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16권, 순조 12년 1812년 6월
6월 1일 임인
하교하기를,
"관서의 작년의 환곡에 대해서는 이미 정퇴(停退)하라 명하였고, 진자(賑資) 역시 각자 나누어 주었으며 별도로 감진(監賑)하는 신하를 보내 백성을 위로할 터전으로 삼도록 하였는데, 관서 지방의 백성이 이제 생활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아! 난리가 처음으로 일어나게 된 것은 비록 내가 부덕(否德)한 소치였으나, 평일에 감사와 수령이 된 자가 만약 혹 성의를 다해서 백성을 사랑하였더라면 흉괴(凶魁) 또한 어떻게 즐겁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선동할 수 있었겠는가? 대저 사치한 풍속과 탐람(貪濫)한 수령에 대해서는 어느 시대인들 징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만 지금은 큰 난리가 새롭게 평정된 날이어서 백성들의 생업을 회복하는 것이 전적으로 여기에 달려 있으니, 몹시 두려워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민간[閭巷]에 중·무당·점쟁이, 각종 술법이 성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치세(治世)에 해를 끼치고 민속을 그르치는 것들이니, 아울러 마땅히 일체 금단해야 한다. 백골 징포(白骨徵布)137) 와 황구 충정(黃口充丁)138) 의 절실하게 불쌍하고 안타까운 것에 이르러서는 족히 위로는 하늘의 화기(和氣)를 간범(干犯)하는 것이므로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어느 도(道)인들 그렇지 않으랴? 아울러 팔도의 도·수신(道帥臣)과 수재(守宰)에게 신칙하라. 이번에 순절한 사람의 자손의 나이와 거주지를 자세히 조사한 후 책으로 만들어 올려 보내라는 일을 해당 도에 분부하여 후일의 참고에 대비하게 하되, 순절한 사람의 자손과 관서에서 공을 세운 자 중에서 문관은 승문원에 분관(分館)하고 무관은 선전관으로 통융(通融)하게 하라. 이외에 청족(淸族)으로 재행(才行)이 있어 택용(擇用)하기에 합당한 자는 역시 그와 같이 하는 것을 영원히 정식으로 삼으라. 도정(都政)이 멀지 않았으니, 서울과 지방의 장수와 군졸로 수고한 자 역시 모두 수응해 써야 하므로, 망단(望單)과 실적에 모두 주를 달아 들이라는 일을 전조(銓曹)로 하여금 알게 하라. 또 생각하건대 오늘날의 국사가 기근으로 인한데다가 군사까지 가중시켜 국용(國用)이 탕갈되어 서울과 지방에서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절약해서 써야 할 때이다. 유사(有司)의 신하는 무릇 모든 일용(日用)에 드는 물자는 중대함에 구애되지 말고 조리 있게 생약(省約)하라는 뜻 역시 분부하라. 난리가 평정된 후 민생(民生)의 근심이 난리가 평정되기 전보다 심하니, 늘 한 번 생각하면 금의(錦衣)·옥식(玉食)도 편안치 못하다. 도적의 위협에 못이겨 추종한 무리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여러 차례 칙교(飭敎)를 내려, 불문에 붙여 즉시 방면하게 하여 개과 천선하는 길을 열어 주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도적을 평정하게 되어 바로 경시(更始)139) 해야 할 기회이니, 관서의 제군 가운데서 위협에 못 이겨 따른 무리로 만일 갇혀 있는 자가 있거든 즉시 소결(疎決)하라는 일을 다시 신칙하라."
하였다.
6월 2일 계묘
왕세자의 이름 정하는 일을 행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과 구경(九卿)·관각(館閣)의 당상, 육조(六曹)의 참판, 양사(兩司)의 장관이 빈청에서 회의하였는데, 대내(大內)에서 예명(睿名)을 일(日)자에 대(大)자를 붙인 〈대(旲)자를〉 써서 내리고 인하여 경례일(慶禮日)에 주합루(宙合樓)에 봉안하라 명하였다.
해서 감진 어사(海西監賑御史) 김계온(金啓溫)이 진휼을 마쳤다고 아뢰니, 공진(公賑)·사진(私賑)한 수령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강령 현감(康翎縣監) 이행교(李行敎)에게는 통정 대부를 가자하고, 옹진 부사 유화원(柳和源)에게는 표리(表裏)140) 와 새서(璽書)141) 를 내려 포유(褒諭)하였다.
6월 4일 을사
평안 감사 정만석(鄭晩錫)이 진(陣)에 있을 때의 공적(功績)을 책자를 모아 만들어 아뢰기를,
"부진(赴陣)·수성(守城)·영액 방수(嶺隘防守)로 구분하여 3질(秩)로 만들었습니다. 각진에서 전사한 장수와 군졸들 그리고 각읍의 군향(軍餉)을 도운 사민(士民) 역시 각기 한 질로 만들었습니다. 전사한 장수와 군졸은 삼가 정월 27일에 내린 전교를 받들어, 그들의 살고 있던 각 고을에 신칙하여 그들의 매장(埋葬)을 돌보아 도와 주고 그들의 처자를 무휼(撫恤)하게 하면서 신의 영(營)에서 1명당 돈 3냥, 무명 1필씩을 제급(題給)하였습니다. 전사한 장교(將校)로 왕사(王事)를 위해 죽은 것이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장교 이정량(李廷良)과 실로 다름이 없는데, 하나는 포상하고 하나는 포상하지 않으면 혹은 한쪽 구석에서 탄식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사한 군졸 가운데서 이성춘(李成春)은 제경욱(諸景彧)을 따라서 사다리를 가지고 성을 넘다가 적에게 붙잡혔는데, 악행에 따르라고 위협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다가 마침내 피살되었으니, 역시 양동(梁同)의 예에 의해 마땅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나머지 싸움에서 전사한 군졸은 아들 하나의 신역(身役)을 영원히 면제시켜 주는 것을 허락하고, 10년 동안의 연역(烟役)142) 을 특별히 견감하여 먹은 신구(新舊)의 환곡을 집이 불탄 예에 의해서 탕감하여 특별히 포상하는 뜻을 보여야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진에 있으면서 병사한 군졸 4백 9명에 이르러서는 비록 전사한 자와는 다름이 있으나 역시 매우 불쌍하기 때문에 신칙하여 반장(返葬)143) 한 후에 각기 무명 1필을 주고 당년의 연역을 모두 견감하기를 허락하도록 하였습니다. 군량을 도와준 대상 가운데 강계(江界)의 과녀(寡女) 유 조이(劉召史)·최 조이(崔召史)는 송지렴(宋之廉)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서 각기 5꿰미[緡], 혹은 15꿰미의 돈을 가지고 와 군수(軍需)를 도왔는데, 송지렴의 무리가 그들을 가난한 과부라고 여겨 받지 않으니 울면서 굳이 청하여 기어이 주고서야 말았다고 합니다. 그는 시골의 가난하고 천한 여인으로서 역적은 모두가 처단해야 한다는 의리를 알고 있으니, 마땅히 이들을 가상하게 여기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논공 행상(論功行賞)할 즈음에는 반드시 충분하게 살피고 신중히 한 연후에야 논공 행상의 일이 제대로 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이 보고하기를, ‘곽산(郭山)의 싸움에서 적의 선봉 이제초(李齊初)가 패주하자, 안주(安州)의 장사 군관(軍官) 전 첨사(僉使) 김계묵(金啓默)과 서울의 소모 군관(召募軍官)인 전재명(全再明)이 한꺼번에 뒤쫓아 갔는데, 이제초가 김계묵의 창을 한 번 맞고 말에서 떨어졌고 김계묵도 이제초의 창에 반격을 당하여 역시 말에서 떨어져 서로 버틴 것이 오래 지속되자, 전재명이 앞뒤를 차단하고는 말로써 달래고 무기로 위협하다가 곧바로 힘을 합쳐 묶어 왔다.’고 하였습니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영식(李永植)의 보고에는 ‘곽산 싸움에서 적도들이 무기를 끌고 도망하자 안주 장사 군관 김계묵이 앞장을 서 추격하면서 이제초를 사로잡으려고 하니, 이제초가 그가 들고 있던 손칼로 김계묵을 찌를려고 하였는데, 김계묵 역시 창으로 먼저 그의 손을 치고 연달아 그의 허벅지를 찌르자 피가 솟구쳤으며, 다시 곧장 적의 목을 찌르려고 하다가 창날의 구(鉤)가 갑자기 이제초의 철갑(鐵甲)에 걸려 잇닿아 돌며 서로 버틴 지 잠깐 사이에 이제초가 도리어 김계묵의 창을 빼앗으매, 김계묵이 몸을 돌려 말에서 떨어져 형세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서울의 소모 군관 전재명이 뒤쫓아 와서 구원해 내고 협력하여 붙잡아 바쳤는데, 그때 일의 형상을 모든 군사가 놀라운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제초란 바로 적장(賊將) 가운데서 가장 팔 힘이 센 자여서 실로 쉽게 붙잡아 올 수 없었는데, 김계묵이 먼저 창으로 찌르고 전재명이 뒤쫓아 협조하여 속이는 말로 꾀어내어 마침내 산 채로 붙잡아 왔습니다. 그래서 선천(宣川)과 철산(鐵山)에 주둔하고 있던 역적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해 패주하게 하였으니, 두 장교의 공로는 과연 특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6일 정미
공충도(公忠道) 도신이 비가 내렸다고 급하게 계문하니, 하교하기를,
"요즈음에 비록 비가 고루 적당하게 내리지는 않았으나 연속 장계를 보니, 아주 다행스럽게 여긴다. 각도의 여러 읍에 분부하여 비가 내리거든 지체하지 말고 빨리 알리게 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순무사(巡撫使) 이요헌(李堯憲)은 6개월 동안 영(營)을 설치하고 천리를 지휘하면서 계책을 적중하게 세웠으므로, 수고한 공이 매우 컸으니, 특별히 정2품의 자급(資級)을 더해 주고 그 공로에 보답해야 합니다. 순무 중군(巡撫中軍) 유효원(柳孝源)은 왕명을 받고 출정(出征)하여 오랫동안 고생을 고루 겪으면서 임금의 위광(威光)이 미치는 바에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개선(凱旋)했으니, 가자(加資)해야 합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은 앉아서 경내의 적을 진압하여 혼자서 성을 온전하게 보존했으며, 길을 나누어 간 군사에게 지시하여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빨리 소탕했으니, 새서 표리(璽書表裏)의 은전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영변(寧邊)의 전전(前前) 부사 오연상(吳淵常)은 가까운 주변에 숨어 있던 흉적을 적발하여 김우학(金遇鶴)·남익현(南益顯)을 모두 죽이고, 경외(境外)로 새어나가는 적을 붙잡아 귀성(龜城)·태천(泰川)을 다시 온전하게 회복하였으니, 새서 표리의 은전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종영(趙鍾永)은 적로(賊路)에 당해서 군민(軍民)을 아울러 관장하여 징발하고 안정시키기를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빈 성을 지키면서 아울러 영읍(營邑)을 총람(總攬)하였는데, 준조 절충(樽俎折衝)144) 이 다 합당하여 안주(安州)의 위기가 다시 안정됨은 사실 온전한 공로가 있으니, 가자해야 합니다.