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6권 순조4년 1804년 2월
2월 2일 임술
대사간 이문회(李文會)가 상소하여 홍이유(洪履猷)·이동만(李東萬)·조진정(趙鎭井)의 일을 논하고, 이어 말하기를,
"사간 현중조(玄重祚)의 처음 상소에 이미 ‘이 옥사(獄事)의 마무리는 애초 지난(遲難)해 할 것이 아니었다.’ 하였고, 또 ‘속히 처분해야 한다.’ 하였으며, 또 ‘급급하게 엄히 감률(勘律)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바쁘고 급한 단서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제 국사(鞫事)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즈음에 반드시 속히 마무리 짓고자 하여 중언 부언하기까지 하는 것입니까? 이에서 끌어댄 것이 죄다 드러나고 숨은 정상이 깡그리 탄로남을 두려워함을 볼 수 있습니다. 징토(懲討)하는 글을 가탁하여 암암리에 의란(疑亂)시킬 계책을 꾸몄으니, 정적(情跡)을 가질 수 없고 간폐(肝肺)가 보이는 듯합니다. 청컨대 귀양보내는 법을 베푸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 【장령 강휘옥(姜彙鈺)과 헌납 신성진(愼性眞)이다.】 에서 새로 아뢰어 물고(物故)한 죄인 조시위(趙時偉)의 여러 아들들에게 여러 곳으로 흩어 귀양보내는 법을 베풀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3일 계해
소대(召對)하였다.
2월 5일 을축
우의정 김관주(金觀柱)를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도성을 나가는 것은 아주 정도에 지나친 일이다. 접때 소본(疏本)을 보았더니, ‘수렴(垂簾) 때는 정승이 되고 철렴(撤簾) 때는 떠날 것을 구한다.’ 했는데, 과연 어디에 의거함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철렴한 뒤에는 대신(大臣)들이 모두 행공(行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하니, 김관주가 말하기를,
"신은 본디 주수(株守)033) 하고 있는 터이라 어떻게 말을 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글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에게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이에 비슷한 점이 있었다면, 이 어찌 신하의 본분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전(慈殿)의 존호(尊號)를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경은 모름지기 판부사와 더불어 즉시 빈계(賓啓)하도록 하라. 나 또한 마땅히 대내에서 우러러 청하겠노라."
하니, 김관주가 말하기를,
"존호는 곧 막중·막대한 전례(典禮)인지라 하정(下情)이 갈망하며 바야흐로 우러러 청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 이 일찍이 이 일로 단서를 꺼내었다. 이제 출사를 권면하는 때를 당하였는데다 존호를 청하는 일이 한시가 급한데, 어찌하여 들어오지 않는 것인가?"
하니, 김관주가 말하기를,
"동료 정승이 들어오기 전에는 무릇 묘당의 계획에 관계된 일을 신은 감히 거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 또한 어찌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니, 김관주가 말하기를,
"지금 존호를 올리고자 하는 일은 보통의 예(例)로 말할 수가 없고, 그 밖의 여러 사무도 실로 혼자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2월 6일 병인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오직 우리 자성(慈聖) 전하께서는 태임(太任)·태사(太姒)의 덕에다 요(堯)·순(舜)의 공을 겸하시어 한 나라에 국모(國母)로 임하신 지 이제 46년이 되었습니다. 