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10월

싸라리리 2025. 6. 1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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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임오

김이도(金履度)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10월 4일 을유

식년 문무과 초시를 베풀었다.

 

10월 5일 병술

교리 홍명주(洪命周)가 상소하여 시장(試場)이 혼잡한 폐단을 논하니, 비답하기를,
"과거의 폐단은 참으로 그대의 말과 같다. 이는 크게 기강과 관계되므로, 사정(私情)을 써 불공정한 짓을 한 부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어지럽고 혼잡한 것은 사자(士子)들이 정숙하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반드시 문금(門禁)이 해이되어서 그런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각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7일 무자

윤익렬(尹益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8일 기축

천둥과 번개가 쳤다. 하교하기를,
"번개와 천둥이 순음(純陰)이 폐장(閉藏)하는 달에 심하게 쳤으니, 아! 하늘이 왜 이처럼 간곡하게 재앙의 경계를 보인단 말인가? 아! 하늘이 재변을 내리는 것은 부르는 바가 있기 때문이고 해마다 이러한 이변이 오는 것은 분명히 그 까닭이 있다.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라고 하였고, 어(語)에는 ‘임금의 마음은 원표(源表)와 같다.’라고 하였으니, 나라가 편안한데도 근본이 어지럽거나 마음이 정성스러운데도 원표가 혼탁한 일은 없다. 그러므로 두 가지 가운데는 한 가지를 겸하여 있게 되니, 나라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마음을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 성(誠)은 덕(德)의 표(表)이고 원(源)이다. 그렇다면 덕을 닦는 것 또한 성으로 말미암는데, 재변을 늦추는 방도도 실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험삼아 오늘날에 백성을 보호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고 마음의 정성을 다하여 원표(源表)를 밝게 하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무리하지 않을 것이니, 조용히 그 까닭을 따져 보면 오로지 나에게 그 원인이 있다. 내가 민첩하지 못하여 모든 일이 좀스럽게 되어 상하가 한갓 구차하고 고식적인 것만을 편안히 여기고 국정(國政)에 하나의 방편(方便)도 마음을 써 주선하지 않았다. 비록 재변이 생기는 때에는 경각심을 가지지만 어느 해가 되면 점차로 게을러지고 마니, 재변의 조짐이 점차로 형성되어 점점 해마다 이 재이를 초래하는 것 또한 옳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애(仁愛)하는 하늘의 경계가 봄날처럼 따뜻하여 간곡하고 자상함이 마치 염려해 주는 바가 있는 것 같다. 미처 상제(上帝)를 두려워하기 전에 알려 주었으므로 대비할 수 있었는데 대비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나간 일을 말해도 소용없지만 앞으로는 할 수 있다. 우순(虞舜)의 성덕(聖德)처럼 부지런히 하고 주 문왕(周文王)의 소심(小心)함과 같이 조심하여 우러러 보답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오직 나의 도리이다. 아직 모르고 있는 나의 잘못과 백성들의 어려움에 이르러서는 구중 궁궐에 있는 내가 어떻게 하나하나 다 알 수 있겠는가? 풍속이 투박하고 기강이 무너져 해이된 것이 마치 양약(良藥)이 아니면 다스릴 수 없는 고질과 같으니, 반드시 같은 마음으로 보필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회복시킬 가망이 있는 것이다. 