것만 알고 국모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극히 흉패(凶悖)하여 차마 말할 수도 없고 감히 말할 수도 없는 일이 여항(閭巷)에 낭자하게 전파되었으니, 무릇 혈기가 있어 생명을 지닌 무리라면 속을 썩이고 피가 끓어올라 곧바로 그의 살을 난도질하고 그의 가죽을 깔고 자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일이 궁액(宮掖)에 관계된 까닭에 감히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고,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머금은 채 20여 년을 지나왔는데, 이제 다행스럽게 대신(臺臣)이 단서를 들추어내어 실마리를 핵실할 길이 있고 정상이 반드시 드러날 기미가 있게 되었었습니다. 따라서 위로 진신으로부터 아래로 하인배와 부녀자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은 소리로 토죄(討罪)하였으므로 거의 오랫동안 쌓였던 울분을 덜 수 있었는데, 귀주(鬼誅)가 먼저 가해져 형륙(刑戮)을 베풀 길이 없으니, 빨리 정민시의 죄를 바루어 그의 관작을 추탈하소서. 홍국영의 수악(首惡)에 이르러서는 더욱 추탈하는 데 그칠 수 없으니, 흔쾌하게 노적(孥籍)의 전형을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이 이미 복주(覆奏)하였었다."
하였다.

 

5월 20일 을미

소대하였다.

 

병조 판서 김관주(金觀柱)를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우포도 대장 이한풍(李漢豐)이 품달할 일이 있다 하여 청대(請對)하니, 드디어 시임·원임의 대신들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이한풍이 말하기를,
"동대문과 남대문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언문 서찰을 입직 금군(入直禁軍)에게 주었는데, 금군이 포청(捕廳)에 와서 바치므로, 신이 비로소 뜯어 보았더니, 이것이 흉서(凶書)이었습니다. 놀라서 두려움을 금하지 못하여 이에 감히 청대하고, 옷소매에서 꺼내어 바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돌아가며 보라고 명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 서찰이 두 개이나, 내용은 한가지이다. 서찰에 한 말은 진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그 간교한 계책은 얕아서 쉽게 알 수 있다. 장신(將臣)을 다 몰아넣은 것은 오로지 조정을 동요시키고 인심을 의란(疑亂)하여 속마음을 넌지시 떠보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아뢰기를,
"자성의 하교가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이는 역적의 소굴이 아직 남아 있는 까닭에 이런 변괴가 있게 된 것입니다. 생각건대, 저 도역(島逆)은 곧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하지 못할 바이고, 흉참하고 사특한 홍낙임(洪樂任)에게 도극(島棘)의 전형을 베푼 것은 너무 관대하게 실형(失刑)한 것입니다. 두 역적의 죄는 위로 하늘에 통하였는데도 아직 하늘과 땅 사이에 잠시 쉬게 하였으므로, 흉패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움직였다 하면 문득 서로 관련을 맺었습니다. 따라서 윤행임(尹行恁)이 선조의 의리를 배치(背馳)하고 선조 때 굳게 지키던 마음을 저버린 데에 이르러서는 홍낙임과 충분하게 주무한 실상이 밝게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대개 도역·홍낙임 및 윤행임이 한 가지 투식(套式)으로 합작한 소굴의 근원이 본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요망하고 흉악한 말이 무단히 지어져 나온 것입니다. 또 나라를 원망하는 사학(邪學)의 무리가 있다는 것 또한 하나의 와전된 말에서 나온 것이니, 오늘날을 위한 방도는 마땅히 그 근본(根本)을 먼저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뒤에는 이 같은 지엽(枝葉)은 제거되기를 기필하지 않아도 저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대저 포청(捕廳)에서 거행한 것이 몹시 해괴하다. 망명(亡命)한 황사영(黃嗣永)·현경(玄慶) 같은 무리를 아직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니, 그동안에도 반드시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놈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대로 둘 수 없다. 이번 일은 오로지 조정을 동요시키고 인심을 소란스럽게 하고자 하여 장신(將臣) 몇 사람을 몰아넣은 것이다. 그리고 조정에서 그 사이에 의심하게 하려 한 짓이지만, 위에서 어찌 그가 말한 것 때문에 털끝만큼이라도 생각을 움직이겠는가? 먼저 이놈을 잡아들여 캐묻는 바탕을 삼지 않을 수 없으니, 모름지기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여 기필코 잡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1일 병신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아침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5월 22일 정유

권강하였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비국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병신년223)   중궁전(中宮殿)에 진상할 제호탕을 궐봉(闕封)했던 약원의 세 제조는 현고(現告)를 받아들여 그 죄를 의정(議定)하라는 일을 윤하(允下)하셨습니다. 그 당시 도제조는 김양택(金陽澤)이었고, 제조는 서명선(徐命善)이었으며, 부제조는 홍국영(洪國榮)이었음을 본원에서 상고해 내어 현고해 왔으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오정원(吳鼎源)이 상소하여 이인(李䄄)·홍낙임(洪樂任) 및 윤행임(尹行恁)에게는 흔쾌하게 왕법(王法)을 바루고, 이윤행(李允行)에게는 국청을 설치하여 죄를 바루고, 정민시(鄭民始)에게는 관작을 추탈하는 전형을 시행하고, 홍국영(洪國榮)에게는 빨리 노적(孥籍)의 전형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한 내용은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오정원(吳鼎源)이 상소한 여러 조항 중의 이인(李䄄)·홍낙임 및 윤행임에 관한 일은 청컨대, 대간의 청을 모두 윤허하소서. 홍국영의 노적(孥籍)에 대해서는 이미 수교(受敎)가 있어서 감히 갑작스럽게 의논할 수 없으나, 정민시의 기해년224)   사이의 일은 양사(兩司)에 함문(緘問)하고 그 함사(緘辭)가 등철(登徹)되기를 기다려 그 죄를 의정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고, 정민시에 대한 일은 함사를 기다려서 처치하게 하였다.

 

