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17권, 순조 14년 1814년 1월
1월 1일 계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혜경궁에 치사(致詞)와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친히 올리고, 이어서 하례를 받고 교문을 반포하였다. 치사에 이르기를,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하는 법이므로 이제 팔순이 되셨습니다. 자화(慈化)는 우리 나라에 흡족하고, 복록은 남산(南山)과 같습니다. 육궁(六宮)에 경사가 넘치고 팔역(八域)에 칭송이 가득합니다. 삼가 오래오래 사시기를 헌수(獻壽)합니다."
하였다. 전문에 이르기를,
"우리 집안에서 천 년에 한 번 있는 날에 온갖 복이 모두 모여들고, 자위(慈闈)께서 80세를 장수하시니 번잡한 의식을 꾸미어 갖추었습니다. 예를 대정(大庭)에서 거행하니 기쁨이 온 나라에 골고루 퍼졌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 저하(邸下)께서는 도산(塗山)에서 태어나 자라시고 왕실에 들어오셔서, 연복(練服)001) 을 입는 기림이 육궁(六宮)에 퍼졌으니 덕이 철후(哲后)에 짝하고, 삼조(三朝)002) 에 옷 입고 재롱을 부려 기쁨을 드리니 경사가 증손(曾孫)에까지 돈독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공화(功化)는 천심(天心)에 잘 배향(配享)하여, 저 길경(吉慶)이 새해 처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인이 덕이 있으면 반드시 장수하게 되니 영고(英考)003) 의 계사년(癸巳年)004) 의 하례 의식과 상부(相符)하고, 제왕은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게 되니 선조의 을묘년005) 의 고사를 본받아서, 이에 송초(頌椒)하는 날을 당하였으므로 감히 헌비(獻篚)006) 의 정성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돌보아 주신 은혜를 입음을 생각하고 해가 떠오르듯 달이 차오르듯 장수하기를 축원하면서, 새벽에 안후(安候)를 물으면 모시는 내시(內侍)가 언제나 ‘편안하십니다.’ 하는 말을 듣게 되고, 기뻐 손뼉을 치며 송축(頌祝)하면서 외정(外庭)과 더불어 함께 경하를 올립니다."
하였다. 교문을 반포하였는데, 그 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이제 하늘이 오래오래 다스리도록 명하여 왕업(王業)의 무궁한 미래를 정월 이 첫날에 아뢰게 되고, 해마다 오늘과 같이 되기를 원하매 자수(慈壽)가 팔순의 고령에 오르시었다. 어찌 널리 알리는 조처를 늦추겠는가? 이것이 곧 드물게 보는 경사로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께서는 도산에서 자라시고 왕실에 들어오셔서, 금슬(琴瑟)과 종고(鍾鼓)처럼 사상(四象) 중 소양(少陽)의 상의(象儀)에 짝하였으니 자품(姿稟)이 유정(幽靜)하심이요, 형황(珩璜)007) 은 중궤(中饋)008) 의 법도에 합하였으니 지니신 덕이 화정(和貞)함이로다. 마음을 공경하고 조심하니 주실(周室)에서 사미(思媚)의 덕을 칭송하고009) , 양양(洋洋)한 홍복(洪福)은 은가(殷家)에서 장발(長發)의 상서010) 를 받았도다. 칭송하는 바는 선행(善行)과 가언(嘉言)으로 《소학(小學)》에서 얻은 것이요, 정신을 쓰는 것은 기거(起居)와 동작(動作)이므로 일찍부터 아름다운 소문이 났었다. 생각하면 부족한 내가 어렵고 커다란 기업(基業)을 이어받은 것은 자위께서 돌보아 주신 덕택이다. 태평한 운수가 다가오니 훌륭한 교훈이 바탕이 된 것을 스스로 알겠고, 겸손하시는 뜻을 만회하기 어려움에 가만히 의물(儀物)의 미비함을 한탄하노라. 아! 성대한 공렬(功烈)이 너무도 두루 미쳐서 마침내 팔순의 보령에 오르심을 보게 되었다. 기꺼이 좌우에서 뵈올 때에는 항상 연덕(年德)011) 이 함께 높으심을 우러러보았으며, 한두 끼 밥 먹는 시간에도 마음이 쏠리어 한편 기쁘고 한편 두려움이 더욱 깊고 절실하다. 삼가 정결하게 고례(故禮)를 따라 제사를 올리고, 이어서 널리 교서를 반포하여 함께 새로워지고자 한다. 그래서 잘못과 흠을 모두 씻어서, 《주역(周易)》 뇌수해(雷水解) 괘의 뜻을 본받고, 은혜를 베풀어서 《예기(禮記)》 월령(月令)의 발육하는 공효에 따르고자 한다. 이달 초하루 새벽 이전의 잡법으로 사죄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 자덕(慈德)이 천심(天心)을 잘 배향(配享)하여 만민이 형통하고 태평한 기회를 우러르게 되고, 길경(吉慶)이 새해 첫머리부터 시작되니 태사(太史)012) 가 크게 형통한다는 《주역》의 대유괘(大有卦)를 점쳤도다. 그리하여 이처럼 교시하는 것이니 의당 모두들 잘 알 것이다."
