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8권 순조6년 1806년 1월

싸라리리 2025. 6. 1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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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기유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고 이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권농(勸農)하는 윤음(綸音)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농사는 백성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백성은 곡식을 하늘로 삼는다고 하였다. 대저 농사란 백성이 소중히 여기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임금도 이에 힘입는 것이기 때문에 풍년이 들기를 축원하는 것을 어느 해인들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나 소자(小子)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마음에 잊지 않고 걱정하는 것도 또한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그것이다. 풍년다운 풍년이 들게 하기 위해서는 곧 농사를 권면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는 것뿐이다. 농기구에 힘을 다하고 들에 나아가서 생업에 열심히 애쓰며 세 계절의 농사일을 제때에 하면서 사체(四體)의 고달픔을 잊는 것은 백성들의 부지런함인 것으로, 곧 농사에 힘쓰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의 부족한 양식을 지급해 주고 나태한 것을 경칙(警飭)시키며 몸소 들판으로 나가서 농사일의 독려에 마음과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은 관리들의 부지런함인 것으로, 곧 농사를 권면하는 것이다. 아! 그대 유수(留守)와 관찰사(觀察使)들은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 반드시 과업을 권면하는 정사에 힘써서 많은 수확을 얻는 경사가 있게 하기 바란다. 후원(喉院)001)  에서는 이런 뜻으로 찬출(撰出)하여 팔도의 도신(道臣)과 사도(四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하라."
하니, 정원에서 아뢰기를,
"이제 내리신 전교(傳敎)에서 신 등은 한마디도 덧붙일 것이 없으니, 이 전교를 그대로 하유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노인(老人)들에게 특별히 세찬(歲饌)을 반사(頒賜)하고 이어 존문(存問)하라고 명하였는데, 연례(年例)에 의한 것이었다.

 

정관채(鄭觀采)를 평안도 절도사로 삼았다.

 

1월 2일 경술

황승원(黃昇源)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윤광안(尹光顔)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응당 가자(加資)할 노인(老人)을 하비(下批)002)  했는데, 1백 세가 된 사람이 45인이었다.

 

1월 3일 신해

예조에서 아뢰기를,
"효안전(孝安殿)의 연제(練祭)가 있은 뒤 대소의 향사(享祀)에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 것의 당부(當否)에 대해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들에게 문의(問議)하였는데, 좌의정 한용귀(韓用龜)는 말하기를, ‘음복에 관한 의절(儀節)은 이것이 막중한 향례(享禮)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무인년003)  에는 휘령전(徽寧殿)의 담제(禫祭) 후의 음복례가 효소전(孝昭殿)의 연제(練祭) 뒤에 있게 되었는데, 장헌 세자(莊獻世子)가 바야흐로 심제(心制)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지금 효안전의 연제 뒤에는 백관들의 복(服)이 모두 길복(吉服)을 따르게 되어 있고 대소 향사도 또 섭행(攝行)하게 되어 있으니, 음복례는 구애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경모궁(景慕宮)에 대해서는 친제(親祭)와 섭향(攝享)을 막론하고 정례(情禮)에 의거 참작하여 보면 준례대로 음복하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은 말하기를, ‘무인년에 휘령전 담제 후의 음복례를 준례에 의거 효소전의 연제 뒤에 신청(伸請)하였으니, 연제 뒤에 음복례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법제가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의 하교는 한때 임시로 정지시킨 것 같으니, 오늘날 인용하여 증거로 삼을 수 있는 단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였고, 영의정 서매수(徐邁修)·판부사 김관주(金觀柱)·오은군(鰲恩君) 이경일(李敬一)은 병 때문에 헌의(獻議)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하니, 좌상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교하였다.

 

문희묘(文禧廟) 전사관(典祀官) 박사언(朴思彦), 중관(中官) 박민서(朴敏瑞)·신희택(申熙宅)을 잡아다가 감죄(勘罪)하라고 명하였는데, 사전(祀典)을 근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어 묘전(廟殿)·사궁(社宮)·능원묘(陵園墓)의 관원을 신칙하여 앞으로 조심하게 하였다.

 

1월 4일 임자

호남(湖南)의 진자(賑資)로 본도(本道)의 진곡(賑穀) 3만 석(石)을 획급(劃給)하게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도계(道啓)로 인하여 청한 것이다.

 

1월 5일 계축

비국에서 세밑에 우금(牛禁)004)  을 엄중히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추조(秋曹)005)  와 경조(京兆)006)  의 당상(堂上)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니, 특별히 파직(罷職)시키라고 명하였다.

 

1월 6일 갑인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右相)의 처음 연석(筵席)에서의 거조(擧條)를 영상과 좌상도 모두 보았는가?"
하니, 영의정 서매수(徐邁修)가 말하기를,
"신이 과연 보았습니다만, 우상이 아뢴 내용은 말한 것이 모두 절실한 것으로 충애(忠愛)스런 정성이 사표(辭表)에 넘쳐흘렀으니, 가납(嘉納)하신 성의(聖意)에 대해 신은 진실로 흠앙하고 찬탄(贊歎)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깊이 체찰(體察)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의 거조 가운데 이우(李㙖)·박하원(朴夏源) 등의 일은 바로 근래에 관계되는 일이니, 으레 상량(商量)하여 처분해야 한다. 그리고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의 일에 이르러서는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크게 의리(義理)에 관계되는 것이니, 상세히 살펴서 조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하여 보니, 세초(洗草)007)   속에 들어가 있었다. 우상으로 하여금 두 글을 찾아서 들여오게 했는데 원본(原本)을 보니, 과연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를 살펴보건대, 선조(先朝)께서 세초할 것을 앙청한 것과 영묘(英廟)께서 특별히 세초할 것을 허락한 것은 대개 이런 등류의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거론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문적(文蹟)을 세간(世間)에 남기고 싶지 않은 데서 나온 조처인 것이다. 양조(兩朝)의 성의(聖意)가 이미 이와 같으니, 후사(後嗣)로서 준수(遵守)해야 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차마 추후에 거론할 수 있겠는가? 나는 도리어 원서(原書)를 찾아본 것을 후회하는 것은 물론 마치 영묘·경모궁(景慕宮)·선조(先朝)께 죄를 진 것만 같다. 경모궁이 간언(諫言)을 용납한 성덕(聖德)에 대해서 내가 진실로 흠앙하지만 조(祖)·자(子)·손(孫)은 본래 일체(一體)인데, 선조(先朝)께서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일을 내가 어떻게 오늘날에 와서 포증(褒贈)할 수가 있겠는가? 경 등은 모두 선조의 구신(舊臣)들이니, 모쪼록 차례대로 상세히 진달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서매수가 말하기를,
"우상 이 처음의 연석에서 아뢴 내용은 진실로 세도(世道)가 이치에 틀린 것을 걱정하고 의리가 회색(晦塞)된 것을 우려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지극히 중대한 데에 관계되기 때문에 두 글의 원본(原本)을 보려 했던 것인데, 그것을 보고난 뒤에는 모골(毛骨)이 함께 송연하였으니 후회 막급이다. 이제 선조(先朝)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는다면 무릇 모년(某年)008)  에 관계된 모든 일은 전부가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 이 서본(書本)을 찾아서 보니, 마치 내 마음이 죄를 얻은 것만 같다. 거조(擧條) 가운데 사설(邪說)이 유행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사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말하기를,
"신이 삼가 누누이 하교하시는 내용을 들어보니, 너무도 황공스러운 마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대개 선조(先朝)께서 선세자(先世子)의 아름다운 덕을 천양(闡揚)하면서 반드시 ‘간언을 용납했다.[容諫]’는 두 글자를 제일의 의리로 삼은 것은 지극히 따르기 어려운 말을 가납(嘉納)한 성덕(聖德)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 이 거론하여 아뢸 적에 이 글이 세초(洗草)에 들어가 있는 것인 줄 몰랐는가?"
하니, 김달순이 말하기를,
"《일기(日記)》를 세초(洗草)한 일은 신도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글까지 아울러 세초 속에 들어간 데 대해서는 신이 당초에 과연 몰랐었습니다. 그때 간언을 용납한 성덕에 대해서는 늘 가정(家庭)에서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간신(諫臣)을 포증(褒贈)하는 것이 실로 천양(闡揚)하는 도리에 합당하겠기에 처음의 연석에서 우러러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간언을 용납한 성덕에 대해서는 나도 또한 흠앙하고 있다. 그러나 모년(某年)에 관계된 모든 일은 이것이 선조(先朝)께서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포증하라고 청한 것은 절대로 불가한 것이다."
하니, 김달순이 말하기를,
"성교(聖敎)를 거듭 받들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누누이 번거롭게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에 관계된다고 해도 아름다운 덕을 천양하는 한 가지 일에 관계가 된다면 지금에 와서 포증하는 것이 또한 어찌 천명하는 방도가 아니겠습니까? 선조 임자년009)  에 일종(一種)의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네 글자[四字]의 흉언(凶言)을 전파시켜 일세(一世)의 인심을 속여 미혹시켰기 때문에 선조(先朝)께서 특별히 간언을 용납한다는 두 글자를 천양하는 방도로 삼은 것은 또한 세도를 걱정하는 만부득이한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설(邪說)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는데 포증하는 한 가지 일은 실로 선을 표창하고 악을 징계하는 정사가 되겠기에 처음의 연석(筵席)에서 우러러 청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아뢴 바에 대해 나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 모년(某年)의 일에 대해 차마 거론할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선조의 성심(聖心)을 알 수 있고, 세초(洗草)할 것을 앙청한 데 대해 특별히 허락한 것에서 영묘(英廟)의 성의(聖意)를 또한 알 수 있다. 지금도 또한 그때와 다를 것이 없는데 영묘와 선조(先朝)께서 차마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만약 오늘날 포증을 시행한다면 죄를 얻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라 양조(兩朝)의 성의(聖意)를 저버리게 될까 두렵다."
하니, 김달순이 말하기를,
"소신(小臣)의 구구한 천견(淺見)에 통분스럽게 여기는 것은 대개 선조(先朝)께서 이 일로써 흉도(凶徒)들에게 무함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번 우러러 아뢴 것은 진실로 제방(隄防)이 혹 해이해질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설(邪說)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니, 김달순이 말하기를,
"대개 박하원(朴夏源)의 무리는 의리에 죄를 얻은 자들인데, 한번 사유(赦宥)를 받은 뒤로부터 일종의 괴귀(怪鬼)한 무리들이 사설로 선동하여 의리를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거론한 조항에서 운운한 것은 바로 이런 등등의 부류들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비록 이우(李㙖)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세상에 어찌 만인소(萬人疏)가 있을 수 있습니까? 협박하고 무함하고 다그치려는 계교임을 알 수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에 관한 일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하는 것이지만,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의 일은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연석(筵席)에 나오기를 기다려 한번 환히 하유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 말한 것이다. 우상이 처음의 연석에서 청한 것에 대해서는 비답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니, 종당에는 비답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의 무리가 기필코 의리와 겨루려고 하였고 심지어 진신(搢紳)들을 일망 타진하려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등등의 부류들에 대해 어찌 속히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한용귀(韓用龜)는 말하기를,
"우상 이 청한 것은 실로 징토(懲討)를 엄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상도 또한 아뢰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은 또한 여사(餘事)이기는 하지만 비답을 내리게 될 것이다."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의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버티면서 윤허하지 않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비답을 내리겠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우선 거조(擧條)에 대한 비답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부교리 이상우(李尙愚)가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에 대한 일은 대신이 이미 누누이 진달했는데도 아직껏 처분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이는 상하가 서로 버티는 일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의리가 점점 회색(晦塞)되어 제방(隄防)이 엄중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거조(擧條)에 대해서는 의당 비답을 내리겠다."
하였다. 사간 이인채(李寅采)가 말하기를,
"신은 추후 연석에 나왔기 때문에 대료(大僚)가 아뢴 내용과 상하의 수작(酬酢)을 상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이우 등의 일은 제방에 관계된 일이니 윤허를 아껴서는 안 됩니다.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과 옥당(玉堂)은 차이가 있는 것이니, 진계(陳啓)한 뒤 회포를 우러러 아뢰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아뢴 것은 격례(格例)에 어긋남이 있다."
하였다. 이인채가 말하기를,
"신이 전후 누차 언지(言地)를 더럽혔고 대개 진부한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아뢴 것은 진실로 나라를 위한 공공(公共)의 분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등등의 부분에 대해 혁연(赫然)히 과감한 결단을 내려 천둥이 치듯 태풍이 불듯이 쓸어버리지 않는다면, 혹은 의리가 이로 말미암아 점점 회색되고 제방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우의 일은 선조(先朝)에서 이미 환히 다 드러난 것이다. 의당 대신의 거조(擧條)에 대한 비답에서 하유하겠다."
하였다.

