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5권 순조3년 1803년 11월

싸라리리 2025. 6. 6. 10:06
반응형

11월 1일 임진

희정당에 나아가 경기전(慶基殿)의 동지제(冬至祭)와 경모궁(景慕宮)의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였다.

 

소대하였다.

 

11월 2일 계사

진강하였다.

 

11월 3일 갑오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이노춘(李魯春)을 공조 판서로, 임시철(林蓍喆)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1월 4일 을미

진강하였다.

 

대사간 민명혁(閔命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덕린(趙德隣)을 추삭(追削)하라는 명을 여정(輿情)이 분울(憤鬱)해 하던 나머지에서 특별히 내리시자, 국시(國是)가 다시 정해지고 난역(亂逆)이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으나, 오히려 다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조덕린의 관작은 비록 삭탈하였으나, 조진도(趙進道)의 과명(科名)은 그대로 있으니, 이는 머리만 거론(擧論)하고 꼬리는 빠뜨린 것과 같습니다. 대저 천하의 의리는 한가지일 따름입니다. 당초에 조진도의 삭과(削科)는 곧 그 조부의 역절(逆節)로 인한 것이었으니, 지금 역적 조덕린의 관작을 추탈하는 날을 당하여 조진도의 과명은 저절로 마땅히 삭제하는 거조가 있어야 함이 분명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조진도의 과명을 빨리 추삭(追削)하여 의리가 더욱 밝게 드러나게 하소서."
하고, 끝으로 이경신(李敬臣)이 상소하여 꾸며서 날조한 죄를 논하며 이어서 먼 지역으로 추방하는 율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소본(疏本)을 내려서 좌의정 서용보(徐龍輔)에게 보이고 하교하기를,
"조진도의 일은 이미 자전(慈殿)의 처분이 있었다. 이경신의 일은 이미 방축(放逐)의 율을 시행하였으니, 거듭 논할 필요가 없다."
하자, 서용보가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조진도의 일을 무신년121)  에 처분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연교(筵敎)에 이르기를, ‘지금 이 처분이 어찌 조덕린을 부호(扶護)하는 뜻에서 나왔겠는가? 또한 조덕린을 징토하는 데 대해 마땅하지 못하다고 여긴 것도 아니다. 이 일은 모년(某年)의 사고에 관계되는 바가 있다.’ 하였습니다. 고 상신 김치인(金致仁)의 주어(奏語)는 ‘조덕린을 징토하는 것과 조진도를 삭과하는 것은 두 가지 단락으로 나누어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고, 고 상신 윤시동(尹蓍東)도 또한 말하기를, ‘조덕린은 단연코 엄중한 처분을 내려야 마땅하겠지만, 조진도는 다시 제기할 수 없는 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경신에 이르러서는 방축(放逐)도 또한 가벼운 율이 아니며, 이미 처분을 내린 후에 신하는 감히 율(律)을 더할 것을 우러러 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경신의 소장은 후원(喉院)122)  에서 선조 때 전함(前銜)의 소장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금령(禁令)이 있었다 하여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말이 진실로 쓸 만하다면 어찌 전함의 소장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선조 때 전함의 소장에 대한 금령도 또한 한때의 사단(事端)으로 인하여 발론된 것이었습니다. 대개 선조조 때 중년(中年) 이전에도 매일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을 행하였는데, 대간이 반드시 들어가 참여하였고, 또 차대하는 날에도 매번 등연(登筵)하게 하였으니, 비록 전함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은 것을 근심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대청(臺廳)이 오랫동안 폐쇄되어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고, 차대하라는 명이 있어도 또한 나아가 참여하지 않으며, 전함(前銜)에 이르러서는 금령에 구애받아 감히 진소(陳疏)하지 못하니, 이에 마침내 과감하게 말하는 인사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언로가 폐쇄(閉鎖)되었으니 어찌 민망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함의 말이 반드시 모두 좋은 것은 아니나, 말을 다하도록 허락하여 쓸 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버려 둘 것이며. 또 혹 이경신과 같이 괴이하고 패려한 자가 있으면 죄를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니, 단지 금령을 설치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오늘부터라도 전함의 소장도 또한 구애받지 말도록 허락하신다면, 그 성덕에 빛이 나고 언로에 도움되는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민명혁의 상소에 대해 비답을 내리기를,
"조진도에 대한 일은 지난날 처분이 엄중하고도 명백하였고, 이경신에 대한 일은 방축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하고,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사직서(社稷署)의 악기고(樂器庫)에 불이 났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하고, 난간에 나아가 회주(回奏)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예조의 계달(啓達)로 인하여 날을 가리지 말고 위안제(慰安祭)를 설행하고, 불탄 풍물(風物)·관복(冠服) 등을 해조로 하여금 속히 개조(改造)하고, 종(鐘)·경(磬)은 청(廳)을 설치해서 조성(造成)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조진관(趙鎭寬)·윤광보(尹光普)를 도감 당상으로 차출하였다.

 

11월 5일 병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태사(太社)의 위안제와 장녕전(長寧殿)의 동지제 축문에 서압(署押)하고, 이어서 향과 축문을 전하였다.

 

내의원(內醫院)에서, 호조에서 이납(移納)한 호삼(戶蔘)이 몸체가 작고 품질이 열등(劣等)하다 하여 돌려 주고 다시 봉진(封進)하게 하기를 계청하자, 하교하기를,
"호삼을 약원에 이납하게 한 것은 오로지 약용(藥用)을 위해서인데, 품질이 열등하여 쓰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면, 다시 봉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한겨울을 당하여 서쪽 지방 백성들의 폐해(弊害)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그만 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6일 정유

진강하였다.