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유수(李儒秀)는 안주에서 징병(徵兵)하던 초기에는 열군(列郡)에서 응하여 달리 온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숙천의 친병(親兵)만이 유독 먼저 이르러 군세가 점차 떨쳐지고 성수(城守)가 비로소 공고하게 되었습니다. 급할 때 처하여 단속함이 이러하니, 평일의 전제(專制)함을 알 수가 있으며, 하물며 또 진에 나온 이후에 군·민을 다스림에 각기 그 방도를 다하였으니, 현직(現職)보다 조금 나은 자리에 조용(調用)해야 합니다.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 순천 군수(順川郡守) 오치수(吳致壽),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영식(李永植)은 송림(松林)의 싸움에서 공과(功過)가 반반씩이나 가산(嘉山)·박천(博川)의 위급한 상황이 한 번 진군(進軍)하여 안정되었고, 곽산(郭山)의 승리에서 성세(聲勢)가 처음으로 떨치게 되어 선천(宣川)·철산(鐵山)의 넋을 잃은 적의 세 소굴을 모조리 소탕하였으니, 전도(全道)를 수복(收復)하게 된 것은 실로 이 싸움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윤욱렬·오치수에게는 모두 가자하고 이영식은 전에 이미 시상하였으니 그냥 두소서. 순영(巡營)의 중군(中軍) 이정회(李鼎會)는 싸움에 나온 것이 비록 송림(松林) 싸움보다 늦었지만 전공을 이미 곽산(郭山)보다 빨리 아뢰었으니, 본직으로 변지(邊地)의 이력(履歷)을 허락하여 써야 합니다. 삭주 부사(朔州府使) 윤민동(尹敏東)은 한 성이 가운데 들고 팔진(八陣)이 밖을 둘러싸서, 오직 삭주의 나누어 받은 곳이 적로(賊路)의 가장 요지를 맡고 있었는데도 이웃 성채(城寨)에 경보(警報)가 있으면 일찍이 응하지 않음이 없었고, 궁지에 몰린 도적이 혹 도망가면 일찍이 잡지 않음이 없었는데, 진퇴와 주선함이 아주 조리가 있었으니, 본직으로써 방어사 이력(履歷)에 쓰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운산 군수(雲山郡守) 한상묵(韓象默)은 기미를 살피고 적을 정탐하여 영변에서 내응하는 변고를 구하였으며, 군사를 다스려 승산을 마련하여 본읍이 스스로 지킬 방도를 마련했으니, 준직(準職)에 조용해야 합니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권수(權琇)는 용골성(龍骨城)을 지키면서 군사는 흩어지고 적이 추격해 오자, 팔뚝에 자자(刺字)하고 군중(軍衆)에게 맹세하며 인수(印綬)를 품고 사잇길로 가서 의주(義州)의 대진(大陣)에 구원해 주기를 청했으나 수신(帥臣)이 계파(啓罷)한 것은 과연 잘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위험에 임해서 팔뚝에 자자한 것은 아주 가상하니, 현직보다 조금 나은 자리에 자리를 기다렸다가 즉시 조용하게 해야 합니다. 개천 군수(价川郡守) 유상필(柳相弼)은 군량을 때에 맞춰 운반하여 군식(軍食)이 부족하지 않게 하였으니, 승서(陞敍)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합니다. 귀성 부사(龜城府使) 조은석(趙恩錫)과 병우후(兵虞候) 이익(李榏)은 혹 외로운 성을 보전하다가 위태로움에 임해서 응변(應變)하기도 하고, 혹은 좌우의 대진(大陣)에서 일에 따라 성의를 다하였으니, 모두 궁전(弓箭)·통개(筒箇)145) 의 상을 시행해야 합니다.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주성(鄭周誠), 박천 군수(博川郡守) 이운식(李運植), 정주(定州)의 전전 목사 서춘보(徐春輔), 정주의 전 목사 임재수(林栽洙)는 비록 겉으로 드러난 특이한 공적은 없으나 모두 공수(攻守)한 노고가 있으니, 궁전(弓箭)을 사급하는 은전을 모두 시행해야 합니다. 무릇 정주성 안에 있는 적을 비록 마땅히 남김없이 진멸(殄滅)하여야 하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무리를 다스리지 않음은 성왕(聖王)의 대덕(大德)이며 항복한 자를 죽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지극한 경계입니다. 더군다나 전후의 윤음(綸音)에서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다칠까 염려하여 반드시 임석(袵席)에서 굽어 보호하실 생각을 하셨으니, 덕의(德意)가 미친 곳은 봄날처럼 따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이 함락되던 날 투항한 군졸 2천 명을 모두 처참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구중(九重)에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본받는 것이겠습니까? 역시 불량(不良)한 무리를 교화시키는 뜻도 아니니, 순무 중군(巡撫中軍) 유효원은 마땅히 삭직(削職)하여 공과 죄가 서로 가리워지지 않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허항(許沆)이 전사하던 날에 함종(咸從)은 미국(尾局)146) 이 서로 이어져 있었으니 이는 바로 같은 진(陣)이었고, 순천(順川)은 가장 가까운 이웃 성벽(城壁)이어서 기고(旗鼓)가 서로 바라다 보며 위급할 때에 함께 해야 하는데, 그가 몸을 솟구쳐 홀로 달려가 죽을 때까지 발꿈치를 돌리지 않는 것을 보고도, 각자 군사를 머물러 두고 출동시키지 않으며 서로 구할 생각이 없어 전군(全軍)이 다함께 죽도록 맡겨 두었습니다. 지금 죄를 조사하는 때를 당해서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함종 부사 윤욱렬과 순천 군수 오치수를 청컨대 절도사로 하여금 영(營)으로 잡아와서 엄중히 곤장을 쳐서 징려(懲勵)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순무영의 장관 이하 및 경외(京外)의 장사(將士)로 진에 달려가 성을 지키며 공을 세운 사람은 방금 등급을 나누어 논공 행상하기 위해 별단(別單)을 만들어서 아뢰었는데, 출정(出征)한 제군(諸軍)은 5개월 동안 한데서 자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마침내는 승첩을 아뢰었습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특이한 공적은 없으나 별도로 노고에 보답하여 윗사람과 친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은 정성에 보답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경영(京營)의 군병(軍兵)은 각 해당 영으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서 넉넉하게 시상하여야 합니다. 송도 및 관서의 향군(鄕軍) 가운데서 앞장서 적을 죽여 공로가 조금이라도 드러난 무리는 해당 부와 해당 도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제급(題給)하게 하고, 이에 10년을 한정하여 그들의 신역(身役)을 견감하게 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는 비록 두루 상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신역을 견감하는 은전을 7년을 한정해서 시행해야 합니다. 각처 의병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척적(尺籍)147) 을 전(傳)함도 없었는데, 징발하는 영을 기다리지 않고서 의리를 사모하고 충성을 권면해 즐거운 곳으로 달려가듯 한 것은 더욱 별도의 큰 상을 주어 장려함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김견신(金見臣)과 허항(許沆)이 거느린 무리가 제일 먼저 창의(倡義)하였고 공훈을 가장 많이 세웠습니다. 송지렴(宋之廉)이 모집한 날랜 포수(砲手)는 오랫동안 대진(大陣)에 있으면서 성세(聲勢)를 많이 도와 전후에 적을 죽인 것이 제일 많았습니다. 이 두 진영의 사졸은 한결같이 본도로 하여금 쌀과 포(布)를 넉넉하게 제급(題給)하게 하고 이에 따라서 부역을 견감하는 은전을 시행하게 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 뒤늦게 달려 온 의병은 그 공로의 많고 적은 데 따라서 각 고을의 전진(戰陣)에 나간 군졸과 함께 일체로 시상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사인(士人)과 향족(鄕族)으로 소문을 듣고 의리를 향하여 서로 이끌고 무기를 들고 나선 자는 특별히 본도로 하여금 규례에 벗어나게 논공 행상해야 합니다. 의주·영변·안주·구성 네 고을에서 성첩(城堞)을 지킨 군졸은 그들이 세운 공로가 진에 나아가 싸운 자들과 다름이 없으니 모두 3년을 한정해서 부역을 견감하고, 교졸(校卒) 가운데서 공로가 더욱 현저한 무리들도 역시 쌀과 포를 제급해야 합니다. 전사한 여러 병졸에게는 이미 넉넉한 휼전(恤典)을 시행하였고, 또 자손이 있으면 그 나이와 거주지(居住地)를 책자로 만들어 올려 보내라는 명이 있었는데, 도신의 장계 가운데, ‘아들 하나의 신역(身役)을 영원히 탈면(頉免)해 주고 10년 동안 연역(煙役)을 특별히 견감하며 받아간 신·구 환곡을 탕감하소서.’ 한 청은 실로 마땅하니, 이에 의거해서 시행해야 합니다. 비록 병사한 무리로 말하더라도 그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똑같으니, 생전의 신역과 환곡을 같은 예로 탕감 해야 합니다. 이밖에 소모(召募)하고, 방수(防守)하여 각양으로 공로를 세우고, 적변(賊變)이 일어나던 초기에 위험한 지역에 드나들며 왕래하면서 정탐(偵探)한 자는 모두 본도로 하여금 경중을 가려서 두루 보답하는 상을 주고 수용(收用)하기에 합당한 자도 역시 규례에 벗어나게 특별히 시상하여 누락됨을 당해 울분을 품는 탄식이 없게 해야 합니다. 쌀과 포를 제급한 자는 모두 책자를 만들어 계문하게 해서 회감(會減)하고, 출정한 제군의 시예(試藝)와 논공 행상은 이미 무신년148) 의 예가 있으니, 경영(京營)은 중순(中旬)149) 의 예에 의하고 송도 및 관서는 도시(都試)의 예에 의해서 각기 활 잘쏘는 것을 시험하여 그 입격(入格)한 화살 숫자를 별단에 써서 아뢰게 하여 논공 행상하여 위로하는 바탕을 삼아야 합니다. 이제 이 상전(賞典)이 비록 넉넉하고 후한 데 따른 것 같지만 본도의 전수(戰守)한 공적은 단지 책자의 현주(顯註)에 의거한 것이니, 그것이 낱낱이 다 정당하게 되었다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누락되어 시상하지 않거나 상이 공로에 맞지 않은 등류가 있으면 청컨대 본도로 하여금 다시 실적(實績)을 조사하여 이치를 들어 계문하게 하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순무영(巡撫營)의 종사관(從事官)·장관(將官)·장교(將校)·원역(員役) 별단(別單).
