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7권, 순조 14년 1814년 8월

싸라리리 2025. 6. 2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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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기미

하교하기를,
"영남의 농사는 이미 흉년이 확실한데, 이번의 수재는 더욱 놀랍다. 앞으로 닥치는 구휼(救恤)과 주진(賙賑)의 방법에 대해서는 연분(年分)의 결과를 기다려 의당 강구해야겠지만, 삭선(朔膳)·물선(物膳) 등의 정감(停減)은 굳이 늦출 필요가 없다. 본도의 삭선과 절선(節扇)의 진상을 모두 내년까지 정지하여, 나라의 진휼(軫恤)이 우선 이것부터 시작한다는 뜻을 보여주도록 묘당에서 행회(行會)하게 하라."
하고, 이어서 각신에게 윤음을 대찬(代撰)하도록 명하고, 승지 서춘보(徐春輔)를 위유사(慰諭使)로 차출하여 영남 32읍의 재해를 입은 백성을 위유하게 했다. 곧 이조 참판 이호민(李好敏)의 ‘위유사란 호칭은 사체가 중대하여 전부터 무신을 차출한 예가 없다.’는 소언에 따라,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서 다만 승지의 직함으로 윤음을 받들어 선포하도록 명하였다.

 

8월 2일 경신

경상 감사 이존수(李存秀)가, ‘안동 등 39읍이 큰 홍수가 져 둑이 터지고 무너진 것이 먼저 보고한 32읍보다도 덜하지 않은 바, 도내의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가 합쳐서 5천 6백 5호이고, 깔리고 빠져 죽은 사람이 94명이라.’고 아뢰었다. 이에 하교하기를,
"듣기에 매우 긍측(矜惻)하다. 원휼전(元恤典) 외에 별도로 고휼(顧恤)하되,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환곡과 신포를 모두 탕감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 장계를 보니 더욱 놀랍고 참혹하다. 똑같이 위유(慰諭)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8월 3일 신유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8월 4일 임술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문신 제술(文臣製述)을 행하였다.

 

