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7권 순조5년 1805년 12월
12월 1일 경진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서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12월 2일 신사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재차 사직소를 올렸으나, 돈면(敦勉)하는 비답을 내렸다.
12월 4일 계미
효안전에 나아가 납향(臘享)을 행하였다.
12월 6일 을유
사관(史官)이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명을 기다린 채 감히 부주(附奏)할 수 없다고 한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이제 사관의 서계(書啓)를 보건대 영상(領相)의 일이 어찌 너무도 정당한 데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부주(附奏)도 감히 할 수 없으며 즉시 죽고만 싶을 뿐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무슨 말이고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백방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다. 정세(情勢)에 대해서는 이미 죄다 환히 밝혔으므로 다시 말할 것이 없고 국사(國事)에 대해서는 판탕(板蕩)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누가 이를 정돈(整頓)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대신의 처지에서 국사를 관계 없는 남의 일 보듯이 돌아보지 않는 것은 실로 뜻밖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조정은 정승이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 내가 전후 목마른듯이 하유한 것이 어떠하였는가? 그런데도 대신이 나를 대우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내가 또한 어떻게 한결같이 성관(誠款)을 허비할 수 있겠는가? 경례(敬禮)는 경례인 것이고 임금의 기강은 임금의 기강인 것이다. 영의정 이병모에게 우선 삭직(削職)시키는 형법을 시행함으로써 대신으로서 편안함만을 취택하는 자의 경계가 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전후 올린 사직소에서 번번이 말하기를, ‘선신(先臣)이 신에게 훈계하기를, 「진실로 임금을 섬기려면 마땅히 먼저 자신의 행동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는데, 연전(年前)에 화(禍)에 걸려 일패 도지(一敗塗地)255) 되고 나서는 마음속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서 이미 신의 아비의 무덤 앞에 고하였습니다.’는 말을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우상(右相)의 일은 어찌 놀랍고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분묘에 가서 맹세했다는 말은 고금에 찾아보아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국사가 판탕되고 임금의 기강이 해이되었기 때문에 위로 대신에서부터 모두 편안하기만을 교묘하게 모의하는 것을 면치 못하여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지난번 즉시 처분(處分)을 내리려고 하다가 대우하는 뜻에서 누차 돈면(敦勉)시키는 하유가 있었던 것이니, 의당 번연(幡然)히 깨달아 고치는 행동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도 굳게 고집한 채 끝내 변동이 없으니, 진실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명색이 대관(大官)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등의 부분에 대해 보통의 처분을 내리고 그칠 수는 없다. 우의정 김 재찬에게는 우선 중도 부처(中道付處)의 형법을 시행하여 재령군(載寧郡)에 정배시키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좌상의 계속되는 사직 단자가 이제 50여 번이었는데 전에 체량(體諒)한다는 비답이 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말한 대로 실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좌의정 이경일(李敬一)에게는 우선 사임(辭任)을 하게 한다."
하였다.
복상(卜相)하라고 명하였다.
