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12월

싸라리리 2025. 6. 1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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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신사

소대하였다.

 

오재소(吳載紹)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홍석주(洪奭周)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신대곤(申大坤)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2일 임오

호조 판서 심상규(沈象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통신 정사 김이교(金履喬)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탁지(度支)는 국가 화폐의 권한을 주관하고, 사신의 일을 개정하는 임무까지 겸하고 있는데, 정지(情志)가 미덥지 못하여 논의가 저지되었다.’라고 하였고, 또 ‘사색(辭色) 사이에 혹 서로의 예우가 결여되어, 거의 사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인정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이교는 바로 신의 지우(知友)인데 그 말이 이와 같으니, 신의 허물이 너무 심하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엄히 파출(罷黜)하는 것을 어찌 날짜를 넘기겠습니까만, 만일 사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신이 여기는가 의심했다면, 또한 장차 신이 사비(私費)를 쓰는 것처럼 인색하다고 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너무 지나쳤습니다. 통신사의 일을 개정한다고 말한 것에 있어서는 제도(諸道)에서 청구하는 복정(卜定) 등의 물품을 대략 줄인 다음, 그 즉시 통신사에게 알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또한 심하게 감해서는 안된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 가운데 빠지거나 적어서는 안될 것들은 그때마다 증가하고 있으므로, 자연 계해년181)  의 구례(舊例)처럼 구애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통신사의 약삼(藥蔘) 또한 일전의 주사(籌司)의 회의에서 대신에게 상의해 근수(斤數)를 참조하여 마련하고 나서 또 대동(大同)의 상정(詳定)으로는 넉넉히 쓰지 못할까 염려되었으므로, 정퇴(停退)한 북삼(北蔘)으로 바꾸기로 의논하여 빈대(賓對)를 기다려 여쭈어 정하려고 하였습니다. 오직 이른바 별반전(別盤纏) 인삼은 임술년182)  의 예에는 본디 없었으나 정묘년183)  과 계미년184)  에 모두 있었으니, 적당히 참작하여 얼마를 남겨 두더라도 반드시 전부를 감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서북(西北)의 민력(民力)이 이미 과징(科徵)을 많이 하여 예단(禮單)에 써야 할 숫자를 아직껏 다 납부하지 않았고, 지부(地部)185)  에 또 평소 저축이 50년 전 조금 넉넉한 때와 같지 않으므로, 신이 이를 걱정하여 갑자기 논의를 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통신사가 혹 이를 양해하지 못하고 갑자기 격분하여 지나치게 염려한 것일 것입니다. 또 군관(軍官)·역원(譯員)의 반비(盤費)가 태반이나 부족하다거나 의자(衣資)·사미(賜米) 등과 같은 것으로 본조에서 발급한 것 이외에 각년의 예(例)를 상고해 보아도 이끌어 댈 만한 것이 없는 것은 대료(大僚)가 별도로 품재(稟裁)해야지 실로 유사(有司)가 많이 꿀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은화(銀貨)를 꾸어 주라고 청하는 것도 으레 통신사가 아뢰어 시행하므로, 탁조의 신하가 필요없습니다. 대개 이번 갈등은 실로 신에게 말미암았으니, 신의 현직을 즉시 체차하고 내쫓아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교린(交隣)은 중요한 일이니, 널리 의논하는 사이에 성실(誠實)이 귀중하다. 무엇 때문에 불안한 단서를 많이 일으키는가?"
하였다.

 

심상규를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으로,  【앞서의 의망 단자에서 낙점해 내렸다.】 정상우(鄭尙愚)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3일 계미

이면응(李冕膺)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2월 4일 갑신

홍문록(弘文錄)을 회권(會圈)하였는데,  【부제학 홍석주(洪奭周)·응교 이유명(李惟命)·교리 임경진(林景鎭)·부교리 이영하(李泳夏)·수찬 강세륜(姜世綸)·부수찬 김학순(金學淳)이다.】  5점은 조정철(趙貞喆)·남혜관(南惠寬)·강세백(姜世白)·조상기(趙象基)·유응환(兪應煥)·조석정(曹錫正)·홍희필(洪羲弼)·이엽(李墷)·홍기섭(洪起燮)·이동영(李東永)·이종목(李鍾穆)·조경진(趙經鎭)·임처진(林處鎭)·신재식(申在植)·이영순(李永純)·이진연(李晉淵)·이항(李沆)·박기굉(朴基宏)·이노집(李魯集)·이종운(李鍾運)·이재수(李在秀)·유정양(柳鼎養)·홍희근(洪羲瑾)·김유근(金逌根)이다.

 

12월 7일 정해

대제학 심상규(沈象奎)가 상소하여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드높은 문장의 명망이 저절로 이 직임에 맞으니, 사양하지 말고 사은 숙배하라."
하였다.

