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5권 순조3년 1803년 12월
12월 1일 임술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김근순(金近淳)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오재소(吳載紹)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2일 계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감제(柑製)를 시험하고, 수위를 차지한 송익연(宋翼淵)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12월 3일 갑자
소대하였다.
12월 5일 병인
진강하였다. 강하기를 마치고 임금이 어제(御製)한 군덕편(君德篇)을 내보였는데, ‘학문에 힘쓰는 것과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과 하늘을 공경하는 것과 조상을 본받는 것과 백성을 사랑하는 것과 어진이를 수용(收用)하는 것과 재물을 절약하는 것과 정사에 부지런하는 것과 공순하고 검소하는 것과 작은 일에도 삼가한다.’는 것 등 무릇 10조목이었는데, 모두 수신 제가(修身齊家)하고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하는 요체였다. 영사 서용보(徐龍輔) 등이 펴서 읽기를 마치고 아뢰기를,
"이 편(篇) 가운데 이르기를, ‘인군(人君)의 덕(德)은 사욕(私慾)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마음으로 하여금 밝고 광명 정대하며 공정하고 화평(和平)하여 털끝만큼도 사사로움이 없은 후에야 덕을 닦아서 위로 하늘을 감동할 수 있고 아래로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흠송(欽誦)할 바가 있는 것은 이에서 성학(聖學)의 고명(高明)하여 이미 중화(中和)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으니, 신이 감히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스리고 본받는 도리가 모두 이에 갖추어져 있으니, 곧바로 경전(經典)과 표리(表裏)가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12월 6일 정묘
진강하였다.
홍문록(弘文錄)151) 【부제학 김근순(金近淳), 응교 원재명(元在明), 부응교 신귀조(申龜朝), 부교리 이회상(李晦祥)이다.】 을 행하였는데, 강세륜(姜世綸)·이위달(李渭達)·임경진(林景鎭)·이영하(李泳夏)·임백희(林百禧)·김계온(金啓溫)·신위(申緯)·조진화(趙晉和)·윤정렬(尹鼎烈)·홍희응(洪羲膺)·서유순(徐有恂)·기학경(奇學敬)·조운익(趙雲翊)·홍병철(洪秉喆)·이유명(李惟命)·윤치정(尹致鼎)·김시근(金蓍根)·서능보(徐能輔)·이상우(李尙愚)·김상휴(金相休)·이면구(李勉求) 등이 3점을 받았다.
12월 7일 무진
진강하였다.
12월 8일 기사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숙선 옹주(淑善翁主)는 지금 이미 11세가 되었으니, 내년에는 장차 길례(吉禮)를 행해야겠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숙선 옹주의 부마(駙馬)는 마땅히 내년에 간택(揀擇)할 것이니, 13세부터 9세까지의 동몽(童蒙)은 금혼(禁婚)하고, 단자(單子)를 받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개성 유수 서미수(徐美修)가 아뢰기를,
"청석동(靑石洞)의 수십 리 긴 골짜기는 골 서쪽 대로(大路)와 통하는데, 헛되이 무인지경(無人之境)으로 만들어 마침내 방어할 수 있는 공효(功效)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산기슭을 따라 성첩(城堞)을 쌓는다면, 3리의 성으로 백 만의 적군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 초(哨)의 군사를 옮겨서 채우고 한 진장(鎭將)을 두어 통솔하게 한다면, 험준한 대흥 산성(大興山城)과 곡식이 쌓인 태안(泰安)의 창고가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성을 쌓고 문을 설치하며, 수문(水門)·돈대(墩臺)를 쌓을 곳은 천여 보에 지나지 않는데, 돌을 캐고 기와를 구으며, 재목을 모으고 철(鐵)을 사들이는 길이 모두 순편하니, 만약 수만 냥의 재물로 1백 일의 공력(功力)을 소비한다면, 거의 완성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는데, 대신들에게 하문하고 이를 허락하였다.
이만수(李晩秀)를 홍문관 대제학 겸 예문관 대제학으로, 김희순(金羲淳)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12월 9일 경오
진강하였다.
우찬성 송환기(宋煥箕), 좨주(祭洒) 이직보(李直輔), 경연관 송치규(宋稚圭)·김일주(金日柱)를 돈독하게 불렀으니, 부제학 김근순(金近淳)의 말에 의한 것인데 송환기 등이 사양하고 올라 오지 않았다.
이만수(李晩秀)를 호조 판서로, 김달순(金達淳)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10일 신미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11일 임신
소대하였다.
관학 유생 이근원(李近源) 등 7백 27인이 연명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신종 황제(神宗皇帝)로부터 재조(再造)의 은혜를 치우치게 입었고 황조의 정삭(正朔)을 오늘날까지 보존하여 민멸(泯滅)되기에 이르지 않은 것은 오직 우리 나라만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옛날 영묘조(英廟朝) 때에는 충량과(忠良科)를 방방(放榜)할 때 특교(特敎)로 인하여 은패(恩牌)에 숭정 연호(崇禎年號)를 썼고, 무릇 사대부 집안의 묘도 문자(墓道文字)와 스승과 벗 사이에 시문을 창화(唱和)할 때에도 모두 특별히 숭정의 기원을 씀으로써 존주(尊周)의 정성을 표시했던 것도 또한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청도 회덕(懷德) 한 고을은 또한 우리 나라의 곡부(曲阜)·신안(新安) 같은 곳이므로, 향교(鄕校)에서 석전(釋奠)의 축문에 특별히 숭정 연호를 쓴 것은 그 유래가 대개 오래 되었습니다. 아! 그런데 저 지현(知縣) 강세정(姜世靖)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길래 금년 추향(秋享)에 자신이 초헌관(初獻官)이 되어 축문을 읽을 때에 숭정 두 글자를 듣고 대축을 위협하여 제지하고, 그로 하여금 고쳐 읽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는 모두 평일에 품고 있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의리를 원수로 여겨 반드시 오랑캐의 연호를 위하여 기치를 세우고자 하여 춘추(春秋)의 의리에 대해 난적(亂賊)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긴 것입니다. 화양 서원(華陽書院)의 유생들이 회덕 고을에 이문(移文)하여 강세정의 죄를 성토하고 고쳐 읽은 대축을 게시하여 벌을 주니, 강세정은 그 죄를 승복(承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 도리어 대단한 기세로 장황한 말을 늘어 놓으며 감히 끌어댈 수 없는 자리를 감히 끌어대며 일세(一世)의 공의(公議)와 겨루어, 당세의 사대부들이 고첩(誥牒)을 받은 것과 사신으로 갔던 것에 대해 두루 욕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집안의 조선(祖先)을 거론하여 황조(皇朝)의 적신(賊臣)이며 원수 조정의 배신(陪臣)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심지어 4도(度)의 공첩(公貼)에 이르기를, ‘지금 숭정과 수백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통원(痛冤)」 두 글자는 어찌 너무 지나치며 가소롭지 않은가?’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나온 것입니까? 아! 우리 나라는 황명(皇明)에 대해 백 세가 되도록 잊을 수 없는 은혜가 있고, 저 오랑캐에 대해서는 백 세가 되도록 잊을 수 없는 수혐(讎嫌)이 있는데, 어떻게 세월이 오래고 가까운 것을 비교하여 묵은 옛날의 은혜와 수혐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신민(臣民)이 된 몸으로서 ‘통원’ 두 글자를 너무 지나친 경지와 가소로운 과조에 돌렸으니, 이는 우리 나라의 죄인이며 황조의 죄인인 것입니다. 그 아들 강준흠(姜浚欽)은 되도록이면 이를 숨기는 것이 옳고, 사사롭게 이를 통박(痛迫)하게 여기는 것이 옳은데, 이미 사론(士論)을 듣고서 의기 양양(意氣揚揚)하게 장소를 베풀었으니, 이미 엄외(嚴畏)하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뭇사람들의 말을 막기 어렵게 되자, 스스로 장소를 파하고는 서둘러 진소하여 공의와 승부를 다투었는데, 그 아비의 무함을 변명(辨明)한 것이 도리어 아비의 죄악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신 등은 의리상 강세정과 함께 한 나라 안에 살 수 없음을 대략 사실을 들어 거론하오니, 삼가 원하건대, 강세정의 의리를 배신한 죄를 특별히 다스려서 변방에 내침으로써 세도(世道)를 안정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강세정의 일은 그 마음이 어찌 의리에 배치하고자 하였겠는가마는, 그 자취는 그러하였다. 아뢴 바에 의거하여 강세정을 기장현(機張縣)에 내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2일 계유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간원 【사간 현중조(玄重祚)이다.】 에서 새로 아뢰어 정창순(鄭昌順)·유협기(柳協基)에게 빨리 추탈(追奪)의 율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3일 갑술
서정수(徐鼎修)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인정전(仁政殿)이 불탔다. 유시(酉時)에 선정전(宣政殿) 서쪽 행각(行閣)에서 불이 일어나 인정전까지 연소된 것이니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였다. 선원전(璿源殿)이 인정전(仁政殿)에 접근함으로 정원에서 불을 끄는 계엄(戒嚴)의 절차를 각신(閣臣)으로 하여금 편의(便宜)한 데 따라 거행하게 하고, 또 이봉(移奉)할 곳을 주합루(宙合樓)로 삼자는 뜻을 계품하였다. 내각 직제학 김근순(金近淳), 대교(待敎) 이교신(李敎信)이 명을 받들고 선원전에 나아가 3실의 어진(御眞)을 이봉하여 소여(小輿)에 봉안하고, 서향각(書香閣)에 이르러 청사(廳事)152) 에 임시로 봉안하였다. 임금이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 이어(移御)하고 시임 대신·원임 대신·각신·승지 등을 소견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진위(陳慰)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의 정전(正殿)이 이렇게 모두 불에 타 있으니, 황공하고도 두려운 마음을 견줄 데가 없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박덕(薄德)한 몸으로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지나치게 두려워하던 즈음에 이러한 비상한 재난이 있었으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금할 바가 없다. 비록 소각(小閣)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불행하다고 할 것인데, 더욱이 수백 년이 된 구전(舊殿)이겠는가?"