유문식(柳文植)을 함경 남도 절도사로, 오재광(吳載光)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7일 병술
판부사 서매수(徐邁修) 오은군(鰲恩君) 이경일(李敬一)이 연명 차자로 대략 이르기를,
"삼가 복상(卜相)하라는 명이 있으셨는데,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보건대, 영묘(英廟)병오년256) 에도 원임(原任)을 복상에 넣으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때 고(故) 상신(相臣) 민진원(閔鎭遠)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고 차자(箚子)로 진달하여 1백 년 전에 한 번 있었던 전례를 원거(援據)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극력 사퇴하였습니다. 선조(先廟) 계묘년257) ·임자년258) 에도 또한 이런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여러 원임(原任)들이 고(故) 상신(相臣)의 차자 내용을 인용하여 아울러 모두 차자를 진달하였는데, 끝내 깊이 헤아린다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신 등이 어떻게 감히 무릅쓰고 중서(中書)의 고사(故事)를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상부(相府)의 격례(格例)가 있다면 어떻게 강박(强迫)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특지(特旨)로 판부사 서매수(徐邁修)를 의정부 영의정에 임명하고, 예조 판서 한용귀(韓用龜)를 좌의정에 임명하고, 호조 판서 김달순(金達淳)을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조득영(趙得永)을 이조 참의로, 김사목(金思穆)을 판의금부사로, 서영보(徐榮輔)를 예조 판서로, 서유구(徐有榘)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8일 정해
영의정 서매수(徐邁修)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짐을 벗고 돌아가서 쉰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비록 경은 노쇠했다는 것으로 사양하고 물러갔지만 노성인(老成人)은 국가의 전형(典刑)인 것이니,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경이 평일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 있어 어찌 하루인들 이런 마음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다시 중서(中書)에 명하여 원보(元輔)259) 의 직임을 맡기는 것이 그 의도가 어찌 부질없는 것이겠는가? 경은 시험삼아 생각하여 보라. 돌아보건대 지금 국사가 판탕되었고 기강이 퇴패되어 인심이 경박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세도(世道)가 안정되지 않은 탓으로 어렵고 걱정스러운 일이 눈에 가득하니, 철류(綴旒)와 누란(累卵)처럼 위태롭다는 것도 이를 비유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밤중에 자다가 일어나서 고요히 생각하노라면 차라리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날 이를 진정시킬 책임은 오로지 보상(輔相)의 직책에 달려 있는데, 경이 나라를 자기 몸처럼 여기는 정성은 내가 본디부터 알고 있는 것이니, 진실로 나의 면유(勉諭)를 기다리지 않고 나와서 명을 받을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대략 만분의 일이나마 드러내어 보였다. 경은 소자(小子)의 지극한 뜻을 본받고 국사가 위태로운 것을 유념하여 즉시 일어나 명을 받음으로써 소자가 이때 목마른듯이 기다리는 뜻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한용귀(韓用龜)에게 하유하기를,
"나라에 있어 소중한 것은 보상(輔相)이기 때문에 보상의 적임자를 얻은 후에야 온갖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경을 취택한 것은 경력과 업적이 훌륭한 것뿐만이 아니라 독후(篤厚)하고 정성스러운 행실을 많은 사람들이 눈을 닦고 보아 온 지가 또한 오래 되었다. 경은 시험삼아 생각하여 보라. 삼공(三公)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낭묘(廊廟)가 오랫동안 문을 닫고 있었으므로 낭묘의 업무가 적체되어 있는 것은 경도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다. 경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 있어 국사의 어려움을 보고서 어찌 나 소자(小子)의 면유(勉諭)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 국사가 아득키만 한 것이 물이 새는 배 위에 서 있는 것만 같은데 장년 삼로(長年三老)260) 의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옹용(雍容)히 여가를 즐기면서 마치 얕은 물에 빈 배처럼 여길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경은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 즉시 일어나 나와서 명을 받음으로써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여 어려운 국사를 잘 극복해 나갈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에게 하유하기를,
"경을 매복(枚卜)한 뒤로부터 나는 어진 이를 얻었다는 것으로 기뻐하였는데, 대개 경을 취택한 이유는 지망(地望)과 문화(文華)요 경륜(經綸)이요 재지(材智)요, 또 순후한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어 시끄러운 풍속을 진정시킬 수 있고 어려운 일을 조정해 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국사가 어렵고 온갖 일이 지연된 상황이니, 돌아보건대, 보상(輔相)의 책임에 있지 않겠는가? 많은 말을 기다릴 것이 없으니, 경은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 즉시 일어나 나와 명을 받고서 시국의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가기 바란다."
하였다.
남병사(南兵使) 유문식(柳文植)을 회령 부사(會寧府使) 최동악(崔東岳)과 서로 바꾸었다.
12월 9일 무자
윤치성(尹致性)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진관(趙鎭寬)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11일 경인
효안전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영의정 서매수(徐邁修)가 사직소를 올렸으나, 돈면(敦勉)하는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한용귀(韓用龜)가 사직소를 올렸으나, 돈면하는 비답을 내렸다.