위에서 혼자 움직이는 내가 어떻게 하나하나 구할 수 있겠는가? 너희 대소 신료들은 모두 이런 뜻을 몸받아 말을 진달하고 계책을 건의하되, 정직하게 숨기지 말라. 비록 말이 맞지 않더라도 내가 죄를 주지 않을 테니, 국가로 하여금 풍속을 변화시켜 돌리는 아름다움이 있게 하라. 내가 바야흐로 마음을 비우고 경건히 기다리겠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의계(議啓)하여 권면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교리 홍의영(洪儀泳)이 차자를 올려 학문에 힘쓰는 것과 민폐를 돌보는 것과, 언로를 여는 세 조목을 재변을 늦추는 방책으로 삼으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시경》에 ‘번쩍거리는 번개와 우레에 천하가 불안하다.’라고 하였다. 내가 평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스스로 고인(古人)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여겼는데, 어찌하여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리는 것이 근세(近歲)에 더 심해졌단 말인가? 어찌하여 내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하늘이 뜻하지 않는 재변을 내리게 되었는가? 자신을 반성하여 자책(自責)하건대, 반드시 알지 못하는 가운데 미진한 곳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깊이 두려워서 밤새도록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하늘이 이미 밝아져 운관(雲觀)150)  에서 날이 밝았음을 알려 왔다. 이에 초안을 불러 주어 도움되는 말을 구하게 하였는데, 마치 목마른 자가 마실 것을 찾듯이 하였다. 승정원의 계사와 옥당의 차자가 일시에 답지하였는데, 말마다 절실하고 곧아 걱정스런 마음 더욱 깜짝 놀라게 하였다. 진달한 다소의 말은 내 마땅히 벽에 붙여 두고 수성(修省)을 돕는 밑천을 삼겠다."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지금 평안 감사 이만수(李晩秀)의 장계를 보니, 그가 말하기를, ‘본도의 병사 이윤겸(李潤謙)이 죽었는데, 그가 차고 있던 밀부(密符) 및 인신(印信)·병부(兵符)와 수령·변장(邊將) 병부의 좌척(左隻) 76척(隻)을 병우후(兵虞候) 심공작(沈公綽)이 신의 영(營)에 보내 왔습니다. 그래서 밀부는 승정원으로 올려 보내고, 인신과 병부는 해당 영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았더니, 강희(康熙)병술년151)  ·건륭(乾隆)경술년152)  에 모두 절도사가 유고하여 우후가 신의 영으로 옮겨 보냈었습니다. 삼가 《대전통편(大典通編)》 부신조(符信條)를 상고해 보았더니, 절도사가 유고하면 우후가 받아 보관한 다음 보고한다고 하였습니다. 우후는 옛날의 유후(留後)이고 지금의 중군(中軍)으로, 유사시에 주장(主將)을 대신하여 영(令)을 맡습니다. 법의 뜻은 그러하나 변방의 중한 곤수(閫帥)가 부인(符印)이 없다면 곧 빈 영이 되고 마니, 《대전통편》에 기록된 바에 의해서 다시 해당 우후에게 주어야 합니다만, 과거의 사례가 이와 같기 때문에 우선 머물러 두었습니다. 법의 뜻과 일의 체면으로 헤아려 볼 때 끝내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고, 또한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는 안되니,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품지(稟旨)하라 분부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절도사가 유고하면 부인(符印)은 우후에게 전해 준다고 이미 《대전통편》에 실려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성헌(成憲)이고, 또 우후는 주장(主將) 다음이므로 만약 사고를 당하면 주장을 대신하여 영(令)을 맡게끔 법제화되어 있습니다. 도의 장계에 의해서 우후에게 다시 주어 새 병사가 부임하기를 기다려 넘겨 주게 하고, 이어 후일의 정제(定制)로 삼으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해우(李海愚)를 평안도 절도사로 삼았다.