전 장령 정필조(鄭弼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 김재찬(金載瓚)은 본래 사특한 성품에 궤비(詭秘)한 행실을 겸하여 갖추고 있습니다. 작년 도정(都政) 때 무릇 그 진퇴(進退)에 대해 윤행임(尹行恁)에게 말하여 지시를 받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역적을 위해 번복(飜覆)할 계책을 은밀히 행하다가, 마침내 병을 핑계대고 인입(引入)한 채 조정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는 뜻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윤행임을 처분한 뒤에 김재찬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있도록 하는 것이 형정(刑政)의 마땅함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좌참찬 김재찬에게 찬배의 전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조 참의 조득영(趙得永)은 어리석고 경박한 곧 하나의 미천한 부류인데, 평상시 언의(言議)는 선류(善類)를 좇는 듯하였으나 전후의 추천은 번번이 모두 권문(權門)에서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주(政注)에서 의망을 받았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욕을 먹고 시원(試院)에서 비방을 들은 것은 제 행동에 따라 자초한 것이었으니, 바야흐로 간흉(奸凶)을 물리치는 때를 당하여 어찌 당여(黨與)를 다스리는 율에서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전 도사 민장현(閔章顯)은 요망한 성질과 조급한 행실이 그의 외숙과 아주 비슷하여 포의(布衣)로서 세력을 팔아서 권세가 일세(一世)를 기울일 정도였습니다. 금번의 과사(科事)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처음에는 이미 뒤섞어 수용하여 같은 또래에서 뛰어나게 하였다가, 바로 물의(物議)로 인하여 고사(考査)에서 내쳤습니다. 외숙과 성질간에 마음을 쓴 정상을 입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이를 전파하였으니, 저와 같이 간세(奸細)한 무리에게 수사(收司)225)  의 율을 합하여 시행하소서. 임실 현감(任實縣監) 황인기(黃仁紀)는 위포(韋布)로 있었을 때부터 행실이 음비(陰秘)하였고, 젊었을 때 무뢰한 무리를 뒤좇아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년에는 사류(士類)를 거짓 칭탁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비웃으며 욕하였습니다. 심지어 뇌물을 받고 청촉(請囑)을 꾀하는 습성과 상중(喪中)에 여색을 탐한 비난은 이를 말하기조차 추잡스러우니, 어찌 다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윤행임이 조정의 권세를 제멋대로 농락하였을 때에는 분주하게 노력하여 등창을 빠는 기교를 다 부렸고, 좌우에서 권유하여 포학을 조장하는 혐의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만냥 태수(萬兩太守)226)  를 세력의 연줄로 인하여 앉아서 얻었고, 8백 개의 부채를 은밀히 봉하여 몰래 수송하였는데, 이는 모두 길거리의 사람들이 듣고 본 것이니, 덮어 숨길 수 없습니다. 지금 간흉을 물리치는 시기를 당하여 조아(爪牙)가 되고 심복이 되었던 무리를 그대로 두고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조득영·민장현·황인기는 병예(屛裔)의 전형에서 도피하기 어렵다고 여깁니다. 전 교리 이석하(李錫夏)는 본래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로서, 타고난 성품이 간교하고 악독한데다가 지론(持論)이 흉악하고 음험하여 말을 하고 일을 논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채제공(蔡濟恭)의 지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을 돕고 착한 이들을 해쳐서 두건덕(竇建德)이 원수227)  를 갚는 일을 시행하려 하였는데, 갑인년228)  에 올린 한 소장은 곧 그의 평생의 단안(斷案)이었으니, 지금 의리를 밝히고 소인을 멀리하는 날을 당하여 이와 같은 음험하고 간사한 무리는 왕도에 둘 수 없습니다. 특별히 투비(投畀)하도록 명하시어 악한 자에게 고통을 주는 정치를 면려하소서. 신은 사사로이 분개하여 원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박종악(朴宗岳)의 임자년229)   흉소(凶疏) 가운데 ‘기묘(己卯)’ 이하의 두어 구어(句語)는 곧 장돈(章惇)과 채경(蔡京)230)  도 감히 말할 수 없었던 것인데, 그의 삼촌 박명원(朴明源)은 감히 가정에서 마음속에 품었다가 입 밖에 내어 옮겨가면서 서로 고해 바쳤습니다. 그는 존귀한 위치에 속하여 처지가 자별하였으면, 더욱 어찌 감히 이런 흉언을 가지고 중외(中外)를 선동하여 그 조카로 하여금 서론(緖論)을 전해 받도록 해서 주달하는 소장에 올리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죄범(罪犯)을 논할 것 같으면 박명원이 실로 수범(首犯)이 될 것입니다. 신은 고(故) 도위(都尉) 박명원은 마땅히 빨리 그 죄를 의정하여 해당되는 율을 추후해서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한 내용은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직보(李直輔)를 이조 판서로, 조진관(趙鎭寬)을 병조 판서로, 한용귀(韓用龜)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포도청에서 사학 죄인(邪學罪人)을 형조(刑曹)에 옮기고 결안(結案)을 바쳤는데,
"죄인 강성(姜姓)의 노파 완숙(完淑)은 사서(邪書)를 배워서 오염되고 고혹되어 지아비 홍지영(洪志榮)에게 내쫓겼으나, 그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홍필주(洪弼周)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머물면서 주문모(周文謨)를 높이 받들어 갈륭파(葛隆巴)라는 호를 받았으며, 6년 동안이나 숨겨 두어서 추행(醜行)이 낭자하였으나, 그 도(道)는 본래 이와 같다는 이유 때문에 더러운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황사영(黃嗣永)이 망명했을 때에는 그를 위해 주선하여 숨겨 준 다음 그로 하여금 몸을 숨겨 피하게 하고 스스로 사학의 괴수를 삼았으며, 남녀가 뒤섞여 밤낮으로 외며 학습하였습니다. 따라서 가는 곳마다 속여서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하여 한 세상을 미혹되게 하였습니다. 죄인 최인철(崔仁喆)은 사학을 정도(正道)로 여겨 신주(神主)를 태우고 제사를 폐지하기에 이르렀으며, 주가(周哥)를 높이 받들어 도당을 체결하고, 형륙(刑戮)을 달갑게 여겨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죄인 김현우(金顯禹)는 사학에 차츰 빠져들어 주가 놈을 맞이해 놓고 흉상(凶像)을 걸고서 설법(設法)하고 예배를 보고, 요서(妖書)를 외면서 남녀가 뒤섞여 거처하였습니다. 죄인 고광성(高光晟)은 사서에 고혹되어 밤낮으로 외어 학습하며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철폐하였으니,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됩니다. 죄인 이국승(李國昇)은 주가 놈을 신부(神父)로 섬기며 집안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10년 동안 고혹된 마음은 도거(刀鋸)에도 고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죄인 김녀 연이(連伊)는 중간에서 사학을 매개(媒介)하는 노파로서,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평민을 유혹해 그릇되게 하였고, 강파(姜婆)와 서로 체결하여 주가 놈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망명한 황사영을 집안에 숨겨 두어 마침내 도피하도록 하였습니다. 죄인 강녀(姜女) 경복(景福)은 폐궁(廢宮)의 나인(內人)으로 강파의 집에 왕래하면서 주문모에게서 호를 받았는데, 선아(仙娥)라고 일컬었습니다. 죄인 한녀(韓女) 신애(新愛)는 몸이 사학에 빠진 지 이미 여러해가 되어 강파를 추종하면서 주가 놈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요서(妖書)·요화(妖畵)를 집안에 숨겨 묻어 두었습니다. 죄인 이현(李鉉)은 본래 희영(喜英)의 조카로서, 강파의 아들이 그의 동서(同婿)가 되는데, 사학에 차츰 빠져들어 그 악행(惡行)을 함께 이루었습니다. 죄인 홍정호(洪正浩)는 강파의 집에 왕래하면서 설법(設法)의 모임에서 사학을 강하였으며, 많은 요서(妖書)와 흉서(凶書)를 정원 안에 숨겨 묻어 두었다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죄인 윤녀(尹女) 점혜(占惠)는 본래 양반의 서얼 처녀로서, 과부라고 거짓 일컬어 강파에게 종적을 의탁하고, 주가 놈의 손에 세례를 받았는데, 아가대(亞佳大)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죄인 여인 영인(榮仁)은 본래 물러난 궁인(宮人)으로서, 완숙과 체결하여 주가 놈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비비아라(非非阿羅)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죄인 여인 순매(順每)는 동녀(童女)로서, 허성(許姓)의 처라고 거짓 일컫고는 남매가 사교(邪敎)에 함께 고혹되어 주가 놈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발발아(發發娥)라고 호를 지었습니다."
하였으므로, 모두 정법(正法)하게 하고, 고광성·이국승·윤점혜·순매는 원적(原籍)의 관아로 압송하여 정법하게 하였다.