종사관 부사과(副司果) 서능보(徐能輔)는 가자하고, 김계온(金啓溫)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므로 겸중군(兼中軍)으로 승서하고, 전 병사 김익빈(金益彬)에게는 궁전(弓箭)과 통개(筒箇)를 사급(賜給)한다. 비장(裨將) 전 부사 이유수(李惟秀), 전 첨사 서유건(徐有建), 전 부사 이의수(李義秀),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 윤우현(尹禹鉉),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안광정(安光貞), 부정(副正) 이근식(李近植), 기사장(騎士將) 전 부사 박종화(朴宗和), 파총(把摠) 김식(金植)에게는 모두 아마첩(兒馬帖)150) 을 사급하고, 교련관(敎鍊官) 가선 대부(嘉善大夫) 전 첨사 김창인(金昌仁)에게는 상가(賞加)한다. 전 만호(萬戶) 여현장(呂鉉長), 가선 대부 김복순(金復淳), 전 만호 조신배(趙信培), 한량(閑良) 변득운(邊得運)·이흥국(李興國)·박재묵(朴在默), 전 만호 고광빈(高光彬), 전 권관(權管) 김상희(金商禧), 전 만호 방경유(方景孺), 사과(司果) 박태휘(朴泰輝), 한량 신재문(申在文)에게는 모두 불장궁(不粧弓) 한 장씩을 사급한다. 별무사(別武士) 절충 장군(折衝將軍) 맹상련(孟尙鍊), 과거 출신 박중검(朴重儉), 한량 차근행(車謹行)·강도완(姜道完)·양긍일(梁兢佾)·전명주(全命周), 과거 출신 김상현(金商鉉), 가선 대부 전 첨사 김효일(金孝逸), 별장(別將) 반해강(潘海康)에게는 모두 각 해당 영(營)으로 하여금 수용(收用)하게 한다. 서리(書吏) 이유선(李惟善)에게는 체가(帖加)하고, 정경신(鄭暻信) 등 8인과 문서직(文書直) 4명에게는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쌀과 포를 후하게 제급(題給)하게 한다.
서울에서 출정한 장관·장교·원역의 별단.
좌사 파총(左司把摠) 윤지겸(尹之謙), 마병 초관(馬兵硝官) 이기정(李基鼎), 좌초관(左哨官) 방우정(方禹鼎)에게는 【모두가 영군 장관(領軍將官)으로서 5개월 동안 한 데 자면서 이미 근로(勤勞)가 많은 데다가 대진(大陣)이 겁략을 당할 때에는 온 힘을 다해 방어하여 조치가 합당하였었다.】 모두 가자(加資)하고 중초관(中哨官) 손태영(孫泰永)에게는 【별도로 진에 가서 처음부터 힘써 성문을 쌓고 흙을 파서 정성을 다하여 역사를 감독했으며 성을 함락시킨 때도 또한 성벽에 먼저 올라갔다.】 가자하여 우후(虞候)에 제수하고, 군관인 전 부사(府使) 조운구(趙雲衢)·유문검(柳文儉)은 상당한 직으로 조용하고, 무겸(武兼) 이존경(李存敬), 훈련 주부(訓鍊主簿) 김현필(金鉉弼)은 모두 현직보다 조금 나은 자리에 승서한다. 가선 대부 유진명(柳鎭明)은 상으로 가자하고, 전 낭청(郞廳) 조문규(趙文逵), 한량 조익풍(趙益豊), 별군관(別軍官) 가선 홍문적(洪汶績), 정충 장군 오성철(吳聖哲)·김석규(金錫圭), 한량 유운덕(劉運德)은 모두 각기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각자의 원(願)에 따라 수용하게 한다. 과거 출신 유형원(兪逈源)은 【동로(東路)의 복병장(伏兵將)으로 적을 격파할 때에 군사를 이끌고 성(城)에 들어가 자못 참획(斬獲)함이 있었다.】 가자한다. 송영(松營)의 기사 백총(騎士百摠) 박징희(朴徵禧)는 【송영군(松營軍)의 도령(都領)으로 부진(赴陣)하였다.】 상으로 가자한다. 집사(執事) 가선(嘉善) 사의관(史誼觀)과 【행군 집사(行軍執事)로서 거행(擧行)하여 대진(大陣)이 겁략 당할 때 적 3급(級)을 베었다.】 사과(司果) 조경린(趙景麟), 【행군 집사로 거행하였다.】 유흥기(劉興基)에게 【탄환(彈丸)을 맞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장중령(張重齡)은【출전할 때에 세운 공이 많았고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앞장을 서서 성을 공격하였는데, 능철(菱鐵)151) 에 발을 다쳐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변장(邊將)으로 제수하고, 이동은(李東殷)은 상으로 가자한다. 김광룡(金光龍)·이동환(李東煥)에게 모두 각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수용하게 한다. 송영(松營)의 기사(騎士) 출신 백유회(白有繪)는 【김이대(金履大)를 사로잡았다.】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으로 제수하고, 집사(執事) 최정복(崔貞復)·윤성동(尹星東)에게 모두 본부로 하여금 원에 따라 수용하게 한다. 별무사(別武士) 가선 대부 정의진(鄭義鎭)은 【대진(大陣)이 겁략 당할 때 적 1명을 사로잡았고, 5개월 동안 갑옷을 벗지 않고 경포수(京砲手)를 거느리고 날마다 시석이 쏟아지는 가운데를 출몰하여 적도(賊徒)들이 보기만 하면 문득 위축되었다.】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으로 제수한다. 과거 출신 이문주(李文柱)· 【전령 차비(傳令差備)로 거행하여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1급을 목 베었다.】 매경은(梅景殷)·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2급을 베었다.】 박효건(朴孝建)· 【전령 차비로 거행하여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1명을 사로잡았다.】 김우적(金禹績)· 【전령 차비로서 공을 세운 것이 가장 많았다.】 한여시(韓黎矢)는 【시마초 차지(柴馬草次知)로 거행하면서 겸하여 군량을 공급한 공로가 있었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강계무(姜繼武)·김창건(金昌健)·허귤(許橘)은 아울러 해당 영(營)으로 하여금 시상하게 한다. 별견 장교(別遣將校) 김명숙(金命淑)은 【행영 집사(行營執事)로 거행하였다.】 상으로 가자하여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한다. 전 만호(萬戶) 김계택(金啓宅)은 【적정(賊情)을 탐지하기 위해 내려가 공성(攻城) 제구(諸具)의 역사를 보살폈다.】 상으로 가자하고, 가의 대부 김재명(金在明)은 【공성 제구(攻城諸具)의 역사를 보살폈다.】 체가(帖加)하여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한다. 전 만호 김인환(金仁煥)은 【화기(火器)를 운반하고, 성문을 쌓고 흙을 파내서, 화약을 묻어 불을 붙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를 보살펴 공이 가장 드러났다.】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을 제수하고, 남한 산성 집사 이정량(李廷良)의 【화기를 운반하고 목책(木柵)을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다가 적의 창을 맞아 죽었다.】 아들은 상복(喪服)을 벗기를 기다려 본영의 집사로 즉시 차출한다. 별부료(別付料) 김전(金篆)은 【북도(北道) 사람으로 자원해 내려가 공로를 많이 세웠으며 스스로 소 세 마리를 마련해 잡아 호군(犒軍)하였다.】 변장(邊將)을 제수하고, 최만리(崔萬里)·안의득(安義得)·김진원(金鎭元)·전학초(全學初)·오정린(吳禎麟)·오중권(吳仲權)과 【이상은 대진(大陣)이 겁략 당할 때 합력하여 적 두 명을 사로 잡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김용손(金龍孫)은 【별견장(別遣將)으로 가산(嘉山) 진중(陣中)에 머물러 있었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소모(召募)하여 진에 온 사람 사과(司果) 구시방(具時芳)은 【전함(前啣) 장교로 병영에 내려가 삼초(三哨)의 군사를 얻어 유격장(游擊將)이 되어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1명을 사로 잡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황하윤(黃河潤)·황유청(黃有淸)은 【대진이 겁략 당할 때 협력하여 적 3명을 사로잡았다.】 모두 각영으로 하여금 수용하게 한다. 가선 대부 정유(鄭鍒)는 【평양(平壤)의 별군관(別軍官)으로 군사를 이끌고 진에 달려 나갔다.】 상으로 가자하고, 금군(禁軍) 길의척(吉義倜)은 【성채(城寨)가 겁략 당할 때 정탐하는 적을 사로잡았다.】 상당한 실직(實職)에 임용하고, 한량 김종헌(金宗憲)은 【함종진(咸從陣)이 겁략 당할 때 전사하였다.】 해당 부서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가급(加給)하게 한다. 약방(藥房) 이규환(李圭桓), 마의(馬醫) 민흥대(閔興大)는 모두 각영으로 하여금 원에 따라서 수용하게 하고, 서리(書吏) 김상희(金尙禧)는 체가하고, 송유항(宋有恒)은 해당 부서에서 요미를 후하게 주고 승차(陞差)한다. 황혁(黃
)은 해당 영에서 요미를 후하게 주고 승차하며, 약방 서원(藥房書員) 박문환(朴文煥) 등 3명은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하게 하고, 훈국(訓局)의 별파진(別破陣) 양조일(梁祖一)은 【흙을 파낼 때 공이 많이 있었다.】 체가하고, 남한 산성의 별파진 박인흡(朴仁洽)·강세후(姜世厚)는 【이상은 흙을 파낼 때 많은 공이 있었다.】 모두 본영으로 하여금 장교에 승서하게 한다. 어영청의 별파진 문복득(文卜得), 남한 산성의 별파진 이춘일(李春一), 훈국의 거부(車夫) 김낙행(金樂行)은 【이상은 성문을 쌓을 때 많은 공이 있었다.】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후히 시상하게 한다. 훈국의 일기총(一旗摠) 김철홍(金哲弘), 서자적(書字的) 한광진(韓光鎭)은 해당 부서로 하여금 모두 쌀과 베를 후히 제급하게 하고, 마병(馬兵) 조계문(趙啓文)·최철중(崔哲重)·양도묵(梁道默)·이춘득(李春得)·안광원(安光源)·지인득(池仁得)은 모두 체가하여 해당 영으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서 수용하게 하고, 전승임(全承任)·김광려(金光麗)·윤도욱(尹道昱)·박춘문(朴春文)·김세욱(金世郁)·박경욱(朴景郁)은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하고 해당 영으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수용하게 한다. 보군(步軍) 조윤옥(曹允玉)·강우신(姜遇信)·이국필(李國弼)·김진원(金進源)·강치온(康致溫)·윤낙신(尹樂莘)·강덕룡(姜德龍)·양해종(梁海宗)은 모두 해당 부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하게 하고, 고경득(高景得)·정취옥(鄭就玉)·권영(權榮)·정필운(丁弼運)·황인태(黃仁泰)·이종혁(李宗爀)은 모두 체가한다. 금위영 중초군(中哨軍) 강문득(姜文得)·조언유(趙彦有)·김중형(金重珩), 뇌자(牢子) 조만득(趙萬得)은 모두 아울러 체가하고, 중초군 이광유(李光裕)·이종직(李宗稷)·김철주(金鐵柱)·노성원(盧聖源)·박흥철(朴興哲)·어성린(魚成鱗)·유지무(柳枝茂)·박완상(朴完相)·한호복(韓好福)은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하게 하고, 총융청의 당보수(塘報手) 김성복(金成福)은 체가한다.
평안도에서 출정한 장령(將領) 이하의 별단.