 

10월 9일 경인

좌의정 김재찬·우의정 김사목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내린 윤음(綸音)에서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정성이 애연하였습니다. 하나의 ‘성(誠)’ 자로 폐단을 구하는 근본을 삼으셨으니, 지극한 한마디의 말씀이 이에 더할 것이 없었습니다만, 신들이 이 ‘성(誠)’ 자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한번 기뻐하고 한번 노여워함이 중도(中道)를 어기면 마음이 성(誠)을 잃는데 하늘이 이를 보고, 한번 움직이고 한번 그치는 것이 정도(正度)에 어긋나면 마음이 성(誠)을 잃는데 하늘이 이를 보며,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을 지키는 것이 때에 맞지 않거나 일정 일령(一政一令)이 이치에 거슬리면 마음이 성(誠)을 잃는데 하늘이 이를 봅니다. 성(誠)과 불성(不誠)은 털끝을 다투는데, 오직 얼굴을 맞대고 명해 주고 귀에 대고 말해 주는 하늘이 지척(咫尺)에 임해 계시니, 어찌 성과 불성을 보아 상서나 재앙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마음으로 하고 말로 하지 말고, 안으로 하고 겉으로 하지 말아, 급할 때에도 성(誠)으로 하시고 출입(出入)에도 성(誠)으로 하소서. 동정(動靜)·희로(喜怒)에서부터 어묵(語默)·정령(政令)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를 스스로 진실하게 하여 거짓이 없고 순일(純一)하여 잡(雜)됨이 없도록 해나가면,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돌릴 수 있고 아래로는 대중의 마음을 믿게 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신들이 음양(陰陽)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으면서 하늘이 견책하고 사람들이 노하여 재변이 거듭 이르게 하였는데, 오히려 어찌 감히 편안하게 직책에 있겠습니까? 빨리 내쫓으라고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우레와 번개가 경계하여 밤새도록 근심하였는데, 바로잡아 구제하는 글이 계속 이르렀으니, 감히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내가 옛날에 선왕께 들었는데, ‘내 평생에 한 점의 게으른 기운이 없었다. 이는 한결같이 ‘성경(誠敬)’이란 두 글자로 해나간 것이니, 너는 알아두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면려하였다. 이어 소자에게 명하여 ‘성경’ 두 글자를 침실의 자리 옆 병풍에 쓰게 하시고, 돌아보면서 소자에게 ‘너는 이 뜻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가르치시었다. 이에 소자가 손을 맞잡고 큰 소리로 외우며 영원한 경계로 삼는데, 그 옥음(玉音)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나 성훈(聖訓)은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다. 아! 소자가 이 가르침을 듣고 나서부터 조석으로 잊지 않고 뜻을 가다듬어 계술(繼述)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덕이 없어 미치지 못해 일정 일령(一政一令) 사이에서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경각심을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존성(存省)·근계(勤戒)의 공부가 단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전전 긍긍(戰戰兢兢)하며 마치 연못 위에 임하고 얼음을 밟듯이 한 지 몇 해가 되어간다. 옛날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이루기는 더디나 망하기는 쉬운 것이 나라이다.’라고 하였는데, 〈성패(成敗)의〉 판가름이 이처럼 분명하니, 어찌 깊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 부자(程夫子) 또한 경계하기를, ‘재이로 인하여 닦고 경계하는 것은 현인의 말에 손상됨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후세의 임금을 가르쳤다고 하겠다. 대저 나라의 성패(成敗)의 지속(遲速)은 성경(誠敬)에 나타나는데, 성경의 실지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만두어서는 안될 극진한 공부인 것이다. 아!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고 오직 성인만이 하늘을 두려워할 줄을 안다. 싫어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좋은 상서를 보이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재이로 견책하여 알리는데, 하늘과 사람의 이치는 곧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으나,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겠는가? 수성(修省)하는 책임은 오로지 재앙을 그치고 없애는 데에 있으니, 어찌 감히 성실하지 않겠는가? 천 가지 만 가지의 단서가 다같이 성경으로 귀착하니, 시험삼아 몇 조목만 말하더라도 역력히 진술할 수 있다. 군덕(君德)의 성취는 경연(經筵)에 달려 있고, 치도(治道)의 쇠퇴와 융성은 살피고 묻는 데에 달려 있다. 한가로이 있을 때 마음을 맑게 지니고, 조정에 임해서 도(道)를 묻는 것이 학문에 부지런히 하는 성경이다. 치화를 넓게 펴려면 반드시 유술(儒術)에 의지해야 하고, 광명(光明)을 빛내려면 전훈(典訓)을 본받아야 한다. 정치(政治) 가운데에다 마음을 써 궁극(窮極)의 지경[域]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 뜻을 세우는 성경이다. 백성을 보호하는 데 마음을 두고, 다친 사람처럼 불쌍히 여기어 큰 덕(德)을 밝히기에 힘쓰고, 백성을 편안히 구제하되, 항상 이것만 생각하고 이것만 해야 한다. 마음과 뜻은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일한 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너그럽고 어진 덕을 미루어 넓혀 괴로워하는 대중을 어루만져 돌보면 은혜가 비록 고르게 입혀지지 않더라도 효과가 저절로 베풀어질 것이니, 이것이 백성을 보호하는 성경이다. 《서경(書經)》에 ‘하늘의 복 주심을 공경하라.’고 하였고, 《시경(詩經)》에는 ‘상제(上帝)가 너에게 임하여 계신다.’라고 하였다. 성경(聖經)·현전(賢傳)에 방책(方策)이 펼쳐져 있으니, 우리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를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경들은 대신의 직책으로 옛날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옛 선헌(先憲)을 본받아 과인에게 보답하되, 모두 동덕(同德)으로 보필하고 구제하여 만회한다면, 우리 나라가 거의 편안하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경의 차자를 펼쳐 놓고 보니, 한 폭에 충성스럽고 곧은 말이 가득히 담겨 있어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더욱 감회가 일어나 노성(老成)에게 사례하였다. 뜻밖에도 오늘날 염매(鹽梅)153)  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사직하는 것에 있어서는 형식적인 겉치레이므로, 실로 듣고 싶지 않다. 경들은 어찌 생각하지 않는가? 안심하고 일을 보아 일찍 계책을 세우라."하였다.