12월 12일 신묘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감제(柑製)261) 를 설행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이용우(李容愚)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조상진(趙尙鎭)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2월 13일 임진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사직소를 올렸으나, 돈면하는 비답을 내렸다.
12월 15일 갑오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서매수(徐邁修)가 아뢰기를,
"관서 어사(關西御史) 홍병철(洪秉喆)이 복명(復命)하였는데, 앞서 탄핵을 받았다는 것으로 서계(書啓)를 정리하여 바치지 않고 있으니 위임한 본의(本意)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로 하여금 즉시 정리하여 바치게 하고 계하(啓下)하기를 기다려 각 해사(該司)에게 회계(回啓)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두 대신(大臣)에 대한 처분이 과중하니 청컨대 은서(恩敍)를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추조(秋曹)262) 의 죄수 이경욱(李慶郁)을 군문(軍門)에 출부(出付)시켜 효수(梟首)하였다. 이에 앞서 이경욱이 액례(掖隷)로서 전교(傳敎)라고 가칭(假稱)하면서 병조의 정색(政色)263) 에게 공갈을 쳐 전재(錢財)를 토색질한 것에 대해 이미 승복하여 결안(結案)되었는데, 장차 법을 시행하려다가 곧이어 정지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아뢴 것을 인하여 그대로 따랐다.
박종경(朴宗慶)을 도로 선혜청 제조에 차임하였다.
12월 16일 을미
좌의정 한용귀(韓用龜)가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나, 돈면(敦勉)하는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평안남도 암행 어사 홍병철(洪秉喆)이 서계(書啓)하여 상원 군수(祥原郡守) 이희장(李熙章), 순천(順川)의 전(前) 군수(郡守) 신굉(申紘), 양덕(陽德)의 전 현감(縣監) 황상원(黃相轅), 영원(寧遠)의 전 군수 이응회(李應會), 개천(价川)의 전 군수 전덕현(田德顯), 봉산 군수(鳳山郡守) 이길배(李吉培), 증산 현령(甑山縣令) 김노정(金魯正), 강서(江西)의 전 현령 김기언(金基彦), 덕천(德川)의 전 군수 김이례(金履禮), 숙천(肅川)의 전 부사(府使) 이철순(李喆純), 평양 서윤(平壤庶尹) 이영원(李永瑗), 장단(長湍)의 전 부사 성범진(成範鎭), 파주 목사(坡州牧使) 심공엽(沈公燁) 등의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에 대해 논하였는데, 경중을 나누어 감처(勘處)하였다.
별단(別單)에는 환곡(還穀)의 폐단에 대한 여러 조항을 이혁(釐革)할 일, 전결(田結)을 개량(改良)할 일. 결렴(結斂)을 사정(査正)할 일, 용강(龍崗)에 소재한 균역청(均役廳) 둔답(屯畓)의 폐단을 이정(釐整)할 일, 칙사(勅使)를 지대(支待)할 때 부감(富監)의 사대(私貸)를 엄격히 금단할 일, 군정(軍丁)의 폐단을 이정할 일, 영원(寧遠)의 허록(虛錄)된 군관(軍官)을 변통시킬 일, 봉수(烽燧)를 신칙시킬 일, 영애(嶺隘)에 경작(耕作)을 금지시킬 일, 역전(驛田)을 환징(還徵)할 일, 형구(刑具)의 척량(尺量)을 법식에 맞게 할 일, 액외(額外)의 교생(校生)을 혁파시킬 일, 기성(箕城) 전관(殿官)의 사일(仕日)을 계산하여 내직(內職)으로 승부(陞付)시킬 일, 화전(火田)의 전세를 한결같이 풍겸(豊歉)에 따라 집총(執摠)할 일, 유향안(儒鄕案)을 이정할 일, 고채(庫債)를 혁파할 일, 누적(漏籍)을 신칙시킬 일, 각 고을의 사례(事例)를 산정(刪定)할 일, 토성진(兎城鎭)의 경토(境土)를 할급(割給)할 일, 기성(箕城)의 화재(火災)를 당한 가호(家戶)가 있는 방리(坊里)의 역사(役事)는 1년을 기한으로 침해하지 않는 일인데,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방책을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2월 18일 정유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나, 돈면(敦勉)하는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12월 19일 무술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 어머니 나이 90세가 되었다는 이유로써 고 판서 송흠(宋欽), 고 지사(知事) 이현보(李賢輔), 고 감사 이태연(李泰淵), 고 부제학(副提學) 김화택(金和澤)의 전례를 인용하여 돌아가서 봉양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상소하여 체직시켜줄 것을 청하자, 윤허하고 김문순(金文淳)을 대신시켰다. 이정운(李貞運)으로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1일 경자
조진관(趙鎭寬)을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삼았다.