 

김희순(金羲淳)·서형수(徐瀅修)·한용탁(韓用鐸)·박종래(朴宗來)를 정경(正卿)으로, 조득영(趙得永)·정동관(鄭東觀)·윤치성(尹致性)·이상황(李相璜)을 아경(亞卿)으로 발탁했는데, 영의정 서매수(徐邁修)의 말을 따른 것이다. 서매수가 또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만석(鄭晩錫)의 정적(政績)이 특이하다는 것과 강화 유수(江華留守) 오재소(吳載紹)는 영묘조의 승선(承宣)이었다는 것으로 모두 품계를 올려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면주(金勉柱)·김희순(金羲淳)·박종래(朴宗來)·김이도(金履度)·서미수(徐美修)를 비변사 제조에 차임하였다.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처음 연석(筵席)에서 진계(陳啓)한 것에 대해 비답을 내리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답하기를,
"이우의 일은 돌아보건대, 애석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신년010)   이전에는 박하원의 일이 제기되었을 때를 막론하고 또한 거론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어떻게 무단히 추후에 귀양보낼 수 있겠는가? 박하원 등은 이제 아뢴 바에 의거하여 살펴보면 이우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미 이우가 받지 않은 죄를 겪었다. 그런데 다시 귀양보내는 것은 참으로 의의가 없는 것이지만 처음의 연석에서 청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한다.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 두 사람의 일에 이르러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선대왕조(先大王朝)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조(先朝)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를 내가 어기지 않고 준수한다면 의리는 절로 밝혀질 것이다. 두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옳다 그르다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박종경(朴宗慶)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김희순(金羲淳)을 형조 판서로, 박종래(朴宗來)를 한성부 판윤으로, 김기상(金箕象)을 이조 참의로 이광익(李光益)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동래 부사 정만석(鄭晩錫)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통신사(通信使)를 청하기 위해 나온 대차왜(大差倭)가 이제 막 왔습니다. 차왜가 한 말은 「신해년011)   의빙사(議聘使)가 퇴각당한 뒤로 귀국(貴國)에서 다시 장소를 바꾸어 정하여서 폐단을 줄인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였으며 신사(信使)는 폐주(弊州)에서 맞이하고 연한(年限)은 기사년012)  으로 확정한 것이 문자(文字)에 환히 기재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위조(僞造)했다는 등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애당초 폐주에서는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귀국의 문자에 의거하여 이미 강호(江戶)에 보고하여 성실히 완정(完定)하였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다시 결코 허접(許接)할 수 없다는 뜻으로 엄중한 책유(責諭)를 가하였습니다.’ 했습니다. 지금의 이 차왜는 신해년 의빙사와 함께 똑같이 법규 외의 것인데, 신해년에 퇴각시켰던 것을 이제 어떻게 허접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번에 네 명의 역관(譯官)을 법에 의거 처형한 뒤이니, 서로 얽힌 간사한 정상을 반드시 모를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짓으로 꾸며내어 말을 만들어 스스로 숨기려고 하고 있으니, 더더욱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해당 수신(守臣)에게 분부하여 허접하지 말고 다시 책유를 가하여 속히 들여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1월 7일 을묘

사간 이인채(李寅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상의 연주(筵奏)에 대한 비답에서 박하원(朴夏源) 등의 일에 대해서는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습니다만, 이우(李㙖)를 도배(島配)시키라는 청에 대해서는 끝내 윤음(綸音)을 아끼셨으니, 삼가 놀랍고 의혹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박하원 등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는 비지(批旨)에 다시 귀양보내는 것은 의의가 없는 것이지만, 처음의 연석(筵席)에서 청한 것이기 때문에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한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신은 삼가 훌륭한 왕언(王言)에 흠결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속히 이우를 도배시키라는 청을 윤허하시고 박하원 등의 일에 대한 비지 내용에 ‘다시 귀양보내는 것은 의의가 없다.’고 한 한 구절은 또한 즉시 환수(還收)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우의 일은 내가 어찌 그에게 사정(私情)을 두었겠는가? 무릇 모년(某年)의 의리에 관계된 것에 대해서는 단지 삼가 선조(先朝)께서 재정(裁定)한 정의(精義)를 지키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현재 조정의 의논이 반드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나도 또한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이우를 아끼겠는가? 대신이 아뢴 대로 시행하라. ‘참으로 의의가 없다.[誠無義]’는 세 글자는 그대가 해석한 내용이 모두 옳다. 참으로 소각(銷刻)013)  의 혐의가 있으니, 원래의 비지를 고쳐서 쓰라."
하였다.

 

오한원(吳翰源)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1월 8일 병진

임금이 승지 신현(申絢)에게 말하기를,
"친제(親祭) 때의 축문(祝文)에 어휘(御諱)를 읽는 일에 대해 선조(先朝)께서 누차 하교하였었고 연전(年前)에 대신도 또한 아뢴 바가 있었다. 돌아보건대 지금 춘향(春享)이 곧 있고 연사(練事)도 머지 않았으니, 이 뒤로는 축문을 읽을 즈음에 어휘를 독주(讀奏)하라는 뜻을 승지는 대축(大祝)에게 분부하라. 그리고 술을 따를 적에는 울창주(鬱鬯洒)를 반드시 가득히 따르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우(李㙖)를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에, 홍지섭(洪志燮)을 순천부(順天府) 방답진(防踏鎭)에 정배(定配)하였다.

 

1월 9일 정사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춘향(春享)을 행하였다.

 

조만원(趙萬元)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지난번의 처분은 국체(國體)를 위하여 결국에 부득이해서 내린 조처였다. 내가 어찌 오로지 구경(九經)014)  의 의리를 소홀히 해서 그렇게 했겠는가? 이미 한해가 지났고 또 일전에 대신이 말한 것도 있었으며 효안전의 연기(練期)도 가까워 왔으니, 오래도록 죄적(罪籍)에 있게 할 수는 없다. 전 영의정 이병모(李秉模)는 서용(敍用)하고 재령군(載寧郡)에 부처(付處)한 죄인 김재찬(金載瓚)도 죄명(罪名)을 탕척시키고 똑같이 서용하라."
하였다.

 

장령 이정륜(李廷輪)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 박하원(朴夏源) 등의 일에 관한 거조(擧條)에 대해 내리신 비답에 ‘처음의 연석에서 청한 것이기 때문에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흉악한 박하원과 요망한 홍지섭(洪志燮)의 지극히 참혹하고 패려스러운 죄상에 대해서는 신인(神人)이 다함께 통분스럽게 여겨 온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처분을 내릴 때 죄상을 명시(明示)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흉죄(凶罪)를 저지른 것을 아주 환히 밝혀서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의 하교에는 마치 마지못해 따르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난적(亂賊)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사륜(絲綸)을 내려 지금의 처분을 엄명(嚴明)하고도 광대(光大)한 지경으로 귀결시켜야 합니다. 지난번 홍명주(洪命周)가 전례(典例)를 잘 몰라서 백지(白地)에 시끄러움을 야기시킨 것도 이미 더없이 통분스럽고 증오스러운 일인데, 한두 개의 구어(句語)가 감히 막중한 곳을 핍박한 것은 더욱 어찌 여러모로 마음을 놀라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다행히도 대료(大僚)가 연석에서 주달하여 윤허를 받기는 했습니다만, 신의 의견에는 율명(律名)이 너무 가볍다고 여깁니다. 오직 바라건대, 먼 변방에 이찬(移竄)시키는 형법을 빨리 시행하여 간사한 마음의 발동을 꺾고 무너진 기강을 진기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박하원의 일과 거조(擧條)에 대한 비답의 일은 이미 윤허하여 따른 것이다. 또 도로 정배한다면 어찌 반드시 특별히 번거롭게 사륜을 내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마지못해 따른 혐의가 있다면 원래의 비답 가운데 ‘대신의 처음 연석’이란 한 구절을 제거하라. 홍명주의 일은 본래 찬배(竄配)한 것이고 또 가까운 도(道)가 아닌데 이미 가율(加律)시키려 한다면 어찌하여 도배(島配)하고 안치(安置)시킬 것을 청하지 않고 이찬(移竄)시킬 것을 청하는가? 너무 잗단 데 가까운 말이다."
하였다.

 

김근순(金近淳)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김이도(金履度)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윤대(曹允大)를 예문관 제학으로, 이병모(李秉模)를 영중추부사로, 이시수(李時秀)·김재찬(金載瓚)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1월 10일 무오

영부사 이병모, 판부사 김재찬에게 하유하기를,
"어제 내린 전교(傳敎)에서도 말을 했다. 경 등의 오늘날 의리는 이험(夷險)을 가리지 않고 생사(生死)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와 나 한 사람을 보좌함으로써 선조(先朝)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 등은 이에 도리어 인혐해서는 안되는 정상인데도 억지로 인혐하여, 이루어서는 안되는 의리를 부당하게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지조를 지키는 데 과감했던 탓으로 상하가 서로 버티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내가 국체(國體)를 위해 경 등을 독박(督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 등은 끝내 나를 버려서는 안 되고 나도 또한 끝내 경 등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어떻게 경 등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죄루(罪累) 속에 있게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이루어진 일은 논할 것이 없는 것이고 경 등의 왕래가 또한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경 등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시임(時任)으로 있지 않다고 해서 혹시라고 그친 적이 없었다. 경 등은 안심하고 즉일로 올라와서 숙배(肅拜)하고 이어 나의 면유(面諭)를 들으라는 것으로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1월 11일 기미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아침 상식(上食)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연주(練主)를 받들고 나아갈 때 홍화문(弘化門) 안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 저녁 상식을 행하였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를 재실(齋室)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의 돈유(敦諭)에서 이미 나의 의견을 다 이야기하였거니와, 지난번의 처분은 국체(國體)를 위하여 부득이한 조처였다. 그런데 어찌 이 때문에 한결같이 인의(引義)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원임(原任)이 되었으니, 다시 시골로 내려가지 말고 경제(京第)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하라."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의 지난번 일은 비록 정세(情勢)에 있어 부득이한 것이었으나, 죄를 범한 것이 지극히 중하고 잘못된 허물이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황공하고 위축된 가운데 가볍게 감단(勘斷)한 지 오래지 않아 은서(恩敍)하는 명령을 갑자기 내리시니, 신은 명을 듣고 황송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반열에 참여하는 의리가 중하여 즉일로 길에 올랐는데 중로(中路)에서 또 근신(近臣)이 반선(頒宣)하는 성유(聖諭)를 삼가 받들어 보니, 더욱 그지없이 황송스러운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이제 성교(聖敎)가 또 이와 같으니, 신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는 도리에 있어 삼가 우선 경제(京第)에 머물면서 천질(賤疾)을 조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뒤로는 혹 강교(江郊)에 머물기도 하고 혹 시골 집으로 내려가기도 하는 것을 때에 따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아뢴 내용을 듣건대, 비록 신절(愼節)015)  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신이 까닭없이 시골에 가 있는 것은 국체(國體)와 사면(事面)에 있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강교(江郊)에 거처하는 것은 시골에 가 있는 것과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니, 바라건대, 경은 경제(京第)에 머물면서 다시 고향을 찾아가지 말도록 하라."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이 누차 하교를 받드니, 너무도 황공하고 감격스러운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신이 병을 치료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강수(江水)가 좋습니다. 또 신이 서울에나 시골에나 편리한 대로 가 있게 하는 것에 대해 일찍이 선조(先朝)의 하명을 우러러 받든 바 있습니다. 이 뒤로는 삼가 서울과 왕래하겠습니다만, 강교는 실상 서울에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1월 12일 경신

효안전에 나아가 연제(練祭)를 행하였다. 우주(虞主)를 받들고 태묘(太廟)로 나아갈 적에 홍화문(弘化門) 안에서 지송(祗送)하였다.