하자, 좌의정 서용보(徐龍輔), 우의정 김관주(金觀柱)가 두려워하며 수성(修省)하여 재난을 돌이켜 상서를 만드는 도리를 차례로 아뢰고, 이어서 아울러 물리쳐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치다."
하였다. 승지 박윤수(朴崙壽)가 말하기를,
"궐내의 금화(禁火)는 병조에서 주관하는데, 이번에 불이 난 재난은 몹시 두려워할 만하였으니, 평소 검칙(檢飭)하지 못한 죄를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해조(該曹)의 죄가 아니니 버려 두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미망인이 불행하게도 수렴 청정(垂簾聽政)하며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였는데, 천만 뜻밖에 수백 년 동안 전해져 온 정전(政殿)이 한 시간 사이에 불타는 재난을 당하였으니, 하늘에 계신 열조(列祖)의 영령(英靈)들께서 내려다보시고 어떻다 하시겠는가? 몹시 놀라서 두렵기만 하다. 이는 내가 박덕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간언(諫言)의 책임을 맡은 신하는 모름지기 과실을 진달함으로써 나를 보필(輔弼)하도록 하라. 내일부터 감선(減膳)을 시작하겠다."
하고, 임금이 하교하기를,
"보잘것없는 소자(小子)가 외람되게 당구(堂構)의 책무를 이어받고 항상 두려워하며 부하(負荷)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같이 하였는데, 이제 화신(火神)이 경계를 고함이 천위(踐位)하고 행례(行禮)하는 곳에서 있었다. 이는 첫째도 나의 부덕(否德)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둘째도 나의 부덕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매우 두려운 나머지 이어서 송구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이렇게 비상한 재난을 당하여 어떻게 감히 소홀하게 여겨 스스로 용서할 수 있겠는가? 내일부터 감선(減膳)하며, 5일 동안 피전(避殿)하고 철악(撤樂)함으로써 폄책(貶責)하는 거조를 보이겠다. 무릇 논사(論思)하고 간쟁(諫爭)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 허물을 죄다 진달함으로써 나의 과매(寡昧)함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삼가 숙묘조(肅廟朝)정묘년153) 에 만수전(萬壽殿)이 불탔을 때의 일을 상고하건대, 태묘(太廟)에 가까이 접근하였다 하여 위안제(慰安祭)를 설행하고, 백관(百官)이 전문(箋文)을 올려 진위(陳慰)하였으며, 외방에서도 또한 일체 전문을 봉진(封進)했었습니다. 청컨대, 이 전례에 의거하여 날을 가리지 말고 일체로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위안제를 설행하고, 각 전·궁(殿宮)에 백관들이 같은 날 전문을 바치게 하되, 진위할 처소는 명정전(明政殿)에서 하게 할 것이며, 외방은 관문(關文)이 도착하는 날 곧 봉진(封進)하라는 일을 파발마(擺撥馬)를 보내어 알리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4일 을해
서향각(書香閣)에 나아가 어진(御眞)을 봉심(奉審)하였다.
조진관(趙鎭寬)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양사(兩司) 【대사간 이동직(李東稷), 사간 현중조(玄重祚), 장령 임후상(任厚常)·이원팔(李元八)이다.】 에서 연명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재해를 만나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말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옥당(玉堂) 【응교 원재명(元在明), 부응교 신귀조(申龜朝), 교리 홍석주(洪奭周)·권준(權晙), 부교리 이회상(李晦祥), 수찬 김매순(金邁淳)·송지렴(宋知濂)이다.】 에서 연명하여 차자를 올려 면려(勉勵)하기를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어제 구언(求言)하는 하교가 오직 논사(論思)하고 간쟁(諫爭)하는 신하들에게만 미치었습니다. 이러한 비상한 재난을 당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비상한 거조가 있은 연후에야 거의 공경히 천의(天意)를 받들고 굽어 여정(輿情)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인데, 자문(諮問)하는 뜻이 언관(言官)에 한정되었으니, 옹용하고 심상하게 여기는 데 돌아감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애통해 하시는 윤음을 내리시고 숨기지 않는 문호를 활짝 열어 놓아 위로 낭묘(廊廟)로부터 아래로 초야(草野)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마음속에 품은 소회를 죄다 진달하게 하고, 이를 널리 채택하여 거두어 들임으로써 수성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하고, 인하여 정원으로 하여금 구언하는 전교를 대신 찬술하게 하였다.
12월 15일 병자
월식(月食)하였다. 【인정(寅正)으로부터 묘정(卯正)에 이르기까지 침식(浸蝕)되었는데, 4분(分) 2초(秒)에 처음 동남쪽에서 이지러져 정남쪽에서 심하게 침식되었다가 다시 서남쪽으로부터 둥글어졌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69면
【분류】과학-천기(天氣)
서향각(書香閣)에 나아가 분향(焚香)하였다.