성조(聖祖)의 50여 년의 치적을 빛나게 도운 것에는 황상(黃裳)034) ·현담(玄紞)035) 의 의절(儀節)과 규목(樛木)036) ·갈담(葛覃)037) 의 찬송이 궁곤(宮壼)에서부터 드러나 온 천지에 덮혔으니, 《시경》·《서경》에 실린 바로는 짝할 수 없었으니 우리 자성께서 그렇게 함이 있었으며, 을미년038) ·병신년039) 왕위를 주고받던 날 조용히 자충(慈衷)을 운용하여 영고(寧考)를 보호하고 도우실 것을 생각하시어 뭇 흉적(凶賊)들이 무지개처럼 가림을 쳐부수고 종사(宗社)를 안정시켜 반석처럼 공고히 하였으니 우리 자성께서 그렇게 함이 있었으며, 역종(逆宗)·권흉(權凶)이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듯 지렁이가 서려 있듯 하여 숨은 화(禍)가 호흡지간에 닥쳤을 때 열 줄의 자륜(慈綸)으로 토복(討復)의 의리를 환히 내걸고 길례(吉禮)·가례(嘉禮)를 크게 거행하여 경술년040) 에 성인을 낳으시는 경사를 도타이 맞이하게 하였으니 우리 자성께서 그렇게 함이 있었으며, 경신년041) 에 천붕(天崩)의 변고를 당하자 국세(國勢)는 위기에 처하고 인심은 물결처럼 위태위태하여 안정될 수 없었는데, 조용히 염유(簾帷)에 임하시어 우리 성궁(聖躬)을 보호하시매 4백 년 종국(宗國)이 이미 위험했던 것을 한번 전이(轉移)하는 사이에 다시 안정되게 하였으니, 우리 자성께서 그렇게 함이 있었습니다. 조정에 임하신 4년 동안 추술(追述)한 것은 선왕의 뜻과 사업이요, 천명한 것은 선왕의 대의(大義)였습니다. 따라서 흉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간사한 소인들을 베어, 하늘을 뒤덮던 사기(邪氣)를 쓸어버리고 이륜(彛倫)을 해처럼 환히 내거니, 온 천하가 편안해졌고 조야(朝野)가 청명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가지 정사 한 가지 명령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하늘의 법칙에 부합되었으니, 가모(嘉謨)·휘열(徽烈)은 역사에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정도이고, 혜택이 오막살이에까지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이 위로 저 하늘을 감동시키매, 복록이 불어나 이르고 상서로운 운수가 끝이 없으니, 아름답고도 성대합니다. 신 등의 졸렬하고 어눌한 글로는 진실로 능히 만분의 일도 형용해 낼 수 없으며, 옛날에 일컬은 바 ‘여자 중의 요(堯)·순(舜)’인들 또한 어찌 족히 오늘의 자덕(慈德)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성주(聖籌)가 바야흐로 한창 때가 되자, 자심(慈心)이 기뻐하시며 밝으신 명을 널리 선동하고 이에 염의(簾儀)를 거두시어 왕무(王務)의 근심과 노고를 벗어 버리시고 내조(內朝)에서 융성하게 봉양하심에 응하시니, 이것은 더욱 역사책이 생긴 이래로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입니다. 또 더구나 올해의 갑자(甲子)는 자성의 보주(寶籌)가 육순이 되는 해입니다. 옛날 우리 영고(寧考)께서 재유(在宥)042) 하시던 날 이 해를 기다려 아름다움을 드날리고 융성하게 높이고자 계획하시어 신린(臣隣)에게 밝게 조명(詔命)을 내리신 적이 있었습니다. 천서(天序)가 이제 돌아와 옥음(玉音)이 그대로 들리는 듯한데, 우리 자성의 옛날의 생각하시는 거룩함으로 우리 성상의 뜻을 계술(繼述)하시려는 효사(孝思)를 생각하시어 척연(戚然)043) 감동하시고, 유연(犁然)044) 하게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셨을 것이니, 어찌 신들의 말을 기다리시겠습니까? 임술년045) 의 존호(尊號) 올리기를 청했던 것은 상전(常典)에 있는 바였으나 자성의 뜻이 겸양만을 고집하시어 마침내 허락을 아끼셨고, 원일(元日)에 호숭(呼嵩)046) 하는 예(禮)는 길일(吉日)을 이미 잡았지만 자성의 마음이 재이(災異)에 놀란 나머지 곧 그만둘 것을 명하셨습니다. 신들은 비록 자성의 뜻에 순종하여 억지로 물러나 기다리긴 했습니다만, 군정(群情)의 억울함과 방례(邦禮)의 이지러짐이 또한 이미 많았습니다. 이번에 자덕(慈德)이 더욱 빛나고 자열(慈烈)이 더욱 넓어졌으며 자령(慈齡)이 더욱 높아지고 자성의 음덕[慈庥]이 더욱 성대해져 이처럼 천 년에 한번 있을 기회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랜 뒤 열조(列朝)에서 응당 행했던 법을 상고해 본다면, 어찌 오늘날 나라에 신하가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성상께서 어제 연석(筵席)에서 하교하신 까닭이며, 신들이 오늘 청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우러러 자성께 아뢰어 빨리 욕례(縟禮)047) 를 거행케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성의 마음이 지나치게 겸양하시어 즉시 윤허하지 아니하시므로, 바야흐로 몹시 번민하고 답답하다."