8월 4일 임술

대사헌 김희순(金羲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한록(金漢祿)이 난역(亂逆)을 하고 당일에 흉론을 퍼뜨린 데 대하여 신은 일전에 한 번 아뢰었고, 두 번이나 소를 올려서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신의 종숙 신 김이양과 족숙 신 김이교도 신과 서로 전후하여 소를 올렸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어찌 신 한 사람이나 한 가문만 듣고 혼자서 주토(誅討)하는 일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는 것이고 온 세상에 유포된 것입니다. 속일 수 없는 것이 공의(公議)요, 더없이 엄중한 것이 공안(公案)입니다. 비록 김한록이 지금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두말할 것 없이 사실을 말하여 스스로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저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더벅머리 아이이겠습니까? 부추겨서 나오게 한 자는 이름을 빌려 마음대로 입을 놀려서, 많은 사람의 입을 막고 온 세상과 한판 싸움을 벌여 천하의 공의·공안을 엄폐하려 하니, 정말 멍청하다 하겠습니다. 그 흉악한 공사(供辭)가 논의한 바를 살펴보면, 이른바 ‘강설(講說)하였다.’는 것이 결국 김한록이 역적의 핵심이라는 말이므로, 신이 전후 상소에서 이미 상세히 아뢴 것입니다. 김한록이 신의 조부인 신 김교행을 찾아와서 그자가 당(唐)나라 중종(中宗)의 일에 대하여 물었을 때, 신의 조부는 주자(朱子)가 장남헌(張南軒)에게 답한 편지를 들어서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자가 이 일에 대하여 물은 것은 목적이 일반적인 논설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의 나쁜 음모를 그 사이에 슬쩍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이 신의 조부가 그 말을 물리치고 마음속으로 비난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문도(門徒)에 이동윤이란 자가 있어서 행록(行錄)에 거두어 기재하였습니다. 이 행록이 있으니, 곧 김한록의 역절(逆節)에 대한 증거로서 숨기려 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가 말한 것에, ‘연조(年條)로 현혹시키고 막연한 의논으로 혼란시킨다는 것은 역시 그 말이 둔사(遁辭)이며 계교가 엉성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난역(亂逆)이 흉악한 계획을 양성하는 것은 단시일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가에 변고가 있기 앞서서 벌써 화기(禍機)가 비밀히 진행되는 법입니다. 신사년080)   이후는 바로 김상로·홍계희 등의 무리가 불궤(不軌)를 꾀하던 때로 김한록이 흉론을 앞장서 선동한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그러니 연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어찌 끌어다 댈 만한 증거가 되겠습니까? 더구나 그자가 흉언을 말하였을 때 신의 조부는 이를 논박하면 또한 그쳤어야 될 것인데, 다시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여 사우(士友)들 간에 두루 알려지게 한 것은 그자의 음도 패계(陰圖悖計)입니다. 한 마디 말로서 알 수가 있는데, 아직도 막연한 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신의 조부 문하(門下)의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것에는 상세하고 간략한 것이 각각 다르니, 이동윤의 기록도 대의(大意)는 이미 충분하지만 내용이 자세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김한록의 질문과 신의 조부의 대답을 조목을 나누어 각기 기재하여 아주 명백한 것도 있습니다. 지금 한 번 찾아보기만 하면 알 수가 있는데, 그자는 이동윤의 기록만 이야기하고 다른 기록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자는 감히 흉론이란 무슨 말을 가리키는 것이며 강설한 것이 별다른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꾸며대려고 한 것은 어찌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자가 신을 잡아 흔들고 모욕하여 말이 비록 망측하나 신은 수다스럽게 변명하여 따져서 그 모욕을 거듭 받고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자의 말한 것에, 신의 집에서 고발하지도 않고 절교하지도 않다가 지금에 와서 토주(討誅)한다고 하여 이것으로 윽박지를 칼자루를 삼았지만, 신은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신 등이 오늘날 토주하게 된 것은 공의와 공안이 중지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의 조부가 지난날 마음속으로 비난하면서도 울분을 참아온 것을, 신 등에게 와서 발설하는 것은 바로 의리이며 사리상 당연한 것이 되니, 그 선후나 늦고 빠름을 가지고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자 집안의 죄안(罪案)이 분명하여 없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리 그자의 은인을 배반하여 해치려는 계책이 시행된다 하더라도 어찌 그것이 그자가 죄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계책이 되겠습니까? 이런 것은 그래도 신들의 사사로운 울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위로 막중한 자리에 무핍하여 감히 말하기를, ‘나라에서 그들 가문에 대하여, 선조 때는 저렇게 하였는데 지금에는 이렇게 한다.’고 하면서 조금도 고려하거나 두려워함이 없이 드러내 놓고 화풀이를 하였으니, 이것이 신들의 놀랍고 분하여 죽고 싶은 점입니다. 그리고 그자는 김상로나 홍계희의 일을 인용하여 당일의 처분에 다른 점이 있다는 증거를 삼으려고 하지만 이것도 또한 생각이 매우 부족한 것입니다. 나라에선 김상로와 홍계희에 대하여 용서한 것이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영묘(英廟)께서 그들의 역절(逆節)에 대하여 다 알았지만 선조 때를 기다려서 이들을 처단하였던 것이니, 지금 성상께서 김한록을 처단한 것도 바로 선조께서 김상로와 홍계희를 처단한 것과 같은 의리입니다. 그자가 김상로와 홍계희를 말한 것은 그자의 조부를 반드시 주토해야 한다는 아주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니, 또한 너무 우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잔당들 중에 김관주·김일주와 같은 무리에 대하여 지난날에 용서해 준 것이 또 어떻게 그들이 구실을 삼는 자료가 된단 말입니까? 더구나 고 상신 윤시동의 연주(筵奏)를 인용한 일은 바로 거짓말입니다. 신도 또한 그때 일에 대하여 들은 일이 있습니다. 선왕은 윤시동이 아뢴 것에 대하여 불가하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 한마디도 결백을 밝혀 준 말이 없었는데, 그자가 감히 허실(虛實)을 바꾸어서 선왕의 사교(辭敎)까지 속였으니, 역시 무엄하고 방자함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이를 보아 논한다면 그자의 장황한 선후의 논의는 무핍이 아니면 협지(脅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스스로 변명하는 계책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철안(鐵案)은 허물 수 없고, 죄안(罪案)은 지울 수 없으며, 형장(刑章)은 도피(逃避)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 역얼(逆孼)들이 어찌 이것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그대로 거듭 이런 짓을 하면서 난데없이 여러번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조정을 엿보고 시험하여 한 번 뒤집어 분란을 일으키겠다는 습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점이 바로 나라를 위한 걱정이 진실로 적지 않은 것입니다. 삼가 청원하건대, 대신과 신하들의 소청을 즉시 윤허하시어 분란의 싹을 잘라버리소서. 그리고 생각하면 신은 본래 관직에 있으려는 자가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당한 무욕이 심상(尋常)한 것이 아니므로, 역수(逆竪)를 문초하지 않고 흉역의 소굴을 깨뜨리기 전까지는 모두가 신의 참을 수 없는 통분(慟憤)의 날들일 것이니, 이와 같은 형편에서 사는 것은 죽는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속히 신의 직명을 갈아주소서."
하였으나, 아뢴 것은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함경 감사 김이양(金履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만 뜻밖에도 갑자기 금년 말까지 유임한다는 명이 내려서 지금 막 해면(解免)을 진정하여 소원을 이루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이런 때에 갑자기 역적 김한록의 손자 아홉 살 난 아이가 재작년에 호소하던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임금을 간범(干犯)하고 조정을 꺾어 누르며 매우 물어뜯고 독하게 쏘는 아주 흉패(凶悖)한 것은 일전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이 먼저 발설하여 성토하였기 때문에 그 쏘는 화살이 유독 신의 몸만 맞추어서 그 모독과 욕설이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듣고는 잠시라도 견딜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 신이 병집(秉執)한 것이 옳다면 만세의 공의가 저절로 존재한 것일 것입니다만, 만일 그자의 하소연이 거짓이라면 당연히 기강을 범한 처벌을 받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천 리 밖에서 조정의 거조(擧措)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관아에 나아가 백성들을 대하여 일 보기를 아무 일이 없는 번신(藩臣)과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사무를 전폐하고 울분이 가슴에 복받쳐 땅에 엎드려 하늘만 쳐다보면서 처분만 삼가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는데,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그대로 사무를 보도록 신칙하였다.

