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3월
3월 1일 신유
함흥부 위유사(咸興府慰諭使) 박종훈(朴宗薰)을 소견하였는데, 사폐(辭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북백(北伯)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계해년072) 의 실화(失火) 때에 견주어 어떠한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계해년에는 2천 7백 호(戶)였는데, 이번에는 1천 8백 호입니다. 계해년처럼 많지는 않지만, 그 참담하고 딱한 정상은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백성들을 안도시켜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 내려가서 각별히 위유(慰諭)하여 조가(朝家)에서 긍휼(矜恤)히 여기는 생각을 반포토록 하라. 그리고 전접(奠接)시키는 방책에 대해서는 도신(道臣)과 익히 상의하여 복명(復命)할 때 상세히 회주(回奏)토록 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함흥부의 회록(回祿)073) 의 재변이, 계해년의 큰 화재가 있은 뒤 회진(灰燼)이 채 가셔지지 않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일어났으니, 민정(民情)의 분탕(焚蕩)함이 반드시 전보다 더할 것입니다. 삼가 계해년에 시행한 조항을 살펴보건대, 교제창(交濟倉)에 오래 보관된 곡식과 산재(散在)한 곡식 가운데 절미(折米)를 호(戶)마다 각각 1석(石)씩을 지급하고, 불에 타서 죽은 사람은 원래의 휼전(恤典) 이외에 쌀 1석씩을 더 지급하였으며, 당년조(當年條)의 신역(身役)과 신환(新還)을 탕감시키고 잡역(雜役)도 또한 견제(蠲除)시켰습니다. 물선(物膳)은 1년을 기한으로 정봉(停封)시켰고, 재목(材木)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구해 주게 하였으며, 내국(內局)에 진상(進上)하는 녹용(鹿茸)은 1년을 기한으로 정봉시키고 이때문에 납부된 비용은 모두 구획(區劃)하였습니다. 또 대내(大內)에서 단목(丹木) 1만 근(斤)과 호초(胡椒) 2천 두(斗)를 내려 아울러 절가(折價)하여 고르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밖에 협호(挾戶)의 원휼전(元恤典)은 잔호(殘戶)의 예(例)에 의거 시행하고, 별휼전(別恤典)은 한결같이 원호(元戶)의 예에 의거하여 호(戶)마다 쌀 1석씩을 무상으로 지급하였습니다. 영진곡(營賑穀) 모곡조(耗穀條)의 절미(折米) 8천 8백 석을 획급(畵給)할 것을 허락하였으며, 유고전(留庫錢)으로 각처(各處)에 산대(散貸)한 것도 아울러 더 쓸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명첩(空名帖) 1천 장(張)을 만들어 보내어 어염세(魚鹽稅)·선세(船稅) 조로 급대(給代)하게 하고 여전(餘錢) 3천 9백여 냥은 획급하였는데, 이것은 장청(狀請)에 의하거나 혹은 연품(筵稟)에 의하여 시행을 허락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제창의 오래 보관된 곡식을 특별히 나누어 주는 데 대한 제반 조항은 아울러 계해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봉(停封)과 별하(別下)의 특은(特恩)에 대해서는 감히 전례를 원용(援用)하여 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화재를 당한 백성들이 몸을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이 더욱 참담하고 안타까우니 공석(空石)074) 과 장목(長木)을 넉넉히 판급(辦給)하여 그들로 하여금 장막을 치고 움을 만들게 하고, 비어 있는 공해(公廨)도 또한 급대를 허락하여 기어이 편의에 따라 용접(容接)하게 함으로써, 흩어져 떠도는 폐단이 없게 하도록 우선 급하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아울러 이에 의거 착실히 거행하게 하도록 행회(行會)하라. 녹용(鹿茸)은 금년을 기한으로 정봉(停封)케 하고 단목(丹木) 2만 근(斤)을 내하(內下)하는 것은 계해년의 예(例)에 의거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일 임술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서전(書傳)》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공고해야 나라가 평안해진다.’ 하였으니, 나라에 있어 백성은 그 중한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한 근본이 되기 때문에 나라가 이를 힘입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이런 때문에 예로부터 성제(聖帝)·명왕(明王)이 백성의 일로 주야로 부지런히 애쓰고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보존시키는 것으로 하늘에게 국명(國命)이 영구해지기를 비는 근본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한 정치의 득실(得失)이 어떠했는가를 살필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은 왕자(王者)의 하늘이고 곡식은 백성의 하늘인 것이기 때문에, 나라에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되고 사람에게 식량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답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춥고 배고픈 것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노고(勞苦)가 항시 쉴 틈이 없어서 여리(閭里)에서는 수심에 젖어서 탄식하는 소리가 많이 들려 오며, 부옥(蔀屋)075) 에 징렴(徵斂)이 날로 가중되어 뼛골을 깎는 폐단이 있어도 통하여 아뢸 수가 없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어도 통하여 알릴 길이 없으면, 임금이 비록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보존하고 싶어도 또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널리 은혜를 베풀어서 뭇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요(堯)·순(舜)도 근심하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갓난 아기를〉 양육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품어 백성 사랑하는 것을 간절히 하고 백성 보존하는 것을 부지런히 했기 때문에, 혜택(惠澤)이 저절로 아래로 흘러내려가 먼 데까지도 두루 미치지 않는 데가 없고 하찮은 것에까지도 파급되지 않는 데가 없었으니, 이는 임금의 정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불쌍하고 딱하게 여겨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와 애통해 하면서 자신을 질책하는 조서(詔書)를 날마다 조정에다 내려도 성의가 있지 않으면, 부질없는 공언(空言)이 되고 백성도 또한 믿지 않을 것이다. 주야로 마음 졸이면서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이 백성을 해치는 한 가지 일이나 백성을 곤고하게 하는 한 가지 일이라도 모두 임금이 자신의 허물로 책임을 지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공력을 들이는 것이 실로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이니, 이는 임금으로서 당연히 스스로 반성해야 될 부분인 것이다. 궁벽한 고장 외진 산속에는 허다히 곤폐(困弊)스러운 일이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고, 황막한 전지(田地)나 외진 들판에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는데도 묘당(廟堂)에서는 전혀 들을 수 없다면, 이는 진실로 인주(人主)의 허물인 것이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 또한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일을 아뢰면 은혜를 베푸는 것은 임금의 정치인 것이고 폐단을 거론하여 위로 통달시키는 것은 수재(守宰)의 직분인 것이다. 옛날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어려서 민간(民間)에 있었으므로 관리들의 일을 통달하였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았기 때문에 능히 소강(小康)의 정치를 이룰 수 있었다.