 

전라 감사 이상황(李相璜)이 상소를 올려 재해를 입은 백성에게 관대한 정사를 시행하도록 청하기를,
"첫째 죽은 군오(軍伍)는 현재의 안부(案付)에서 옛날의 정원을 조사하여 탕감하고 작년 정포(停布)하고 첨대(簽代)한 정사 또한 너그럽게 하여 다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각종 거두어야 할 포(布)로써 경안부(京案付)에 들어 있지 않아서 대신 지급할 수 없는 것은 주사(籌司)154)  와 의견을 상의해서 변통하여야 합니다. 경안부에 있어서는 두 해로 나누어서 절반은 당년에 책임지우고 절반은 명년에 내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둘째는 진폐(陳廢)된 전결(田結)이고, 셋째는 유망(流亡)한 결역(結役)입니다. 넷째는 어염선세(魚鹽船稅)를 아울러 조금 알맞게 감해 주고, 대동(大同)의 미수(未收) 및 정퇴(停退)된 것 중에 징수할 곳이 없는 것은 특별히 견감을 시행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환곡(還穀)을 기한을 뒤로 물려 5년을 한정으로 분수를 배정해 차차 마련해 납부하게 해서 민력(民力)을 늦추어 주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호남 한 도는 작년의 흉년이 다른 도의 배나 더하여 실로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다. 전 도신(道臣)이 정성을 다하여 곤경에서 건져내 살려 내었으므로, 내 지금까지도 가상하게 여겨 잊지 않고 있다. 또 경의 상소를 접해 보니, 다섯 조목에 대해 누누이 그치지 않고 설명하였는데 머리에서 말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성들이 치우치게 해를 입고 있는 것으로서 궁하여 아주 고생하는 상황이 완연히 글에 나타났는데, 경의 세밀함을 기뻐하고 백성들을 위해서 불쌍하게 생각한다. 빨리 묘당으로 하여금 조목마다 여쭈어 처리하게 하여 실제의 혜택이 있게 하겠다. 곡식으로 바꾸는 기한을 물리고 모조(耗條)를 면제하라고 명하였지만, 우선 한 해 가을을 기다린들 또한 방해될 게 뭐가 있겠는가? 물정(物情)을 채탐(採探)하고 반드시 상량(商量)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나, 이는 내가 우선 시행하라고 허락하니, 경은 잘 알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호남 도신의 상소에 대한 말을 품처하고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는데, 그 상소를 가져다 보니, 백성들에게 매우 긴요한 것이 많았으므로, 이 상소를 보면서부터 기뻐서 밥 먹는 것을 잊고 마치 큰 폐단을 모조리 제거한 것같이 여겼다. 묘당으로 하여금 반드시 자세히 마련해 강구하여 품처할 자료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부교리 김계하(金啓河)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신민을 다스린 지 지금 거의 1기(一紀)155)  가 되어 갑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돌이켜 생각해 보소서. 1기 동안에 분발한 바는 무슨 일이며 진작한 바는 무슨 일이셨습니까? 날마다 진보한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날로 퇴보한다는 말만 들리며, 점차 번창함은 보지 못하고 오직 점점 폐단만 보게 됩니다. 묘당에서는 문서나 처리하는 것으로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는 근본으로 삼고, 전조(銓曹)는 피차를 가려 배격하거나 등용하는 것으로 격탁 양청(激濁揚淸)하는 정사로 삼고 있으며, 옥송(獄訟)은 굽혀져 청탁이 날로 성해지고, 과시(科試)는 뒤섞이고 잡되어 뇌물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대각(臺閣)으로 말하면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가법(家法)을 삼고, 수재(守宰)로 말하면 가렴 주구를 부지런하고 능하다고 일컫습니다. 