 

8월 5일 계해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8월 7일 을축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접때 강계(江界)의 좌채(左寨) 지경의 모민(募民) 중에 후주(厚州) 백성으로서 숨어 들어와 사는 자는 해진(該鎭)에 속하게 하고, 원래 살던 부민(府民)은 본주에 속하게 하라는 뜻으로 각각 해당 도신에게 공문을 보내어 신칙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평안 감사 정만석(鄭晩錫)이 보고한 것을 보니, ‘후주의 진장(鎭將)은 비변사의 공문도 따르지 않고 조정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았으며, 토지를 마구 차지하고 인민(人民)을 강제로 빼앗아 전후로 해괴하고 패려한 거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비변사의 공문은 곧 경계를 넘도록 되어 있고 토지는 이미 본진(本鎭)에 속한 것이라 여기어, 변경 시찰을 핑계로 경계를 넘어 마구 들어와서 법외(法外)의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고 이미 정해진 세금을 협박하여 빼앗으며, 읍속(邑屬)을 몰아내고 마을에 가득히 들어찾으니, 그의 하는 짓들이 일마다 놀랍습니다. 삼세(蔘稅)도 봉진(封進)할 수 없는 형편이고 토민(土民)도 들어와서 살 수 없는 지경이니, 엄중히 금단(禁斷)하여 백성들의 걱정을 막아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제 이 진장은 조령(朝令)이 없는데도 조령이 있다고 하고 경계가 정하지 않았는데도 경계를 정했다고 핑계 대면서, 제멋대로 직차(職次)를 떠나 남의 경내에 들어가 무고한 백성들을 함부로 처벌하고 이미 정해진 세금을 강제로 빼앗아 한 성채(城寨)의 땅이 마치 노략질을 당한 것과 같으니 이런 것은 법의 기강과 크게 관계되는 것입니다. 후주 첨사 유상두(柳相斗)를 우선 파출(罷黜)하고는 잡아다가 문초하여 엄중히 감죄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8월 9일 정묘