병우후진(兵虞候陣)의 좌형장(左領將) 전 오위 장(五衛將) 최진일(崔鎭一)과 【수성(守城)할 때에 공을 세움이 가장 많았고, 송림(松林)에 출전하였다가 이내 대진으로 가 시종 군무(軍務)를 전담해 관장(管掌)·검찰(檢察)하였으며 총수(銃手) 30명을 모집하여 성을 격파하던 날에 동문(東門)을 거쳐 성으로 들어갔다.】 우영장(右領將) 전 오위 장 김경엽(金景燁)은 【수성(守城)할 때에 공을 세움이 가장 많았고, 송림에 출전하였다가 이내 대진으로 가서 대소의 군무를 좌영장과 함께 전적으로 관장하여 검찰(檢察)하였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천총(千摠) 최인지(崔麟趾)는 【송림 싸움에서 공을 세움이 많았다.】 본도에서 수용하고, 행군 집사(行軍執事) 한량(閑良) 전학엽(全學燁)은 【송림(松林)·곽산(郭山)에 출전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기 위해 진외(陣外)로 갔다가 함종진(咸從陣)이 겁략 당할 때 창을 맞아 죽었는데, 김학엽이 복수를 위해 진중에 남아있었다.】 먼저 그 아비에게 휼전을 내리고 〈그 아들은〉 상복을 벗기를 기다려 본도에서 수용한다. 겸사복(兼司僕) 김의권(金義權)과 【송림 싸움에서 공을 세움이 많았고, 곽산 싸움에서 전진하여 적을 추격하였으며, 애도(艾島)를 방수(防守)하였다.】 환약 감관(丸藥監官) 한량(閑良) 강처홍(姜處弘)은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창을 맞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군기 감관(軍器監官) 한량 김치언(金致彦)은 【정월에 각종 화기(火器)를 가지고 대진에 가서 화기 장방(火器粧放) 및 거패(車牌) 등 성을 공격하는 여러 기구를 감조(監造)하였고, 흙을 파낼 때 주야로 감독하고 화약을 묻고 불을 붙였다.】 상으로 가자 후에 병영에서 원에 따라서 수용한다. 함종진(咸從陣) 장사 군관(壯士軍官) 김계묵(金啓默)· 【송림 전투에서 힘껏 전진하여 적의 가짜 원[倅]인 김이대(金履大)의 가속(家屬)을 붙잡아 바쳤으며, 곽산 싸움에서는 소모 군관(召募軍官)인 서울에 사는 전재명(全再明)과 함께 적의 괴수 이제초(李齊初)를 뒤쫓아가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으며, 김계묵 역시 낙마하여 형세가 장차 위급하게 되었었는데, 김재명이 뒤쫓아가 구원해 내고 협력하여 함께 적을 포박하였다.】 서울의 소모 군관(召募軍官) 전재명(全再明)은 모두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邊將)에 제수한다. 중군(中軍) 최치호(崔致昊)는 【송림 싸움에서 앞장서서 적을 추격하였고, 곽산 싸움에서 선두 부대도 힘껏 진격하였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은산 초관(殷山哨官) 김정옥(金正玉)· 【곽산의 전투 및 적이 본채(本寨)를 겁략할 때의 전공이 문치장(文致章)과 다름이 없었다.】 장사 군관 문치장(文致章)· 【곽산 싸움에서 군병(軍兵)을 독려하여 용맹을 떨쳐 전진하였고, 적이 본진을 겁략할 때 김정옥(金正玉)과 함께 적 2급(級)을 베었다. 성을 공파(攻破)하던 날에 홍경래(洪景來)의 동생 홍정래(洪鼎來)를 사로잡았다.】 영장(領將) 박계량(朴季良)· 【송림 전투에서 전구(前驅)로 싸움에 나아갔고, 곽산 전투에서는 총수(銃手)를 독려하여 총을 쏘며 바로 앞까지 전진하여 적을 매우 많이 죽이니 적이 분궤(奔潰)되었다. 적이 본진을 겁략할 때 또 총수를 거느리고 일제히 총을 쏘아 적을 죽었다.】 강서 파총(江西把摠) 김이인(金利仁)은 【송림·곽산 전투에서 박계량(朴季良)과 함께 공이 같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무사(武士) 이달욱(李達旭)·박상화(朴尙化), 기패관(旗牌官) 강우문(姜右文)·박제순(朴濟順)·이원갑(李元甲), 초관(哨官) 강희철(姜希喆)·오치현(吳致賢)· 【이상은 송림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총을 쏘아 적을 죽였으며, 곽산 전투에서 총을 쏘아 적을 죽였다.】 김세봉(金世奉)· 【송림 전투에서 총을 쏘아 적을 죽였으며, 적이 본진을 겁략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총을 쏘았다.】 이봉문(李奉文) 등 9명과 【송림 전투에서 총을 쏘아 적을 죽였다.】 이경운(李京云)은 【적이 본진을 겁략할 때 총을 쏘아 적을 죽였다.】 모두 부역을 견감하고 본도로 하여금 쌀과 베를 후하게 제급하게 한다. 영변 별장(寧邊別將) 김재철(金再哲)은 【자원(自願)해 출정(出征)하여 2백 명의 관군(官軍)을 거느리고 정주성(定州城) 아래로 가서 함종진이 겁략 당할 때에 칼날을 무릅쓰고 충돌하다가 이내 전사하였다. 그 아들 김구장(金九章)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진영으로 달려가 적을 죽였다.】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가급(加給)하게 하고, 그 아들 김구장은 상복을 벗기를 기다려서 특별히 수용하게 한다. 천총 김응철(金應哲)· 【적변(賊變)이 있던 처음에 자원하여 출전했으며, 곽산 전투에서는 있는 힘을 다해 적을 추격하여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다.】 순천진(順川陣)의 장사 군관 안형복(安亨馥)은 【송림 전투에서 시석을 무릅쓰고 앞장섰으며, 곽산 전투에서 적도들이 몰려오자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가 알리고 이내 진군하였다. 적이 허항(許沆)의 성채를 겁략할 때에 적 2명을 사로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박종묵(朴宗默)은 【송림 전투에서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앞장섰으며, 곽산 전투에서는 적 김이국(金理國) 등 6명을 사로잡았다.】 본도에서 시상한 것이며, 변득렴(邊得㾾)은 【송림 전투에서 적 2급을 베었으며, 동성(東城)을 공격할 때에 힘껏 싸우다가 화살을 맞았다.】 상으로 가자한다. 병영 집사(兵營執事) 유학린(劉學麟)· 【적이 허항의 진영을 겁략할 때 적 1명을 사로잡았다.】 장사 군관(壯士軍官) 최상언(崔尙彦)·송대윤(宋大允)은 【적이 허항의 진영을 겁략할 때 적 2명을 사로잡았다.】 모두 본도로 하여금 수용하게 하고, 군졸(軍卒) 이정번(李正番)· 【송림 전투에서 적 7명을 죽였다.】 김두청(金斗淸)은 【송림 전투에서 적 3명을 죽였다.】 모두 부역을 견감하고 본도로 하여금 쌀과 베를 후히 제급하게 한다. 양덕(陽德)의 소모군(召募軍) 이성춘(李成春)은 【제경욱(諸景彧)을 따라다니며 사다리를 타고 성을 넘다가 적에게 붙잡혔는데, 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다.】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가급하게 하고, 이장갑(李長甲)의 예에 의해서 도내의 변장(邊將)을 특별히 증직한다. 숙천진(肅川陣)의 파총(把摠) 김학원(金學源)·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먼저 안주(安州)로 달려가 성을 지켰으며, 송림 전투에 출전하여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적 1명을 사로잡았다.】 집사(執事) 김태홍(金泰弘)은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먼저 안주로 가서 성을 지켰으며 송림 전투에 출전하여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적 1급을 베었다.】 모두 본도에 수용하게 하고, 장사 군관 오치도(吳致道)는 【자원해 출전하여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불이 군기막(軍器幕)에 미치자 화약과 군기를 지고 나와 요행히 불타는 것을 면하였다.】 상으로 가자한다. 포교(捕校) 김윤거(金允琚)는 【도망하는 적 2명을 잡아 바쳤다.】 본도에 수용하고, 군졸 김동이(金同伊)는 【적에게 붙잡혔다가 밤을 틈타 도망해 오다가 순천(順川)의 군사 2명이 적에게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는 긴 창으로 적을 찌르고 드디어 함께 돌아왔다.】 체가한다. 군졸 임종석(林宗石)·박상번(朴尙番)·최차삼(崔次三)·김삼광(金三光)은 【이상은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창을 맞았다.】 모두 부역을 견감하고, 본도로 하여금 쌀과 베를 후히 제급하게 한다. 좌수(座首) 김학일(金學一)은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병영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는데, 제군에서 모두 기일에 오지 못하였으나 유독 김학일이 벼슬자리를 비우고 시골에 있으면서 초모(招募)하여 70명으로 부대를 만들어 자장(資裝)을 찾아 주고 격려 단속하여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하룻밤 사이에 거느리고 가게 하였으며, 이어서 또 민병(民兵) 2백 명을 가려 뽑아 송림의 적을 진격하였다.】 본도의 전랑(殿郞)으로 차임하고, 평양 중군진(平壤中軍陣) 영장(領將) 옥재혁(玉載赫), 【적이 함종진(咸從陣)을 겁략할 때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였으며, 성을 격파하던 날에 나학수(羅學守)와 함께 홍경래를 베었다.】 무사(武士) 김형록(金亨菉)은 【성을 격파하던 날 적 홍총각(洪總角)을 사로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며 변장을 제수한다. 천총 최종석(崔宗錫)· 【성을 격파하던 날에 적의 집사 김혜철(金惠哲)의 목을 베어 바치고, 적의 괴수 이희저(李希著)의 조카를 사로잡았다.】 영장(領將) 김진연(金進淵)은 【동문과 남문의 전투에서 매번 앞장섰으며, 대진이 겁략 당할 때에 총수(銃手)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으며, 성이 격파되던 날 홍경래의 어미를 사로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무사 차익환(車益煥)은 【성이 격파되던 날 적 양시위(楊時緯)를 사로잡았다.】 변장을 제수하고, 초관(哨官) 나학수(羅學守)· 【성이 격파되던 날, 옥재혁(玉載赫)이 홍경래를 벨 때 협력하였다.】 장사 군관 이담(李淡)· 【성이 격파되던 날 적의 집사 이침(李琛)을 사로잡았다.】 무사 김중빈(金仲彬)· 【남문의 전투에서 앞장서 진격하다가 탄환을 맞았다.】 임종언(任宗彦)·김인수(金仁守)· 【이상은 동문 전투에서 탄환을 맞았다.】 기패관(旗牌官) 김치룡(金致龍), 무사 김성우(金成右)·김범(金範)은 【이상은 남문 전투에서 탄환을 맞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군졸 이춘삼(李春三),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적 3명을 사로잡았다.】 총수 황보철(皇甫喆)·김학봉(金學奉)·박문현(朴文玄)은 【이상은 남문 전투에서 탄환을 맞았다.】 모두 체가한다. 가산진(嘉山陣) 천총 장대명(張大明)은 【일곱 차례 출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초관(哨官) 강수광(姜守光)은 【동문 전투에서 탄환을 맞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박천진(博川陣) 군관 정복희(丁馥禧)는 【성이 격파되던 날 적 윤언섭(尹彦涉)을 사로잡았다.】 변장을 제수하고, 초관 조이욱(趙利郁)·김종록(金宗菉), 기패관 이동엽(李東燁)은 【이상은 일곱 차례 출전하여 자못 공로가 있었다.】 모두 본도로 하여금 시상하게 한다. 정주진(定州陣) 초관 조명진(趙命珍)·배행준(裵行俊), 교련관 오협(吳鋏), 기패관 송인천(宋仁天), 군관 김관해(金觀海), 별군관 송문봉(宋文鳳), 【이상은 일곱 차례 출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군관 김덕룡(金德龍)·강시제(康時濟)는 【이상은 여러 차례 접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모두 본도로 하여금 시상하게 한다. 삭주진(朔州陣) 장사 군관 길선덕(吉善德)은 【자원해 출전하여 적을 만약 섬멸하지 못하면 죽어서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며, 북성(北城)의 흙을 팔 때 밤낮으로 역사를 감독하였다.】 상으로 가자하고, 운산(雲山)의 연군(鉛軍) 변동이(邊同伊) 등 11명은 【1명은 영변(寧邊)의 병졸로 북성에 흙을 팔 때에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두 부역을 견감한다. 창군(槍軍) 박지영(朴之永)과 【효유문(曉諭文)을 가지고 솔선하여 동문 밖 적이 둔(屯)을 치고 있는 곳에 가서 던져 전했다. 북성 흙을 팔 때에 탄환을 맞았는데, 다리를 싸매고서 조금도 물러나 피하지 않았고, 또 성의 돌 몇 개를 뽑아내었다.】 장군(將軍) 강돈금(姜頓金)은 【북성에 땅을 팔 때에 거듭 화살과 탄환을 맞았으나 시종 역사에 힘썼다.】 모두 부역을 견감하고 체가한다. 군뢰(軍牢) 박지영(朴枝英)은 【성문을 쌓을 때에 공이 많았다.】 본도로 하여금 시상하고, 인산리(麟山吏) 오세권(吳世權)은 【자원하여 진에 나아가 성문을 쌓고 흙을 파낼 때 세운 공이 매우 많았다.】 본도로 하여금 소원에 따라서 수용하게 한다.