나 소자(小子)는 불초(不肖)하고 과덕(寡德)한 사람으로 깊은 궁중(宮中)에서 생장(生長)하여 또 어린 나이에 외람되이 지극히 어려운 서업(緖業)을 이어받은 탓으로 한 줄기 덕택도 백성들에게 내린 것이 없으며, 정치가 전대(前代)의 임금들에 견주어 부끄러워서 팔방(八方)에는 혜화(惠化)를 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주야로 두려운 마음이 마치 썩은 새끼줄로 육마(六馬)를 모는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깊은 연못가에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 감히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다. 민생(民生)의 곤고(困苦)가 날마다 가중되고 있는데도 내가 상세히 알지 못한 것은 물론 또한 은혜를 베풀지도 못했으며, 수령들의 탐묵(貪墨)이 이제 해마다 가중되고 있는데도 내가 통찰하지 못한 것은 물론 또한 심히 징계하지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저 불쌍한 소민(小民)들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받아 원망에 젖은 채 스스로 보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이미 한나라 선제(宣帝)와 같은 일을 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내가 스스로 잘 알 수 없으니, 조금이나마 백성을 구제하려는 방도를 생각하려 한들 될 수 있겠는가? 옛날 영묘조(英廟朝)에서 50여년 동안 태평한 정치를 이룩하였던 것은 오로지 여민(黎民)을 사랑하고 탐묵(貪墨)을 징계하면서 부지런히 애쓴 데 연유된 것으로 그 성덕(聖德)과 대공(大功)에 대해 역사가 이루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선조(先朝)의 인정(仁政)도 백성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음은 물론, 덕화(德化)와 기름진 은택이 팔방(八方)에 두루 시행되어 억조 창생의 우부 우부(愚夫愚婦)도 덕화와 은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은 또한 나 소자(小子)도 우러러 목격한 것이다. 또 우리 영묘(英廟)께서는 수재(守宰)로 하여금 민은시(民隱詩)076) 를 지어 올리게 하여 백성의 폐단 가운데 절실한 것은 제거하고 덜어주었다. 우리 선조(先朝)께서도 모든 백성들의 곤고한 사정 가운데 성총(聖聰)에 진달된 것이 있으면 즉시 제거하고 덜어주라고 명하였다. 또 도백(道伯)과 수재(守宰)들에게 계칙하여 서장(書狀)이나 대책(對策)으로 두루 농무(農務)와 민정(民情)에 대해 진달하게 하였으므로 구중 궁궐 깊은 곳에서도 만백성의 고락(苦樂)을 힘들이지 않고 꿰뚫어 알 수 있었는데, 이것이 나 소자(小子)가 매양 우러러 본받을 것을 생각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돌아보건대, 이제 삼양(三陽)이 비로소 새로워져 만물이 모두 소생하고 있는데 팔방(八方) 민생들의 우환(憂患)과 곤고(困苦)가 바로 이때에 있으니, 한나라 문제(文帝)가 바야흐로 봄에 조서(詔書)를 내리고 이천석(二千石)077) 의 양리(良吏)를 인견(引見)한 것 또한 이때에 해당될 수 있다. 이에 그대 경기·공충·함경·평안·황해·전라·강원·경상도의 도신(道臣)과 사도(四都)의 유수(留守) 및 3백 62주(州)의 수령들은 민생(民生)의 곤고(困苦)와 여리(閭里)의 간난(艱難)에 대해 그 이유를 갖춰 진달하라. 또한 구제(救濟)할 방도도 갖추어 도신(道臣)에게 올리면, 도신은 거두어 모아 두루 살펴본 다음 그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을 뽑아서 논리(論理)를 구별하여 아뢰라. 사도의 유수(留守)에 있어서는 직접 재정(裁定)하여 소민(小民)들의 고락(苦樂)을 내가 직접 열람하는 데에서 하나도 빠지는 것이 없게 하라. 아! 지금의 이 거조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또한 한때의 형식적인 일도 아니다. 아! 그대 팔도의 도신(道臣)들을 특별히 신칙(申飭)하노니, 혹시라도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 비슷하게 하지 말고 혹시라도 으레 해오던 방법 비슷하게 하지도 말 것이며, 반드시 성심껏 대양(對揚)하여 마음을 다해 갖춰 진달토록 하라. 이제부터는 나도 또한 수령들의 치·불치(治不治)와 성·불성(誠不誠)을 알 수 있고 장부(臧否)의 출척(黜陟)을 이를 통하여 분명히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말은 중도(中道)에 맞지 않아도 또한 잘못될 것이 없겠으나 만일 성의를 극진히 하지 않는다면 이는 실로 나를 저버리는 것이 되니, 아울러 이점을 알고 있으라."
하였다.
유상조(柳相祚)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4일 갑자
경상 감사 정동관(鄭東觀)이 울산(蔚山) 부내(府內)의 민가(民家)에서 실화(失火)하여 5백 7호(戶)가 타고, 인물(人物)의 소사(燒死)가 16명이었다고 장계(狀啓)하니, 하교하기를,
"봄일이 한창 시작되고 농사철이 다가오는데, 민호(民戶)가 살 곳을 잃고 사람들이 불에 타죽었으니, 매우 놀랍고 딱하다. 불가불 전례에 의거 돌보아 구조(救助)하여 줌으로써 나의 오갈 데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혹시라도 길가에 쓰러지는 일이 없게 하라. 정사년078) 북도(北道)의 민가(民家)가 불에 탔을 때 휼전(恤典)을 시행한 예(例)에 의거 회부곡(會付穀)을 각각 1석(石)씩 원휼전(元恤典) 이외에 따로 더 고휼(顧恤)하게 하며 1년을 기한으로 신역(身役)을 면제시키고, 타죽은 사람의 생전(生前) 신환포(身還布)는 모두 즉시 탕감시키고 휼전을 더 지급하게 하라."
하고, 이어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각별히 위유(慰諭)하고, 안접(安接)시키는 일에 힘을 다하도록 할 것으로 분부하였다.