12월 16일 정축
경외(京外)의 신민(臣民)들에게 유시하기를,
"아! 그대들 모든 벼슬에 있는 자들과 우리 팔방의 여러 대중(大衆)들은 나 한 사람의 고유(誥諭)함을 밝게 들을 지어다. 보잘것없는 내가 조상의 기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마치 큰 내를 건너듯이 두려워하였는데 오히려 건곤(乾坤)이 베풀어 주시는 은택과 조종(祖宗)의 강림하시는 영령과 경사(卿士)들의 협보(夾輔)하는 것과 뭇 백성들이 추대(推戴)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힘입어 장차 숙세(叔世)를 돌이켜 옹희(雍熙)에 이르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난번에 시상(時象)이 기다려 주지 않아 재해(災害)가 빨리 닥쳐왔다. 지금 왕위(王位)에 오른 다음 해인데, 사씨(史氏)가 재이(災異)를 쓴 것이 두세 가지뿐만이 아니었다. 함흥(咸興)은 우리 나라의 풍패(豊沛)154) 인데 불탔고, 평양(平壤)은 기자(箕子)가 처음 교화를 편 곳인데 불에 탔으며, 사직(社稷)은 왕자(王者)의 토지신(土地神)이 있는 곳인데 응종가(應鍾歌)와 함지무(咸池舞)에 사용하는 악기(樂器)가 불에 타서 예절을 갖출 수가 없었고, 섣달에 이르러서는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이 수백 년 동안 남면(南面)하여 다스리던 정전(正殿)인데, 또 불에 대해 경계하지 않아 하루 저녁에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무릇 필부(匹夫)가 그 선인(先人)의 집을 불태웠을 때에도 예에 있어서 또 사흘 동안 곡(哭)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더욱이 나라의 임금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는 이변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심상한 재앙에 견주어 논할 뿐이겠는가? 우리 자전(慈殿)과 자궁(慈宮)을 경동(驚動)시키고 우리 신민들을 분주하게 한 지 대개 여러 날 되었는데, 나의 마음도 근심하여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나이 어려 위 아래에 대해 무슨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어서 화재의 이변이 겹쳐 일어나 이와 같이 경계하는 것인지 나도 감히 알 수는 없다. 정(鄭)나라 사람들이 법률을 업신여겨 폐기하자 불이 났는데, 지금의 법률 가운데 혹시라도 선왕의 구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인가? 노(魯)나라 사람들이 법도에 지나치게 사치하자 불이 났는데, 혹 선왕의 유훈(遺訓)을 본받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인가? 인재를 육성한다는 이름은 있으나 어진이를 거두어 기용하는 실상이 없으매 한(漢)나라 조정은 명철하지 못했다는 징벌(懲罰)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 조짐인가? 때로 폐정(弊政)이 많고 날로 쇠퇴해지는 조짐을 보이니, 진(晉)나라 조정에 상류(象類)가 응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그 감계(鑑戒)가 되는 것인가? 이에 무슨 어려운 일이 어떻게 응하였다는 유향(劉向)·동중서(董仲舒)의 부회(傅會)한 말을 인하여 나이 어린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대저 인군(人君)이란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기강과 풍속이 매어 있고 정법(政法)을 쓰고 버리는 것이 그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인데, 혹시라도 학문에 독실하지 않거나 일에 임하여 근실하지 아니하여 백공(百工)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모든 공적이 침체되면 구징(咎徵)이 어찌 있지 않겠으며, 〈재앙이〉 또한 어찌 갖추어지지 않겠는가? ‘깊은 근심은 성덕(聖德)을 계발(啓發)하고 많은 어려움은 나라를 흥왕시킨다’는 것은, 옛날에 전해온 말이다. 그래서 나무가 뜰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155) 태무(太戊)는 반드시 현명하지 못했을 것이고, 암꿩이 솥에서 울지 않았더라면156) 무정(武丁)은 반드시 종주(宗主)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감히 하늘이 나를 일깨웠다고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칭양(稱揚)하여 밝게 섬겨 욕됨이 없어야 할 것이니, 이를 위해서는 지난날을 뉘우치는 데에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해야 할 것이며, 미치지 못하는 데에 부지런히 힘써야 할 것이다. 일전에 구언(求言)하였을 때 논사(論思)하고 간쟁(諫諍)하는 신하들이 옳은 말을 나에게 고하였다. 이러한 정성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있으나 나는 오히려 넓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스승을 방문하여 연택(淵澤)을 피하지 않고 착한 계책을 자문하는 데에는 추요(芻蕘)하는 사람을 가리지 아니하여 거룩한 실적(實績)을 사책(史策)에 빛내고, 아름다운 명성을 금석 문자(金石文字)에 전파하는 자는 그 어떤 사람이겠는가? 임금은 오직 원수(元首)가 되고 고굉(股肱)의 신하는 오직 보필해야 하며, 서민(庶民)들은 오직 터전이 되어 한결같이 서로 도와야 할 것이다. 덕을 같이하여 서로 구하는 자는 나를 업신여기거나 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더욱이 지금 나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우리 선대왕께서 어진이를 친애하고 이로움을 즐기는 혜택을 입고 한평생 잊지 못하는 생각을 사람마다 지니고 있을 것이니, 그 차마 선군(先君)을 생각하는 정성으로 나 과인을 위해 힘쓰지 않겠는가? 너희들의 모유(謀猷)를 죄다 공거(公車)157) 에 올려 위로 임금의 과실에서부터 아래로 그릇된 정사에 이르기까지 기롱하거나 속이지 말고 숨김 없이 직간(直諫)함으로써 나의 옆자리를 비워 놓고 도움을 구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말이 비록 적합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대들을 죄주지 않을 것이다. 아! 내가 충인(沖人)으로 어찌 사람들을 속이겠는가?"
하였다. 【승지 서영수(徐瀯修)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69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궁관(宮官) / 정론(政論) / 군사-금화(禁火) / 어문학(語文學)
[註 154] 풍패(豊沛) :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발상지.[註 155] 나무가 뜰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 은(殷)나라 중종(中宗) 때 뜰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엉켜 붙어 생겨난 지 하루 만에 두 손아귀에 차도록 자란 요사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당시의 현신(賢臣) 이척(伊陟)이 말하기를, "요괴는 덕을 이기지 못하니, 임금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므로, 중종이 선왕의 선정(善政)을 본받아 행하니, 이틀 만에 그 나무가 말라 죽고 은나라에 왕도(王道)가 부흥했다는 고사(故事).[註 156] 암꿩이 솥에서 울지 않았더라면 : 은(殷)나라 고종(高宗)인 무정(武丁)이 탕(湯)임금을 제사지내는 날 꿩이 날아와서 솥에 앉아 우는 이변(異變)이 있었는데, 조기(祖己)가 말하기를, "먼저 임금님께서 덕(德)을 바로잡으시면, 그 일로 바로잡힐 것입니다." 하므로, 고종이 두려워하여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고 덕을 쌓으니, 은나라에 왕도(王道)가 부흥했다는 고사를 말함.[註 157] 공거(公車) : 소장(疏章).
12월 17일 무인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영돈녕·호조 판서·형조 판서를 소견하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을 중건하는 역사는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문하자, 좌의정 서용보(徐龍輔)가 말하기를,
"정전(正殿)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마땅히 도감(都監)을 설치해야 하겠지만, 만약 당상과 낭청을 많이 차출한다면 긴요하지 않은 낭비가 매우 많아질 것입니다. 경모궁(景慕宮), 규장각(奎章閣), 자경전(慈慶殿)을 영건할 때에는 아울러 단지 호조의 당상과 낭청만으로 이를 하였었으니, 지금도 이 예에 의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옳게 여겼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화재(火災)가 있은 후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두렵고도 매우 놀란 나머지 내 마음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러한 재이(災異)를 당한 후에 정초(正初)의 하의(賀儀)는 천만 부당한 일이다. 나의 본뜻은 경사를 치르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주상의 청이 간절하고도 지극히 절실해서 차마 성효(聖孝)를 거듭 어길 수 없었으므로 진하(陳賀)로 정했었는데, 이 또한 마지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금 재해를 당해 수성(修省)하는 날에 있어서 경사를 칭도(稱道)하는 일이 있으면, 나의 마음이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그 사면(事面)에 있어서 어떠하겠는가? 빨리 정지하도록 정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는데, 판중추부사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내년은 다른 해와 달라서 군정(群情)이 바라는 바는 진하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므로, 연석에서 진달하고 장계로 호소하여 여러 날 동안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진하함으로써 명을 받들었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해가 되기를 발돋움하여 기다렸는데, 천만 뜻밖에 법전(法殿)에서 불이 일어나 자심(慈心)이 두려워하여 이제 이러한 전교를 내리셔서 하늘을 공경하고 자신을 꾸짖는 뜻을 애연(藹然)히 나타내, 팔방의 청문(聽聞)을 용동(聳動)시키고 한때의 재난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니, 신은 감히 거듭 번거롭게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지금 이 재이는 그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진실로 나로 말미암은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할 수 없는 일을 당하였으므로, 재이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주상은 성효(誠孝)가 돈독하여 내가 혹 조용히 쉬고 있으면, 잠자리에 들었을까 염려하여 발걸음을 조용히 내딛고 목소리를 낮추어 행여나 경동(驚動)할까 두려워하였으니 보호하는 정성이 성실하고 전일(傳一)하여, 감동스럽고도 귀하게 여길 만하다. 대저 제왕(帝王)은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려야 하니, 효도를 먼저 세운 후에야 온갖 행실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주상은 3세 때부터 효성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미처 장성(長成)하지 않은 나이에 갑자기 국상(國喪)158) 을 만났으므로 손상될까 두려워하여, 민려(悶慮)가 자별(自別)하였는데 성효(聖孝)를 할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극진히 하지 않는 바가 없었고, 비통한 심정을 겉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조용한 곳에서 혼자 앉아 있을 때에는 슬퍼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으니, 내가 이를 볼 때마다 이 마음을 형용하기 어려웠다. 지금 이러한 재이를 당하여 또한 극도로 노심 초사하여 재이를 부른 까닭에 대해 반성하므로, 내가 또 위로하여 해명하기를, ‘주상께서 아직 한 가지 일도 행하지 않았으나, 항상 성덕(盛德)이 많았습니다. 재이는 나로 말미암은 것이니, 모쪼록 근심하지 마시오.’ 하였다. 지금 하의(賀儀)를 정지한 일도 또한 힘껏 만류하였지만, 내가 종사를 위한 뜻으로써 법전(法殿)이 불탄 재이를 당하여 어떻게 엄연히 이러한 경례(慶禮)를 받고자 하겠는가?"