사치를 서로 다투어 숭상하여 병과 항아리의 곡식이 모두 텅 비었으며, 기강이 모조리 무너져 모발까지 모두 병이 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만 있어도 재변을 부르기에 족한데, 하물며 겸해서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 전후로 조정 신하들이 진언하여 우리 전하께서 한번 성지(聖志)를 분발하기를 바란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신으로 하여금 종일 내내 탑전(榻前)에서 극구 말하여 재변을 그치는 방안과 절실한 시무(時務)를 진달하게 하더라도 이 ‘분려(奮厲)’ 두 글자 이외에는 또한 할말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제 만약 오늘 분려하시면 내일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이고 한 가지 일을 진작하면 만사가 모두 성취될 것인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반드시 ‘내가 비록 강건(剛健)을 일삼지 않더라도 자연 관석 화균(關石和鈞)의 구제(舊制)가 있으니, 참으로 인후(仁厚)함을 해치지 않는다. 내가 비록 부지런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묘당에서 품재(稟裁)할 것인데, 또 어찌 이폐(弛廢)에 이르겠는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스스로 믿고서 스스로 한가하고 편안하게 지내실 경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갈 것입니다.
인후(仁厚)만을 숭상하는 것은 처음부터 제왕의 좋은 법도가 아니고 오로지 이폐(弛廢)만 일삼으면 마침내는 위란의 근본이 되고 맙니다. 한(漢)나라가 쇠망하게 된 것은 성제(成帝)와 애제(哀帝)에게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원제(元帝)가 인후(仁厚)만 일삼아 우유 부단하였기 때문이고, 당(唐)나라가 쇠퇴하게 된 것은 의종(懿宗)과 희종(僖宗)에게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문종(文宗)이 오로지 문아(文雅)만 숭상하다가 위약(委弱)해져 떨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어리석고 망령된 신이 감히 원제와 문종을 성명(聖明)의 세상에 비유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창(周昌)이 한(漢)나라 고조(高祖)를 걸·주(桀紂)라고 대답했으나156)   또한 받아들였고, 유의(劉毅)가 진(晉)나라 무제(武帝)를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에게 비유했는데도157)   오히려 너그러이 용납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전하께서 사람이 하찮다 하여 그 말까지 버리지 마시고 오늘부터 첫 정사로 삼아서 모든 대소사를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사이에 예의(銳意) 분발하시어 한결같이 게으르지 않으시면, 상(桑)이 시들고158) 형혹성(熒惑星)이 옮겨 가는 것159)  은 다만 잠깐 사이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삼대(三代) 이후에는 이로 말미암아 점차로 그렇게 되었는데 한(漢)·당(唐) 이하는 말할 것조차 있겠습니까? 진부(陳腐)한 말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깊이 유념하신다면, 종사와 신민의 복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 전일에도 분발하라는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한 자가 있었으나, 요즈음은 오랫동안 듣지 못하였었다. 아! 천양 일호(千羊一狐)160)  라고 옛 임금이 칭찬하였는데, 너의 과감한 말이 그와 방불하다. 아! 한나라의 원제와 당나라의 문종은 하나는 우유 부단하고 하나는 유약(柔弱)하여 간신(奸臣)에게 권한을 주고 북사(北寺)161)  에서 견제를 받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데, 네가 나를 이런 임금들에게 비유하였다. 《논어(論語)》에 말하기를, ‘임금이 성스러우면 신하가 곧다.’고 하였다. 자신을 반성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나에게 자신을 비우는 아량이 있기 때문에 네가 역린(逆鱗)162)  을 건드리며 간하였다. 스스로 성스럽게 여겨 자기를 비우는 도리에 힘쓸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공부를 바야흐로 그대들과 번갈아 경계한 것이다."
하고는, 특별히 내탕고(內帑庫)의 비단 10단(段)을 내려 직언을 표창하였다.