 

11월 7일 무술

진강하였다.

 

이동직(李東稷)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8일 기해

소대하였다.

 

11월 9일 경자

악기 조성 도감 제조 조진관(趙鎭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직서의 악기고가 불타서 악기가 훼손되었으니, 이제 수선해서 완전하게 하는 일는 진실로 늦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건대, 옛날 영묘 갑자년123)  에 인정문(仁政門)에 불이 나서 전정(殿庭)에까지 연소(延燒)되었는데, 종거(鍾簴)를 조성하는 역사가 실제로 중동(仲冬)에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장례원(掌禮院)의 신하가 추위를 당하여 옥(玉)을 채취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습니다. 그 당시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이런 때에 옥을 채취하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봄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일도 모든 것이 얼어 붙는 추운 때가 되었으니, 그 당시와 서로 부합(符合)되는데, 석역(石役)이 가장 어렵습니다. 일찍이 전에 조성(造成)할 때에도 매번 석 달 이상이 허비되었으니, 지금 비록 기일을 정해 놓고 동독(董督)한다 하더라도 12월의 일이 있는 날에 미칠 수 없는 것은 사세가 그러합니다. 만약 황단악(皇壇樂)을 창조하라는 명을 상고해 보면, 갑자년124)   3년 전의 봄에 있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한두 대신이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기를 아뢰었고, 또 문묘악(文廟樂)을 빌려 쓰기를 청하였는데, 진실로 기일을 늦추고 빌려 쓰게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았으면, 당시에 여러 신하들의 말이 어찌 이와 같이 모두 똑같았겠습니까? 이제 만약 북원(北苑)의 전례를 준수하여 우선 풍운단(風雲壇)과 산천위(山川位)에 쓰던 장악원(掌樂院)의 악기(樂器)를 임시로 몇 달 동안 조금 늦추는 사이에 진용(進用)하게 하는 것이 그 성례(誠禮)에 흠결(欠缺)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예(禮)는 교사(郊祀)보다 중대한 것이 없고, 악(樂)은 아악보(雅樂譜)보다 성대한 것이 없는데, 예는 온화함을 쓰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악은 음절을 조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바야흐로 겨울에 산에서 옥을 채취할 경우 백성들이 추위를 병통으로 여길 것이니 이른바 온화가 못되고, 공인(工人)들이 입김을 불며 옥을 다듬다가 혹 정밀하지 못하면 이른바 음절이 못될 것입니다. 지금 이 중신이 진소(陳疏)한 바는 말이 모두 근거가 있고 일 또한 편의(便宜)합니다. 전정(殿庭)의 악현(樂懸)의 고사와 북원의 전례는 바로 오늘날에 이를 원용(援用)하는 것이 합당하니, 청컨대, 특별히 아뢴 바에 의거하여 내년 봄을 기다려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10일 신축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예조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 서용보(徐龍輔)가 말하기를,
"오늘 동지(冬至)가 되어 일양(一陽)이 처음으로 생겨나고 경사스러운 날이 마침 이르렀습니다. 대왕 대비전의 성수(聖壽)는 육순(六旬)에 꽉 차게 되었고, 왕대비전의 성수는 이미 52세가 되었으며, 자궁(慈宮)께서는 보령(寶齡)이 칠순(七旬)에 꽉 차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 있는 경사이며, 또한 지난 사첩(史牒)에서도 드물게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은 본래 응당 행해야 할 전례(典禮)가 있으니, 지난번 영묘(英廟)병인년(丙寅年)125) 인원 성모(仁元聖母)의 육순 때 진호(進號)하여 경사를 치렀고, 선조 갑인년126)   왕대비전의 오순과 혜경궁(惠慶宮)의 육순 때에는 이 해에 먼저 하례(賀禮)를 올리고, 을묘년127)  에 이르러 진호하였습니다. 당시 선왕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다음 갑자년에는 마땅히 크게 경례(慶禮)를 치러야 한다.’ 하였는데, 지금은 왕대비전과 혜경궁의 보령이 갑인년에 견주어 다시 10년이 첨가되었으니, 수(壽)는 더욱 높아지고 경사는 더욱 커진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지년(知年)과 애일(愛日)하시는 성효(聖孝)는 이런 때 더욱 간절하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께서는 효성스러운 생각에 한이 없어서 오랫동안 이해를 기다렸다가 성례(盛禮)를 거행하려 하셨던 것인데, 이미 하교가 있었으니 갑인년과 을묘년에 이미 거행했던 전례를 장차 오늘날에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신 등은 이 때문에 우러러 청하는 바입니다. 갑인년에 경사를 치렀을 때에도 계축년 동지에 미리 우러러 아뢰어 청을 허락받아 이듬해 갑인년 원조(元朝)에 하의(賀儀)를 거행하고, 또 그 이듬해 을묘년에 진호(進號)하여 경사를 치렀었습니다. 지금은 대왕 대비전과 혜경궁에 대한 진하(陳賀)는 명년 원조에 먼저 거행하고, 잇달아 존호를 올리는 것이 전례(典禮)에 진실로 합당합니다. 또한 우리 왕대비전께서는 지난해인 임술년에, 대왕 대비전의 갑인년과 서로 부합(符合)하여 보주(寶籌)가 오순에 차는 해였으므로, 마땅히 진호하여 경사를 치렀어야 할 일이었으나, 국제(國制)128)  를 미처 마치지 못하였으므로, 군정(群情)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작년에는 몹시 슬퍼하시는 자교(慈敎)를 받들었기 때문에 신 등이 감히 거듭 번거롭게 청할 수 없었으나, 원조의 하례를 일체로 아울러 거행하는 일은 정례(情禮)에 있어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판부사 이시수(李時秀)·우의정 김관주(金觀柱) 등이 차례로 번갈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경들이 청대한 뜻을 자전(慈殿)께 우러러 아뢰었는데, 수렴 청정(垂簾廳政)할 때에는 존호를 받을 수 없다고 하교하셨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서 우러러 청하고 있다."
하였다.