북백(北伯)이 장청(狀請)한 것으로 말미암아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였는데, 무산부(茂山府)의 절미(折米) 5천 석(石)을 획급(劃給)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3월 5일 을축
울산부(蔚山府)의 화재(火災)를 입은 민호(民戶)에 다시 문비랑(問備郞)을 보내어 도신(道臣)과 함께 안동(眼同)하여 위유(慰諭)하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이, 도백(道伯)이 가게 되면 주전(廚傳)에 폐단이 있다는 이유로 단지 문비랑만으로 거행하게 하고, 이어 문비랑 한용의(韓用儀)를 위유 어사(慰諭御史)로 차정할 것을 명하도록 청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한용의가 바야흐로 문비랑으로서 도내(道內)의 적곡(糴穀)을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월 6일 병인
차대(次對)하였다. 영부사 이시수(李時秀), 좌의정 김재찬(金載瓚), 약원 제조(藥院提調)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께서 태후(胎候)가 있은 지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본래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가 있습니다만 의관(醫官)이 진후(診候)하고 탕제(湯劑)를 의정(議定)하는 것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돈녕(領敦寧)이 바야흐로 승후(承候)하고 있으니, 경 등은 모름지기 함께 상의하고 하교를 기다려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3월 7일 정묘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서총대(瑞葱臺) 시예(試藝)인 서북 별부료(西北別付料)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박기수(朴綺壽)·이광문(李光文)을 뽑았다.
3월 8일 무진
반궁(泮宮)에서 삼일제(三日製)를 설행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제천(堤川)의 화재(火災)를 입은 민인(民人)들을 위유(慰諭)하게 하였는데, 도신(道臣)이 해읍(該邑) 읍내(邑內)의 민가(民家) 2백 32호(戶)가 화재를 당하고 여섯 군데의 공해(公廨)에 있던 각곡(各穀) 8천 4백 7석(石) 영(零)도 연소(延燒)되었다고 장문(狀聞)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화재를 당한 가호의 신·구(新舊) 환곡(還穀)을 아울러 탕감하였으며, 매호(每戶)에 각각 1석(石)씩을 울산(蔚山)의 예(例)에 의거 지급하게 하고 결전(結錢)도 사의를 헤아려 대여(貸與)하도록 허락하였다. 현감(縣監)은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것으로 개차(改差)하고 강명(剛明)하게 종핵(綜核)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상격(常格)에 구애하지 말고 택차(擇差)하여 역말을 주어 내려보낸 뒤 인하여 사계(査啓)하게 하였다. 특명(特命)으로 불탄 곡식은 탕감시키게 하였다.
3월 9일 기사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삼청(三廳)의 춘등 시사(春等試射)를 행하였다.
3월 10일 경오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장보각(藏譜閣)·의소묘(懿昭廟)에 전배(展拜)하였다.
3월 11일 신미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문신강(文臣講)을 행하였다.
3월 12일 임신
희정당에 나아가 문신 제술(文臣製述)을 행하였다.
3월 13일 계유
황제(皇帝)가 50이 되어 칭경(稱慶)하는 칙서(勅書)를 순부(順付)로 반사(頒赦)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서 반교(頒敎)하였는데, 권정례(權停禮)로 하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동지 정사(冬至正使) 심능건(沈能建), 부사(副使) 조홍진(趙弘鎭), 서장관(書狀官) 김계하(金啓河)를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칙서(勅書)는 순부(順付)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순부하여 나왔는가?"
하니, 심능건이 말하기를,
"황력 재자관(皇曆䝴咨官)이 서반(序班)079) 과 사사로이 서로 약속하기를, ‘이번의 칙서를 순부할 수 있게 한다면 마땅히 노고에 보답이 있을 것이다.’고 했답니다. 그리하여 서반이 책문(柵門)에까지 따라와서 뇌물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신 등이 사행(使行)이 이제 막 책문에 들어온 탓으로 이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부(禮部)에서 그 사단(事端)을 알고서 사핵(査覈)하는 거조가 있어 하마터면 탈이 날 뻔하였습니다. 다행히 예부 상서의 예대(禮待)가 매우 후하였으며, 또 수역관(首譯官) 김재수(金在洙)가 극력 주선한 것에 힘입어 다행히 무사하게 순부할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서장관 김계하(金啓河)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한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대만(臺灣)의 도적 채견(蔡牽) 등은 본디 중토(中土)의 사록(士祿)이었는데 파락호(破落戶)가 되어 무뢰한(無賴漢)으로 전락하였다고 합니다. 당초 사람을 죽이고 망명(亡命)하여 다니다가 도당(徒黨)을 모아 들어가기에 이르렀는데, 공사(公私)의 재화(財貨)를 겁탈하여 가지고는 매양 그 반을 정확하게 나누어서 가지고 가기 때문에 이를 절반적(切半賊)이라고 부릅니다.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하여 소탕하여 제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 그 도당 가운데 주분(朱濆) 등이 있는데 그들과 교결하여 힘을 합쳐 월양(粤洋) 등지(等地)에 출몰(出沒)하기 때문에 복건(福建)·양광(兩廣)의 바닷가 여러 곳이 쓸쓸한 빈터가 되었습니다. 관군(官軍)이 매년 정토(征討)하지만 서로 승패(勝敗)가 엇비슷하였는데 재작년 12월 25일 절강 제독(浙江提督) 이장경(李長庚)이 적도들의 대포(大砲)에 맞아 죽었습니다. 황제가 칙유(勅諭)하기를, ‘이장경은 충성스럽고 근면하고 용감하여 위엄에 대한 소문이 널리 드러났다. 몸소 사졸(士卒)들의 앞에 서서 적선(賊船)으로 달려 올라가서 전후 섬멸한 적도가 수없이 많았는데 전진(戰陣)에 임하여 전사(戰死)하였다는 주장(奏章)을 열람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며 지극히 슬픈 마음을 견딜 수 없다. 이장경을 백작(伯爵)에 추봉(追封)하고 은(銀) 1천 냥(兩)을 상으로 주며, 사당(祠堂)을 지어 제전(祭奠)을 올리게 하여 그의 아들은 복(服)이 끝나면 그의 뒤를 승습(承襲)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채견(蔡牽)의 의자(義子)인 채이래(蔡二來)와 그의 도당(徒黨)인 정창(鄭昌)은 비록 체포하여 정형(正刑)에 처하였으나 채견·주분 등은 지금까지 남방(南方)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어 순무(巡撫) 장견승(張見陞)·허송년(許松年) 등이 파직당하는 죄를 받았으니, 이것이 근본적으로 퇴치할 수 없는 적(敵)은 아니지만 남쪽 변경이 소요스러워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3월 14일 갑술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한학 문신(漢學文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효자(孝子)인 광주(廣州)의 사인(士人) 이영(李榮)과 열녀(烈女)인 양성(陽城)의 사인 권두용(權斗容)의 아내인 이씨(李氏), 광주(廣州)의 사비(私婢) 천분(荐分)에게는 정려(旌閭)하며, 충신(忠臣)인 함양(咸陽)의 정윤헌(鄭胤獻)에게는 증직(贈職)하고, 효자(孝子)인 광주(廣州)의 사인(士人) 박사중(朴師中), 함양(咸陽)의 우정려(禹廷呂)와 그의 조카 우의손(禹義孫)·우경손(禹敬孫), 열녀(烈女)인 해주(海州)의 고 학생(學生) 장종갑(張宗甲)의 아내 원씨(元氏)는 급복(給復)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각도(各道) 어사(御史)의 별단(別單)에 의거 복계(覆啓)하여 청한 것이다.