 

5월 23일 무술

권강하였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김해부(金海府)에 전해 내려오는 옛 환곡(還穀)이 2만 1천 5백여 섬이 되는데, 포흠(逋欠)을 진 지 여러 해가 되어 샅샅이 조사할 길이 없으므로 전 부사 이신경(李身敬)이 경솔하게 먼저 장부를 태우고 한 고을 전체를 똑같이 나누어 징수하였다고 그 도(道)의 감사가 장문(狀聞)하여 죄를 논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이것을 구처(區處)할 방책은 오직 수봉(收捧)하느냐 수봉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데, 수봉하려면 환안(還案)이 이미 다 불에 타서 빙고할 만한 것이 없고, 수봉하지 않으려면 2만여 포의 곡식을 일시에 탕감해야 하니, 너무 중난(重難)한 데 관계됩니다. 묘당의 여러 의논도 많이 어긋나고 있는데, 그것은 한갓 쓸데없는 장부를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탕감해 줌으로써 조정에서 백성을 애휼하는 덕의(德意)를 보이고, 이로써 감사에게 분부하게 하소서. 문권을 불 태운 고을 수령에 이르러서는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멀리 찬배하는 전형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이신경은 개천군(价川郡)에 귀양 보냈다.

 

문형 회권(文衡會圈)을 명하였다. 판부사(判府事) 홍양호(洪良浩)가 상소하여 이만수(李晩秀)·김조순(金祖淳)·김재찬(金載瓚)·서정수(徐鼎修) 4인을 천거하였는데, 도당(都堂)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좌의정 이시수(李時秀)·우의정 서용보(徐龍輔)·병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우참찬 이치중(李致中)·공조 판서 이경일(李敬一)·호조 판서 이서구(李書九)이다.】 의 권점(圈點)에서 홍양호를 전임이라 하여 예에 의하여 덧붙여 써 넣었다. 이만수·김조순·김재찬·서정수가 6점을 받았고, 홍양호가 5점을 받았으므로, 이만수를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으로 삼았다.

 

김관주(金觀柱)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전 장령 정필조(鄭弼祚)가 상소하여 논한 여러 조항 가운데 도배(島配)한 죄인 윤행임(尹行恁)의 일에 대해 신 등이 전후에 우러러 청한 것은 실로 국가를 염려하고 세도(世道)를 근심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여러 사람의 분노하는 마음이 똑같으니, 오직 여럿이 청한 것에 빨리 윤허하시기를 원할 뿐입니다. 중신 김재찬(金載瓚)은 조정에서 의뢰하여 위임하고 사류(士類)들이 기대했던 사람으로, 근본이 본래 미천하지 않습니다. 전관(銓官)으로 정사를 행했을 때 비록 한두 번 헐뜯는 의논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사특하고 궤비(詭秘)하다는 말뜻은 아주 근사하지 않은데, 오직 능욕하기를 일삼고 있으니, 이 같은 풍습은 조정에서 매우 미워하고 대단히 배척함이 마땅한 바입니다. 그런데 이는 이미 비지에 응하여 의견을 아뢴 것이니, 아직 감죄할 것을 논하지 않겠습니다. 조득영(趙得永)·민장현(閔章顯)·황인기(黃仁紀) 등의 일에 대해서는 권간(權奸)을 찬출하여 조정을 숙청하였는데, 기회를 틈타 박격(搏擊)하며 떠들썩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이는 도리어 조상(朝象)을 안정되게 하는 뜻이 아니니, 모두 내버려 두게 하소서. 이석하(李錫夏)가 지난해에 올린 한 소장은 의리를 배반하고 바른 사람을 미워하여 고 상신을 터무니없이 무함하였는데, 말이 극도로 참혹하여 온 세상에서 지금까지 놀라고 분개하고 있으니, 투비(投畀)의 전형을 베푼 것은 오히려 가볍게 감죄한 데 속합니다. 고 도위(都尉) 박명원(朴明源)의 일은 그 조카가 올린 흉소(凶疏) 가운데 제 삼촌을 증빙하여 쓴 말은 다만 윤리에 어긋난 가정의 사사로운 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공안(公案)을 증빙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추후에 그 죄를 바르려면 이는 일률(一律)에 관계되므로, 갑작스럽게 의논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윤행임(尹行恁)에 대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중신 김재찬에 대한 일은 경 등의 회계(回啓)한 데에서 공정한 의논을 볼 수 있었다. 그 아래 조득영 외 여러 사람에 대한 일은 경 등의 말이 또한 옳다. 이석하에 대한 일은 이미 ‘의리를 배반하고 바른 사람을 미워했다.’고 하였으니, 대간(臺諫)의 말에 따라서 투비의 전형을 시행하도록 하라. 고 도위〈박명원〉에 대한 일은 단지 가정 안의 사사로운 말이고 이미 겉으로 드러난 증거가 없는데, 그 조카의 말 때문에 그 삼촌을 죄준다면, 어찌 윤기(倫紀)에 손상시키는 바가 있지 않겠는가? 경 등의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죄인 이치훈(李致薰)을 방축 향리(放逐鄕里)하도록 명하였는데, 국문한 초사(招辭)에서 사교(邪敎)에 오염된 현저한 증거가 없다고 대신이 말한 때문이었다.
5월 24일 기해

권강하였다.


 

 

 

서정수(徐鼎修)를 수원부 유수로 삼았다.
소대하였다.


 

 

 

집의 김희채(金熙采), 사간 유경(柳畊), 장령 강문회(姜文會)·홍광일(洪光一), 지평 강준흠(姜浚欽), 정언 이경삼(李敬參)이 아뢰기를,
"정민시(鄭民始)에 대한 일을 전 사간 박서원(朴瑞源)·전 장령 홍희운(洪羲運)·전 헌납 조항진(趙恒鎭)·전 정언 이회상(李晦祥)에게 함문(緘問)하였더니, 회답한 통문(通文)에 이르기를 ‘아! 기해년231)   여름 동안에 있었던 변고는 생각하면 담(膽)이 떨리고, 말하려면 가슴이 막힙니다. 그때 정민시가 역적 홍국영(洪國榮)에게 사주받아 궁인(宮人)을 체포하여 악형(惡刑)으로 구문(究問)하다가 죽인 일이 있기에 이르렀던 것은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 말하고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으니, 그가 위핍했던 흉도(凶圖)와 참혹하게 무함했던 역절(逆節)은 환하게 드러나 숨기기 어렵습니다. 특히 그 세력이 하늘에 넘칠 만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말을 못한 지 지금 몇 해나 되었습니까? 또 궁중의 일은 비밀스러워서 바깥 사람들은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떠들썩하다가 온 세상에 전파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지금 다행히 동료 대신(臺臣)이 다른 사람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일을 과감하게 말하였는데, 그 함사 가운데 정민시의 죄를 나열한 것은 곧 온 나라에서 똑같이 전하여 똑같이 분개해 하는 바입니다. 정민시의 죄를 추후해서 바로잡음으로써 신인(神人)의 분개함을 덜도록 하는 것은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이므로, 충분(忠憤)에 격동되어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일전에 연명(聯名)하여 짤막한 차자를 올렸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궁중의 액례(掖隷)에 관계되어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다.」는 뜻을 명백하게 바로 진달하지 못한 채, 단지 「체포한 것이 말하기 어려운 데 미치기에 이르렀다.」고만 말하였기 때문에 함문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황송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술(供述)한 바가 이와 같으니, 청컨대 성상께서 재가(裁可)하소서."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전 교리 이석하(李錫夏)를 북청부(北靑府)에 유배하였다.


 

 

 

5월 25일 경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권강(勸講)에 입시할 때 옥당(玉堂)에서는 상번(上番)·하번(下番)이 돌아가면서 입참(入參)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강하였다.