 

우주(虞主)를 태묘의 북쪽 계단에 매안(埋安)하였다.

 

효안전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세도(世道)가 점점 비하(卑下)되는 것을 걱정하고 의리가 혹시라도 회색(晦塞)될까 두려워하여 처음 연석(筵席)의 주대(奏對)에서 함부로 진청(陳請)한 것이 있었습니다만, 성비(聖批)를 받드는 데 이르러서는 ‘어기지 않고 준수하면 의리가 절로 밝혀질 것’이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훌륭한 성인(聖人)의 말씀이 이렇게 정밀하고 절실하며 간략하고 합당하니, 진실로 흠앙하여 찬송(贊頌)하는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신이 엊그제 연석에서 삼가 누누한 하교를 받들었고 계속하여 연석에서 반시(頒示)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황송하여 위축되고 두려워 떨려서 스스로 용납할 데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무릇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에 대해 실낱 같고 털끝 같은 것도 철저히 분석하여 권도(權度)016)  가 그 의리를 천명함에 있어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덕을 선소(宣昭)하는 즈음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성심(聖心)으로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두려워하는 성심(聖心)을 천만세토록 천양하는 의리에 견주어 볼 때에 절로 경중의 구별이 있어 그런 것입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종래의 흉도(凶徒)들이 네 글자의 흉언을 가지고 막중한 지위에 계신 분을 무함하고 핍박하였는데 간언(諫言)을 숨긴 한 가지 일이 그 근저(根柢)가 된 것이니, 선세자(先世子)께서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신 성덕(聖德)을 발휘(發揮)하고 선대왕(先大王)께서 아름다움을 천양한 성효(聖孝)를 계술(繼述)함에 있어서는 선을 표창하고 악을 징벌하는 정사를 분명히 보여 백성들의 마음을 귀일시키고 무궁한 장래에 알리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변함없는 적침(赤忱)은 단지 이에서 나온 것이데, 신이 이미 고루 과문한 탓으로 간서(諫書)가 함께 세초(洗草)에 들어간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누차 찾으시는 명을 받들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것을 기주관(記注官)이 보존해 두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그 자손들이 사사로이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성상께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만, 신이 경솔한 연유로 의리의 본말(本末)을 다 진달하지 못하였고 또 개석(開釋)하여 뜻을 통달시키지 못했던 관계로 감히 받들어 들을 수 없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비록 만번 죽더라도 어떻게 스스로 속죄(贖罪)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위벌(威罰)을 내려 신을 중률(重律)에 적용함으로써 인신(人臣)으로서 망령되게 말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무릇 모년(某年)에 관계된 의리는 선조(先朝)에서 잡아 지켜 온 것이 더할 수 없이 정미(精微)하였으니, 천양(闡揚)의 여부를 막론하고 이렇게 문자(文字)에 올리는 것은 더없이 송구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경은 다시 거론하여 말하지 말라. 연석에서 본래 반시(頒示)한 것은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내가 삼가 준수한다는 뜻을 알게 하려고 한 것으로 경에게는 털끝만큼도 간여된 것이 없다. 경이 이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은 진실로 생각 밖의 더없이 지나친 마음인 것이다. 사퇴하지 말고 안심하고 시사(視事)하라."
하였다.

 

진하 겸 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 서용보(徐龍輔) 등이 연경(燕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으로 치계(馳啓)하였다.

 

1월 13일 신유

민기현(閔耆顯)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1월 14일 임술

연주 서사관(練主書寫官) 김선(金銑)에게 가선 대부를 가자(加資)하고 효안전(孝安殿)의 향관(享官)·수릉관(守陵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1월 15일 계해

효안전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형조 참판        조득영(趙得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이달 초6일의 연석에서 본래 반시(頒示)하신 것을 반도 못 읽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담이 떨렸습니다. 아! 선왕(先王)의 더없이 정미(精微)한 의리와 더없이 엄중하게 지켜 온 것은 일성(日星)처럼 빛나고 금석(金石)처럼 견고하여 천지에 세워놓아도 어긋나는 것이 없고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 동토(東土)에 삶을 누리고 있는 모든 무리는 진실로 조금이라도 준수해야 하는 도리에 소홀히 한다면, 이는 괴귀(怪鬼)인 것이요 흉도(凶徒)인 것입니다. 나라에 삼척법(三尺法)017)                  이 있는데 어떻게 의리를 괴란시킨 죄를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모년(某年)의 일에 관계된 데 이르러서는 사실(事實)이나 문자(文字)를 막론하고 또한 마땅히 선조(先朝)께서 차마 말하지 못하였던 지극한 뜻을 본받고 선조께서 감히 말하지 못하게 했던 성유(聖諭)를 받들어 입으로 말하거나 글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 곧 신하의 분수요 사람의 도리인 것입니다. 또 혹 차마 못할 것을 차마 하여 예사롭게 말을 하고 감히 못할 것을 감히 하여 보통으로 등전(謄傳)한다면, 그 죄가 의리를 괴란시킨 것과 또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릇 오늘날 우리 전하(殿下)의 전정(殿庭)에서 북면(北面)한 자들이 누군들 이런 도리를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아! 저 대신(大臣)이 처음의 연석에서 진주(陳奏)할 적에 갑자기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이 당시에 올린 상서에 의거 포증(褒贈)하기를 앙청한 것은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두 상서에서 모두 가납(嘉納)을 받은 경모궁(景慕宮)의 포용하는 덕에 대해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사람들이 모두 흠송(欽誦)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서 내용의 구절 구절이 곧 선조께서 차마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이므로 세초(洗草)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아! 무릇 모년의 사실에 소속된 것으로 《후원일기(喉院日記)》에 기재되어 있는 것은 모두가 선왕의 끝없는 지극한 슬픔인 것입니다. 따라서 대리 청정(代理聽政)할 처음에 상소하여 세초하기를 청하였던 것이고 영묘께서 울면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등의 문자를 유치(留置)시키지 않게 한 것이 어찌 다만 선왕의 마음만 그러했을 뿐이겠습니까? 실은 영묘의 성의(聖意)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내려오면서 선왕께서는 연석(筵席)이나 사륜(絲綸)의 사이에서도 매양 모년에 관계된 일은 차마 다시 거론할 수 없다고 누누이 하교하신 것이 천 번 백 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계축년018)                   가을의 연교(筵敎)에서 말씀하시기를, ‘대저 모년의 사변(事變)은 차마 거론할 수 없기 때문에 감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차마 거론할 수 없다. 비록 양조(兩朝)의 아름다운 덕에 관계된 일이더라도 의당 차마 거론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덮어두고 드러내지 않기에 이른 지가 이제 거의 10년이나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살펴보건대, 오늘날 다시 두 사람의 상서에 관한 일을 거론하여 연석에서 아뢰는 일이 있기에 이른 것이 옳은 일입니까, 옳지 않은 것입니까?
이제 그의 말에 ‘이 상서가 모두 세초(洗草)에 들어간 줄을 처음에는 과연 몰랐었다.’고 했는데, 대저 세초라고 하는 것은 이런 등의 문자(文字)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두 상서를 세초에 넣지 않게 하였다면 선조께서 앙청한 것과 영묘께서 특별히 허락한 본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은 감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대신(大臣)이 과연 참으로 알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면 무슨 까닭으로 말했는지, 과연 참으로 몰랐다고 한다면 대신이 되어 가지고 그런 것을 몰랐다면 또 누가 그런 것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그의 말에 또 ‘선왕의 뜻을 계술(繼述)하고 아름다운 덕을 천발(闡發)해야 한다.’고 했는데, 선대왕(先大王)의 지사(志事)는 진실로 마땅히 계술해야 하는 것입니다만, 세초한 문자를 다시 거론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계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경모궁(景慕宮)의 아름다운 덕은 으레 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만, 두 사람의 상서를 극력 포장(褒奬)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천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의 충애(忠愛)와 통박(痛迫)이 이미 이토록 간절하다면 대신이 선왕을 섬긴 것이 또한 여러 해였는데, 어찌하여 선왕께서 다스리고 계실 때엔 한 번도 진달하지 않고서 이에 도리어 서둘러 전하 앞에서 누누이 아뢴단 말입니까? 정승에 제배(除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사람은 선왕께서 지켜 오던 일을 준수하고 선왕의 의리를 강명(講明)하여 환히 밝혀 드러내어 후세에 전해 보이는 것으로써 우리 전하의 계술하는 덕을 우러러 도와야 하는 것이며, 전하께서도 또한 선왕께서 지키던 것을 지키고 선왕의 의리를 의리로 삼아서 선왕께서 엄중히 분변하여 굳게 지킨 것은 또한 엄중히 분변하여 굳게 지키고, 선왕께서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했던 것을 또한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지를 버티게 하고 우주(宇宙)에 푯말이 되는 일분도 보탤 수 없고 일분도 감할 수 없는 대륜(大倫)·대의(大義)의 큰 관두(關頭)인 것입니다. 저 대신은 선조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이렇게 차마 못하고 감히 못하는 일을 차마 했으니, 이런 것도 차마 하는데 무엇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비록 선조의 죄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엄중한 처분을 내려 대의(大義)를 밝히고 성효(聖孝)를 빛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연석에서 분변하여 내어 보인 뜻은 하나는 천명하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준수하기 위한 것인데, 성효(誠孝)가 천박한 탓으로 능히 정신(廷臣)들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하여 바야흐로 깊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이 이에 분발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서 명백히 분변하고 통렬히 말을 하였으니, 내가 감탄하여 마음에 감동되는 점이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대신이 이미 몰랐었다고 했으니, 망발에 부치는 것이 충후하게 하는 도리에 해가 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지사(知事)        한만유(韓晩裕)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빈대(賓對) 때의 연설(筵說)을 들었습니다만, 우상이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의 포증(褒贈)을 청한 일로 인하여 누누이 말씀하신 사교(辭敎)는 모두가 지극히 정성스럽고 측달(惻怛)스러운 뜻에서 나온 것으로, 이런 사교를 듣고서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인 것입니다. 아! 저 박치원·윤재겸 두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옛날 우리 선대왕께서 춘저(春邸)에 계실 적에 통박(痛迫)스러운 지정(至情)에 의거하여 대조(大朝)께 《일기(日記)》를 세초(洗草)할 것을 앙청했는데 영묘께서 매우 가상하게 여겨 즉시 윤허하였으니, 여기에서 양성(兩聖)의 마음이 입술처럼 딱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선왕께서 등극하신 뒤에 금령(禁令)을 엄중히 설치하여 일이 모년(某年)에 관계된 것을 문자에 나타내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누군들 이를 모르겠습니까? 따라서 선왕을 보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이런 등의 요청이 이에 전하의 뜰에서 발론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보위(寶位)에 올라 행례(行禮)함에 있어 비록 보통의 시조(施措)에 관계된 일이라도 또한 선왕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선조(先朝)께서 차마 들을 수 없었던 것을 이제 어떻게 차마 주광(黈纊)019)                  에 진달할 수 있으며 옛날에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또한 어떻게 감히 하전(廈氈)020)                  에 아뢸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 두 사람에 대하여 드러내어 포증(褒贈)을 청한다면 이로부터 이후로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의 무리의 제방(隄防)이 어찌 쓴 듯이 없어지지 않겠습니 까? 이 또한 두렵고도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전하께서 연석에 임어하여 개유(開諭)하신 것이 이같이 간측(懇惻)하고 친절하게 되풀이 한 것은 진실로 선조(先朝)의 지사(志事)를 추술(追述)하는 데에 그 뜻이 있는 것이었는데, 저 대신은 물러가서 명을 기다리지 않고 위안(威顔)의 가까운 앞에서 허다한 둔사(遁辭)를 늘어 놓았습니다. 그뒤 차자(箚子)를 올려 변해할 적에는 전의 말을 더 보태어 기필코 위협적으로 버티면서 각승(角勝)하려 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재신(宰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말을 했는데 경에게도 또한 다시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러나 대신의 마음에 어찌 혹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장령 이지형(李之珩)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에 힘쓰고, 조정(朝廷)을 바로잡으며, 기강을 확립하고, 용사(用捨)를 분명히 하며, 탐오를 징계하고, 저축을 늘리며, 변금(邊禁)을 신칙시키고, 재이(災異)를 경계시키며, 융모(戎謨)를 잘 다스리고, 시끄러운 풍속을 진정시키는 데 대한 열 가지 조항을 진달하고, 끝에다 김달순(金達淳)이 처음의 연석에서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 두 사람에 대해 포증(褒贈)하기를 청한 일과 세초(洗草)한 두 상서를 찾아서 올린 죄에 대해 부기(附記)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진달한 열 조항은 모두 절실한 것이니 마땅히 깊이 유념하도록 하겠다. 그 가운데 품처(稟處)해도 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끝에 대신이 연석에서 아뢴 일에 대해 진달하면서 그대가 세초한 문자를 찾아서 바친 것을 대신의 죄로 삼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만약 세초 속에 들어간 일은 진주(陳奏)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말을 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옳지만, 사사로이 보관한 것은 대신이 한 일이 아니다. 찾아서 바친 데 이르러서는 곧 내가 명한 것이니, 만약 그것이 세초인 줄 알면서 찾아서 바친 것이 불가한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찾아서 바치게 한 것도 또한 불가한 것이다. 그대의 말은 경중을 모르고서 한 말이다."
하였다.