3월 16일 병자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의 일차(日次) 문안(問安)에 승후(承候)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진사(進士) 김유근(金逌根)을 초사(初仕)로 부직(付職)시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유근은 중궁전의 오라버니이다.
3월 17일 정축
왜역(倭譯)이 바다를 건너갈 때 도주(島主)의 위문(慰問)과 신사(信使)의 면담(面譚)·서계(書契)는 한 번에 겸부(兼付)하여 내려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예조에서 계청(啓請)한 것을 따른 것이다.
3월 19일 기묘
북원(北苑)에 나아가 황단(皇壇)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함인정(涵仁亭)에 돌아와 반열에 참여한 유무(儒武)를 시험 보였다.
3월 20일 경진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무신(武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이경일(李敬一)의 회혼일(回婚日)에 이원악(梨園樂)과 의자(衣資)·연수(宴需)를 내려 주고 그의 아들 평강 현감(平康縣監) 이영진(李永晉)을 기읍(畿邑)과 서로 바꾸어 주도록 명하였다.
증 판서(判書) 송영구(宋英耉)에게 사시(賜諡)하라고 명하였는데, 임진 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근왕(勤王)하였으며 천지(天地)가 폐색(閉塞)되었을 적에 의기(義旗)를 높이 들고 인륜을 부지(扶持)시켰다는 것으로 예조에서 유소(儒疏)로 인하여 대신(大臣)과 의논한 다음 청한 것이다.
3월 21일 신사
함흥부 위유사(咸興府慰諭使) 박종훈(朴宗薰)을 소견하였는데, 복명(復命)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화재를 입은 백성들의 정상(情狀)을 순문(詢問)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계해년080) 의 화재(火災)를 겪은 지 얼마 안되어 또 이와 같은 화재를 당하였으니, 더할 수 없이 애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내려간 뒤에 백성들을 열무당(閱武堂) 앞에 모아놓고 거듭거듭 고유(告諭)하면서 덕의(德意)를 선포하니 모두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성은(聖恩)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전고에 없던 은택(恩澤)입니다. 다만 어떻게 하든지 전접(奠接)하여 영구히 풍패(豊沛)081) 의 고장을 지킴으로써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방도로 삼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아뢰기를,
"이번 북관(北關)의 불에 탄 가호(家戶)가 비록 계해년보다는 조금 작다고 하지만 민정(民情)의 황급함은 전보다 배나 됩니다. 계해년의 휼전(恤典)이 풍부하고 흡족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전지(田地)를 팔고 소를 팔아서 가까스로 집을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화재를 겹쳐 겪게 되었으므로 다시는 팔 수 있는 전지나 소가 없어 조가(朝家)에서 휼전을 내려 주기를 바라는 이외에 다시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 비록 집을 지을 자금(資金)을 준급(準給)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의를 헤아려 더 지급하는 방도가 있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부(本府)의 지형(地形)이 남쪽은 대해(大海)와 닿아 있고 북쪽은 장곡(長谷)과 통하고 서쪽은 백리(百里)나 되는 넓은 들을 임하고 있고, 성천강(城川江)이 오른쪽을 지나고 있어 한쪽은 넓게 툭 터져 아무런 가로막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항상 큰 바람이 많이 부는데 겨울과 봄이 더욱 극심한 탓으로 화재가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매양 바람이 일 때를 당하면 관(官)에서 번번이 불을 조심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어서 백성들이 모두 취사(炊事)를 중단하고 짐을 묶어놓고 있는데도 오히려 화재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옛날 경신년082) 고 중신(重臣) 박문수(朴文秀)가 감사(監司)로 있을 적에 수화(水火)의 환란을 우려하여 강가에 제방을 쌓고 수목(樹木)을 널리 심어놓았기 때문에 무성한 숲이 우거져 풍구(風口)를 가로막아서 그로부터 20년 동안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었습니다. 계미년083) 때부터 백성들이 점차 제방 위에다 집을 지으면서 수목을 베어내었는데, 겨우 10년이 지나자 큰 숲이 텅비어 없어져 버렸고 화재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크고 작은 화재를 모두 열 세 번이나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길가는 사람들이 서로 경계하고 상려(商旅)들이 모여들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옛날의 은성(殷盛)하였던 것이 점점 조폐(凋弊)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들 이제 집을 짓는다고 해도 어느날 다시 잿더미 속으로 들어갈지 모른다고 하고 있으니, 그 정상이 또한 슬픕니다. 화재가 이렇게 빈번하게 계속된다면 조가(朝家)의 휼전을 어떻게 매양 더 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화재를 막기 위한 예비책을 구한다면, 제방 위의 민가(民家)를 철거하고 전대로 수목을 심어야 합니다. 이는 10년의 계획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이익은 영구히 누릴 수 있습니다. 신이 도신(道臣)과 익히 상의하고 또 형편을 살펴본 뒤 그림으로 그려 가지고 왔습니다. 제방 위의 민가는 모두 3백 90여 호인데, 이번에 화재를 당한 가호가 2백 20여 호입니다. 이들 가호는 이미 다른 곳에 옮겨서 집을 짓게 하고 우선 나무를 심게 하였습니다만, 그 나머지 화재를 면하여 완전한 것으로 마땅히 철거하여 옮겨야 할 것이 1백 70여 가호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옮겨서 지을 자금(資金)을 조급(助給)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감영(監營)의 저축이 넉넉하지 못한 데다가 달리 조판(措辦)할 방도가 없습니다. 