하였다.
임기철(林耆喆)을 공조 판서로, 정대용(鄭大容)을 한성부 판윤으로, 조상진(趙尙鎭)을 판의금부사로, 심영(沈鑏)을 함경남도 절도사로 삼았다.
2월 7일 정묘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생기(牲器)를 살펴보고 이어 재숙(齋宿)하였다.
2월 8일 무진
사직 대제(社稷大祭)를 행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누누이 우러러 청하여 지금 비로소 윤허를 받았으니, 기쁨과 다행함을 견딜 수 없다."
하였다.
이경일(李敬一)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관주(金觀柱)를 상호 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로, 이만수(李晩秀)·윤광보(尹光普)·임기철(林耆喆)을 제조로, 남공철(南公轍)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지평 강세백(姜世白)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하면서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이어 기강이 서지 않은 것과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은 것과 백성들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형편과 탐오(貪汚)가 날마다 마구 저질러짐과 경용(經用)의 넉넉하지 아니함에 대해 논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내가 심히 가상하게 여기노라. 모두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2월 9일 기사
책보(冊寶)를 올리며 내정(內庭)에서 행례(行禮)할 때에 고사(瞽師)·여령(女伶)은 그냥 두라고 명하였다.
화성(華城)의 유생(儒生) 우하영(禹夏永)이 상소하고 책자를 올렸는데, 《천일록(千一錄)》이라 하였다. 조목별로 백성과 나랏일에 대해 진달한 것인데, 비답하기를,
"네가 초야의 소원(疏遠)한 처지로서 이런 양잠(良箴)을 말하니, 그 마음이 가상하다. 펴보고 나서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채택토록 하겠다."
하였다.
2월 10일 경오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직접 대왕 대비의 존호 단자(尊號單子)를 받고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이르기를,
"천승(千乘)으로 높이 봉양함을 꾸미노니 복록이 더욱 새롭고, 두 글자의 드러난 이름을 올리니 욕례(縟禮)를 크게 정하게 되었습니다. 허락하시는 음성이 처음 내려지자 기뻐하는 소리가 널리 솟구쳐 올랐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 대왕 대비 전하(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大王大妃殿下)께서는 간책(簡策)이 있은 이래 공덕이 더할 수 없이 높으셨고, 염유(簾帷)에 임어(臨御)하신 지 4년 동안 종팽(宗祊)048) 은 태산·반석의 기반을 다졌고, 해주(海籌)049) 가 육순(六旬)에 더해지자 장락궁(長樂宮)에서 강릉(岡陵)의 복을 누리시게 되었습니다. 아름답게도 자열(慈烈)이 일을 벗어 놓으심에 더욱 빛나고, 다행하게도 보잘것없는 정성은 아름다움을 선양하는 일을 얻어 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화축(華祝)050) 의 사양하는 것과 같이 하여 겸양하시는 뜻에 힘쓰시다가 이제 기주(箕疇)051) 의 법을 받아들이시니, 이에 숭보(崇報)의 의식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양책(颺冊)하는 길일(吉日)을 장차 잡고 배전(拜箋)의 이전(彛典)을 먼저 거행하여 삼가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여 ‘광헌(光獻)’이라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에 휴명(休命)을 맞이하여 여정(輿情)이 답하신다면, 옥간(玉簡)·금장(金章)을 구여(九如)052) 의 가송(嘉頌)에 어울리고 남산(南山)·북두(北斗)는 만년토록 지극한 기쁨을 바칠 것입니다."