좌의정 한용귀(韓用龜)가 세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돈면(敦勉)하는 비답을 내리고 아경(亞卿)을 보내어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
전라 감사 심상규(沈象奎)가 상소하여 흉년이 든 고을에 진구(賑救)를 설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우도(右道) 연해변의 흉년이 이토록 극심하게 참혹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일부(一夫一婦)가 죽어 구렁에 나뒹굴어도 나의 마음은 오히려 딱하고 부끄럽게 여기는데 더구나 이 열 두 고을의 10만 명에 가까운 생령(生靈)이겠는가? 세전(歲前)에 구급(救急)할 계책과 세후(歲後)에 진주(賑賙)할 계책을 즉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강구하여 아뢰게 할 것을 경은 다 알 것이니, 마음을 다해 구제함으로써 나의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굶어서 죽는 걱정이 없게 하라."
하였다.
12월 22일 신축
예조 참판 조덕윤(趙德潤)이 좌의정 한용귀(韓用龜)의 부주(附奏)를 아뢰니, 돈면하는 비답을 내리고 정경(正卿)을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
12월 24일 계묘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세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돈면하는 비답을 내리고 정경을 보내어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
좌의정 한용귀(韓用龜)를 성정각(誠正閣)에서 소견(召見)하였다. 한용귀가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 임어하시어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한 지 이제 6년이 되었는데도 치화(治化)는 더욱 멀어지고 국세는 갈수록 능이(陵夷)되고 있습니다. 민생(民生)에 대해서 말하여 본다면 살을 베어내어 상처를 보완하는 격이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는 상황이며 와언(訛言)이 떼 지어 일어나고 간귀(姦宄)가 해마다 불어나고 있습니다. 여러해 풍년이 든 끝인데도 오히려 이러한데 만일 농사가 흉년으로 알리게 되면 토붕 와해(土崩瓦解)될 형세가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박두하게 될 것입니다. 조상(朝象)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의리가 날로 회색(晦塞)되고 염치(廉恥)가 완전히 상실되어 기강이 해이해지고 원기(元氣)가 소진되었으니, 강역(疆域)의 걱정을 기다릴 것이 없이 먼저 복심(腹心)이 무너질 걱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어떤 때라고 여기십니까? 비록 마음에 새기고 정신을 가다듬어 줄을 갈고 전철(前轍)을 개역(改易)하여도 오히려 이룰 수 없을까 두려운데 주조(注措)264) 에 나타나고 정령(政令)에 발표되는 것은 그저 구습(舊習)을 따라 행할 뿐이고, 우선 당장 평안한 것만 취할 뿐입니다.