 

서유구(徐有榘)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서울의 각사(各司)·각영(各營)에서 을축년021)  의 회계부(會計簿)를 진달하였다. 【현재 있는 황금(黃金)이 2백 27냥, 은자(銀子)가 36만 3천 40냥 영(零), 전(錢)이 83만 5천 4백80냥 영, 면주(綿紬)가 1백 1동 30필(疋), 무명[木]이 5천 9백 81동 영, 저포(苧布)가 56동, 포자(布子)가 7백 60동 영, 쌀이 35만 3천 4백 50석 영, 전미(田米)가 5천 4백 90석, 콩이 3만 8천 8백 90석 영, 피잡곡(皮雜穀)이 1만 4천 5백 60석 영이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523면
【분류】재정-국용(國用)


[註 021] 을축년 : 1805 순조 5년.

 

 

1월 16일 갑자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대명(待命)하니, 하교하기를,
"경은 경의 견해를 고치려 하지 않고 나도 또한 나의 지조를 감히 고치지 않은 탓으로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경의 큰 도량으로 사람들의 말에 개의할 것이 뭐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서 대명하지 말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성밖으로 달려 나가니, 하교하기를,
"도성을 나가는 일은 더욱 지나친 것이다. 안심하고 즉시 도로 들어오라."
하였다.

 

부수찬 이유명(李惟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큰 의리(義理)는 하나는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감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은 감히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저 상신(相臣)도 또한 일찍이 선대왕의 뜰에서 북면(北面)하여 섬긴 적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차마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은 감히 말하지 않는다.’는 데 해당되는 일을 멋대로 전하 앞에서 진달함으로써 우리 전하로 하여금 송구스럽고 위축되어 몸을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은 지경에 이르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 통분스럽습니다. 차마 선왕께서 차마 들을 수 없던 것을 전하께서는 차마 들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까? 아! 우리 전하께서 일념(一念)으로 계술(繼述)한 것은 선조(先朝)의 지사(志事)이고 만세(萬世)토록 준수해야 할 것은 선조의 의리인 것입니다.
무릇 오늘날 신자(臣子)된 사람은 다만 마땅히 사시(四時)처럼 믿고 공벽(珙壁)처럼 받들어야 하는데, 건릉(健陵)의 묘역에 있는 나무가 한아름도 되기 전에 이런 아룀이 이런 정승의 입에서 차마 발론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만일 운향(雲鄕)에서 오르내리는 영령(英靈)이 차마 말하고 감히 일컫는 마음을 굽어살피신다면 애통해 하는 마음을 머금고 있는 것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한번 연설(筵說)을 반시(頒示)한 뒤로부터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누구인들 눈물을 삼키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재신(宰臣)이 제일 먼저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충분(忠憤)이 격렬하여 진절(眞切)하고도 통쾌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륜(彛倫)이 이를 힘입어 천하 후세에 면멸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은 성비(聖批)에서 ‘망발에 부치는 것이 충후하게 하는 데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 하교에 대해서는 천지처럼 큰 도량이지만 원한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망발이라고 하는 것은 무심히 잘못 말한 것이고 충후라고 하는 것은 작은 잘못을 불문에 부치고 미세한 하자를 덮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죄가 막중한 데 관계되는 것을 망발로 귀결시켜 가면서 충후한 풍속으로 면려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일을 오늘날에 다시 거론하는 것은 결단코 사람의 도리에 있어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또 세초(洗草)를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대히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경모궁(景慕宮)의 하해(河海) 같은 도량과 널리 포용(包容)하는 풍도에 대해서는 선대왕께서 재거(齋居)하실 때의 윤음(綸音) 가운데서 천명하여 유양(揄揚)한 것이 더할 수 없이 극진하였는데, 어찌 저 정승의 진달함을 기다려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지게 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상신(相臣)으로 하여금 스스로 분소(分疏)022)  하게 하여도 선조(先朝)의 죄인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분명한 처분을 내리시어 위로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령을 위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준행하는 의리는 본래 알기가 어렵지 않은 것인데, 이런 말이 이 대신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상리(常理)로 미루어 보건대 대신이 어찌 고의로 발론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 때문에 망발이라고 한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玉堂) 【부응교 여동식(呂東植), 교리 김계렴(金啓濂)·이기경(李基慶), 부교리 윤치정(尹致鼎), 수찬 이기숭(李基崇)·김상휴(金相休), 부수찬 김계온(金啓溫)이다.】 에서 연명(聯名)으로 된 차자(箚子)를 올려 김달순(金達淳)의 죄를 징토하고 속히 처분을 내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좀전에 요원(僚員)의 비답에서 이미 나의 뜻을 유시하였다."
하였다.

 

1월 17일 을축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여 김달순의 죄를 논핵하고 속히 위벌(威罰)를 내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내용을 다 알았다."
하였다.

 

1월 18일 병인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인일제(人日製)의 시험을 보였다.

 

정언 임업(任㸁)이 상소하여 김달순(金達淳)의 죄를 논핵하고 속히 처분을 내리기를 청하고 끝에 진달하기를,
"연석에 나아가 있던 대신(臺臣)이 다만 솔직하게 그 안중에 군부(君父)를 무시한 죄를 척언(斥言)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이에 도리어 그의 성세(聲勢)를 도와 속히 윤종(允從)할 것을 청하였는가 하면, 계속해서 장주(章奏)를 올려 현저히 우단(右袒)023)  하는 뜻을 보이면서 기필코 각승(角勝)하고야 말려고 했습니다. 청명한 조정의 이목관(耳目官)이 도리어 권세있는 정승의 응견(鷹犬)으로 쓰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등의 염치없고 두려움없이 임금을 배반하고 당여를 위해 사력(死力)을 바치는 부류들은 버려두고 묻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그날 입시했던 대신(臺臣) 이인채(李寅采)와 이정륜(李廷輪)에게는 속히 찬배(竄配)시키는 형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비답에서 이미 다 하유하였다. 이인채·이정륜의 일은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부제학 서유구(徐有榘)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제의 상소에서 같은 집안에서 교대로 양록(兩錄)024)  을 주관하는 것은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가 된다고 아뢴 데 대해 비지(批旨)에는 힘써 찾아보라는 것으로 책망하시고 이미 전례가 있다고 하유하였습니다. 전해 오는 관규(館規)를 신이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오직 고(故) 중신(重臣) 김종정(金鍾正)은 부제학으로서 본관(本館)의 권점(圈點)025)  을 주관하였고 고 상신(相臣) 김치인(金致仁)은 영상으로서 도당록(都堂錄)의 권점을 주관하였습니다. 고 중신과 고 상신은 비록 동종(同宗)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원족(遠族)이니, 이를 가져다가 신의 한집안의 지친(至親) 사이와 비유한다는 것은 전혀 걸맞지 않는 것입니다.
참조할 수 있는 전례를 가지고 말하여 보건대, 선조(先朝) 임자년026)  에 내각(內閣)에서 장차 직각(直閣)의 회권(會圈)을 행하려 할 적에 신이 각직(閣職)에 대죄(待罪)027)  하고 있었는데 선신(先臣) 서호수(徐浩修)와 신의 재종 숙부(再從叔父)인 고 판서(判書) 서정수(徐鼎修)가 모두 원임(原任)으로서 검교(檢校)에 차하(差下)되었습니다만, 선신이 한집안에서 세 사람이 권좌(圈坐)에 동참하는 것은 편치 못하다는 것으로 진달하여 결국 두 사람은 검교에 차하하는 명을 정지하였었습니다. 옛날 영묘(英廟) 때 신의 증조부(曾祖父) 문민공(文敏公) 서종옥(徐宗玉)이 동전(東銓)028)  의 장관으로 있을 적에 고 판서(判書) 이주진(李周鎭)이 병조 판서에 제배되었는데, 신의 증조부는 남매(娚妹)가 나란히 문무의 양선(兩選)을 주관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으로 오랫동안 버티다가 견삭(譴削)을 당하기에 이르렀었습니다.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지만 어떻게 감히 가훈(家訓)을 변모(弁髦)처럼 여겨 조정의 체통을 무너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전삭(鐫削)을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이미 이와 같으니, 특별히 체직을 허락한다."
하였다.

 

김이도(金履度)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윤치성(尹致性)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인채(李寅采)를 철산부(鐵山府)에, 이정륜(李廷輪)을 북청부(北靑府)에 정배하였다.

