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6권 순조4년 1804년 4월

싸라리리 2025. 6. 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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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기미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묘(太廟) 하향(夏享)의 축(祝)에 서압(書押)하고, 이어 향(香)과 축을 전하였다. 태묘에 나아가 희생과 제기(祭器)를 살펴보고 재숙(齋宿)하였다.

 

4월 2일 경신

태묘 하향을 행하였다.

 

정대용(鄭大容)을 전라도 관찰사로, 조문언(趙文彦)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4월 3일 신유

소대하였다.

 

유효원(柳孝源)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추국(推鞫)하였다.

 

4월 4일 임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식년(式年) 문과·무과의 전시(殿試)를 설행하였다. 문과에서는 이우재(李愚在) 등 38명을, 무과에서는 이중현(李重鉉) 등 42인을 뽑았다.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추국하였다.

 

4월 5일 계해

소대하였다.

 

4월 6일 갑자

소대하였다.

 

4월 7일 을축

소대하였다.

 

평안 감사 김문순(金文淳)이 삭주부(朔州府)의 남창(南倉)에 불이 나서 곡식 8백 90석 영(零)을 태웠다고 아뢰니, 탕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4월 8일 병인

주강(晝講)하였다.

 

영돈녕(領敦寧) 김조순(金祖淳)의 경연관(經筵官) 직임을 갈아주라고 명하였다. 연석(筵席)에서 간절히 진달했기 때문이었다.

 

4월 9일 정묘

중희당(重熙堂)에 나아가 부마(駙馬) 삼간택(三揀擇)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숙선 옹주(淑善翁主)의 도위(都尉)를 전 정랑(正郞) 홍인모(洪仁謨)의 아들 홍현주(洪顯周)로 정하였다. 위호(尉號)는 영명위(永明尉)로 하고, 가례청(家禮廳)을 설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0일 무진

조강(朝講) 하였다.

 

차대(次對)하여 임금이 도당록(都堂錄)을 행하라 명하였다.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만약 영상(領相)이 없다면, 반드시 대제학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주권(主圈)을 하는데, 지금 영상은 없고 신이 외람되게도 좌규(左揆)080)  의 자리에 있으며 대제학은 또 신의 아우입니다. 형제가 함께 주권하는 일은, 이런 고례(古例)가 없었습니다."
하고, 이어 빨리 영상을 택정하거나 혹은 다른 문형(文衡)을 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함을 따라 하교하겠다."
하였다.

 

좌의정 이시수가 관동 위유 어사(關東慰諭御史) 홍석주(洪奭周)의 계사(啓辭)로 강릉(江陵) 등의 고을의 협호(挾戶)에 대한 휼전(恤典)을 원호(元戶)에 견주어 반만 지급하고, 올해의 전세(田稅)·대동(大同)의 결전(結錢) 중 마포(麻布)로 대신 바치는 것은 내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정퇴(停退)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관동 위유 어사 홍석주를 소견하고 강릉의 백성 고검(高儉)의 처 권성(權姓)과 원주(原州)의 선비 박형명(朴亨明)의 처 이씨(李氏)에게 모두 정려(旌閭)를 시행하라 명하였다. 화재가 났을 때 시어머니를 위해 자신이 순사(殉死)했다고 어사가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추국하였다.

 

4월 11일 기사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전경 문신강(專經文臣講)을 행하였다.

 

소대하였다.

 

4월 12일 경오

주강하였다.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에게 부조(不祧)의 은전081)  을 베풀라 명하였다. 승지 홍의호(洪義浩)의 아룀으로 인해 예조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추국하였다.

 

4월 13일 신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식년(式年) 문과·무과의 방(榜)을 내걸었다.

 

소대하였다.

 

4월 15일 계유

하교하기를,
"숙선 옹주(淑善翁主)의 가례(嘉禮)는 길일이 이미 정해졌다. 선왕께서 몹시 사랑하시던 바이고, 나의 동기간으로는 단지 이 한 누이동생이 있을 뿐이니, 영명위(永明尉)의 집으로 쌀 1백 석, 무명 10동(同), 포(布) 5동, 돈 3천 냥을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실어 보내 비용을 돕게 하라. 숙선 옹주이기 때문에 이렇게 함이 있는 것이니, 이것으로 훗날 전례를 삼을 수는 없다. 비록 해조(該曹)에서 거행하는 것과는 다름이 있다 할지라도 또한 《수교등록(受敎謄錄)》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무신년(戊申年)082)  에 청주(淸州)에서 순의(殉義)한 사람인 이홍무(李弘茂)에게 따로 이증(頤贈)083)  을 더하라 명하였다. 이조에서 청주 유생(儒生)의 상언(上言)이라며 복계(覆啓)했기 때문이었다. 이홍무는 곧 그 당시 병사(兵使)였던 이봉상(李鳳祥)의 숙부이다.

 

4월 16일 갑술

강진(康津)의 전 현감 이안묵(李安默)을 형신(刑訊)하여 절도(絶島)에 감사 정배(減死定配)하라 명하였다. 도계(道啓)에서 그의 탐욕스럽고 비루한 정상을 나열했기 때문이었다.

 

추국하였다.

 

4월 18일 병자

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4월 19일 정축

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4월 20일 무인

주강하였다.

 

4월 21일 기묘

주강하였다.

 

4월 22일 경진

주강하였다.

 

석강(夕講)하였다.

 

4월 23일 신사

주강하였다.

 

4월 24일 임오

소대하였다.

 

4월 25일 계미

주강하였다.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상소하기를,
"도당록(都堂錄)의 법에 의하면 그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수규(首揆)084)  와 문형(文衡)085)  입니다. 그런데 신의 형은 바야흐로 중서(中書)의 우석(右席)에 있고 신은 또 외람되게도 삼관(三館)의 우두머리로 있습니다. 형제가 모여 도당(都堂) 자리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아도 원래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문형의 직임을 갈아주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교리 김굉(金㙆)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권면하니, 우악한 비답으로 가납하고, 곧 승지로 발탁하였다.

 

4월 26일 갑신

주강하였다.

 

4월 27일 을유

소대하였다.

 

관서(關西) 개천군(价川郡)의 불에 탄 민가(民家) 1백 60호와 해서(海西) 곡산부(谷山府)의 불에 탄 민가 1백 27호에 따로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4월 28일 병술

주강하였다.

 

4월 30일 무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내금위(內禁衛)와 서북 별부료 군관(西北別付料軍官)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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