창의 소모(倡義召募) 장사(壯士)의 별단.
공충 병사(公忠兵使) 김견신(金見臣) 【이미 포상을 받았다.】 좌부 방어장(左部防禦將) 한응좌(韓膺佐)는 【자원으로 서림(西林)에 종군(從軍)하였는데, 성을 공격할 때 먼저 나가 문을 지키는 적을 베고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본도로 변장을 제수하고, 좌선 봉장(左先鋒將) 박정모(朴禎謨)는 【김견신(金見臣)과 함께 모의하여 창의(倡義)해서 김 견신의 부장(副將)이 되어 거짓으로 적괴(賊魁) 복일(復一)에게 투항하여 적정(賊情)을 자세히 탐문하고 밤중에 도망해 돌아왔는데, 북성의 흙을 팔 때에 탄환을 맞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변장을 제수한다. 후부 방어장(後部防禦將) 박성묵(朴聖默)은 【김현신과 함께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서림(西林)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상으로 가자하고, 구응 방어장(救應防禦將) 문응규(文應圭)는 【김견신과 함께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는데, 가는 곳마다 세운 공로가 많았다.】 본도에서 수용한다. 전부 방어장(前部防禦將) 김계엽(金啓熀)과 【처음부터 의병을 일으켜 서림 전투에서 전부(前部)가 되어 공로가 가장 많았는데, 정주성을 공격할 때에 탄환을 맞았다.】 철산(鐵山) 한량 김국추(金國樞)와 【철산 백성으로서 김견신의 군사를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하였고 곧바로 향도관(嚮導官)이 되어서는 철산(鐵山)의 백성으로 적을 위해서 서림산(西林山) 부성(富城)을 지키고 있는 자들의 가족을 위협해서 그들로 하여금 성 밖에서 울부짖게 하여 적군의 태반이 도망하여 흩어지게 한 것은 실로 그의 공에 힘입은 것이다.】 영병장(領兵將) 가선 대부 전 첨사 홍여일(洪麗一)은 【의주(義州) 사람으로 3월 초에 연행(燕行)에서 돌아와 자원해서 한 부대의 군사를 얻어 김견신의 진영으로 갔다. 북성의 흙을 팔 때에 일을 감독하였으며 성을 격파하던 날 먼저 성벽에 올라가 입성하였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증 통제사(贈統制使) 허항(許沆)과 【이미 포증(褒贈)을 받았다.】 의주의 무사 임술조(林述祚)· 【그의 동생 임증봉(林曾鳳)과 함께 용천(龍川) 성문을 속여서 열게 하였으며 동림(東林)을 수복할 때 먼저 성문을 부수고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임증봉(林曾鳳)· 【그의 형 임술조와 함께 용천성에 들어가 문을 열어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기사(騎士) 좌영장(左營將) 김형척(金亨倜), 【자원하여 종군하였는데 용천(龍川)을 습격할 때 적 7명을 베고 말 두 필을 빼앗았으며, 김형철·임술조와 함께 먼저 동림 성문을 부수고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기사 김형철(金亨喆)은 【자원해 종군하여 김형척·임술조와 함께 동림 성문을 먼저 부수고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무사 허웅(許雄)·김중규(金中奎)·김문도(金文道)는 【모두 자원으로 종군하여 용천을 수복할 때에 허웅은 적 2명을 베고, 김중규는 1명을 베었다. 이내 선천(宣川)으로 가서 세 사람이 협력하여 적도 김인백(金仁白) 등 4명을 잡아 바쳤다.】 아울러 본도에서 수용한다. 초산 부사(楚山府使) 최신엽(崔信燁), 【이미 포상을 받았다.】 의주의 한량 임치명(林致明)·양해득(梁海得)은 【모두 최신엽을 따라서 미곶(彌串)과 용골(龍骨)을 수복할 때 세운 공이 가장 많았다.】 모두 본주에서 수용한다. 삼등 현령(三登縣令) 송지렴(宋之廉), 【이미 포상을 받았다.】 강계(江界)의 한량 계운해(桂運海)는 【심하(深河)에서 전사한 사람 계수방(桂秀芳)의 육대손(六代孫)으로 송지렴과 함께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시종 협력하여 계책을 도와 대응하였고, 군수(軍需) 조달에 세운 공이 가장 많았었다. 대진이 겁략 당할 때 본채(本寨)에 남아 지키면서 기미를 보아가며 막아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변장을 제수하고, 길주(吉州)의 한량 김종욱(金宗郁)은 【강계에 와 머물면서 의병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서 군장(軍裝)과 전마(戰馬)를 스스로 마련해 함께 진으로 갔다. 허항(許沆)의 진이 겁략 당할 때 필마 단창(匹馬單槍)으로 적진에 충돌하여 적괴 홍총각(洪總角)의 갑옷을 빼앗았다. 대진이 겁략 당할 때에 적로(賊路)를 막았으며 성을 격파할 때에는 적장 김치신(金致信)을 베고 적병을 사살(射殺)한 것이 역시 많았다.】 상으로 가자하여 실직에 조용한다. 강계의 의사(義士) 별무사 김대윤(金大允)과 【활 잘 쏘고 총을 잘 쏘았는데, 송지렴을 따라서 진에 나가 동성(東城)에 땅을 팔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역사를 감독했다. 북성(北城)이 궤파(潰破)될 때 포수(砲手)와 함께 사다리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 손태영(孫泰永)과 함께 동문을 열고 각진의 군사를 불러들였다.】 별무사 김계문(金啓文)· 【자원하여 진으로 나가 2월 25일, 윤거(輪車)로 성을 공격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성벽에 올라가 화살을 맞아 거의 죽을 뻔하였다. 성을 격파하던 날 송지렴과 함께 앞장서 입성해서 총을 쏘아 죽인 적이 매우 많았다.】 윤홍조(尹弘祚)· 【총과 활을 잘 쏘았는데, 자원해서 진으로 나가 싸움에서 반드시 앞장섰다. 적을 격파하던 날에 포를 쏘아 적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호일성(扈一成)은 【자원하여 진에 나가 포수 54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와서 송지렴의 진에 소속되었다. 성을 격파하던 날 송지렴의 전봉(前鋒)이 되어 적의 대포를 맞아 얼굴이 데어 문드러졌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창성(昌城)의 전 권관(權管) 강인학(姜仁鶴)은 【정묘년에 순절(殉節)한 사람의 자손으로 한 집안의 의사(義士) 42명을 일으켜 스스로 양자(糧資)를 마련하여 대진으로 갔다.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3명을 사로잡았다.】 병조의 육품직에 조용한다. 희천(熙川)의 한량 함의형(咸義衡)은 【의사(義士) 50명을 모집하여 자원해서 진으로 갔다. 성을 격파한 후 적의 괴수 이희저(李希著)의 수급을 베어 바쳤다.】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을 제수한다. 의주 행영장(行營將) 정내홍(鄭來鴻)은 【수성(守城)할 때 집사(執事)로서 거짓으로 적의 괴수 이복일(李復一)에게 투항하여 적정(賊情)을 자세히 탐지하여 허항(許沆)의 진중으로 따라갔다. 용천(龍川)을 수복할 때 적 3명을 베고 2명을 사로잡았다. 관군과 함께 선천(宣川)에서 모여 적 4명을 사로잡고 이내 정주(定州) 진중으로 갔다. 허항의 진이 겁략 당할 때 적 2명을 사로잡았으며, 허항이 전사한 후 그 군사를 대신 거느렸다.】 상으로 가자하여 실직에 조용한다. 귀성(龜城)의 가선 대부 전 만호(萬戶) 김지환(金志煥)은 【병영의 장사 군관(壯士軍官)으로 출전하여 송림·곽산의 전투 때 후영(後營) 선봉이 되어 적추(賊酋) 박성신(朴聖信)의 세 부자(父子)를 잡아 바쳤으며, 장정 53명을 모집하여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상으로 가자하고, 곽산의 한량 원영정(元永丁)은 【의병 44명을 모집하고 양미(粮米)를 스스로 마련하여 와서 정주 서문(西門) 밖 고갯마루의 요새지를 지켰다. 청천강(淸川江) 북쪽의 적이 패한 후 김지환(金志煥)과 협력하여 박성신(朴聖信)을 붙잡았다.】 상당한 초사(初仕)에 녹용(錄用)한다. 곽산의 전 좌수(座首) 강집(姜
