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7월
7월 1일 계축
하교하기를,
"오랫동안 성묘[省謁]하지 못해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이제 다행히 하늘에 계신 영령에 힘입어 농사가 다행히 흉작을 면하였으므로, 나의 정을 펴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이번에는 8월 안에 〈성묘할〉 것이다. 그런데 초하루 이후부터 열흘 전까지는 이미 재계(齋戒)할 날이 적으니, 건릉(健陵)·현륭원(顯隆園)의 거둥은 5일로 가려서 들이라."
하였다.
대호군 조득영(趙得永)이 상소하여 서능보(徐能輔)가 상소한 말을 변명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중신(重臣)인데 그가 한 말을 개의할 것이 뭐가 있기에 스스로 체모를 손상한단 말인가? 내가 그에게 벌을 준 것은 또한 경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고 경의 본심을 알아서 그런 것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7월 2일 갑인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추도기 유생(秋到記儒生)에게 시험을 보여 강(講)에서 수석을 차지한 김일연(金逸淵)과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한 조경진(趙璟鎭)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재령(載寧) 등 고을의 떠내려갔거나 쓰러진 민가 1백 23호에 특별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 명하였다.
7월 4일 병진
판부사 서용보에게 거듭 유시하기를,
"경은 어찌 내가 경을 위하여 고심(苦心)한다는 것을 모르고 한결같이 이렇게 하면서 변통하려고는 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서로 버틴다면, 어느 때에나 끝장이 나겠는가? 경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비록 해를 넘기더라도 사관(史官)을 보내 면유(勉誘)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흉년이 들어 쇠잔한 고을이 장차 피폐하기에 이르렀으니, 경의 나라를 본받는 마음으로 분의(分義) 밖에 것은 또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경은 당일로 돌아가 내 마음을 편하게 하라."
하였다.
7월 5일 정사
비가 내렸는데, 수심이 한 자 한 치 여섯 푼이었다. 이해에 6월 보름 사이부터 장마가 자주 져서 5부(五部)에 쓰러진 집이 도합 7백 40여 호였다. 모두 휼전을 내렸다.
7월 8일 경신
가산(嘉山)·박천(博川) 두 고을에 떠내려갔거나 쓰러진 민가(民家)가 2백 60채였는데, 특별히 휼전을 시행하라 명하였다.
7월 9일 신유
약원(藥院)에서 대조전(大造殿)에 입진(入診)하였는데, 임금의 귀 왼쪽 언저리가 땅기는 증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제조 김사목이 말하기를,
"근일 날씨가 매우 더워 성상께서 접견하는 즈음에 몸차림새에 어려움이 없지 않을 것인데, 아랫사람을 예로 대하시는 마음을 천만 존경합니다만, 약원에서 입시할 때는 이에 구애될 필요가 없습니다. 일찍이 영묘조 및 선대왕의 조정에서는 증후(症候)가 있을 경우 매양 침실로 들어와 진찰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주 불러 접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역시 몸차림새를 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앞으로 조리하는 약제는 마땅히 계속 올려야 하니, 이 또한 미리 잘 알아서 하라."
하고, 가감육화탕(加減六和湯)을 달여 들이라고 하였다.
7월 10일 임술
형개연교탕(荊芥連翹湯)을 날마다 달여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다섯 첩(貼)에 이르러 중지하였다.
7월 11일 계해
도정(都政)130) 을 행하여, 【이조 판서 서영보(徐榮輔)·참의 남이익(南履翼)·병조 판서 김이도(金履度)이다.】 윤장렬(尹長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원재명(元在明)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김희순(金羲淳)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춘영(李春英)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7월 13일 을축
여러 도의 추조(秋操)를 정지하고, 진휼을 설행한 고을의 관문(官門)에 모여서 하는 점호(點呼) 또한 정지하였다.