 

빈청에서 아뢰기를,
"대왕 대비전의 성수(聖壽)가 영광스럽게 육순이 되고, 왕대비전의 성수가 오순에 꽉 찼으며, 혜경궁(惠慶宮)의 보령 또한 칠순에 찼으니, 이것이 어찌 국조(國朝) 4백 년 이래로 처음 있었던 경사일 뿐이겠습니까? 지난 사첩(史牒)을 두루 거슬러 살펴보더라도 또한 드물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오직 우리 대왕 대비 전하께서 덕은 주(周)나라 태사(太姒)129)  에 필적할 만하고 성(聖)은 여요(女堯)130)  를 능가할 만합니다. 문조(文祖)131)  께서 마음을 전할 즈음에 묵묵히 대책(大策)을 협찬(協贊)하셔서 무궁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고, 영고(寧考)132)  께서 즉위(卽位)하는 날에 미쳐서는 빛나는 기미를 먼저 밝히셔서 장차 일어날 화란(禍亂)의 조짐을 제거하여 안정시키셨으니, 공렬(功烈)이 크게 빛나고 윤강(倫綱)이 이를 힘입어 바로잡혔습니다. 이에 경신년133)  에 이르러 서는 국세(國勢)가 철류(綴旒)134)  같이 위태하여 두려웠는데, 종사(宗社)를 부지할 계책을 깊이 진념(軫念)하셔서 염유(簾帷)의 치화(治化)를 널리 베푸셨습니다. 사왕(嗣王)을 계도하여 도우시니, 성덕이 날로 진취(進就)되었고, 백성을 아들처럼 여겨 은혜를 베풀어 치화가 응할 것을 기다렸습니다. 영구히 보존할 계모(計謨)를 하늘에 빌어 선대의 업적을 이었고 후손에게 복을 물려 주었으며, 검소한 풍속을 숭상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하셨습니다. 선왕의 말명(末命)을 인도하여 드러내고, 의리의 정온(精蘊)을 천명(闡明)하였습니다. 호오(好惡)를 밝게 보이니 조야(朝野)가 모두 아주 화목한 데에 이르렀고, 상벌(賞罰)을 널리 베푸시니 위엄과 은혜는 지극한 교화(敎化)에 돌리게 되었습니다. 사설(邪說)이 횡행하는 것을 통분스럽게 여기고 인류가 서로 쇠퇴하여 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보필하여 가르치는 의형(儀刑)으로 먼저 나라에 들어오는 이에게 금령(禁令)을 게시하니, 흉추(凶醜)가 저절로 진멸되고 이단(異端)이 이에 침식(寢息)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릇 오늘날 여염(閭閻)에서 그 이로운 혜택을 입게 되었고, 조정에서 안녕과 평온을 보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연익(燕翼)135)  을 물려주는 계획은 우리의 억만 년 동안 반석과 태산처럼 공고해질 수 있게 된 업적이 어찌 우리의 억만 년 동안 반석과 태산처럼 공고해질 수 있게 된 업적이 어찌 우리 자전(慈殿)의 이루어 놓은 바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혜경궁 저하께서는 일찍이 휘유(徽猷)를 드러내고 의범(懿範)을 크게 밝히셨는데, 성인(聖人)을 낳아 은나라가 길이 발전한 성서를 여시고, 상궁(上躬)을 보호하여 주나라 왕실이 번성한 아름다움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뜻과 물품을 모두 받들어서 천승(千乘)의 효양(孝養)을 누리셨고, 장수의 상서는 구주(九疇)136)  의 큰 복을 받았습니다. 《시경(詩經)》에는 생민편(生民篇)을 기리고, 《예기(禮記)》는 근본에 보답함을 귀중히 여겼으니, 또 누구인들 오늘날 본받을 법칙이 아니겠습니까? 아! 이런 거듭된 복과 큰 경사의 날을 당하여 아름다운 덕을 유양(揄揚)하고, 기이한 상서를 꾸며 완염(琬琰)에 기록하고, 강릉(岡陵)의 장수(長壽)를 축원하여 융숭한 명호(名號)를 보첩(寶牒)에 빛내고 천지(天地)가 무궁토록 전할 것이니, 이는 진실로 뭇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함께 기원하는 바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더구나 이 예절은 곧 우리 국조의 이전(彝典)으로서, 인원 성모(仁元聖母)의 육순에 이미 행했던 욕의(縟儀)이고, 우리 자전(慈殿)과 자궁(慈宮)께서도 일찍이 갑인년137)  과 을묘년138)  에 우러러 준행(遵行)했던 경사입니다. 