하였다. 【예문 제학 남공철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5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註 001] 연복(練服) : 비단옷이 아닌 거친 명주로 지은 의복.[註 002] 삼조(三朝) : 정월 초하루.[註 003] 영고(英考) : 영조를 말함.[註 004] 계사년(癸巳年) : 1773 영조 49년.[註 005] 을묘년 : 1795 정조 19년.[註 006] 헌비(獻篚) : 지방의 각종 토산물을 바침.[註 007] 형황(珩璜) : 몸차림. 외양을 갖추는 일.[註 008] 중궤(中饋) : 집안의 여러가지 안살림.[註 009] 칭송하고 : 《시경(詩經)》 대아(大雅) 사제(思齊) 편에, "거룩하신 태임이 문왕의 어머니이시니, 시어머니 태강께 효도하시며 왕실의 주부노릇 하셨네.[思齊太任 文王之母 思媚周姜 京室之婦]"라 하였음.[註 010] 상서 : 장발(長發)은 《시경》 상송(商頌)의 편명인데, 하늘과 선조(先祖)를 제사하는 대체제(大禘祭) 때에 부르던 송가(頌歌)임. 선조의 공덕과 천하를 다스린 것을 노래하였음.[註 011] 연덕(年德) : 나이와 덕망.[註 012] 태사(太史) : 천시(天時) 성력(星曆) 따위를 맡은 벼슬.
치사(致詞)를 임금이 친히 올릴 때의 예방 승지 유경(柳畊)과 대거(對擧)한 승지 이유명(李惟命)에게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고, 좌우 통례 조진화(趙晉和)·서장보(徐長輔)를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홍세주(洪世周)에게 수령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아룀에 따라 경과(慶科)를 합경(合慶)하여 하도록 명하였다.
노인에게 특별히 세찬을 내리고, 이어서 존문하도록 명하였는데, 연례적인 것이다.
1월 2일 갑자
별강(別講)하였다.
1월 3일 을축
마땅히 자급을 올려주어야 할 노인에게 비지(批旨)를 내렸는데, 1백 세인 자가 48인이었다.
1월 4일 병인
약원에서 입진하고, 이날부터 인삼석창포차(人蔘石菖蒲茶)를 올렸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영중추부사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전에는 기사(耆社)에 들어간 사람에 대하여 혹은 특교(特敎)에 의하기도 하고 혹은 제주(提奏)에 의하기도 해서 모두 초상(肖像)을 그려 후세에 전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소대(昭代)의 성사(盛事)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혹은 하기도 하고 혹은 안 하기도 합니다. 이 다음부터는 해마다 추가하여 들어가는 사람에 대해 해조(該曹)에서 물력(物力)을 지급하여 초상을 그리도록 하는 것을 정식으로하여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5일 정묘
별강하였다.
1월 7일 기사
도목 정사(都目政事)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이조원(李肇源), 참의 김이재(金履載), 병조 판서 심상규(沈象奎)이다.】 김계락(金啓洛)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선(金銑)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호민(李好敏)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5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김계락(金啓洛)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선(金銑)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호민(李好敏)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성균관에서 인일제(人日製)를 설행하였다.
1월 10일 임신
선원전(璿源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예방 승지 이하에게 시상하였다. 이 해가 영묘(英廟)의 두 번째 회갑이기 때문이다.
1월 13일 을해
각도의 봄철 조련을 정지하였는데, 진제(賑濟)를 설행하기 때문이다.