본도(本道)에서 균청(均廳)에 바치는 어염선세(魚鹽船稅) 가운데 급대(給代)하고 남은 돈 3천 9백 50냥, 호조(戶曹)에 바치는 단천(端川)의 세은절전(稅銀折錢) 1천 5백 냥, 호조에 바치는 삼포가전(蔘布價錢) 등 1만 냥까지를 특별히 획급(劃給)하여 화재를 당한 가호에 휼전(恤典)을 더하고 제방의 민가를 옮기는 데 드는 자금으로 삼게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화재(火災)의 재해는 전에 없이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6년 사이에 산업(産業)이 흡족하지 못했는데 화재가 또 닥쳤으니, 백성의 일을 생각하면 딱하고 측은하기 그지없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항상 풀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휼전을 더 내리는 것이 집이 타서 몸을 은신하기 위한 자금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축산(蓄産)이 흡족한 경우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지난번 그대의 장계(狀啓)를 보고서 이미 위유(慰諭)한 연유를 알았고 계속하여 북백(北伯)의 장문(狀聞)을 보고서 또한 민생(民生)을 완전히 소복(蘇復)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연석(筵席)에서 그대의 회주(回奏)를 듣고 서계(書啓)한 것을 보건대, 30여년 사이에 열 세 번 화재를 만났다고 하니 백성들이 황급하고 곤고한 것을 이를 미루어 더욱 잘 알 수 있다. 어염선세를 급대(給代)하는 것과 삼포가전(蔘布價錢)·세은절전(稅銀折錢) 등의 돈과 철거하여 옮기는 일들은 한결같이 청한 대로 시행할 것을 허락한다. 즉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그로 하여금 각별히 상량(商量)하여 한편으로는 화재를 만난 가호(家戶)에 휼전을 더 주고 한편으로는 민가(民家)를 옮기는 자금을 보조하여 주어 다른 곳에 옮겨 짓게 하고 수목을 심어 바람을 막게 하는 등등의 일도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조사(措辭)하여 분부하여서 마음을 다져먹고 대양(對揚)하게 함으로써 일부 일부(一夫一婦)라도 곤궁한 봄을 당하여 방황하는 탄식이 없게 하라. 그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때를 당하여는 또한 연소(延燒)되는 화란을 면하게 할 것을 일체(一體) 분부하라."
하였다.
3월 22일 임오
내각(內閣)에서 혜경궁(惠慶宮)에게 표리(表裏)를 올리고 찬선(饌膳)의 의궤(儀軌)를 올리니, 각신(閣臣) 이하에게 시상(施賞)하였다.
3월 23일 계미
비국에서 아뢰기를,
"이제 함흥 백성들이 화재를 당한 데 대해 조가(朝家)에서 진휼(軫恤)하는 은전(恩典)이 진실로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가 위유사(慰諭使)가 회주(回奏)한 데 대해 내린 비지(批旨)를 보건대, 또 어염선 삼세(三稅)의 급대(給代)와 은절전·삼포가를 합쳐 1만 냥이나 되는 것을 아뢴 대로 획급하게 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재용(財用)은 각각 절제(節制)가 있는 것이고 은전(恩典) 또한 차등과 한도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재용에 절제가 없게 되면 궁하게 되고, 은전이 혹 한도를 넘게 되면 고갈되게 마련인 것으로, 육지(陸贄)084) 가 이른 바 ‘은혜가 다하게 되면 원망이 뒤따르게 된다.’고 한 말이 실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더 시행하는 은전은, 재용을 궁하게 할 것이고, 은혜는 다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혹 불행하여 이보다 더 큰 재변이 있게 될 경우에는, 조가(朝家)에서 장차 어떻게 조처할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울산(蔚山)의 성(城) 절반이 소실된 화재와 제천(堤川)의 전 고을이 불탄 화재는 놀랍고 참혹한데, 함흥의 화재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울산의 백성들에게는 1석(石)의 쌀을 특별히 더 주는 것에 불과했고 제천의 백성들에게는 겨우 8백 꿰밋돈의 대여(貸與)를 허락했을 뿐인데, 유독 함흥의 백성들에게만 이와 같이 치우치게 후하게 하였으니, 이는 만백성을 똑같이 여긴다는 뜻에 어긋남이 있는 것은 물론, 또한 ‘우리는 뒤로 한다.’는 원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혜택이 두루 미치고 은혜를 고르게 입히려고 한다면 널리 베푸는 것이 병(病)이 된다는 것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방을 축조하고 수목(樹木)을 심는 것은 곧 성읍(城邑)을 위호하고 풍수(風水)를 막자는 뜻인 것이니, 옛사람이 설시(設施)한 데에서 깊고도 원대한 계획을 알 수 있는데, 중간에 황폐(荒廢)시킴으로 인하여 전공(前功)을 완전히 포기시킨 것은 참으로 매우 애석한 노릇입니다. 도신(道臣)이 기필코 보수하려고 하는 것은 실로 기적인 대책입니다. 다만, 제방 위의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호는 급가(給價)하여 철거해서 옮기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위유사(慰諭使)가 청한 여러 조항 가운데 어염선세 3천 9백 50냥을 특별히 획부(劃付)하여 민거(民居)를 옮기고, 제방의 터를 다시 정리하여 관목(灌木)을 심어서 무성한 숲을 이루게 함으로써 불을 방지하고 물을 막는 실효(實效)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강계(疆界)를 구획(區劃)하여 과조(科條)를 엄히 설정(設定)함으로써 다시는 전처럼 침점(侵占)하는 일이 없게 함은 물론, 영구한 이익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 쓰고 남은 숫자의 돈은 공해(公廨)를 영건(營建)는 역사(役事)에 더 보태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치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4일 갑신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하향(夏享)의 서계(誓戒)를 행하였다.