오직 우리 선왕께서는 효성스러운 생각이 한이 없어서 자나깨나 마음에 잊지 못하시고 이 해를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아름다운 옥책(玉冊)과 진하(進賀)의 예를 법전(法典)에 의해서 거행하고자 하여 하루를 1년같이 여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상께서는 지극한 정성과 효도로써 뜻과 업적을 계술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옛날에 하교를 받들어 경년(慶年)이 이르기를 손꼽아 기다린 지 이제 몇몇 해가 되었으니, 또 어떻게 감히 일제히 한 목소리로 적은 정성이나마 은혜를 갚을 것을 우러러 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 자전과 자궁께서 겸양하신다 하나, 만약 옛날에 선대왕께서 자나깨나 잊지 못하시고 오랫동안 기다리셨던 성효(聖孝)를 생각하신다면, 또한 어떻게 여정(輿情)에 힘써 따르심으로써 우리 성상께서 계술(繼述)하시는 정성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 왕대비 전하께서는 유순하고 아름다움이 오직 법이 되어 성선(聖善)이 두루 알려졌었습니다. 영고(寧考)의 지치(至治)를 협찬하여 음교(陰敎)가 곤위(壼闈)에 널리 미쳤고, 태모(太母)의 휘음(徽音)을 이어받아 어진 교화가 장락궁(長樂宮)139)  에 융성하였습니다. 지난해인 임술년140)  은 곧 보산(寶算)이 오순에 차는 해였으니, 존호를 올리고 경사를 치르는 것이 방례(邦禮)에 있어서 곧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국제(國制)를 미처 마치지 못하여 군정(群情)을 펼 수 없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큰 복록이 삼궁(三宮)에 모여 들어 경사가 한 때에 아울렀으니, 성상께서는 은혜를 갚는 정성과 기쁨을 기념하는 생각으로서 어찌 공손히 존호(尊號)와 옥책(玉冊)을 올려 크게 아름다움을 포장(鋪張)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난해 자전(慈殿)의 하교에 선왕께서 지키신 정의(精義)를 뒤좇아 본받으셔서 마침내 열조(列朝)에서 응당 행하셨던 구장(舊章)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은 진실로 선열(先烈)을 빛내고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바가 있으므로, 신 등이 장송(莊誦)하며 감읍(感泣)하여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는데, 비록 감히 거듭 번거롭게 청할 수 없으나 스스로 정성이 부족한 죄과에 돌아가니, 대정(大庭)에서 호숭(呼嵩)141)  하는데 이르러서는 곧 신하로서 송축(頌祝)하려는 사정(私情)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왕조께서 을묘년에 또한 일찍이 임어하신 지 2기(紀)가 되므로 정전(正殿)에 나아가 하례를 받으셨습니다. 이에 자전(慈殿)과 자궁(慈宮)에 진하(進賀)를 올려 경사를 치르는 날을 당하여 지난해에 미처 겨를하지 못했던 욕의(縟儀)를 뒤좇아 거행하여 동시에 진하를 올린다면 자덕(慈德)에 빛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효(聖孝)에 대해 크게 위안이 될 것이며, 신민(臣民)들도 기뻐하여 송축하는 뜻을 거의 조금이나마 펼 수 있을 것입니다. 뭇사람들의 정성이 격앙되어 서로 이끌고 일제히 호소하오니, 삼가 원하건대 빨리 자전께 품의하여 흔쾌히 청을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침에도 내전에서 이미 우러러 청하였고, 또 경들이 아뢴 뜻으로 누누이 고달(告達)하였으나, 자전께서 겸양하시어, 미처 윤허의 하교를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하였다.