 

 

 

차대하였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함답(緘答)한 말을 보았더니, ‘기해년232)   여름 사이에 있었던 변고는 전부 역적 홍국영(洪國榮)과 정민시(鄭民始)의 간교하고 흉악한 데에서 빚어진 것으로서, 궁인(宮人)을 체포하여 여러 가지로 악형을 가하고, 반드시 무복(誣服)하게 하려 한 것은 위핍(危逼)하는 흉심(凶心)과 참혹하게 무함하는 역절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홍수(紅袖)233)  를 체포하여 다스린 것은 일이 막중한 데에 관계되니,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홍수는 이미 죽었으나, 또 아직 살아 있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다시 더 구핵(究覈)하여 기필코 조사해 낸 후에야 해당되는 율을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는 바깥에서 조사해 낼 것이 아니다. 궐내(闕內)에서도 마땅히 알 도리가 있으니, 다시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영의정 심환지(沈煥之)·좌의정 이시수(李時秀)·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개성 유수 김문순(金文淳)·예조 판서 김조순(金祖淳)·병조 판서 조진관(趙鎭寬)·공조 판서 이경일(李敬一)·호조 판서 이서구(李書九)·행 호군 이득제(李得濟)·도승지 남공철(南公轍)·검교 직각(檢校直閣) 김근순(金近淳)이 똑같은 말로 우러러 아뢰면서 윤행임(尹行恁)의 죄를 두루 거론하고 빨리 처분을 내릴 것을 청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선대왕의 하교가 지당하시었다. 일찍이 윤행임은 인물이 미천하다고 하교하셨는데, 지금에 와서 더욱 사람을 알아보시는 명철(明哲)을 우러러 볼 수 있다. 그가 의리를 굳게 지켰다고 말하지만 지금에 와서 서로 반대되니, 만약 조정에 그대로 둔다면 오래 갈수록 반드시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곧 이번의 처분이 있었으나, 또 우선 두고 살펴보려고 할 뿐이다."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신이 지금 주달한 바가 비록 자질구레한 데에 가까우나, 또한 분개하여 원망했던 것이므로, 감히 이에 앙달(仰達)하는 것입니다. 홍봉한(洪鳳漢)은 주고(奏稿)에 대해 당초에 하교하셨을 때 그가 신에게 서찰로 알리기를, ‘나는 김조순이 봉승(奉承)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홍낙좌(洪樂佐)가 첨서(添書)한 일로써 그에게 서찰을 보내기를, ‘선조(先朝) 때에 비록 한두 번 첨서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진실로 오랜 왕도(王道)의 교화가 이루어져 한때의 임시 편의에 따르는 정사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사복(嗣服)의 초기에는 아마도 마땅하지 않은 듯하다…….’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와 김조순은 처음부터 알지 못했고 박종보(朴宗輔)가 뜻을 받들어 써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는 식으로 말을 변경하여 어지럽히고 인심을 의심스러이 어지럽히는 것은 그 당류가 다 이와 같으니, 어찌 매우 분통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그대로 둔다면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재앙을 당하여 구언(求言)하는 것은 대개 왕실(王室)의 잘하고 잘못한 것과 나라에 이로움과 병폐되는 점을 들으려는 것이다. 일전에 조언을 구한 뜻도 이와 같은데, 어찌하여 지금 진언(進言)하는 자는 대양(對揚)하는 뜻은 전혀 없이 사사로움을 이루는 계책을 성취하고자 하여 기회를 틈타 번갈아 일어나서 오로지 박격(搏擊)을 일삼고 있으니, 시세의 수저(愁沮)와 인심이 의구(疑懼)를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조상(朝象)이 무너지고 갈라질 뿐만 아니라, 무릇 우리 세신(世臣)들 가운데 한 사람도 온전히 보존할 길이 없을 것이니, 조정이 장차 텅 비어서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어찌 늠연(凛然)하여 한심(寒心)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하교한 뒤에도 만약 종전의 습관을 답습한다면 내가 마땅히 그 사람을 엄중히 처단할 것이고, 봉납(捧納)한 승지도 마땅히 엄중하게 감죄(勘罪)할 것이니, 이를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권강할 때 옥당(玉堂)에서 한 사람을 입참(入參)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겨우 자교(慈敎)를 받들었습니다. 소대(召對)에는 이미 각신(閣臣)이 입참하는 규례가 있으니, 지금도 소대의 예에 의하여 시임·원임의 각신 중에서 한 사람을 입참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삼사 【집의 김희채(金熙采), 사간 유경(柳畊), 장령 강문회(姜文會)·홍광일(洪光一), 지평 송응규(宋應圭), 헌납 김회연(金會淵), 교리 신서(申漵), 정언 이경삼(李敬參), 수찬 정만석(鄭晩錫)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홍국영(洪國榮)·김양택(金陽澤) 및 서명선(徐命善)·정민시(鄭民始)의 하늘에 닿는 죄악은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고, 천 번 과형(剮刑)234)  에 처하여도 속죄(贖罪)하기 어려운데, 아직 왕법(王法)을 굽히고 있으니, 이 어찌 나라에 상형(常刑)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여러 역적들이 국모(國母)는 안중에 없이 제 마음대로 자행(恣行)하며 위핍(危逼)하는 역절과 참혹한 흉계(凶計)를 암암리에 서로 주무한 바가 한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장한 자는 역적 홍국영이었는데 김양택과 서명선이 받들었고, 지휘한 자는 홍국영이었는데 정민시가 화응하였습니다. 병신년235)   절헌(節獻)의 궐봉(闕封)과 기해년236)  에 궁녀(宮女)를 체포해 신문한 데에 이르러서는 윤강(倫綱)이 여지없이 멸절되었습니다. 보호해야 하는 직임에 있으면서 단오(端午)의 으레 공상(供上)하던 것을 멋대로 폐지하였으며, 심엄(深嚴)한 곳에 함께 앉아서는 궁녀를 고문하여 기어코 무복하게 하였습니다. 난역(亂逆)의 분의를 범하고 기강을 거스른 자가 옛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습니까마는, 어찌 이들 무리같이 지극히 흉패(凶悖)한 자들이 있었겠습니까? 이는 실로 사적(史籍)에도 없는 극도로 악한 대악인(大惡人)입니다. 미처 성토하기 전에 귀주(鬼誅)가 먼저 미쳤으므로 온 나라의 공분(公憤)이 쌓여서 덜어지지 않고 삼척(三尺)의 방헌(邦憲)이 오래도록 아직 펴지지 못하였으니,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신도 모르게 뼈가 싸늘하고 담이 떨리고 머리털이 곤두서고, 흘겨보게 됩니다. 지금 의리를 크게 밝히고 흉역(凶逆)을 엄히 징토하는 때를 당하여 약원의 일기를 이미 조사해 찾아내었고, 대신(臺臣)의 함사(緘辭)가 이같이 명확하니, 해당되는 율을 추후해서 시행하는 일을 일각이라도 늦출 수 없음이 확실합니다. 김양택은 그의 집에 이미 노적(孥籍)을 시행하고 관작도 추탈하였으니, 다시 더 시행할 율이 없습니다. 그러나 홍국영은 천만 가지 죄악이 그의 한 몸에 모두 모였으니, 그가 흉소(凶疏)를 지어 주어 대계(大計)를 저지하고 인심을 선동하여 국맥(國脈)을 몰래 도모한 것은 이미 한(漢)나라의 왕망(王莽)237)  과 동진(東晋)의 환온(桓溫)238)  의 흉악함보다 더함이 있습니다. 지금 와서 김양택과 서명선이 간범(干犯)한 것이 밝게 드러나고 정민시가 무핍한 정상이 탄로났으니, 그 수악(首惡)은 실제로 홍국영이요, 흉괴(凶魁)도 역시 홍국영입니다. 작년 봄에 다행히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건단(乾斷)을 널리 발휘하셔서 윤유(允兪)를 특별히 내리심을 의뢰하였으나, 전지(傳旨)를 곧 반하(頒下)하지 않아서 전형을 흔쾌하게 시행하는 것이 아직까지 지체되고 있으니, 신인(神人)이 분개하여 원망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물고(物故)된 죄인 홍국영에게 빨리 노적의 전형을 시행하고 고 영의정 서명선과 고 판서 정민시에게는 우선 관작을 추탈하는 전형을 아울러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만수(李晩秀)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대사헌 한용귀(韓用龜)가 상소하여 이윤행(李允行)의 논척(論斥)을 변명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하여 논했던 대신(臺臣)은 이미 중감(重勘)을 받았으니, 이는 공의이다. 경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였다.
지평 강준흠(姜浚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부터 난역(亂逆)의 거괴(巨魁)와 소굴이 되었던 자로서 정절이 역적 이인(李䄄)과 흉적 홍낙임(洪樂任)과 같은데도 끝내 왕법(王法)에서 도피한 자가 과연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도극(島棘)의 전형으로는 신인(神人)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덜 수 없는데, 형세를 관망하고 엿보는 것이 오히려 지난날의 버릇을 회복하여 과연 윤행임(尹行恁)의 요망하고 사특함이 〈양립(兩立)할 수 없는〉 한(漢)나라 역적 사이에서 편든 일이 있었으니, 그의 천만 가지 요악(妖惡)함이 이미 소계(疏啓)의 징토할 것을 청한 말에서 죄다 드러났습니다. 위복(威福)을 제멋대로 농락하여 패합(捭闔)하는 술책을 알게 모르게 행하고, 의리를 더럽혀 신하의 분의를 멸절시켰는데, 권유하여 부탁하면서 영리에 마음을 기울이는 무리들은 그의 아비를 위해 서원을 창건하고 사당을 설립한 것이 영남과 호남 사이에 이미 두세 군데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의 아비는 곧 전혀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 음관(蔭官)이었는데, 법금(法禁)이 없음에 따라 그 위세를 의뢰하여 선비들의 공론을 부추겨 일으켜서 조두(俎豆)를 이와 같이 어려움 없이 사사롭게 설치하였으니, 그가 사림(士林)에 욕을 끼친 것은 세도에 관계됨이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건대, 인·홍낙임 및 윤행임에 대한 합사(合辭)의 청에 빨리 윤허해 따르셔서 흔쾌히 왕법을 펴게 하시고, 서원을 사사롭게 설치할 것을 처음 논한 선비와 그것을 금하지 않은 수령(守令)에 대해 해조(該曹)로 하여금 해도(該道)에 관문(關文)으로 물어 낱낱이 적발해서 찬배의 전형을 시행하고 창건한 서원은 훼철(毁撤)하게 함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아! 정민시의 죄를 오히려 어찌 말하겠습니까? 그는 홍국영의 심복으로서 기해년239)   여름 동안에 있었던 변고는 실로 사적(史籍)에도 없는 바입니다. 그가 궁인(宮人)을 잡아다가 신문하였던 극도로 흉악하고 참람한 죄가 남김없이 환하게 드러났는데, 저도 또한 우리 조정의 신하로 감히 국모(國母)를 섬겨야 할 처지에서 이렇게 흉패한 행동을 하고도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귀주(鬼誅)가 미치지 않았다면 천 번 과형(剮刑)을 가하고 만 번 죽인다 해도 이 여러 사람의 분노를 덜 수 없습니다. 그런데 관작을 추탈하고 으레 감죄(勘罪)하는 율에 그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아울러 연좌[應坐]해야 할 사람과 더불어 멀고 나쁜 지역에 귀양보내어 조금이라도 왕법을 펴는 바탕을 삼도록 하소서. 그리고 그 당시 체포되었던 궁인이 바른 길을 지키며 말로 항거하다가 죽기에 이르렀던 것은 비록 지난날의 묵세(墨世)240)  라도 어찌 이에 지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늠연(凛然)히 생기(生氣)가 있었으니, 빨리 더 탐문하여 특별히 충성을 드러내는 은전(恩典)을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지난번 문후를 철폐한 상신(相臣)이 아뢰고 상하에서 서로 버티어 마침내 끝이 없었는데, 삼가 제호탕(醍醐湯)을 궐봉(闕封)한 데 대해 현고(現告)한 것을 보았더니, 아! 심하였습니다. 저 무리들이 비록 매우 흉패하고 완악하다 하나, 보호해야 할 직임을 띠고 있으면서 감히 평소에 헌상하던 절목을 폐지하고는 분명하지 않고 사납게 보통으로 여겼으니, 그를 사람의 마음이 있고 신하의 분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현고한 가운데 김양택(金陽澤)·홍국영(洪國榮)은 비록 다른 죄로 인하여 이미 추감(追勘)을 겪었으나, 서명선(徐命善)에 이르러서는 그가 일찍이 수립한 공이 있고 이름이 대신(大臣)을 띠고 있다 하여 관대하게 용서함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니, 또한 유사에게 명하여 당감(當勘)의 형률을 뒤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네가 대간(臺諫)에 내린 비답을 보았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분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오정원(吳鼎源)이 상소하여 이인(李䄄)·홍낙임(洪樂任) 및 윤행임(尹行恁)·정민시(鄭民始)·서명선(徐命善)의 죄를 진달하고, 대계(臺啓)에 윤허하여 왕법(王法)을 흔쾌하게 펼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홍취영(洪就榮)은 본래 요사(妖邪)한 성품으로 음흉하고 사특함을 이루었는데, 그 아비의 죄악이 커서 대각(臺閣)의 성토가 매우 엄격하였으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두려워하며 위축되어 엎드려 있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원한을 품고 뒤돌아보아 꺼려함이 없이 날마다 도성 안팎에서 몸을 감추어 출몰하며 그 종적이 변화 무상하여 하루가 급하게 하였으니, 무슨 일을 헤아리고 어떤 간흉과 규결(糾結)하는지 알지는 못하나, 온 세상이 다 떠들썩하여 여러 사람이 모두 손가락질하였으니, 배를 같이 탄 북호(北胡)와 수레바퀴 밑에 숨은 서강(西羌)241)  은 그 근심이 마땅히 어떠하였겠습니까? 그 날개를 자르고 며느리발톱을 떨어져 나가게 하는 방도에 있어서 결코 하루도 서울 가까운 곳에 둘 수 없습니다. 신은 전 주부 홍취영에게 우선 도배(島配)의 전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득제(李得濟)가 요사한 윤행임에게 가옥을 바치어 교분을 맺은 지 여러 해이고, 요사한 윤행임과 통화(通貨)하여 체결하는 것이 날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무릇 봄 사이에 장임(將任)의 자리를 차지한 뒤 도순(都巡)을 핑계하고 밤을 이용하여 늘 요망한 윤행임의 집에 들어가서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은밀한 일을 도모한 것이 비록 무슨 말과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행동 거지가 해괴하여 여러 사람의 입에서 떠들썩하게 전파되었으니, 이와 같은 무리는 결단코 장병(將兵)의 소임을 제수할 수 없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금위 대장 이득제에게 찬배의 전형을 시행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대사간 오정원의 상소가 비록 명을 내리기 전에 들어왔으나 이미 오늘 하교한 뒤에 있었는데, 무단히 받아들인 것은 매우 놀랍다. 봉납한 승지는 체차(遞差)하고, 이 상소는 도로 돌려주어 내가 하교한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6일 신축