)은 【의병장으로서 시종일관 진(陣)에 있으면서 전후하여 적 장홍익(張弘益) 등 15명을 붙잡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별군직 장낙현(張洛賢)은 【의주 사람으로 서울에 있다가 적변을 듣고는 내려가 본주(本州)의 의사(義士)를 모집하고 또 7명의 의사(義士)의 자손을 모아 정주성 아래에 진을 쳤다.】 가자(加資)하고, 벽동(碧潼)의 사인(士人) 김경로(金慶魯)는 【향무(鄕武) 1백 명을 창도(倡導)하여 거느리고 진으로 가서 땅을 팔 때에 낮에는 역에 나가고 밤에는 진에 머물렀다.】 본도의 전랑(殿郞)으로 차출한다. 태천(泰川)의 의병장 백사증(白師曾)과 【의사 20명을 거느리고 양찬(粮饌)을 스스로 마련하여 요로(要路)를 지켰고, 성을 격파한 후 도망하는 적 8명을 베었다.】 철산(鐵山)의 진사 박대관(朴大觀)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부름에 호응해서 사인(士人) 43명을 모집하고 양미 12석을 거두어 대진(大陣)을 응접하였다. 이내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진으로 나갔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의주의 전 첨사(僉使) 한금기(韓今琦)는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자원하여 진으로 나가 관병(官兵) 70명을 거느리고 영병장(領兵將)이 되었다.】 상복 벗기를 기다려 상으로 가자한다. 안주 향인 안명렬(安命烈)은 【적들이 반란을 일으킨 초기에 60여 명을 모집하고 스스로 군량을 마련해 가지고 온 고을 경내를 순회하면서 돌아다녀 마을 사람을 동요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역적 한지겸(韓志謙) 등 3명을 잡아들였다.】 상으로 가자하며, 전 장령(掌令) 차경진(車敬鎭)은 【선천(宣川) 사람으로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사인(士人) 김연(金埏)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웃 마을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동림(東林)의 적도를 쫓았으며 군기(軍器) 및 도둑질해 가는 창고의 곡식을 빼앗아 창고 안에 다시 넣었으며, 그의 자손과 친속을 거느리고 청천강(淸川江) 요로를 지켰다.】 수령을 제수한다. 태천(泰川)의 사인(士人) 이시복(李時復)은 【서울에 있다가 적변을 듣고 달려 돌아가 군병 29명을 모집해서 진 앞으로 나가 여러 차례 접전하였으며, 또 돈과 곡식을 모아 출정한 사람의 가속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기와 잡물을 마련하였다.】 본도의 전랑(殿郞)으로 차출한다. 장사 군관(壯士軍官) 구채문(具采文)은 【곽산 사람으로 적이 본군에 들어올 때에 그의 무예(武藝)를 듣고서 위협해 불렀으나 굽히지 않고 도망해 피했으며, 적이 물러간 후 양미(粮米)를 스스로 마련하여 가지고 와 응모하였다. 성을 격파하던 날 적을 많이 베고 사로잡았는데 이때 19세였다.】 변장을 제수한다. 평양의 한량 장운한(張雲漢)과 【용사(勇士) 송인철(宋仁哲) 등 20명을 창모(倡募)하여 자원하여 진으로 갔다.】 오필련(吳必鍊) 【동지(同志) 정득현(鄭得賢) 등을 거느리고 대진으로 나갔으며, 또 소 두 마리와 장(醬) 두 바리[馱]를 마련해 순무영 중군(中軍)의 진영에 바쳤다.】 모두 본도에서 원에 따라 수용한다. 강서(江西)의 전 사고 참봉(史庫參奉) 이인화(李仁華)와 【동지 고경천(高擎天) 등을 창모(倡募)하여 함종진으로 나갔으며, 성을 격파하던 날 성첩(城堞)을 지켜 도망하는 적을 막았다.】 용천(龍川)의 향인(鄕人) 안택륜(安宅倫)· 【적변이 있던 처음에 장낙현(張洛賢)의 진으로 나갔는데, 병으로 인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본부의 향인 김응면(金應勉) 등을 모아 함께 대진으로 나갔다.】 이지렴(李志㾾)· 【그의 동생 이지락(李志洛) 및 사인 차신국(車信國) 등과 함께 대진으로 나갔다.】 정주의 향인 김기영(金基英)은 【의병 10명을 거느리고 군량(軍粮)을 스스로 마련하여 대진으로 나갔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한다. 도사(都事) 최대식(崔大寔), 박사(博士) 박영현(朴榮顯)은 【모두 정주 사람으로 본현의 사인 백경환(白慶煥)·정현박(鄭顯璞)·윤종현(尹宗鉉)과 함께 서울에 있다가 적변을 듣고서 서로 이끌고 진으로 나갔다.】 모두 복직(復職)시킨다. 운산(雲山)의 전 참봉 이즙(李檝)과 【적변이 있던 처음에 향인 강백록(康百菉)·이현문(李顯文)과 함께 1백 20여 명을 창모(倡募)하여 운산(雲山)·태천(泰天)·영변(寧邊) 세 고을의 요로에 나누어 둔(屯)을 쳐 도망하는 적 3명을 잡아 바쳤다.】 영변의 향인 김성붕(金成鵬)은 【적변이 일어난 처음에 향인을 모집하여 고갯마루의 요새지에 나누어 둔을 쳐 적의 군관 변대헌(邊大憲)·변대현(邊大賢) 형제를 잡아 바쳤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평안도의 장사 군관 별단.
병영의 장사 군관 한량 왕사현(王思賢)은 【송림에 출전하여 대진을 따라다니며 안형복(安亨馥)과 함께 운흥(雲興)의 적둔(賊屯)에 가서 정탐하여 적정을 먼저 보고하였다.】 상으로 가자하였다. 직부(直赴) 이의승(李宜承)과 【송림과 곽산 두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있는 힘을 다하여 방어하였다.】 한량 이심일(李心鎰)·한정신(韓正臣)은 【송림과 곽산 전투에 참가 하였는데, 적을 격파하던 날 앞장서서 먼저 성벽에 올라갔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한다. 한량 백인서(白麟瑞)와 【송림과 곽산 전투에서 모두 전공(戰功)이 있고 적 휘하의 김이국(金理國) 등을 사로잡았으며,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뒤쫓아가 적을 죽였다.】 김낙홍(金洛弘)·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5명을 사로잡았다.】 과거 출신(出身) 최천학(崔天鶴)· 【송림에 출전하여 대진을 따라다니며복 병장이 되어 적 9명을 붙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라. 과거 출신 김인덕(金仁德)과 【송림에 출전하였고, 대진으로 나가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겸사복(兼司僕) 구즙(具緝)·오명회(吳命恢)는 【송림에 출전하였다가 대진으로 가서 복병장이 되어 흙 파는 역사를 감독하였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하고, 한량 이인협(李寅協)과 【송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후에 대진에 나가 복병장이 되어 북성(北城)의 요해처를 지키고 북성(北城)의 흙 파는 일을 감독하였다가 이마에 화살을 맞았다 성을 격파하던 날 병든 몸을 이끌고 군사를 거느려 입성하였다.】 향인(鄕人) 이건악(李健岳)· 【곽산에 출전하였고 성을 격파한 후 대진으로 가 접전하다가 탄환을 맞았다.】 과거 출신 서백석(徐百碩)은 【접전할 때 탄환을 맞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과거 출신 김창신(金昌信)은 【송림 전투에서 앞장서서 적을 추격하였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한량 이희엽(李禧燁)과 【송림 전투 후에 이영식(李永植)을 따라 다복동(多福洞) 적의 소굴을 쳐서 적의 기치(旗幟)를 빼앗았다.】 김후덕(金厚德)은 【이영식을 따라가 다복동 적의 소굴을 쳤고 대진으로 나가 복병장이 되었다.】 모두 본도에서 수용한다. 과거 출신 김성록(金聲菉)은 【송림에서 대진으로 가 접전 중에 화살을 맞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과거 출신 장치영(張致榮)은 【송림에 출전하였다가 이내 진으로 나가 우영장(右營將)의 행군 집사(行軍執事)가 되었다.】 본도에서 시상한다. 한량 변득렴(邊得㾾)은 【송림에서 대진으로 나가 접전할 때에 화살을 맞아 정월에 먼저 돌아왔다.】 상으로 가자하고, 한량 한무흥(韓武興)은 【대진이 겁략 당할 때에 적 1명을 베었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전 만호 박대욱(朴大旭)은 【복병장(伏兵將)으로 접전할 때 탄환을 맞아 3월에 병으로 돌아왔다.】 상으로 가자하고, 과거 출신 계응화(桂應華)와 【북성(北城)을 파는 부역에서 심부름을 하였다.】 한량 박치검(朴致儉)은 【송림 전투에서 앞장서서 쫓아갔으며 북성의 흙을 팔 때에 역사를 감독하였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한다.
평안도 각읍 수성(守城) 방수(防守) 및 각종 공을 세운 사람의 별단.