 

11월 11일 임인

빈청에서 두 번째 아뢰니, 모두 ‘힘써 우러러 청하겠다.’고 비답하였다.

 

11월 12일 계묘

빈청에서 아뢰니, 비답하기를,
"자전께서 지금 경들을 불러 접견하시고자 한다."
하였다. 이어서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예조 당상을 소견하였다. 좌의정        서용보(徐龍輔)가 말하기를,
"신 등이 청하는 것은 오늘에 비로소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선조 때 일찍이 기대(企待)하시겠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곧 이미 정해진 예(禮)입니다. 위로 자전과 자궁의 아름다운 덕을 유양(揄揚)하고, 아래로 지극하신 성상의 효사(孝思)를 표장(表章)하는 것은 이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3,4번에 이르도록 오히려 그칠 줄 모르는 것인데, 이제 3일 동안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진실로 지극히 민망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판부사        이시수(李時秀) 등도 또한 누누이 진달하니, 대왕 대비가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하기를,
"빈청의 계사(啓辭)에 대해 여러 날 동안 윤허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내가 겸양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선왕께서 행하고자 하신 예라 하나, 선왕께서 세상에 생존하시던 날에는 전후에 청한 바를 이미 모두 받아들였는데, 이제 어찌하여 유독 굳게 거절하겠는가? 하물며 주상께서 춘추가 오히려 정성(鼎盛)하지 못한 데다 이런 간대(艱大)한 기업을 이어받은 것이겠는가? 오늘날 이런 경사가 있음으로써 도리로 진달하고 정사(情事)로 힘써 권하며 기뻐하는 빛이 십분 간절하니, 한 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이 마음을 형용하기 어렵다. 또 삼종(三從)의 의리가 지극히 중대하여, 부인은 비록 소견이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펴지 않고 성효를 펴게 하는 것이 당연한 사리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세(國勢)가 외롭고 위태한데다가 민사(民事)에 어려움이 많아서 평일(平日)에 견줄 바가 아닌 것이다."
하고, 이어서 흐느껴 울며 말하기를,
"갑인년142)                  과 을묘년143)                  의 일은 아직도 삼연(森然)하여 보이는 듯한데, 비록 내가 완인(頑忍)하다 하더라도 차마 이러한 시기를 보고서 이 청을 힘써 따를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선왕께서 만약 6,70년에 이르도록 오랫동안 재위하셨다면, 어찌 대왕 대비의 칭호가 있겠는가? 아직껏 세상에 살아 있으면서 또 이런 시기를 만났으니, 두려운 마음은 허다한 날이라도 오히려 부족하다. 비유하건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와 비가 오고 개이는 것이 각기 그 시기가 있는 것같이 해야 하는데 나는 시기에 어긋난 사람으로서 시기에 어긋난 시절을 만났으므로, 추위와 더위가 혹 어긋나거나 비가 오고 개이는 것이 혹 시기에 어긋나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불안을 견디지 못하였다. 매양 백성의 일을 생각하건대, 누가 굶주리고 누가 배불리 먹고 있는지 깊이 궁궐에 거처하여 살필 도리가 없다. 이른바 부인의 도리는 비록 분수 밖에 지나칠 수 없다 하나, 또한 어찌 지각(知覺)조차 없겠는가? 비록 비와 우레가 시기에 맞추어 천심(天心)이 어기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방심할 수 없는데, 더욱이 이 시기가 어떤 시기라고 오히려 방심할 수 있겠는가? 내가 경들의 계청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주상이 더욱 간절하고도 지극하게 청하였다. 그러나 내가 매번 뜻에 순종하는 것이 효도가 된다는 뜻으로 주상에게 여러 번 말하였으니, 경들도 마땅히 이 마음을 본받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명년에는 주상의 춘추 15세가 되는 해인데 식견이 날로 진보되고 정리(政理)가 점차 시행되어서, 국세(國勢)를 진정시키고 인심을 안정시키게 된다면, 그때를 당하여서는 그래도 혹 괜찮겠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진실로 그 시기가 아니다. 주상이 여러 날 동안 간절하게 권하며 강연(講筵)에도 나가지 않은 채 지나치게 성심(聖心)을 헛되이 쓰고 있는데, 내가 허락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렇게 노심 초사(勞心焦思)하기에 이르렀다면, 내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오늘날 송구스러운 심정으로 지금 사치스럽게 즐기는 일을 받는다면, 마침내 미안한 데 관계된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반복해서 진달하여 청하자,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비록 갑자년이 아니라도 이후에 어찌 날이 없겠는가? 주상의 청이 지극히 간절하여 때로 수라(水剌)도 또한 진어(進御)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내가 더러 노(怒)한 빛을 띠고 권하고 더러는 온화한 말로 달래니, 비로소 조금이나마 진어할 수 있게 되었으나, 온종일 곁에서 떠나지 않은 채 소청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근심하고 있다. 