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9권 순조6년 1806년 12월
12월 1일 갑술
세초(歲抄)에서 전 국청 죄인(鞫廳罪人) 조원철(趙元喆)과 전 유수(留守) 서유린(徐有隣)에게는 직첩(職牒)을 환급하고 전 판서 이익운(李益運)과 전 승지 정상우(鄭尙愚)는 서용(敍用)하였다. 서유린은 고 명신(名臣) 서성(徐渻)의 후손으로 그의 동생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정묘(正廟)의 대단한 대우를 받았었는데, 서유린은 총명하고 재서(才諝)가 있어 나라의 병용(柄用)을 담당한 지 거의 20년이 가깝도록 권요(權要)의 직임에서 떠나지 않았다. 물 흐르듯이 부결(剖決)하고 막힘이 없이 수접(酬接)하여 비록 여대(輿儓)의 천한 자에게도 그 환심(歡心)을 얻지 않음이 없었다. 여러 번 재부(財賦)를 맡았는데 공시(貢市)에서 칭송하면서 모두 통달하고 단련된 재상(宰相)이라고 말하였으나 단지 이는 유속(流俗)의 평범한 사람으로 임금의 뜻을 승봉(承奉)하는 것에만 잘했을 뿐이었으므로 유식(有識)한 사람들의 논의는 좋게 여기지를 않았었는데, 오래 세리(勢利)에 처하면서 거듭 한편 사람들의 원수처럼 질투함을 받아 반드시 죽이려고까지 하였었다. 을묘년453) 이후로는 자주 탄핵(彈劾)을 당하였고, 경신년454) 초에 이르러서는 국세(局勢)가 크게 변하여 북쪽 변방에 귀양가서 죽었는데, 이때에 미쳐 그의 관직을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의정부 우참찬 민태혁(閔台爀)이 졸(卒)하였다.
12월 4일 정축
김문순(金文淳)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12월 8일 신사
경상 감사 윤광안(尹光顔)이 이달 초3일에 영사(營舍) 1백 84간(間)이 소실 당하였다고 장계하였다.
12월 10일 계미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래(東萊)의 사건에 대하여 오래 듣지 못하였다. 차왜(差倭)가 한결같이 서로 버티다가 서계(書契)의 답을 받지 아니하고 갔다고 말하였는가?"
하매,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바깥에서 여러 재신(宰臣)들과도 말한 바가 있는데, 이는 실로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미 허락하지 않았으니, 비록 좋은 말로 달랜다 하더라도 저들이 반드시 돌아와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사세(事勢)는 차왜가 나오기 전과는 다름이 있다. 저의 한 바가 비록 아주 대단히 밉다 하더라도 또한 불화(不和)를 생기게 할 수는 없다. 경이 이미 여러 재신과 말한 것이 있다고 하니, 과연 강구(講究)한 것이 있는가?"
하였다.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의 생각하는 것이 혼착(昏錯)하여 어떻게 하면 좋게 될지를 알지 못하겠으나, 대저 보통 일은 대략 본 일의 근원과 원인을 안 다음에야 비로소 요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호(江戶)와 대마도(對馬島) 두 곳의 일은 막연(邈然)하여 듣기 어렵고 또 전 차왜가 소소한 일로 서로 버티다가 아직도 혹시 5, 6년, 7, 8년을 유주(留住)하고 있으니, 지금은 애걸을 하고 위협을 한다 해도 장차 필경에는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또 교활하여 상정(常情)이 아닌 것이 있으니, 실로 민망스럽게 여깁니다. 작년에 일이 있은 이후로 두 남쪽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잘못된 것을 서로 전하며 두려워서 겁을 내고 시끄럽게 요동하여 도성(都城) 가운데에까지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금년에는 호남(湖南)에서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만일 옛사람의 도리로써 말한다 해도 ‘내가 말한 것은 이미 정직하지만 저의 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했으니, 오직 마땅히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융기(戎器)를 수선하여 변방을 굳게 방비하는 계책을 다하여야 되겠으나, 이와 같이 한다면 민정(民情)이 반드시 다시 시끄럽게 요동할 것입니다. 그다음, 신이 만약 두 전조(銓曹)에 대하여 ‘두 남쪽 지방의 수령(守令)과 변곤(邊閫)에게 조가(朝家)의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상격(常格)에도 구애될 것 없이 택차(擇差)하게 하라.’는 하교로써 보인다면, 다만 그 사람의 완급(緩急)을 보아 믿을 만한 자를 차임(差任)하여야 된다는 뜻을 장차 언급하고자 하는데, 이와 같이 한다면 그 뜻밖의 일을 대비하는 것이 수선(修繕)을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수선하는 효과는 있을 것이나, 이 또한 거조(擧措)를 내어 신칙하게 되면 아마도 시끄럽게 요동이 일게 될 것이니, 오직 그 마음을 다하여 의차(擬差)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역시 오직 전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뜻밖의 일에 대비함은 사람을 잘 선택하여 임용하는 데에 있으니, 아뢴 바가 참 좋다. 그런데 차왜에 대한 일을 한갓 통역을 맡은 무리에게만 맡기는 것은 대단히 민망스러우니, 모름지기 강구할 방도를 생각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시수가 또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이재협(李在協)이 죽은 뒤 선조(先朝) 때 은졸(隱卒)455) 의 하교에 조제(弔祭)·치부(致賻)를 전례에 의하여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해조(該曹)에서 아직도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선조 때의 하교에 의하여 치제(致祭)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조에서 어찌하여 거행하지 않았는가?"