1월 14일 병자
조만원(趙萬元)을 이조 참판으로, 이만수(李晩秀)를 우빈객으로, 김희순(金羲淳)을 사헌부 대사헌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월 15일 정축
서울의 각사(各司)와 각영(各營)에서 계유년의 회계부를 올렸다.
【현재 있는 황금이 2백 40냥 영(零), 은자(銀子) 47만 3천 8백 냥, 전문(錢文)이 79만 4천 8백 냥 영, 면주가 1백 14동 영, 면포가 7천 6백 10동 영, 저포가 76동 영, 마포가 1천 2백 82동 영, 쌀이 21만 7백 석 영, 전미(田米)가 4천 석 영, 황두가 2만 9천 3백 석 영, 피잡곡이 1만 2천 5백 4석 영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55면
【분류】재정-국용(國用)
1월 16일 무인
사헌부 【장령 조장한(趙章漢)이다.】 에서 아뢰기를,
"이기경(李基慶)은 본래 음험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분격하고 간특한 행동을 하여 남의 집안과 나라를 해치고 심환지(沈煥之)와 김달순(金達淳)을 아비처럼 섬긴 상황은 이미 전후의 장주(章奏)에 모두 말하였으므로 신이 굳이 첨가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갑자년013) 무렵에 역적 권유(權裕)의 흉소(凶疏)와 역적 심환지의 패주(悖奏)를 보고 우분(憂憤)이 치밀어 진정을 할 수 없어서 장차 전함(前銜)014) 으로 소를 올리려 하였었는데, 이기경이 신에게 서신을 보내어 몹시 으시대면서 갖가지로 달래고 위협하기 때문에 신이 엄중한 말로 물리치고 소를 가지고 입궐하였다가 결국 퇴각당하였습니다. 그 뒤에 다시 논하였으나 이기경이 대신(臺臣)을 부추겨서 정계(停啓)하였습니다. 역적 권유의 정상에 대해서는 그때의 성상의 비답에서, ‘이기경의 일은 그 자가 정계하였기 때문에 귀양간 것이다. 다시 무엇을 보태겠는가?’ 하고 하교하셨습니다. 이 지극한 임금의 말씀을 신은 아직까지 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귀양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곧장 방면을 받으니 이것은 벌써 크게 형벌의 정당성을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삼가 세초(歲抄)015) 에 낙점(落點)한 것을 보니, 급첩(給牒)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만약 이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제방이 어찌 흔들지지 않겠습니까? 이기경에 대한 급첩의 명을 속히 거두시고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0일 임오
태묘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정상우(鄭尙愚)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상조(柳相祚)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3일 을유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의주 부윤 오한원(吳翰源)의 장계에는, ‘부안(扶安)에 표류하여 온 청나라 사람 한 명이 장단(長湍) 땅에 이르러 죽었다.’고 하였는데, 자문(咨文) 중에는 이 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표류하여 온 자를 영송(領送)할 때에 경기 경내에서 죽으면 승문원에서 사유를 갖추어 말을 만들어 다시 자문을 작성하여 보내고, 관서의 경내에서 죽으면 의주에서 편의에 따라 급히 통보(通報)하는 것이 선례입니다. 이번에는 자관(咨官)이 즉시 급히 통고하지 않고 의주까지 가서 자문이 내려온 뒤에야 비로소 써보낸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복명(復命)을 기다려 엄중히 과치(科治)하고, 사유를 갖추어 자문을 고쳐서 내려 보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4일 병술
조덕윤(趙德潤)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오태현(吳泰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소대하고, 별강하였다.
1월 25일 정해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웅주환(雄朱丸)과 인삼석창포차(人蔘石菖蒲茶)를 진어하는 것을 정지하였다.
소대하였다.
1월 27일 기축
수찬 박기수(朴綺壽)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소를 올려 그의 아비 박종신(朴宗臣)이 당한 변을 호소하고 인의(引義)하여 사직하려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1월 30일 임진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이날부터 연육차(蓮肉茶)를 들이고 안신환(安神丸) 세 돈쭝을 조제하여 올렸다.
남공철을 선혜청 제조에 차제하였다.
별강하였다.
서변(西變) 때에 사절(死節)한 사람들을 유제(侑祭)하는 단을 충의단(忠義壇)으로 이름을 정하도록 명하였다. 예문관 제학 남공철의 말을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