하자, 서용보 등이 말하기를,
"성상의 돈독한 효성으로 백성들과 더불어 옹축(顒祝)하는 정(情)에 있어서 하의는 오히려 부족하다고 말했었는데, 천만 뜻밖에 법전이 불탔고 잇달아 간절한 하교를 받드니, 그윽이 흠앙(欽仰)하여 두려운 사정(私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삼가 하교를 받들건대, 오로지 재이를 당해 수성(修省)하여 하늘의 뜻에 응하는 진실한 뜻에서 나왔으니, 신 등은 감히 거듭 일을 번거롭게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임금이 말하기를,
"하정(下情)이 억울하게 여기고 있는데, 하교가 이와 같으니 진실로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내년은 혜경궁(惠慶宮)이 70세가 되는데, 매우 희귀한 일이니 마땅히 빨리 경사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애통한 마음으로 칭송(稱頌)함을 듣기 싫어하니, 그 마음을 생각해 보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성효(聖孝)에 감동되어 비록 굳이 사양하지는 못하였으나, 근일에는 침식(寢食)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채 지나고 있다. 지금 이러한 재이를 당하여 비록 당신에게 해당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궐내에서 이러한 재이가 있었으니, 무슨 마음으로 이 예를 받겠는가 하였다 한다."
하자, 이시수가 말하기를,
"지난번에는 간절하신 성효를 여러 날 동안 강청(强請)하였으나, 지금은 그때와 다릅니다. 이 뜻밖의 재이를 당하여 삼가하고 수성(修省)하여 공경히 천명(天命)을 두려워함으로써 하의를 오히려 풍형 예대(豐亨豫大)하는 것으로 여겨 정지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성의(聖意)를 흠앙(欽仰)하여 감격을 금할 수 없으니, 봉승(奉承)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삼가 성교를 받든 후에야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교가 이와 같으니, 봉승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왕대비전과 혜경궁의 하의를 마땅히 일체로 봉승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나 미망인이 이런 감당하지 못할 자리에 있은 지 4년이 되었지만, 일컬을 만한 덕(德)이 없었고 기록할 만한 정적(政績)이 없었으므로, 단지 밤낮으로 두려워하였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풍형 예대하는 일이 더욱 어찌 나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지난번 빈계(賓啓)한 후에 여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여 자세하게 누누이 뜻을 펴 보였었으나, 성효(聖孝)에 감동되고 뭇 신하들의 청에 따라 부득이 단지 칭하(稱賀)하는 것으로 억지로 따랐던 것이니, 이 또한 나의 본뜻이 아니었다. 지금 천만 뜻밖에 정전이 불타는 재이가 있었으므로, 마음이 두려워서 지금까지 안정되지 않고 있다. 진실로 그 까닭을 구명해 보건대, 곧 내가 덕이 적고 식견이 얕아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소치이니,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 보매 부끄러워서 침식(寢食)이 달갑지 않다. 만약 이 일에 대해 안연히 받는다면, 진실로 두려워하여 수성(修省)하는 뜻이 아니니, 내년 봄의 진하(陳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8일 기묘
소대하였다.
고 도사(都事) 나덕명(羅德明)과 충장공(忠壯公) 박영신(朴榮臣)의 처 이씨(李氏) 및 그 두 아들 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藩)을 정려(旌閭)하고, 고 참봉 나해륜(羅海崙)의 자손에게 급복(給復)하였다. 나덕명은 곧 충렬공(忠烈公) 나덕헌(羅德憲)의 백형(伯兄)으로서, 임진년159) 에 경성(鏡城)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와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과 싸워 여러번 승리를 거두었었다. 박영신은 갑자년160) 에 순국(殉國)한 후 그 처 이씨는 걸어서 난리 속에 나가 시신(屍身)을 헤쳐 보고서 떠메고 돌아왔는데,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통분스럽게 여겨 합장(合葬)하지 말도록 경계하자, 두 아들이 10년동안 칼을 갈아 오다가 마침내 흉수(凶讎)를 찔러 죽여 그 머리를 베어 들고 궐문에 나아가 복법(伏法)되기를 원하였다. 나해륜은 곧 나덕헌의 종질(從姪)로서, 정유 왜변 때 나이 겨우 15세였는데, 어버이를 엎고 난리 속에서 도망하다가 왜적을 만나 붙잡히자, 도리에 의거하여 애걸하니 왜적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놓아 보냈다. 그리고 갑자년 이괄(李适)의 역변(逆變)과 병자 호란 때161) 에는 의병을 일으켜 전란(戰亂)에 참가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유생의 상언으로 인하여 복계(覆啓)하여 포장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12월 20일 신사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주상이 바야흐로 유충(幼沖)하지만 성덕이 성대함을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한다. 내가 근일에 수성(修省)할 때 보았더니, 진어(進御)하는 물선(物膳)이 본래 가짓수가 많지 않았으며, 비록 몇 그릇이 넘는다 하더라도 진어하는 것은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근래에 또 재이를 만나 스스로 감손(減損)하였는데, 유충한 나이에 수성하는 도리를 알고 있으니, 진실로 기뻐할 만하다."
하였다. 좌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아뢰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1만 가지 허다한 일에 강학(講學)을 부지런히 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는데, 계옥(啓沃)하는 책임은 오로지 옥당(玉堂)에 있습니다. 교리 홍석주(洪奭周), 수찬 김매순(金邁淳), 교리 신현(申絢), 대교 이교신(李敎信)은 경술(經術)과 문예(文藝)가 있으니, 모두 경연(經筵)에 구임(久任)시키는 것이 합당합니다. 청컨대, 현재 관직(館職)을 띠고 있는 자는 다른 직임에 옮기게 하지 말고, 바야흐로 산함(散銜)에 있는 자는 곧 검의(檢擬)하게 할 것이며, 참하(參下)는 남상(南床)162) 에 환부(還付)해서 오로지 경서(經書)를 강론하고 논사(論思)하는 책임에 대해 마음을 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나라에 있어서 소중한 것은 언로(言路)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옛 명왕(明王)은 의승(疑丞)과 설어(暬御)의 잠계(箴誡)가 없지 않았으나, 오히려 언로가 넓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간쟁고(諫諍鼓)를 설치하고, 비방목(誹謗木)163) 을 세움으로써 온 천하의 말을 받아들였으니 보고 듣고서 사리에 통달하고 다스리는 기상이 화락했던 것은 오로지 이에 말미암습니다. 세강 속말(世降俗末)이 되어 이 법을 비록 갑자기 회복하기는 어렵겠지만, 시종신과 전함(前銜)의 신하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소회(所懷)가 있으면, 더욱 어떻게 군부(君父)의 앞에서 스스로 막힐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수성(修省)하는 때로 인하여 구언하시는 하교가 초야(草野)에 미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재이를 옮겨 상서로 만들 하나의 큰 기회인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비록 구언하는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종신과 전함의 상소는 특별히 금지하지 말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언로를 넓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바가 지극히 마땅하다. 전함의 상소는 이제부터 구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1일 임오
소대하였다.
12월 22일 계미
소대하였다.
12월 23일 갑신
소대하였다.
12월 24일 을유
소대하였다.