윤우열(尹羽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의호(洪義浩)를 형조 판서로, 임한호(林漢浩)를 한성부 판윤으로, 신경(申絅)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8월 10일 무진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 김재찬 등이 김한록 손자에 대하여 철저히 문초한 것을 서로 잇달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날부터 가미군자탕(加味君子湯)을 올렸다.

 

8월 12일 경오

예문관 제학 김희순(金羲淳)을 파직하고, 남공철(南公轍)로 대신하였다. 김희순이 정세(情勢)가 있다 하여 여러번 부름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8월 13일 신미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영남 백성들을 접제(接濟)할 밑천으로 관북과 관동의 곡식을 옮겨다가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관북에 대해서는 교제(交濟)할 각종 곡물 2만 4천 7백 석, 호조에서 별도로 안치한 각종 곡물 2만 석, 균역청의 갑술년 전작곡(錢作穀) 5천 3백 석 영과, 관동에 대해서는 비변사의 별회 각곡(別會各穀) 1만 5천 석, 상평창의 별창 각곡(別倉各穀) 5천 석, 합계 7만 석을 편리한 대로 수봉(收捧)하여 연해에 가까운 창고 등에 옮겨 두도록 하였다가 명령이 내려가면 즉각 발송토록 하라는 뜻으로 미리 행회(行會)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8월 14일 임신

조만원(趙萬元)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심상규(沈象奎)를 우빈객으로 삼았다.

 

8월 15일 계유

원릉(元陵)에 나아가 전알하고 친제(親祭)하였다. 헌관 이하에게 시상하였는데, 예방 승지 김교근(金敎根)에게 가선 대부를 가자하고, 집례 김후(金𨩿)·대축 신재식(申在植)·좌우 통례 한기유(韓耆裕)·민덕기(閔德基)에게는 모두 통정 대부를 가자하였다.

 

8월 17일 을해

김이재(金履載)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박윤수(朴崙壽)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20일 무인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차대하였다. 영남에서 진상하는 삼명일(三名日)081)  의 방물(方物) 및 물선(物膳)·갑주(甲胄)에 대하여 모두 봉진(封進)을 정지하고 진자(賑資)에 보태어 쓰며, 상방(尙方)과 약원의 연무(燕貿)082)  에 대하여 긴요하게 쓰이는 것 외에는 1년 동안 정지할 것을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재찬의 말에 따른 것이다.

