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11권 순조8년 1808년 3월
3월 2일 무술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전 경상 감사 윤광안(尹光顔)과 영양 현감 조석륜(曹錫倫)이 주자 영당(朱子影堂)을 훼철(毁撤)한 일로 인하여 권당(捲堂)하고 품고 있는 생각을 진계(陳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양(英陽)에 운곡(雲谷)이 있는데, 마침 무이(武夷)와 지명(地名)이 서로 부합하므로, 일찍이 강사(講舍)를 건축하여 주자의 유상(遺像)을 봉안(奉安)하고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였으니, 옛부터 운곡 영당(雲谷影堂)이라고 일컫던 곳입니다. 간혹 경희(梗戱)를 당하면 곧 다시 중수(重修)하곤 하였었는데, 한번 윤광안이 안찰(按察)한 초기부터 영양(英陽)에 살고 있는 조덕린(趙德隣)의 추얼(醜孼)들과 안팎으로 화응(和應)하여 흔단(釁端)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는 유생들을 체포하고 신문하여 낭자하게 형배(刑配)하였습니다. 그리고 봉화 현감(奉化縣監) 이구원(李久源)을 협박해서 옮겨 조사하고 훼철(毁撤)하는 것을 독려하게 하였는데, 이구원이 거절하고 따르지 않으니, 벼슬을 버리도록 2년 동안 거의 빈 날이 없이 위협하여 침핍(侵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과만(瓜滿)하여 돌아가기에 이르러서는 문득 영당을 훼철하라는 영(令)을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으로 보내었는데,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으레 신칙을 더하는 것처럼 하였으나, 속으로는 실제로 흉도(凶圖)를 은밀하게 수여한 것이었습니다. 조석륜은 바야흐로 현감이 되어 관문이 도착한 날 많은 선비들을 유인하여 체포한 다음 모두 목에 칼을 씌워 가두고는, 무사들을 소집하고 이례(吏隷)들을 단속하여 각각 기물(器物)과 무기를 가지고 영당에 달려가서 에워싼 다음 영기(令旗)를 움직이어 호령하여 뜰의 비석을 쳐서 쓰러뜨려서 천 조각이나 되게 부수었으며, 몽둥이를 어지럽게 사용하여 당우(堂宇)를 무너뜨리니, 두 폭의 유상(遺像)은 거의 허물어지고 찢어지기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벽 위에 걸린 황조(皇朝) 열성(列聖)의 기년(紀年), 본조(本朝)의 국기판(國忌板), 대로사(大老祠)의 비문(碑文)과 어필(御筆)의 인본(印本), 감실(龕室)의 상탁(床卓) 등을 한결같이 모두 짓밟아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 속에 던지고, 허물어진 영당의 재목과 기와는 모두 속공(屬公)하였으니, 아! 심하였습니다. 만약 사원(祠院)에 대한 금령(禁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나라에는 수천 리에 편액(扁額)을 내리지 않은 사원들이 별처럼 흩어져 벌려 있다 할 수 있고 향선생(鄕先生)·읍대부(邑大夫)는 대부분 단확(丹雘)의 묘우(廟宇)를 가지고 향기로운 의식을 향사하고 있는데도, 유사(有司)가 죄다 규금(糾禁)을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진실로 이미 세운 묘우를 경솔하게 허물기 어려운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도(道)가 주자와 같고 공(功)이 주자와 같아 천하에서 가가 호호마다 존숭(尊崇)할 만하다면, 더욱 어떻게 제일 먼저 파괴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윤광안은 본래 신축년016) ·임인년017) 의 흉당(凶黨)인 윤서교(尹恕敎)의 손자로서 대대로 그 악행을 이루었으니, 진실로 이미 명교(名敎)의 아래에서 주토(誅討)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패려하고 악독한 조석륜을 얻고는 성현(聖賢)을 업신여기고 모욕하여 의발(衣鉢)018) 을 전해 주는 가계(家計)를 견주어 만들었으며, 간사한 자를 돕고 올바른 사람을 미워하여 흉론(凶論)의 기치를 세우기를 담당하였었습니다. 그 정상을 구명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본 것이었는데, 영남으로부터 돌아온 후에 갑자기 주서(朱書)의 《근사록(近思錄)》을 영남에 반사(頒賜)하자고 청하였으니, 천총(天聰)을 속일 수 있고 간사한 마음을 숨길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지척인 궁궐에서 속여서 마치 진실로 주자를 존모(尊慕)하는 것같이 하였으니, 어떻게 그 사원을 허물고 그 유상을 철파하고서 유독 그 책을 존모하는 의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유생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살펴보건대, 극도로 놀라워서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 저 도신과 수령 또한 사람인데, 만약 상도(常道)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사방의 변방에 내쳐서 사람 축에 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사면(事面)이 지극히 중대하여 경솔하게 먼저 처분할 수가 없다. 시임 도백(道伯)은 권당한 이 계사(啓辭)를 가지고 각 사람들에게 응당 물어 보도록 허락하고, 각별하게 몸소 엄중히 핵실해서 소홀하고 간략하게 하는 뜻이 없도록 할 것이며, 묘당으로 하여금 삼현령(三懸鈴)019) 으로 행회(行會)하게 하라. 이는 관계된 바가 심상한 옥사(獄事)에 견줄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엄중히 핵실하라는 일을 아울러 분부하도록 하라. 그 사계(査啓)를 기다려 마땅히 처분을 시행하겠다."