옥당(玉堂) 【응교 민명혁(閔命爀) 부응교 김선(金銑), 교리 한흥유(韓興裕)·이상겸(李象謙), 부교리 이인채(李寅采)·신서(申漵), 부수찬 정만석(鄭晩錫)·김재창(金在昌)이다.】 에서 연명 차자를 올려 물고(物故)된 죄인 홍국영(洪國榮)에게 노적(孥籍)의 전형을 시행하고, 고 영의정 서명선(徐命善)과 고 판서 정민시(鄭民始)에게는 관작을 추탈(追奪)하는 전형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연석(筵席)에서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헌납 김회연(金會淵)이 아뢰기를,
"아! 저 이상겸(李象謙)은 성질이 본래 핍박하고 속임수를 잘 쓰는데다 행동이 또 궤비(詭秘)하여, 말하는 것이 매우 거짓되고 조급하게 진출하여 싫어함이 없습니다. 처음에 요망한 최익남(崔益男)이 품에 안아 길러 밤마다 잠자리에서 심엄(深嚴)한 동정을 은밀히 정탐하다가, 이어서 간사한 윤행임(尹行恁)의 심복이 되어서는 날마다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남을 해치고 죄를 얽으려는 깊숙한 계략을 몰래 행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간사스러운 자들을 물리쳐 내쫓은 뒤에는 진실로 숨을 죽이고 가만히 엎드려서 용납할 바가 없는 것같이 함이 마땅할 것인데, 이에 도리어 한결같이 방자하게 제멋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위세(威勢)를 빙자하여 부리어 거짓말로 협박하고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어두운 밤의 행동 거지도 어느 곳에 출몰하는지를 알 수 없고 도처(到處)의 기관(機關)은 사건을 자아낸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는데, 온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승냥이와 이리같이 두려워하고 전갈과 물여우같이 피하고 있으니, 이번의 조상(朝象)을 전정시키고 세상의 도의를 안정케 하는 때를 당하여 이같은 부류를 결단코 하루라도 왕도에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교리 이상겸에게 찬배의 전형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사은 정사(謝恩正使) 조상진(趙尙鎭) 등이 연경(燕京)으로부터 출발한다면서 치계(馳啓)하기를,
"상칙(上勅) 송영(松齡)은 나이가 45세이고 부칙(副勅) 길윤(吉倫)은 나이가 52세인데, 부칙은 사람됨이 자못 분명하고 직임도 황제의 측근에 있었으므로 사무를 배당한 다음 인견(引見)했을 때 황제가 ‘송영은 일에 경험이 없으니 길윤이 사행(使行)의 일을 전관하여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분부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5월 27일 임인