 

1월 19일 정묘

박종경(朴宗慶)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정동관(鄭東觀)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정언 임업(任㸁)이 연명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이 김달순(金達淳)에 대한 징토의 논의는 곧 그가 스스로 범한 것으로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통분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이것을 어찌 신하의 분수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국가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대청(臺廳)에 나와서 좌기(坐起)하였으나 헌대(憲臺)의 인원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의당 발론해야 할 계사(啓辭)를 발론하지 못한 채 또다시 오늘도 지나쳐 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란 말입니까? 신 등은 사헌부의 여러 대신(臺臣)들의 사유가 사실인지 고의인지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습니다만, 장령 윤제홍(尹濟弘)의 집은 하루 저녁 방아 찧을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곳에 있고 지평 김처암(金處巖) 또한 들풀이 있는 근교(近郊) 사이에 있으며 장령 황기천(黃基天)은 바야흐로 실직(實職)에 있으면서 당초 말미를 받은 일이 없는데도 갑자기 외방에 가 있다는 이름을 핑계하고 있으니, 이를 엄중히 징계하지 않으면 국시(國是)가 정해질 수 없고 임금의 기강이 진기될 수 없습니다. 신 등의 의견에는 헌부의 여러 대신(臺臣)들 가운데 윤제홍·김처암·황기천에게 모두 찬배하는 형법을 시행함으로써 인신(人臣)이 되어 이해(利害)를 돌아보는 자들을 징계시켜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헌부 여러 대신(臺臣)들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 가운데 황기천은 실직으로서 말미를 받은 일이 없는데도 외방에 있다고 일컬은 것은 더욱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원찬(遠竄)시키는 형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영의정 서매수(徐邁修), 좌의정 한용귀(韓用龜)가 연명하여 차자를 올려 스스로 인책(引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지난번 빈연(賓筵)에서 삼가 누누이 내리신 성교(聖敎)를 받들건대, 선왕의 지사(志事)를 준행할 뜻이 엄중하고도 측달(惻怛)하였으며, 진심을 다 토로한 하유가 되풀이되고 정녕(丁寧)하였습니다. 신 등은 모두 선조(先朝)의 구물(舊物)들로 이 분부를 받들어 들으니 절로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신 등이 그날 이우(李㙖)의 일에 대해 처분을 내릴 것을 앙청한 것은 진실로 의리를 천명하고 징토(懲討)를 엄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연석에 나온 대신(臺臣)들이 서로 이어 진달한 내용에도 비록 상략(詳略)의 같지 않은 점은 있었으나 목소리를 함께하여 징토하는 것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곧 정언 임업(任㸁)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대신(臺臣)들이 우상의 토죄를 청하지 않고 이에 도리어 그의 성세(聲勢)를 도와 극력 윤종(允從)할 것을 청했다는 것으로 죄를 성토한 것이 지극히 엄했기 때문에 신 등은 놀랍고 두려움이 마음에 가득하여 몸둘 데를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때 대신(臺臣)들이 청한 것은 단지 이우 등의 일에 관한 것이었고 신 등의 이 청은 이미 대신들보다 먼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사람의 말은 단지 대신들만 논하였을 뿐 신 등에게는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어찌 신 등이 직책이 대관(大官)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기 때문에 우선 관대히 용서하여 줌으로써 그 자처(自處)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신 등이 처하여 있는 의리에 있어 어떻게 감히 자신의 성명(姓名)이 우연히 거론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스스로 죄가 같은데도 요행히 피하게 된 것을 달갑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처분을 내려 물의(物議)에 사죄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 등의 이 일은 과연 무슨 뜻인가? 대신(臺臣)의 상소에서 이인채(李寅采) 등을 논핵한 내용에서 이우를 토죄한 것으로 죄를 삼지 않고, 이인채 등이 대신(臺臣)으로서 그날 연석에 나와 있었으면서 군부(君父)를 무시한 죄를 척언(斥言)하지 않고, 도리어 성세(聲勢)를 도운 것으로 죄를 삼은 것은 그 말이 매우 그르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청한 것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경 등이 이에 갑자기 이우의 일을 들고 나와서 또 ‘성세(聲勢)’라는 두 글자를 스스로 담당하는 것은 진실로 과매(寡昧)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경 등의 말이 이미 이와 같으니, 두 대신(臺臣)에 대한 처분을 환수(還收)하겠다. 경 등은 안심하고 시사(視事)토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서매수(徐邁修)와 좌의정 한용귀(韓用龜)가 말하기를,
"신 등이 삼가 내리신 비지(批旨)를 살펴보건대, 신 등은 만번 죽어도 속죄하기가 어려운 죄를 실로 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날의 연석에서 삼가 누누이 간곡한 성교(聖敎)를 받들었으니, 신 등이 비록 매우 어리석고 미혹하다고 해도 또한 병이(秉彛)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어찌 엄중히 공척하고 분명히 변명하여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하는 의리를 본받으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요상(僚相)에 관계된 것이어서 묵묵히 물러나왔으니, 척언(斥言)하지 않은 죄를 논한다면 실로 대신(臺臣)보다 더한 점이 있습니다. 또 생각건대, 오늘의 연명하는 차자는 말이 뜻을 통달시키지 못하였고 단지 이우의 일만을 거론하여 스스로 인책(引責)하는 단서로 삼은 것은 말을 분명하게 하지 못한 것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신 등의 죄는 부월(鈇鉞)도 오히려 가볍기 때문에 금오(金吾)029)  로 달려가 엎드려 삼가 엄명(嚴命)을 기다립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얼마 전의 비답은 곧 이인채의 무리에 대한 일을 논한 것이다. 어찌 경 등에 대해 한 말이겠는가? 대개 이인채의 상소는 박하원(朴夏源)의 처분이 있은 뒤에 나왔고 이정륜의 상소는 이우의 처분이 있은 뒤에 나왔으니, 경 등이 연석에서 시행하기를 청한 것과는 본래 같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요상(僚相)은 서로 공경하는 것이 자별한 것이겠는가? 그날 경 등이 아뢴 내용은 각기 달랐으므로 내가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어찌 구별하지 않고 혼동하여 의심할 수 있겠는가? 명을 기다리는 것은 더없이 부당한 것으로 그지없이 지나친 처사이다. 경 등은 안심하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삼사(三司) 【대사간 신헌조(申獻朝), 장령 조수민(趙秀民)·이경삼(李敬參), 교리 이기경(李基慶), 정언 임업(任㸁), 부수찬 김계온(金啓溫)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김달순(金達淳)의 죄는 이루 주토(誅討)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본디 음험하고 궤휼스런 성품으로 어리석고 외람된 습관을 이루어 불세(不世)의 총애를 지나치게 받았던 탓으로 앉아서는 안될 직책을 더럽혔으므로, 식견이 있는 이들이 가만히 탄식하여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그가 정승에 제배(除拜)된 처음에 성상(聖上)께서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고 돌보는 은총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도 보답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교만 방자한 마음을 돋구어 의리를 빙자해서 근거없는 이야기를 창도하여 내고 천양한다는 명칭을 핑계하여 망측한 논의를 함부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 연석(筵席)에 나아가는 날에 갑자기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을 포증(褒贈)하자는 일을 방자하게 우러러 아뢰었고 또 감히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거론할 수 없는 두 상서(上書)를 예람(睿覽)에 올리기에 이르렀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토록 그지없이 흉악하고 패리(悖理)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 우리 선대왕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효도는 신명(神明)에 달통되고 의리는 정미(精微)로움을 천명하여 ‘감히 말할 수 없고 차마 말하지 않는다.[不敢道不忍言]’는 여섯 글자를 권도(權道)에 통달시키고 경도(經道)에 합치시키는 방도로 삼으신 것이 일성(日星)처럼 환하고 단청(丹靑)처럼 빛났습니다.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진실로 이 의리에 혹시라도 소홀히 하는 것이 있다면, 이는 흉도(凶徒)인 것이요 괴귀(怪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초(洗草)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무릇 모년(某年)의 사실에 소속된 것으로 《정원일기(政院日記)》에 기재되어 있는 것은 선왕(先王)의 끝없는 지극한 슬픔이기 때문에 대리(代理)할 처음에 곧바로 세초할 것을 청한 것입니다.
아! 저 김달순도 또한 일찍이 선왕의 뜰에서 북면(北面)하여 섬긴 적이 있는 사람인데 무슨 심장(心腸)을 지녔기에 이에 감히 이를 등사하여 주달하는 것을 이토록 무엄하게 한단 말입니까? 우리 전하께서 차마 받들어 들을 수 없다는 하교를 내리시기에 이르렀는데도 전혀 송구스럽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협박하여 각승(角勝)하려는 의도를 환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날의 광경을 상상하여 보면 천리가 멸절되고 기강이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일념(一念)으로 계술(繼述)하는 것은 곧 선조(先朝)의 지사(志事)이고 준수하는 것은 선조의 의리인데, 저 김달순은 이에 선조의 신하로서 선조의 전칙(典則)을 무시한 채 선왕께서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을 전하께서 차마 볼 수 있다고 여기고, 선왕께서 차마 들을 수 없던 것을 전하께서 차마 들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의 죄범을 논한다면 다만 전하의 죄인이 될 뿐만이 아니라 실은 선대왕의 죄인인 것이고, 다만 선대왕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곧 영묘와 선세자의 죄인인 것입니다. 이런데도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루지 않는다면 선왕의 의리가 이로 연유하여 점점 회색(晦塞)되고 국가의 기강이 이에 연유하여 더욱 궤란되어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우의정 김달순에게 우선 관직을 삭탈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시키는 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달순이 처음의 연석에서 아뢴 내용이 비록 용서할 수 없는 데 관계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오히려 아무 생각이 없이 한 말에 부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올린 상소의 내용에 이르러서는 연교(筵敎)를 승문(承聞)한 뒤에 있었으며, 두려워하여 뉘우칠 줄 몰랐을 뿐만이 아니라 불만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드러내어 보였음은 물론 그 가운데 한두 구어(句語)는 가슴이 떨리고 뼈에 사무치는 것이었으니, 이는 고의로 범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법을 굽혀 용서함으로써 의리가 밝혀지지 못하고 백성들의 뜻이 귀일되지 못하게 할 수 없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월 20일 무진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삭출(削黜)시킨 죄인 김달순(金達淳)에게 우선 중도 부처(中途付處)030)  의 형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훈계는 오직 감히 말할 수 없고 차마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데, 저 이른바 간서(諫書)라고 하는 것은 실로 감히 말할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 가운데 가장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김달순이란 자가 이에 감히 포증(褒贈)하자는 등의 의견으로써 어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아뢴 것은 이미 선왕의 정미한 의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런 등의 사적(事蹟)은 이미 세초(洗草)에 들어간 것이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사람의 처지에서 어떻게 감히 마음에 품고 입으로 말하며 이를 글로 써서 전하의 앞에 올리기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조항으로도 그가 방자하여 기탄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상께서 차마 들을 수 없다는 하교를 내려 분명하게 마음을 내어 보이고 간절하게 개유(開諭)하기에 이르러서는 짐승과 물고기도 감동하고 귀신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는데, 저 사람은 유독 무슨 마음이기에 끝내 고칠 줄 모르고서 군부(君父)를 무시한 채 한결같이 위협하는 말을 한단 말입니까? 신하의 분수와 국가의 기강이 이에 땅을 쓴듯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나중의 상소 내용에 이르러서는 단지 연석에서 본래 반시(頒示)한 것을 인의(引義)의 단서로 삼았는데 전편(全篇)의 사의(辭意)가 이기기를 힘쓰는 말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한두 개의 구어(句語)에는 불만스럽게 여기는 뜻이 현 저하게 있었습니다. 신 등은 징토(懲討)에 급급하여 그 정절(情節)을 상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비지(批旨)의 내용에 있는 네 글자의 하교를 받들기에 이르러서는 서로 돌아보고 눌러 막으니, 심담(心膽)이 함께 찢어지는 듯하여 곧바로 죽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삭출시킨 것은 가벼운 감죄(勘罪)이므로 국인들의 분노를 풀 수가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군정(群情)을 굽어 따르시어 속히 의당 시행하여야 하는 형률(刑律)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현재의 일에 대해 상소와 차자를 모두 세 번 올렸는데 횟수가 더할수록 내용의 강도가 높았고 그 말이 모두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일체 공의(公議)에 부칠 따름이다. 실정과 병이 이미 이러하다니 본직(本職)의 체임을 허락한다."
하였다.