임금의 성절(盛節)은 정사에 부지런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구중 궁궐에 깊이 거처하면서 신료(臣僚)들을 인접할 때가 드물고 때로 불러서 접견하는 것도 두서너 명의 승지(承旨)·사관(史官)에 불과한가 하면 가부(可否)를 주대(奏對)하는 즈음에 별로 반복하여 변론하는 실상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온갖 업무가 적체되고 백사(百事)가 제대로 거행되지 않고 있으니, 연거(燕居)하시는 중에 혹시 잗단 즐거움에 뜻이 사역되어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편폐(便嬖)에 의해 총명이 가리워져서 그런 것입니까? 진실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는 성지(聖志)가 확립되지 않아서 청명(淸明)하고 강대(剛大)한 지기(志氣)가 편안함을 즐겨 스스로 방사해지는 마음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니, 이는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법강(法講)을 정지한 지가 오래되었고 소대(召對)는 매양 간단(間斷)이 있음을 걱정하게 되는가 하면 무릇 경서(經書)를 펴놓은 반열에서 송독(誦讀)하고 진주(陳奏)하는 사람들도 준례에 따라 책임만 면하고 그치는 데 불과한 실정입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게다가 어떻게 성총(聖聰)을 열어 넓혀 장차 성학(聖學)이 향상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언로(言路)는 나라의 혈맥(血脈)인 것입니다. 옛말에 ‘성문(城門)은 닫혔어도 언로는 열려 있고 성문은 열려 있어도 언로는 닫혀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매우 이치가 있는 말입니다. 근년 이래 주저하면서 머뭇거리는 풍습이 이미 고질(痼疾)로 굳어졌습니다. 이번의 성문(星文)265) 은 이것이 드물게 있는 재변인데 응지(應旨)하여 글을 올려 규계(規戒)를 진달하는 일까지 아울러 적뇨하기만 한 채 들리는 말이 없는데도 전하께서는 일찍이 언관(言官)을 죄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꺼리는 문로(門路)가 많아져서 의저(疑阻)가 갈수록 극심해지기 때문에 충성을 바치기를 원하는 선비가 있어도 스스로 주상의 귀에 진달시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궁금(宮禁)을 엄중히 하고 근습(近習)을 억제하는 것은 실로 이는 우리 왕조(王朝)의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근습(近習)들이 멋대로 외람된 짓을 하는 것이 많아졌는데 이경욱(李慶郁)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이들의 범과(犯科)가 계속되고 있는데 심지어는 떼 지어 당여를 이루어 포교(捕校)를 포박하고 구타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범자(首犯者)는 이미 발배(發配)하게 하고 여당(餘黨)들은 특별히 엄장(嚴杖)을 가하라고 명하였습니다만, 미처 거행하기도 전에 갑자기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는 속에 넣었습니다. 이렇듯 은애(恩愛)가 항상 의(義)를 가리우고 국법이 사정(私情)에 의해 굽혀지니, 장래의 걱정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순박하고 성실함을 근간으로 삼고 강의(剛毅)하고 굉대(宏大)함으로 규모(規模)를 정하시어 몸소 서정(庶政)을 재결하심으로써 권강(權綱)이 아래로 옮겨가는 일이 없게 하며 자주 경연(經筵)에 나오심으로써 성학(聖學)이 날로 향상되는 도움이 있게 하며 언로를 엶으로써 옹폐(壅蔽)하는 폐단을 트게 하시며 궁액(宮掖)을 엄중히 함으로써 요행을 바라는 문을 막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모두 절실한 것이다. 의당 유념하여 행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백성들의 곤췌(困瘁)가 근일보다 더 심한 적은 없습니다. 