권강(勸講)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장병(將兵)을 맡은 자리는 법으로 보아 함부로 떠나는 것이 부당하고 무신(武臣)으로서 처해야 할 의리는 더욱 이와 같을 수 없을 것인데, 지금 금위 대장 이득제(李得濟)는 당한 바가 망극하다고 하면서 차고 있던 명소패(命召牌)를 금위영(禁衛營)의 군교(軍校)로 하여금 대신 바치게 하고는 곧바로 시골집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종전에 없던 바로 대단히 해괴하고 망령스러운 데 관련됩니다. "
하니, 하교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자세하게 알도록 하겠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아! 오늘날의 기강(紀綱)이 어찌하여 흔적도 없이 되었는가? 대저 조정에서 비록 대각(臺閣)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그 위에서 결정한 것이 이치에 합당한데, 대각이 된 자가 배치(背馳)하기를 힘쓴다면 이는 협잡하여 차서가 없는 습성이니, 용서할 수가 있겠는가? 대저 큰 괴수를 죽이고 그 나머지를 다스리지 않는 것은 이것이 옛 성왕(聖王)의 징토(懲討)하던 큰 법이었는데, 윤행임(尹行恁)을 유배시켜 내쫓은 뒤로부터 일종의 협잡하는 부류들이 시기를 틈타 날뛰며 징토한다고 가탁하고는 각각 자신의 사심을 행하여 서로 더불어 박격(搏擊)하여 용이하게 사람을 망측한 죄과(罪科)에 빠뜨리니, 이것이 과연 국가를 위하여 의리를 부지하는 마음이겠는가? 이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요직에 거의 완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니, 조상(朝象)이 어느 때에 안정되겠는가? 내가 일전에 하교한 것이 얼마나 엄절하였던가? 그런데 지금 이 김회연(金會淵)은 하교가 있지 않았는데도 제 마음대로 계사(啓辭)를 진달하여 버티어 이기려는 계획을 힘써 하고 있으니, 만약 조금이라도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같이 할 수 있겠는가? 헌납 김회연에게 빨리 찬배하는 전형을 시행하라."
하였다.
신봉조(申鳳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한용귀(韓用龜)를 원접사(遠接使)로 차임하고, 조진관(趙鎭寬)을 관반(館伴)으로 차임하며, 이기헌(李基憲)을 문례관(門禮官)으로 차임하였다.
5월 28일 계묘

권강(勸講)하였다.


 

 

 