 

첨지(僉知) 이동형(李東馨)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의 무리가 흉역(凶逆)들의 와굴(窩窟)이 되어 무진년031)  ·기사년032)  에서 무인년033)  ·기묘년034)  에 이르기까지 10년사이에 기반을 잡고 흉모(凶謀)와 휼계(譎計)를 빚어낸 것이 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의 무리를 사주해 내어 안면을 바꾸고 글을 올리게 하였으니, 진실로 병이(秉彛)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누군들 살점을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선세자(先世子)의 치욕을 참으면서 그들이 모인 곳을 숨겨 주는 큰 덕으로 특별히 관대하게 용서하여 준 것입니다.
우리 선대왕에 이르러서도 또한 선지(先志)를 잘 준행하여 그들을 놓아 두고 묻지 않았으나,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는 절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으니, 아! 성대합니다. 다만 성모(聖慕)가 망극하고 지극한 슬픔이 마음에 간직되어 있었으므로 궁박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년(某年)의 일에 관계된 것은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거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영묘께 세초(洗草)할 것을 청하였고 영묘께서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해동(海東)의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다시 어떻게 감히 전하의 뜰에서 입을 열어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저 정승도 또한 하나의 해동의 신자인 것인데, 유독 무슨 마음으로 감히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거론할 수 없는 일을 발론하면서 두 사람에게 시호와 관작을 추증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는 참으로 두 사람을 충신(忠臣)으로 여긴 것입니까? 만일 이 두 사람을 충신으로 여겨서라면, 역적 김상로·홍계희도 또한 충신이라고 하면서 관작과 시호를 추증하라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의 차자 내용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말하기를,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성심(聖心)으로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다.’고 운운했으니, 어쩌면 음참(陰慘)스럽고 부도(不道)스러운 것이 이토록 극도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께서 어찌 일찍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을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발탁하여 정승의 자리에 앉히고 의지하는 마음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도 일푼 반푼도 공효를 바쳐 보답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이에 도리어 처음 연석의 주대(奏對)에서 우리 선왕(先王)을 무함하고 핍박하며 우리 전하에게 극력 항거하면서 방자하고 기탄없는 것이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도 한두 신하가 앞장서 항론(抗論)한 사람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여러 날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조정에서 아직껏 피를 흘리고 눈물을 삼키면서 일제히 소리를 함께 하여 토죄하면서 극력 청하여 허락을 받고야 말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불꽃 같은 권세에 압도당하여 감히 구기(口氣)를 내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데도 놓아둔다면 한적(漢賊)은 양립(兩立)할 수 없다035)  는 상황을 다시 오늘날에 보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임금의 재량으로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리시어 출척(黜陟)시키는 법을 크게 밝히소서. 저 상신(相臣)은 본디 미련하고 무식한 탓으로 의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는데다가 서형수(徐瑩修)에게 종용을 당하여 이런 흉악하고 패리(悖理)한 짓을 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아! 저 서형수는 본래 역적 홍계능(洪啓能)을 아비처럼 섬김으로부터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천 가지 만 가지 요악(妖惡)이 모두 그의 몸에 집결되어 진실로 이미 일세(一世)의 침 뱉고 욕하는 수모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비 서명응(徐命膺)은 일찍이 이 두 사람과 함께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막아주면서 교대로 흉서(凶書)를 올렸기 때문에 이를 빙자하여 벗어날 계교를 꾸미고서 암암리에 사주하여 넌지시 시험해보는 거조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두 사람의 포증(褒贈)을 청한 것은 곧 자기 아비의 포증을 청한 것입니다. 먼저 조수민(趙秀民)이 상소를 나오게 하여 덕색(德色)을 보이는 바탕이 되기를 구하고 계속해서 두 사람의 포증을 권함으로써 대대로 이루어 놓은 죄악을 감추려 했으니 그가 자신을 위한 꾀는 공교하게 하였으나 유독 귀신의 눈이 횃불 같고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먼 변방으로 축출시킴으로써 영원히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지 못하게 해서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민지(民志)를 귀일시키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내가 상신(相臣)의 연주(筵奏)에 대해 놀랍고 통분스럽게 여긴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는 것이겠는가? 첫째는 선왕(先王)의 정의(精義)를 준행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도 선왕의 정의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정신(廷臣)이 이에 의거 성토(聲討)하는 것은 내가 진실로 옳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내가 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대저 김 상로·홍계희가 김상로·홍계희라고 지칭하게 된 이유는 영묘의 하교가 있었고 선왕(先王)께서 이를 경건히 준행해 왔기 때문인 것이다. 이밖에 모년(某年)에 관계된 것을 모두 감히 말할 수 없는 가운데 붙인 것은 그 또한 영묘의 성의(聖意)이고 선왕께서 경건히 준행하여 온 것이다. 그런데 비록 김상로·홍계희의 일에 대해서도 선왕께서 정신(廷臣)들이 다반사(茶飯事)로 말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은 차마 들을 수 없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인 것인데, 더구나 김상로·홍계희 이외의 일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에 감히 말할 수 없고 감히 들을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의 정의(精義)에 부합되어 천지에 세워놓고 귀신에게 질정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 뒷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성심을 다하여 감히 어기지 말고 준행해야 하는 것이다. 선왕께서 감히 조금이라도 영묘께서 후손을 위하여 남겨준 모유(謨猷)를 어기지 않았던 것을 나 소자(小子)가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선왕께서 지켜 온 의리를 어길 수 있겠는가?
삼가 임자년036) 이우(李㙖)의 상소에 대해 눈물을 흘리면서 효유(曉諭)한 것과 박하원(朴夏源)의 상소가 올려지지 않자 엄중한 하교를 내린 것과 재거(齋居)하면서 내린 윤음(綸音)을 우러러 살펴보건대, 대성인(大聖人)의 지공 지엄(至公至嚴)하고 지정 지미(至精至微)한 심법(心法)은 천만세 뒤에 비록 삼척 동자라도 모두 우러러 알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명색이 진신(搢紳)으로서 선왕을 북면(北面)하여 섬기고 오늘날에 이르러 나를 섬기는 자들이 어떻게 감히 좌우에서 의리에 어긋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선왕께서 지켜온 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도 이른바 용서없이 죽여야 하는 것이고, 선왕께서 지켜온 것에 지나치는 자도 이른바 용서없이 죽여야 하는 것이니, 내가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사의(私意)를 개입하여 이 의리를 올리고 내리어서 무겁게 하거나 가볍게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상소가 저 사람을 성토했다는 것으로 스스로 범한 죄를 용서한다면 어떻게 이에 반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겠는가? 기백(畿伯)을 논핵한 일에 이르러서는 또한 기백이 상신(相臣)을 사주하는 것을 그가 과연 눈으로 보고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가 눈으로 보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감히 자취가 없는 일을 임금에게 고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는단 말인가? 이 또한 협잡(挾雜)된 마음이다. 그러나 위의 사건(事件)에 견주면 또한 여사(餘事)에 속하는 것이다. 이제 준수하는 것을 삼가고 호오(好惡)를 밝히는 때를 당하여 이런 등의 부류들을 노쇠하다고 해서 용서할 수는 없다. 첨지 이동형에게 속히 찬배(竄配)하는 형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윤제홍(尹濟弘)을 창원부(昌原府)에, 김처암(金處巖)을 순천부(順天府)에, 황기천(黃基天)을 용천부(龍川府)에 정배하였다.
1월 21일 기사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김면주(金勉柱)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정운(李貞運)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직보(李直輔)를 성균관 좨주로 삼았다.

 

삭출(削黜)시킨 죄인 김달순(金達淳)을 홍주목(洪州牧)에 중도 부처(中道付處)하고, 첨지(僉知) 이동형(李東馨)을 이원현(利原縣)에 찬배하였다.

 

1월 22일 경오

주강(晝講)하였다.

 

삼사(三司) 【대사헌 김면주(金勉柱), 대사간 이정운(李貞運), 집의 이덕현(李德鉉), 사간 이원팔(李元八), 부응교 여동식(呂東植)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중도 부처 죄인 김달순(金達淳)에게 원찬(遠竄)시키는 형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지평 김노응(金魯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사해(四海)에 표준이 되는 효성으로 천고에 없는 변고를 당하였는데 지극한 슬픔이 마음에 걸려 있어 천승(千乘)의 융숭한 봉양도 즐거움이 없었고 탁월한 식견(識見)은 천고에 뛰어나 한가지를 굳게 지켜 동요하지 않았으며, 금평(金秤)은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하지 않았고 요경(瑤鏡)은 드러나지 않은 것도 간파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와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이 과조(科條)는 다르지만 귀결은 같게 되었고 천리와 인정이 다같이 시행되어 어긋나지 않게 된 것이 모두 24년이었습니다. 다만 이 세초(洗草)에 관한 한 가지 일은 곧 우리 동방의 4백 년 이래 처음 있는 더없이 엄하고 더없이 중대한 대의리(大義理)인 것입니다.
선대왕께서 보위(寶位)에 계실 때나 우리 전하께서 사복(嗣服)하신 뒤를 막론하고 진실로 이런 등의 일에 관계된 것은 비록 천백 년 뒤일지라도 북면(北面)하여 섬기는 부류들은 진실로 금석(金石)처럼 지키고 단청(丹靑)처럼 믿어야 하는 것은 물론, 오직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다.[不忍言不敢道]’는 여섯 글자를 마음에 새긴 연후에야 이적(夷狄)과 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은 대관(大官)이 되어 방자하게 세초에 들어간 두 개의 상소를 거론하여 감히 전하의 뜰에서 포증(褒贈)할 것을 청하였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비록 세초가 있기 이전이라도 남의 신자(臣子)가 된 마음에 있어 진실로 감히 입을 열어 말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세초한 이후이겠습니까가? 다만 선대왕의 망극한 슬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아! 우리 영묘의 자애로운 덕도 백세 뒤에 누군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완고하게 아는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는 것처럼 하면서 서둘러 앞장서 나와서 공공연히 멋대로 드러내어 말을 하였으니, 그가 농간을 부리는 흉계(凶計)에 있어서는 잘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유독 우리 영묘와 경모궁(景慕宮)·선대왕(先大王)의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이 조정을 오르내리면서 날마다 굽어 살핌이 이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조(先朝)에서는 감히 말할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감히 말할 수 있고 차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천하 만고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세 성인(聖人)037)  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곧 전하의 죄인인 것이며 천하 만세의 죄인인 것입니다. 빈대(賓對)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애통해 하는 하교가 너무도 정녕하고 비통하였으므로 그때 연석(筵席)에 있던 여러 신하들이 눈물을 감추고 슬픔을 억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그런 하교를 받든 저 사람은 태연히 아무런 동요도 없었고 주대(奏對)하는 말이 오직 각승(角勝)만을 주로 하였습니다. 연석에서 물러가고나서는 애당초 명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의기 양양하게 재실(齋室)로 달려갔으며, 끝에 가서 뒤늦게 올린 한장의 상소에서는 흉악하고 패리(悖理)한 기세를 더욱 방자하게 부려 전편(全篇)의 지의(旨意)가 곧 난역(亂逆)을 달게 여기는 하나의 단안(斷案)이었습니다. 간언(諫言)을 숨긴 것이 그 근저(根柢)가 된다고 한 것이 가장 심한 것인데, 그 심장(心腸)을 궁구하여 보면 어떻게 감히 하지 않아야 할 데에 과감히 하고 차마 못할 데 차마 하는 것이 이토록 극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당초의 세초(洗草)는 오로지 두 성인(聖人)038)  의 자애로움과 효성스러움에 의한 작위(作爲)에서 나온 것인데 그가 이른바 숨겼다는 것은 누구이고 근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끝부분에 다 개석(開釋)하여 도달(導達)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성상께서 혹 깨닫지 못한 점이 있어서 완곡한 말로 이야기하여 천심(天心)을 감동시켜 돌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의 하교는 사지(辭旨)가 그지없이 간곡하고 의리가 엄정하여 너무도 명백하고 통쾌한 때문에 남은 것이 있지 않았으니, 신은 이밖에 또 무슨 남은 뜻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꾹 참으면서 발론하지 않은 것을 이처럼 추후에 후회하고 있으니, 곧 이 한 조항으로도 무장(無將)039)  의 주벌(誅罰)과 불경(不敬)스런 형률을 이 사람에게 시행하지 않고 누구에게 시행하겠습니까?
얼마나 다행한지 재신(宰臣)의 한 통의 상소가 능히 만세의 강상(綱常)을 부등켜 세워 충의(忠義)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난적(亂賊)의 기세를 꺾고 있었습니다만, 끝내 처분을 아끼시니 신은 삼가 성조(聖朝)의 큰 실형(失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주참(誅斬)하는 형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여러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대호군 채홍리(蔡弘履)가 상소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려 허락하였다.