하였다.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77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어문학(語文學)
[註 048] 종팽(宗祊) : 종묘의 제사.[註 049] 해주(海籌) : 해옥 첨주(海屋添籌)의 준말. 전설에 의하면 해상(海上)의 신선이 사는 집에 선학(仙鶴)이 해마다 주(籌:산대) 한 개씩을 물고 온다는 것으로, 남의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말임.[註 050] 화축(華祝) : 화(華) 땅의 사람이 요(堯)를 위하여 수(壽)·부(富)·다남자(多男子)를 축원할 것을 청한 고사인데, 요는 모두 사양하였음.[註 051] 기주(箕疇) : 기자(箕子)의 홍범 구주(洪範九疇)를 뜻한 것으로서,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을 설명한 것인데, 여기서는 오복(五福)에 대한 것을 말함.[註 052] 구여(九如) :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장(天保章)에서 아홉 여(如) 자에 대한 뜻을 따온 것으로, 지금 사람들이 축송(祝頌)하는 말로 쓰임.
2월 12일 임신
상호군(上護軍) 이병정(李秉鼎)이 졸(卒)하였다. 이병정은 완산(完山) 사람으로, 판서 이창수(李昌壽)의 아들이다. 빼어난 재주가 있고 문사(文辭)가 넉넉하여 민첩한지라, 일찍이 현사(顯仕)를 역임하여 이조 판서와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력을 붙좇고 이(利)를 좋아해 가는 곳마다 탐욕스러웠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침을 뱉고 욕했지만 태연스레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혹 기안(氣岸)이 있다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2월 13일 계유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서매수(徐邁修), 이조 참판 김면주(金勉柱), 이조 참의 박종래(朴宗來), 병조 판서 김달순(金達淳)이다.】 정동관(鄭東觀)을 이조 참의로, 황승원(黃昇源)을 판의금부사로, 정대용(鄭大容)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경일(李敬一)을 한성부 판윤으로, 이장철(李長喆)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대교(待敎) 이교신(李敎信)을 체직하고, 이어 회권(會圈)할 것을 명하여 김조순(金祖淳)과 이만수(李晩秀)를 내각(內閣)의 검교 제학(檢校提學)으로 삼았다.
2월 14일 갑술
내각(內閣) 【검교 제학 김조순(金祖淳)·이만수(李晩秀), 직제학(直提學) 김근순(金近淳), 검교 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박종경(朴宗慶)이다.】 회권(會圈)을 하였다. 직각의 5점(點)에 김매순(金邁淳), 4점에 오연상(吳淵常)·홍석주(洪奭周), 대교(待敎)의 5점에 박종훈(朴宗薰), 4점에 조석정(曹錫正)이었다. 김매순을 규장각 직각으로, 박종훈을 대교로 삼았다.
2월 17일 정축
직각 김매순(金邁淳)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종부(從父) 형제가 동시에 각함(閣銜)을 차지함은 규장각을 설치한 뒤 처음 있는 일입니다. 격헌(格憲)으로 헤아려 보건대, 잠시라도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각직(閣職)은 본래 상피(相避)가 없는 법이니, 어찌 구애될 것이 있으랴? 하지만 우선 체직을 허락한다."
하였다.
2월 18일 무인
임희존(任希存)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19일 기묘
명릉(明陵)·홍릉(弘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환궁하는 길에 양철평(梁鐵坪)에 이르러 대열례(大閱禮)를 행하였다.