 

12월 11일 신묘

통신사 김이교가 재차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서로 다투어 갈등이 생긴 것이 아니고, 더구나 사신의 일이 어떠한데 평지 풍파를 일으키는가? 그대의 일은 매우 놀랍다."
하고는, 묘당으로 하여금 사신의 일을 재차 회피하는 율(律)로 논계(論啓)하게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사신의 일은 막중하고 기일이 매우 촉박한데, 한 가지 하찮은 일을 가지고 여러 차례 번거롭게 상소하여 반드시 구획(區劃)하려는 의의로 삼으려고 하니, 참으로 지나칩니다. 통신사 김이교를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 대개 이 사단은 또한 비롯된 바가 있으니, 행 호조 판서 심상규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호조 판서의 추고는 하지 말고, 통신사는 해당 율을 적용하라."
하였다.

 

12월 12일 임진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별군직(別軍職)·선전관(宣傳官)·입직 금군(入直禁軍)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12월 13일 계사

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을 통신사로 삼았는데, 재차 상소하여 인혐하니,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호조 판서 심상규(沈象奎)가 재차 상소하여 인혐하니, 비답을 내려 도타이 신칙하였다.

 

이존수(李存秀)를 이조 참판으로, 김상휴(金相休)를 통신사로 삼았다.

 

총관(摠管) 오재희(吳載熙)를 용강현(龍岡縣)으로, 민명혁(閔命爀)을 중화부(中和府)로, 이보천(李普天)을 성천부(成川府)로, 조만원(趙萬元)을 순안현(順安縣)으로, 정만석(鄭晩錫)을 무주부(茂朱府)로, 승지 신의학(愼宜學)을 서천군(舒川郡)으로 유배하였는데, 총부(摠府)의 변통 초기(變通草記)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매양 전좌(殿座)에 나오면 반드시 이 초기(草記)가 있는데, 근래에 기강이 어찌 이처럼 무엄해졌단 말인가? 모두 투비(投畀)의 법을 시행하고, 받아들인 승지는 우선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부교리 조봉진(曹鳳振)이 상소하기를,
"이번 시행한 처벌자 가운데 원래 밖에 있는 자와 중제(重制)186)  를 만난 자는 모두 국전(國典)에 빼게끔 되어 있는데, 후원(喉院)187)  에서 싸잡아 전지(傳旨)를 받들었으니, 해당 승지에게는 파직을 시행하고 투찬(投竄)한 여러 사람은 구별하여 법을 적용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오재희·조만원은 원래 외부에 있었다는 이유로, 민명혁은 중한 상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분간하고, 승지 김기후(金基厚)는 파직하였다.

 

12월 14일 갑오

영화당에 나아가 내삼청(內三廳)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감제(柑製)를 실시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제학 심상규(沈象奎)가 여러 번 소패(召牌)를 어겼다. 하교하기를,
"종일 반궁(泮宮)188)  의 선비들이 모여 있고, 더군다나 이 일은 크게 소란을 일으킬 것이 아닌데, 또 이처럼 여러 차례 소명을 어기는 것은 아주 미안하다. 예로 부리는 도리에 있어서 한결같이 다그쳐서는 안되나, 기강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고는, 이어 예문 제학이 시취(試取)하라 명하였다.

 

12월 15일 을미

소대하였다. 소대할 책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반궁에서 감제를 실시하고 수석을 한 조운종(趙雲從)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통신사를 지금 대마도에 보내기로 하였으니, 사례가 전과 달라 통신사가 섬에 들어간 뒤에 비로소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대마도에서 강호(江戶)로 들여보냈다가, 집정(執政)이 글을 가지고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는 즈음에 날짜가 반드시 오래 걸려 지체될 것인데, 통신사가 관(館)에 머무르는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서의 초본(草本)을 먼저 저 사람들에게 보여야 사전에 주선하여 기일에 맞추어 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국서를 미리 지어내어 통신사의 출발 날짜를 헤아려 기일 전에 내려 보내라는 뜻을 해원(該院)과 통신사에게 분부하여 처리하도록 일체로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통신사 김상휴(金相休)가 상소를 올려 면직해달라고 청하니, 허락하였다.

 

12월 16일 병신

소대하였다.

 

전 호조 판서 심상규(沈象奎)의 본직(本職)·겸직(兼職)과 전 통신사 김이교(金履喬)의 직책을 그대로 두게 하였다.