7월 14일 병인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만수(李晩秀)가 의주부(義州府)의 민가 1천 8백 77호가 떠내려갔거나 무너지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2백 63명이라고 치계하니, 하교하기를,
"허다한 인명이 죽었다고 하니 마음이 섬뜩하고 불쌍한 생각이 참으로 곱절이나 든다. 도와주는 것은 오로지 위무(慰撫)하는 한 가지 방도에 달려 있으니, 수령들이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마음을 다할 것이다만, 신칙하는 하교가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처럼 하교한다. 특별히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휼전(恤典)을 더해 주라. 죽은 사람의 신역(身役)과 환포(還布)를 모두 탕감해 주고, 물가에다 제사를 설치하는 등의 절차를 착실히 거행하라. 또한 처자로 하여금 안접(安接)시키는 방도를 알게 하여 즉시 며칠 안으로 고쳐 짓게 하고, 이밖에 떠내려간 자에게는 연호 잡역(煙戶雜役)을 모두 면제하거나 줄이라."
하고, 도신(道臣)에게 글을 지어 권면하게 하였다.
7월 15일 정묘
조종영(趙鐘永)을 의주부(義州府) 위유 어사(慰諭御史)로 삼아 불러 보고 보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근년 들어 처음 있는 재변이어서 듣고 불쌍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다. 이 전교를 가지고 가서 선유(宣諭)하고, 비록 전교 이외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대가 도신(道臣)·수신(守臣)과 함께 안접시키는 방도를 강구해 조치하라. 백성들에게도 이런 뜻을 선유하고 일을 마친 후 복명(復命)하되, 병진년131) 재해를 당한 때와 비교해 형편이 어떠한지도 자세히 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의주부의 재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유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기백(箕伯)132) 의 장계를 보건대,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떠내려가고 무너진 민가가 거의 천여 개나 되었으므로, 불쌍한 마음이 밤이 새도록 풀리지 않아 아침에 신칙하는 유시를 보내 의주 백성에게 유시한다. 대저 금년 여름에는 강우량이 적당치 않았는데, 비록 서울의 민가로 말하더라도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것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렇게 심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과거의 사례에 의해서 대략 휼전을 베풀었다만, 어찌 족히 나의 본심을 다하였겠는가? 다만 조정에서 믿는 것은 오로지 며칠 안에 집을 짓고 안접시켜서 처자와 가속(家屬)이 전처럼 안도(安堵)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이에 위유 어사를 보내 유시하노니, 오직 너희 재해를 입은 백성들은 모두 잘 알라."
하였다.
7월 16일 무진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각신(閣臣) 및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았다. 화성(華城)의 거둥 날짜를 다음달 27일로 물려 정하라고 명하였다.
오재소(吳載紹)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헌납 이장후(李章垕)가 상소하여 대신(臺臣) 민양세(閔養世)를 논하기를,
"그가 일찍이 한 수령을 논박하였는데, 사안(査案)이 거짓으로 밝혀졌는데도 거듭 언지(言地)를 차지하고 스스로 인책하지 않고 있어 대각(臺閣)에 부끄러움을 끼치고 있다고 합니다. 청컨대 전후로 그를 의망(擬望)한 전관(銓官)을 추고하소서."