12월 25일 병술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세말(歲末)이 지나 새해가 되면, 주상은 춘추가 15세가 되고, 영특하신 자태가 날로 점차 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한 나라의 큰 경사이니,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좌의정 서용보(徐龍輔)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춘추가 한창 왕성하셔서 성덕이 날로 새로워지고 성학이 날로 성취되시니, 뭇 신하들의 기쁜 정성을 어떻게 죄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무릇 오늘날의 나라 일을 아래에서 아뢰면, 문득 그대로 따르는데, 이 일 저 일을 물론하고 묘당과 유사(有司)의 신하가 사리에 합당하도록 상확(商確)하여 아무 일은 순편하고 아무 폐단은 이혁(釐革)해야 한다는 등 처지에 따라 진달하여 각각 그 도리에 마땅하면, 위에서 따르지 않는 일이 없었다. 오늘날 성치(聖治)를 우러러 협찬(協贊)하는 것은 오직 아랫사람이 각각 그 직분을 다하는 데 있으니, 안으로 대소 신료로부터 밖으로 도신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만약 일에 따라 마음을 다해 부지런히 힘써 실행해 간다면, 백성들이 각기 그 생업을 즐겨하여 자연히 태평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고, 이어서 호조 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말하기를,
"숙선 옹주(淑善翁主)의 길례(吉禮)를 내년에는 마땅히 행해야 한다. 전 호조 판서 때 면세전(免稅田)을 획급하도록 이미 하교한 바가 있었고,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실려 있는 것은 병신년164) 후의 정식(定式)인데, 8백 결을 획급하라는 글이 있다. 지금 길월(吉月)이 멀지 않았으니, 더욱 속히 구획해서 제택(第宅) 값과 아울러 곧 내주는 것이 옳다."
하니, 이만수가 말하기를,
"전후에 내리신 자교(慈敎)가 만약 《대전(大典)》의 응당 행해야 할 일에 관계된다면, 유사(有司)의 신하가 어떻게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면세전을 절수하는 법례(法例)를 모두 굽어 통촉하지 못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대개 선묘(宣廟)임진년165) 이후로 여러 궁가(宮家)에서 의뢰할 바가 없는 것을 진념(軫念)하셔서 절수(折受)하는 법을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법이 오래 되어 폐단이 생기고 그 폐해가 소민(小民)들에게 미치게 되자, 현묘조(顯廟朝)에 이르러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건백(建白)한 바가 많았고 삼사(三司)에서 논계하여 한 달이 지나도록 서로 고집하니, 《대전(大典)》 직전법(職田法)을 모방하여 대군(大君)과 왕자(王子)는 3백 결을 절수하고, 공주(公主)와 옹주(翁主)는 2백 결을 절수하여 면세(免稅)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았었습니다. 또 유토 면세(有土免稅)166) 를 6백 결로 하되, 각 궁가로 하여금 진고하도록 허락하여 획급(劃給)하고, 인하여 돈[錢] 4천 냥을 대신 획급하게 하였는데, 숙묘조(肅廟朝)에 이르기까지 준행(遵行)하였습니다. 그런데 영묘조(英廟朝) 때 특별히 경비(經費)를 진념하셔서 이에 절반으로 줄여 2천 냥을 획급한 전례가 있었으니, 열성조의 성헌(成憲)은 이와 같은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초원(初元)의 출치(出治)하는 날에 더욱 마땅히 선왕의 성헌(成憲)을 거울삼아야 할 것이니, 조종조에서 행하지 않았던 일을 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듯합니다. 거듭 더 심사 숙고하소서."
하였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획급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6백 결을 유토 면세의 예에 의하여 획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이만수가 말하기를,
"무토 면세(無土免稅)는 국가의 전세(田稅)를 호조에서 획부(劃付)해 주는데, 흉년과 취재(臭載)167) 에 모두 가감(加減)이 없으면, 유토 면세(有土免稅)는 본궁으로 하여금 스스로 전토를 사게 하여 전세를 면제해 주었던 것이니, 전례가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유토 면세의 예에 의하여 획급한다면, 또한 전례가 없던 일에 관계됩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자전(慈殿)과 자궁(慈宮)의 공상(供上)을 재감(裁減)하여 기록한 종이를 호조 판서에게 내리고 말하기를,
"각 전·궁의 공상은 경신년168) 이후부터 내가 반드시 재감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이는 곧 내가 고심(苦心)했던 것이다. 각 전·궁의 공상은 모두 해당 전·궁의 공상으로 수용(需用)하게 하였으므로, 나인(內人)의 분료(分料)는 항상 부족한 것을 근심하였었다. 그런데 선조(先朝) 때 인원 왕후전(仁元王后殿)의 공상을 처음에는 대전(大殿)에 소속시켰었으나, 내가 들어와서 승봉(承奉)한 후로는 인하여 나에게 소속시켰으니, 지금 이미 40여 년이 되었지만 아직 부료(付料)하는 옛 나인이 7,8인 된다. 나는 이전(二殿)의 공상을 쓰고 있으나 오히려 넉넉하지 못하니, 다른 전·궁의 간핍(艱乏)함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공상의 수효를 기록해 들인 지 거의 다섯 달이 지났는데, 마음과 힘을 기울여 강구해서 지금 비로소 줄인 수효를 기록하여 내리는 것이니, 명년부터는 이에 의거하여 줄여서 지급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국용(國用)에 보태는 방도를 삼도록 하라."
하였다. 【줄인 것은 곧 대왕 대비전에 이속(移屬)한 나인 60인의 공상이었다.】 대왕 대비가 또 옹주방(翁主房)에서 절수하는 일로 호조 판서에게 말하기를,
"호조 판서가 지난(持難)하는 것은 애초에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옹주가 새로 태어난 초기에 만약 궁방(宮房)을 정하여 전결(田結)을 주었다면 정례(定例)에 의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달라서 넓혔다 좁혔다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공상을 제감(除減)한 수에 의하여 이송(移送)하는 것이 옳다."
하니, 이만수가 다시 아뢰기를,
"그 공가(貢價)는 오로지 국가의 경용(經用)을 위한 것인데, 지금 제감하라는 명이 특별히 공민(貢民)을 위한 성의(聖意)에서 나왔고, 이미 제감하였으니 이는 공민들이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이를 궁방(宮房)에 소속시킨다면, 이는 바로 어공(御供)의 수용을 덜어서 궁방에 이송하는 것이니, 사체가 진실로 불가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선왕조 때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았는데, 삼가고 두려워하시는 성념(聖念)이 항상 조종(祖宗)의 전장(典章)에 매어 있어서 한 번 조처하시고 한 번 거동하시는 사이에 혹시라도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하셨으니, 이는 신 등이 평일에 흠송(欽誦)하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자전의 하교를 받들건대, 선왕의 귀주(貴主)가 출합(出閤)할 때 모양을 이루기 어렵겠다고 하교하셨는데, 귀주의 궁양(宮樣)이 조금 넉넉지 못한 것이 조종의 전장을 받들어 준수하는 것으로 더불어 어느 편이 더 가볍고 더 소중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선조의 성덕(盛德)을 더욱 천양(闡揚)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열성조에서 귀주가, 여가(閭家)와 너무 가깝게 있다 하여 이것을 사줄 것을 청하자, 그 당시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여가를 어떻게 빼앗을 수 있겠는가? 만약 너무 가깝다면 갈대발을 내리고 큰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대저 천승(千乘)의 왕희(王姬)가 한낱 작은 집을 사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조종조의 성의(聖意)를 이에서 우러러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12월 26일 정해
친히 유지(諭旨)를 지어 우찬성 송환기(宋煥箕), 좨주 이직보(李直輔), 경연관 김일주(金日柱)·송치규(宋稚圭)를 돈독하게 불렀으니, 좌의정 서용보(徐龍輔)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송환기에게 유시하기를,
"지난번에 부주(附奏)한 것을 보건대,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는데, 첫 번째도 나의 정성이 얕은 때문이고 두 번째도 나의 정성이 얕은 때문이니, 부끄럽고 서운한 마음은 모두 효유(曉喩)할 바를 모르겠다. 지난번에 화신(火神)이 나를 경계하여 법전(法殿)에 불을 나게 했으니 두려워 떨며 마음이 불안하여 침식(寢食)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돌아보건대, 내가 변변치 못한 재질로서 오직 기구(耆耉)와 성인(成人)이 좌우에서 아침저녁으로 도와 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보필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경은 나를 괄시하여 나를 버려둔 채 감반(甘盤)169) 의 구우(舊遇)를 생각지 않고, 한갖 동강(東岡)170) 의 아조(雅操)만 지키고 있으니, 내가 장차 누구를 의뢰하고 누구에게 자문하여 수신(修身)하여 재해를 그치게 할 방도를 도모하겠는가? 경은 나의 간절한 마음을 양찰(諒察)하여 즉일로 생각을 바꾸고 나의 기갈이 들린 듯한 생각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직보에게 유시하기를,
"일전에 비답한 내용에서 나의 지극히 간절한 마음을 언급하였으니, 이미 깨달아 알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평소 무사한 날에도 경을 간절히 기다려 가뭄이 든 하늘에 구름을 쳐다보듯 할 뿐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재이를 당한 나머지 천심(天心)의 위노(威怒)에 대하여 대응할 바를 알지 못하고 인정(人情)이 두려워함에 대하여 진정(鎭定)할 바를 알지 못하니, 밤낮으로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당황하고 있다. 오로지 경에게 바라는 것은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고 지선(至善)의 도리를 나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내가 비록 정성이 얕아서 경을 초치할 수 없다 하더라도, 경은 선왕께서 경에 대한 권우(眷遇)가 융성했던 은혜를 유독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경은 모쪼록 양지(諒知)하기 바란다."