내가 보건대 주상의 성효(誠孝)는 선왕과 한 가지이니, 이런 때에 마음의 회포가 마땅히 다시 어떻겠는가? 내가 10년이나 20년을 지체하여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국사(國事)가 조금 안정되고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면 또한 혹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이고 있는데, 나라에서는 풍형 예대(豊亨豫大)144)                  하는 일을 일으키고 내가 또 만류하여 제지하지 않은 채 편안하게 여겨 이를 받는다면 사체(事體)가 어떠하겠는가? 설령 선왕께서 지금까지 세상에 생존하여 친히 올해를 맞이하여 예전에 한 말을 실천하고자 하시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양한다면, 선왕의 효심으로 반드시 따르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선왕께서 반드시 마땅히 따르신다면, 주상 또한 마땅히 따를 것이니, 경들도 마땅히 양해하도록 하라. 경사를 치르고 잔치를 베푸는 것은 진실로 크게 떠벌리는 데 관계되는데, 대전(大殿)의 성효(誠孝)에 그 정의(情意)를 드러내지 못하므로써 깊이 한탄스럽게 여긴다면, 나 또한 한결같이 억지로 뜻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반드시 그만둘 수 없다면, 경사를 치러 진하(陳賀)하는 것은 혹 할 수 있겠지만, 사치하고 거대하게 하는 일은 결단코 행할 수 없다."
하였다. 이어서 임금에게 말하기를,
"곧 전교를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어찌 이 하의(賀儀)를 받고 싶겠습니까마는, 주상의 간절한 뜻에 감동되어 특별히 하례받는 일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존호(尊號)에 이르러서는 깊이 나의 뜻을 본받아 다시는 번거롭게 청하지 말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성효가 되는 것이오."
하였다. 한참 있다가 서용보가 말하기를,
"누누이 하교하시는 바가 간절하시니, 아랫사람들의 정의가 비록 답답하지만 진실로 한결같이 억지로 떠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우러러 청하는 것은 대왕 대비전께 진하하여 존호를 올리고, 혜경궁께 진하하여 존호를 올리며, 왕대비전께 경사를 치러 진하하는 일입니다. 자교가 간절하셔서 받들어 순종하고자 한다면, 또 자궁(慈宮)께 우러러 청한 본의가 아니고, 또 한결같이 억지로 떠들기가 어려우니 아랫사람으로서 정의가 진실로 민망스럽습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옛말에 ‘나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나의 마음이 이미 이와 같으니, 혜경궁은 더욱 어떤 마음이 일어나겠는가? 내가 이를 권하고자 하나 반드시 힘써 따를 리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서용보 등이 오랫동안 부복(俯伏)하고 있다가 말하기를,
"옛날 선조(先朝) 때 처음에 빈계(賓啓)로 우러러 청하였는데, 내전에서 힘써 뜻을 돌이키시겠다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잠시 빈계를 철회하였다가 후에 다시 아뢰어 마침내 청을 허락받았었습니다. 신 등은 마땅히 빈청에 물러가 있으면서 하교를 기다릴 것이니, 성상께서는 내전에서 다시 자전과 자궁께 거듭 우러러 힘써 따르시기를 청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윤허받지 못하면, 또 빈계로 우러러 청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여러 신하들이 이미 물러가자 빈청에 하교하기를,
"내전에서 의당 힘써 뜻을 돌이키시게 할 것이니, 경들은 물러갔다가 내일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3일 갑진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예조 당상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어제 밤과 오늘에 잇달아 우러러 권면(勸勉)하였으나, 한결같이 어제 연석(筵席)에서 하교하신 것과 같았으니, 지금은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제 하교하신 바에 의거하여 진하(陳賀)하는 것으로 거행함이 어떠하겠는가?"
하자, 좌의정 서용보(徐龍輔) 등이 말하기를,
"지금 한결같이 억지로 떠드는 것은 아랫사람의 정의에 있어서 미안할 뿐만 아니라, 뜻에 순종하는 성효(聖孝)의 도리에 있어서도 진실로 뜻을 받드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래서 어제 연석에서도 또한 감히 누누이 번거롭게 청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성교(聖敎)를 받들어 이로써 거행한다면, 진실로 자성(慈聖)의 겸양하시는 덕을 드러낼 것이고, 또한 성효도 빛날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윤광보(尹光普)가 아뢰기를,
"오는 갑자년 원조(元朝)에 경사를 치르며 진하하되, 경명(慶名)은 대왕 대비전께서 성수(聖壽)가 육순에 꽉 차고, 왕대비전께서 성수가 오순에 꽉 차며, 혜경궁(惠慶宮)께서 보령이 칠순에 오르게 되시니, 세 경사를 합하여 칭호(稱號)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15일 병오