 

1월 23일 신미

주강(晝講)하여 《논어(論語)》의 예(禮)의 용(用)에 관한 장(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禮)를 행용하는 데 있어서 화합하게 하는 것이 귀하다고 할 경우에는 예(禮)가 체(體)가 되고 악(樂)이 용(用)이 되는 것이며, 화합을 귀히 여기면서 또 예로 이를 절제해야 한다고 할 경우에는 반대로 악(樂)이 체가 되고 예(禮)가 용이 되는 것이다. 예는 경(敬)을 주안점으로 하고 악은 화합을 주안점으로 하고 있는데 마음을 가지고 말한다면 예가 마땅히 체가 되어야 하고 악이 마땅히 용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검토관 김상휴(金相休)가 말하기를,
"예악은 서로 체와 용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였다.

 

금오(金吾)에서 김달순(金達淳)을 길주목(吉州牧)으로 원찬(遠竄)시킬 것을 아뢰었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원찬 죄인 김달순(金達淳)에게 극변(極邊)에 원찬시키는 형벌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1월 24일 임신

주강(晝講)하여 《논어(論語)》의 학문에 뜻을 둔다고 한 장(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는 것을 먼저하고 행하는 것을 나중에 하는 것이 학문의 순서인 것이다. 학문에 뜻을 둔다고 한 이 장(章)의 지(志) 자의 뜻을 안다[知]는 데 속하는 것이고 입(立) 자의 뜻을 행한다[行]는 데 속하는 것이며, 불혹(不惑)에서 이순(耳順)까지는 아는 데 관계된 일이고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을 어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행하는 데 관계된 일이다. 그렇다면 삼십이입(三十而立)이란 말을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란 말 앞에 두어 또 마치 행(行)이 지(知)보다 앞에 있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검토관 김상휴(金相休)가 말하기를,
"학문의 순서는 지(知)가 행(行)보다 앞서는 것입니다만 대저 지행(知行)은 함께 향상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효안전(孝安殿)의 연제(練祭)가 있은 뒤 경모궁(景慕宮)의 제향(祭享)에 음악을 쓰는 것의 당부(當否)에 대해 대신(大臣)들에게 문의(問議)하여 품처(稟處)하게 할 일로 하명하셨으므로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에게 문의하였습니다. 영의정 서매수(徐邁修)는 말하기를, ‘음복례(飮福禮)를 준례대로 행할 수 없다면 음악을 쓰는 것의 난편(難便)에 대해서는 이동(異同)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한용귀(韓用龜)는 말하기를, ‘지금 음악을 쓰는 것의 난편에 관한 것은 음복하는 의절(儀節)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의 의논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시원(李始源)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한용탁(韓用鐸)을 공조 판서로, 박종래(朴宗來)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금오(金吾)에서 김달순(金達淳)을 경흥부(慶興府)의 극변(極邊)으로 원찬(遠竄)시킬 것을 아뢰었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여 극변 원찬 죄인 김달순(金達淳)에게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는 형벌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양사(兩司) 【집의 이덕현(李德鉉), 사간 이원팔(李元八) 지평 이조(李潮)·김노응(金魯應)이다.】 에서 아뢰기를,
"아! 슬픕니다. 이동형(李東馨)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더없이 엄중한 것은 모년(某年)의 의리이고 지극히 정미(精微)한 것은 선조(先朝)께서 지켜 온 의리인 것입니다. 이런 때문에 여기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은 똑같이 용서없이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 김달순이 천양(闡揚)한다는 것을 핑계하여 감히 거론해서는 안되는 일을 감히 거론하였으니, 이미 더할 수 없이 흉패(凶悖)스러운 것으로 참으로 드물게 있는 변괴(變怪)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동형이 일의 기회를 인연하여 성토(聲討)를 빙자하면서 또 다시 차마 거론할 수 없는 말을 차마 거론하여 괴란(壞亂)시키고 협잡(挾雜)하려는 계교를 드러내어 부렸으니, 그가 대의(大義)를 간범하여 성심(聖心)에 슬픔을 끼친 것은 다같이 난역(亂逆)과 같은 궤도로 귀결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엄하고 기탄없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대개 김달순(金達淳)의 죄는 의리를 간범한 데 있고 이동형의 죄는 의리를 괴란시킨 데 있는데, 간범한 것이 이미 인신(人臣)의 극죄(極罪)가 되었으니 괴란시킨 것도 또한 어찌 인신의 극죄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런데도 심상하게 조처한다면 선대왕께서 28년 동안 지켜온 지극히 정미(精微)한 대의리(大義理)가 장차 이들에 의해 무너지고 마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간담이 떨립니다. 이는 진실로 전하의 죄인인 것이며 또한 두 조정의 죄인인 것입니다. 바야흐로 대의(大義)를 밝히고 민지(民志)를 귀일시키는 때를 당하여 이런 등의 괴귀(怪鬼)한 흉도(凶徒)들을 만약 가볍게 감죄(勘罪)하여 원찬(遠竄)시키는 데서 그친다면 왕장(王章)을 신장(伸張)시킬 방법이 없게 되고 여정(輿情)의 분노를 풀 수 있는 날이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원찬 죄인 이동형에게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는 형벌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특별히 평안 감사 이면긍(李勉兢)·병사 오의상(吳毅常)에게 월봉(越俸) 3등040)  을 명하였으며, 월경죄(越境罪)를 범한 죄인 최덕래(崔德來) 등에 대해서는 건륭(乾隆) 7년의 예(例)에 따라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나누어 처단하도록 명하였다.


 

대호군(大護軍) 채홍리(蔡弘履)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치사(致仕)를 허락했는데 이제 졸서(卒逝)했다는 단자(單子)를 보니 매우 슬프다. ‘봉조하(奉朝賀)’란 세 글자를 특별히 원함(原銜)에다 쓰라는 것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1월 25일 계유

부제학 이시원(李始源)을 체직시키고 정동관(鄭東觀)으로 대신하였다.
금오(金吾)에서 김달순(金達淳)을 남해현(南海縣)의 절도(絶島)에 안치시킬 것으로 아뢰었다.


 

1월 26일 갑술

주강(晝講)하여 《논어(論語)》의 말한 대로 먼저 실행한다는 장(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보다 먼저 행하고나서 말이 행동을 따르게 하라고 자공(子貢)에게 답한 것은 어찌 자공의 부족한 점이 언어(言語)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로 면려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또 다만 자공에 대해 논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범인(凡人)에 이르러서도 매양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니, 강관(講官) 등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절도(絶島)에 안치시킬 죄인 김달순(金達淳)에게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는 형벌을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대사헌 이의필(李義弼), 집의 이덕현(李德鉉), 지평 이조(李潮)이다.】 에서 아뢰기를,
"대계(臺啓)에 있어 상피(相避)하는 법규는 동성(同姓)이든 이성(異姓)이든 사촌(四寸)을 상한선으로 하고 있는데 소족(疏族)에 대해서도 인피(引避)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비록 이것이 윤상(倫常)을 돈독히 하는 후의(厚誼)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실상은 전거로 삼을 만한 고례(古例)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제 이 합계(合啓)는 전계(前啓)로서 감죄(勘罪)하기를 청한 것이 모두 43계(啓)인데 1계(啓) 가운데 혹 3, 4인이 겸한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로 그 근본을 따져본다면 거개가 모두 벌열 세족(閥閱世族)인 대관(臺官)이 족친(族親)임을 이유로 인피(引避)했을 경우 이들을 모두 체면(遞免)시킨다면 다시 어느 곳에서 그 대리자를 데려 올 수 있겠습니까? 자주 체직시키는 데 대한 폐단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대관의 지망(地望)은 그 장차 가벼워질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가벼워질 것이니, 또한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이어 삼가 생각건대 만일의 경우 대론(大論)이 있으면 여러 대신(臺臣)들이 일제히 사진(仕進)해야 하는데 대신의 사의(私義)가 단사(單司)의 계사(啓辭)에 있을 경우에는 단사를 피하고 합사(合辭)에 참여하며, 사의가 양사(兩司)의 합계(合啓)에 있을 경우에는 양사를 피하고 삼사(三司)의 합계에 참여하여 온 것은 근례(近例)가 곧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윤리를 돈후하게 하는 뜻은 이미 이렇게 하는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인데, 어찌 마땅히 분분하게 체역(遞易)시켜서 언로(言路)를 좁히겠습니까? 근일 대론(大論)이 제기된 이후 두세 명의 대신(臺臣)의 피혐하는 상소는 의당 퇴각시켰어야 하는데 번번이 봉상(捧上)하여 번거롭게 수응(酬應)하게 하였으니, 그 오직 윤허하는 의의에 있어 실로 상세히 살피지 않은 데 관계됩니다. 청컨대 해당 봉납 승지(捧納承旨)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봉납한 승지에 대한 일은 아뢴 내용이 참으로 옳다. 그러나 그것이 곧 전례로 굳어져 있어 전후 이 때문에 피혐한 사람을 모두 허락하여 왔다. 이제 만약 이미 지난일을 추후 거론한다면 대간(臺諫)과 승지(承旨) 가운데 장차 몇 명이나 남게 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일전의 대간과 봉납한 승지만을 유독 책망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청한 것은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하여 정원과 양사(兩司)에 신칙시켜 전일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영의정        서매수(徐邁修), 좌의정        한용귀(韓用龜)가 연소(聯疏)를 올려 스스로 인책(引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은 토죄(討罪)를 완만히 한 데서 죄가 드러났는데도 부당하게 개석(開釋)하는 하유를 받들었고 자취가 왕명을 어긴 것에 관계되는데도 요행히 부월(鈇鉞)의 주참(誅斬)을 피하였습니다. 비상한 하교를 삼가 받들기에 이르러서는 무릅쓰고 도성(都城)으로 들어왔으며 금오(金吾)에 나아가 엎드려 왕명을 기다릴 적에는 은혜로운 비답이 더욱 융숭하였으니,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신 등은 다시 감히 하찮은 몸에 대한 거취(去就)를 가지고 우러러 수응(酬應)을 번거롭게 할 수 없기에 물러나 사차(私次)로 돌아왔습니다만 우러러보고 굽어봄에 있어 부끄럽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아! 선대왕(先大王)의 을미년041)                   상소 내용과 병신년042)                  의 윤음(綸音)은 엄중하고도 비통하여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였는데 24년 동안 세상을 다스리고 풍속을 교도(敎導)한 대경 대법(大經大法)이 실로 여기에 근본된 것으로, 은밀히 불어나는 간사한 싹을 꺾고 무궁한 후세에 궤범(軌範)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임자년043)                  에 환하게 유시한 하교와 갑인년044)                  에 재거(齋居)하면서 내린 윤음(綸音)은 또 하늘에 떠있는 해와 별 같아서 만국(萬國)이 다 볼 수 있고 사시(四時)로 명령을 시행하는 것은 백세(百世)토록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진실로 혹 선왕의 정미(精微)한 의리에 배치(背馳)되어 그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차마 말하고 그 감히 거론할 수 없는 것을 거론한다면 이것이 어찌 다만 전하의 죄인이 될 뿐이겠습니까? 실은 선조(先朝)의 죄인인 것입니다.
아! 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킨 죄인 김달순(金達淳)은 곧 선조(先朝)를 섬겼고 후한 은총을 받은 자입니다. 그럼에도 처음의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은 곧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거론할 수 없는 일이었는가 하면, 이에 이미 세초(洗草)된 문자(文字)를 방자하게 전하의 앞에 올림으로써 성심(聖心)이 애통해 하고 두려워하여 몸둘 데가 없는 것처럼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연석에서 성교(聖敎)를 받든 여러 신하들은 그 누군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저 김달순은 미욱하여 이를 깨닫지 못하고 완악하게 두려워할 줄 모른 채 도리어 각승(角勝)하려는 계교를 내어부렸는가 하면 나중에는 상소를 올리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한두 글귀는 그지없이 불경스러운 것이었으니, 어찌 통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죄명(罪名)을 지게 되면 주극(誅殛)도 오히려 가벼운 것입니다. 신 등이 그날 전석(前席)에 나란히 나아가 위협하는 무엄한 정상을 눈으로 보고서도 엄중히 지척(指斥)하여 환하게 분변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신하가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아! 신 등은 전하의 망극한 은혜를 받고 외람되게 받들어 보좌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그가 분수를 범하는 죄를 그대로 둔 채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하는 의리를 바치지 못하였으며 공의(公議)가 준엄하게 발론되었는데도 태연히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대방(大防)은 어긋나기가 어려운 것인데도 마침내 스스로 파괴하였으니, 신 등이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청명한 조정의 사유(四維)045)                  에 있어 어찌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신 등이 차지해서는 안될 직책을 삭탈(削奪)시키고 신 등의 당연히 받아야 할 형률(刑律)을 의논케 함으로써 인신(人臣)으로서 불충(不忠)한 자의 경계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신 등은 이동형(李東馨)의 처분에 대해 실로 너무도 흠앙하고 감탄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전교(傳敎)에 ‘선왕(先王)께서 지켜 온 의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이른바 용서 없이 죽여야 하고 선왕께서 지켜 온 의리에 지나치는 것도 또한 이른바 용서 없이 죽여야 하는 데 해당이 된다.’ 하였는데, 참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전하의 지켜 온 것이 공고하여 선택한 것이 정미한 것을 우러러 볼 수가 있으며 영원히 천하 후세에 변명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만약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데 대한 죄를 논한다면 김달순과 이동형이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오직 저 김달순의 죄는 진실로 이미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일종의 간사한 무리들이 만일 이로 인하여 감히 부정한 마음을 품고 전하의 마음을 시험하려는 계교를 드러내어 부린다면 삼가 괴귀(怪鬼)한 무리들의 무함하고 핍박하는 이야기가 기회를 타고 잇달아 일어나게 될까 염려스러우니, 이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란건대 공정하게 들으시고 엄중히 분변하여 불령(不逞)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를 빙자하여 지극히 정미하고 더없이 엄중한 대의리(大義理)를 형혹(熒惑)시키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 등이 사차(私次)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부터 나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지금 보내온 소장(疏章)을 보건대 징토(懲討)하는 의리와 면진(勉陳)하는 정성이 누누이 간절했으니, 어찌 경 등의 지극한 뜻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의 일은 내가 경 등을 위하여 인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깊이 밝힌 것인데 또 무엇 때문에 지나치게 인책하는가? 나머지 모두 면대(面對)해서 이야기하겠으니, 경 등은 사퇴하지 말고 안심하고 시사(視事)하라."
하였다.