김회연(金會淵)을 해남현(海南縣)에 유배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득제(李得濟)는 장임(將任)을 몸에 띠고 감히 정세(情勢)를 일컬으면서 명소패(命召牌)를 풀어 바치고는 마음대로 고향 길을 찾았는데, 그의 몹시 패악하여 버릇없이 함부로 군 행습은 전에 들어 보지 못했던 바로서 크게 법강(法綱)에 관계되니, 보통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 오게 하여 멀리 찬배하는 전형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강화 유수        황승원(黃昇源)의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이달 27일 인시(寅時)에 천극 죄인(極棘罪人) 이인(李姻)과 그의 아들 철득(鐵得)이 비가 오는 어두컴컴한 때에 천극한 데에서 동쪽의 울타리를 엮어 연폭(連幅)한 곳에 구멍을 뚫고 뛰어나와 장차 죄인의 딸린 가족을 맡아 둔 집으로 달려가려 하다가 바로 그때 붙잡히게 되어 도로 함부로 나온 구멍을 따라 천극 안에 잡아 가둔 뒤 이어서 보수 주인(保守主人) 차득인(車得仁)으로 하여금 천극 안을 적간(摘奸)하게 하였더니 죄인과 죄인의 세 아들이 전과 같이 모두 있으므로, 가시 울타리를 다시 엄하게 더 튼튼하게 막도록 하여 목책(木柵)을 많이 세우고 싸리나무 울타리를 단단히 동여매어 가시 묶음을 빽빽하게 늘어세워서 아주 견고하기를 힘썼으며 군교(軍校)를 더 정하여 방수(防守)를 엄히 더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적 인이 죄를 범한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하지 못할 바이고 신인(神人)이 함께 주토하는 바였으니, 조가(朝家)에서 경전(磬甸)242)                  의 형률을 관대하게 한 것은 실로 이것이 하늘과 땅 같은 망극한 은혜일 것인데, 흉악한 계책을 깊이 간직하고는 제멋대로 날뛰는 습성으로 끝내 징계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이전에 듣지 못했던 놀랍고 탄식할 만한 행동을 하였으니,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곧 속히 품처(稟處)하게 하여, 흔쾌하게 전형을 바루어 난역의 뿌리를 뽑아 버리도록 하소서."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승지·옥당(玉堂)·양사(兩司) 및 경기 감사 이조승(李祖承)을 성정각(誠正閣)에서 소견(召見)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한꺼번에 이인(李䄄)의 전후 죄범을 아뢰어 빨리 처분을 내리기를 청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지난번 정청(庭請) 때 처음부터 끝까지 윤허를 아꼈던 것은 다른 뜻이 없었고 선조(先朝) 때 몇 해 동안 온전히 보존했던 마음을 생각하여 반드시 우러러 깊이 유념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그의 흉패(凶悖)하기가 이 같아 가시 울타리 밖으로 뛰어나와서 죄 위에 죄를 더하였으니, 대단히 밉다. 울타리를 설치한 것이 과연 어떠했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이런 변이 있기에 이르렀으면 그 방수(防守)의 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와 같은 기강(紀綱)이 있겠는가? 그의 죄악에 대하여 다시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데, 골육(骨肉)의 지친에게 어찌 차마 별안간 윤허하겠는가? 선왕(先王)께서 대단히 염려하셨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면 더욱 차마 갑자기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역적 인이 가시 울타리 밖으로 뛰어나온 것은 곧 이것이 전고(前古)에 없었던 큰 변입니다. 진실로 방수하는 절차를 충분히 엄밀하게 했다면, 어찌 감히 뛰어나올 생각을 했겠습니까? 보통 때에 신칙하지 않은 실수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유수(留守) 황승원(黃昇源)에게 찬배의 전형(典刑)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만유(韓晩裕)를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승정원 【승지 남공철(南公轍)·윤광보(尹光普)·김희순(金羲淳)·이조원(李肇源)·조석중(曹錫中)·조홍진(趙弘鎭)이다.】 에서 의계(議啓)하기를,
"역적 이인(李䄄)이 가시 울타리를 뛰어나온 것은 이것이 어떤 등류의 변괴(變怪)입니까? 그의 하늘과 땅처럼 끝없는 죄악으로써 아직까지 머리를 보전하게 하여 가까운 섬에 용납해 둔 것은 신인(神人)의 분울(憤鬱)한 지가 지금 몇 해입니다. 지금 이와 같이 천고에 없는 바의 사변이 있었는데, 심지어 어려운 기색 없이 악한 성정을 마구 부리면서 도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으니, 그의 흉악하고 사나워서 안중(眼中)에 국법(國法)이 없었던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겠고, 그가 반드시 흉악한 계책을 깊이 간직하고서 재앙을 빚어 내려고 그러했던 것이 불을 보듯 환합니다.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건대, 과연 어떠했습니까? 역적 홍낙임(洪樂任)의 지극히 간흉(奸凶)한 데에 대하여는 비록 천 번 과형(剮刑)을 더하고 만 번 죽인다 하여도 오히려 꿰뚫어 꽉 찬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섬 중에 임시 쉬도록 두어 차마 온 나라의 사람들로 하여금 한 하늘 아래에 함께 살도록 하였으니, 장차 어떤 양상의 화기(禍機)가 어느 때에 나타날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화답하고 응하여 명성과 위세를 서로 의지했던 바는 역적 인이 곧 역적 홍낙임이고 역적 홍낙임이 곧 역적 인이었습니다. 또 하물며 사당(邪黨)을 서로 얽어 맺은 것은 차마 말 못할 것이 있고 요망한 윤행임(尹行恁)의 남 모르게 옹호한 것은 아직까지 남은 근심이 있으니, 전석(前席)에서 물러나면 저희들 속마음은 더욱 격동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더 세 번 생각하시고 동조(東朝)께 우러러 여쭈시어 빨리 인·홍낙임 두 역적에게 공명 정대한 전형의 처분을 내리셔서 화란의 뿌리를 뽑고 나라의 형편을 편안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교(慈敎)에 이미 유시(諭示)하셨다.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병모(李秉模)·영의정 심환지(沈煥之)·좌의정 이시수(李時秀)·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역적 이인(李䄄)에 대하여 10년 동안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먹고 쉬게 한 것은 실로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반드시 온전히 보존하려는 성덕(聖德)과 대은(大恩)에서 나온 것이니, 진실로 조금이라도 사람의 도리를 아주 끊어 없애 버리지 못함이 있는 자라면 진실로 움츠려 엎드리고서 죽기를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할 것인데, 원망함이 더욱 심한 것은 흉악한 무리와 도둑의 부류들이 좋은 기회로 보고, 실상의 음모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인의〉 간사한 아내와 요망한 며느리가 몰래 양적(洋賊)243)  과 통하였습니다. 전일에 정청하여 호소한 것이 어찌 그림자를 살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반역의 형태가 이미 드러났고, 그때의 천극하여 수금한 것이 어찌 형률에 합당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왕법(王法)이 아직도 관대하였으므로, 신인(神人)의 분노가 한층 답답하게 맺히고 종사(宗社)의 걱정이 다시 깊어져서 팔도의 신민(臣民)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떤 양상의 화기(禍機)가 어느 곳에 나타날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과연 이번에 흉종(凶種)을 서로 돕고 가시 울타리를 뛰어나오는 변이 있었으니, 이는 실로 고금 천하에 듣지도 못한 바이고 보지도 못한 바입니다. 그의 마음보를 궁구해 보면 장차 어떤 짓을 하려 함이었으니, 그윽이 생각건대, 오늘날 나라의 형편이 대단히 위태로운 것은 진실로 하나의 단서가 아닐 것입니다. 궁궐 안의 형편으로 말한다면 전하께서 나이가 어리어 거상(居喪) 중에 몸이 수척하시고 태모(太母)께서는 조정에 임하여 염유(簾帷)에서 안온하게 계시며, 조정의 형편으로 말한다면 진신은 간흉을 꺾을 무게가 없고 유사(有司)는 법도를 집행할 재능이 없으며, 백성들의 심리로 말한다면 사당(邪黨)과 추악한 무리들이 나라의 반을 넘었는데, 또 더군다나 요망한 인척(姻戚)은 큰 바다에서 머리로 하늘을 이고 있으며 권간(權奸)은 신지도(薪智島)에 쉴 곳을 빌렸으므로, 하나는 역적 인의 근저가 되고 하나는 역적 인의 성원(聲援)이 되어 처음과 끝이 한데 맞닿고 맥락(脈絡)이 일치하니, 하늘이 만약 송(宋)나라에 복을 내린다면244)   반드시 이런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바람이 불어 풀이 움직이고 수컷이 부르매 암컷이 화답하는 경우가 있게 된다면, 하늘과 땅 사이의 궁벽하고 아주 먼 곳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장차 한 조각을 이루어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어지는 것처럼 그 형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니, 차라리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싶습니다. 국가의 위망(危亡)에 관계되는 시기임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아도 한마디의 말로 결정지울 수 있는데, 미심쩍기는 합니다만, 전하께서는 어느 곳을 믿으시기에 마음 편안하게 근심이 없이 역적의 간담이 날로 방자해지고 나라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며 하늘의 상리(常理)가 날로 어두워지게 하고는 반드시 구구한 사은(私恩)을 꼭 온전히 할 수가 없는 처지에다가 온전하게 하려 하십니까? 또 역적 인이 죽지 않는다면 나라에 위태로움을 잊을 날이 없을 것이고, 요망한 홍낙임(洪樂任)을 그대로 둔다면 역적의 세력을 타파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리는 밝기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데, 지금 한 번의 거사로 둘 다 처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다가오는 근심은 장차 이것보다 더 클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삼사(三司)의 청을 곧바로 따라서 경전(磬甸)의 주벌(誅罰)을 흔쾌히 행하시고, 이어서 앞으로 요망한 홍낙임에게는 전형을 밝게 바루어 화란을 그치도록 하고 종사(宗社)를 편안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교(慈敎)에 이미 유시(諭示)하셨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조금 전 연석(筵席)에서 내 뜻을 다 유시하였다. 미망인(未亡人)이 선왕(先王)께서 마음먹었던 바를 마음속에 간직했다면 오늘날 어찌 이 말을 차마 듣겠는가? 다시는 번거롭게 떠들썩하지 말라."
하였다.