2월 20일 경진
예조에서 유생(儒生)의 상언(上言)이라고 하면서 단종조(端宗朝)의 세 상신(相臣)인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에게 작설(綽楔)053) 의 법을 베풀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1일 신사
동지 정사(冬至正使) 민태혁(閔台爀) 등이 연경(燕京)을 떠나 출발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다.
윤대(輪對)하였다.
2월 22일 임오
식년 감시(式年監試)의 복시(覆試)를 설행(設行)하였다.
윤대하였다.
2월 23일 계미
소대(召對)하였다.
초토신(草土臣)054) 이노춘(李魯春)이 상소하여 그 아들 전 대교(待敎) 이교신(李敎信)을 그의 죽은 형 이노전(李魯傳)의 후사로 삼게 해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노춘은 지난달에 어머니 상(喪)이 있어 마땅히 이교신이 승중(承重)055) 토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2월 24일 갑신
검교 제학(檢校提學)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사국(史局)의 교정 당상(校正堂上)은 으레 문임(文任)으로 차출하기 때문에 사고 없이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아주 적습니다. 각신(閣臣) 당상관 이상을 모두 교정 당상에 차임하고, 비록 외임(外任)에 있다 하더라도 일체로 차하(差下)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대하였다.
소대하였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숙선 옹주방(淑善翁主房)의 면세(免稅)는 마땅히 8백 결(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토지가 없는 2백 결은 원결(元結)로 획송(劃送)하고 토지가 있는 6백 결은 모두 해궁(該宮)에서 토지를 산 뒤에 면세하거나 혹은 양안(量案) 밖의 더 경작하고 있는 것을 절수(折受)056)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토지가 없는 것으로 일제히 획송하였으니, 곧 법식(法式)을 벗어난 것이라 처음으로 만들어 행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원칙을 지키자는 말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나의 오늘날 마음으로 어찌 이 궁방(宮房)에 대해 수백 결을 아낄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특별히 전례를 뽑아버리고 맞추어 획송하도록 하되, 뒷날 다른 궁방이 만약 혹시라도 이것을 끌어들여 예로 삼는다면 유사(有司)의 신하가 법에 의거하여 엄격하게 막는다는 일을 수교(受敎)에 실어 영원히 준수하는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 【대사간 이문회(李文會), 집의 이기경(李基慶), 장령 유한인(兪漢人)·강휘옥(姜彙鈺), 헌납 신성진(愼性眞)이다.】 에서 연명 상소하여 이동만(李東萬)의 공초(供招) 가운데서 응당 신문해야 할 여러 사람들을 한결같이 엄하게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니,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습관을 책망하고 파직했다.
응교 김재창(金在昌) 등을 파직하였다. 그 연명 상소에서 여러 대신(臺臣)을 서용하지 아니함을 구원했기 때문인데, 곧 승지 남공철(南公轍) 등의 말로 인해 중지되었다.
종성부(鍾城府)에 정배(定配)한 죄인 박제가(朴齊家)와 북청부(北靑府)에 정배한 죄인 이석하(李錫夏)를 특별히 풀어 주게 했음에도 해를 넘긴 채 아직도 거행하지 않았다 하여 그 당시의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파직하라 명하고 즉시 풀어 주게 하였다.