 

 

 

1월 27일 을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춘도기(春到記) 유생(儒生)들을 시험보이고 나서 이어 삼청(三廳)의 사예(射藝)를 행하였다. 강경(講經)에서 수석을 차지한 정희조(鄭熙祚),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한 권비응(權丕應)과 사예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기항(柳基恒)은 모두 문무(文武)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1월 28일 병자

대사헌 이의필(李義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달순(金達淳)의 죄를 일전의 합사(合辭)에서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차례대로 응당 시행해야 할 형률(刑律)에 대해 또한 무엇 때문에 윤허를 아끼십니까? 이런 죄를 졌는데도 오히려 이런 형률(刑律)을 아낀다면 이뒤로 해당되는 형률을 반드시 시행하리라는 것을 마땅히 어떻게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김달순처럼 흉역(凶逆)을 저질렀는데도 해당되는 형률을 면할 수 있다면 난역(亂逆)이 징계되어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윤강(倫綱)이 장차 멸절되기에 이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계사(啓辭)를 윤허하소서. 이동형(李東馨)이 감히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거듭 우리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에 대해서 그 죄범(罪犯)을 논한다면 김달순과 실정은 다르지만 행동은 같습니다.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이 그가 비록 늙어서 쓸모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죄범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또한 어찌 돌아보아 매길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즉시 대간의 청을 따르시어 그 죄를 바루소서.
대저 새매가 참새를 쫓듯이 죄인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은 신자(臣子)의 떳떳한 본분(本分)인 것이고 여우가 죽으면 토끼가 슬퍼하듯 〈동류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은 소인(小人)들의 으레 있는 습관인 것입니다. 당일 연석에서 김달순이 방자하게 흉언(凶言)을 발론할 적에 대신(大臣)이 되어 수상(首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몸으로서 눈으로 매우 불경(不敬)스러운 상황을 보고 귀로 매우 부도(不道)한 말을 들었으면서도 일찍이 성토하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으니, 이는 애당초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하는 공분(公憤)이 없고 오히려 여우가 죽으면 토끼가 슬퍼한다는 사정(私情)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죄인 것입니다. 하순(下詢)할 때에 이르러서는 감히 앞장서서 성세(聲勢)를 도와 극력 많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두 사람의 포증(褒贈)과 두 상서(上書)의 수납(搜納)에 대해 절실하고도 충애(忠愛)스러운 것이라고 했는가 하면, 또 세도(世道)가 이치에 틀린 것을 걱정하고 의리가 회색(晦塞)되는 것을 우려해서 한 말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어찌 앞에서 창도하고 뒤에서 호응하여 왼쪽에서 막고 오른쪽에서 차탄하여 주면서 멋대로 농간을 부려 위협하게 함에 있어 조금도 돌보아 꺼리는 것이 없는 처사가 아닙니까?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저들이 설사 듣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고 핑계대고 있습니다만 누누이 내린 하교의 내용이 분명하고도 비통하였으니, 의당 전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했을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놀라고 당황해 하는 기색은 없이 한갓 노여워 하는 마음만 품은 채 소매를 나란히 하고 발꿈치를 잇대고서 불만이 가득찬 마음으로 물러나가서는 그의 집에 편안히 누워 조정의 동정(動靜)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무릇 재신(宰臣)이 수악(首惡)임을 성토하고 언관(言官)이 당여(黨與)임을 논핵하기에 미쳐서는 그 두세(頭勢)가 끝내 면할 수 없게 될 줄 알고서 비로소 벗어날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외람되게 한 장의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겉으로는 의리를 핑계하였지만 속으로는 은밀히 비호하면서 짐짓 딴 일을 빌려 임금의 속마음을 떠보는 계교를 부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비지(批旨)를 받들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에 명을 기다렸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른바 발명(發明)하는 말은 ‘동료의 정의에 구애되어 성토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가령 사람이 동료가 악역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서도 만약 군부(君父)를 위하여 징토하지 않고 이에 도리어 동료를 위하여 엄호한다면 그것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들이 말한 것에서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더욱 확연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징토를 완만히 했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억지로 스스로 인책하는 단서로 삼아 부주(附奏)하는 문자에 언뜻 농간을 부렸으며, 또 도성(都城)을 나간 지 얼마 안되어 염치를 무릅쓰고 도로 들어왔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짤막한 차자를 올리면서 하나의 토(討) 자를 거론하여 조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제(階梯)를 만들었으니, 이런 짓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이런 등의 무엄하고 불경스러운 죄를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당여까지 주멸(誅滅)하는 것을 어떻게 도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이 대신(大臣)과 과연 작은 알력이 있어 사소한 혐의를 피하려고 하였습니다만 큰 의리를 생각하지 않은 채 두려운 마음으로 남의 일 보듯이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고 조선(祖先)을 망각하는 처사인 것이니, 신이 어떻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신은 흰 머리에 늙은 나이라서 온갖 세념(世念)이 사그라졌으므로 은혜와 원수 양쪽을 모두 잊었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공의(公議)를 빙자하여 사리(私利)를 도모하면서 사소한 원한을 갚을 마음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충분(忠憤)에 격발되어 삼가 병을 무릅쓰고 수레를 타는 의리에 부치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조정이 숙청(肅淸)되고 세도(世道)가 편안하고 안정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영상(領相)에 대한 일은 그날의 연주(筵奏)에 이우(李㙖) 등의 일이 거론되었기 때문에 노쇠한 사람이어서 말을 분명히 깨닫지 못한 데서 온 소치인 것인데, 경이 어찌하여 이렇게 말을 하는가? 더구나 일전의 상소 내용에서 징토한 것이 매우 엄중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한다면 조상(朝象)이 안정될 때가 없게 될 것이다. 경은 파직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서매수(徐邁修)가 전 대사헌의 상소에서 죄를 성토한 것이 낭자하다는 이유로써 한강(漢江) 밖으로 달려나가니, 하교하기를,
"경은 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지나친 거조를 하는 것이며, 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지나친 거조를 하는 것인가? 경을 아는 것은 나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좀 전에 전 도헌(都憲)046)  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그날 연주(筵奏)를 분명히 깨닫지 못한 데서 온 연유임을 하유하였다. 경이 어찌 돌보아 비호할 마음을 품었겠으며 또한 어찌 토죄를 완만히 할 사람이겠는가? 경을 만류하기에 급하여 긴 말을 못하겠으니, 경은 즉시 도로 들어오라."
하였다.
홍의모(洪義謨)를 한성부 판윤으로, 조상진(趙尙鎭)을 판의금부사로, 이익모(李翊模)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좌(殿坐) 때에 합계(合啓)를 우선 정지한 여러 대신(大臣)들을 계칙시켰다.

 

1월 29일 정축

하교하기를,
"옥당(玉堂)의 일은 어찌 더없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패초(牌招)를 어긴 사람은 이미 관록(館錄)에 호망(呼望)047)  하지 말게 하여 당일에 권점(圈點)을 완결지으라고 했는데, 이제 3일이 되었는데도 아직껏 동정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설령 일치되지 않은 의견이 있다 해도 옛 습관에 구애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감히 이렇게 명에만 맡기겠는가? 모두 즉시 엄중히 조처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경우 마침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데로 빠지게 되어 국가의 기강이 확립되지 않게 될 것이다. 부제학 이하 응당 참여해야 할 사람들은 즉시 엄중히 계칙하여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본관록(本館錄)을 거행한 뒤에는 찬배(竄配)시키는 전지(傳旨)를 일체 모두 즉시 봉입(捧入)하라."
하였다.
좌의정 한용귀(韓用龜)에게 즉시 도로 들어오라고 하유하였다.


 

 

 

특지(特旨)로 조득영(趙得永)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30일 무인

영의정 서매수(徐邁修)가 다시 광주(廣州)로 향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언(臺言)은 대언인 것이고 정지(情地)는 정지인 것인데 이제까지 한결같이 강박(强迫)을 가한 것은 또한 신하를 예(禮)로서 부린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영의정 서매수에 대해 이제 우선 그의 사임(辭任)을 허락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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