하매, 이시수가 말하기를,
"그때 고 상신에 대하여 말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그를 허락하였다.
호조 판서 서영보(徐榮輔)가 아뢰기를,
"기호(畿湖)·양서(兩西)·동북(東北) 등 6도(道)에 금맥(金脈)이 점점 성하여 몰래 채취하는 무리가 거의 없는 곳이 없는데, 수령이 비록 징금(懲禁)을 엄중히 더하고 있으나 잠깐 흩어졌다가는 바로 모여들어서 막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에 만일 엄중히 징금하여 영원히 막는다면 진실로 대단히 좋겠습니다마는, 그것을 기필코 금하지 못할 것이라고 명확하게 알고 있으니, 관아(官衙)에서 구검(句檢)하여 오로지 통기(統紀)함이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제도(諸道)의 금이 생산되는 곳에는 거기에 설점(設店)을 허락하고 탁지(度支)에서 은점(銀店)의 예에 의해 구관(句管)하여 세금을 거두어들이되, 먼저 그 풍성(豊盛)에 따라서 전파되는 소문이 낭자한 곳에 시행토록 하는 것이 아마도 편의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 본 다음 가하다 하였다.
예조 판서 조윤대(曹允大)가 아뢰기를,
"부묘(袝廟)의 예(禮)에 대하여 《오례의(五禮儀)》 및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삼가 상고해 보니, 모두 담제(禫祭) 후에 시향(時享)할 때를 당하여 거행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묘조(英廟朝)의 정축년456) 수교(受敎)한 것을 보건대, ‘담월(禫月)이 만일 4계절의 첫달과 납월(臘月)을 당하게 되면 오향제(五享祭)457) 와 겸하여 행하고, 만일 중동(仲冬)을 당하게 되면 납향(臘享)에 겸하여 행하며, 봄·여름·가을의 세 계월(季月)을 당하면 달을 넘기는 것은 똑같으니 역시 중동의 예에 의하여 대향(大享)을 기다려서 겸하여 행하도록 하고, 만일 봄·여름·가을의 세 중월(仲月)을 당하게 되면 앞으로 두 달을 넘어서 행하여야 할 것인데, 한갓 예문(禮文)만을 지키기란 어려움이 있으니 한결같이 근례(近例)를 좇아서 할 일을 《보편》에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다시 신의 예조 등록(謄錄)을 상고해 본즉, 영묘조의 기묘년458) 에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부묘할 때의 하교에 말씀하시기를, ‘성묘조(成廟朝) 때 정희 왕후(貞熹王后)를 5월에 부묘할 때 처음에는 7월의 향월(享月)에 거행하라고 명하였다가 다시 고례(古禮)를 상고하여 담월에 행하라고 명하였었다. 이미 고례가 있어 지금의 일과 서로 부합되니 그 길일(吉日)을 택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 무술년459) ·임술년460) 에 모두 이 예를 따라 사용하였는데, 대개 부묘를 시향에 행했던 것은 곧 예문에 실린 바입니다. 그런데 만일 담제가 중월에 있으면 맹삭(孟朔)의 달과는 달라서 앞으로 두 달을 지나 부묘하여야 하기 때문에, 전후의 수교에서 이것을 어렵고 조심스럽게 여기어 마침내 담월에 행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였고, 계월에 담제가 해당하는 경우면 시향을 기다려서 부묘를 행하는 예에 있어서는 정축년 하교에 그러하였습니다. 효안전(孝安殿) 담제가 명년 3월에 있는데, 한결같이 예문과 수교를 좇아서 4월의 하향(夏享)을 기다려 부묘하는 예를 의심이 없을 듯하나 막중한 제례(祭禮)를 감히 갑작스레 마련하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 본 다음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유생(儒生)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증(贈) 지평 정택뢰(鄭澤雷)의 처 정씨(鄭氏)의 열행(烈行)과 아들 동몽(童蒙) 정천세(鄭千世)의 효행(孝行), 이원(利原)의 고(故) 동지(同知) 최진섬(崔振暹)의 효행과 그의 딸로 출가한 윤성은(尹聖殷) 처의 열행, 가평(加平)의 사인(士人) 유재한(柳宰漢)의 처 허씨(許氏)와 부안(扶安)의 사인 정충량(鄭忠良)의 처 김씨(金氏)의 열행에 대하여 아울러 정포(旌褒)를 실시하라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13일 병술
이조 참판 이면응(李冕應)을 특별히 백령 첨사(白翎僉使)로 보외(補外)하라 명하였는데, 여러 번 칙교(飭敎)를 내렸는데도 끝내 나와 응수(膺受)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월 15일 무자
효안전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12월 18일 신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심상규(沈象奎)를 이조 참판으로, 이직보(李直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오정원(吳鼎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9일 임진
별강(別講)하였다.
12월 20일 계사
도정(都政)에 친림(親臨)하였다. 【이조 판서 조득영(趙得永)·이조 참의 김시근(金蓍根)·병조 판서 한만유(韓晩裕)이다.】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570면
【분류】인사(人事)
12월 21일 갑오
효안전에 나아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12월 22일 을미
효안전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행하였다.
12월 23일 병신
효안전에 나아가 조상식을 행하였다.
12월 24일 정유
효안전에 나아가 조상식을 행하였다.
송익효(宋翼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5일 무술
효안전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12월 27일 경자
별강하였다.
이시원(李始源)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28일 신축
별강하였다.
12월 29일 임인
효안전에 나아가 석상식을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