진강하였다.

 

서장관        홍석주(洪奭周)가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리기를,
"1. 금년 윤2월 사이에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으로부터 궁궐로 돌아와서 이미 자금성(紫禁城)의 신무문(神武門)을 들어갔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검(劍)을 뽑아 들고 호위(護衛)하는 사이에서 일어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매우 황급한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오직 친왕(親王)과 근신(近臣) 6인이 몸으로 막아서 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2인은 몸에 여러 군데 창상(創傷)을 입은 후에야 겨우 그 도둑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데, 그 도둑은 곧 편호(編戶)의 백성인 진덕(陳德)이었다고 합니다. 군기 대신(軍機大臣)으로 하여금 신문하게 하였더니, 단지 말하기를, ‘기한(飢寒)이 닥쳤으나 사경(死境)에서 구제할 방도가 없어서 차라리 속히 죽으려고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또 육부(六部)의 대신으로 하여금 연일 형장을 가해 국문(鞫問)하게 하였더니, 비로소 말하기를, ‘길몽(吉夢)과 기이한 복서(卜筮)가 있어서 바랄 수 없는 자리를 외람되게 희구(希求)하였습니다.’ 하고, 마침내 기꺼이 공범(共犯)을 끌어대지 않았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구문(究問)하기를 청하자, 유시하기를, ‘미친 개가 사람을 물었을 경우에는 원래 시킨 자가 없는 것이다. 온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짐의 골육(骨肉)인데, 어떻게 차마 흉범(凶犯)으로 하여금 끌어대게 할 수 있겠는가? 곧 처결하게 하되, 오직 진덕과 두 아들만 베어서 고가(藁街)에 머리를 매달고, 나머지는 비록 진덕의 지친이라 하더라도 아울러 파급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으며, 또 급변(急變)이 일어나는 즈음에 1백여 명의 시위하던 사람들이 모두 수수 방관(袖手傍觀)하였다 하여 전지를 내려 준절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1. 안남(安南)은 여씨(黎氏)가 이미 멸망한 후 완광평(阮光平)이 대신 그 나라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완광평의 아들 완광찬(阮光纘)이 죄를 짓고 민월(閩越)에 도망가 있는 자들을 불러들여 변방의 행려(行旅)를 겁략(劫掠)했으며, 작년에 이르러서는 농내국장(農耐國長) 완복영(阮福暎)과 서로 공격하여 싸우다가, 그들에게 패배당해 나라를 버리고 몰래 도망쳤다고 합니다. 완복영이 그 칙인(勅印)을 획득한 다음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바치고, 그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은 본말(本末)을 아뢰자, 인하여 완복영을 안남에 봉하고 국호(國號)를 ‘월남(越南)’이라고 고쳤다 합니다.
1. 광동(廣東)의 땅은 본래 오랑캐의 소굴인데, 생업(生業)을 잃은 곤궁한 백성들이 서로 선동하여 도둑이 되었으므로, 여러 번 초안(招安)을 행하였으나 점차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 합니다. 올해 봄·여름 사이에 나언(那彦)·성호도(成瑚圖)·영아(靈阿) 등을 보내어 기회를 타서 초토(剿討)하게 하였는데, 여러 번 싸워 모두 이기고 참칭(僭稱)하던 황아정(黃亞程) 등을 사로잡음으로써 이제 이미 소탕하여 평정하고 개선(凱旋)을 아뢰어 논공(論功)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천성(四川省)의 도둑을 평정하기도 전에 광동의 도둑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으며, 강남(江南)의 숙주(宿州) 한 지경에도 또한 적비(賊匪)의 소요로 황지(潢池)에서 병기(兵器)를 희롱하고 있는 것이 없는 해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 천초(川楚)의 적비(賊匪)는 8년 동안이나 근심거리가 되어 왔는데, 이제 이미 차례로 초멸(剿滅)하여 평정하였으며, 지난해 겨울 사이에는 이미 크게 승리한 것을 고묘(告廟)하고 논공 봉상(論功封賞)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당(餘黨)이 만연되어 산동(山峒)에 출몰하고 있으므로, 경략 대장군(經略大將軍)        액륵등보(額勒登保)와, 참찬 대신(參贊大臣)        덕릉태(德楞泰)와, 사천 총독(四川摠督) 늑보(勒保) 등이 아직도 진(鎭)에 머물러 있어 여러번 혈전(血戰)을 겪었고, 제독(提督)과 대장(大將)도 또한 싸우다가 죽은 자가 많았는데 봄·여름 사이에 다시 연승(連勝)을 거두어 지금은 서남 지방 한쪽에는 남아 있는 비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이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에 가는 길에서 여러번 돌아오는 전사(戰士)들을 만났는데, 역참(驛站)의 수레와 말 때문에 동네가 떠들썩하였으니, 그 돌아오는 자가 이와 같다면 그 〈전장(戰場)에〉 가는 자도 또한 알만 합니다. 그런데 섬서(陝西)·파촉(巴蜀)의 만 리 길에 심지어 영고탑(寧古塔)·흑룡강(黑龍江) 부근의 군병을 징발(徵發)하였으니, 군사가 피로하고 재물이 탕갈되었음을 미루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신이 귀로(歸路)에서 또 들은즉 영평(永平)의 군사가 사천성에 징발되어 나갔던 자들이 7천 인이 되었는데, 지금 살아서 돌아온 자는 3천 인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1. 근년에 남쪽 변방에서는 잇달아 흉년이 들어 유민(流民)이 관문 밖으로 많이 나갔으므로, 황제가 비적들이 그 사이에 섞일 것을 염려하여 부도통(副都統)        책파극(策巴克)에게 특별히 명하여 앞에 가서 조사해 살피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년 5월 사이에 관문을 나가서 마침 복건성(福建省)의 유민을 만났는데, 구문 제독(九門提督)에게 정문(呈文)한 자가 말하기를, ‘간민(奸民) 유문희(劉文喜) 등 6인이 변방 밖에 진을 치고 웅거하여 유민들을 불러 모은 다음 나무를 몰래 베고 상려(商旅)들을 약탈하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제독이 이에 의거하여 황제에게 주품(奏稟)하자, 황제가 부도통에게 명하여 그대로 머물러 조사하게 하였으며, 여순(旅順)의 수군(水軍)과 수암현(岫巖縣)의 군사들을 조발(調發)하여 고려구(高麗溝)·장자도(獐子島) 등지에 주둔하여 모여 있는 비적(匪賊)을 엄습하여 그 수범(首犯) 4인을 체포하였는데, 유독 유문희(劉文喜)·고학언(顧學彦) 2인은 아직도 잡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신이 돌아오는 길에 심양을 지나가다가 듣건대, 심양 장군        부곤(富坤)이 바야흐로 변경을 살피고 돌아왔는데, 전임(前任) 봉황성장(鳳凰城將)        갱녕(賡寧)이 뇌물을 받고 간사한 사람을 용서한 까닭에 체포해서 심양에 계류(繫留)하고 있는데, 적몰(籍沒)하여 찬적(竄謫)하는 데 해당된다고 합니다. 또 듣건대, 고려구·장자도 등의 지방에는 심양과 봉황성으로부터 군사를 조발하여 갈대를 베어 내고, 인하여 군사를 머물러 두고 방수(防守)하려 한다고 하는데, 이 한 조항은 일이 길에서 들은 것이므로 확실하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11월 16일 정미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1월 17일 무신