 

삼사(三司) 【집의 김희채(金熙采), 응교 민명혁(閔命爀), 부응교 김선(金銑), 장령 강문회(姜文會)·홍광일(洪光一), 지평 강준흠(姜浚欽)·송응규(宋應圭), 교리 한흥유(韓興裕), 부교리 이인채(李寅采)·신서(申漵), 수찬 이존수(李存秀), 부수찬 정만석(鄭晩錫)·김재창(金在昌)이다.】 에서 합사(合辭)하여 계청(啓請)하기를,
"역적 이인(李䄄)의 부자에게 흔쾌히 전형을 바루고, 홍낙임(洪樂任)에게도 또한 합계(合啓)한 데에 대하여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교에 이미 유시하셨다."
하였다. 두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한용귀(韓用龜)가 상소하였고, 대사간 신봉조(申鳳朝)·사간 유경(柳畊)·정언 이회상(李晦祥)이 연소(聯疏)를 올려 빨리 여러 신료의 소청에 윤허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9일 갑진

정청(庭請)하여 두 번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 등은 어찌하여 이 미망인(未亡人)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다시는 번거롭게 떠들썩하지 말고 곧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원의(院議)에서 세 번 아뢰었고, 삼사(三司)에서 합사로 세 번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득제(李得濟)를 경성부(鏡城府)에, 황승원(黃昇源)을 김해부(金海府)에 귀양 보냈다.

 

강화부(江華府)에 천극했던 죄인 이인(李䄄)과 제주목(濟州牧)에 안치(安置)했던 죄인 홍낙임(洪樂任)에게 사사(賜死)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정청(庭請)하여 호소했던 뜻을 거듭 청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선왕(先王)께서 마음먹었던 바를 마음속에 간직하려 했기 때문에 차마 급하게 극률(極律)로 조치하지 않았었는데, 천만 뜻밖에 제가 스스로 천주(天誅)를 간청하였다. 옛부터 수렴 청정한 때가 어찌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만, 어찌 이 미망인이 오늘날 처해 있는 바와 같은 때가 있었겠는가? 생각이 선조(先朝) 때의 성심(聖心)에 미치매 저절로 억눌러 막을 줄을 깨닫지 못하여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겠는데, 종사(宗社)를 위하고 성궁(聖躬)을 위하여서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이어서 언교(諺敎)를 내리기를,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는 어찌하여 이 미망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불행한 처지를 당하도록 하시는지? 말을 일으키어 생각하자니 자신도 모르게 원통하여 가슴이 꽉 막힌다. 대저 두 역적의 대단히 흉악했던 정적(情跡)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으므로 사람들의 귀와 눈에 밝게 알려졌었으나 이번의 사옥(邪獄)이 있은 뒤에는 죄상(罪狀)이 더욱 환하게 드러나게 되어 여러 신하들의 계사(啓辭)에 다 나열하였는데, 내가 또 어찌 차마 붓에다 먹물을 찍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된다고 말한 것은 이것이 곧 온 나라의 공의(公議)인데, 내가 비록 부인(婦人)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대의(大義)를 위하는 것인 줄 어찌 몰랐겠는가? 그러나 선조(先朝)에서 평일 형제간의 우애하였던 지극한 인정을 돌이켜 생각하고 다음으로 자궁(慈宮)의 동기간에 곡진하게 보호했던 정성을 위해 대단히 절실하고 매우 슬퍼서 족히 귀신을 울리고 미련한 돼지와 미물인 물고기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였으니, 내가 평소 익히 보아 온 심정을 가지고서 차마 경솔하게 변경하여 고칠 수 있었겠는가? 처음부터 윤허하기를 아꼈던 것은 대개 이런 까닭이 있었다. 지난번에는 정청하여 호소하기를 하루가 지나도 철폐하지 않아서 여러 신료들의 심정을 떨쳐버리기 어려웠으므로 부득이 충분하게 참작하여 혹은 가율(加律)을 쓰고 혹은 안치(安置)하는 전형을 시행하여 한 오리의 가냘픈 목숨을 보전케 하였던 것인데, 지금 강화 유수의 장계(狀啓)를 보매 ‘이인(李䄄)이 가시 울타리 밖으로 뛰어나오기에 이르렀다.’ 하니, 고금에 어찌 이러한 변괴가 있었겠는가? 이번의 변이 있은 후로 여정(輿情)이 더욱 격동하고 조정의 의논은 더욱 들끓게 되어, 모두 ‘오늘날 시세(時勢)는 선조 때와 크게 다르고 당면한 근심 걱정은 조석(朝夕)을 보전키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옛사람이 이른바 ‘임금은 어리고 나라는 위태롭다.’라는 염려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매, 이 미망인은 불행하게도 이 지극히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종사의 존망(存亡)과 성궁의 안위(安危)의 책임을 이 한몸에 담당하여 도피할 수가 없는데, 지난일을 돌아보고 차마 변경하여 고칠 수가 없는 인정에 거리끼어 공의(公議)를 억지로 막다가 마침내 혹시 말하기 어려운 화란이라도 있기에 도달한다면, 내가 종사에 죄를 얻음이 클 것이다. 다른 날에 장차 무슨 낯으로 조종을 지하(地下)에서 뵈올 수 있겠는가? 이러한 입장에 이르렀으니, 여러 신료들의 소청에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죄인 인과 홍낙임(洪樂任)에게 모두 사사(賜死)한다."
하였다. 홍낙임은 혜경궁(惠慶宮)의 아우로서 그 집안이 죄폐(罪廢)된 이후 진실로 종적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지 않았다가 재앙의 근원을 제 스스로 초래하였으나, 선왕(先王)의 감싸 준 바가 되었었다. 지금 두 척신(戚臣)의 오랜 불화로 인하여 ‘도수(島囚)와 서로 통하고 사옥(邪獄)의 원소굴이었다.’라고 하여 얽어 넣었으므로 온 조정에서 성토하여 결국 죽도록까지 하였으니,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이로써 김용주(金龍柱)의 무리를 정직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김용주가 민심(民心)을 잃었던 것은 대개 홍낙임을 죽인 데에 말미암았다. 임금이 친정(親政)하고서 관작이 회복되었다.

 

서유대(徐有大)를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사직(社稷)·경모궁(景慕宮)·효원전(孝元殿)에 고유(告由)하라고 명하였다.

 

양사(兩司) 【대사간 신봉조(申鳳朝), 집의 김희채(金熙采), 사간 유경(柳畊), 장령 강문회(姜文會)·홍광일(洪光一), 지평 강준흠(姜浚欽)·송응규(宋應圭), 헌납 김효수(金孝秀), 정언 이경삼(李敬參)·원재명(元在明)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이인(李䄄)·홍낙임(洪樂任)의 여러 아들로서 연좌[應坐]될 무리에게 율(律)에 의하여 처단해서 영원히 화란의 뿌리를 끊자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자교(慈敎)에 이미 유시하셨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연명 차자를 올려 이인·홍낙임의 여러 아들을 율에 의하여 처단하자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오늘의 처분은 종사(宗社)를 위하여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서 나온 것이니, 그들에게 이미 처분을 내린 뒤라면 두 죄인의 여러 아들이 연좌[應坐]의 율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도 또한 처분할 방도를 생각하고 있으니, 삼사(三司)의 신료들은 번독(煩瀆)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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