2월 25일 을유
판의금부사 황승원(黃昇源)이 진소(陳疏)하여 성명(成命)을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27일 정해
이서구(李書九)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민창혁(閔昌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의모(洪義謨)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2월 28일 무자
친히 명정전(明政殿)에서 대왕 대비의 책(冊)과 인(印)을 올리고, 경복전(景福殿)에서 치사(致詞)·전문(箋文)·표리(表裏)057) 를 올렸다. 명정전으로 도로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사유(赦宥)를 반포하였다.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자열(慈烈)은 견줄 데 없어 세 번 넓은 기반을 안정시키셨고, 모의(母儀)는 더욱 높아 여덟 번 현책(顯冊)에 드날리셨으며, 선왕의 뜻을 계술하여 위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밝히셨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 대왕 대비 전하(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大王大妃殿下)께서는 덕이 후비(后妃)에 으뜸이시고 공은 천지의 조화에 참여하셨습니다. 양성(兩聖)께서 용비(龍飛)058) 하신 운수를 도와 억만년 종팽(宗祊)을 크게 붙들었으며, 적의(翟衣)로 조정에 임어하신 지 4년 동안 제1등의 의리(義理)를 첫머리에 내거셨습니다. 하늘이 큰 임무를 내리시매 곤알(坤斡)·현재(玄宰)의 기틀이 두터웠고, 백성들이 능히 이름지을 수 없으매 무임(婺臨)·자미(紫微)의 자리에 상서가 찾아들었습니다. 무릇 동토(東土)의 생명이 있는 부류는 모두 자성의 은혜로 귀착되고, 나 소자(小子)는 수공(垂拱)059) 만 하고도 정사가 이루어져 오늘이 있게 되었도다. 이제 연영전(延英殿)에 자리를 비워둘 때를 당하매, 이에 난의사(鑾儀司)에 철렴(撤簾)을 명하시니 선위(璇闈)가 목청(穆淸)하고, 내정(內廷)의 서무(庶務)를 처음으로 벗으니 옥음(玉音)이 지성스럽고 간절하시었습니다. 왕실에 대한 한 생각이 아직도 성실하시나 신공(神功)을 거두어 차지하지 아니하시니, 비유컨대, 때맞추어 내린 비가 이미 흡족한 것과 같습니다. 보위(寶位)의 수엄(邃嚴)함을 바라보매 태산의 높이를 더함을 더욱 깨닫겠습니다. 하물며 성주(聖籌)가 꼭 육순(六旬)에 올랐으니, 아! 아름다운 조짐은 오복(五福)에 적용됩니다. 지극한 도는 이순(耳順)060) 에 응집(凝集)되니 신령스런 봄이 곧 돌아올 것이매, 융성히 봉양함에 낯빛이 편안함을 누리시니 상서로운 햇빛이 길이 머무를 것입니다. 어찌 다만 손뼉치고 발만 구를 뿐이겠습니까? 이에 하늘과 같은 복을 드러내는 것이며, 오직 옥돌에 새기고 금니(金泥)로 써넣음에 있어 거의 애일(愛日)의 정성을 펴게 되었습니다. 여정(輿情)을 좇아 겸양하시는 덕에 힘쓰시는지라, 나라의 법을 상고하여 유양(揄揚)의 의식을 극진히 합니다. 삼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되, ‘광헌(光獻)’이라 합니다. 그 빛을 크게 드러내었으니 휘음(徽音)이 임사(任姒)061) 에 짝이 될 만하고, 성인과 나란히 하는 것이 헌(獻)이니 크나큰 호(號)는 훈화(勛華)에 견준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동관(彤管)062) 은 광휘를 드날리고 보록(寶籙)은 경사를 펼칠 것입니다. 인(仁)이 지극하고 의(義)가 극진하니 팔방에서 보우(保佑)하신 모열(謨烈)을 우러러보고 덕이 더욱 높아지고 이름이 더욱 높아지니, 천추토록 크나큰 찬송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77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語文學)