하였다. 김일주에게 유시하기를,
"《시경(詩經)》 겸가편(蒹葭篇)에 이르기를, ‘이른바 그 사람은 강물 저쪽에 있다네.’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그대를 말한 것이다. 매정한 자취가 더욱 멀어져 가매 잊혀지지 않는 생각이 더욱 간절한데, 부끄러워할 바는 나의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고상한 선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는 명철한 식견으로 도리어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대는 곧 그대 집안의 사람으로서 휴척(休戚)이 서로 관계되어 자별한 의리가 있는데, 더욱이 지금 법전(法殿)이 불탄 변고는 또 심상한 재이(災異)에 견줄 것이 아니다. 돌아보건대, 내가 허물을 생각하고 정사를 닦으며 재이가 변하여 상서가 되게 하는 도리를 어진이의 보도(輔導)에 바라지 않고 누구에게 바라겠는가? 불러들이는 사행이 여러 유현(儒賢)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는데, 집은 가까우나 사람은 먼 탄식이 그대에게 더욱 그러하다. 아침이 늦기 전에 그대가 올 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리겠다."
하였다. 송치규에게 유시하기를,
"보잘것없는 어린 내가 외람되게 당구(堂構)의 책임이 있어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면서도 견디어 내지 못하자, 과연 하늘이 재이를 보인 것이 남면(南面)하여 정사를 행하던 정전(正殿)에 있었으니, 두려워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안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성하는 요체(要諦)와 재이를 그치게 할 방책이 대천(大川)을 건너는 것처럼 아득히 멀기만 한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내가 어진이를 구해 자조(自助)하려는 마음이 또 장차 어떠하겠는가? 내가 스스로 변변치 못함을 달갑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진실로 덕에 밝지 못하여 감히 하늘이 명철(明哲)을 명하고 길흉(吉凶)을 명하는지 알 수 없으니, 오로지 그대 산림(山林)의 여러 사람들이 오고 오지 않는 데 따라 내가 세상이 다스려질는지 다스려지지 않을는지에 대해 점쳐 보고자 한다. 그대는 나의 고심(苦心)을 알아 빨리 달려올 것을 생각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이 나라의 흥망 성쇠(興亡盛衰)에 가장 크게 관계되는 것이요, 인재를 뽑는 방책은 오로지 주시관(主試官)과 전관(銓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신년171) 이후로 내가 신칙한 것이 정녕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그 사람을 뽑는 것이 매번 구차하게 사정(私情)에 따라 공의(公議)에 어긋남을 모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데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이에서 기강(紀綱)이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또한 재이를 부른 한 가지 단서가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이에 미치매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대저 위에서 엄정하지 못하면 아래에서 게을러지는 법이니, 이는 내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대정(大政)을 당하여 이렇게 하교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다시 전의 투식을 답습하여 대양(對揚)하는 바가 없다면, 이것이 어찌 오늘날 북면(北面)한 자가 할 바이겠는가? 그것을 양전(兩銓)에서는 자세히 알도록 하라. 외방의 도천(道薦)에 이르러서는 법의(法意)가 가볍지 않은데, 근래에 전관이 매번 추천에 든 자의 문벌이 한미하다 하여 애당초 서사(筮仕)에 검의(檢擬)하지 않아서 마침내 재주가 많고 행실이 뛰어난 자로 하여금 천거를 건너뛰어 헛되이 늙어가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법을 제정한 본의(本意)이겠는가? 또 생각해 보건대, 미관 말직(微官末職)으로 벼슬이 해면된 한산한 사람이 기색(枳塞)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일인데, 도리어 기색을 당하는 것은 진실로 세력이 없어, 종신토록 엄체(淹滯)되어 견복(甄復)될 희망이 끊어진 것이니, 이 또한 크게 화기(和氣)를 간범(干犯)하는 것이다. 이번의 도정을 위시하여 널리 공의를 채택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행하도록 하라. 이로 인하여 또 생각해 보건대, 영남 한 도는 본래 인재의 부고(府庫)로 일컬어져 왔는데, 간혹 세변(世變)을 겪어 비록 괘오(詿誤)한 잘못이 있으나, 그 가운데 또한 어찌 더러운 풍속에 물들지 않고 확고한 지조를 지킨 사람이 없겠는가? 더욱이 듣건대, 사학(邪學)의 일종들이 영남 밖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서 더욱 추로(鄒魯)의 유풍(遺風)이 아직 민멸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니, 그 가상함이 다른 도에 견줄 바가 아니다. 또 듣건대, 근년 이래로 영남 사람들은 오로지 거론(擧論)하는 가운데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니, 이와 같은데도 어찌 향우(向隅)의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번 대정에서는 전과 같이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되니, 더욱 채방(採訪)을 가하여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논할 것 없이 마땅한 데 따라 검의(檢擬)할 일을 또한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7일 무자
삼조(三朝)의 어진(御眞)을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하고, 이어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교리 홍석주(洪奭周)가 상소하여 옥서(玉署)에 구임(久任)하라는 명을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번 법전(法殿)이 불탔을 때를 당하여 특별히 구언(求言)하는 전교를 내리신 지 열흘이 지났으나, 공거(公車)의 아래에 적막하여 한 봉의 주본(奏本)조차 없으니, 어찌 조정이 청명하고 시절이 태평하여 말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지금의 세상에서 어그러진 일이 없지 않음이 또한 이미 분명합니다. 도도(滔滔)히 전해 내려온 풍습이 말하는 것을 꺼려하여, 한 사람을 논평하면 문득 이를 가리켜 경알(傾軋)한다고 하고, 한마디 발언하면 교묘하게 결점을 잡아낸다고 하며, 심지어는 과거의 구어(句語)를 들추어 내고 인용한 문자를 부회(傅會)하여 떠들썩하게 뭇사람들이 의심하여 떠들어대기를, ‘아무 구어(句語)는 무슨 일을 가리키는 것이고, 아무 문자는 무슨 뜻이 있다.’ 하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좌로 얽히고 우로 막혀 스스로 벗어날 곳이 없게 하니, 마침내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데 이르러 붓을 내던지고야 맙니다. 이러한 풍속을 고치지 않고 구언하는 길을 열고자 한다면, 어찌 뒤로 물러나면서 앞으로 나가기를 구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이미 고질이 된 풍속의 폐단을 진념(軫念)하시고 오히려 당언(讜言)이 들리지 않음을 두려워하여 먼저 허다하게 기휘(忌諱)하는 풍습을 일체 쓸어 버릴 것을 도모하시되, 들어주는 번거로움을 싫어함이 없고 촉범(觸犯)하는 과오(過誤)를 거역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유의(留意)’ 두 글자로서 으레 비답하는 말을 내리지 마시고, 반드시 실심(實心)으로 받아들여 실정(實政)에 이를 시행하소서. 신은 듣건대, ‘숭화전(崇華殿)이 불탔을 때에 고당융(高堂隆)이 말하기를, 「민역(民役)을 파하고 백성들을 돌려 보내며, 불탄 곳을 청소하고 건물을 세우지 않는다면 가화(嘉禾)·삽보(箑莆)가 반드시 그 땅에서 날 것이라」고 하였고, 옥청전(玉淸殿)과 소응전(昭應殿)이 불탔을 때에, 왕서(王曙)가 그 땅을 소제함으로써 천변(天變)에 응하기를 청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인군(人君)이 천계(天戒)를 공경히 받드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 반성하는 것을 앞세워야 마땅하며, 견노(譴怒)의 나머지에 갑자기 공역(工役)을 일으킬 수 없으니 대월(對越)하는 도리가 진실로 마땅히 그러합니다. 지금 이 법전은 진실로 중대한 바가 있으므로, 이궁(離宮)·별관(別館)처럼 폐기한 채 수즙(修葺)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니라 하나, 감선(減膳)의 기한도 차지 아니하여 영건(營建)하라는 명을 내리시고, 정초(定礎)의 역사를 며칠 안되어 또 시작하게 하시니, 신은 그 거조(擧措)의 사이에 상세하고 너그럽게 하는 데 흠결(欠缺)이 있어서 황천(皇天)의 경고에 우러러 답하는 뜻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또 영건하는 즈음에 역사는 크고 경비는 많은데, 만약 속히 완성하고자 한다면 수고로움이 반드시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깊이 구중 궁궐에 계시므로, 보실 수 있는 것은 오직 훗날 완성을 고한 후에 장대(壯大)하고 미려(美麗)하며 날아갈 듯하게 아름다운 경관(景觀)이 있을 뿐입니다. 나무와 돌을 운반하는 괴로움과 장정들을 징발하는 번거로움과 무릇 가난한 동네의 오막살이에 사는 백성들이 소요(騷擾)하여 쓰러져가는 정상에 이르러서는 삼가 성총(聖聰)이 또한 죄다 두루 아시지는 못하실까 두렵습니다. 큰 역사를 한번 일으키면 팔로(八路)가 모두 동요하는 외에 이목(耳目)이 미치지 않고 사려(思慮)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또 어떤 모양의 폐단이 이로 인하여 아울러 일어나는 일이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유사(有司)의 신하에게 명하여 충분히 강구(講究)하고 난만하게 상의(商議)하여 먼저 하나의 적합하고 마땅한 성규(成規)를 정한 다음 모쪼록 백성을 피폐하지 않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게 하는 데로 귀착한 후에 법도에 맞는 공역을 천천히 의논해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그대는 경악(經幄)에 오랫동안 있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으니, 사양하지 말라. 덧붙여 진달한 영건하는 일에 있어서 백성을 피폐하게 하지 않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은 진실로 현재 절실하고도 마땅한 의논이니, 영건하는 신하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겠다."