3월 25일 을유
평안 감사 서영보(徐榮輔)가 박천군(博川郡)의 성적비(聖蹟碑)를 영건(營建)하였다고 아뢰었다. 제술관(製述官) 이하에게 시상(施賞)하였다.
3월 26일 병술
울산부 위유 어사(蔚山府慰諭御史) 한용의(韓用儀)를 소견하였는데, 복명(復命)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민정(民情)이 어떠하냐고 순문(詢問)하니, 한용의가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장계(狀啓)에서 이미 상세히 진달하였습니다만 화재를 당한 형지(形止)를 눈 앞에서 보니, 남녀 노소가 울부짖으면서 뛰어다니고 있어 그 광경이 너무도 참담스러웠습니다. 간혹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간 사람이 있기도 하였습니다만, 신이 위유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거개 다시 돌아와서는 둘러서서 은유(恩諭)를 들었습니다. 과분한 별휼전(別恤典)을 받고서는 기뻐하는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였으며, 간간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법을 세워 구획(區劃)하여 집을 짓는 일이 지금 한창인데, 이 달이 지나면 역사(役事)를 끝내고 전거(奠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3월 27일 정해
사학 유생(四學儒生) 윤우대(尹遇大)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근일 새로 간행(刊行)한 이른바 《운평집(雲坪集)》이라는 책을 보니, 곧 고 장령(掌令) 송능상(宋能相)의 글이었습니다. 송능상은 일찍이 학문을 한다는 이름을 훔쳤습니다만, 심술(心術)이 추악하고 패려스러우며 언의(言議)가 음흉하고 궤휼스러워 평일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을 주자(朱子)가 중년(中年)에 확정짓지 않은 책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글을 잘못 읽고 의심하여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소학》·《근사록》을 배울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잘못 읽고 아무런 효험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가 말을 거칠게 하여 도(道)를 어지럽힌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정자(程子)의 역설(易說)도 농조(籠罩)085) 를 면치 못한다고 말을 하는 등 기담 괴설(奇談怪說)을 힘쓰면서 고금의 현인(賢人)들을 무시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동방의 《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의 책까지도 조목에 따라 기록하고 폄하(貶下)한 것이 더없이 망측하였습니다. 대저 《상례비요》는 곧 선정신(先正臣)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산정(刪定)한 책으로 예가(禮家)의 금석(金石) 같은 법전인 것입니다. 아! 저 송능상은 선정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현저히 드러나게 품고서 몰래 사사로이 연원(淵源)을 끊으려는 계교를 부리기 위하여 망령되이 문자(文字)를 찬술하여 감히 멋대로 방자하게 침척(侵斥)하였습니다. 신 등이 그 대략을 아뢰겠습니다.
그가 망실(亡室)이라고 신주(神主)를 쓰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비루하고 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라고 하였는가 하면, 남편을 따라 승중(承重)한다고 한 것에 대해 논하기를 패륜(悖倫)이요 무식(無識)한 짓이라고 하였으니, 너무도 심한 말입니다. 단습(袒襲)의 제도에 대해 논하기를 마구 뒤섞어 불분명하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고, 동자(童子)의 복(服)을 체감(遞減)시키는 데 대해 논하기를 전혀 예의(禮義)를 모른 것으로 매우 패려스러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혼백(魂帛)의 동심결(同心結)을 괴이하고 비루하고 설만스러워 쓸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부판(負版)을 1촌(寸)을 찌르게 한 것에 대해서는 이야말로 어불성설이며 매우 이상스러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조상(祖喪)이 있을 적에 적손(嫡孫)이 대중(代重)하는 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갑자기 자신이 상(喪)을 입고 있으면서 멋대로 스스로 대중(代重)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으며, 처모(妻母)는 출가(出家)되었어도 오히려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제도에 대해서는 이는 또한 너무도 패려스러운 것이라고 하였으며, 시자(侍者)들에게 다시 다 강의(降衣)하게 한 것에 대해 논하기를 진퇴(進退)시킴에 있어 전거할 것이 없으니 도리어 패리(悖理)가 된다고 하였으며, 조문(弔問)하는 위치의 그림이 섬돌 아래에 있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어찌 《가례(家禮)》를 불만스럽게 여겨 기필코 《의례(儀禮)》를 따라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본생(本生)의 외친(外親)에 대해 강복(降服)한다는 조항에 관하여 신씨(申氏)086) 가 가씨(賈氏)087) 의 예설(禮說)을 위조(僞造)한 것으로 학문이 거칠고 심술이 바르지 않다고 하며, 그 다음 계속 논하기를, ‘선정신 김장생이 이 책과 함께 가씨의 예설을 가탁하면서 한 글자도 다르게 한 것이 없으니 매우 이상하다.’ 하였으며, 또 신씨의 성(姓)을 고쳐 은밀히 가탁하였으니 너무도 오활한 짓이라 할 수 있다고 하고, 이하 계속 논하기를, ‘선정신이 한만하게 보고서 산삭하지 않은 채 이를 중히 여겨 인용하여 사람에게 답(答)하였다.’ 하였으며, 또다시 자주(自註)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단지 가씨왈(賈氏曰)이라는 세 글자만 첨가하였기 때문에 어리둥절하고 의심스러워 변별(辨別)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가 호란(胡亂)스러운 이야기로 떠든 것이 스승과 문난(問難)하는 말에서 나오기도 하였고, 다른 사람들과 왕복하는 글에서 나오기도 하였고, 《상례비요》의 지두(紙頭)에 사사로이 기록한 데서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침모(侵侮)하고도 부족하여 비난하고 헐뜯었는가 하면 무함하고 패려스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강복(降服) 한 조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씨(申氏)의 예설을 인용하여 비난하고 모욕하는 말을 더욱 방자하게 하였으니, 음흉하고 사특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보통 정도뿐만이 아닙니다. 《상례비요》라는 책이 비록 신씨의 초본(草本)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선정(先正)께서 증가하고 산삭하고 윤색(潤色)을 가하여 누차 초본을 고친 뒤에야 비로소 완전한 책이 이루어진 것이니, 신씨로부터 나왔다고 하여 반드시 신씨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신씨가 가씨의 예설을 위조했는데도 선정이 이를 취신(取信)하였으며 신씨가 성(姓)을 고쳐 몰래 가탁한 것인데도 선정이 중히 여겨 인용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송능상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위조한 말을 취신하고 성을 고친 이야기를 거듭 인용했다고 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리고 망실(亡室)이라고 신주에 쓰게 한 것은 주자(朱子)가 정한 것이지만 선정신 이황(李滉)은 ‘망(亡) 자는 너무 박절한 것 같으니 고치는 것이 방해로울 것이 없을 것 같다.’