하고, 이어서 여러 유생들에게 도로 들어가도록 유시하였다.
3월 6일 임인
황단(皇壇)에 나아가 예(禮)를 행하고 재숙(齋宿)하였다.
3월 7일 계묘
황단(皇壇)의 춘향(春享)을 행하고, 반열에 참여한 유신과 무신들을 시험하였다.
3월 8일 갑진
윤대(輪對)하였다.
3월 12일 무신
남공철(南公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13일 기유
창릉(昌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히 제사하였다.
3월 15일 신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서총대 시예(瑞蔥臺試藝)를 행하였다.
3월 16일 임자
이득제(李得濟)를 금위 대장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조윤대(曹允大)가 잇달아 상소하여 의리를 끌어대니, 체차(遞差)하고 남공철(南公轍)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3월 17일 계축
서영보(徐榮輔)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병조 판서 김이익(金履翼)이 상소하기를,
"지난번에 본조의 면포 50동(同)을 궐내(闕內)에 들여놓으라는 명을 삼가 받들고 비록 봉진(奉進)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본조의 경용(經用)은 옛날부터 넉넉지 못하여 비록 저축이 여유가 있는 때를 당하였다 하더라도 결단코 명분 없는 비용에 대해서는 수응(酬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열조(列朝)의 재물이 넉넉한 세대를 당하였을 때에도 이러한 숫자의 면포를 궐내에 들이라는 명을 듣지 못하였는데, 신은 감히 오늘의 수용(需用)에 있어서 그것의 당부(當否)에 대해 과연 어떠한지를 알 수는 없지만,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에게 유익하게 하는 정사에 어긋남이 있는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성명(成命)을 정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면포는 내탕금(內帑金)이 없어졌으므로, 과연 들여놓도록 명한 것이었다. 경이 과연 법을 지키겠다면, 궐내의 수용이 비록 구간(苟簡)하더라도 모두 돌려보내도록 명하겠다."
하였다.
3월 19일 을묘
황단(皇壇)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이존수(李存秀)를 이조 참의로, 김희순(金羲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한용탁(韓用鐸)을 형조 판서로, 조상진(趙尙鎭)을 판의금부사로, 윤행순(尹行順)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상소하여 병상(病狀)을 아뢰고, 면직(免職)되기를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에서 유생들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우의정 김재찬(金載瓚)에게 문의한 후에 아뢰기를,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皓)는 병자 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의리를 굳게 지켜 순절(殉節)하였고, 충숙공(忠肅公) 이만성(李晩成)은 위대한 공로와 탁이한 절개가 신축년020) ·임인년021) 의 사대신(四大臣)022) 과 다름이 없었으며,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과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은 같은 시대의 세 상신으로 수립한 공이 서로 똑같았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부조지전(不祧之典)을 시행하소서.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의 사판(祠版)을 방손(旁孫)에게 받들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니, 전례에 의거하여 노은 서원(魯恩書院)에 이봉(移奉)하게 하소서. 고려조의 충신 성사제(成思齊)는 절행(節行)이 조의생(曹義生)·임선미(林先味)·맹성인(孟姓人) 세 사람과 뜻이 같았으니, 청컨대, 표절사(表節祠)에 추배(追配)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김해(金海)의 고 학생(學生) 조수문(曹秀文)의 처 이씨는 시어미를 예(禮)로 봉양하다가, 지아비가 죽으니 따라 죽었습니다. 그 계집종 숙진(淑眞)은 다섯 번이나 고개를 넘어와서 슬프게 호소하며 포장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청컨대, 이씨는 정려(旌閭)하고 숙진에게는 복호(復戶)의 혜택을 주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열부(烈婦)·충비(忠婢)가 모두 한 집안에 있었다."
하고, 아뢴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해서(海西)의 고 효자 이철휴(李喆休)는 이미 선조 때에 증직(贈職)의 은전을 받았었는데, 곧 연주(筵奏)로 인하여 다시 후식(後式)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도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0일 병진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행하고, 이어서 서총대 시예(瑞蔥臺試藝)를 행하였다.