 

이희갑(李羲甲)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9일 기해

하교하기를,
"빈대(賓對)의 날짜를 내일로 잡아 보고하였다. 엊그제 대신이 연이어 건강이 좋지 않다고 회주(回奏)하다가 지금 또 갑자기 날짜를 잡아 보고하니,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다. 또 내가 어제부터 자전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소접(召接)하기가 어려우니, 빈대를 즉시 미루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연말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가난한 백성들의 일이 암담하다. 누더기 옷을 입은 형상이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과연 삼동(三冬)을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삼남(三南)의 백성들 사정이야 어찌 조금이나마 의식이 풍부한 자가 있겠는가? 잠자고 밥먹기가 편치 않다. 묘당에서 특별히 유의하여 구호하는 방책을 극진히 하고, 공문을 보내 해당 도(道)의 사정을 물으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12월 20일 경자

대사간 이희갑(李羲甲)이 상소하여 빈대(賓對)를 뒤로 미루라고 한 하교를 환수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아주 절실한데,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대신을 공경하는 마음에 소홀하겠는가?"
하였다.

 

12월 21일 신축

송면재(宋冕載)를 이조 참의로, 박윤수(朴崙壽)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23일 계묘

호조 판서 심상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문형(文衡)에서 체차되었다가 다시 잉임(仍任)되었을 경우 공무를 볼 수 없다는 고사를 지켜 내려온 지 오래 되었다는 이유에서 재차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이 직책이 비록 청준(淸峻)하다고는 하나, 가장 중한 관작을 신처럼 불초한 자가 참여할 경우 관직이 사람 때문에 가벼워져 바로 전규(前規)가 전도되므로, 문원(文苑)을 서로 전수(傳受)하는 고사에 끼워 넣을 수 없다고 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의 기억에, 선조(先朝) 갑인년189)  에 문형의 천거가 합당한지의 여부를 여러 대신으로 하여금 일제히 모여서 고사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면서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소중함이 어찌 문형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하나라도 사례에 어긋날 경우 당사자가 어찌 공무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선왕께서 이 직책에 대해 신중하게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잉임시킨 문형은 공무를 볼 수 없다는 사례가 얼마나 분명하고 확고합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위에서는 다그쳐 어기도록 하고, 아래에서는 또 모른 체하고 감히 어긴다면, 조정의 대체(大體)가 옛날 성대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겠습니까? 최근의 일만 가지고 고 중신(重臣) 오재순(吳載純)의 일을 가지고 그 사례를 밝혀 보겠습니다. 중신이 문형의 직임을 띠고 있을 때 예조 판서로 파직되었다고 곧바로 잉임을 명하자, 고사를 끌어다 상소해 사면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특별히 체차하였습니다. 그 후에 수어사(守禦使)를 파직하였다가 잉임시킬 때에도 또 전처럼 사직하니, 즉시 또 변통하였습니다. 사례가 본디 이와 같으므로, 결코 폐할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이미 전례가 이처럼 확고하다고 말하니, 문형의 직임은 특별히 소청을 허락한다."
하였다.

 

12월 24일 갑진

좌의정 김재찬이 차자를 올려 처벌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미천한 신이 병 때문에 위로는 주상을 번거롭히고, 아래로는 묘당의 일을 보지 않은 지 지금 이미 4년이나 되도록 거의 빈 달이 없었습니다. 지난번 보름날로 앞당겨 빈대(賓對)를 정하라고 특별히 명하셨는데, 마침 그때에 병이 또 더 심해져서 죄를 무릅쓰고 나오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전의 일차(日次)에 이르러서는 감히 예전의 병이 이제 나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전일에 비하면 그런대로 조금 차도가 있었기 때문에 밀린 사무를 아뢸 것이 많고 세말에 하는 등대(登對)여서 하찮은 정성을 펴고 싶어 마침내 예에 의해 입품(入稟)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전께서 편찮으시다는 것을 미처 듣지 못하여 그때 수접(酬接)을 청한 바람에 정중한 하교를 내리게 했습니다. 신이 가슴 가득히 황공하여 스스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전에는 이미 유고(有故)하여 나오라는 전지(傳旨)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후에는 또 살피지 못하고 때가 아닐 때 번거롭게 품하여 가는 곳마다 죄를 지었으니, 그 죄 어떻게 도피하겠습니까? 그 까닭은 따져보면 병 때문인데, 병은 비록 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죄를 어찌 용서받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 빈대에 나오라는 명이 있었으나 경이 병이 났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즉시 정지하였는데, 이는 경에게 실제로 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경이 취품(取稟)한 것을 내가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때마침 내가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또 자전께서 편찮으셨으므로 약원(藥院)에서 구두로 아뢰었으나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내가 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경이 이처럼 병환이 있는 것을 내가 몰랐었고 경들이 후일 취품한 것 또한 경들이 몰라서였다. 그러고 보면 군신 상하가 모두 잘못이 있다. 또 더군다나 간장(諫長)의 상소가 들어왔으니, 내가 살피지 못한 것은 정말 변명하기 어렵다. 그렇기는 하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이미 지나간 일인데, 경과 내가 편안치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김사목이 차자를 올려 처벌해 달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지난날 불참한 것은 실로 억지로 나올 수 없는 질병이 있었기 때문이니, 질병은 사람이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로는, 전일 매양 정승 한 사람이 입시했었고, 설혹 좌상(左相)에게 병이 있더라도 경까지 반드시 일시에 질환이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때에 의심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경은 이번에 이처럼 주선하기 어려움이 뭐가 있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기를 내 실로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12월 25일 을사