 

장령 이태순(李泰淳)이 상소하여, 선비의 습관을 바르게 하고 사치를 금하며 사목(司牧)을 가려뽑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라는 네 조항의 시무(時務)를 진달하니, 가납한다고 비답을 내렸다.

 

동래 부사 윤노동(尹魯東)이 장계하기를,
"왜 비선(倭飛船) 1척이 왜관(倭館)에 도착하였기에 즉시 정상을 물었더니, 별금도왜(別禁徒倭)가 말하기를, ‘귀국의 통신사가 명년에 저의 주(州)에 들어오기 때문에 금년에 만송원(萬松院)에서 보낼 사자와 명년에 일특송사(一特送使)를 정지하는 일과, 저의 주에서 봉행하는 일 등을 알리는 서계(書契)를 저에게 주기에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이미 통신사의 행차로 인하여 들여보내는 사신을 정지하였으니, 도주(島州)의 서계를 바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하나, 봉행(奉行)하는 일은 감히 대신 알리는 것은 잘못된 사례이니 아주 외람되다.’는 뜻으로 책유(責諭)하여 물리쳤습니다."
하였다.

 

10월 10일 신묘

주강하였다.

 

차대하였다.

 

응교 이유명(李惟命)·수찬 조민화(趙民和)·부수찬 이영하(李泳夏)·교리 한기유(韓耆裕)·정언 윤응대(尹應大) 등이 상소하여 권면하니, 가납한다고 비답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통신사를 들여보낼 기일을 북경(北京)에 보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혹 별도로 재자관(齎咨官)을 정하기도 하고, 혹은 절사(節使)의 편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통신사는 초봄에 가게 되었으니, 정묘년163)  의 예에 의해 자문(咨文)을 절사의 편에 보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이교(金履喬)를 통신사(通信使)로, 이면구(李勉求)를 부사로 삼았다.

 

10월 11일 임진

주강하였다.

 

10월 12일 계사

주강하였다.

 

10월 13일 갑오

중궁전이 딸을 순산하였다.

 

약원의 여러 신하들과 대신(大臣)·각신(閣臣)을 불러 보았다.

 

10월 15일 병신

비국에서 완백(完伯)164)  의 상소에 관해 회계(回啓)하니, 하교하기를,
"완백이 소청(疏請)한 것은 절박하여 부득이하였기 때문이니, 조정에서 백성을 돌보아 주는 방도에 있어서도 마땅히 도백의 청을 허락해야 한다. 대동미의 정퇴조(停退條) 가운데서 특히 심한 열 고을은 갑인년165)  에 시행한 예에 의해서 말[斗] 수를 감하는 일은, 매결(每結)당 3두(斗)를 감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10월 16일 정유

식년 감시(式年監試)의 복시(覆試)를 설행하였다.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를 중수(重修)하는 데 드는 돈 2만 냥 영(零)과 공명첩(空名帖) 1천 장을 주라고 명하였는데, 비국의 조치를 따른 것이다.

 

10월 19일 경자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각신,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고 약원의 직숙(直宿)을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새로 출생한 공주(公主)의 공상(供上)을 계축년166)  의 예에 의해 하라고 명하였다.

 

약원의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제조 심상규(沈象奎)에게는 숭록(崇祿)을 올려주고, 부제조 이영석(李永錫)·예방 승지 신광식(申光軾)에게는 가선(嘉善)을 올려주었다.

 

심상규(沈象奎)를 규장각 제학으로, 홍석주(洪奭周)를 직제학으로, 서준보(徐俊輔)를 직각(直閣)으로, 이광문(李光文)을 대교(待敎)로, 조상진(趙尙鎭)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김재창(金在昌)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교리 홍의영(洪儀泳)·부수찬 조민화(趙民和)를 백부(柏府)167)  에 넘겨 함추(緘推)한 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근일에 고사(故事)를 연달아 써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만약 전교에 ‘연달아 하라.’는 말이 없었다고 의심하였다면, 어찌하여 연일 써서 들이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연일 써서 들이라고 명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 대답하는가? 일이 매우 놀랍고 성실이 매우 결여되었는데, 또한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태만한 마음을 볼 수가 있다. 홍문관에 입직한 학사를 백부에 넘겨 중하게 추함(推緘)한 후 본직(本職)을 체차하고, 내일 경연에는 전경(典經) 이광문(李光文)과 다른 상번(上番)으로 하여금 경연에 나오게 하라."
하였다.

 

10월 20일 신축

주강하였다.

 

홍석주(洪奭周)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10월 21일 임인

주강하였다.

 

10월 22일 계묘

주강하였다.

 

10월 23일 갑진

주강하였다.

 

10월 24일 을사

주강하였다.

 

부제학 홍석주가 상소하여 여덟 조목으로 권면하기를,
"첫째 학문을 강론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둘째 욕심을 막아 덕(德)을 기르며, 셋째 총애하는 사람을 멀리하여 현사(賢士)와 친하고, 넷째 명령을 신중히 하여 왕언(王言)을 중히 하며, 다섯째 부지런히 자문하여 치도(治道)를 강구하며, 여섯째 인재를 길러서 선임(選任)에 대비하고, 일곱째 기강을 진작시켜 조정을 엄숙하게 하며, 여덟째 경비를 절약하여 백성을 돌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덟 조목은 아주 절실하였다. 만약 깊이 유념하겠다고 하면 으레 하는 말에 가깝고, 깊이 유념하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받아들이는 도량에 방애되니, 감복 할 뿐이다. 경은 더욱 이런 마음에 힘써 나를 보필하는 책임을 삼으라."
하였다.