안주 수성 도패장(安州守城都牌將) 절충 장군(折衝將軍) 이춘화(李春華)는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북성을 지켰으며, 거느린 군사가 3백 20명인데 연달아 포(砲) 쏘는 것을 시험하여 등급을 나누어 상을 주고, 쌀을 내어 떡을 만들어 다시 성 안의 장정을 먹였다.】 도내의 변장(邊將)을 제수하고, 집사 행수(執事行首) 전 경복장(景福將) 전계장(全啓璋)은 【수성(守城) 및 출전했을 때 각종 수용(需用)을 힘을 다해 마련했으며 화약을 가지고 정주에 나가 성을 공격하였다.】 본도에서 수용하고, 장교(將校) 김여흥(金麗興)은 【내능(內應)하는 적도 이무실(李武實)을 잡아 바쳤으며, 성첩을 지킬 때 도성장(都城將)으로 거행하였다.】 상으로 가자한다. 영변의 집사 겸사복(兼司僕) 길상척(吉尙倜)은 【칼을 품고 내응하는 적 이만봉(李萬奉)을 붙잡아 바치고, 적정을 정탐하여 본관(本官)에 몰래 알려서 위태로운 성을 보전하는 데 실로 그의 공이 많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변장을 제수한다. 천총 출신 장문오(張文吾), 겸사복 박처검(朴處儉)은 【이상은 앞장서 자원하여 태천(泰川)의 적 소굴을 소탕하고 흉추(凶酋) 박인식(朴仁植) 등 5명을 사로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성장(城將) 겸사복 최정보(崔廷珤)는 【태천의 가짜 고을 원[倅] 변대익(邊大翼)을 붙잡아 참수(斬首)하여 바쳤으며, 또 도망하는 적 1명을 잡아 바쳤다.】 도내의 변장을 제수하고, 한량 윤정호(尹鼎浩)와 【최정보와 함께 변대익을 붙잡았다.】 중군(中軍) 홍치백(洪致伯)은 【내응하는 여러 적을 조사해 잡을 때 많은 공로가 있었고, 태천을 수복할 때에도 또한 방략(方略)을 설시하였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천총인 과거 출신 김문행(金文行)은 【장사 군관 고한장(高漢章) 등을 거느리고 곧장 다복동 적의 소굴을 쳐서 군기(軍器) 30태(馱)를 거두어 모으고 적 8명을 잡았다.】 도내의 변장을 제수하고, 부민(府民) 유태운(劉太云)은 【적의 군관 김상각(金尙珏) 및 쌀 아홉 섬과 소 한 마리를 적진으로 끌고 가던 최경일(崔景一) 및 적당(賊黨)과 가까운 일족인 최익성(崔益成)을 잡아 바쳤다.】 체가한다. 운산(雲山)의 행수 군관(行首軍官) 안여곤(安如坤), 집사(執事) 이춘재(李春栽)는 【이상은 영변에 내응하는 적정을 염탐하였고 적도 나대곤(羅大坤)을 잡아 바쳤으며, 또 수검(手劍)으로 남익현(南益顯)과 김우학(金遇鶴) 두 적을 먼저 베었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수리(首吏) 김남희(金南禧), 형리 박사권(朴思權)은 【이상은 남익현(南益顯) 무리들이 흉적에게 내응하는 상황을 염탐하여 먼저 운산 본관에 알렸으며, 영변에 따라 들어가서 내응하는 적을 잡아 다스려 공로가 가장 드러났다.】 모두에게 본도로 하여금 자원에 따라 시상한다. 장교 서상곤(徐尙坤)과 【적의 자객(刺客) 김우갑(金遇甲)이 영변부 관아로 돌입하는 것을 보고는 칼을 빼앗고 포박해 베었다. 북성(北城)에 땅을 팔 때 길선덕(吉善德)과 함께 연군(鉛軍)을 거느리고 주야로 역사를 감독하였다.】 천총 허철(許喆)은 【영변 성문에서 칼을 품고 매복해 있던 적 강수흥(康守興)을 잡아 바쳤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의주의 도령장(都領將) 전 첨사 김취규(金就奎)는 【적변을 듣고 기복(起復)하여 군무(軍務)를 전담했으며, 그의 가족이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돌보지 않았었고, 그의 아들 김택회(金宅晦) 역시 산성 중군(山城中軍)으로 굳게 지켜 공을 세웠다.】 상복 벗기를 기다려서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한다. 전 군수 장몽열(張夢說)은 【적변을 듣고 기복(起復)하여 들어와 산성을 지켰으며 그 가속(家屬)이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돌보지 않았다.】 상복 벗기를 기다려 가자하고, 방어장(防禦將) 정현석(鄭賢碩)은 【장사 군관 조도헌(趙道憲)을 시켜 적의 괴수 문제(文濟) 및 그의 두 아들과 첩 하나, 며느리 하나를 찾아 잡게 하였다.】 상으로 가자하고, 방수장(防守將) 최봉덕(崔鳳德)은 【조도현을 시켜 적의 괴수 남관(南冠)·남혁(南赫) 형제를 잡게 하였다.】 본도의 변장을 제수하고, 부민(府民) 조도헌(趙道憲)은 【문제·남혁 등 여러 적과 그의 지속(支屬)을 찾아내 잡았다.】 부역을 견감하고 체가한다. 포교 최종일(崔宗日)·김덕영(金德永)·김표응(金表應)·문정엽(文正燁)은 【이상은 힘을 합쳐 서림(西林)의 적장 김익명(金益明)을 잡아 바쳤는데, 최종일은 적변이 일어난 처음에 큰 길[官路]을 따라서 곧장 병영으로 나가 적정을 보고하고 공문[題辭]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귀성(龜城)의 방수장(防守將) 정몽량(鄭夢良)은 【적의 괴수 우군칙(禹君則)·최이륜(崔爾崙)·최이항(崔爾恒)·최정우(崔正宇)·최이구(崔履九)를 잡아 바쳤다.】 상으로 가자하여 중군에 차정(差定)한다. 좌수(座首) 홍이경(洪履警)과 【적변이 일어난 처음부터 염탐하여 진안(鎭安)하는 데 세운 공로가 많았으며, 밤에는 칼을 짚고 관문에 오래 서 있었다.】 중군 전 동지(同知) 조영(趙暎)은 【장정을 모집하여 시종 일관 성을 지켰으며 손수 포를 쏘아서 음흉한 격문(檄文)을 가지고 성 밖으로 오던 적추(賊酋)를 다치게 하여 내쫓았다.】 모두 본도에서 소원에 따라서 시상하고, 풍헌(風憲) 홍이후(洪履垕)는 【적도가 정주부(定州府)의 경내를 노략질하는 것을 보고는 장군을 모집하여 적추(賊酋) 한처곤(韓處坤) 및 그 도당(徒黨) 5명을 참획하였다.】 상으로 가자하고, 약정(約正) 허용(許溶)과 【적도가 정주부의 경내를 노략질하는 것을 보고 장군을 모집하여 적추 한처곤 및 그 도당 5명을 참획하였다.】 체가하고, 포교 김득기(金得己)와 【적도 장홍익(張弘益) 등 3명을 잡아 바쳤다.】 곽산의 방수장 김홍척(金弘倜)은 【정주성에 패전한 적(賊) 15명을 잡아 바쳤다.】 모두 본도로 하여금 시상하게 한다. 향인(鄕人) 김우척(金宇倜)은 【적의 군관 박상현(朴尙賢) 및 적의 괴수 김창시(金昌始)의 아비와 아들을 잡아 바쳤다.】 모두 본도의 변장을 제수하고 평양 군기 감관(平壤軍器監官) 조진범(趙鎭範)과 【화약 창고에 방화한 적을 사로잡았다.】 평양 배지(陪持) 김복삼(金福三)·김진홍(金珍弘)·이초영(李初英) 이상은 본도로 하여금 소원에 따라서 수용한다. 안주(安州) 배지 최종한(崔宗漢)·백사정(白士正), 의주 배지 김이급(金以汲)·김내문(金來聞)은 모두 본도에서 특별한 예로 수용하고, 그 가운데서 제일 많이 상경(上京)한 한 사람은 도내의 변장을 제수한다.
평안도의 재산을 보내 군량을 보탠 사람의 별단
의주 유학(幼學)152) 홍득주(洪得周)는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각종 곡식 1천 2백 18석과 돈 5천 냥을 자원하여 관에 바쳐 기민(饑民)에게 나누어 주니 성중의 민심이 이를 의뢰해서 조금 안정되었다. 또 돈 2백 냥을 내어 본부의 성첩을 지키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초사(初仕)에 조용하고, 숙천(肅川)의 향인 차형기(車亨基)와 【돈 2천 냥을 내어 안주(安州)로 실어다 바쳐 군수(軍需)에 보탰다.】 안주의 향인 박경(朴絅)은 【돈 1천 5백 냥과 벼 8석을 본현에 자원해 바쳐서 군수에 보탰다.】 모두 변장을 제수하고, 김경중(金慶中)은 【돈 1천 냥을 안주에 자원으로 바쳐서 군수를 보탰다.】 모두 본도의 전랑(殿郞)에 차임한다. 숙천 진사 차형규(車亨逵)와 【쌀 17석 영(零), 콩 13석 영(零), 돈 35냥 영(零), 소 일곱 마리를 내어 대진(大陣)이 경내를 지나갈 때 스스로 준비해 맞이하여 호궤(犒饋)하였다.】 증산(甑山)의 장교 계진흥(桂震興) 【소 20마리를 대진에 자원하여 바쳤다.】 ·벽동(碧潼)의 향인 안사권(安士權) 【쌀 1백 석을 내놓았는데 두 차례에 나누어 김경로(金慶魯)의 의병진으로 실어 보냈고, 그 아들 안급인(安
仁)을 진중으로 보내 계속 호궤를 담당하게 하였다.】 ·삭주(朔州)의 한량(閑良) 이현택(李賢澤) 【쌀 15석과 소 열 마리를 내어 본읍 진영에 자원하여 바쳤다.】 ·안주의 향인 박용의(朴龍儀), 【돈 2백 냥을 내어 본현에 자원하여 바쳐서 군수에 보탰다.】 ·의주의 유학(幼學) 김홍적(金弘迪), 【돈 2백 냥을 내어 본부의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안주의 향인 최석증(崔錫曾) 【돈 1백 50냥을 내어 본현에 자원하여 바쳐서 군수에 보탰다.】 ·삼등(三登)의 사인(士人) 장공서(張公書) 【소 열 마리를 내어 평양성을 지키는 곳에 자원하여 바쳤다.】 ·강서(江西)의 절충 장군 박창겸(朴昌謙) 【소 열 마리를 내어 후영진(後營陣)에 자원하여 바쳤다.】 ·평양의 전 동지(同知) 안봉핵(安鳳翮) 【소 한 마리와 술 한 항아리를 내어 본부의 창의사(倡義士)에게 나누어 호궤하고, 또 돈 1백 50냥을 내었다.】 ·전 오위 장 오성렬(吳成烈) 【돈 1백 50냥을 냈다.】 ·의주의 한량 김정윤(金廷潤) 【소 다섯 마리와 쌀 5석을 내어 본부의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에게 나누어 호궤하고, 또 소 두 마리를 내어 가지고 김견신(金見臣) 진에 가 호궤하였다.】 ·가산(嘉山) 유학(幼學) 김희권(金希權) 【쌀 1석과 소 여덟 마리를 내어 대진에 자원하여 바쳤다.】 ·의주의 유학 문천익(文天益) 【각종 곡식 50석 9두(斗)를 내어 서쪽 6개 면(面)의 진에 나간 군병에게 나누어 주었다.】 ·벽동의 사인 공현검(公顯儉) 【쌀 40석을 내어 본군의 의병진에 수송하였다.】 ·영변의 유학 김광척(金光倜) 【돈 2백 냥을 내어 의병의 양식을 보탰다.】 ·평양의 절충 장군 김여행(金麗行)·유학 송인철(宋仁哲) 【각기 돈 2백 냥을 내어 소를 사고 장을 사서 대진과 평양진에 자원하여 바쳤다.】 ·강계의 향인 김양섭(金陽燮)·김종욱(金宗郁) 【각기 돈 1백 냥을 내어 송지렴과 계운해 등이 창의(倡義)하여 진으로 갈 때 힘 닿는 대로 자원하여 바쳐서 구량(糗粮)과 기계(器械)를 마련하게 하였다.】 ·의주의 민병 천총(民兵千摠) 절충 장군 김광하(金光厦) 【돈 30냥을 내고, 또 좌영장(左營將)이 출직(出直)하는 처소 3간(間)을 스스로 마련하였다.】 ·강서(江西)의 진사 홍용규(洪龍圭) 【돈 2백 70냥을 내었다.】 ·정운갑(鄭雲甲) 【돈 1백 30냥을 내었고, 정예한 포수 20명을 모집하여 행장(行裝)에 필요한 돈 30냥을 주어 후영진(後營陣)으로 가게 하였다.】 이상은 모두 본도에서 소원에 따라 시상한다. 희천(熙川)의 유생과 향인 등은 【돈 1천 냥을 내어 본군의 김인복(金麟福)·양홍(梁鴻) 등이 모병하여 진으로 갈 때 군장(軍裝)과 군량을 마련해 주었다.】 본도에 공문을 띄워 물어보며 자원에 따라 보고하게 한다. 강계(江界)의 과녀(寡女) 유조이(劉召史)와 【돈 15냥을 내었다.】 최조이(崔召史)는 【돈 5냥을 내었다. 이상은 힘닿는 대로 마련해 바쳐서 구량(糗粮)과 군기(軍器)를 마련하게 하였다.】 모두 호역(戶役)을 면제한다.