하였다.
12월 28일 기축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거두고 환정(還政)172) 하였다. 이때 일종의 괴귀(怪鬼)한 무리가 좌의정 서용보(徐龍輔)를 반드시 제거하려고 전함(前銜)의 대신(臺臣) 조진정(趙鎭井)을 사주하여 소장을 지어서 헐뜯어 무함하게 하였으나, 재일(齋日)을 당하여 입철(入徹)하지 못하고 도로 가지고 갔는데, 서용보가 이를 은밀히 듣고는 빈대(賓對)의 명을 내렸지만,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대왕 대비가 좌상이 나오지 않은 연고를 물으니 우의정 김관주(金觀柱)가 그 대략을 아뢰었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지금이 어떠한 시기인가? 믿는 자는 오로지 좌상 한 사람뿐인데, 이 무리가 반드시 공척(攻斥)하여 제거하고자 하였으니,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이 이와 같고서야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하니, 김관주(金觀柱)와 판부사 이시수(李時秀)가 드러나는 대로 엄중히 처분하여 훗날을 징계할 것을 청하였다.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이것은 유언 비어(流言蜚語)와 다름이 없어서 족히 책망할 말도 못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이 이것 때문에 스스로 인혐(引嫌)하고 있으니, 매우 개연(慨然)스럽게 여긴다."
하고, 이어서 돈독하게 부른 다음 그가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려 차대를 행하라고 명하니 서용보가 명을 받들고 등대(登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차대를 오늘로 앞당겨 정한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경신년173) 의 창황(蒼黃)하고 망극(罔極)한 날을 당하여 수렴 청정(垂簾聽政)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내가 본래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이 없는데다가 또 여러 해 동안 고질(痼疾)을 앓아 왔으므로, 보통 사람처럼 일을 책임질 수 없었던 것이 오래 되었다. 불행하게도 망극한 때를 당하여 부득이 종국(宗國)을 위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담당하여 끌어온 지 3년이 되어 가례(嘉禮)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니, 이 마음의 기쁨이 또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나의 처음 뜻은 새해에 곧 수렴 청정을 거두려 했었는데, 그 사이에 큰 재이(災異)를 당하였으니, 시기(時期)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써 마땅히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바로 비상(非常)한 일인데, 이런 비상한 재이가 있게 된 것이다. 올해는 주상의 보령(寶齡)이 오히려 15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새해 초두에 곧 수렴 청정을 거두려 하였다. 지금 새해가 며칠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러한 하교가 있게 된 것은 수렴 청정의 칭호를 또한 새해에 이르기까지 끌지 않으려는 때문이다. 주상의 슬기로운 모습이 일찍 성취되고 성학(聖學)이 날로 진보되었으니,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할 수 있게 되어서 큰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부덕(否德)하고 또한 지식이 없는데도 오랫동안 이 책임을 담당하여 조상(朝象)은 진안(鎭安)된 것이 없고 기강(紀綱)은 진쇄(振刷)된 것이 없었으니, 항상 부끄러워하였는데, 과연 재이가 여러 번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서북(西北)이 불탄 재이와 사고(社庫)가 불탄 변고는 모두 비상(非常)한 일에 관계되는데다 정전(正殿)이 불타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또 마땅히 비가 내릴 시기에 비가 내리지 않고 눈이 내릴 시기에 눈이 내리지 않았으니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는 마땅하지 못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이러한 재이를 부른 것이다. 새해에는 다시 수렴 청정하지 않으려 한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통유(洞諭)하고 차대를 앞당겨 정한 것이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나 소자(小子)가 충년(沖年)에 있으면서 우러러 자전(慈殿)을 의지하여 국사(國事)로써 노고를 끼쳐드려 오랫동안 효도(孝道)를 어겨 왔으니, 하정(下情)에 항상 황송(惶悚)하였습니다만, 이제 환정(還政)의 하교가 계시니, 우러러 이양(頤養)하는 방도를 생각한다면 비록 다행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오직 내가 국사(國事)에 생소하여 큰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을까 두려우니, 이것이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경사스러운 날이다. 주상의 나이가 곧 15세에 차게 되어 이제 친히 정사를 행하게 되었으니, 경들은 단지 기뻐하여 축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이시수 등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국가가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이것이 누구의 공덕(功德)입니까? 선조(先朝)의 유업을 주고받을 때를 당하여 묵묵히 대책(大策)을 협찬(協贊)하여 성궁(聖躬)을 보호하신 것은 곧 우리 자성 전하의 공이었고, 기미에 밝아 간사한 싹을 꺾어 종사(宗社)를 부지하여 안정시킴으로써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을 계도(啓導)한 것도 또한 우리 자성의 공이었습니다. 경신년174) 에 천붕(天崩)의 슬픔을 당하여 애통하고 황급함이 갑자기 닥쳐 국사(國事)를 어찌할 바를 몰라 신 등이 눈물을 흘리며 청하자, 자성께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굽어 따르시고, 동조(東朝)에 광림(光臨)하여 조용히 온화하게 수렴 청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초원(初元)의 정사를 인도하여 나라가 반석(盤石)같이 공고해지고, 의리를 천명(闡明)하여 일성(日星)같이 밝히셨습니다. 간흉(奸凶)을 물리쳐 조정이 청명(淸明)해지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덕화(德化)가 충만해졌습니다. 옛 성왕(聖王)과 의벽(懿辟)을 거슬러 논하건대, 이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었으니 온 나라에서 우러러 바라보는 바이고, 전하께서도 우러러 본받는 바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셔서 예학(睿學)이 날로 성취되고 있으니, 이제 서정(庶政)을 친히 총섭(總攝)하심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성께서는 만기(萬機)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천승(千乘)의 봉양을 누리시니, 우러러 생각하건대, 복록(福祿)의 성대함이 또한 더불어 견줄 데가 없는 것입니다. 자교(慈敎)를 내리시니 흠앙(欽仰)하고 송축(頌祝)하며 기뻐서 춤추게 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을 거둔다는 언교(諺敎)를 내리고, 승지로 하여금 읽게 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미망인이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담당해 온 지 이미 4년이 되었다. 내가 궁중의 한낱 부인(婦人)으로서 무슨 지식(知識)과 덕량(德量)이 있어서 이를 담당할 수 있었겠는가마는, 열성조(列聖朝)부터 선왕(先王)이 불행히 일찍 승하하여 나와 같은 처지를 만나면, 종사(宗社)를 위해 감히 사양하지 못했던 경우가 이미 구전(舊典)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내가 또한 힘써 따르고 감히 사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3,4년 이래로 스스로 과덕(寡德)을 돌아보건대, 조금도 국사(國事)에 도움되는 것이 없었고, 한갓 그 책임에 부응하지 못하는 허물만 쌓였으니, 백성들이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곧 나의 허물이고, 조상(朝象)이 해이해진 것도 곧 나의 허물이며, 세도(世道)가 안정되지 않는 것도 곧 나의 허물이요, 기강(紀綱)이 날로 해이해져서 인심을 수습할 수 없게 된 것도 내가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허물 아님이 없으니, 이 때문에 하늘이 재이를 내린 것이다. 올해의 농사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끼니를 잇기 어려운 근심이 있는데, 초여름에 서북(西北)에서 며칠 사이에 화재가 연달아 일어났고, 또 지난달에는 사고(社庫)가 불탔다. 