 

송상렴(宋祥㾾)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계락(金啓洛)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상황(李相璜)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 김이양(金履陽)이 장계하기를, ‘본영의 군액은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 재용(財用)이 고갈되어 교련(敎鍊)을 할 계책이 없습니다. 마침 탕채곡(蕩債穀)으로 작전(作錢)한 나머지가 2천 냥이 있어서 본영에 나누어 주어 달마다 시상하면서 사수(射手)에 응모한 8백여 인과 포수에 응모한 2백여 인을 모집하였던 바, 세 발에 여섯을 맞히는 포수와 5시(矢)를 전부 맞히는 사수가 자주 있었습니다. 포수는 별포위(別砲衛)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본영에는 장포군(壯砲軍) 45초(哨)가 있는데, 이름은 군(軍)이지만 천역(賤役)으로 여겨서 모두 면탈하기를 꾀하여 조련(組練)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장포군을 모두 다 폐지하여 충익(忠翊)·충찬(忠贊)·충순(忠順)의 세 가솔(假率)을 증액하고, 그중에서 다시 별포위를 2천 명 정도 모집하여 달마다 시상하면서 부오(部伍)를 정령(正領)하되, 대략 친기위 제도를 모방하여 기병과 보병·포수와 사수를 쌍행 병용(雙行幷用)한다면 자연히 장포군을 비록 폐지했더라도 장포군의 실익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가솔(假率)에 증액된 수천 인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예전(例錢) 1냥 씩을 거두고 별포위의 원액(元額)에 대해서는 역전(役錢) 5전 씩을 거둔다면 현재 있는 상전(賞錢)과 합쳐서 4천여 냥이 됩니다. 이것으로 상자(賞資)를 만든다면 졸오(卒伍)가 저절로 충실해지고 기예가 저절로 정련(精鍊)될 것입니다. 그런데 군제에 관계된 일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사수에 응모한 8백여 인에 대해서는 보다 널리 기예가 숙달되기를 좀더 기다려서 천천히 논의하여 구처(區處)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1천 명의 사수와 포수를 모집하여 한 방면의 위급한 경우의 용도에 대비한다면 군제가 늘어나서 관방(關防)이 튼튼하여질 것입니다. 이들 사수 8백여 인과 포수 2백여 인을 합쳐서 1위(衛)를 만들고, 현재 있는 상자(賞資)로도 또한 충분히 달마다 연습할 수 있을 것이니, 위명(衛名)을 다시 정하여 영구히 영하(營下)의 친병(親兵)을 만들게 하소서. 장포군에 이르러서는 이미 거의 50초(哨)나 되는 바, 원정(元定)한 군제가 언제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마는 이제 와서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신중히 생각할 일이니, 우선 그대로 두고 충분히 논의한 뒤에 다시 품처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1일 기묘