 

10월 26일 정미

밤에 우레가 쳤다. 하교하기를,
"우레와 번개가 거듭 재변을 경계하는데, 하늘의 뜻은 비록 감히 헤아리지 못하겠으나 마음이 근심스럽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 지금의 사세는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기강이 더욱 무너지고 있어, 나라의 안위(安危)가 진려(振勵)를 잘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으니, 하늘이 어찌 위엄과 노여움을 보이지 않겠는가? 우러러 생각하고 굽어 헤아려 보아도 더욱 마음이 우울한데, 조정의 신들은 어찌 양해하지 않는단 말인가? 금일부터 3일 동안 감선(減膳)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의 일단을 펴겠다."
하였다.

 

10월 27일 무신

승정원에서 의계(議啓)하여 권면하니, 비답하기를,
"계속해서 조금 감기 증세가 있어서 신하들을 인접하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어젯밤 우레가 치고 비바람이 불어 평일과 달랐는데, 더군다나 번개와 우레는 간곡히 고해 준 것이다. 감히 천심(天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이불을 끌어안고 촛불을 밝히고 조용히 생각해 보니, 실로 이는 나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바람을 쐬며 노천에 앉았다가 앓던 병이 더해졌는데,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면서 그칠 줄을 모르고 반복해 걱정하고 탄식하였다. 아! 지극히 인자한 하늘이 어찌 오늘날의 조정 상하를 굽어살피지 않겠는가? 첫째도 나의 부덕한 탓이요, 둘째도 나의 부덕한 탓이다. 삼가 영고(英考)168)  의 전교를 상고하건대, 반드시 ‘태강(太康)의 경계’를 일컬으셨는데, 아! 오늘날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 만약 진실된 이치에 도달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마음이 슬퍼서 아침 내내 두려워하였는데, 때마침 너희들이 아뢰는 것을 보았다. 더욱더 유념하겠다."
하였다.

 

좌의정 김재찬·우의정 김사목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면직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눈에 가득 넘치는 근심이 재변 아님이 없습니다. 어찌 유독 이달에 우레를 쳐야만 비로소 재변이라고 하겠습니까? 시험삼아 금년에 지나간 것만 논하더라도 봄에는 여역(癘疫)을 겪어서 남쪽 백성들이 거의 다 죽었으니 이것도 재변이고, 여름에는 바람이 불고 홍수가 져서 서북 지방이 먼저 침수되었으니 이것도 재변이고, 산천(山川)이 벗어지고 말라서 연해(沿海)와 산협(山峽)의 가호(家戶)가 이미 텅 비었으니 이것도 재변이고, 안개와 이슬이 제때에 내리지 않아 음사(陰邪)의 기운이 더욱 치성하니 이것도 재변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재정이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백성들의 목숨이 거의 다 죽게 되었고, 작록(爵祿)은 바로 세상을 격려하는 도구인데 한 세상이 취한 듯하여, 갖가지 괴이한 일이 거듭 생기고 과거(科擧)는 바로 나라를 보는 척도인데 사단(四端)169)  이 모두 없어져 팔방이 해체되었으니, 이것이 특히 재변 가운데서 큰 것입니다. 아! 하늘이 내린 재변은 오히려 어떻게 해볼 수 있으나, 사람으로 인해서 생긴 재변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우레가 치고 번갯불이 번쩍거려 이미 나라 사람들에게 보이고 성상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노여움을 돌려 기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혹 방도가 있겠으나, 사람으로 인해서 일어난 재변에 있어서는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어 물에 염색되는 것이나 모래가 무너져 물이 터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연고가 아니어서 나라가 반드시 망하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 있는데, 전하만 다 살피지 못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식자(識者)들이 길게 탄식하고자 하는 것으로,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이른바 ‘천하의 일은 그래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오늘날을 두고 한 말입니다. 만화(萬化)의 근원을 한번 분부하여 이전(移轉)하는 데에 힘쓰면 천심(天心)을 기쁘게 하고 나라의 기반을 튼튼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차례차례 할 일입니다. 신들이 이미 일전에 차자로 진달하여 거의 남김이 없었고, 전하 또한 이미 가납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심지어 우리 영고(寧考)께서 직접 가르친 교훈을 걸라고 하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시 더 번거롭게 반복할 것이 없고 오직 전에 내린 비지(批旨) 가운데 ‘성경(誠敬)’이란 두 글자를 마음에 두시고 마음에 깊이 새기어, 먼저 해결하기 어려운 것부터 해나감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하늘과 사람에게 응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듣건대, 고어(古語)에 ‘재앙과 상서는 비록 다르나, 선(善)을 권면하는 것은 한가지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경들이 올린 차자의 말은 마땅함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목전의 겨울 우레뿐이겠는가? 아! 온갖 일이 모두 재변을 부르는 단서가 아닌 것이 없다. 시험삼아 말하자면 조정의 기상과 백성들의 사세가 끝이 없는데,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아! 하늘이 경계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향응(響應)이 있게 마련이다. 말이 귀하지만 행실이 더욱 귀하므로 나는 마땅히 행실에 힘쓸 것이니, 경들 또한 전일에 명한 바를 애써 보답해야 할 것이다. 어찌 구구하게 사직해서야 되겠는가? 안심하고 일을 보라."
하였다.