6월 9일 경술
이근주(李近胄)를 장성부(長城府)로, 김처한(金處漢)을 청도군(淸道郡)으로 정배하였다. 처음에 이근주는 병부를 잃어버리고 성을 버렸으며, 김처한은 병을 핑계대고서 진으로 나가지 않은 죄로써 모두 의금부에 가두고 형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근주의 아들 이용현(李容鉉)과 김처한의 아들 김우종(金禹鍾)이 자원하여 진으로 가 공을 세움으로써 아비의 죄를 면하였다. 이용현은 적 4명을 베고 적 13명을 사로잡았으며, 김우종은 적 8명을 베고 적 24명을 사로잡았다. 이때에 이르러서 비변사에서는 한(漢)나라 제영(緹縈)153) 의 고사(故事)를 인용해 사죄를 용서하고 먼 변방에 충군(充軍)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6월 10일 신해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증 판서(贈判書) 정시(鄭蓍)는 바로 선정신(先正臣) 정구(鄭逑)의 후손입니다. 선정신이 명륜 정의(明倫正義)의 학문을 후손에게 남겨 주었으며 정시가 임금을 섬기는 데 본분을 다하는 충성심을 가정에서 얻게 되어 이번에 부자(父子)가 함께 성취함이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그 유래한 바를 논하자면 바로 선정신의 공로인 것입니다. 청컨대 선정신의 사판(祠版)에 특별히 은유(恩侑)를 내려 성상이 크게 감동하였다는 뜻을 보이소서. 정시의 아버지 증집의(贈執義) 정노(鄭魯)가 정시와 동시에 의리를 좇아 몸을 바쳤는데, 정시가 붙잡혀 협박 당하고 있을 때 정로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네 부모 생각은 하지 말고 반드시 옳게 죽어야 된다.’ 하였고, 적이 또 정로를 붙잡아 칼을 몸에 들이대자 계속 꾸짖다가 죽었으니, 그 높은 의리와 뛰어난 절조는 옛날에도 또한 드물었습니다. 청컨대 정로에게 아경(亞卿)을 더 추증하소서. 듣건대 정시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그의 종제(從弟) 정숙(鄭塾)에게 정주석(鄭胄錫)이란 아들이 있다고 하니, 청컨대 특별히 양자를 세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먼 변방(邊方)인 서쪽 땅 사람들로 하여금 비로소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을 위해 죽어야 하는 의리를 알게 한 것은 바로 청천강(淸川江) 이북(以北)과 이남(以南)의 여러 의사(義士)의 공이며, 여러 의사들이 이런 의리를 알게 된 것은 바로 임진년154) 사충신(四忠臣)이 창의(倡義)하였기 때문입니다. 대개 의병장과 의병은 옛날에도 드물게 있었는데, 지난 임진 왜란 때에 호서(湖西)의 선정신(先正臣)의 조헌(趙憲), 호남의 고 충신(忠臣)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영남의 고 충신 곽재우(郭再祐)가 동지를 불러 모으고 사사(死士)155) 를 규합하자, 당시 사람들이 의병이라 불렀고 조정에서는 의병장을 제수하였습니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지자 중국에서도 모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우리 동방의 영토가 오늘날이 있게 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 네 신하의 힘입니다. 백세까지 일어나게 하고 천리까지도 응하게 해서 관서(關西)의 인사(人士)들로 하여금 풍문을 듣고서 소매를 떨치고 분기(奮起)하도록 한 것도 그 근본은 이 네 신하입니다. 청컨대 특별히 제향하는 사원(祠院)에 강향(降香) 사제(賜祭)하고, 곧 해조로 하여금 그 사손(祀孫)을 수록(收錄)하여 구중 궁궐에서 감회를 일으키는 뜻을 크게 보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임진난 때 나라를 다시 회복하게 하였던 은혜를 아! 잊을 수 있겠습니까만, 삼경(三京)156) 을 수복하고 팔도를 보전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제독(李提督)157) 의 힘입니다. 갑신년158) 이후에 유손(遺孫)이 우리 나라로 왔으나, 조정에서 뜻대로 보답하지 못해 오랫동안 지사(志士)들이 한탄하여 왔었는데, 선조(先朝)에서 그 손자 이원(李蒝)을 곤수 아장(閫帥亞將)으로 삼아서 호조로 하여금 사우(祠宇)를 사주고, 별도로 내부(內部)의 고취(鼓吹)를 보내 그 사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이원의 부자가 죽은 후에는 사손(祀孫)이 가난하여 향화(香火)를 잇지 못하는데, 이원의 손자 이희장(李熙章)이 일찍이 수령(守令)을 지내다가 한 번 배척된 후 복직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청컨대 이번 도정(都政)에서 수령으로 특별히 제수하여 세시(歲時)의 향사(享祀)를 받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임성고(任聖皋)가 적에게 굽히지 않고 대항한 실적(實蹟)은 바로 죽지 않은 정시와 같으니, 전석(全釋)하고 그쳐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현직보다 조금 나은 자리에 조용(調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서북인 중에서 문관(文官)은 괴원(槐院)159) 에 통망(通望) 시키고 무관은 선천(宣薦)160) 을 허락해야 한다는 뜻으로 전후의 연석에서 아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성명(成命)이 내린 것 역시 여러 해인데도 아직껏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신칙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한용귀(韓用龜)가 말하기를,
"탐관(貪官)을 징계하는 법은 적(賊)을 다스리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법과 기강이 점차 무너져서 탐욕스런 풍조가 날로 치성해지고 있습니다. 김석형(金錫衡)이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과 민수익(閔修益)이 끝없이 탐욕을 부리는 것과 같은 것이 뒤를 이어 나와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는데, 그 몸에 매 한 대도 때리지 않고 가볍게 감죄(勘罪)하여 유배에 그쳤으니, 이미 이는 크게 실형(失刑)한 것이며, 더욱 통분한 것은 바로 이방억(李邦億)입니다. 조정에서 조치해 보낸 전곡(錢穀)은 고통을 받고 있는 남쪽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것인데도, 그는 자목(字牧)하는 직임으로 왕명(王命)을 선양(宣揚)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동쪽 서쪽으로 마구 융통하여 마음대로 가져다 써서, 백성들은 돈을 받지 못하고 창고에는 빈 장부만 남아 있습니다. 그 범한 바를 따져 보면 도리어 장오(贓汚)161) 보다도 심한데도 해당 현에 발배(發配)하였다가 겨우 한 달이 지나자 갑자기 특지(特旨)로 용서해 돌아오게 하여, 마치 예사로운 일로 귀양을 보냈다가 사유(赦宥)를 만나 곧 석방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법을 시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굉(申紘)이 다섯 조목을 범한 데 이르러서는 장안(贓案)이 낭자하니,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더욱 통분하고 놀랍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지방으로 도배(徒配)하여 문득 말감(末勘)에 속하게 하였으니,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북쪽 백성들에게 사과하고 무너진 기강을 떨칠 수 있겠습니까? 그 몸을 영원히 금고(禁固)하여 물간 사전(勿揀赦前)162) 하는 것이 바로 왕부(王府)의 법이니, 먼저 이 무리부터 빨리 이 형률을 시행하라는 뜻을 양전(兩銓)에 분부하소서. 이방억은 다시 배소(配所)로 출발시키고 신굉은 관북(關北)으로 이배(移配)시켜야 조금이나마 징계하는 도리가 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해우(李海愚)를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으로 삼았는데, 지방에 있기 때문에 체직하고 정학경(鄭學畊)으로 대신하였다.
6월 12일 계축
윤대하였다.
6월 13일 갑인
공충 절도사(公忠節度使) 김견신(金見臣)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국가를 위해서 큰 공을 이루었으므로, 내가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곤임(閫任)을 제수하였으니, 그대는 가서 반드시 그 직을 잘 수행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마땅히 급한 난리를 만나 힘을 써야 하는 것이 곧 고금의 떳떳한 도리이다. 그러나 진실로 충용(忠勇)이 아니면 이룰 수가 없는데, 더군다나 그대는 먼 곳 사람으로서 능히 세상에 드문 공을 세웠으니 더욱 가상하다. 이번의 이 특제(特除)는 공로에 보답했다는 것이 아니라, 뜻이 그 재능을 두루 시험하고자 하는 데 있으니, 그대가 만약 이 병사(兵使)의 직을 잘 처리하여 명성이 떨치고 공적을 세운다면 어찌 충청도 병사에 그칠 뿐이겠는가? 이번에는 비록 녹공(錄功)을 하지 않았으나 조정에서 그대들을 대우하는 것이 녹공과 다름이 없으니, 그대는 더욱 정성과 힘을 다하라." 하고는 곧바로 공충 병사 김견신에게 밭 20결과 노비 10구(口) 및 군복을 차례로 사급하라 명하였다.
윤대하였다. 한성 주부(漢城主簿) 조학영(趙學榮)이, 높고 넓은 집과 사라(紗羅) 능단(綾緞)을 금지하는 영을 거듭 밝히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사치한 풍습을 마땅히 통금(痛禁)해야 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본래 신칙하여 금하는 것은 바로 조종조의 금석과 같이 공정한 법전(法典)인데, 지금 비록 별도로 칙교(飭敎)를 내린다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상하가 각자 준수하여 감히 법제(法制)를 어기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거듭 밝혀 수거(修擧)하는 일이요, 범한 자를 법관(法官)이 그 법으로 처리하면 이는 바로 칙령(飭令)을 내리는 것과 같은 효과이니, 이로써 엄중히 신칙하라." 하였다.
6월 14일 을묘
윤대(輪對)하였다.
6월 18일 기미
왕세자(王世子)를 책례(冊禮)할 때의 정사(正使)로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을, 부사(副使)에 홍명호(洪明浩)를 계하(啓下)하였다.
이조 판서 남공철(南公轍)을 병체(病遞)하고 박종래(朴宗來)로 대신하였다.
6월 19일 경신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6월 21일 임술
남공철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삼았다가 얼마 후 체직하고 이조원(李肇源)으로 대신하였으며, 오한원(吳翰源)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6월 23일 갑자
각영(各營)의 출진(出陣)하였거나 유영(留營)하였던 장관(將官)에게 활을 쏘고 총을 쏘게 하여 상전(賞典)을 실시하였다.
6월 25일 병인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관서를 진휼하고 남은 돈 7만 냥을 감영과 병영에 맡겨서 본도의 각종 군포(軍布)를 탕감한 급대(給代)의 수요에 적당히 배치해 쓸 것을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를 책례한 후에 조신(朝臣)의 숙배(肅拜)를 연영문(延英門)에서 하라고 명하였다.
6월 29일 경오
도정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박종래(朴宗來), 참의 정내백(鄭來百), 병조 판서 심상규(沈象奎)이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30면
【분류】인사-관리(管理)
이보다 앞서 서란(西亂)163) 이 일어나던 처음에 해서(海西)의 수신(帥臣) 조계(趙𡹘)는 본주의 난민(亂民)으로서 적(賊)을 따르는 자를 조사해 내어 그들의 친속(親屬)을 가두었다고 급히 계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비변사에서 복계(覆啓)하여 경중을 분간하고 작처(酌處)했는데, 그 가운데 적을 따른 난민(亂民) 신덕관(申德寬)의 형 신덕점(申德漸)은 그의 아우가 적과 흉서(凶書)로 통하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 곧바로 그의 종제(從弟) 신기량(申琦良)과 함께 관청에 고발하였으므로 비변사에서 마땅히 죄를 용서해서 풀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니, 하교하기를,
"이번 관서의 변란은 그 도당의 규결(糾結)함이 천백 명 뿐만이 아니며, 긴밀한 흉모가 창졸간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급변을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신덕점 형제만이 변을 듣고 즉시 고하였다. 그가 분수와 의리를 조금 아는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죄를 용서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니, 묘당에서는 특별히 포상(褒賞)을 가하여 후일에 격려 권장하는 터전으로 삼으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