시골의 가난한 소민(小民)들은 비록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있어도 스스로 수령(守令)에게 감히 말을 전달시킬 수 없고 수령이 비록 백성을 사랑하여 돌볼 마음이 있어도 방백(方伯)에게 다 진달할 수 없고 방백이 비록 구제할 수 있는 계책이 있어도 매양 격례(格例)에 구애되는 점이 있는 것을 걱정하게 되어 계획을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리하여 저 불쌍한 백성들이 쓰러지고 엎어지며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정상을 위에 통달시킬 수 없으니, 이것이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반드시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것을 정치의 급선무로 삼은 이유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묘당(廟堂)과 전부(銓部)의 신하에게 특별히 계칙하여 방백과 수령은 잘 가려 택차(擇差)하게 하며, 방백이 체임(遞任)되어 돌아온 경우나 차원(差員)이 상경(上京)한 경우에는 그때마다 소대(召對)를 내려 부지런히 채방(採訪)함으로써 크고 작은 백성들의 고통이 옹알(壅閼)되는 걱정이 없이 상달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또 아뢰기를,
"청백리(淸白吏)의 선발은 곧 우리 조종(祖宗)의 양법(良法)입니다만, 숙묘(肅廟)갑술년266) 이후 녹선(錄選)하는 일이 있지 않았습니다. 선조(先朝) 병진년267) 에 고(故) 상신(相臣) 윤시동(尹蓍東)이 영묘조(英廟朝)에 의논하여 천거했던 사람인 고 판돈녕 정형복(鄭亨復), 고 판서 윤용(尹容), 고 좌윤 한덕필(韓德弼), 고 부제학 이병태(李秉泰), 고 병사 허정(許晶) 이 다섯 사람을 청백안(淸白案)에 재록(載錄)할 것을 건청(建請)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아직껏 재록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해조(該曹)에 계칙하여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에 의거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대신(臺臣) 홍명주(洪命周)를 기장현(機張縣)에 정배하였다. 지난번 상소의 내용에 구어(句語)를 잘 살피지 않은 것 때문에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청했기 때문이었다.
관서(關西)의 죄인 박성린(朴聖麟)을 본도(本道)로 압송하여 가서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도민(道民)으로서 도백(道伯)을 무함한 것은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는 대신의 말을 따른 것이다.
12월 25일 갑진
차대(次對)하였다.
야대(夜對)하였다.
12월 26일 을사
예조에서 아뢰기를,
"효안전(孝安殿)의 연제(練祭) 뒤에는 백관들이 상복(喪服)을 벗고나서 의당 음복(飮福)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예문(禮文)에 이미 명백하게 기재되어 있는 것이 없으니, 청컨대 대신에게 문의(問議)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연제(練祭) 전에 원릉(元陵)의 능관(陵官)과 제관(祭官)의 복색(服色)은 전례에 따라 천담복(淺淡服)으로 마련했습니다만, 《등록(謄錄)》과 《보편(補編)》에는 연제 뒤 하위(下位)인 능원 묘묘(陵園廟墓) 제관의 복색은 모두 흑단령(黑團領)으로 마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릉은 같은 등성이에 있지만 사체가 더욱 중하니 흑단령으로 거행하게 하소서. 화령전(華寧殿)·경모궁(景慕宮)에 입직하는 관원도 이 예(例)에 의거 흑단령을 입게 하고 제관은 제복을 입고 행제(行祭)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야대(夜對)하였다.
12월 27일 병오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을 성정각(誠正閣)에서 소견(召見)하였다. 김달순이 아뢰기를,
"의리(義理)를 천명하는 것은 곧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백성의 마음을 귀일시키는 방법입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굳게 지켜 행한 의리는 천지에 세워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백대의 성인(聖人)을 기다려 질의해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24년 동안 풍속을 바로잡고 세상을 다스려온 정치가 이 의리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어찌 죄를 범한 모년(某年)의 역괴(逆魁)와 흉당(凶黨)들이 무함 핍박하는 말에 간여되어 번복(翻覆)시킬 계교를 도모하는 것이 한 번 변하고 두 번 변하여 임자년268) 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요망한 정동준(鄭東浚)은 안에서 농간을 부렸고 역적 채제공(蔡濟恭)은 밖에서 성원(聲援)하여 네 글자의 흉언(凶言)을 사방에 전파시킴으로써 일세(一世)의 인심을 광혹(誑惑)시켰는데 학유(學儒)와 영인(嶺人)의 상소가 나오기에 이르러서는 군부(君父)를 협박하고 성궁(聖躬)을 무함 핍박한 것이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의 말보다 더 참혹하였고 정희량(鄭希亮)·이인좌(李麟佐)의 격문(檄文)보다도 더 극심했습니다. 