여러 가지로 재이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진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수백 년 동안 임어(臨御)했던 정전(正殿)이 몇 시간 사이에 죄다 불타 버렸으니, 재이가 계속됨이 어떻게 이토록 극도에 이르는 것인가? 지난 사첩(史牒)을 상고해 보아도 드물게 있는 일인데, 진실로 그 까닭을 구명해 보면 내가 부덕한 몸으로 당치 않은 지위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더욱이 지금 주상의 춘추가 장성하였고, 어진 자질(資質)이 하늘에서 태어나 덕성(德性)이 날로 성취되고 성학(聖學)이 날로 진취되었으니, 만기(萬機)·서정(庶政)을 족히 살펴서 모두 결단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처지로 어떻게 한결같이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서 국체(國體)를 존중하여 대경(大經)을 바로잡기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상이 누누이 억지로 만류하며 사지(辭旨)가 간절하고 정리(情理)가 측은하니, 내가 이를 듣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형편에 이르러 내가 어떻게 차마 한갓 나의 뜻만 지킴으로써 주상이 지극한 정성으로 간청하는 성의(聖意)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 수렴 청정을 거두되, 서정(庶政) 외에 군국(軍國)에 관한 대정령(大政令)과 형상(刑賞)에 관한 대처분(大處分)과 의리에 크게 관계되는 등의 일은 내가 우선 참여하여 논함으로써 주상이 홀로 근심하는 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자세히 알고 있도록 하라."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 이후로 믿는 것은 오로지 경들뿐이다. 내가 진실로 부덕하고 지식이 없어서 세상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는데, 이제 오로지 경들만 믿는다. 이제부터 다시는 면유(面諭)하지 못할 형편이니, 더욱 힘써서 모쪼록 한층 더 공변되고 정직한 마음으로 나의 주상을 보도(輔導)하도록 하라. 임금을 보도하는 도리는 오로지 백성을 돌보는 데 있으니, 방심하지 말도록 하라. 오늘날 세도는 무너져 어지럽고 인심은 함닉(陷溺)되었는데, 만약 주상의 보주(寶籌)가 더욱 장성하여 만기(萬機)를 친히 재단(裁斷)하기에 이른 후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마땅히 한마음으로 함께 힘써서 단지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도만 생각해야 할 것이니,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는 민폐를 제거하는 데 달려 있다. 이후로는 영구히 면칙(面飭)하는 길이 막히게 될 것이니, 모든 일을 오로지 대신들만 믿을 따름이다."
하니, 이시수 등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삼가 마땅히 마음속에 새겨서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춘추가 정성(鼎盛)하셔서 친히 서정(庶政)을 총찰(總察)하시며 자전(慈殿)을 봉양하게 되었으니, 자덕(慈德)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종사(宗社)의 막대한 경사이므로, 금옥(金玉)에 새겨서 자휘(慈徽)를 유양(揄揚)할 도리를 신 등이 우러러 청하니, 위로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반포해야 합니다.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 혜경궁에 경외(京外)에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진하(陳賀)하는 등의 절목을 해조로 하여금 날짜를 가려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제 이미 수렴 청정을 거두었으니, 명일부터는 써서 들이던 모든 공사(公事)를 들이지 말 것이며, 언서(諺書)로 베껴 쓰던 것도 또한 제외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매번 태묘(太廟)의 제향(祭享)을 친히 거행하신 후에 내가 근력(筋力)이 피로하실 것을 염려하였더니, 선왕이 말씀하시기를, ‘과연 근력이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실수(室數)가 점점 많아지면, 이후의 사왕(嗣王)은 진실로 예를 행하기 어렵겠습니다. 그 절목(節目) 사이에 번거롭고 잗단 것으로 제외시킬 만한 것은 제외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교하였는데, 그후 변통한 일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지금은 15실(室)이 되니, 만약 친히 제향할 때를 당하면 성체(聖體)가 피로할까 진실로 민망스럽다. 내가 매번 정신(廷臣)들에게 이 하교를 전하여 절목을 덜어서 간편하게 하는 방도를 삼으려 하였으나, 아직도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무릇 여염집의 대종(大宗)에 있어서도 봉사(奉祀)와 다례(茶禮)의 절차는 오히려 이것이 행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욱이 태묘의 각실에 친히 행하는 예이겠는가? 이후로 친히 제향하는 예절(禮節)은 미리 제감(除減)하는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지금 대신의 말을 듣건대, 어찌 이와 같은 괴귀(怪鬼)의 무리가 있겠는가? 반드시 조신(朝紳)들을 일망 타진하여 남의 국가에 화란(禍亂)을 빚어내고자 하였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싸늘해지고 뼛골이 떨린다. 전 군수 김진정(金鎭井)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고,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에 정배한 유생은 반장(泮長)으로 하여금 실상을 조사하여 절도에 충군(充軍)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제(御製)를 교정한 각신(閣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12월 29일 경인
좌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4년 동안 상직(相職)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시위 소찬(尸位素餐)175) 하여 돌보아 주신 은혜를 저버린 채 한갓 죄만 쌓아 왔으므로, 귀신과 사람이 진노(嗔怒)하게 되었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하여 일을 그르쳤으니, 반드시 다행스러울 리가 없는데, 과연 탄핵하는 소장과 유언 비어가 나돌아 온갖 질타가 잇달아 모여들었습니다. 비록 그 죄를 성토하는 말들이 모두 상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단지 도로에서 유전(流傳)하는 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반드시 멸종(滅種)시키고야 말려고 했음이 분명합니다. 신의 몸은 가루가 되더라도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못되지만, 신이 불초함으로 인하여 조정에 오욕(汚辱)을 끼치고 세교(世敎)를 더럽힌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몸을 어루만지며 부끄럽고도 분통하여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침 이러한 일과 기회를 당하여 감히 달리 돌아볼 것이 없었는데, 잇달아 자지(慈旨)를 받들건대, 이 세상에 보기 드문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셨으므로, 비록 염치를 무릅쓰고 등연(登筵)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얼굴이 달아오르고 등에 땀이 흘러, 자취를 돌아보매 더욱 부끄러워졌습니다. 이제 만약 인연하여 한 번 나온 것을 핑계대어 마침내 다시 득의 양양하게 조정에 나아간다면, 신이 비록 전혀 염치가 없다 하더라도 장차 팔방에서 모두 쳐다보며 백세토록 비난하는 데에야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본직과 겸대(兼帶)하고 있던 여러 직임을 빨리 삭탈(削奪)하라는 명을 내리시고, 이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신의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의논하여 인신으로서 불충(不忠)한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떠한 흉괴(凶怪)의 무리가 음험하고도 참혹한 계책을 경영하고 배포하여 여지없이 조정을 구무(構誣)한단 말인가? 이는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니, 통분스럽고도 가증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경은 보상(輔相)의 직임에 있으면서 어찌하여 음사(陰邪)한 무리를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이와 같이 자책하는 것인가? 이러한 시기에 믿을 사람은 오직 경뿐이고, 의뢰할 사람도 오직 경뿐인데, 내가 어떻게 경을 버릴 수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곧 나와서 정사를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