진강하였다.

 

11월 18일 기유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1월 19일 경술

진강하였다. 《시전(詩傳)》 초자장(楚茨章)을 강하다가, 임금이 말하기를,
"초자(楚茨) 한 편은 장마다 복제(福祭)를 말하고 있는데, 어찌 복을 위해 제사를 지내겠는가?"
하자, 영사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이 시(詩)는 제사를 주장하는 자의 시가 아니고, 곧 제사에 참여하는 자가 그 예의(禮儀)의 성대함을 보고 이러한 송축하는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시동(尸童)145)  을 썼는데, 그 당시에는 목주(木主)가 없었는가? 목주로 행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 시대인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삼대(三代) 때부터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경(書經)》 감서편(甘誓篇)에, ‘명을 잘 받드는 사람은 조상들 앞에서 상(賞)을 받는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이르기를, ‘친정(親征)할 때에 그 천묘(遷廟)한 신주를 싣고 간다.’ 하였으니, 이로써 살펴보면 그 당시에도 또한 신주가 있었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시동(尸童)이 있었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묘(廟)에서 신주를 취하고 정침(正寢)에서 유의(遺衣)를 취하여 시동에게 주었는데, 시동과 목주(木主)는 아울러 신위에 임하였습니다."
하였다.

 

11월 20일 신해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금년에는 재이(災異)가 여러번 나타났는데, 이러한 때에 내가 무슨 마음으로 하례(賀禮)를 받겠는가? 단지 주상의 성효(誠孝)로 인하여 하례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지금 의주(儀註)를 보았더니 하의(賀儀)를 초하루로 잡았는데, 초하루에는 마땅히 선원전(璿源殿)에 다례(茶禮)를 행해야 한다. 새벽에 다례를 지내고 또 하례를 받는다면 주상께서 반드시 수고로움이 많게 될 것이니, 진하(陳賀)는 10일 사이로 늦추어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여러 대신(臺臣)들이 한 사람도 빈대(賓對)에 입참(入參)한 사람이 없으니, 어찌 이와 같은 기강이 있을 수 있는가? 비록 지난번 이경일(李敬一)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미 물의(物議)를 채탐(採探)하였다 하고 곧 정계(停啓)할 뜻으로 연석(筵席)에서 질언(質言)하였는데, 날짜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끝내 들어와서 정계하지 않았다. 늙은 부모에게 연고가 있다 하여 엄중한 견책을 내리지 않았으니, 조정에서 효도로써 다스리는 정사에 있어서 간곡하게 하는 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한두 번 계사(啓辭)하더라도 내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정계하게 하려 한다."
하고, 마침내 이경일을 특별히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후에 이경일이 장령 홍광일(洪光一)·이동만(李東萬)과 더불어 대청(臺廳)에 나아가 강명길(姜命吉)의 제자(諸子) 및 정창순(鄭昌順)·유협기(柳協基)·서유문(徐有聞)·이광익(李光益)에 대한 일을 정계(停啓)하였고, 사간 현중조(玄重祚)가 대청에 나아가 강명길 제자의 일에 대하여 정계하였다.

 

소대하였다.

 

고 참판 김양행(金亮行), 고 찬선 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에게 특별히 정경(正卿)을 추증하라고 명하였으니, 이조 판서 서매수(徐邁修)가 절혜(節惠)146)  의 은전(恩典)을 내리기 위하여 먼저 정경을 추증하기를 주청한 것으로 인해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허락한 것이었다.

 

11월 21일 임자

내년 정조(正朝)의 방물(方物)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세 경사를 합하여 진하하는 것이 정조와 서로 겹쳤다 하여 정조의 방물을 정지하라고 명하고 경하(慶賀)는 초열흘로 늦추어 날짜를 정하도록 하였는데, 예조에서 아뢰기를,
"경사를 치러 진하하는 일은 이제 이미 늦추어 행하기로 하였는데, 정조의 공헌(貢獻)은 봉진(封進)을 정지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처음 하교한 바에 의거하여 봉진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2일 계축

진강하였다.

 

11월 23일 갑인

진강하였다.

 

11월 24일 을묘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1월 26일 정사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1월 27일 무오

진강하였다.

 

11월 28일 기미

진강하였다.

 

이상황(李相璜)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1월 29일 경신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북경의 예부(禮部)에서 휘명(諱名)은 대신 쓰라는 자문(咨文)을 내보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성휘(聖諱)147)  의 위 한 글자는 《서경(書經)》의, ‘현덕이 승문하였다.[玄德升聞]’는 귀절 가운데 첫 번째 글자를 응당 원(元) 자로 대신하고, 아래 한 글자인 불화[火] 변에 빛날화[華]를 가한 자는 응당 욱(煜) 자로 대신할 것이며, 세종 헌황제(世宗憲皇帝)성휘(聖諱)148)  의 위 한 글자는 《시경(詩經)》의, ‘영원히 복을 후손에 내리시네.[永錫祚胤]’라는 귀절 가운데 네 번째 글자는 응당 윤(允) 자로 대신하고, 아래 한 글자인 보일시[示] 변에 참진[眞]을 가한 자는 응당 정(禎) 자로 대신할 것이며,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성휘(聖諱)149)  의 위 한 글자는 《역경(易經)》의, ‘크고 밝고 성대함을 함유하였네.[含弘光大]’라는 귀절 가운데 두 번째 글자는 응당 굉(宏) 자로 대신하고, 아래 한 글자는 《서경》의,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을 관찰하였다.[曆象日月星辰]’라는 귀절 가운데 첫 번째 글자는 응당 역(歷) 자로 대신할 것이며, 황상(皇上)의 어명(御名)150)   위 한 글자는 《역경》의, ‘믿음이 있어서 그 모습이 공순하다.[有孚顒若]’라는 귀절 가운데 세 번째 글자는 오른편 혈(頁) 자의 왼쪽의 삐친 획과 오른 쪽의 점을 삭제하고[顒], 아래 한 글자는 《서경》의, ‘큰 구슬과 아름다운 옥(玉)을 서쪽 행랑에 두었다.[宏璧琬琰在西序]’라는 귀절 가운데 네 번째 글자인 염(琰) 자의 오른쪽 두 번째 화 자를 우(又) 자[琰]로 고쳐서 쓸 것입니다. 그리고 성휘에 이르러서는 편방(偏旁)에 있는 글자를 더하여 음의(音義)가 옳은지 그른지 서로 화합되는지를 논할 것이 없이 모두 존경하여 한 글자를 떼워 쓰는 것이 마땅하므로 이에 알립니다."
하였다.

 

11월 30일 신유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국전(國典)에 원자(元子) 외의 자녀는 7세가 되면, 으레 설궁(設宮)하는 것인데, 선조(先祖)께서 복을 아끼는 마음으로써 구습에 따라 이에 이르렀다. 지금 옹주의 나이 이미 11세가 되었으니, 길례(吉禮) 또한 당장 가까워져 있으니, 옹주방에 전결(田結)을 청연 군주방(淸衍郡主房)의 예에 의거하여 2백 결 외에 6백 결을 더 주도록 하라."
하였다.

 

부교리 심반(沈鎜) 등이, 정창순(鄭昌順)·유협기(柳協基)의 일을 정계(停啓)한 것에 대해 크게 제방(隄防)에 관계된다고 논하고, 인하여 정계한 대신(臺臣)들에게 파직의 율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