고 하였고,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감히 이를 따를 수 없을 것 같지만 진실로 이는 주부자(朱夫子)가 이미 정해 놓은 예법(禮法)이니, 문원공(文元公)의 준용(遵用)하라는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하였습니다. 비록 선정신 이황의 이야기일지라도 오히려 감히 갑자기 따르지 않았는데 그는 이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하류(下流)에 거처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이런 때문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주자(朱子)는 70세에 요절(夭絶)하였기 때문에 예서(禮書)를 미처 수정(修整)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아! 하류(下流)로서 윗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성문(聖門)에서 증오하는 것이니, 윗사람을 비난한 죄과를 면할 수 없음은 물론 존경하는 도리에 매우 흠결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팽조(彭祖)를 요절(夭絶)이라고 한 것은 장주(莊周)가 말한 것인데 그가 일찍이 상자(殤子)의 수(壽)만도 못하게 여겨 드러내어 기폄(譏貶)하는 마음을 내어부린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적손(嫡孫)이 대중(代重)하는 제도는 곧 선정신 문원공(文元公)의 의논이 아닌 것입니다. 문순공(文純公) 신(臣) 권상하(權尙夏)가 일찍이 말하기를, ‘하손(賀孫)의 예설(禮說)은 감히 따를 수 없을 것 같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조사(祖師)의 자리인데, 어떻게 감히 단상설(短喪說)을 가지고 조사의 의논과 배치(背馳)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본디 몰래 우리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에 대해 이심(貳心)을 품고서 기필코 추악한 비난을 가하려 하였는데 위로는 주자(朱子)에까지 언급하고 아래로는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에게까지 언급하는 등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습니다. 아! 후학(後學)으로서 선현(先賢)을 무함하는 것이 진실로 어떠한 사람이며 후손(後孫)으로서 선조(先祖)를 무함하는 것은 더더욱 어떠한 사람입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선정신 김장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적에 이희정(李喜鼎)·김간(金侃) 등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계속 일어나 상소하였는데 그들이 추악하게 비난하는 것이 끝이 없어서 위로는 선정신 이이(李珥)에게까지 언급되었고 아래로는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에게까지 언급되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선정신 김장생을 침훼(侵毁)한 것은 단지 예학(禮學)에 관한 한 조항 때문인데 패려스러운 이희정의 상소에는 애매 모호하여 불분명하다는 말이 있고 흉측한 김간의 상소에는 전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제 송능상(宋能相)이 마구 뒤섞여 불분명하다고 한 말도 패려스런 이희정의 입에서 나온 말과 똑같으며, 송능상이 어불성설이라고 한 말은 흉측한 김간의 글을 전수받은 것으로 스스로 선정을 비난하고 정례(正禮)를 혼란시킨 무리로 귀결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선조(先祖)의 패려스러운 손자요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인데 그 책을 널리 반포하게 한다면 선정에 추욕을 가하는 불령(不逞)스런 이희정·김간 같은 무리가 송능상의 말을 구실로 삼아서 예가(禮家)의 변괴를 야기시켜 세도(世道)를 괴란시키는 것이 양묵(楊墨)088) 과 노불(老佛)089) 의 해보다 더 심하게 되지 않을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그의 죄를 성토하고 각판(刻板)을 파기시키고 책을 불태운 뒤에야 그만두려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윤리를 어기고 예법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으로 정초(旌招)의 은전(恩典)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處分)을 내려 송능상의 직명(職名)을 삭제시키고 송능상의 문판(文板)을 파기시켜 세도(世道)를 안정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주자(朱子)는 성인(聖人)을 계승하고 후학(後學)을 개도(開導)한 대현(大賢)이고, 김문원(金文元)은 우리 동방에서 도통(道統)을 접수(接受)한 유현(儒賢)이고 또 송선정(宋先正)의 스승이다. 그리고 선정이 높여 우러르고 본받아 계술한 것은 곧 김문원과 주자(朱子)이다. 선비로서 이 두 현인을 무시하고 비난한다면 이는 사문(斯文)의 변괴인 것이고, 가속(家屬)으로서 이 두 현인을 등진다면 선정의 패려스러운 후손인 것이다. 따라서 유일(遺逸)에서 삭제시키고 문판(文板)을 파기시키는 것을 누군들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또한 지극히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겨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집을 내가 아직 보지 못하였으니 갑자기 윤종(允從)할 수 없다. 그대들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조가(朝家)의 형정(刑政)은 본디 이렇게 해야 마땅한 것이다. 상소의 내용에 대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별강(別講)에서 《맹자(孟子)》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맹자(孟子)가, ‘양(羊)으로 소와 바꾸게 한 것을 두고, 이 마음이 왕천하(王天下)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진실로 선단(善端)의 발현이기는 하지만 단지 측은해 하는 마음만 지닌다면 어떻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니, 옥당(玉堂) 서장보(徐長輔)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참으로 옳습니다. 임금이 된 사람이 만일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한 방도로 살인(殺人)한다면 이는 죽이는 가운데에도 또한 인심(仁心)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만일 부인(婦人)의 사랑으로 감싸주기만을 일삼는다면 이는 다스림에 아무런 유익이 없게 될 것입니다. 봄에는 태어나게 하고 가을에는 죽이는 것이 곧 하늘의 도(道)인 것으로 봄에 태어나게 하는 것은 인(仁)이고 가을에 죽이는 것은 의(義)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의(仁義)가 병행된 연후에야 세공(歲功)을 이룰 수 있고 천하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수(禽獸)라 할지라도 죄없이 죽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차마 못보겠다면 이 마음이 왕천하(王天下)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백성으로 하여금 죄없이 구렁텅이에 죽어서 나뒹굴게 하고 풍년이 들어도 일년 내내 고생스럽고 흉년이 들면 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경중이 전도된 것으로 당연한 순서를 어긴 것이다."