형조에서, 징을 친 서부(西部)의 이복일(李復一)이 아비를 위하여 사리를 밝혀 진술한 일에 대하여 시행하지 말 것을 아뢰었다. 원정(原情)한 데에 이르기를,
"저는 죄인 이상로(李商輅)의 아들입니다. 저의 아비가 형장에서 억울하게 죽었으나 숨겨진 억울함을 드러낼 수 없었고, 저의 형제들은 연좌되어 먼 곳에 귀양갔다가 차례로 방환(放還)되었습니다. 저의 종숙 이의명(李義明)을 소통(疏通)할 때에 경연에서 하교하기를, ‘이상로의 풍색(風色) 등의 말이 스스로 기휘(忌諱)에 저촉되기는 하였지만 역적은 아니다.’ 하였으며, 을묘년083)   봄에 화성에 행차하였을 때에, 저의 처에게 특별히 명하여 봉수당(奉壽堂)에서 자궁(慈宮)에게 입대(入對)하도록 하였는데, 상교(上敎)로 자세하게 결백을 밝히고 우선 치욕(恥辱)을 시원스럽게 씻어 버릴 때를 기다리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대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시자 호소할 길이 없어지고 나라의 경사가 거듭해서 임금의 은택이 널리 퍼졌지만 저의 아비의 답답한 원통함만은 유독 드러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늘을 부르고 부모를 부르는 일을 이 때에 하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대개 병신년084)  의 여러 죄인이 불행하게도 인아(姻婭)의 사이에서 많이 나왔지만 저의 아비만은 성명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오지 않았고 사실이 옥사와는 관계가 없었으나, 단지 편지의 구절이 역안(逆案)으로 귀착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아비가 여러번 혼인을 사양한 일로 적신(賊臣) 홍국영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오랫동안 분풀이를 하려고 벼르던 차에 마침 국옥(鞫獄)이 한창 벌어지자 이때를 틈타 섬멸하려는 계획으로 편지의 구절을 따서 근거도 없는 죄안을 만들어 온갖 방법으로 죄를 꾸며 만들어 마침내 극전(極典)085)  으로 처치하고 말았습니다. 선대왕의 유교(遺敎) 중에 ‘역적은 아니다[逆則非矣].’는 네 글자가 해와 별처럼 뚜렷하며, 또 화성(華城)의 면교(面敎)를 등서(謄書)한 봉서(封書)가 집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저의 아비가 만약 조금이라도 범한 것이 있다면 일월 같이 밝으신 선대왕께서 어떻게 분석(分析)한 연교(筵敎)가 있었겠으며, 또한 정령(丁寧)한 면유(面諭)가 있었겠습니까? 삼가 청원하건대, 특별히 처분을 내리시어 지극한 억울함을 씻어 주소서."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상로의 일에 대해서는 선조께서 죄가 없음을 통촉하시고 장차 신설(伸雪)하겠다는 성의(聖意)를 전에 여러번 보였으니, 이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옳다. 이상로를 특별히 신설하고 죄명을 탕척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의계(議啓)하여 다투어 논란하니, 여러 승지의 파직을 명하고 남소 위장(南所衛將)을 가승지(假承旨)로 차하(差下)하여 즉시 반포하게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고, 옥당에서도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고, 의금부 당상도 연명으로 상소하여, 이상로의 죄명을 탕척하는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2일 경진

영의정 김재찬, 좌의정 한용귀, 우의정 김사목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김한록의 손자가 징을 친 죄를 조사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이상로의 죄명을 탕척하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한권(翰圈)086)  에 대한 성명(成命)이 있었으나 별겸 춘추(別兼春秋)들이 모두 인책하고 부임하지 않자, 도당(都堂)에 특명하여 권점을 행하였다. 【영의정 김재찬, 우의정 김사목, 홍문관 제학 김계락, 동춘추 김이교·김교근이다.】  6점(點)에는 윤풍렬(尹豊烈)·정기선(鄭基善)·이기수(李驥秀)·김도희(金道喜)이다.

 

8월 24일 임오

예조에서 유생의 상언에 따라, 열녀인 횡성(橫城)의 사인(士人) 박돈철(朴敦哲)의 처 원씨(元氏)와 청주의 무신년087)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의 충신인 증 참판 홍임(洪霖)의 방기(房妓) 해월(海月)을 정려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8월 25일 계미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신 등이 그저께 이상로(李尙輅)의 죄명을 탕척한 일에 대하여 차자로 아뢰었습니다. 성명(成命)을 거두기 전에는 대의가 장차 흐려지고 대방(大防)이 마침내 무너져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죽기로 다투는 의리로서는 결단코 전하의 뜻을 따라 받들 수가 없습니다. 근일 전하께서 매양 언자(言者)의 말에 답할 적에 반드시 선조의 본뜻으로써 잘못을 깨우쳐 주는 하교로 인정하고 있지만, 신 등은 이에 대하여 실로 구구하게 거듭 아뢰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 등이 옛날에 선대왕을 섬길 때 오랫동안 근신(近臣)의 반열에 있으면서 선대왕의 지극히 인자한 성의(聖意)를 보아왔는데, 선대왕께서는 천지의 만물을 살리는 덕을 본받아서 옥사를 다스릴 때는 언제나 몹시 애경(哀敬)하였고, 죄수를 동정할 때는 반드시 은덕이 널리 미치게 할 것을 생각하시어 온화한 덕의(德意)가 무엇이든지 감싸주지 않음이 없었으나, 《명의록(明義錄)》088)  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한 번도 처분한 적이 없었으니, 대개 의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국론을 막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선대왕의 뜻을 이어 사업을 밝히는 도리에 있어서, 선대왕께서 일찍이 처분하지 않은 일을 이제 어찌 쉽사리 작량하여 처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상로의 부범(負犯)은 곧 《명의록》 중에서도 책을 열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대책(大策)에 불만을 갖고 기필코 훼방하려는 의도로 ‘풍색(風色)’이니 ‘기관(機關)’이니 하는 등의 흉언을 사찰(私札)에서 함부로 발설하였다가 국정(鞫庭)에서 탄로가 나자, 그자의 입으로 할말이 없어 자복(自服)한 것입니다. 무릇 그가 화응(和應)할 생각을 품고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의 역적들과 통하였음은 죄인의 명부에 새겨져 있어서 영구한 철안(鐵案)이 되었으니, 몇 천겁(千劫)을 지나더라도 다시 바뀌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한 번 이를 무너뜨린다면 이것은 곧 《명의록》이 없어지는 것이며, 역적을 다스리는 큰 기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에 대하여 생각이 미친다면 성심(聖心)에 섬뜩하게 놀라고 두려움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주역(周易)》 복괘(復卦)의 멀지 않아서 되돌아온다[不遠復].’는 뜻을 마땅히 조용하게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습 니다."
하였고, 좌의정 한용귀와 우의정 김사목이 서로 잇달아 힘껏 청하니, 임금이 전교를 환수하라고 명하였다.