차대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이경일(李敬一)의 녹봉을 법전(法典)에 의해서 수송해 주라고 명하였다. 이경일이 바야흐로 조간(遭艱)190)  을 당하였는데, 치사(致仕)한 대신은 다른 관직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고 유신(儒臣) 이간(李柬)에게 시호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는데, 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이 유생들의 상소로 인하여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대신에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이간의 호(號)는 외암(巍巖)인데,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를 사사(師事)하였고 학문을 많이 하고 행실이 돈독하여 큰 선비가 되었다. 영조조(英祖朝)에 유일(遺逸)로써 자의(諮議)를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과 함께 동문 수학하였는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 서신을 왕복하여 논변(論辨)하다가 마침내 대립하기에 이르러 호학(湖學)·낙학(洛學)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간을 받드는 자를 낙학이라 하고 한원진을 받드는 자를 호학이라고 하였다.

 

기사년191)  의 흉도(凶徒) 이현일(李玄逸)의 문집(文集)을 간행한 우두머리를 도신으로 하여금 엄히 형벌한 다음 섬으로 귀양보내고, 흉서(凶書)는 거두어 불태우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영남 도백 김회연(金會淵)의 장계로 인하여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이현일은 영남 사람으로 처음에 유일(遺逸)로 뽑혀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숙종 기사년에 스스로 욕하는 죄를 범해 죄가 윤리에 관계된 자이다.

 

수찬 이동환(李東煥)이 상소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할 것을 권면하면서 말하기를,
"혹 초당(貂璫)이나 빈어(嬪御)가 평소 한가히 계실 때 가까이할까 염려됩니다."
하고, 또 고 찬성 송환기(宋煥箕)에게 시호 내리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 간절하고 명백하여 말이 충성심에서 비롯되었음이 말에 드러났으므로, 명심하고 감탄하며 가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 평소 성색(聲色)과 기호품 따위를 좋아하지 않아, 비록 친근한 환관이나 시녀들이라 하더라도 단지 창문 안에서 대기하고 있을 뿐, 합외(閤外)에는 한담 설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대개 조연(朝筵)이 파하자마자 그날 강했던 책을 손에 들고 즉시 여러 번 읽고 나서, 또 볼만한 경사(經史)를 가져다 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한 달을 마치면 다시 경사를 상고하였다. 이렇게 순환하므로 비록 어리석은 환관이나 시녀들이라도 발자국 소리와 신발 끄는 소리가 낭정(廊庭)에서 나는 것을 드물게 들었다. 때문에 오히려 너무 근로(勤勞)한다고 말하였는데, 내가 듣고 꾸짖었었다. 환관이나 시녀들 또한 나의 본심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비록 일용(日用)하는 다선(茶膳)을 출납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감히 한만(閑漫)하게 아뢰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액정(掖庭)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이제 그대들이 나를 논할 때 반드시 ‘이목(耳目)이 넓지 않으면 심지(心智)를 통하기 어렵다.’라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옳지만 곧바로 친하게 지낸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보지 않은 채 헤아려서 논했다면 성실하지 못한 것이고, 만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서 논한 것이라면 또한 무슨 일인지 겉으로 드러난 것을 지적해 말하지 어찌 자취를 감추고 말해서 후일 간쟁(諫爭)할 길을 삼는가? 또 말할 것이 있다. 대체로 나의 소망은 내가 허물이 있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통렬하게 진달하는 것이며, 설혹 이러한 실덕(失德)이 있으면 비록 옷자락을 잡고 간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어찌 구구하게 발명(發明)하겠는가? 말단의 송산림(宋山林)192)  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일은 시행을 허락하여 내가 스승을 대우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더욱 실제로 보답하는 뜻을 보인다."
하였다.

 

김계락(金啓洛)을 형조 판서로, 박윤수(朴崙壽)를 수원부 유수로 삼았다.

 

12월 27일 정미

도정(都政)을 행하여 【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참판 이존수(李存秀)·참의 송면재(宋冕載)·병조 판서 이면긍(李勉兢)이다.】 박종래(朴宗來)를 공조 판서로, 이영로(李永老)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30일 경술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방면하였다.

 

경조(京兆)193)  에서 민수(民數)를 바쳤다. 오부(五部) 및 팔도(八道)의 총 원호(元戶)는 1백 76만 1천 8백 87호였는데, 남자는 3백 75만 4천 8백 90구(口)이였고, 여자는 3백 82만 8천 1백 56구(口)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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