3월 23일 기미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첫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3월 26일 임술
이조 판서 남공철(南公轍)을 소견하였다. 남공철이 아뢰기를,
"사행(使行) 때 서책을 사서 가지고 오는 것은 본래 금령(禁令)이 있었으므로, 정경(正經)·정사(正史)와 아울러 오랫동안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옛날에 성교(聖敎)가 《패관잡설(稗官雜說)》을 엄금한 데에서 나왔는데, 경사(經史)와 아울러 아직도 사서 가지고 오지 말도록 작년 겨울에 하교를 받들었으니 이제부터 시행하되, 정경·정사 및 선배 순유(醇儒)들의 문집(文集) 등의 서책은 가지고 나오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이단(異端)의 잡서(雜書)와 패승 소설(稗乘小說)은 선조의 법령에 의해 금하여 구별해서 금령을 믿는 방도로 삼을 것을 청컨대, 드러나게 정식(定式)을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윤대(曹允大)를 공조 판서·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지평 황명한(黃明漢)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아뢰기를,
"공도(公道)가 베풀어지지 않고, 언로(言路)가 막혀서 가려져 있고, 수령이 탐묵(貪墨)하고, 과거 제도가 뒤섞여 어지럽고, 민생(民生)이 곤궁하여 고달프니, 청컨대 유의하여 분려(奮勵)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하여 권면한 다섯 조목이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에 관계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3월 28일 갑자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는데, 왕대비전과 중궁전에서도 함께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3월 30일 병인
차대(次對)하였다. 이보다 앞서 좌의정 이시수가 북관(北關)으로부터 돌아와서 북청(北靑)·단천(端川) 두 고을의 백성들이 관문(官門)에서 소동을 일으킨 일을 아뢰자, 본도에 명하여 조사하게 하였었는데, 함경 감사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북청부의 아전 김치정(金致貞) 등이 관장을 모해(謀害)하고 떼를 지어 향청(鄕廳)에 들어가서 아관(亞官)023) 을 불로 지졌습니다. 단천부의 향인(鄕人) 김형대(金亨大) 등은 좌수(座首)를 쫓아내고 관문(官門)에 들어간 다음 지팡이를 가지고 관아(官衙)에 올라가서 해당 수령을 쫓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북청 부사 심후진(沈厚鎭)은 모욕을 받고 비웃음을 샀으며, 단천 부사 김석형(金錫衡)은 겁을 먹고 피하여 숨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에서 아뢰기를,
"단천에서 정당(政堂)을 타파(打破)하고 관장(官長)을 쫓아낸 것과 북청에서 좌수를 불로 지지고 고을 수령을 욕보인 것은 하북(河北)의 반졸(叛卒)들이 한 짓과 다름이 없었는데, 만약 병기(兵器)가 있었다면 바로 변란(變亂)인 것입니다. 도신의 계사(啓辭) 가운데 수악(首惡)은 대벽(大辟)으로 의율(擬律)했지만, 동헌(東軒)에 들어간 단천의 세 사람과 관장을 욕보인 북청의 한 사람은 차율(次律)로 의논하였으니, 잘못 감단해서 너무 관대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청컨대, 모두 효시(梟示)해서 완악(頑惡)한 자들을 징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의정 김재찬(金載瓚)에게 말하기를,
"두 고을에서 변란을 일으킨 이향(吏鄕)에 대해 도신은 4인을 수악(首惡)으로 처치하기를 아뢰었고, 경은 8인을 모두 일률(一律)로 처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자, 김재찬이 말하기를,
"지금 기강이 날로 퇴폐하여 관장을 쫓아내고도 부족하게 여기는데, 장차 감사·병사를 범한다면, 어찌 임진년024) 국경인(鞠景仁)의 변란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하순(下詢)하신 일은 진실로 대덕(大德)으로 살리고자 하시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신이 어찌 한갓 죽이려는 의논만 고집하여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지금 일률로 감단한 것 또한 팔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명분(名分)과 기강(紀綱)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두루 물어 보았는데, 서영보(徐榮輔) 등이 모두 대신의 말을 옳다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김영(金煐)을 단천 부사로, 이덕현(李德鉉)을 북청 부사로 삼고, 아울러 소견하여 신칙하기를,
"백성들의 풍속이 완고하고 사나우니, 각각 무마(撫摩)하고 진안(鎭安)하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또 형조의 계사로 인하여 차율 이하는 모두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하였다.
이보다 앞서 평안 감사 조득영(趙得永)이 하찮은 일로 절도사 이광익(李光益)을 파직할 것을 청했었는데, 비국에서 아뢰기를,
"진실로 변정(邊情)과 사율(師律)이 아니면, 도신은 수신(帥臣)을 곧바로 파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신이 과연 잘못한 일이 있으면,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할 것을 청해야 하는 것인데, 이제 이렇게 곧바로 파직하였으니, 체례(體例)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해당 도신을 중추(重推)하소서. 인하여 곧바로 파직할 수 없다는 뜻을 정식(定式)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소대하였다.
조계(趙𡹘)를 평안도 절도사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