 

대사간 윤익렬(尹益烈), 집의 조봉진(曹鳳振), 장령 이태순(李泰淳)·이영하(李泳夏) 등이 상소하여 재변을 그치는 방책을 진달하니,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부응교 이유명(李惟命)·교리 홍명주(洪命周)·부교리 조민화(趙民和)·수찬 홍의영(洪儀泳)·정자 이광문(李光文)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재변을 그치는 방도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임금의 마음은 온갖 교화의 근원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허언(虛言)이겠는가? 오늘부터 조정의 신료들이 나의 간절한 마음을 선양해야만 나 또한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길 것이다. 먼저 조정을 책망하고, 또한 남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뜻이 실로 그러하다. 그대들이 나열해서 진달한 가운데 ‘팔도가 한집안이고, 만백성이 자식이다.’라고 하였는데, 내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성인의 말을 대략 들어 알고 있다. 대저 임금은 외로운 일신(一身)으로 홀로 위에 임하였으니, 믿을 자가 누구인가? 반드시 많은 대중인데, 두려워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방백(方伯)과 수재(守宰)는 근심을 나누는 자들이며 묘당의 관료들은 교화를 펴는 자들이니, 내가 바라는 바가 어찌 그들에게 있지 않겠는가? ‘묘당(廟堂)은 가상(家相)이요, 시종(侍從)은 이목(耳目)이다.’라고 한 것에 있어서는 나 또한 그들이 임금을 보필하는 팔다리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배가 물에 떴을 때 노를 젓는 도울 자를 쓰는 것은 배가 저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는 노를 젓는 공이다. 어찌 노가 없는데 배가 운행될 리가 있겠는가? 내가 어찌 혼자서 운전하는 것이겠는가? 아! 천재(天災)와 시이(時異)가 없는 해가 없는데, 내가 어찌 불성실하겠으며 내가 어찌 불성실하여 그렇겠는가? 오히려 성의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계시는데, 내가 거짓말을 하겠는가? 진달한 바는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주강은 하지 못하겠으니, 지사(知事) 이하는 고사(故事)를 써서 들이라."
하였다.

 

10월 28일 기유

주강하였다.

 

동지 정사 이집두(李集斗)·부사 박종경(朴宗京)·서장관 홍면섭(洪冕燮)을 불러 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10월 29일 경술

주강하였다.

 

10월 30일 신해

제도(諸道)와 삼도(三都)에 입은 당년의 재해지 8만 3백 31결의 세금을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경기(京畿)는 4천 2백 79결, 수원(水原)은 6백 결, 광주(廣州)는 1백 27결, 강화(江華)는 63결, 공충도(公忠道)는 1만 3천 결, 전라도(全羅道)는 4만 3천 5백 31결, 경상도(慶尙道)는 1만 4천 4백 27결, 황해도(黃海道)는 3천 결, 강원도(江原道)는 2백 89결, 평안도(平安道)는 1천 15결이다. ○호남 대동(大同) 정퇴조(停退條) 가운데서 더욱 심한 열 고을은 3두(斗)를 감하고, 결전(結錢)은 명년 봄까지 정퇴하고, 신환(新還) 분수(分數)는 정퇴하고, 군미포(軍米布) 분수(分數)도 정퇴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69면
【분류】구휼(救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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