[註 058] 용비(龍飛) : 임금의 즉위.[註 059] 수공(垂拱) : 팔짱을 끼고 아무것고 하지 아니함.[註 060] 이순(耳順) : 60세.[註 061] 임사(任姒) : 태임(太任)·태사(太姒).[註 062] 동관(彤管) : 붉은 빛의 대붓. 옛날 여사(女史)가 궁중의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할 때 쓰던 붓.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이름을 드날리고 아름다운 업적을 천명함은 제왕(帝王)의 달효(達孝)이고, 덕을 펴고 경사를 넓힘은 방가(邦家)의 이장(彛章)이다. 10행(十行)의 사륜(絲綸)을 반포함은 천 년 동안 없었던 예이로다. 대저 상덕(象德)의 뜻을 캐보면 그 홍호(鴻號)의 높임이 있어야 하니 옥검(玉檢)063) ·금니(金泥)의 글은 대개 태산(泰山)에 봉제(封祭)지내고 양보(梁父)에서 선제(禪祭)지낸 것을 모방한 것이로다. 용기(龍紀)064) ·봉력(鳳曆)065) 의 시대에도 또한 요(堯)임금을 ‘방훈(放勛)’이라 순(舜)임금을 ‘중화(重華)’라 하였으니, 비록 천지의 모습과 일월의 빛으로도 그려낼 수 없었지만, 《시경》·《서경》에서 일컬은 바요, 죽백(竹帛)에 실린 바임을 이에 상고해 낼 수 있도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옛 후비(后妃)의 거룩한 때도 우리 자성(慈聖)의 휘열(徽烈)과 같지는 아니하였으니, 성조(聖祖)를 도우시어 5기(紀) 동안 교화를 펴시매 건순(健順)은 건곤(乾坤)과 합(合)하였고, 황고(皇考)를 보익(保翊)하시어 만년의 기틀을 안정시키시매 문무(文武)는 임사(任姒)에 근본한 것이로다. 나 한 사람이 즉위하매 4년 동안 자성의 은혜 아닌 것이 없었으니, 위태롭고 소란한 데에서 과궁(寡躬)을 보호하시던 처음에 음성과 안색에 크게 나타내지 않으셨고, 염유(簾帷)·하전(厦氈)에서 지치(至治)를 펴시던 즈음에는 경권(經權)이 중도를 얻으셨다. 종묘·사직이 이에 의지하여 편안하니 세 성모(聖母)의 고사에 빛남이 있으며, 서질(敍秩)과 명토(命討)가 다 거행되었으니 우리 1만 자손에게 굉대(宏大)한 계획을 물려주셨도다. 어두운 거리에 이륜(彛倫)을 내걸자 《춘추(春秋)》의 수십 가지 의리가 밝아졌고, 수역(壽域)에 대유(大猷)를 올리자 해옥(海屋)에 3천의 주책(籌策)이 불어났도다. 아름답도다! 이제 만기(萬機)를 벗으심이여. 이에 선갑 삼일(先甲三日)066) 에 있었도다. 처음에 왜황(媧皇)067) 이 오색(五色)의 돌을 불려서 하늘을 보완했던 것처럼 잠시 구면(裘冕)의 수고를 하셨으나 이제 명덕 황후(明德皇后)가 함이(含飴)068) 했던 것처럼 영원히 궁위(宮闈)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도다. 사지(辭旨)가 정녕·측달(惻怛)하니 어찌 한충헌(韓忠獻)069) 이 건의하기를 기다릴 것이며, 거조가 탁월·광명(光明)하니 실로 송나라의 선인 황후(宣仁皇后)070) 에 견주어 의논할 바 아니로다. 비유컨대, 의기(欹器)가 이미 바루어졌는데도 성공을 차지하지 아니하시니, 상서로운 햇빛이 더욱 장원함을 바라보매 무엇으로 그 덕에 보답할 것인가? 이에 모두가 다 함께 원하는 바를 따라 반드시 얻어야만 할 현명(顯名)을 널리 드날리는 것이다. 세 번 사양하시던 연충(淵衷)을 돌이키시어 밝으신 명을 환발(渙發)하고 일곱 번 올린 보책(寶冊)에 더하여 특별히 크게 쓴 것을 내건다. 한없이 오직 걱정한 데에서 또한 한없이 오직 아름다워지니 이것이 누가 준 것이며, 비상한 업적에는 비상한 명호(名號)가 있는 것은 이 때문에 마땅하도다. 이에 이달 28일에 대왕 대비 전하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여 ‘광헌(光獻)’이라 하고, 전(箋)과 치사(致詞)를 올리니, 명정전(明政殿)에서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으셨다. 