 

8월 26일 갑신

홍경모(洪敬謨)를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으로 삼았다.

 

8월 27일 을유

예조에서, ‘용인(龍仁)의 생원 신순(辛淳)이 상언하여 그의 아비 신덕우(辛德羽)의 복과(復科)를 청하였다.’고 아뢰었다. 신덕우는 경술년의 화성(華城) 설과(設科) 때에 입격(入格)하여 창명(唱名)했었는데, 호적이 없어서 발거(拔去)당한 자이다. 대신에게 문의하여 복과를 명하였다.

 

8월 28일 병술

이복연(李復淵)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29일 정해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해서(海西) 도신의 장계를 보니, 황주(黃州)와 곡산(谷山)의 두 고을이 모두 몰락하여 떠돌아다니는 호구에서 거두어들이지 못한 제조(諸條)에, 황주의 5백 31호에서 못 거둔 환곡이 1천 9백 4석 영(零), 못 거둔 군포목(軍布木)이 3동 39필 영, 못 거둔 군전(軍錢)이 3천 38냥 영이고, 곡산의 2백 4호에서 못 거둔 환곡이 8백 13석 영, 못 거둔 군전이 2천 85냥 영, 못 거둔 전세가 5백 14결 영이라고 합니다. 두 고을은 여러 읍(邑) 중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아서 각종 조목의 납부할 것을 여러 해 동안 거두지 못하였으나 징독(徵督)할 곳도 없고 정감(停減)할 길도 없어서 백성과 고을이 장차 다같이 텅 비게 될 지경입니다. 진전(陳田)의 허록(虛錄)에 대해서도 마땅히 변통할 방도가 있어야겠습니다. 청컨대 똑같이 견감(蠲減)해 주게 하여 조가(朝家)의 넓고 끝이 없는 덕의(德意)를 보여 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곡산의 신미년 옥사 때에 관련된 사람들을 특별히 사형에서 용서한 것도 또한 나라의 아주 드문 덕의입니다. 여러번 사전(赦典)을 겪었던 바, 협종(脅從)한 자에 대해서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곧 성세(盛世)의 관대한 뜻이니, 다 함께 새로워진 것은 바로 성주(聖主)가 모두 용서한 교화입니다. 청컨대 전부 석방해 보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일본에서 관백(關白)이 손자를 낳아서 대차왜(大差倭)가 왔으므로, 이동영(李東永)을 접위관으로 차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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