하니, 서장보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제(齊)나라 왕(王)이 왕정(王政)을 행하지 못한 것은 실로 경중의 순서를 몰라서 그 마음을 미루어 확충시켜 나가지 못한 데 연유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풍년이 들면 일년 내내 배부르고 흉년이 들면 죽음에서 면하게 하는 것이 곧 왕도 정치의 효험인 것으로 이는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제나라 왕이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겼으며, 토지(土地)를 넓히고 진(秦)나라 초(楚)나라에게 조회(朝會)를 받고 중국(中國)에 임어하여 사방의 오랑캐를 위무(慰撫)하는 것을 비유컨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는 것 같은데도 제나라왕이 기필코 추구하였으니, 이 또한 경중과 난이(難易)의 순서를 모른 것이다."
하니, 서장보가 말하기를,
"왕자(王者)의 도(道)는 곧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일을 행하는 것뿐입니다. 떳떳한 말과 떳떳한 행동을 하면 저절로 이치에 합치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애당초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저절로 그 공효가 드러나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그물질[罔民] 한다는 ‘망(罔)’ 자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항심(恒心)이 없는 것은 본래 임금의 죄인데, 죄를 범하는 데 따라서 형벌을 가하는 것은 참으로 그물질하여 엄습해서 잡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3월 28일 무자
승지 홍석주(洪奭周)·김종선(金宗善)·김노경(金魯敬)·정만시(鄭萬始)·김교근(金敎根)을 소견하였다. 김노경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경모궁(景慕宮)의 악장(樂章)의 일에 대해 뒷날 연석에 나올 적에 다시 아뢰라는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원(梨園)을 상고하여 보았더니, 선조(先朝) 기미년090) 의 하교에 ‘악장이 너무 기니 재절(裁節)토록 하되, 오언(五言)은 깎아서 사언(四言)으로 만들고 일장(一章)은 나누어 이장(二章)으로 만들라.’고 하였으며,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 쓰는 악장도 개찬(改撰)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아직 완성한 데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글을 완성하지 못한 것인가?"
하니, 홍석주가 말하기를,
"글은 완성하였습니다. 대저 태묘(太廟) 15실(室)에서 관헌(祼獻)하는 시간이 상당히 오래 되기 때문에 악장의 구어(句語)가 많아도 다 연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모궁의 경우는 장사(將事)할 즈음 시각이 너무 빠른데 반하여 악장은 너무 길기 때문에 매양 촉박하다는 탄식이 있었습니다. 선조(先朝)께서 만년(晩年)에 이미 글자의 숫자를 감하라고 명하고 나서 그에 의거하여 연주하게 하였으며, 또 다시 찬술하라는 하교가 있으셨으나 아직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 악보(樂譜)에 관한 책자(冊子)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악장이 저절로 음률(音律)에 합치될 수 있는가?"
하니, 홍석주가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전에는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이 가시(歌詩)에 꼭 들어맞았다고 합니다만,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당(唐)·송(宋) 이후에는 오직 악가(樂歌)를 찬술하여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악보에 의거 노래하게 하여 성음(聲音)의 장단(長短)이 저절로 율보(律譜)에 합치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악장을 고치더라도 이원(梨園)의 성률(聲律)은 별로 개정(改定)해야 할 것이 없는가?"
하니, 홍석주가 말하기를,
"악원(樂院)에 있는 책자(冊子)를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니, 경모궁의 악장은 이미 도식(圖式)을 써서 둔 것이 있었습니다. 악장을 이제 개찬(改撰)한다고 하더라도 자수(字數)의 다과(多寡)는 이 악보에 의거하여 한다면 성률은 개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신(迎神)할 때는 헌가악(軒架樂)을 쓰는가?"
하니, 김노경이 말하기를,
"영신(迎神)과 송신(送神)에 아울러 헌가악을 씁니다만 변두(籩豆)를 치울 때에는 등가악(登歌樂)을 씁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모궁의 악장은 팔성(八成)을 쓰는가?"
하니, 홍석주가 말하기를,
"천신(天神)에게는 육성(六成)을 쓰는데 예컨대 남단(南壇)이 이것이며, 지기(地祇)에게는 팔성(八成)을 쓰는데 예컨대 사직(社稷)이 이것입니다. 묘궁(廟宮)에는 아울러 구성(九成)을 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마침 언단(言端)으로 인하여 아뢸 것이 있습니다. 음악의 도(道)가 정치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어 풍속의 오륭(汚隆)과 국가의 치홀(治忽)을 모두 여기에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태묘(太廟)의 덕을 상징하는 음악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선조(先朝)에서는 매양 지금 사람들의 정력(精力)이 옛사람만 못하기 때문에 제향(祭享)을 올리면서 장사(將事)하는 즈음 준분(駿奔)하는 반열에 서는 사람에 대해 모두 빨리 하는 것을 공경으로 삼도록 신칙(申飭)하였으며 악장에 이르러서는 오직 천천히 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이에 대한 전후 사교(辭敎)가 누누이 간절했을 뿐만이 아니고 신도 또한 받들어 들은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근래 배향(陪享)하는 반열에서 삼가 영신악의 구성(九成)을 연주하는 것을 들어보면 음절(音節)이 촉박하여 전일과는 크게 다릅니다. 이것이 행례(行禮)의 시각에 더디게 함이 없게 하려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기는 하지만 풍속을 살펴보고 덕을 안다는 의의에 있어서는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친히 관헌(祼獻)하실 날이 하루가 격해 있으니, 특별히 신칙을 가하여 천천히 하던 옛 방법을 회복시키게 하는 것을 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영신악뿐만이 아니라 악장의 절차에는 대저 모두 촉박한 탄식이 있으니, 특별히 신칙하여 전처럼 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홍의호(洪義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한용귀(韓用龜)를 진하 겸 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삼았다. 이에 앞서 판중추부사 서용보(徐龍輔)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하고 병든 정상을 진달하면서 사함(使銜)을 체차시켜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3월 29일 기축
별강(別講)하였다.
고 장령(掌令) 송능상(宋能相)을 유일(遺逸)에서 삭제시키고 문집(文集)의 각판(刻板)은 파기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이 유생(儒生) 윤우대(尹遇大) 등의 상소에 의거 복계(覆啓)하기를,
"선현(先賢)을 무시하고 예법(禮法)을 무너뜨렸으니, 유자(儒者)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문집을 간행한 각판을 파기시키고 초선(抄選)한 직(職)을 삭제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