때는 중춘(仲春)의 화창한 봄날이라 육순(六旬)의 강녕(康寧)한 복에 진실로 꼭 맞도다. 천승(千乘)에 융성한 봉양을 꾸미니 공덕은 더욱 높아지고, 육궁(六宮)에 아름다운 찬송이 조화가 되니 길한 경사가 불어나 이르도다. 영왕(寧王)의 유지(遺志)를 추술(追述)하매 어린 나의 사모함이 더욱 새롭고, 경실(京室)071) 의 성대한 의식이 나란히 이루어지니 자성의 얼굴에 기쁨이 어리도다. 이달 28일 매상(昧爽) 이전의 잡범(雜犯)인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노라. 1년에 두 차례의 사면(赦免)은 드물게 있는 경사스런 때를 미루어 한 것이니, 만물은 모두 되살아나 흘러넘치는 크나큰 은덕으로 들어가도록 하라. 아! 한(漢)나라 때는 관대한 조서(詔書)를 내렸고, 주(周)나라 때는 사제(思齊)의 시(詩)를 올렸다. 삼조(三朝)에 아름다운 가르침을 받들었으니 지금이 초복(初服)인 줄을 알 것이며, 팔역(八域)에 크나큰 은혜를 널리 전파하노니 나와 함께 태평을 누릴지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모두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7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사법(司法) / 어문학(語文學)
[註 063] 옥검(玉檢) : 옥으로 만든 서함(書函)의 뚜껑.[註 064] 용기(龍紀) : 태호 복희씨(太昊伏羲氏) 때엔 용자(龍字)를 두어 관직을 기록함.[註 065] 봉력(鳳曆) : 소호 금천씨(小昊金天氏) 때엔 조자(鳥字)를 넣어 관직을 기록함.[註 066] 선갑 삼일(先甲三日) : 갑(甲)은 법령(法令)을 새로 만드는 것. 법령을 처음 제정(制定)·발포(發布)함에 있어서 백성들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법령을 선포하기 앞서 3일 동안 은근하게 말한다는 뜻임. 즉 주의 깊게 신중히 대처한다는 것임.[註 067] 왜황(媧皇) : 삼황(三皇) 때 여왜씨(女媧氏).[註 068] 함이(含飴) : 엿을 먹고 손자를 회롱하며 정사에 관여하지 아니하는 것. 후한(後漢)의 마황후(馬皇后)가 "나는 단지 엿을 머금고 손자나 희롱하며, 다시 정사에 관여하지 아니하겠다." 한 데서 나온 말.[註 069] 한충헌(韓忠獻) : 충헌은 송(宋)나라 때 한기(韓琦)의 시호.[註 070] 선인 황후(宣仁皇后) : 영종 황제(英宗皇帝)의 비(妃).[註 071] 경실(京室) : 왕실.
상호 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 김관주(金觀柱)에게는 안구마(鞍具馬)를 면급(面給)하고, 제조 이만수(李晩秀)와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 김조순(金祖淳)에게는 모두 숙마(熟馬)를 면급(面給)하고, 제조 윤광보(尹光普)·임기철(林耆喆), 도청(都廳) 김재창(金在昌)·신현(申絢), 옥책문 서사관(玉冊文書寫官) 김달순(金達淳), 옥보 전문 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 한만유(韓晩裕), 예방 승지(禮房承旨) 임희존(任希存), 옥책보 대거 승지(玉冊寶對擧承旨) 박종래(朴宗來), 좌통례(左通禮) 안책(安策), 우통례(右通禮) 박서원(朴瑞源)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윤광보·임기철·김달순·한만유에게는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임희존·박종래에게는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김재창·신현·안책·박서원에게는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더하였다.
경과(慶科) 정시(庭試)와 무과(武科) 초시(初試)를 설행(設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