하고, 또 무장(武將)이 대례(臺隷)를 곤장 때려 가둔 일을 말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묘당에서 아뢰기를,
"어영 대장 이요헌(李堯憲)이 길에서 정언 박규수(朴奎壽)를 만났는데, 편복(便服) 차림을 하였기 때문에 대간(臺諫)인 줄을 모르고 말 앞을 범한 것을 꾸짖어 그 대례(臺隷)를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대신(臺臣)이 또 장신(將臣)의 대례(帶隷)를 붙잡아 놓았습니다. 장신이 ‘잠시 가두어 놓았다가 곧 놓아 주었으니 참으로 잘못이 없는데,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장신의 하리(下吏)를 잡아 가둔 것은 조정의 체면에 관계된다.’라고 여기어, 먼저 도태시키고 이어서 가두고 곤장을 때렸다고 합니다. 대관(臺官)이 혹 실례하였다 하더라도 이 일은 확실하지 않은 예에 불과한데, 서로 따지는 것처럼 하여 마침내 서로 대우하는 예가 결여되었으니, 장신을 중하게 추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신(臺臣)은 공복(公服)을 착용하지 않으면 나가지 않는 것이 본디 대관의 체통이고 칙교(飭敎)가 아주 엄한데도 먼저 대관의 체모를 잃고 또 칙령(飭令)을 어겼습니다. 전 정언 박규수에게 파직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대간이 평복 차림으로 사사로이 나가는 것을 칙금(飭禁)으로 삼아 양사(兩司)에 써서 걸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 묘당의 초기(草記)를 보건대, 이 일은 아주 미세한 것에 불과한데도 한 말이 아주 적당치 못하다. 민양세의 일에 대해서는 그에게 참으로 죄가 있으면 감죄(勘罪)를 청하면 되고 개정(改正)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갑자기 의망한 사람에게로 건너뛰어 문비(問備)까지 청하였다. 또 성명(姓名)을 쓰지 않고 다만 전후의 전관(銓官)이라고만 말한 것은 그 뜻을 알기 어렵지 않으니, 이는 현란시키려고 시험해 본 계책이 아니겠는가? 작았을 때 방지하고 조짐을 막는 의의에 있어서 언관(言官)이라고 해서 곡진히 용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꼬치꼬치 말하지는 않겠다만, 그와 같은 시골 사람을 깊이 따질 것이 뭐 있겠는가? 특별히 경(輕)한 쪽을 따라 헌납 이장후에게는 우선 향리로 추방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노동(尹魯東)이 통신사(通信使)의 호행 대차왜(護行大差倭)가 나왔다고 치계하였다.
7월 18일 경오
이조 판서 서영보가 상소하여 어머니의 병을 진달하고 장기간의 휴가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판서로, 이직보(李直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20일 임신
반궁(泮宮)133) 에서 칠석제(七夕製)를 시행하였다.
7월 21일 계유
북원(北苑)에 나아가 황단(皇壇)에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7월 25일 정축
태묘(太廟)와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7월 29일 신사
함경 가도사(咸鏡假都事) 윤광호(尹光濩)가 관찰사 김명순(金明淳)이 졸(卒)하였다고 아뢰니, 조덕윤(趙德潤)으로 대임시켰다.
조윤대(曹允大)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7월 30일 임오
약원에서 입진(入診)하고 겸하여 차대를 행하였다. 명하기를,
"작년 겨울에 호서와 호남에 이전(移轉)한 환곡(還穀)의 금년 모조(耗條)를 특별히 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호조 판서 박종경의 아뢴 바를 따른 것이다.
좌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진휼의 밑천을 보태 준 사람에게 줄 실직(實職)은 오위 장(五衛將) 및 동첨추(同僉樞)인데, 시골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오위 장이 더 낫습니다. 조정에서 시행하는 위장(衛將)이나 중추부 관함(官銜)이 이미 경중의 구별이 없으니, 마땅히 받아야 할 자가 원하는 것이 만약 위장에 있다면, 원하는 바에 의해서 시행하도록 허락하여 그 희망에 맞추어 주는 것이 바로 후일을 권면하는 방도입니다. 진휼의 밑천에 1천 석 이상 보탠 사람으로 실직을 응당 받아야 할 자에게는 모두 위장으로 차하(差下)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무신(武臣)이 변방으로 나가는 데는 본래 단계가 있는데, 만약 훈련원 정(訓鍊院正)을 지낸 자가 아니면 내외(內外)의 장(將)을 거치기 전에는 곧바로 변방에 차출하지 못하는 것이 옛날의 관제(官制)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많이 규식을 어기고 있으니, 앞으로 옛날의 제도를 신명(申明)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거둥할 때에 강할 책자를 싣고 가는 것이 옛 규례인데, 근래에는 행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유신(儒臣)의 아룀으로 인해 복구(復舊)하라 명하였다.
오의상(吳毅常)·백사은(白師誾)을 좌·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