이들의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은 선조(先祖)만을 무함하고 핍박했을 뿐만이 아니라 실은 경모궁(景慕宮)을 무함하고 핍박한 것이며 경모궁을 무함하고 핍박했을 뿐만이 아니라 실은 영묘(英廟)를 무함하고 핍박한 것이니, 세상에 꽉 찬 죄는 위로 하늘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조(先朝)께서 질서를 펴고 토죄(討罪)를 명하는 권한을 지니시고 어찌 그 죄를 분명히 바루고 와굴(窩窟)을 타파하려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단지 감히 말할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 숨겨두고 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은미하고 완곡한 뜻이고 정미로운 의리인 것인데, 그의 의리를 천명(闡明)하는 근본은 오직 성무(聖誣)를 분변한다[辨聖誣]는 세 글자에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양조(兩朝)의 아름다운 덕을 천명하여 거의 끊겨져가는 이륜(彛倫)과 이미 회색(晦塞)된 의리를 해와 달처럼 환히 밝히고 단청(丹靑)처럼 찬란히 빛나게 해야 합니다. 이제야 세상의 도의(道義)가 안정되고 백성의 마음이 귀일되어 우리 4백 년 종사(宗社)를 반석(磐石)처럼 영원히 평안하게 만드는 것이 곧 선조(先朝)에서 만세(萬世)에 편안함을 남겨 준 계책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여 세상을 다스린 뒤로 자성(慈聖)의 휘지(徽旨)를 우러러 받들고 선조(先朝)의 지사(志事)를 천발(闡發)하여 왔으므로 성효(聖孝)가 더욱 빛나고 국시(國是)가 크게 정하여졌는데 유독 영소(嶺疏)의 흉괴(凶魁)인 이우(李堣)를 지금까지 용서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형(失刑) 가운데 큰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추로(鄒魯)의 유풍(遺風)이 헛되이 흉당(凶黨)이 만인(萬人)이나 된다는 이름을 덮어쓰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런 까닭에 온 도내(道內)의 충지(忠志)를 지닌 선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더구나 지난번 박하원(朴夏源)·홍지섭(洪志燮)을 곧바로 석방하기를 마치 잡범(雜犯)인 사죄(死罪)로서 때로 소석(疏釋)시킬 수 있는 것처럼 하였는가 하면 원의(院議)와 대장(臺章)을 일례(一例)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삼가 의리가 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지고 사설(邪設)이 이로 말미암아 다시 행해져 인심이 의혹스러워하고 세도(世道)가 안정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은 이우·박하원·홍지섭에게는 모두 도배(島配)하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을 세상의 도의(道義)를 안정시키고 백성의 마음을 귀일시키는 근본으로 삼아야 된다고 여깁니다. 이어 생각하건대, 선조(先朝)에서 경모궁(景慕宮)의 아름다운 덕을 천양하면서 제일 먼저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덕으로서 칭호를 높이고 덕을 찬양하는 제일의 의리로 삼았으니, 그때의 간신(諫臣)은 당초 포가(褒嘉)하는 전례(典禮)를 기다릴 것도 없이 절로 영광스러운 칭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가 점점 내려갈수록 의리가 회색(晦塞)되어가는 때에 이르러서는 충신(忠臣)과 사신(邪臣)을 변별(卞別)함에 있어 착한 것을 표창하고 악한 것을 괴롭히는 것보다 먼저해야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고(故) 지사(知事) 신 박치원(朴致遠), 고(故) 사간(司諫) 신 윤재겸(尹在謙)에게는 특별히 시호와 벼슬을 추증하여 표창함으로써 선조(先朝)의 뜻을 계술(繼述)하고 아름다운 덕을 천발(闡發)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실로 성효(聖孝)에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야대(夜對)하였다.
12월 28일 정미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이익모(李翊模), 참판 박종래(朴宗來), 병조 판서 김사목(金思穆)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520면
【분류】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